빠르게 익어가는 가을 숲의 화려한 변신을 보고 있노라면 팍팍한 일상임에도 사계절이 분명한 이 산하에 태어난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여름 내내 무표정한 녹색이던 숲이 어느 날 문득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좀체 변할 것 같지 않던 녹색의 강직함이 수그러들고 숲은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을 한다.
단풍은 하늘을 이고 있는 산정에서 불붙기 시작하여 어느 틈엔가 도심의 거리에까지 내려왔다.
단풍의 계절... 아 ~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근처 도심 산책로의 손짓이 마음을 동하게 한다. 올 한해는 강수량이 적고 일교차가 커 유난히 붉은 단풍...
서울 도심 곳곳에 숨어있는 낙엽거리나 드라이브 코스는, 차 밀리는 관광지보다 훨씬 진한 가을 내음을 풍길 수 있다.
빌딩 숲 뒤편에 숨어있는 호젓한 가을거리에서 코트 깃을 세우고 걷다가... 조그만 카페에 들러 차를 한잔 마셔도 좋을 듯하다. 이미 가을에 젖은 도심 산책길... 뚜벅 뚜벅 낙엽이 되어 함께 걸어보자.
[정동길]
"웬 여자 손이 이렇게 얼음덩이야? 하지만 손이 차가운 사람은 가슴이 따뜻하다던데..."
금화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듯한 은행나무 가로수 밑을 걷고 있노라면, 최양숙의 가을편지를 따라 불러보고 싶어진다.
덕수궁 돌담길로도 불리는 정동길은 오랜 시간 많은 세대에 걸쳐 사랑을 받은, 서울 시내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정동길은 돌담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작은 원형 분수 모양의 중심부로 향한다. 이 중심부에서는 미국대사관을 거쳐 광화문 사거리로 이어지는 길과 정동극장을 거쳐 경향신문사로 이어지는 길,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올라가는 길 등으로 나뉜다. 이 중 어떤 길을 선택해도 좋다.
돌다리로 이어져 있는 미술관 가는 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샛길로 나 있는 흙길도 운치 있다. 미술관에서 유명한 작품전을 관람하는 것도 좋지만 아름답게 가꾸어진 미술관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 것도 눈이 즐겁다.
경향신문사로 이어지는 길은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 있는 길이며 정동극장, 예원학교, 이화여고 등이 자리해 있는 문화의 거리이기도 하다. 이화여고 돌담 아랫부분은 파스텔로 벽화가 그려져 있고, 맞은편 정동극장 앞에는 라디오가 나오는 벤치가 놓여 있다. 예원학교 담벼락에는 정동의 역사를 각 나라의 언어로 설명해주는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이 거리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카페가 곳곳에 자리해 있다.
미국대사관을 거쳐 광화문으로 나가는 길은 차량 진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걷기에 좋다. 조용하고 깨끗하며 잘 다듬어져 있어 방해받지 않고 걷기에 더없이 좋다.
[남산]
"이야하! 여기 제법 근사하군요! 맘에 드는 땅 있으면 함 찍어봐요 ~ 내가 다~아 사줄게~~~"
남산에 가면 서울이 한 눈에~ 서울예술대학에서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에, 소문난 기사식당에서의 맛난 식사. 커피 한잔하기에 좋은 카페 "촛불" 순환도로 쪽에는 이탈리아 식당 "일 비노로소", "라쿠치나", "비손"등 분위기와 맛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도 있다. 오는 길에 독일 문화원에 들러 영화 한편 감상도 좋다.
[북악 스카이웨이]
"나...당신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아요. 당신은 어떤가요? 저~한참 위 정상에서 말해줄래요...?"
꼬불꼬불의 길! 멋진 드라이브! 사직공원 옆길에서부터 돈암동 아리랑고개까지 이어지는 10여km의 드라이브 코스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마치 설악산을 넘어가는 고갯길처럼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도로가 가을 드라이브에 안성맞춤이다. 팔각정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시내 전경은 야~호~~~ 돌아오는 길에 부암동 "환기 미술관"에 들러, 그림감상에 퐁당 빠지는 것도 좋다.
우이령길과 제2북악스카이웨이 산책로도 새롭게 개방이 되었는데 도시의 산책로답지 않게 자연경관이 빼어나다.
[경복궁 삼청공원]
"입맛이 떨어지신 부모님을 모시고 개성 장김치를 찬으로 한 끼 식사를 호화롭게 할 수 있는 곳..."
미술관 순례와 함께 산책하기에 최고다. 고풍스런 경복궁에서부터 삼청공원에 이르는 은행나무 길. 프랑스문화원에서부터 현대화랑, 국제화랑, 아트선재센타 등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화랑들이 함께 하는 미술관 순례. 10여만 평에 이르는 삼청공원에서의 낙엽구경. 소문난 "삼청동 수제비집", "삼청동 복집", 만두전골집 "다락", 재즈카페 "재즈 스토리", 개성음식의 황태자격인 한정식집 "용수산", 찻집 "진선 북카페"도 들러 볼 만하지만 수많은 인파로 인해 감흥이 전 같지는 않다.
그 외 노원구 화랑로와 송파구 석촌호수, 이대 후문 새절쪽 오솔길, 작금에 새롭게 조성된 한강둔치 산책로도 추천할만하다. 서울에는 정말 운치 있는 가을 산책코스가 많다.
생각만큼 잘 흘러가 주지 않아 불만투성이의 삶일지라도, 가끔은 그 불만과 피곤한 삶을 엮어가는 복잡한 서울시내 한 모퉁이에서, 호젓하게 걸어보며 사색하며 익어가는 가을 정취 속에 온갖 것들을 떨쳐 버리고 것도 좋을 듯하다.
잘 알려진 먼 곳으로의 여행도 좋겠지만, 바쁜 일상의 서민들에겐 그야말로 도심 속 "외딴 섬"으로의 일탈도 신나는 일이 아닐까?
유난히 짧은 가을! 그러나 짧은 시간을 탓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놀랄 만치 다양한 색을 연출하여 도심에서 보기 힘든 별천지를 만들어 주고 있다.
넉넉함과 겸손함, 그리고 진솔함으로 소리 없이 다가오는 자연... 정말 평생을 두고 친구하고 싶은 멋진 창조물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참 좋은 평생의 친구다.
[Moliendo Cafe / Africand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