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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한 백성에 대한 축복
학 2:17-23
1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19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20 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1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22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학 2:17-23 / 내가 깜부기병과 흰가루병과 우박으로 너희를 치고 너희가 하는 일마다 꼬이게 하였으나, 너희는 여전히 내게로 돌아오는 것을 싫어하였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18) `그러나 너희는 이제 오늘부터 모든 일을 잘 살펴보아라! 여호와의 성전 기초공사가 완료된 ㄱ) 9월 24일부터 눈여겨 보아라! (ㄱ. BC 520년 12월 18일) 19) 이제까지는 광에도 양식이 떨어졌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석류나무와 올리브나무에도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의 땅에 복을 내려서, 모든 곡식과 과일에 풍작이 들도록 하겠다!' 20) [스룹바벨이 구원의 왕이 된다] 여호와께서 9월 24일에 또 한 번 학개에게 말씀하셨다. 21)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여라. 내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 작정이다. 22) 그때에는 내가 뭇 나라의 왕위들을 뒤집어 놓고, 또 내가 뭇 민족의 군사력을 파괴해 버리겠다. 그때에는 내가 무정한 그들의 병력들을 뒤엎어서, 기마병들이 서로 자기들의 칼에 찔려서 군마와 함께 쓰러지도록 하겠다.' 23)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아, 그날이 오면 내가 너를 나의 종으로 들어올리겠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그때에는 내가 너를 옥새와 같이 쓰겠다. 너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본문은 성전 건축이 중단되고 하나님 앞에 부정으로 인해 하나님께 받은 징계를 기억하고, 성전 재건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17-19) 하나님의 성전은 중단되고 하나님 앞에 부정한 삶을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재앙이 임했습니다.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들의 창고에는 희망이었습니다.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서 열매도 심령이 완악하여 회개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아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 재건을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부터는 9월 24일로 파종을 위해 비를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하나님은 시기적절한 비로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신 11:14; 욜 2:23). 성전 재건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20-23) 성전을 건축하려는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1차로 고국에 돌아온 스룹바벨입니다. 하지만 성전 기초를 놓고 16년 동안 성전 건축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그의 심정은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런 스룹바벨에게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내 종이라 불러주시고,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을 위하여 내가 너를 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학개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로 다시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4년 만에 완공되고 하나님께 봉헌하게 됩니다(스 6장).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비전을 주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는 마침내 완성된 하늘 성전에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어떤 시련과 방해가 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을 택하여 자신의 인장 반지로 삼으시고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회복시키시며,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의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축복을 예표하신 것입니다(눅 1:32, 33; 3:27, 31).
적용: 당신 안에 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감이 우리의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당신의 성전은 잘 지어져 가고 있습니까?
교회봉사에 누구보다 앞장서셨던 분들이 하나둘 요양원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교회에서 늘 기도하고 예배드리던 당신의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게 되고,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지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이 서글퍼집니다. 문득 그분들을 함께 모시고 예배드리는 날을 꿈꿔보기도 합니다. 언젠가 임종을 앞둔 장로님께서 당신이 예배드리던 자리를 그리워하시며,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라고 하셨던 말씀이 두고두고 기억납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이 자리가 누군가에겐 마지막까지 간절히 사모하던 자리였음을 생각하고 감사와 감동으로 가득 채움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 설 교 >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 2장 17~19절 / 피종진목사
사람들이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은 본능이고 본심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복되길 원하는 것은 신불신(信不信)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 2:19) 하나님께서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약속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축원합니다.
오랫동안 포로생활에서 삶이 고달프고 힘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기 일을 앞세우고 신앙이 퇴보되어 성전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예배를 등한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바사제국의 왕 메대사람 다리오 시대에 선지자 학개를 통해서 먼저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하십니다. 성전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국가나 개인도 예배가 사라지면 어느 시대를 봐도 국가가 존립하지 못하고, 가정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할 것은 신앙이 나태하므로 예배가 줄어들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줄어들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있을 때 무서운 재앙이 구약시대도 임했고, 신약시대 와서도, 현대시대와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있던 재앙도 거두어주시고, 환란도 멈추어주시고 땅도 옥토가 되게 하시며 물과 양식을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신 약속을 성취 받을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하여 은혜받으시고 다짐하는 귀한 시간이 되길 축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돌이켰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예배가 무너지고, 성전이 훼파되어도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 무관심할 때 그들은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학개 1:6)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면 많이 뿌려도 수확이 없으며, 인간의 수고는 아무리 많이 쌓아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헛될 뿐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음악으로 유명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직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한 슈바이처이고, 또 한 사람은 존스타운 집단자살 사건을 일으킨 세기의 살인마 짐 존슨입니다.
두 사람은 왜 이렇게 다른 결과를 낳았을까요? 연구한 사람들의 발표에 의하면 슈바이처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였고, 짐 존슨은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의 영광을 누렸다고 합니다. 신앙의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나를 위한다면 오히려 사탄이 틈타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이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이어지도록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여 자신의 집에만 관심이 많고 하나님의 성전이 훼파되어도 관심이 없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학 2:9) 아멘.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육신의 탐욕을 위해 자신뿐 아니라 세상과 땅에 두면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항상 우리는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쓰임 받으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한 사람에게 내리시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복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탄의 전략 세 가지를 요약하면,
.멀리 보지 못하고 앞에만 보게 합니다. (내세의 천국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하게 만듭니다.(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무관심하고 안일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바라보아야 하는데 사탄은 현실에만 관심을 두게 합니다.
현재의 시련, 고난, 역경이 있어도 하나님이 예비한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신령한 영의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서 하나님 말씀을 가슴에 받아야 합니다. 현실에 괴로움이 있어도 미래에는 영광이 오고 축복으로 이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성전의 지대를 쌓기를 시작했을 때입니다.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 2:18,19)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 곧 황폐할 정도로 훼파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생각을 버리고 오직 자기만족과 안위를 위해서만 정신을 쏟았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자신들의 삶을 성찰하도록 촉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려한 성전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백성들의 마음이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집을 지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착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의롭고, 경건하고, 참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시고,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기도를 쌓고, 말씀이 충만, 성령이 충만한 것도 심고, 베풀며 나누어 모든 사람을 위로해주고,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것들이 모두 신앙의 지대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이 땅에 세워지기를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몸담은 교회가 부흥되길 기도하고, 헌신하며 지체의 사명을 다하여 나아가 베풀어야 합니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또 천국을 소유하지 못해 지옥 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길 위해서 노력하고 힘쓸 때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경고했던 아모스 선지자는 비록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멸망할지라도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여서는 회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암 9:11~15)
이는 죄에 대하여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확실함을 약속한 말씀입니다.
이는 ‘성전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보라’고 말씀하셨듯이 복을 주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많이 쌓아놓길 바랍니다. 전도를 많이 쌓아놓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는 힘들고 핍박과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나타내서 영광을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면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십시오. 특별히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성도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학 2:5) 아멘.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잠들었던 백성들의 영을 깨우시며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쁨으로 순종하게 도우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 곧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하였고 친히 성령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7) 아멘.
주의 영이 없는 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주의 영이 함께 하시므로 자유하고 생각이 선해지고 수고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아멘.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롬 8:9~10)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갈 5:22,23) 성령은 되게 하십니다.(슥 4:6)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로 향한 우리 마음의 성전을 건축해야 합니다.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맡기신 선한 일을 담대하게 행하여 우리 주님으로부터 내리는 위로와 평안으로 승리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부터는
학 2장 15~19절 / 임덕순목사(한가람교회)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보면 ‘오늘 이전’, ‘오늘부터’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보라고 권면하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든 생활을 했는지,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불행했던 삶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이제는 복된 생활을 시작하라는 권면입니다.
여러분, 요즈음 살만 하십니까? 아니면 너무 힘드십니까? 요즘 모두가 살기 힘들다고들 말합니다. 부동산시장이 붕괴되어 하우스푸어 라는 말이 생겨났고 경제가 너무 어려워지는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대기업은 수익을 내지만 중소기업이나 일반 직장인들은 경제가 너무나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대통령선거가 코앞에 다가왔는데 상대방을 폄하나 하고 있지 제대로 된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은 안 보입니다. 오래전에 시작된 유럽의 경제위기는 아직도 수습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그 여파가 우리에게까지 미치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상시 불안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세계는 경제전쟁의 시대로 접어 들었는데 경제전쟁에는 전통적인 우방도 혈맹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두가 저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고, 다른 사람을 해쳐서라도 자신의 행복을 누려보려고 하는 사람들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행복과 만족을 얻지 못하고 헛된 수고와 쓴 입맛을 다실뿐입니다.
시 127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일을 시작하고 밤늦게 돌아오며 수고의 떡을 먹어도 헛되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헛된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오랜 시간 준비하고 수없이 장소를 답사하고 돈을 빌려서 전세금 권리금 주고 큰 맘 먹고 개업을 했는데, 일 년도 못되어 돈만 까먹고 가게 문을 닫아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헛된 수고입니다.
여러 번 선보고 사주관상 맞추어보고, 혼수를 장만하고 예식장 잡고 청첩장 찍고 수천 만원씩 들여 결혼식도 거창하게 치렀는데, 신혼여행 다녀온 뒤로는 다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결국은 서로가 상처를 안고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헛된 결혼입니다.
그보다도 더한 것은 헛된 인생입니다. 어려서부터 성공을 해야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공부했고 최선을 다해서 수고한 결과로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성공을 이루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가슴에 채워진 것이 없습니다.
돈과 명예를 얻어 보려고 죽도록 노력했는데, 결국 한숨과 후회만 남게 되는 것이 세상사입니다. 인생은 단 한번 뿐인데 지나온 세월이 헛바퀴 돌린 것만 같으니 인생 자체가 헛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는 게 만족스러우신 분 있습니까?
무엇을 먹었더니 행복하고 무엇을 가졌더니 만족하던가요? 굶주릴 때 생각으로는 먹을 것만 해결되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먹어보니 거기에 행복이 있지 않았습니다. 남들 못 입는 명품 옷을 입으면 만족하던가요? 연봉은 얼마를 받으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취직만 하면 원이 없겠더니 취직하고 나니까 월급적어서 불만이지요? 월급이 괜찮아지면 월급보다는 복지가 잘 되어있는 직장이 부럽지요? 무엇이 인생을 신나게 해줄까요?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몸을 만드는 운동을 하고 여행을 하면서 살면 만족할 것 같습니까?
학개는 1:6에서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고 일꾼이 삯을 받아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일까요?
여러분의 마음 안에는 평안이 있습니까? 미래가 불안한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10년 후에도 끄떡 없으리라는 보장을 받은 분이 혹시 있습니까?
자식들 학교 보내고 학원 보내고 남부럽지 않게 기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만약에 아이들 기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여러분 자식의 장래를 책임져 줄 사람은 있습니까?
이 세상에 와서 한일 중에 가장 많이 한 것은 죄지은 것일 텐데, 여러분이 지은 죄는 해결해 놓았습니까? 죄 사함 받지 않고서도 편한 마음으로 세상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빚을 졌다가 십 수 년 죽을힘을 다해서 갚아서 후련하신 분 있습니까? 앞으로는 절대로 빚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있나요?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얼마나 좋은 날입니까? 그런데 앞으로 다시는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보장을 해 줄 이가 있나요?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까지 그렇게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면, 인생이 참 불행하지 않습니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해결 받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불행의 원인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자연만물과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하나님을 등지고 삽니다. 오히려 돈이나 명예나 귀신이나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섬기며 삽니다.
“예수님을 믿자, 하나님을 섬기며 살자”고 전도하면, 바쁘다고 말하는 분도 있고, 나는 종교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들고 우리 미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입니까? 여러분과 나는 인생입니다. 인생은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만들고 나와 여러분을 만들어 세상에 살게 해주신 조물주 하나님이 따로 계십니다.
우리 생명은 그분이 선물로 주신 것이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하늘과 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남의 집에 살면서 세를 내지 않으면 당연히 쫓겨납니다. 더구나 그 주인이 집만 빌려준 것이 아니라 먹을 것과 입을 것 까지 주었다면 당연히 그 값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이 조물주 하나님께 내야 하는 것은 그분께 감사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누구는 그분을 섬겨야 하고, 누구는 안 섬겨도 될 일이 아닙니다. 인생으로 태어나서 자기의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면 그게 가장 큰 죄입니다. 죄인에게는 형벌이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등지고 살면 세상을 살아도 삶의 의미와 이유도 모르게 되고, 평안과 행복도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장소를 하나 지어주셨습니다. 사람의 가슴 한 가운데에는 빈 공간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의 가슴 안에 빈공간이 있다는 것은 본인도 느낍니다. 삶이 허전하다고 느끼는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채워보려고 이것저것을 해봅니다. 지식을 많이 채우면 그곳이 채워져서 인생이 허전을 면할까 했는데 안 됩니다. 명예나 권력을 가지면 채워질까 했는데 그것도 실패 했습니다. 사람의 머리는 지식으로 채워질 수 있고, 사람의 배는 기름진 음식으로 채울 수 있지만, 마음의 빈 장소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실 때에만 인간의 한 가운데인 마음이 채워집니다. 거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모실 때에만 인간은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는 제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입으로 한쪽 젖을 먹으면서 한 손으로는 다른 젖을 붙잡고 있을 때에 만족을 누립니다. 다 큰 사람은 하나님 품에 안겨 있고 하나님께 붙잡혀 있을 때에만 허전함을 면하고 만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으로 만족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학개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 우리처럼 불행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서 모든 민족에게 축복의 모델이 되라고 부름 받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는데 열중하고, 정의롭지 못하게 살며,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자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던 성전마저 파괴되었습니다. 그들은 망국의 한을 안고 바벨론에 끌려가서 죽도록 고생했습니다. 그들은 고생 속에서야 깨닫고 지난날의 우상숭배를 회개하며 고국에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우리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가장 먼저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겠다고 울며불며 기도했습니다. 70년이 되자 하나님은 그들을 고국에 돌려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 온지 15년이 되었는데도 하나님께 약속했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미루어두고 제각기 자기 행복을 가꾸어 보려고 자기 집만 짓고 목장만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도,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고 농사는 풍년들지 않았으며, 목축은 실패를 했습니다.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었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했으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했으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했으며, 일해서 받은 품삯을 주머니에 넣었지만 구멍이 뚫린 것처럼 모두 새어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지치고 낙담되었지만 그 이유가 뭔지도 몰라서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학개 선지자가 그 이유를 밝혀 주었습니다.
“너희는 각기 자기들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각자 자신들의 삶을 반성해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파괴된 채 80년이 넘어 가는데, 너희들은 자기 집 짓기에만 바쁘고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기 위해서 육신의 일에만 몰두하며 나를 잊어버리고 사니, 하나님을 외면한 삶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사는 삶이 황무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오늘부터라도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찍어다가 성전을 짓기 시작해라. 그러면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이것이 본분의 내용이며, 또한 오늘 여기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처방이며 약속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특정한 한 건물에서만 하나님께 예배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건물을 한 채 짓는 일에도 힘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황폐했고 허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예배와 성전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해 주셨습니다. 진정한 예배란, 특정한 장소에 가서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리고 고기를 불태워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공경하며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흉악한 죄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이제 남의 허물을 아주 깨끗하게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용서하고 자녀를 삼아주셨으니, 나도 이제는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살피고 도와야한다고 생각하고 섬기는 생활입니다. 남의 회사에 취직한 직장인이라면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일 하는 삶이고, 만약 사장이라면 하나님이 나에게 직원들을 맡겨 주셨으니 직원들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사랑으로 돌보는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의 예배, 즉 참된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상관하지 않고 제물이나 많이 바치면 좋아하시는 신이 아니라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제물이나 제사보다 더 원하시는 창조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 안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신 그 마음이 바로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즉 예수님을 마음 안에 모시고 주님께 순종하며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는 성전이 건축되어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까? 어릴 때 주일학교에 다닌 것은 마음 안에 건축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짓기 시작했던 마음의 성전이 언제부터인지 건축이 중단된 상태로 방치된 채, 수 십 년 세월이 흘러갔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동안의 삶이 열심히 뿌렸는데도 수확이 없는 허무한 삶을 되풀이 해온 것이 아닙니까?
이 시간에 여러분 마음 안에 주님을 모심으로 여러분 마음 안에 성전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교회등록은 했지만 결석을 떡먹듯이 해서, 마음 안에 지어져가는 성전이 기초만 쌓아진 채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혹은 한때는 열심히 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마음의 성전이 허물어져 있지 않습니까? 기둥이 부러지고 벽이 무너지고 문짝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황무한 모습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나를 만드시고 생명의 힘을 공급하시며 오늘 나를 살아가게 해주신 하나님, 내 마음 안에 종교심을 주어서 그곳에 귀한 당신을 모시도록 해주신 그분을, 평생에 단 한 번도 모셔보지 못하고 그동안 온갖 귀신에게 시달리면서 불안과 두려움과 허무함으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마음의 성전이 허물어지면 삶이 허무하고 불행한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만드셨고 힘과 지혜와 이성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신 분입니다. 그분께서 오라고 부르시면 오늘 밤 당장에라도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모든 것은 그분의 결정대로 됩니다. 그런데 그분을 인정하지도 않고 믿고 순종하지도 않고 뭐가 될 줄로 아셨습니까? 그분께서 허락 하지 않으시면 인간이 별 재주를 다 부려도 되는 게 없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 채 세상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으니 허무했고 불안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먹어도 마셔도 입어도 만족이 없고 텅 빈 가슴뿐이었다고 오늘 성경이 지적해 주십니다.
우리가 불행한 원인은, 돈 없고 빽 없고, 못 배우고 재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생명과 복의근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의 성전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하신 모든 분은 지금부터 마음의 성전을 재건하시기 바랍니다.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을 섬기는 삶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날마다 일마다 주님께 묻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믿음과 사랑과 의로움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음 안에는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시고 책임자가 되시고 보호자와 인도자가 되셔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될 것입니다.
마음 안에 성전을 회복한 사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복을 주시면, 우리가 평생 몸부림쳐도 안 되던 문제가 한 순간에 풀리게 됩니다.
그분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문제의 해결책이, 행복의 길이, 예수님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시기를 간절하게 권면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요10:)고 하셨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내안에" 라 하심은, 사람이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말하고,
"내가 저안에" 라 함은, 내 마음 안에 예수님이 들어와 거주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인생은 미지의 세계에서 짧은 여행을 하는 나그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꽤 먼 인생길을 걸어오셨지만, 그렇다고 남은 인생길이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미래는 여전히 낯설기만 합니다. 앞길에 어떤 풍파가 일고 어떤 문제가 가로막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간편한 하루 이틀의 나들이라면 몰라도, 멀고 험한 나머지 평생을 혼자서 걷는다는 것은 너무 쓸쓸하고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여러분!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시면 오늘부터 우리의 길이 되시고 생명이신 그분께서 동행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마음에 주님을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것이 마음 안에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그러면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고 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어 마음 안에 성전을 짓는 일은 결혼식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남남이었던 남녀가 서로 만났습니다. 서로가 마음에 들어 평생을 함께 살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결혼날짜를 잡고 혼수를 장만하였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날짜 약속한 장소에서 하객들이 보는 앞에서 주례 앞에 혼인서약을 했습니다. 그 서약을 함과 동시에 그 둘은 이제 남남이 아니라 한 몸이 되었고, 그들의 모든 지식과 경험과 재산과 삶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약 하나로 둘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상합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 일, 즉 내 마음 안에 성전을 짓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약 하나면 됩니다.
이 시간에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내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겠노라고 약속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과 지혜가 가득하신 그분이 여러분과 동행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시작됩니다. 내가 오늘부터 복을 주리라 하신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미래가 두려울 것이 없고 안정과 평안이 가득하고 순간마다 신기한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감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더 이상 외롭거나 정처 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날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어서 그리스도와 언약을 함으로서 누리게 된 특권입니다.
오늘이, 그동안 무너졌던 여러분 마음안의 성전이 재건되는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중심에 계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부터 여러분 안에 평안과 만족과 하나님의 인도가 시작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영혼에 축복의 햇빛이 비추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영원히 예수의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홉째 달 이십사일은 성전이 다 지어진 날이 아닙니다. 이제 막 새로운 결심으로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던 날, 즉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시작만 했는데도 그날부터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온 분이라면, 오늘부터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여러분 마음 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는 날이요, 오늘부터 하나님이 축복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동안 오래 결석하다가 오늘 다시 오신분이라면, 오늘부터 새 출발하셔서 그동안 건축하다가 방치했던 마음의 성전을 오늘 재건을 시작하시고 오늘부터 주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다녔지만 주님을 중심에 모시지 못하고 마음 구석에 방치하고 중심에는 물질이나 명예나 세상 재미를 두었다면, 오늘부터는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순종하는 삶을 시작하셔서 오늘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복과 땅의 아름다운 복을 오늘부터 영원토록 풍성히 내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면
학 2장 15~19 / 임현수목사
죄송하지만 오늘은 저희 집 이야기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저희 집안은 친할머님 때부터 예수님 믿고 전도부인으로 교회를 섬기신 집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은 저희 아버님 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물질적인 복을 많이 주셔서 만주에서부터 큰 사업을 하셨고 다시 서울로와 명동에서도 큰 사업을 하셨습니다. 제 본적도 옛날 시공관 맞으편인 명동1가 53번지 입니다. 그래서 저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서울 한복판에서 살았던 기억 뿐 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할머님께서 항상 기도해 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할머님은 정말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이었음이 확실한 것이 할머님에 대한 저의 기억의 대부분이 기도하시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부터인가 저희 집에도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찾아 오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줄만 알았지 주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뚝섬에 있었던 공장이 불타고, 염산 공장이 폭발하고, 큰 양계장도 있었는데 수천마리의 닭들이 갑자기 사고로 죽고, 명동에 있던 고려정이라는 유명한 냉면집도 팔고, 건물도 팔았습니다. 그런 시련을 수년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 돌아 오지 않았던 우리 집안엔 다시 제 동생이 골수염으로 아파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지경에 이르는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할머니의 간절한 필사적인 기도로 동생은 다리를 절단하는 위기를 모면 할 수 있었습니다만 이런 가난과 병고의 징계가 많았습니다.
그 때를 계기로 우리 집안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님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오셨고, 누이들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으며 동생들도 하나님께 돌아오고…그래서 온식구가 다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 바로 그런 시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 집에는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의 고생, 징계와 채찍, 연단의 시간들이… 안개처럼 사라지기 시작했고… 다시 모든 축복이 마치 부활하듯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회복이 시작된 것 입니다. (1971년 회심과 확신)
회복의 은총을 입으며 저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제 생애를 드리겠다고 헌신했습니다. 저희 큰 누이도 헌신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저희 가정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 빛이 비치기 시작했고 모든 얽혔던 문제들이 기적 같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 본문 마지막에 나오는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말씀과도 같았습니다.
다같이 인사해 볼까요?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일을 우리 손으로 하려고 하지말고 하나님이 하시도록 맡기면 그것이 바로 형통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 역사 가운데 10대 재벌에 속하는 큰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 때는 체신부 장관으로 발탁되어서 나라를 위해서 크게 공헌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잘 알려진 존 와나메이커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선교헌금으로 교회와 선교단체를 많이 지원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한번은 멋지고 웅장한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을 했습니다. 건축비만도 100만 달러가 들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회고를 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몹시도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저는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제가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교회 입구의 골목길이 생각났습니다. 그 골목길은 비만 오면 질퍽질퍽해서 교인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몹시도 힘들어했습니다. 저는 제가 받는 임금의 일부를 떼어서 매일 벽돌 한 장씩을 사서 골목길을 깔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그런 제 모습을 보신 목사님께서 저를 불러서 축복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 벽돌 몇 장을 바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 이렇게 크고도 멋있는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헌당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놀랍고 엄청난 은혜를 제가 무엇으로 보답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 드릴 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 일을 책임지시고 다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손으로, 우리 일은 하나님의 손으로."
바로 이것이 축복 받는 비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조국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제쳐놓고 그저 자신의 육신적인 일에 바빴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잘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하게 한 그대로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황무하게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지금까지의 자기들의 소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깊이 뉘우쳤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 곧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 하늘 축복의 문을 다시금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그리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4년 만에 완공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 그들의 삶도 역시 윤택해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 2:19)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학 2:21)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학 2:23) 이 세 구절에 보면 “내가”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나옵니다. 여기에서 ‘내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만이 복을 주실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 복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 2:7). 또한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신 32:39).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인간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잘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간단하게 세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과거, 현재, 미래 세 시점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이제 원하건대(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놓이지 않았던 때를 기억(추억)하라."
잘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 생활을 마치고 조국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에스라서 1장에서 거듭 밝히고 있는 대로 하나님은 그들이 황무해진 하나님의 성전을 속히 재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이런 생각을 가졌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우리가 힘써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 물질, 지혜를 다 써서 우리가 부지런히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금 짓자.'
그들은 이런 거룩한 마음을 품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갓 돌아 왔기 때문에 너무 먹고 살기가 힘들다. 우리의 경제가 좋아지면 그때 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도록 하자.'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의 성전 재건하는 일을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못된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시키시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럴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해야 했습니까?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면서 스스로 굳세게 해서 더욱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힘써 행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반드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영광의 역사를 나타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정한 생각은 너무나도 쉽게 전염되어 나가는 법입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일을 너무나도 쉽게 단념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성전은 황무했습니다. 성전의 돌이 돌 위에 놓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집을 짓고 자기들의 집을 치장하는 일에는 바빴습니다. 자기들은 판벽한 집에 거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윤택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127:1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복을 내리지 아니하시는데,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윤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 축복의 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16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는 이십 고르(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그릇)를 길으려 이른즉 이십 고르(그릇)뿐이었었느니라."
그들은 많은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거두어들이는 것은 적었습니다. 많이 뿌리면 많이 거두는것이 당연한 추수의 법칙이건만 그들이 양식으로 쓸 곡식 더미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의 50% 수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음료로 쓸 포도즙은 40% 수준밖에 거두어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농사기술이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그들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농사하는 일에 폭풍으로, 곰팡으로, 우박으로 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폭풍은 남쪽 사막 지대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바람을 의미합니다. 이 열풍이 세차게 불면 곡식은 타버려 알곡이 되지 못하고 쭉정이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반대로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우 습합니다. 이 습한 바람이 세차게 불면 곡식은 곰팡이 슬어서 부패해 버립니다.
또한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우 차갑습니다. 그 바람은 우박을 동반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박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10가지 재앙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박은 농작물에 큰 피해를 줍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은 제쳐놓고, 자기들의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잘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하게 했던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그들의 삶도 똑같이 황무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북미나 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다같이 유럽에서 이민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지금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미 여러 나라들은 한결같이 못살고 있습니다. 한번은 남미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찾아서 신대륙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찾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황금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황금을 찾아서 이 땅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황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 손으로 할 때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 일을 해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일을 무조건 열심히 하면 잘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만 범사가 형통한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일을 먼저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된 손으로, 전능하신 손으로 우리 일을 형통하게 해 주실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늘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기억하라(추억하여 보라) 아홉째달(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추억)하여 보라."
오늘 본문에는 "오늘"이라는 단어가 세 번 사용이 되었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오늘부터." 18절 말씀에도 나옵니다. "너희는 오늘부터." 그리고 19절 끝 부분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이 오늘은 대단히 중요한 오늘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는 것 입니다. 학개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들은 돌이켰습니다. 오늘 그들은 하나님의 전 지대를 쌓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성전의 돌이 돌위에 첩놓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시적인 변화 이외에 더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그들의 삶의 태도가 변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마음을 품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마음을 품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이제는 거룩한 마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마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닫아놓았던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와 같이 엄청나고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리신 폭풍이 그들을 바꾸어놓았습니까? 곰팡이가 바꾸어놓았습니까? 우박이 바꾸어놓았습니까?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폭풍도, 곰팡도, 우박도 그들의 부정한 마음을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정한 마음을 거룩한 마음으로 돌이켜 놓았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뒤집어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히4:12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면서 그들의 부정한 마음을 거룩한 마음으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언제나 사는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부정한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거룩한 마음으로 바뀌어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일에 참여를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들은 성전 건축에 모두가 참여했습니다. 1:12의 말씀을 살펴봅니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이스라엘의 두 지도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물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이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 옛날 다윗 임금은 일생토록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기를 그토록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일생동안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동참할 기회를 한번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성전 건축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러한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을 때 우리는 모두가 마음과 뜻을 같이해서 적극적으로 이 일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1:14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역사)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이 일에 동참했습니다. 성전 건축은 억지로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가 언제였습니까? 1:15절 말씀처럼 육신적 으로 매우 바쁜 추수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일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래서 축복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 옛날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첫 해에 농사를 지어서 하나님의 성전, 곧 교회를 제일 먼저 세웠습니다. 그 다음 해에 농사를 지어서는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셋째 해에 농사를 지어서야 비로소 자기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그 후손들을 복 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여러분도 이런 복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19의 말씀입니다. "곡식 종자가 아직도(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선지자는 오늘을 기점으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와 미래를 서로 비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는 하나님의 일을 제쳐놓았습니다. 자기들의 육신의 일에만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했습니다.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 종자조차도 먹어야할 정도로 절박했었습니다.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등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무에도 열매가 맺지를 못했습니다. 이는 하늘의 이슬이 그쳤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개 선지자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 일을 앞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모두가 자원해서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참여했습니다.
(지난주 교회 청소 하면서 감사한 것은 일 할 분들이 많아서 처음으로 행복한 고민을 했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 복을 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닫아놓았던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상황은 이제 달라질 것입니다.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리해서 창고에는 곡식 종자가 넉넉하게 될 것입니다.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도 열매가 풍성히 맺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힘써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일을 다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증> 제가 좋아하는 일전에 화제가 되었던 베드로의 기적 체험자 김상태 집사의 간증을 좀더 구체적으로 나누고 싶습니다. 아버님이 주지스님으로 절을 세웠다고 합니다. 친구따라 교회 갔다가 믿음을 가졌고 아버님과 어머님을 전도했습니다. 동네 시골교회를 다니면서 시골교회 어려운 재정을 13년을 봤는데, 너무 지나치게 알뜰하게 봐서, 심지어는 교회 목사님 사모님이 전화비가 무서워서 사적(私的)인 전화는 공중전화를 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때는 무척 어려웠는데, 교회재정일을 떠나고 난 후, 나중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셔서 횟집을 개업하고, 그물을 바다에 쳐서 고기를 잡는 대형 정치망 어장을 주시고, 7.5톤의 배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도 잘 안잡히고 횟집도 잘 안되서 4억6천만원의 빚이 생겼습 니다. 사람들은 ‘고사지내라. 용왕에게 제사 지내라’라고 권면을 하더랍니다. 하지만 집사님은 주위의 이러한 유혹에 한번도 흔들리지 않고, 목사님 모시고 동해안 바닷가에서 안수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집사님이 다니던 교회가 21년된 교회 쓰레트 교회, 물이 새는 교회였습니다. 시골교회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나오고, 집사님 형제가 40대인데 제일 젊은 분들이었습니다. 도저히 교회를 새로 지을 형편이 안됐습니다. 그래서 기도했답니다. 이 교회 건축을 하도록 축복해 주세요. 빚 4억 6천만원 갚게 해주시면 교회당 짓겠습니다.
그 해, 즉 2000년 12월 24일 새벽에 전화가 왔습니다. 바다에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으러 간 동생의 전화였습니다. 고기가 엄청나게 많이 잡혔다는 전화 였습니다. 배가 입항하는 포구로 갔는데, 관광버스보다 조금 큰 7.5톤의 배가 거의 내려앉아서 들어왔습니다. 그것을 보니 감격과 회개가 나오더랍니다.
그 배에 방어 2,500마리를 싣고 왔습니다. 방어는 yellowtail을 말합니다. 한 마리에 10kg~15kg, 길이가 120cm입니다. 1차 경매를 했는데, 1마리에 16만9천원 해서 4억원이 됐답니다. 그리고 2차로 그물에 가서 2,500마리를 건져왔는데, 한 마리에 3만원해서 1억6천만원을 벌었습니다. 도합 5억 6천만원 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정치어망이라는 것은 넓은 바다에 그물을 쳐 놓고, 그 그물안에 들어오는 물고기를 잡는 것입니다. 이 집사님의 어망이 51,000평이나 되지만, 그 그물 입구는 1미터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많은 그물이 있어서, 한 복판에 놓여 있는 이 집사님의 그물까지 고기가 들어올 확률이 매우 적었다고 합니다. 한 마리가 120cm나 되니까, 한 마리 들어가면 다른 고기들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고기들이 줄을 서서 이 그물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희안하게도 옆의 다른 집 그물에는 한 마리의 방어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 였습니다. 그런데 십일조 5천600만원하고 빛 갚으니 돈이 하나도 안 남더랍니다. 생각해 보니 4억6천 빚 갚게 해달라고 기도만 했지, 더 달라고 기도를 안했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횟집 담보로 융자를 받아서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그랬더니 한달만에 다시 5m30cm나 되는 큰 밍크고래가 잡혀서 신문과 뉴스에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큰 고래가 잡힐 때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만일 처음 이 고래가 그물에 걸렸을 때 요동을 쳤으면, 그물이 다 찢기거나 배를 파선시킬 수도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고래가 그물에 들어와서는 조용히 잠자듯이 얌전하게 있더랍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후 1년이 경과했을 때 서울에서 오신, 그것도 카톨릭 신자가 무상으로 돌횟집 옆의 싯가 5억원의 땅을 김집사님에게 기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직접 체험한 김집사님은, 교파를 초월하여 은퇴하신 목회자님들을 위한 무료 선교센타를 짓기 위한 20억의 헌금을 하나님께 서원하고, 요즘 적극 실천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내일부터는 복을 주리라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복을 내일로 미루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정한 상태에서 거룩한 상태로 바뀌어지는 순간 하나님은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힘써 하나님의 일을 해드릴 때 하나님도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우리의 일을 형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축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일은 제켜놓고 우리 육신의 일에 힘썼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돌이켜서 하나님의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던 오늘의 역사, 변화의 역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서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평범한 간증이지만 저는 충일 교회 성도의 글을 읽으면서 잔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분의 글이 적어도 솔직했고 정직했기 때문입니다. 저희 충일교회가 성전건축을 하기전인데 공사비가 50억정도의 예산이 들어간다고 하셨다. IMF가 시작되어 모두가 어렵다고 하는 때에 예산도 없이 50억공사를 하신다고 하셔서 도대체 성도들의 힘든 사정을 알기나하고 저런 말씀을 하시나싶고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도대체 어디서 돈이 나온다고 그렇게 크게 성전을 짓나싶은게 건축헌금 말씀만하시면 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며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크게 짓는다면 공연한 거부반응이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들의 주거환경은 너무나 눈에 띄게 달라지고, 넓은 평수와 좋은 환경에서 살고있는데 꼭 교회는 크게 지면 안된다는 것은 내 욕심에서 비롯된 생각이라는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던 중 이 모든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의 전을 짓는데 달라고 하면 주시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할수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 말씀을 읽던중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제자들이 할수있는 능력이 있어서 제자들을 기대하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하라고 하신 것은 주님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위해 제자들을 시험하셨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건축을 하고 헌금을 하라고 하시는 것은 내 능력을 믿고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하실 것인데 믿고 맡기겠느냐라는 말씀으로 들려졌습니다. 그리고 성경전체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은 미리 예비하시고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예비한 것을 주셔서 하게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이런 깨달음을 주옵소서….
복을 부르는 2대 삶
학개 2장 18-19절 / 이한규목사
1. 헌신하는 삶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개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전 건축에 나서면 바로 복이 임할 줄 알았다. 그러나 복이 임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헌신이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학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끗하게 헌신하면 그때부터 상황이 달라지고 놀라운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18-19절). 즉 인간적인 계산을 버리고 순수한 헌신을 하면 바로 그때부터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가끔 목회자가 설교할 때 인간적인 욕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물질적인 헌신에 대해서 설교하는 경우가 있다. 그때 그 설교를 듣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교회 재정부 집사들이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사람이 교회 살림을 실질적으로 꾸려가는 장로들이다. 세 번째로 좋아하는 사람은 교회를 항상 염려해주는 권사들이다. 네 번째로 좋아하는 사람이 교회의 미래를 책임질 안수집사들이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사람들은 강요에 의한 잦은 헌금 압박이 아니라면 대개 물질적인 헌신에 대한 지혜롭고 적절한 설교를 좋아한다. 그 설교를 듣고 한 사람이라도 더 헌신하는 모습을 보는 기쁨이 있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거룩한 부담감과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책임을 일깨우는 지혜로운 헌금 얘기조차 부담스럽게 여길 것이다. “저런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어떤 종류의 성도에게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겠는가? 자원하는 심령으로 헌신하는 성도들에게다. 계산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 머리가 좋은 계산적인 사람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믿음이 좋은 헌신적인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계산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 얻으려고 하면 결국 적자인생이 되지만 드리려고 하면 하나님이 흑자인생으로 만들어주신다.
2. 거룩한 삶
헌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깨끗한 마음과 인격을 가지고 헌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복된 삶을 살려면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잘 관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은혜는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준비해야 할 것은 자신을 깨끗하고 성결하고 흠 없이 가꾸는 것이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거룩한 삶을 통해 아름다운 향기가 나오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역전에서 확성기를 들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친다. 오래 전에는 그런 방법이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긴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이 좋은 믿음을 나타내는 표시로 여겼지만 지금은 온전한 신앙인격을 가지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좋게 본다.
어떤 사람은 거룩한 것을 유머도 안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한때 성경책을 옆에 끼고 고개를 쳐들고 목소리 깔고 “할렐루야.”라고 해야 거룩한 목사처럼 생각하는 줄 오해했다. 때로는 기도하는 거룩한 목사로 평가받기 위해 억지로 목소리를 쉰 목소리로 만들려고 성대를 망가지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성대조차도 소중하게 가꾸어야 할 책임이 있다. 거룩한 삶이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까지 몸과 마음과 영혼을 흠 없이 아름답게 보존하는 삶이다.
운동을 게을리 해서 배가 남산처럼 나오게 하는 것도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온전한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물론 틈틈이 운동도 하면서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가꿀 때 하나님이 큰 복을 내려주신다. 결국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를 한 구절로 말하면 “깨끗하게 헌신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깨끗한 헌신으로 “오늘부터는 복을 주리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라.
오늘부터는 복을 주리라
학 2장 15~19절 / 김영규목사
축복의 전환점
삶에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있습니다. 잘 나가던 인생이 갑자기 곤두박질치는 일이 있습니다. 갑자기 사고를 당합니다. 병들기도 합니다. 사업이 기울어집니다. 큰 손해를 봅니다. 사람을 잃기도 합니다. 천재지변을 당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어둡고 힘들던 삶이 갑자기 신데렐라처럼 돌변하기도 합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전환점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했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어느 시점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고 불행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뭘 해도 풀리지 않습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학1:6, 9-11) 그러다가 어느 시점을 지나니까 모든 일이 다시 술술 풀리기 시작합니다. 축복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 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 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 석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이십 그릇뿐이었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2:15-19)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오늘부터”라는 구절입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오늘이란 어떤 날입니까?
그 날은 바로 성전이 완공 된 날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삶을 우연이나 재수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삶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와 관할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불행이 시작된 날이나, 축복이 시작된 날이나 다 하나님의 섭리란 뜻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은 축복과 불행이 어떤 날을 중심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성전을 포기한 날과 성전을 완공한 날입니다. 성전을 포기한 날 모든 축복이 중단되었습니다. 경제적 소득이 확 줄었습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체불을 당하고 소득원이 사라졌습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학1:6, 10-11) “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슥8:10) 소득이 있어도 도로 다 빠져나갑니다.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9) 경제적 손실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 기쁨이나 만족이 없습니다. 뭘 해도 시원치 않고 부족증에 시달립니다.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1:6) 주변 사람들은 우호적이지 않고 적대적이 됩니다.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슥8:10) 그런데 이런 삶이 성전이 완공된 날부터 확 바뀝니다. 소득은 넘치고, 마음에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손해나는 일이 사라집니다. 뭘 하든지 형통합니다. 바로 이런 삶의 전환점이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새롭게 단장하고 새 출발을 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대로 오늘 우리에게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본문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아야 됩니다. 남북으로 나뉘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의 침략을 받고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BC605 년, BC597 년, BC586 년. 그러다가 BC538 년 고레스 왕의 해방령이 내려지고 BC536년에 49,897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에스라2:64-65) 큰 꿈을 안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과 주변에 정착을 하고, BC536년 제단을 세우고 제물을 바치면서 감격해합니다. BC535년에는 성전 기초를 놓고 공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전 공사는 곧 중단됩니다. 그 땅에 남아 있던 지배자들이 정치적으로 훼방을 했기 때문입니다. 공사 중단은 무려 15년 이상이나 계속됩니다. 이렇게 오래 중단된 것은 방해 때문만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훼방꾼들 때문에 중단 되었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백성들의 마음이 나태해졌기 때문입니다. 성전 중단과 더불어 경제 위기가 닥쳤습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병충해가 나타나고 과일과 곡식이 줄어들었습니다. 원인모를 경제 위기가 계속됩니다. 이때에 일어난 선지자가 바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나태함을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학1:3-5) 이때가 BC 520 년경입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열심히 활동한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성하게 되고, 다시 일어나 성전을 짓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이 중단 된지 20년 만에 BC 515 년 성전이 완공이 됩니다. 이 성전이 소위 말하는 제2성전,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는 날 선지자들은 선포합니다. 오늘부터는 축복이 시작되리라! 그 내용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도 똑 같은 내용을 선포합니다. “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슥 8:11-12) 오늘 우리는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있습니다. 세계 경제의 위축으로 생산력이 저하되었습니다. 해고와 임금 체불, 극심한 빈곤층의 확대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세웠습니다. 돈 한 푼이 아까운 이 시기에 우리는 아낌없이 하나님을 위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기쁨 가운데 준공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을 계기로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의 전환점이 시작된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에, 사업장에, 직장에,모든 일터에, 소득이 늘고 고용이 확대되고 풍요로운 열매들이 맺혀지기를 축원합니다.
성전이 가지는 두 가지 의미
왜 성전을 완공한 날 축복이 시작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만큼 성전이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대한 태도를 이스라엘 신앙의 바로미터로 삼으셨습니다. 성전이 깨끗하고 잘 관리되면 신앙이 괜찮은 것이고, 성전이 퇴락되고 방치되면 신앙이 없는 증표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전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구약 시대 성전은 그 자체가 예수님의 모형과 상징이었습니다. 광야 시절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이나 마찬가집니다. 번제단은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진설병 상은 생명이 떡이신 예수님, 황금등대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분향단은 향기로운 중보기도자이신 예수님의 중보를 상징합니다. 성막 자체, 혹은 재료들도 예수님의 거룩하신 신성이나 무죄하신 인성을 상징했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상징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과정은 그 전체가 하나의 상징입니다. 즉, 죄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속죄 받고 하나님 보좌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중심의 삶은 곧 예수 그리스도 속죄 중심의 삶을 의미했습니다.
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철저하게 파괴당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도록 하셨을까요? 구약 성전의 의미는 이제 참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필요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 메시아가 오셨는데 메시아의 상징물을 놔 둘 필요가 없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당 예배 생활을 시작합니다. 회당중심의 삶이라고 해서 구약 성전 중심의 삶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회당 중심의 삶은 여전히 하나님 중심 삶을 의미했습니다. 왜냐하면 회당은 유대인들의 예배 장소요, 매일의 기도 장소요, 자녀 교육 장소요, 중요한 종교적 사회적 현안을 의논하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성전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던 삶이, 이제는 회당에서 하나님 중심을 사는 모습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신약으로 오면 성도들의 삶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배당으로 장소가 옮겨집니다. 예수님은 당시 예루살렘에 거창하게 세워진 헤롯 성전을 바라보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참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주님의 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작은 성전들입니다.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는 큰 성전입니다. 만국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한 한 몸이기 때문에 가장 큰 성전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헤롯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예배 장소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옮겨집니다. 성도들의 공동체가 있다면 어디든지 그 공동체 자체가 참 성전입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의 삶의 장소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배당을 중심으로 모든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예배, 기도, 교육, 전도, 봉사의 모든 일이 예배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당을 중심으로 모든 삶을 유지해 갑니다. 그러므로 예배당 중심의 삶은 곧 하나님 중심의 삶이라는 점에서 변함이 없습니다. 강조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되는 삶이 곧 예배당 중심의 삶입니다. 예배가 우선이라면, 성도의 교제가 중심이라면, 전도가 중심이라면, 양육이 중심이라면, 예배당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내 삶에서 예배당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삶의 중심 무대입니까? 아니면 가끔 들리는 기분 전환 장소입니까?
오늘 내 삶을 돌이켜 보세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삶에 우선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좌우하고 있습니까?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4-28)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삼상 2:6-10)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나를 창조하신 분, 내 생명을 유지시키시는 분, 내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 선한 목적으로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부분은 다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출생, 죽음이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축복과 불행이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생명과 영혼, 천국과 지옥이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중심, 하나님 우선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나님 우선의 삶을 살려면 예배당이 내 거처보다 우선되는 장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예배당 중심생활은 곧 공동체 중심의 삶을 의미합니다. 예배당은 교회 공동체에 단순한 장소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공동체 생활입니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양육의 공동체입니다. 전도의 공동체입니다. 교제의 공동체입니다. 봉사의 공동체입니다. 모든 것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교회를 인체에 비유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12-13)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14-17)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18-21)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12:26-27) 인체의 비유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서로의 불가분리적 관계, 생존적 관계성입니다. 아무리 얼굴이 잘났어도 얼굴만 떼어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심장이 튼튼하다고 심장만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작용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 연결되고 작용하지 않으면 죽은 몸이요 불구의 몸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몸집은 큰데 생존적 연결성이 부족합니다. 허약하고 영향력은 미미하고 점점 쇠퇴되어 갑니다. 공동체적인 삶은 예배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배당 중심의 삶은 곧 공동체 삶의 현장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하나님은 어느 시대든지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출애굽이나 광야 시절 이스라엘은 완전히 하나의 공동체로 존재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일사불란한 조직체로서 작용했기 때문에 광야의 난관을 이겼고, 가나안의 철병거와 무력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착 직후 약 300 년간은 공동체가 와해된 시기였습니다. 그 시대에 이스라엘은 항상 외세에 시달렸습니다. 농산물을 약탈당하고, 주변 부족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지배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공동체의 연합을 강조하십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12)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공동체적인 삶은 피차의 행복을 위해 가장 수학적이고,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과학적인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 홀로 나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이 행복할 가능성이 높습니까? 아니면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나를 위해주는 이타적인 삶이 행복할 가능성이 높습니까? 나 외의 모든 사람을 위하는 것, 그것이 곧 이타주의입니다. 이타적 삶을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위하기 때문에 가장 행복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개인주의, 이기주의, 특히 개인 행복 지상주의는 망할 놈의 사상인 줄 아셔야 됩니다. 공동체적인 삶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날 지상에서 가장 공동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중심 무대는 바로 하나님의 집인 예배당입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6)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사는 것이 지상 최대의 복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집에 사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장차 들어갈 하나님의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 백성들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할렐루야!
찬란한 꿈을 잃지 말라
학 2장 20~23절 / 이한규목사
< 헌신할 때 복을 주신다 >
사람은 성취를 보지만 하나님은 성취 이전에 마음과 동기를 먼저 보신다. 비전건축을 위해 나서기만 해도 바로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 후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주목하셨다. 바로 성전 건축을 진두지휘하는 총독 스룹바벨이다. 그에게도 백성들처럼 위로의 말씀이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백성들에게 셋째 말씀을 주신 같은 날에 따로 스룹바벨에게 넷째 말씀을 주셨다.
스룹바벨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는가? 하나님은 스스로를 강력한 주권을 가지고 심판하는 분으로 묘사했다(21-22절). 왜 그렇게 묘사했는가? 스룹바벨의 헌신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격려의 말씀을 주셨는가? 하나님은 그를 세우고 인장으로 삼고 택하셨다고 말씀했다(23절). 이 말씀은 대적들이 모함하는 상황에서도 자기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성전건축에 나선 스룹바벨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처럼 자기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교회를 세워가고 비전을 세워가는 헌신적인 성도를 누구보다 축복하신다. 말라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은 그런 헌신적인 심령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게 주시는데 정말 그런지 한번 지켜보라고 말씀했다. 예수님도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해진다고 했다(막 14:9). 그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소중한 것을 기쁘게 드리고 나누고 베풀면 하나님도 기쁘게 그를 축복해주실 것이다.
드리고 나누고 베풀 줄 모르는데 많이 주어지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다. 드리고 나누고 베풀 줄 알아야 축복이 진짜 축복이 되고 영혼도 풍성해진다. 가끔 영적인 빈곤을 느끼면 “더욱 드나베의 삶을 실천하라.”라는 내적인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라. 지금 초라한 모습이라도 헌신을 각오하고 나서면 먼저 마음과 정신부터 가난과 억눌림에서 해방되면서 점차 사는 길이 열리고 그 길은 결국 축복의 대로로 변할 것이다.
< 찬란한 꿈을 잃지 말라 >
하나님은 성도를 축복하실 때 여러 모습으로 축복하신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축복 중 하나가 스룹바벨처럼 비전 건축에 헌신해서 스룹바벨에게 약속된 축복을 같이 공유해 얻는 것이다. 스룹바벨이란 이름의 뜻은 ‘바벨론에서 난 사람’이란 뜻이다. 그는 바벨론에서 났지만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을 지킴으로 리더로 선택되고 더 나아가 사심 없이 헌신함으로 결국 성전 건축의 비전을 멋지게 이뤄냈다.
스룹바벨의 꿈을 새롭게 품으라. 자녀 중에 스룹바벨이 나오는 꿈을 꾸며 기도하라. 또한 교인 중에도 스룹바벨이 나오는 꿈을 품고 계속 기도하고 기대하며 준비하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이름을 날리면서도 늘 겸손하게 하나님을 앞세우며 살고 또한 후방의 암행선교사로서 선교와 구제의 이름 없는 큰 손이 되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며 살겠다는 꿈을 가지라.
꿈은 소중한 재산이다. 다른 것은 잃어도 찬란한 꿈만은 잃지 말라. 예배와 기도시간은 찬란한 꿈을 다듬고 격려하는 시간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에 대한 꿈을 품고 기대하고 계심을 잊지 말라. 하나님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 성도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최상으로 도와주실 것이다. 때로 환난과 역경이 닥쳐도 그것들도 꿈을 이루게 하는 멋진 재료들이 된다. 현재 상황이 힘들어도 마음을 가다듬고 꿈과 비전을 새롭게 하면 위기는 반드시 기회가 된다.
실패가 있어도 거룩한 비전을 계속 품고 “비전은 반드시 이뤄진다.”라는 믿음만 잃지 않으면 그 실패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성도에게는 사실상 실패가 없다. 그저 또 하나의 좋은 경험을 한 것뿐이다. 즉 “이런 길로 가면 안 되는구나.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배운 것이다. 늘 거룩한 비전을 품고 하나님의 뜻과 일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헌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와 나의 자녀 중에 하나님의 크신 일을 감당하는 위대한 스룹바벨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
비전 건축을 주도하라
학개 2장 20-23절 / 이한규목사
< 스룹바벨에게 주신 말씀 >
학개를 통해 4번의 말씀을 주시며 성전건축을 독려했지만 성전건축 과정에서 여전히 어려운 문제들이 계속 터졌다. 그러자 성전건축을 주도했던 총독 스룹바벨에게 힘이 되는 말씀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학개가 넷째 말씀을 전한지 정확하게 2달 후인 주전 520년 11월 24일에 하루만에 8가지 환상을 스가랴에게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그 말씀이 학개 다음에 나오는 스가랴서 1-6장의 말씀이다.
그 환상 중에 다섯 번째 환상인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환상>이 있기 전에 천사가 스가랴를 깨워 질문했다. “스가랴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슥 4:2).” 그 질문은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고 문제를 보지 말고 약속을 바라보고 비참한 현실을 보지 말고 거룩한 비전을 바라보고 나의 무능함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나의 죄와 허물만 보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암시가 담긴 질문이다.
그때 갑자기 스가랴의 눈에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이 펼쳐졌다. 스가랴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천사가 환상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대신 이런 말씀을 스룹바벨에게 하셨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성전건축 문제로 힘들어하는 스룹바벨에게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안 되어도 성령이 함께 하시면 된다는 말씀을 전해주라는 뜻이다.
계속 스룹바벨에게 힘을 주는 말씀을 전해주셨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 4:7).” 아무리 큰 문제의 산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평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말씀은 동일하다. 큰 문제가 있을 때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고 비전을 새롭게 하라. 그러면 문제는 성공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고 하늘로 오르는 야곱의 사닥다리가 된다.
< 비전 건축을 주도하라 >
왜 하나님은 성전 건축의 귀한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는데 큰 산과 같은 문제를 주시는가? 그것은 “네 힘으로는 안 된다. 내 힘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문제가 생기면 신실한 성도들은 간절히 눈물로 기도한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지켜주세요.” 그러면서 문득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이런 기도하는 모습과 은혜에 굶주린 모습을 원하시는구나.” 그것이 바로 문제가 주어지는 이유다.
왜 어떤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인데도 잘 안 풀리는가? 그런 쉬운 문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라는 뜻이다. 반면에 어떤 일은 어려운 일인데 너무나 쉽게 잘 풀린다. 그때 하나님의 돕는 손길을 느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영이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삼손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때 엄청나게 큰일을 했다. 나귀 턱 뼈 하나로 1천명의 훈련된 대적을 죽였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잘리고 하나님의 영이 떠나자 두 눈이 뽑히고 초라한 종이 되어서 맷돌을 돌리게 되었다. 성도에게 가장 큰 불행은 영력과 영안과 영감을 잃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적인 힘과 능력이 있어도 성령이 떠나면 무력해지고 매력 없는 인생이 된다. 반면에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성령이 함께 하시면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능력 있고 매력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
천사는 큰 산이 평지가 될 때 스룹바벨 앞에서 그렇게 된다고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비전 건축에 주도적으로 나서는 스룹바벨의 꿈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 비전을 향해 나가는 길에 큰 문제의 산이 있어도 그 산들이 평지가 되면서 결국 비전을 이루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것이다. 나의 현재 위치에서 내게 주어진 비전 건축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결국 종말을 대비하는 최적의 삶이다.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 2장 18~23절 / 피종진목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복’을 주셨습니다(창 1:27,28). 오늘 본문 19절 하반절에도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그 대가를 거두지 못하고 엄청난 기근으로 인해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축복의 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에게 복을 주실까요?
첫째,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 2:19)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학 2:21)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학 2:23) 이 세 구절에 보면 “내가”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나옵니다. 여기에서 ‘내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만이 복을 주실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 복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 2:7). 또한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신 32:39).
둘째,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학2:17)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폭풍우로 치시고, 때로는 모든 식물에 곰팡이가 나게 하시며, 때로는 우박으로 쳐서 곡물이 상하게도 하셨는데, 그래도 저들이 깨닫지 못하고 심령이 완악해져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복을 주십니다. 호세아 6장 1절에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성전의 지대를 쌓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以前)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사 일 곧 여호와의 전(殿) 지대(地臺)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학 2:18) 곧 성전의 지대를 쌓는 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한 쪽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자고 하고, 한쪽에서는 성전을 아직 지을 때가 안 되었으니 성전을 짓지 말자고 하는 찬반으로 극과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한 번 계산해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한 번 그 때 일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대를 쌓는 날부터 복을 준다는 것입니다.
‘성전(聖殿)’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예배당, 즉 예배를 드리는 건물 예배당이 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이 곧 성전입니다(고전 3:16). 그러므로 전 지대를 쌓는다는 것은 보이는 예배당 성전을 건축하는 것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신앙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성전 지대를 쌓아나가야 합니다. 성도의 신앙이 자라갈 때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복을 받게 되고, 성전도 점점 확장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항상 인정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났을 땐 즉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가 되며, 신앙의 성전 지대를 쌓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다 받아 누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룹바벨의 꿈을 가지라
학개 2장 20-23절 / 이한규목사
< 비전을 세우고 헌신하라 >
주전 536년에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 가운데 성전 기초를 세웠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방해 공작 등의 문제로 성전 건축은 16년간 중단되면서 뜻 깊은 사람들은 좌절했고 백성들은 자기 집을 꾸미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성전 건축을 외면했다. 그 후 재해로 인해 농산물 수확이 줄어들자 백성들은 더 성전 건축에 나설 여유가 없다고 했다.
원칙적으로 경제가 힘들어서 거룩한 비전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비전을 외면해서 경제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거룩한 비전이란 명목을 내세워 무리하게 성전 건축을 추진하면 안 된다. 꼭 필요하면 교회 건축을 실용적으로 해야 하지만 인간적인 야망과 욕심에 따라 무리하게 교회 건축에 나서면 교회나 교인이 다 같이 어려워지고 전체 교회의 이미지에도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교회 건축보다 비전 건축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라. 하나님은 각 사람이나 각 교회마다 장점을 주셨다. 그 장점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성공에도 때가 있다. 성공에 집착해서 하나님의 때를 단축하려고 너무 서두르면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점차 장점도 잃고 길도 잃는다. 성공 세미나를 무분별하게 쫓아다니며 자기 특색을 잃기보다 자기 교회에 최적화된 비전을 세우고 그 비전을 위해 힘쓰면서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이 좋다.
사실상 교회 건축의 비전은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 최강의 비전이다. 교회 건축에 헌신하면 하나님의 집을 세운다는 뿌듯한 감격이 실감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리해서라도 교회 건축을 끝내면 1990년대까지는 거의 예외 없이 큰 성장이 뒤따랐다. 그래서 너도나도 무리하게 교회 건축에 나섰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면 내부적인 반발과 외부적인 비난이 더 거세게 일어난다. 또한 교회 건축 후에도 부흥은커녕 빚을 갚지 못해 교회 건물이 경매로 넘겨지는 파멸적이고 허탈한 상황도 생긴다.
옛날에는 교회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눈물로 호소하면 해결사 역할을 해주는 독지가 성도도 종종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일도 잘 생기지 않는다. 자기의 소중한 돈을 건물에 쓰기보다 선교와 구제에 쓰겠다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 건축의 비전이 최강의 비전 자리에서 밀려나면서 교인들이 구체적인 비전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자 헌신도 덩달아 약해지고 있다. 뜻 깊고 좋은 비전을 세우고 헌신하라. 각 교회가 자기만의 특징과 장점을 따라 거룩한 비전을 찾아 헌신해야 한국 교회도 살고 한국 경제도 살 것이다.
< 좋은 관심이 복을 부른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건축에 대한 열정이 약화되면서 경제도 악화될 때 성전 건축의 비전을 새롭게 일으키려고 나섰던 두 명의 선지자가 있었다. 그들은 학개와 스가랴다. 먼저 학개가 주전 520년인 다리오 왕 2년 6월 1일에 백성들의 무관심과 나태를 질책하는 첫째 말씀을 전했다. 그 질책으로 백성들이 각성해서 스룹바벨 총독을 중심으로 다시 성전 건축에 나섰다(학 1:15). 그러나 성전 건축 과정에서 백성들이 수시로 낙심했기에 학개는 첫째 말씀을 선포하고 50일 후인 7월 21일에 낙심한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는 둘째 말씀을 전하면서 성전 건축을 독려했다.
둘째 말씀을 듣고 백성들은 다시 힘을 얻고 성전 건축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비전도 더러운 손길에 의해 이뤄지면 안 되기에 하나님은 둘째 말씀 후 63일이 지난 9월 24일에 백성들에게 성결한 삶을 도전하는 셋째 말씀을 주면서 약속하셨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 2:19).” 그때 하나님은 성전 건축을 잘 끝내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지 않고 성결한 마음으로 성전 건축에 관심만 가져도 복을 주시겠다고 했다.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인가?
지금 한국 경제가 아주 어렵다. 빈익빈부익부가 심해지고 있다. 생산부터 판매까지 자동화시스템이 진행되면서 일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청년 실업도 큰 문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수록 더욱 깨끗한 마음으로 거룩한 비전 건축에 나서야 한다. 그 비전을 이루지 못해도 상관없다. 하나님은 깨끗한 마음으로 거룩한 비전에 관심만 가져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오늘부터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 찬란한 비전을 성취하지 못해도 괜찮다. 사람은 성취를 보지만 하나님은 성취 이전에 마음과 동기와 관심을 먼저 보신다.
초창기에 성전 건축에 나섰던 때를 기억하고 다시 성전 건축에 관심만 가져도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 후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주목하셨다. 바로 성전 건축을 진두지휘한 스룹바벨 충독이었다. 그에게도 축복의 말씀이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백성들에게 셋째 말씀을 주신 같은 날에 따로 그에게 넷째 말씀을 주셨다. 축복의 말씀을 전했다.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23절).”
하나님은 대적들의 모함 중에도 자기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성전 건축에 앞선 스룹바벨과 같은 헌신적인 성도를 축복하신다. 말라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은 그런 헌신적인 심령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게 주시는데 정말 그런지 지켜보라고 말씀했다(10절). 예수님도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 14:9).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쁘게 드리고 나누고 베풀면 어느 누구보다 복된 존재가 된다.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이 없는데 많이 얻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다. 드리고 나누고 베풀 줄 알아야 축복이 진짜 축복이 되고 영혼도 풍성해진다. 가끔 고독감과 허무감과 영적인 빈곤을 느끼면 “좋은 비전 동역자가 되라. 드나베의 삶을 실천하라.”라는 내적인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라. 지금 초라한 모습이라도 헌신을 각오하고 나서면 마음과 정신부터 가난과 억눌림에서 해방되면서 사는 길이 열리고 그 길은 점차 축복의 대로로 변할 것이다.
< 스룹바벨의 꿈을 가지라 >
하나님은 성도를 축복하실 때 여러 가지 형태로 축복하신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축복 중 하나가 스룹바벨처럼 거룩한 비전 건축에 헌신함으로 그에게 약속된 축복을 공유하는 것이다. 스룹바벨이란 이름의 뜻은 ‘바벨론에서 난 사람’이란 뜻이다. 그는 바벨론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지만 바벨론에서도 신실한 믿음과 충성으로 유다 총독이 되었고 사심 없이 헌신해서 결국 성전 건축의 비전을 멋지게 이뤄냈다.
스룹바벨의 꿈을 가지라. 자녀 중에 스룹바벨이 나오는 꿈을 꾸며 기도하라. 교인 중에도 스룹바벨이 나오는 꿈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고 기대하며 준비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면서도 겸손하게 하나님을 앞세우며 살고 선교와 구제를 위한 은밀한 큰 손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겠다는 꿈을 가지라.
꿈은 소중한 자산이다. 다른 것은 잃어도 찬란한 꿈만은 잃지 말라. 예배와 기도시간은 찬란한 꿈을 다듬고 격려하는 시간이다. 하나님도 나에 대한 꿈을 가지고 기대하심을 잊지 말라. 하나님은 꿈을 포기하지 않을 때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때로 문제와 환난이 닥쳐도 그것들을 꿈을 이루게 하는 재료로 여기라. 현재 상황이 힘들어도 하나님 안에서 꿈을 새롭게 하면 위기는 기회가 된다.
실패해도 거룩한 꿈을 계속 품고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라는 믿음만 잃지 않으면 그 실패는 헛된 것이 아니다. 성도에게 실패는 하나의 좋은 경험일 뿐이다. 즉 “이런 길로 가면 안 되는구나.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라고 하는 교훈을 준 경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스룹바벨의 꿈을 포기하지 말고 문제와 시련을 만나면 더욱 꿈을 새롭게 하고 뚜렷하게 하라.
천국 가기 전에 이 땅에서 소중한 일을 하나라도 구체적으로 이루겠다는 뚜렷한 꿈을 가지라. 언제 그 꿈을 이루게 될지 몰라도 나의 피와 땀과 정성이 담긴 거룩한 열매를 남기고 천국에 가겠다는 꿈만은 포기하지 말라. 늘 거룩한 꿈을 품고 하나님의 뜻과 일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헌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나와 나의 가정과 나의 교회 중에 하나님의 크신 일을 감당하는 위대한 스룹바벨이 생겨날 것이다.
<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라 >
학개를 통해 4번의 말씀을 주시며 성전 건축을 독려했어도 그 과정에서 여전히 어려운 문제들이 계속 터졌다. 그러자 스룹바벨에게 힘이 되는 말씀이 더 필요했기에 하나님은 학개가 넷째 말씀을 전한지 정확하게 2달 후인 주전 520년 11월 24일 하루에 8가지 환상을 스가랴에게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 4:6-7).”
왜 하나님은 성전 건축이런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는데 큰 산과 같은 문제를 허락하시는가? “네 힘만으로는 안 되고 내 힘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려는 뜻이다. 문제가 생기면 성도들은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지켜주세요.” 그때 문득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하는 모습과 은혜에 굶주린 모습을 원하시는구나.’ 그것이 바로 문제가 주어지는 이유다.
왜 어떤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 같은데 잘 안 풀리는가? 그런 쉬운 문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라는 뜻이다. 반면에 어떤 문제는 아주 어려운 문제 같은데 너무나 쉽게 풀린다. 그때 하나님의 돕는 손길을 느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리 힘과 능력이 있어도 성령님이 떠나면 무력해지고 매력 없게 된다. 반면에 아무리 연약해도 성령님이 함께 하면 한 시대를 이끄는 능력 있고 매력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
천사는 큰 산이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된다고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비전 건축을 주도하는 스룹바벨처럼 되는 것이다. 이제 수시로 기도하라. “하나님! 제가 복음 한류의 역사를 이루는 데 멋지게 일조하는 인물이 되게 하소서. 선교사들의 선교를 말씀으로 돕는 <월새기 영어판> 발행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마음도 주소서.” 그런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면 가는 길에 큰 문제의 산이 있어도 그 산들이 평지가 되면서 결국 그 비전이 이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