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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26 - 유대 반란을 진압하고 빚더미 제국 로마 황제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7권을 “악명높은 황제들” 이라며, 티베리우스 - 칼리굴라 -
클라우디우스 - 네로 황제의 4부로 적었으며..... 그리고 8권은 “위기와 극복”
이라 한후 30년 역사를 갈바 - 오토 - 비텔리우스 -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순으로 적었습니다.
네로 황제 치세인 68년에 갈리아에서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네로의 명을 라인강 군단의 루푸스가 반란을
진압했지만 로마군은 더는 네로를 따를 생각이 없었으니 히스파니아에서 오토와 갈바등이
반란을 일으켜 갈바가 황제로 추대되자 원로원이 추인하고 근위대도 돌아서니 68년 6월 9일 네로는 자결합니다.
다음해 69년은 “네 황제의 해” 라고 불리니..... 갈바가 무능하자 오토가 반란을 일으켜 두 번째 황제가
되었는데, 이에 라인강 군단들이 자기 사령관인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니 오토의
군대와 도나우군단이 막을려고 했지만 패해 비텔리우스가 3번째 활제에 올랐는데
그는 먹는데에 광분해 돈을 탕진하니 시리아 속주 총독 베스파시아누스가 4번째로 황제에 추대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 남부 브린디시에 도착한건 70년 8월로 그가
시리아 총독으로 유대전쟁을 진압했기 때문에 5년간 못본 아들 도미티아누스가 19세 청년으로 맞이했는데...
물론 군대를 이끌고 먼저 로마로 간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 한테서는 보고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69년 7월에 동방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이후 원로원에서는 1월 1일
“제1인자” 로 승인받았음에도 귀국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는 아들
티투스가 지휘한 예루살렘 함락을 기다려 개선장군으로 로마에 입성하고 싶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네로 황제는 66년 가을 올림피아, 코린토스, 델포이등 그리스를 여행하던 중에에 유대인
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헤롯 왕이 죽은 뒤 유대 속주는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았으며, 북부 지방은 따로 헤롯왕의 손자인 아그리파 2세가 자치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을 급습하니 66년 6월 로마 수비대는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말에
항복했지만 모두 학살당했으며 시리아 속주의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예루살렘에 입성
했으나 신전 언덕을 공략하는데 실패하고 11월 안티오키아에 있는 총독 관저로 돌아왔고 병으로 죽었습니다.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반란을 진압하게 했는데, 5군단, 10군단, 15군단에 유대 북동부의 로마
동맹인 아그리파 2세와 나바테아와 아라비아 병사들도 포함되어 3만이니, 67년 7월 베스파시아누스
는 갈릴리의 요타파타 요새를 함락했으며 68년까지 북부 유대지방의 반란이 진압되고, 여름에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동쪽과 서쪽, 북쪽에서 포위했는데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유대 전쟁은 1년여 중단됩니다.
유대쪽에서는 유월절이 다가오자 "전투가 벌어질 테니까 예루살렘에 오지 말라" 고 말리지 않았으며.....
'유일신' 여호와가 지켜주는 예루살렘이 '이교도' 로마인의 손에 떨어질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고 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동방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69년 7월에 예루살렘 공략은 재개되는데, 시리아총독
무키아누스는 로마로 가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대기했으며, 유대
전쟁의 지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맡고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가 도왔습니다.
기존의 3개 군단에 유대인들에게 패했던 제12군단 그리고 아그리파 2세도 참전했는데, 예루살렘의 열심당
은 '결사항전' 을 외치니 내전이 반란군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열심당과 시카리오이들은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을 암살하였고 대부분의 반란군 지도자들이 로마인의 손이 아니라 유대인의 손에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사방을 둘러싼 높은 벼랑 위에 서있는 천연의 요새이고, 이중 삼중으로 겹쳐진 성벽 곳곳에 높은 탑과
튼튼한 돌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우뚝 솟아 있으며 예루살렘 성전도 이중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로마군은 공격에 앞서 '숫양(아리에스, 공성무기인 추)' 이 성벽과 부딪치기 전에 항복한 자는 용서하겠다고
했지만 유대인들은 듣지 않았으며,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 공략을 지휘했고
로마군은 예루살렘 공략을 위해 영구진지를 도시 주위에 구축하고 성벽 높이의 벽을 쌓고 참호를 팠습니다.
도시 안에서는 평화협상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고 결사항전 의지를 드높이기 위해 식량을 불태웠는데 그로
인해 도시 거주인과 군인들이 굶어죽었고, 심지어 누구든지 도시를 탈출하려고 하면 붙잡아
십자가형에 처했는데 공성전이 끝날때까지 만명이 도시 주위를 둘러싸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습니다.
70년 8월 10일 예루살렘 성전이 성 안으로 돌입한 로마군에 의해 불탔으며, 9월 8일 시내에서
저항도 수그러들고 20일에 저항은 끝났으며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고 유대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도 철저히 약탈당합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방전때 270만명(?) 에 달하는 사람이 있었다지만, 포로로 잡힌 유대인의 수는 유대
전쟁 전 기간에 9만 7천명이었고, 예루살렘 공방전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11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로마에 서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성전에서 메노라와 같은 성물을 약탈하는 로마군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도 예루살렘 서남쪽 30 km 헤로디온과 사해 동쪽 마카이로스, 그리고 서쪽 마사다 세
요새에서 급진파가 항전하고 있었지만, 예루살렘 함락으로 유대 반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티투스는
예루살렘 공략전에 참가했던 군단 가운데 3게 군단을 시리아와 도나우 강 연안의 원래 주둔지로 돌려 보냅니다.
71년 티투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루실리우스 바수스가 사후수습을 했으니 남은 유대 저항군의 요새를 점령하고
사해까지 진출했으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병사하고 후임으로 플라비우스 실바가 부임했는데,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끝까지 농성하던 이들이 거의 다 자살함으로써 요새가 함락되고 유대 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시작된 로마 유대에 대한 관용 노선은 이때를 전후해 크게 바뀌니... 예루살렘에서 잡힌
포로 가운데 로마에서 열릴 개선식을 위해 젊고 잘생긴 남자만 남기고 17세 이상의 남자 포로 가운데 일부는
이집트로 보내 노역에 종사하게 되고, 나머지는 노예로 속주에 선물이나 검투사가 되거나 야수 먹이가 되었습니다.
16세 이하의 남녀는 병사들에게 전리품으로 분배되었으며 예루살렘에만 존재했던 대제사장
제도도 폐지되고, 유대인들의 자치 의회인 산헤드린의회도 폐지되었르며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에 1개 군단과 보조병을 합쳐 1만명 병력이 상주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뒤 성전 중심의 사두가이파는 몰락했으며, 유대인들이 해마다 2드라크마씩 성전에
바치던 봉납금은 유대인에게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 의무적으로 부과한다는 '유대인세' 의 이름으로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으로 보내졌고..... 로마가 점령한 유대 에 대한 통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대 북동부: 그 전대로 유대 왕가의 아그리파 2세가 통치(유대인 자치구) 하고 유대 서부의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항구 도시에서 로마는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 사이의 중재자로서만 역할을 한다.
예루살렘 및 내륙은 유대 속주 총독이 파견되어 다스리는데, 반항하지 않은 해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에게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으며, 마사다 요새가 함락된 기원후 73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사이에 위치한 얌니아라는 도시에 유대문화 연구소(랍비 학원) 의 설립을 허가합니다.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계 주민들이 도시의 야외극장을 방문한 티투스에게 유대계 주민들을
안티오키아에서 추방해줄 것을 진정했지만 티투스는 허락하지 않았고, 로마에서
유대계 주민들의 권리를 새겨놓은 청동판을 철거해달라는 요청도 티투스는 거절했다고 합니다.
비텔리우스가 반란으로 처형된후 로마 제국의 제 9대 황제에 오른건 베스파시아누스인데, 네로 황제
사후 벌어진 내전인 “네 황제의 해” 의 최후의 승자였고, 두번째 세습 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건자로 오늘날 콜로세움으로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건설을 명령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치스러운 네로 황제와 식탐이 유명한 베텔리우스 황제가 엄청난 낭비로 국고를 탕진해 버린 탓에 제국은
재정과 민생이 파탄지경인지라, 베스파시아누스는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돈에 신경을 썼으니
"짠돌이", "인색한 구두쇠" 같은 욕을 먹으면서 속주세를 대폭 인상하고, 이탈리아와 로마
공중 화장실에 오줌세 같은 세금까지 신설했는데 세금을 늘릴지언정 화폐 평가절하는 하지 않았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AD 9년 이탈리아 레아테 근교의 팔라크리나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기사
계급(부유층) 출신이지만 가업은 징세와 경매, 고리대금업이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사채,
추심, 압류를 전문으로 하는 제3 금융권인 셈이라 돈은 많았지만 사회적 평판이 굉장히 나빴습니다.
조부 티투스 플라비우스 페트로는 경매업자였고 부친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는 세금 징수원을 지내다 고리
대금업자를 한 세리업자 집안이었으니, 베스파시아누스와 형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성공은 부유층 사이에
존경받지 못한 가문이 개인 능력과 훌륭한 인품, 성실성만으로 편견을 깬 것으로 평가받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플라비우스 가문은 '금발머리' 에서 유래한 평민이니, 속된 말로 "어디서 굴러먹다가 급부상한 집안" 으로 평가
받았으니 수에토니우스의 표현레, 로마인에게 있어 생소한 무명의 가문에 불과했다고 하며 세간의 평가
처럼 티베리우스 황제와 가이우스 황제 이전은 가문의 일원중 단 한명의 공직자도 배출하지 못한 성씨 입니다.
조부 티투스 페트로는 레아테 시민으로 공화정 말기 내전시 폼페이우스군에서 백인대장으로 복무했다고
하지만 수에토니우스는 조사결과, 백인대장이 아닌 자원 보충병이었다고 하며 파르살루스 전투후
카이사르의 관용으로 특별사면을 받아 명예제대 형식으로 목숨을 건져 고향에 돌아갔으며 코사 출신
테르툴라라는 부유한 집안 여성과 결혼해 사비니에서 멸시받는 세금징수원과 경매업에 종사했습니다.
아버지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대를 이어 세금징수원의 길을 걸었는데, 양심적이고 정직한 세리였으니,
아시아 속주에서 세금징수원을 거쳐 세관 감독까지 지냈고 퇴직한후 라이티아 속주에서
고리대금업에 종사했는데 사기를 쳐서 세금을 가로채거나 고리대를 덧붙이는 악행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시아 속주에서 사비누스의 정직함과 성실성을 평가한 시민들이 "정직한 세리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란
동상도 만들어줬고, 헬베티족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며 세무사 노릇을 했으며 "더러운 일", "비열하고
추접한 일" 로 비난받는 직업을 거쳤음에도 자신의 가문과 자녀들이 훌륭하고 존경받는 직업을 갖길 원했습니다.
자신보다 신분이 훌륭한 누르시아의 명문가 처녀와 결혼했으니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어머니 베스파시아 폴라
였는데, 아버지 베스파시우스 폴리오는 군단 대대장을 3번 지내고, 로마군 병영 행정책임자까지 지낸 '존경
받는' 기사계급 출신 관료였으며 베스파시아누스 부친 사비누스는 헬베티족 땅 갈리아에서 근무중 객사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조부, 부친이 돈과 관련된 일에 종사한 까닭에 재무와 관련된 직무 이해도가 높았고, 성격이
꼼꼼해서 복무지 크레타섬과 키레네에서 공적 경험을 쌓았으며 39년 조영관(안찰관)을 지냈으니 재무와
군무 모두 뛰어난 능력을 선보였다는데 원로원은 가문이 이름없고 세리업에 종사한걸 좋지않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추천을 통해 출마한 안찰관 선거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는데, 원로원과 가이우스 황제는 끝없는
견제로 알력다툼이 일었고, 칼리굴라는 황제권 강화와 원로원 견제를 위해 측근세력을
키우기 시작한터라, 베스파시아누스는 재능을 눈여겨 본 젊은 황제의 추천아래 출세하기 시작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에 온후, 공개석상에서 "가이우스 황제의 게르마니아 원정을 기념하고 그의 승리를
위한 기념일은 당연하다" 고 대놓고 언급할 정도로 황제를 적극 지지했으며
칼리굴라를 향한 충성심은 끝이 없었는데 그럴수록 가이우스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좋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법무관이 끝난 직후인 41년 1월, 베스파시아누스를 총애한 칼리굴라가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그를 따르는 20여명에게 암살됐으며 이후 근위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칼리굴라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가 옹립돼 황제에 올랐습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원로원 회의 중 "억울하게 살해당한 가이우스 황제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 며 그 충정을 드러냈고, 원로원이나 암살범들이 시해당한 황제의 유해에 해를
가하면 안되며 이를 시도하는 것은 반역 중의 반역이라고 주장하면서 법령 제정까지 건의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발언을 할 당시 원로원은 공화정 복귀 선언 논의를 하고 있었고, 신참자에 불과한 그가 회의중
이런 발언을 한 것은 보통 배짱이 아니라면 하기 힘든 발언이었는데, 황숙 클라우디우스가 클레멘스를 위시한
근위대 지지 아래 즉위했고 24시간도 되지않아 혼란을 수습하고 근위대를 완벽히 장악한후 원로원에 출석합니다.
이 사건으로 베스파시아누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로 부터 가이우스 황제의 측근
이며 친황제파로 눈도장을 찍게 되었고, 갓 즉위한 클라우디우스의 해방노예 참모 3인방 중에 한명인
나르키수스와 클라우디우스 어머니 소 안토니아의 신임받는 해방 노예 여성 카이니스의 천거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실의 적극적 추천아래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게르마니아에
주둔중인 제2군단의 군단장에 임명됐으며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실의 해방 노예 카이니스와 인연을 맺어 카이니스가 죽을 때 까지 사실상 부부로 지냈습니다.
그는 네로 시대에도 승승장구하다가 잠깐 위기의 순간도 있었으니.... 시 낭송회에 직접 출연한 네로
황제가 시를 읊는 도중에 졸아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네로의 진노를 사서
처형될뻔 했지만 목숨을 겨우 건진채 섬으로 유배됐으며 그는 유배지에서 양봉으로 소일
하기도 했는데 이 사건 외에는 네로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은 탓에 유배에서 풀려난후 재등용 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살 강요까지 받을수 있었던 위기를 구해준 사람은 페트로니우스로 네로에게 "오르페우스는
하프 연주로 케르베로스를 잠들게 했는데, 폐하는 시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잠들게 했으니 오르페우스의 업적과
맞먹는 것입니다" 라 야유가 섞인 칭찬으로 달래면서 네로의 분노를 풀어 목숨을 부지할수 있게해 주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위전 트라키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 이집트에 파견돼
공적을 쌓으면서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신임 아래 군부에 남아있었는데, 네로 치세 말기에 유대에서
종교적 민족주의세력 열심당에 의해 발생한 유대 독립전쟁이 커지면서 코르불로 휘하 시리아속주로 파견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반란을 평정할 지휘관으로 임명을 받고 지략과 용맹성으로 유대 북부 갈릴레아
지역을 점령하고 요셉이라는 유대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으니, 후에 로마로 들어가 시민권을
얻게되는 요셉, 즉 로마인으로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로마와 유대 간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공존을 모색하게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도움으로 유대를 무리없이 통치합니다.
유대반란을 진압하던중 내란이 일어나 네로가 자결하자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와 로마의 동방 관리들, 동맹국 국왕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또한 비텔리우스에게 쌓인
원한을 풀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한 도나우 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로마에 입성해 비텔리우스를 죽이고 로마를 평정해 베스파시아누스는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합니다.
이른바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인데.... 그를 지지하는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리치니우스 무키아누스
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는데, 라에티아와 모시아 지방의 다누비아 군단도 8월에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받들게 되며 3세 갈리카, 8세 아우구스타, 7세 클라우디아
군단은 오토 황제가 베드리아쿰 첫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머지 2개 군단 갈비아나 7세와 제미나를 설득하여 합류시켰는데, 제미나는 제1 베드리아쿰
에서 패배한 군단중 하나였던 만큼 더욱 쉬웠으니 벨렌스와 카에치나를 위한 원형경기장을
만드는데 동원중이었고, 7세 갈비아나 군단의 지휘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로마로 진군했는데 행군 거리가 짧아 무키아누스의 군대보다 먼저 이탈리아에 도착합니다.
비텔리우스는 안토니우스 7군단의 접근 소식을 듣고 카에치나를 지휘관으로 강력한 군단을
파견했는데... 안토니우스 군단이 먼저 베로나에 도착한지라 병력이 적으니
나머지 군단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공격하라고 재촉했지만 카에치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카에치나는 라벤나의 로마 함대인 클래시스 라베나스의 사령관 젝투스 루실리우스 바수스와 함께
베스파시아누스로 지지 전환을 꾀하고 있었던지라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그의 군대는 지휘를
따르지 않고 그를 체포해 쇠사슬에 묶었으며 병으로 지체되었던 발렌스는 로마를 늦게 출발했습니다.
장군이 없는 카에치나의 군대는 크레모나로 진격했는데 안토니우스는 베드리아쿰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기병대를 거느리고 크레모나를 향해 진격했으니 10월 24일 베드리아쿰과 크레모나 사이에서
비텔리우스 군대 선봉대와 맞닥뜨렸고 전투가 이어지니 안토니우스는 베드리아쿰으로 증원했고,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자 비텔리우스 군대는 크레모나 외곽으로 후퇴합니다.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비아 포스투미아를 따라 크레모나 쪽으로 진격했으니 그들은 레지옹 4세
마케도니카 등 다른 군단으로 보강된 막강한 비텔리안 군대의 저항에 부딪혔지만,
발렌스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여전히 지휘관이 없었던지라 밤이 되어서도 전투는 계속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7세 갈비아나 군단은 큰 인명피해를 입고 독수리 깃발을 잃었지만 결국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동이 트면서 전환점이 찾아왔으니 다누비아의 갈리카 3세 군단이 도착한 것으로 원군에 사기가 올라
환호성을 지르니 비텔리우스황제 군대는 시리아에서 온 지원군을 맞이하고 있다고 오해 해서 용기를 잃습니다.
비텔리우스군은 안토니우스의 군대 공격에 후퇴했고 안토니우스는 항복한 크레모나를 공격했는데 안토니우스
는 크레모나 사람들을 노예로 잡는 것을 금지한후, 로마로 계속 행군했고 비텔리우스는
포로로 잡혀 살해되었으며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피비린내 나는 위기의 해 말기에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에, “네 황제의 해”라고 불리는 네로 후기와 세 황제의
난립기로 인한 혼란과 국가 위신의 회복을 위해 진력하였으니..... 최대한 보복을
줄이는 방법으로 네로 자결 이후 터진 내전 치유와 제국 안정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텔리우스파의 난동으로 불타버린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복구하고 방만한 재정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국유지 재측량 작업으로 상당한 국고수입 증대를 이뤘으며 이러한
재정수입 증대 덕에 아들들 대까지 콜로세움과 같은 공공 건축 사업을 원활히 추진할수 있게 됩니다.
공중변소 오줌에 세금을 물렸는데 오줌 누려면 돈 내고 누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줌을
수거해 표백이나 세탁에 쓰는 업자들에게 사용료를 내라는 의미니 아들 티투스가
불만을 제기하자 금화를 보여주며 '배뇨세금으로 만든 금화에 냄새가 나냐?' 라고
한마디 했고 '돈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Pecunia non olet)' 는 명언이 탄생했다고 합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베스파시아노' 라 하면 '공중 화장실' 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실제로 이탈리아어 사전에 vespasiano 라고 찾아보면 '(남자용) 공중변소' 라고 나옵니다.
즉위에 도움을 준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도나우 군단장 프리무스를 반강제로 퇴역시키거나 정치공작을
통해 묘한 분위기를 조성해 은퇴시켰는데, 이들은 무력을 보유하고 비텔리우스와의 내전을 대신
치러줬기 때문에 그대로 둘 경우 권신이 될 우려가 높아 숙청은 불가피했고, 다른 황제 같으면
죽였을 것을 명예롭게 은퇴하는 식으로 추방한 것은 잘했다는 평가 받으니“토사구팽 (兎死拘彭)” 이라?
창업공신은 제위를 찬탈할 위험이 있는지라 한나라 고조나 명나라 주원장에 조선의 태종은 잔인하게 죽였으며,
반대로 후한의 광무제 유수와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이들에게 눈치를 주어 은퇴시키면서 지방에 광대한
토지와 호화로운 대저택에 미녀 여러명과 재산을 하사했는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중간쯤 되나 봅니다?
이 숙청 작업은 근위대장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의 장남 티투스가 담당했는데, 티투스가 즉위하기 전까지 인기가
없게 된 원인이 됐으며, 티투스 즉위후 보복이 줄었다고 해도 후일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도미티아누스 시대가 되면 황제가 앞장서서 작업을 하면서 원로원과 황제 사이에 힘 대결 양상으로 확전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장남 티투스를 앞세워, 본인은 관용을 베푸는 식으로 인기를 얻고 뒤로는
계속되는 명문 귀족 숙청 및 추방으로 권력 강화에 매진하며 내전 수습에 매진하는데,
이런 비열한 정적 숙청 방법은 짧게보면 기사계급 출신 신흥황제 가문의
권력기반 안정에는 도움이 됐음에도 결과론적으로는 플라비우스 왕조의 종말로 연결됩니다.
서방에 이어 동방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즉위후, 후임으로 유대 전쟁을 총괄한
장남 티투스의 손에서 마무리되어 갔으니.... 로마군을 이끌던 티투스는
유대 반란군을 거세게 밀어붙였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유대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이 전쟁은 유대인들이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양측 모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학살이 자행되었고, 포로로 잡힌 유대인들은 처형되거나 로마로 끌려갔는데,
로마에 저항한 본보기로 예루살렘 신전 등이 모두 약탈되고 생존자들은 노예로 팔렸습니다.
69년 황제로 공표될 당시, 그는 두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직위를 내리는 제위계승
법을 만들면서, 원로원 존중 태도를 보여주고 애매모호한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 직위를
명확히 규정했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카피톨리누스 신전 내에 동판으로 법령을 새긴뒤 설치합니다.
동판에는 명문으로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계보와 정통성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로 말한 뒤 브리타니쿠스를 그 마지막 직계로 언급하고
공적으로 탄핵된 네로를 제외하면서, 플라비우스 가의 정통성이 클라우디우스에서 나왔다고 명기했습니다.
원로원을 약화시킨 베스파시아누스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처럼 행정부를 강화시켜나갔으니 클라우디우스
와 네로 시대 관료층을 차지하던 해방노예 출신들을 밀어내고 기사계급으로 채워넣는 조치
이기도 했으며 근위대장과 근위대 힘을 통해 정적을 솎아냈는데, 중책을 맡게 된 이는 후계자 티투스 였습니다.
세수의 기본이 되는 인구, 재산 조사를 실시하면서 관료들의 부패와 뇌물 수수, 횡령을 적극 색출해
관용을 베풀지 않았고 공공지출을 대폭 삭감했는데, 하지만 속주에는 새로 만든
세금을 적극적으로 부과했으니, 속주세를 최대 2배나 인상하여 재정이 나아질 때까지 유지한 것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야전사령관, 임페라토르 자리에서 경험한걸 토대로 로마군내 속주 병력의 역할을 개혁해야
된다고 판단했으니, 로마군 중 국경지대 일부 부대들에서 벌어진 군단병, 보조병 모집 관행을 폐지
하고, 동족주의 경향이 강한 레누스, 다누비우스 일대는 본국 출신 이탈리아 혈통 장교들을 대거 배치했습니다.
69년 네로의 몰락 이후 이를 심화시킨 속주총독, 야전사령관들의 군단 장악과 반란 위험성을 최소화
시키는데 주력했으니, 사령관들을 소환하거나 은퇴를 유도해 숙청시키는 극단적 방법이
아닌, 갈수록 정밀화되는 서방 외적들을 막기 위한 전략적 판단에 맞춰 국방강화 정책으로 진행됐습니다.
아울러 로마군의 골머리를 앓게 만든 정규 군단병 모집 대상 문제도 발빠르게 해결했으니, 로마와 이탈리아
내 본국 청년들은 클라우디우스 시대부터 높아진 교육 수준과 경제 향상, 복무지
환경 등을 이유로, 속주 군단에 지원하기 보다는 프라이토리아니(근위병)에 지원하는 경향이 늘어났습니다.
따라서 네로 치세 후반부터는 본국 출신 이탈리아인들의 속주 군단 입대 비율은 뚜렷하게
하락세를 타게 되는데,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는 서방
내 갈리아, 히스파니아 출신자들도 로마 정규군 모집 대상으로 입대할 수 있게 만들어줬습니다.
이는 오래전 로마령에 편입된 역사에도, 동방 내 그리스와 소아시아 일대에 비해 은근히 차별대우를
받는다고 느낀 소외된 민심을 다독이는 또 다른 조치이기도 했으며, 또 곡창지대인데다가
백여년간의 평화로 인구가 늘고, 로마 시민권자 비율이 높았던 현실까지 감안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갈리아 남부를 시작으로 갈리아 서부와 히스파니아까지 라틴 권리를 새롭게 부여했는데, 네로
시대에 이르러 나타난 불만을 다독이는 조치이기도 했으니, 즉,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출신 기사계급들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고, 귀족반열에 올려주는
조치처럼 라틴 권리 부여는 이런 측면까지 고려해 본국과 속주 간의 연계성을 강화하게 됩니다.
베스파시아누스 치세 말에 이르게 되면, 이탈리아 동쪽의 달마티아 일대에도 라틴 권리를 부여됐고 확대됐으며,
라틴 권리가 부여된 속주들은 항구적인 로마시민권자 병력 자원과 세금 징수대상 확대 효과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 성공의 과실을 얻을수 있었기 때문에, 네르바- 안토니누스 왕조(5현제) 시대의 번영에 큰 힘이 됩니다.
79년 봄 베스파시아누스는 고된 직무를 지속하다가 캄파니아를 순시하던 도중에 열병에 걸려
쓰러져 병세가 갈수록 악화되었고 눈을 감았으니 나이 69세였는데, 그가 쓰러질
당시 후계자 문제는 해결된 상태였기에..... 이름이 똑같은 장남 티투스가 이어 받았습니다.
평소 촌철살인 농담을 즐기던 황제답게 임종 직전에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는데 ...
"여보게, 내가 신이 되어가고 있는 거 같아." 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았는데,
우리가 알고있는 고대 로마 황제들은 대부분 사후에 신으로 추앙되었는데,
예외는 내전에서 패한 이들이거나 원로원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은 이들 정도입니다.
"고맙구나, 아들아. 네가 반기를 들지않고 나를 제위에 머물게 해주니." 베스파시아누스는 생애
첫 개선식 중 개선 행렬이 오래 계속되면서 주변이 지루해하자, 다음과 같이 농담을
하면서 모두 웃게 만들었습니다. "다 늙어빠져서 개선식을 원했으니 이래도 싸지. 당연한 거 아닌가?"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머 뿐아니라 촌철살인 경구를 날리는데도 능한 사람이었으니, 제정 철폐와
공화정 복고를 주장하는 민주주의파 그리스 철학자들이 면전에서 계속
황제는 폭군이며 독재자라고 욕하자 더 이상 참을수 없었는지, "나는
짖는다는 이유로 개를 죽이지는 않소" 라고 쏘아붙였고 그리스 철학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주류 그리스 철학자들은 스스로 '개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천명한
디오게네스 이래 개 처럼 가진 것 없이 세상에 냉소적인 삶을 산다고 자인하는
일명 '견유학파' 였는데, 그 시점에서의 공화정 복고론은 잃을게 많아서
진짜 개처럼 물지도 못하는 반쪽짜리들이 짖어대는 '개똥철학 '일 뿐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인, 유대 반란 당시 벤 자카이란 이름의 랍비는 베스파시아누스
를 찾아와 황제가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작은 학교라도 좋으니 이를 세우고 파괴하지
말아달라" 고 간청했는데, 베스파시아누스가 즉위한뒤 예루살렘 전체를 파괴하되
벤 자카이와의 약속대로 학교는 남겨두어 유대인들의 전통과 지식을 지켜나갔다는 내용입니다.
유대인에 교육이 중요하다는 의미인데 벤 자카이는 성을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관에 숨어 나왔는데, 강경파는 관을 들춰서 칼로 찔러보려 했으나 차마 랍비의 시신을
모욕할순 없다며 그냥 보내줬고, 로마군의 경우 실제로 칼로 찔러보려 했으나 관을 가지고 온
제자들이 '당신들의 황제께서 돌아가셔도 이런짓을 할 거요?' 라고 반대해 무사히 통과했다고 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지방을 방문했는데, 아부하고 싶었던 지방관이 막대한 공금을 들여 자기
상을 세우겠다고 터를 잡아달라고 하자 프로젝트를 당장 진행하라고 한
다음 손바닥을 내밀면서 "내 상을 세울 터는 여기다 잡으면 되네." 아첨하는데
공금 쓸 바에야 그 돈 나에게 줘라고 한 것이니 훗날 이 희극이 로마 시내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지출을 아까워했는지, 황제 체면상 한턱 내려고 지갑을 열 때마다 꼭 우거지상을 하고 "이 몸이
쏘는 거야?" 라고 생색을 내는 버릇이 있어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으니, 디오 카시우스는 '그가 돈을
얻기 위해 남을 죽인 적은 없지만, 돈을 받는 대가로 남을 살려 준 적은 많다' 는 미묘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네로가 와인을 홀짝거리면서 오페라 관람을 하는 속물이라면, 베스파시아누스는 맥주를
들이키면서 축구 경기를 보는 서민적 남성이라 평가되니 점잔빼면서 고상한 취향을
가장하는 네로의 시를 듣다가 졸아버린다든가 재위 중에 축구장만 한 콜로세움
을 착공한다든가 한 것을 보면 본인 스스로가 서민적인 취향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황제들은 돈이 궁하면 재정 마련 수단으로 정적을 역적으로 몰아 죽여서 재산을 몰수하는 악랄한
일석이조의 행동을 종종 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일절 하지않아 칭찬을 듣는데, 대신 재정적자
해결 수단으로 온갖 간접세를 붙였던지라 이런 그의 행동은 "지나치게 돈을 밝힌다" 고 비판 받습니다.
사후에 베스파시아누스를 풍자하는 희곡이 상연되었는데, 황제 장례비로 1천만 세스테르티우스
가 들어갔다고 하자 죽은 베스파시아누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차라리
그 중 1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나한테 주고 내 몸은 테베레 강에 던져버리지 그랬어!"
라고 절규하는 내용인데, 죽은자의 시신을 테베레 강에 버린다는 건 부관참시를 의미합니다.
황제 티투스는 이 희곡 상연에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는데, 베스파시아누스가 돈에 집착했던 것이
물욕이 많아서가 아니라 국가 재정을 복구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건 당시 로마인들이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풍자가 플라비우스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문자 옥처럼 옛날 책에 나온 사소한 글귀 하나를 과대해석해 후손을 멸족시키는 등 피바람을 일으킨
권력자가 동서고금 통틀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하면 베스파시아누스나 티투스의 관용과
자제심을 낮게 평가할 이유도 없을 것이며 특히 티투스는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유명한 황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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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심잡고
여행을 하며 알게 되었다.
사랑이란
함께 있는 동안
서로를 외롭지 않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