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국이 설립된 후, 왕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랫동안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 지방에서 뭉개고 있으면서 사람 빡치게 만든 오스트리아를 경쟁국으로 설정한 것이다.
한편 이탈리아 왕국이 설립되자 간덩이가 부어진 왕은 멸망한 로마 제국의 복원을 외치는 목소리가 나왔다. 물론 아직 이탈리아 권역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는 주제에 로마 제국을 만들겠다고 떠벌리는 순간 신롬 캐리어를 앞세운 전 유럽이 이탈리아를 다구리 칠 것이 뻔할 뻔자였기에 그런 마음은 속으로 삭혀야 했다.
사실 이탈리아로서는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바르바리 해적. 중세 시기부터 북아프리카 와 지중해 섬들을 근거지로 하여 기독교인들을 잡아 노약자는 죽이고 남자는 노예로, 여자는 첩 등 성노예로 팔아넘기는 천인공노할 이슬람 해적들. 수세기동안 아라곤 왕국의 골치거리였다. 이들을 토벌하지 않으면 지중해 패자로서의 면모가 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을 치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얄밉게도, 이들은 필요하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신하를 칭하는 대가로 그들의 지원을 받았고, 그랬기에 이들은 강성했다. 또한 모로코 왕국과 튀니스 왕국은 필요하면 이들을 사략 해적화해서 기독교인들을 약탈해댔으니... 이제 이탈리아 왕국은 칼을 뽑아들 때가 되었다.
1620년 8월 1일.
이탈리아 왕국과 그 패밀리들의 모로코 정벌이 시작되었다. 해적들의 본거지인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따버리고 북아프리카 확장을 하겠다는 왕의 의지가 보였다.
통일된 이탈리아 군과 이베리아 연합군의 기세는 참으로 무서웠다. 모로코 군은 버티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바르바리 해적의 배후들이 연합을 해버리는 바람에(특히 오스만) 정벌 자체는 난항을 겪었다. 17세기 당시의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를 달리는 강성대국이었으니.
그래도 리구리아 해전에서 아라곤 패밀리와 프랑스 해군 연합이 오스만 해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 승기를 잡는데 성공했다.
분위기를 일신시키기 위해, 왕은 정부를 제국으로 높였다. 페란 4세는 이렇게 외쳤다.
"신성하지도, 로마에 있지도 않는 놈들도 잘만 황제로 자청하는데, 이슬람과 성전을 치르는 신성한 우리 이탈리아가, 로마에 수도를 둔 우리 이탈리아가 황제를 칭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페란 4세는 교황을 잘 설득하여 중세 롬바르디아 왕국~이탈리아 왕국의 왕들이 대관식에서 썼던 롬바르디아 철관(Corona Ferrea di Lombardia)를 한 층 더 꾸민 황제의 관을 쓰는 방식으로 대관식을 진행시켰다. 이는 이탈리아가 지중해 세계의 주도권을 잡는다는 상징이었으며, 더 나아가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왕국의 것이니 남들이 침흘리지 말라는 무언의 암시기도 했다.
물론 겉으로는 "이슬람을 상대로 성전을 치르고 가톨릭을 위해 목숨을 다한다." 는, 가톨릭의 기사대장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했지만.
이탈리아군은 대담하게도 그리스 남부에 상륙해서 전쟁을 펼쳤다. 하지만 저 분위기와는 반대로 오스만 본군이 오니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래도 모로코 전역은 불바다가 되었다. 바르바리 해적들의 본거지가 산산조각 나는 심정이 어떤지는 몰라도 당했던 사람들 입장으로서는 통쾌한 복수였을 것이다.
마라케시 전투에서 이탈리아-카스티야 연합군이 모로코 군을 전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우선 튀니스 군이 이탈리아와 종전 합상을 맺었고,
이어서 모로코가 종전협상을 맺었다. 비록 바르바리 해적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북아프리카에 이탈리아 해군을 조성시킬 여건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의 안정을 보장할만 하는, 충분히 가치있는 원정이었다.
한편 황제는 세계 무역 시대관을 수용한 후 5번째 이념으로 공격적 이념을 택했다. 근데 질적 이념도 아직 다 찍지 못했는데 이것은 너무 빠른 처사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탈리아에서 학자들이 발전된 유리 렌즈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제 이탈리아 제국은 고급 유리의 원산지로 유명해질 것이다.
이어서 황제는 쓸모가 없어진 피렌체를 통합했다. 이는 이탈리아 권역의 일통을 뜻했다.
이어서 황제는 절대주의 정부 능력을 선택하였다. 이제 굳이 군사력을 쓰지 않으면서도 절대주의가 저절로 늘어날 것이다.
1628년.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황제였던 페란이 승하하고 그의 딸 알레한드라 1세가 즉위하였다. 그녀는 비록 여자이긴 하였지만, 프랑스, 크로아티아와 동맹을 맺고 카스티야, 포르투갈과 동군연합을 맺은 그녀를 살리카 법 등을 운운하면서 계승권을 인정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간 큰 사람들은 없었다.
여제는 즉위하자마자 수도인 로마를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시켰다.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최대 도시에 어울리는 무역항을 가지게 되었다. 고대의 오스티아 항을 연상시킨다고 해야 할까?
공격적인 확장으로 인한 주변국들의 위기의식은 이탈리아에게 있어서 항상 걸림돌이었다. 알레한드라 1세는 거국적인 선전을 하는 선전부를 마련하여 이를 어느정도 극복하기로 했다.
이탈리아는 지중해에 전념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동국연합인 카스티야가 북미와 브라질에 많은 확장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프랑스 또한 카리브해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한편 포르투갈은 리오데프라타 지역과 서, 남아프리카 일대를 중심으로 확장을 하였다.
그리고 여제는 종속국통합법을 실시해 외교 합병에 드는 외교력을 획기적으로 줄여나갔다. 이제 이탈리아 왕국은 종속국을 많이 만들고 그들을 합병하는 방식으로 영토를 늘려나갈 것이다.
1633년 2월 1일.
알레한드라 1세는 선제가 못다한 모로코 정벌을 완수하기로 했다. 이번에야말로 사악한 해적놈들을 모조리 바다속에 수장시킬 의지를 내비쳤다.
모로코에서 가장 높은 요새인 마라케시가 반년간의 공성 끝에 함락당했다. 오스만 없는 모로코 따위, 누워서 떡먹기였다.
한편 여제는 만토바 출신의 한 잘생긴 남자와 결혼하기로 했다. 문제는 그가 옛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아내였던 테오도라와 맞먹을 정도로 하층민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향간에는 남창이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천박한 직업을 가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테오도라의 남자판이라고 확신하고 결혼을 강행했다. 귀족들은 이에 대단히 반발했지만, 알레한드라 1세는 신경도 쓰지 않고 기어이 결혼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튀니스 군대를 전멸시킨 이탈리아 군은 여전히 강했지만.
그리고 여제는 알베르토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는 딱 평균치의 범재였지만, 여제는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 그런지 알베르토를 매우매우 귀여워했다.
수년간의 치열한 전쟁 끝에 모로코는 해안일대 대부분을 이탈리아에게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종전을 맺었다. 그리고 해적들은 잔혹한 고문 끝에 여제가 보는 앞에서 모조리 대중들, 특히 해적들에 의해 노예로 끌려갔던 사람들의 손에 서서히 십자가에서 토막나는 최후를 맞았다.
여제는 바르바리 해적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것이 해적들의 근절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튀니스로 이동했다. 여제는 다음 목표로 튀니스를 선택했다. 마치 카르타고를 정복하는 로마 제국처럼.
튀니스 정벌에 앞서서, 여제는 기함을 건조하고 지중해 함대를 재편성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제국은 점차 지중해와 유럽을 넘어선 지역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후의 정부 개혁은 정시 정치적인 절대주의였다. 알레한드라 1세는 절대주의 시대를 상징하는 철의 여제가 될 것이다.
이념들이 발전함에 따라, 이탈리아는 옛날 로마 제국이 그랬던 것 처럼, 현지 유력층을 상대로 시민권을 발행하는 방식을 모방하였다. 이는 적은 행정력으로도 점령지에 코어를 박을 수 있을 것이다.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은 계속 식민지를 개척했는데, 잉글랜드 놈들이 브라질과 콜롬비아에 슬금슬금 발을 디디는 모습이 꼴불견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당장 무언가를 할 여력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예 연대가 필요없게 되자, 여제는 통일된 이탈리아 군복을 채택하여 이탈리아 군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했다.
엘레나 코르바로 피스코피아라는 천재적인 여인이 이탈리아에서 두각을 드러내자 여제는 그녀를 친히 궁정 조언자로 삼았다.
그리고 여제는 신흥강호로 떠오르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 당시 러시아는 유럽 동부에서 아시아 끝까지 영토로 삼은 영토 대국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에 비해서는 속 빈 강정 ㅅㅈㄴ이긴 했지만.
셸란에서 세계 무역이 발생하더니 이번에는 브레멘에서 공장제가 발생했다. 이는 공장제 시대관 수용을 위해서는 또 어느 지방을 잡아서 집중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독일 지역과 이탈리아의 사이가 좋지 않으니.
1650년 5월 1일.
여제는 이번에는 튀니스 정벌을 천명했다. 아직도 버릇을 고치지 않고 있는 바르바리 해적들을 확실히 토벌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배후를 점령해야 한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튀니스가 어느새 오스만과 동맹을 맺었으니 쉬운 싸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프랑스가 빚이 많아 참전을 못 한다기에 500두캇이라는 거금을 희사해 겨우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타란토만 전투에서 오스만 해군에게 패배하고 육군도 밀리자 이탈리아 군은 수세에 몰렸다.
결국 여제는 예정보다 적은 지역만을 먹고 오스만과의 관계를 끊는데에 집중했다. 아직 바르바리 해적들과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첫댓글 바르바리해적:먹고 살기위해 약탈을 했을 뿐이라고!
기독교인들: 그런것 치고는 노예무역을 너무 철저히 하고 약자는 죄다 죽였잖아! 생계형 범죄는 그렇지 않아!
이탈리아로 남으셔야 더욱 값진 국가가 될텐데!보라색으로 개종하는것은 불결한 일입니다!
보라색? 로마제국은 자주색인데요?
@박팽년과박원종 어쨌든 전 ㄹㅁ는 반대입니닷!이탈리아는 초록초록해야 아름다운 법이라고욧!
@요녀석 플레이상 로마 만들려면 프랑스 전역과 잉글랜드 권역을 먹고 있는 왼쪽 퍼렁거를 치워야하는데 그러려면 한세월이라...
@박팽년과박원종 음.왼쪽 퍼렁거가 역할을 잘 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요.오스만과 동맹을 맺은 퍼렁거가 이탈리아-이베리아로 몰려온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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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녀석 퍼렁거는 이탈리아의 소중한 동맹입니다. 그런 일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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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과박원종 퍼렁거는 적이어야 재미있단 말입니다 ㅠㅠ
@요녀석 좀 시간이 지나면 적이 되는 때가 딱 한 번 있지만,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