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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rable of the Lost Sheep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이번 달에도 특강이나 피정 지도가 많습니다.
저의 일정을 보신 분께서는 이렇게 바빠서 어떻게 생활하느냐고 걱정을 해주시기도 합니다.
영성적으로 제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에 특강이나 피정 지도를 할 때 부담이 매우 큽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강이나 피정 지도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긴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도 있지요.
즉, 지금까지 제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을 정리할 수도 있으며, 또한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에 저 역시 큰 힘을 얻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돕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책을 읽다가 몇 해 전에 일본에서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아내를 잃은 한 할아버지의 사연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뒤에 전혀 모르는 자신보다 스무 살이 더 많은 할머니를 계속해서 업고 다니면서 온갖 도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아내도 잃고 힘드실 텐데 어떻게 모르는 사람을 업고 다니면서 온갖 수발을 다해줄 수 있습니까?”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할머니가 내 등 위에 없으면 제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를 들쳐 업고 화장실도 가고 밥도 먹여드리는 순간 제 고통이 반으로 줄어요.
저는 할머니를 돕는 게 아니라 사실 나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오히려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내가 받고자 하는 것을 먼저 줄 수 있을 때,
실제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는 날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와 같이
주님께서는 당신 품을 떠난 죄인들을 보살피기 위해 노력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주님을 우리 역시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비록 그 순간에는 바보처럼 나만 희생하면서 베풀고 있는 것 같지만,
조금만 미래의 시간에서 바라보면 희생과 나눔이 바로 나를 위한 거룩한 행동이었음을,
그리고 주님을 닮아가는 소중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
저는 사제수품을 앞두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필리2,5)라는 성경구절을 사제생활의 모토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많은 경우 그분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행동하지 못하였습니다.
말씀만 거창하게 선택하고는 실천 없는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을 맞이하여,
기도하며 갈망했던 순수하고 귀한 열정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기를 다시금 청해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한결같이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찾아나서는 사랑입니다.
스스로 등지고 떠나서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그 사랑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도 소중하지만 한 마리 잃은 양이 결코 그 비중이 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야 하는 주님이십니다
물론 아흔 아홉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가셨겠지요.
세상은 계산이 밝아서 아흔 아홉에 마음이 가있겠지만
예수님은 잃은 한 마리의 양의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사람은 질보다 양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양보다 질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잃은 양을 찾고야 맙니다.
그리고 기뻐하십니다.
다시 돌아올 희망이 없이 절망에 빠져 기진맥진 한 양을 찾아나서는 큰 사랑이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잃은 양을 찾은 기쁨과 같습니다.
죄인이었다가 회개하는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선한 많은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 편히 계시지 않으시고 한 사람의 죄인을 찾아 나서는 분이십니다.
어떤 죄인도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비록 나쁜 길에 들어섰을지라도 그를 두고 슬퍼하시며 안쓰러워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주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잃은 양은 바로 사랑을 잊고 사는 나, 주님을 잊고 사는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나를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과의 만남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아직도 그분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분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나를 찾고 계십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사랑>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7)
이 말씀에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라는 말은,
“이미 회개해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자기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칭 의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회개한 의인’으로 해석한다면,
이 말씀의 뜻은, “하늘에서는 의인들 때문에 기뻐하지만, 회개하는 죄인 때문에 더 기뻐한다.”입니다.
‘자칭 의인’으로 해석한다면, 이 말씀의 뜻은,
“하늘에서는 자칭 의인들(회개하지 않는 죄인들) 때문에 슬퍼하지만, 회개하는 죄인 때문에 기뻐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들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도 ‘사랑’이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 때문에 슬퍼하시는 것도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기뻐하시기도 하고, 슬퍼하시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무슨 이익이 생겨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로마 5,8-9)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라는 말씀 그대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바로 그 사랑을 경축하는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그 덕분에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셨고(요한 11,35),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루카 19,41).
라자로가 죽었을 때 흘리신 눈물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해석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흘리신 눈물은 회개하지 않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해석됩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눈물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잘 나타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잘 깨닫고 체험한 사람은 바오로 사도일 것입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1코린 15,9-10)
이 말에서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말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바꿔도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박해자인 사울을 사도 바오로로 만드신 일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루카 6,27)라는 당신의 계명을 직접 실천하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 자신도 그것을 잘 깨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찬가’에서,
“사랑은...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1코린 13,5)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박해하는 사울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계셨다면, 그래서 결국 ‘앙갚음’하셨다면,
우리 교회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에 그 당시에 박해자 사울이 천벌을 받고 죽었다면, 즉 예수님께서 보복을 하셨다면,
박해를 받고 있었던 사도들과 신자들 입장에서는 속이 후련했겠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복음 선포 활동을 못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교회가 망하는 지름길이 되었을 것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된 일은,
양들을 잡아먹던 이리가 양으로 변화된 일이기도 하고,
‘잃은 양’이 ‘되찾은 양’으로 변화된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표현하면,
그 일은 예수님께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신 일이기도 하고,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사랑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박해자는 원수이기도 하고, ‘잃은 양’이기도 합니다.
원수라고만 생각하면 사랑하기가 어렵겠지만, ‘잃은 양’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형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생각하면, 모든 사랑은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원수에 대한 사랑은 사실은 같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다는 중요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랑해야 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4-35)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특히 명심해야 할 계명입니다.)
이 말씀에서 “서로 사랑하여라.”는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결코 아니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입니다.
(신앙인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모든 사람이 신앙인들의 사랑 실천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신앙을 증명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교회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곧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그분의 마음 없이, 그리고 그분의 마음은 그분의 몸 없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체는 예수성심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예수성심은 성체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신뢰하며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일생이 예수성심 공경에 대한 핵심입니다.
예수성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공관복음의 표현은
바로 ‘가엾이 여기는 마음’(스플랑크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을 고쳐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회개가 필요한 한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애절한 사랑의 마음이 그분의 마음입니다(15,4-7).
이렇듯 예수님의 마음은 선(善)과 악(惡), 성(聖)과 속(俗)이 만나는 사랑과 관용의 마음이요 조건 없이 나를 전부 내어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그저 나 밖의 존재를 대상화하여 일시적으로 자비를 베풀고 가슴 아파하는 것에 비할 수 없는 심오한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바로 아파하고 소외된 이의 존재 깊숙이 들어가 완전히 동화되어 함께 아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웃의 인격과 삶의 상황을 완전히 품어야겠지요.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뿐 아니라 온 우주의 핵심이고, 하느님 체험의 장소이며, 우주만물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주님의 인격의 중심은 최고의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분의 전인격과 그분이 구체적 행동으로 보여주신 사랑을 체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로 충만한 예수님의 마음이 될 때
고통과 공허, 무와 죽음을 오히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또 우리가 그분의 사랑의 마음을 지닐 때
무의미한 듯 보이는 삶이 의미로 바뀌고 절망이 희망이 바뀔 것입니다.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목적은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하여 우리도 참된 사랑으로 보답하고 주님께서 당하신 수난을 보상하고 그분과 일치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를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성심 안에서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 되셨음을 체험합니다.
이 사랑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마음, 곧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 안에서
온 힘을 모아 믿음을 고백하고 그분이 걸으셨던 길을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도 창에 찔린 그분의 마음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게 됩니다.
창으로 찔린 사랑하는 그 마음을 통해 절망과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마음을 느끼며,
그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 자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성심 안에서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 되셨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사랑이 아닌 그 무엇을 바라지도 원하지도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사랑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성심께 드리는 흠숭지례 의식의 정점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 뿐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보여주시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삶의 자리에서 모두가 손잡고 그분의 성심을 드러내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永遠)의 체험 -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기쁨>
오늘은 예수성심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요즘 계속된 대축일은 그대로 점차적 하느님 사랑의 계시입니다.
부활대축일, 승천대축일, 성령강림대축일, 삼위일체대축일, 성체성혈대축일,
그리고 오늘 마침내 예수성심대축일로 하느님의 사랑은 결정적으로 완전히 계시되었습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을 통해 체험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의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살아야 하는 6월 예수성심성월입니다.
하여 6월 첫날은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강론 제목에 이어
둘째 날은 ‘영원한 두 도반-꼭 해야 할 일 둘’ 제목하에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해 나눴고,
오늘 셋째 날, 예수성심대축일 강론 제목은 ‘영원의 체험-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기쁨’에 대해 나눕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 모두와 영원의 체험을 나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의 기쁨이 바로 영원의 체험입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나누고 싶은 영원의 체험입니다.
영원한 사랑, 영원한 기쁨, 영원한 현재, 영원한 삶 등 누구나 지니고 있는 영원에 대한 갈망이요 목마름입니다.
저 역시 예수성심성월 첫날 오랜만에 아주 많은 지인들과 카톡을 통해
‘영원’이란 제하의 사진을 전송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의 기쁨을 나눴습니다.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제 사진이 너무 아름다워 묵상 중 떠오른 ‘영원’이란 제목을 붙여 축복의 마음을 담아 많은 분들과 나눴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된 듯 참 평화를 주는 깊고 그윽한 자연과 하나가 된 사진이었습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은, 기쁨은 본능적으로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귀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체험을 나눠주십니다.
예수성심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은 양을 찾았습니다.’하고 말한다.”
(루가 15,4-6)
무슨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바로 이 장면은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자비의 해를 선포하실 때의 로고 사진입니다.
바로 ‘어떤 사람’이 가리키는 바 예수님이자 하느님이십니다.
착한목자 예수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우리 모두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런 착한목자의 사랑을 지니라 우리 모두를 당신 사랑의 미사 잔치에 초대해 주십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에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당신 사랑의 결정체인 예수님이십니다.
끊임없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예수성심의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미사 시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동시에 아멘 하며 주님의 성체성혈을 모실 때는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모심으로 예수성심의 사랑과 하나되는 시간입니다.
평생학인이 되어 평생 배워야 할 공부가 예수성심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아무리 못난 이라도 그 어머니에겐 유일무이한 사랑스런 자식이듯
하느님께는 모두가 사랑스런 자녀들입니다.
차별없는 공평무사한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 하나하나가 우주요,
이 세상과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모두인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예수성심의 하느님 사랑도 온통 잃지 않은 양 99마리가 아닌,
‘잃은 양 1마리’에 집중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에제키엘서의 착한목자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내가 몸소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돋구어 주겠다.”
아, 교회는 물론이고 이런 착한목자 같은 정치 지도자가 절실한 오늘의 현실입니다.
혹자는 산업화(産業化)에 이어 민주화(民主化)요 민주화에 이어 복지화(福祉化)요 다음은 통일화(統一化)라고 우리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요즘 사회복지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모두가 더불어 사는' 복지화가 오늘날의 절실한 화두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에겐 복지화란 말이 그대로 복음화란 말로 들립니다.
물질적인 복지화만으론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영적 복지화의 복음화가 절대적입니다.
예수성심의 하느님 사랑을 깨달아 살아갈 때
비로소 복음화와 복지화는 그대로 일치된다는 확신입니다.
예수성심의 하느님의 사랑은 관상觀想하라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實踐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성심의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답은 단 하나, 다음 말씀처럼 예수성심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의 기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기쁨을 체험함이 영원의 체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에 당신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부어주시어
우리 모두 예수성심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1)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기쁨과 슬픔은 인간 삶의 양면입니다.
내가 기쁘다는 것은 언젠가 같은 이유로 슬펐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내가 슬프다는 것은 같은 이유로 기뻤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언제나 슬픔을 잊는 행복이고,
슬픔은 언제나 기쁨을 갈망하는 아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이 두 마음의 본질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잃었던 것을 되찾는 기쁨’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잃은 양을 되찾은 주인의 기쁨은 남은 양들의 숫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들의 얄팍한 계산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가치입니다.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 본 사람은 가진 사람들보다 더 인생의 깊이를 들여다볼 줄 압니다.
건강을 잃은 뒤에 건강의 소중함을, 욕심으로 재산을 날린 사람은 마음의 절제와 소박함의 가치를,
교만과 위선으로 사회적 지위를 잃은 사람은 겸손과 진솔함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만납니다.
모든 것을 내 소유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로서는 쉽게 만나기 힘든 마음입니다.
신앙인은 죄인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성령으로부터 받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마음의 눈을 뜨고, 세상의 욕망으로 가려진 우리들의 마음을 열 준비만 하면,
하느님 사랑이 지닌 위대한 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쁨은 바로 그런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행복임을 오늘 예수님의 성심으로부터 배웁니다.
특별히 오늘은 사제들이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닮도록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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