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발이 내리던 성락원 뒤뜰에는 아직도 아이들의 옷가지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창작소설) 가) 하얀 무명으로 만든 솜털 이불 글쓴이 : 이방규
바람이 일어 눈발이 흩어지던 날, 경산 어느 시골 산골마을 비탈진 곳에 어설피 지어진 판자집 지붕 사이로 눈이 내리고, 온 들녘이 소복을 입은 듯이 하얗게 물들어 눈이 부시다. 마치 ‘어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처럼 소록소록 하얀 눈이 내리던 날 생각하건데 나의 어머니는 하얀 무명으로 만든 솜털이불을 꼭이나 끌어안고 나를 데려 왔을 법한 이곳, 성락원에도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기가 나의 고향이듯 어린 유아 유년기를 보낸 곳이라 생각하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히 스치운다. 파란 하늘 밑 어딘가 있을 법한 나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청솔가지 끝 하얀 구름이 되어 어디론가 흘러만 가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어머니의 체취가 묻어 있을 것으로 기억되던 곳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찡하게 저려왔다. 돌담길을 돌아 뒤뜰에 다가서니, 장독대 옆 자락에 매화꽃 봉오리가 수줍은 듯이 미소를 던졌다. 멈추워진 시간처럼,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했던 나는 숨소리조차 인지할 수가 없었다. 꼭이나 있을 법한 어머니의 그림자는 자취도 없고, ‘여기가 바로 당신과 이별을 해야 했던 곳이 아닌가?’ 싶어 그저 멍하니 외롭고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운 어머님의 자취가 묻어 있을 성락원 뒤뜰에는 아직도 아이들의 옷가지들이 바람에 너풀거리고 있었다. 나를 잉태해 준 그 뜨거운 그리움이 햇살처럼 내려와 산기슭 판자집 지붕위에 하얀 눈빛으로 반짝이고만 있었다. 만감이 뇌리를 스쳐 지나던 그 때 그곳에는 아직도 몸부림치며 마음 달랬던 생각들이 어느 창가에 초점 잃은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듯하여, 눈시울이 뜨거워 옴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동안 발을 떼지 못하여 주저앉고 말았으나 나의 아이들이 “엄마 왜 그래”하는 말에 그저 놀라고 말았다. 저만치 창틈으로 멍하니 바라다보는 아이들이, 바로 나의 과거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싶어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뒤범벅이 되어 눈시울이 뜨거웠다. 요람과 같은 성락원에는 나와 같은 처지로 맡겨진 아이들이 하나 둘이 아닌 것으로 보아 아마 나도 그들처럼 어린 유아 유년기를 그렇게 보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나) 어머니의 멍울을 이해하고 싶었다 1967년 11월 30일이 나의 생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아마 나의 어머니께서도 하얗게 내린 눈길을 걸으며 나를 데리고 왔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숨소리조차 죽여 가며’ 한걸음 한걸음 왔을 법한 이곳, 아직도 그 때 어머니의 숨결소리 들리는 것만 같다. 피멍울 같은 나를 잠재우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서야 했던 어머님의 뒷모습을 생각하니 오히려 내가 어머니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감내 하려니 같은 여자로서 숙연해지기만 했다. 태동의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마구 엉겨 감당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슬픈 사랑 이야기와 감당하지 못했던 나의 어머니의 멍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나의 정체성을 묻는다면 아무 것도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가 누구이신지? 내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 이곳으로 왔는지도 모른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호적상으로 1967년 11월 30일이 아마 내가 태어난 날짜가 아닌가 싶지만 성락원을 찾았을 때 그때 원장님의 말씀이 “그것도 정확하지가 않다”고 하셨다 지금은 딸 둘을 가진 어머니가 된 나로서도 가끔씩 뇌리를 스쳐 지나는 어머니에 대한 온갖 상념들이 나를 마구 흔들어 놓을 때는, 온통 잠을 이루지 못한다. 가끔씩 나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아마 나의 어머니도 나를 닮았을 거야’ 하면서, 지나는 여인들의 모습을 훔쳐보기도 했다. 그리고 왜 나를 이곳까지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슬픈 사랑 이야기와 눈물겹도록 저린 여자의 심경을 이해하고 싶었다. 미궁으로 빠져드는 상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어머님의 슬픈 사연을 같은 여자로서 공감하며 이해해 보고 싶었다.
지금도 성락원 뒤뜰에 머플러처럼 아이들의 옷가지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을 것이다. 그곳 어느 곳에는 아직도 나의 유아 유년기 때, 걸음마를 배우고 보모들의 젖가슴을 훔쳐보며 어루만졌을 법한 나의 체취들이 향나무 가지 사이로 비스듬히 보이는 어느 방 한 켠에서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하얀 달빛이 성락원 뒤뜰에 내리던 날, 그렇게 바람이 일어 아이들의 속옷가지들이 너풀거리며 색종이 다발처럼 초점 잃은 아이들의 눈빛 속으로 흩어지고 있을 것이다. 다) 과거를 묻지 말아 다오 “과거를 묻지 말아다오” “ 현실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생활관이 되어버린 것은 나의 과거사 때문만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나의 어머님의 속내 깊이 숨겨둔 슬픈 사랑의 이야기와 슬픈 여자의 일생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인지도 모른다. 나도 여자로 태어나 어린 유아기를 성락원 어느 골방에서 키워진 것으로 생각되지만. 나를 잠재워 주시던 유모들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는 오늘날 이렇게 성숙된 모습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승화한 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숨겨야만 했던 나의 과거사는 입양하면서부터 알려지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 하면서 제출해야 하는 주민등록등본 때문일 것이다. 나의 뿌리는 있을 텐데 그러나 가공의 뿌리에는 진정 나의 정체성이 없었다. 이것으로 인해 선량했던 나에게 반추되어 오는 시선들이 무거웠다. 그래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더 더욱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진실된 인간미가 어떤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버릇처럼 지나간 일들을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지나간 일들보다는 현실의 중요성을 깨닫고 살아가고 있다.. 라) 암죽을 먹으며 걸음마를 내가 이곳에 맡겨진 시대적 상황은 1960년대 중반기인지라 농경사회에서 벗어나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으로 도약하는 경공업 시대에 태어났다. 나는 보릿고개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입에 풀칠을 못하여 야위어 가는 걸식 아동들이 많았다. 아침이면 새마을 노래에 발맞추어 함께 일어나 앞뜰을 쓸며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었으리라 생각되는 시대에 유모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로 나는 그렇게 암죽을 먹으며 걸음마를 배웠으리라 생각한다. 내 아이들을 바라보며 한 편의 글을 써 본다.
搖籃(요람) 폭풍 후의 고요한 바다처럼 산고 끝 행복한 아이의 미소는 평화롭고 끝없이 펼쳐진 푸른 화원이다 새벽이 오는 길목에 하얗게 별빛들이 숨어들고 조요한 달빛은 밤의 연가가 되고 아이의 고요한 숨소리는 행복한 어머니다 젖을 먹는 아이를 보라! 티 없이 맑은 눈동자는 가을 하늘처럼 깨끗한 보석이 아닌가? 잠에서 깬 아이의 순수한 모습은 약동하는 내일을 기약하는 주머니처럼 세상을 정화시켜주는 증유수가 아닌가? 맑은 눈동자의 투명한 시선을 가진 아이의 모습을 보면 세상 어딘가 어두운 그 모든 것들을 정화시켜 주지 않는가? 보라! 이것은 분명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가진 모성애의 발로이며 삶의 근원이 아니겠는가? 아이는! 세상 어느 것보다 때 묻지 않고 티 없이 맑은 온누리의 빛이 아닌가? 고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신이 주신 어머니의 선물이 아닌가? 이 글을 쓰면서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어머님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마) 별빛들이 찾아드는 창가에서(유년기) 나의 유년기는 창틈 사이로 비집어 찾아드는 훤한 달빛과 두 팔을 벌리면 다가갈 구멍 뚫린 판자집 지붕 사이로 밤이면 어머님처럼 찾아드는 반짝이는 별들이 나를 바라다보곤 하였다. 그리고 나의 별이 늘 창가에 다가와 주기를 기도하며, 마음의 별이 되기를 바랬다. 봄이면 산비탈 채전에 찾아드는 노랑나비들과 함께 나들이 하며, 양지바른 담벽 사이로 피어난 쑥, 냉이, 캐며 배고픔을 잊어버렸던 어린 시절을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자동차도 잘 볼 수 없었던 시골 산간 마을 언덕배기 판자집 성락원은 온통 전원으로 둘러 싸여 나는 그래도 자연으로부터 풍성한 감성을 배울 수가 있어 인성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풍부한 감성은 곧 나 자신을 만들어 가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보모들의 관심과 사랑이 어찌 나의 어머님과 같으랴마는 그래도 보모인 보경이 언니는 내가 감기에 걸려 아파 누웠을 때 암죽이며 약을 정성껏 먹여 주던 생각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의 처지와 비슷한 머슴아인 우동이는 그래도 어머니가 가끔 찾아와 과자며 예쁜 옷을 입혀 주곤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어느 날 파란색 윗도리가 너무나 예쁘게 보여 보모에게 울며 많이도 보챈 것으로 알고 있다. 나의 순수한 마음을 이해한 보모는 나에게 예쁜 블라우스를 사 입혀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운다. 때로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주변의 언니 동생들과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등으로 사랑과 배려를 나누워 온 것들이 오늘날 이렇게 성숙된 모습의 원천이 된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 한 편으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름다운 품성과 감성을 지닌 여성으로 자랄 수 있게 해준 것들이 사랑과 배려로 나를 키워준 보모님의 정성이 아닌가 싶다. 지금도 그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살아간다. 바) 좋은 생각과 마음은 사랑입니다 가냘픈 내 작은 가슴에도 아름다운 생각들과 좋은 마음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보모들의 사랑과 따뜻한 가슴 때문만이 아니고, 나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린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가냘픈 체구이지만 유난히 영리했던 나는 남에게 지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았고 정서적으로도 다른 아이들보다는 차분했었다. 나는 그렇게 유아 유년기에 남다른 ‘삶의 이야기’를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고, 연약했던 마음을 다스리며 창가에 찾아드는 별들과 소곤거리며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했었다. 불현듯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나는 겨울 바다를 그리워했고, 바람 부는 날 머플러 날리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작으나 소중한 꿈을 그려보기도 했었다. 밤이면 뒤뜰에 나와 반짝이는 별들과 소곤거리며, 나의 별을 찾기도 했다. 나의 유아 유년기의 슬픈 삶의 이야기를 승화시키며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렸다. 오늘 밤하늘에 별빛들이 유난히 빛나고 있다. 한 편의 시를 써 본다. 별빛들이 하얗게 숨어 지난다 별 헤는 밤이면 그대는 가고 스잔히 바람이 불어 어스럼 달빛은 나그네다 바다 건너 꼬리 감추는 한줄기 유성은 누구를 잊기에 저렇게 떠날까? 대양 저 어디선가 바라다볼 그대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너는 아는가? 별 헤는 밤이면 희미한 그림자 밟는 하얀 달빛과 숨어사는 숲의 영들이 부시시 깨어 일어나는 것만 같다 가끔이지만 가뭇이 멀어져 가는 별똥별의 영혼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은하의 아래로 길게 늘어진 삼성별이 마중을 나왔다 그립고 애틋한 마음 이토록 별 헤는 밤이면 그대는 가고 별빛들이 하얗게 숨어 지난다 다) 해설피 웃음지웠던 그 날(입학)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의 생년월일이 호적상으로는 1967년 11월 30일로 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1975년이 학년 적령기가 되어, 성락원 설립자의 성을 따라 대구지방법원 가사심판부에서 1979년 1월 20일부로 경주 최씨의 성을 받아 최채은로 입적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성락원 인근 공립학교 남성 초등학교 1학년에서 5학년까지는 호적상의 법적 이름으로 다니지는 못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1975년 3월 4일 남성초등학교에 입학 하던 날, 보모의 손을 잡고 처음 등교하는 날이라, 빨간 티셔스에 곤색 바지를 입었지만 어설피 보였던 나에게는 그래도 가슴이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다들 엄마의 손을 잡고, 재잘거리는 모습 뒤에는 해설피 웃음 지우던 나는 그 때부터 나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온 것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름을 물으면 “예” “최채은예요“라고 대답하던 내가 자랑스럽지 못해 고개를 숙였던 생각들이 한 없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성도 이름도 몰랐던 나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나의 성은 경주 최씨, 이름은 채은이라고 1979년까지 불렸던 이름이다. 한 편의 시를 쓰고 싶다. 山(산) 산아! 너의 속 깊이 지르는 함성은 울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너를 둘러싼 세상 이야기들이 깊게 충혈된 상심으로 젖어 있으니 이것 또한 내면 깊숙이 감춰 놓은 우는 울음이 아니고 무엇이냐? 산아! 들끓는 소리 삭이며 세상 이야기를 관조하는 것은 너의 깊이 있는 무게 때문이 아닐까? 다들 그렇게 바람을 안고 사는 인간사라지만 너의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 산아! 너의 속내 깊이 지르는 함성은 심중에 간직한 그 의미들을 하나, 둘 삭이는 것 이 또한 내일을 위한 함성의 심호흡이 아닌가? 세상사는 사람들 다들 그렇게 바람을 안고 산다지만 산아! 너의 속 깊이 감내하는 침묵의 의미들이 고고한 상심의 함성이 아니겠느냐? 어머니! 보고 싶어요. 라) 길들일 망아지처럼 고삐가 잡힌 나(입양) 오늘 따라 성락원 분위기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늘 있었던 일이지만 아이들이 하나, 둘 외국이나, 국내에 입양이 되어 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 입양이 되어 갈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까치가 울어 대더니, 귀한 손님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측 하였다. 보모님과 큰 언니들이 “채은아 너는 좋겠구나” “좋은 집안에 입양되어간다”라는 소리를 듣고는 놀라고 말았다. 마치 어느 집에 팔려간다는 생각 때문에 눈물이 비 오듯 내 작은 눈망울을 적시고 말았다. 낳아준 어머니보다는 길러주시는 어머니가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슬픔에 젖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길들일 망아지처럼 고삐가 잡힌 나는 1979년 7월 11일 경상북도 경산시 신천동 산 27번지2 성락원에서, 경북 경산군 용성면 송림동 392번지 호주 천oo씨의 양자로 1978년 9월11일부로 입양 신고로 그 해 1979년 9월 11일부로 양모 천oo 및 입양 후견인인 백oo와 함께 입양신고로 성을 진양 천씨로 바뀌어 현재 천채은으로 쓰이고 있다. 나는 그 당시 남성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양모에게 입양이 되면서부터 낯 설은 동해 바닷가에 자리 잡은 항구의 도시, 포항으로 오게 되었다. 전입과 동시에 포항초등학교에 전입하게 되었으며 농촌 시골 마을에서 도시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철부지였던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체 양모의 손길을 따라 버스에 올라선 것이다. 차창 밖 스쳐 지나는 농촌 전원 풍경을 바라보며, 정처 없이 떠가는 하얀 새털구름처럼 내 마음도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아침이면 용광로처럼 붉게 타오르는 동해의 바다 풍경을 바라다 볼 수 있었던 곳, 검붉게 탄 어느 어부들의 뱃고동 소리 들으며, 아침을 일구어 가던 곳, 바로 바다가 보이던 항구동 어느 집 샛방에 기거하게 되었다. 여기에 내 연약한 소녀의 꿈을 묻어 두어야 했던 곳이 되고 말았다. 때로는 벅찬 내 작은 가슴을 주저앉히며 들어선 이곳이 나의 운명을 맏겨야 했던 곳이 아닌가? 어머니를 잃은 내 작은 가슴에 와 닿은 12년이란 세월이 너무나 길게 느껴져 안타깝기도 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감당하지 못했던 설움이기도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남의 수양딸일 뿐이였다. 어느 하늘 밑 어디선가 바라다 봐 줄 그리움이 파란 물감이 되어 거름종이에 스며들듯이 나의 가슴에 젖어들 때면, 나도 모르게 방황한 날들도 많았다. 가끔은 고독이란 병이 엄습해 올 때마다 몸부림 처야 했던 나의 과거사가 부끄럽다기보다는 차라리 잊어야 했던 체념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때로는 조금씩 무덤으로 무덤으로 떠나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한없이 울기도 했다. 군중 속에서 버림받은 고독한 미아가 되어 정 부칠 곳이 없었던 현실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하던 날, 내 작은 가슴에도 슬픔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요. 절규일 것이다.’ 길러준 어머니께서도 나에게 잘 해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생모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지워 가며 감사한 마음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게 소중하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피로 맺어진 혈연적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나에게도 가족이 생겼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위로 하며 청소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마) 수양딸이 되면서 부터 체격이 외소하고 연약했던 나로서는 모든 것을 능동적 행동보다는 타의에 의해 사고하며 행동해야 했던 탓이라 자아실현의 꿈을 키우기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나보다는 남의 생각과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적 부담감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포항시 항구동 어느 어부의 셋방살이 곁방에서 6살 아래인 동생과 양모와 함께 살았다. 양모는 그 당시 어느 카페를 운영하시었고, 어린 동생을 돌봐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마 생각하건데,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 중에 그런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면 이율배반적인 사고인지도 모른다.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나에게는 마음 한 편으로는 고마움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른들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나로서는 무엇인가 해야만 그 은혜에 보답하리라는 생각에, 동생을 잘 보살피고, 설거지 및 청소를 능동적으로 실천에 힘썼다. 어쩌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 습성이 지금도 내 스스로 주위를 깨끗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습관이 되어 버린지도모른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철부지였던 나도 조금씩 눈을 떠갔으나 몸과 마음은 늘 그 자리였다. 한 편으로는 왜 나를 입양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밤이면 눈시울이 젖어 옴을 가눌 길이 없었다.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하얗게 피어 있던 안개꽃을 바라보며. 진실된 사랑의 의미와 인간미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며 깊은 수렁으로 빠져버리기도 했다. 고독이 밀려올 때면 하얗게 포말 되어 부서지는 바닷가에 나와 한없이 걷기도 했다. 밤이면 어스름 달빛이 금빛 은빛 물결로 출렁이는 수평선을 바라다보며 내 어머님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을까 하고 수많은 별들을 헤아려보았고, 푸른 은하수 곁으로 마중 나온 삼성별을 물끄러미 바라다보곤 했었다.. 아침이면 붉게 타오르는 동해의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을 벌려 심호흡으로 마음을 주저앉히기도 했다. 이런 행동들이 바로 자아 성장의 기회와 자아성찰의 기회로 삼았다. 어린 나에게는 그 당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만 학교에 갔다 와서는 집안일을 도우며 동생의 뒷바라지를 했던 나의 생활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하루 하루를 보내야 했다. 바) 이상이 아닌 현실의 꿈을 가꾸어 가며(청소년기)
나의 청소년기에는 어머님을 잃은 슬픔과 그리움 때문에 실망과 좌절을 안고 사춘기를 맞이해야만 했다. 고독이 엄습해 오는 날은 진실된 사랑의 의미와 심오한 인간미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하고 있었다. 방황의 수렁에서 벗어나야 했던 나는 조금씩 철이 들어가며, 꿈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으며 전신 전념을 하였다. 꿈이란 이상이 아닌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에 만족하며 자아실현의 능동적 행동력으로 실천에 옮기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1년도에 포항 대신동에 자리 잡은 공립학교 H여중에 진학을 하였으며, 3년 뒤 실업계 고등학교 D여상에 진학하여 미래의 꿈들을 하나, 둘 이루어 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84년도에 영광된 고교를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의 틀에서 조금이나 벗어나 미숙하지만 숙녀로 성장하게 된 것이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자랑스럽기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제 나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창조해 낼 수 있는 동력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고, 지금까지는 남에게 의지하며 살던 것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곧 나의 힘으로 무엇인가 해 낼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고교를 졸업한 나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뜻으로도 생각되며, 남의 힘보다는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더욱 기뻤다. 훤한 달빛 아래에 그 어딘가 바라다 볼 그리운 어머님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나 어릴 적 성락원 방 한 켠에서 창틈으로 새어드는 별빛을 바라보며 쓴 글을 읽어 본다. 별 어릴 적 내 살던 언덕 위의 집 구멍 뚫린 널판지 지붕 사이로 훤한 달빛이 새어 드는 날 나는 가장 큰 별들을 헤아렸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미소로 다가왔습니다 팔 벌려 맞닿을 벽 사이로 바람으로 보낸 별빛들이 어둠을 밀쳐 놓고 나무도 그리고, 새도 그리고 집을 그려서 꿈의 동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가는 마디마다 그 때 그 빛들이 지나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며 나의 가슴에 비집어 들어 좋은 생각 마음을 전했습니다 아직도 그 때 그 별들이 이만치 서 있는 나의 창가에 내려와 어머님 미소 가득 실어 편지 한장 주고 간다 마) 냉이 쑥 캐던 봄빛 처녀기 고교를 졸업한 나는 몸과 마음이 듬뿍 성숙되어 제법 처녀다운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립심을 키워 이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고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연약하리만큼 여린 마음과 육신을 스스로 다스리며, 책을 멀리 하지 않았고, 몸매를 가꾸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은사님의 배려로 포항제철 포스코 경리 사원으로 입사를 하여 얼마동안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늘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리되어온 터라, 구속이라는 중압감이 나를 지배해 온 것을 못마땅한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마음 한 편으로는 자영업을 하게 되면 자유로움이 있어 좋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직에서 나오게 된 것을 가끔은 후회하지만, 어쩌면 나에게는 전화유복이 된 지도 모른다. 그 후 나는, 가을빛 노을이 드리운 석양을 바라다보며, 양할머니의 간병을 하기 위해 경산 시골 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던 할머니께서 뇌졸증으로 스스로 몸을 다스리지 못하셨다. 안타까운 일이였다. 외숙모의 권유로 한 일이지만, 할머니의 간호에 최선을 다 하였다. 생각해 보면 할머니의 사랑과 외숙 내외분들의 따뜻한 배려와 관심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할머니께서 세상을 타계하시게 되어, 나도 늘 그 자리에 머무르고 싶지가 않아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는 시골 마을에서 다시 포항으로 오게 되었다. 할머님을 생각하며 쓴 시를 읽고 싶다. 내 하나의 불꽃이 지고 (할머님의 영전에) 마알간 하늘에 한 점 구름이 흐르고 햇살처럼 따사한 산 밑자락 말없이 세월을 둔 곳 풀꽃 마른 잎 쥐불처럼 타던 날 바람이 되어 내 하나의 불꽃이 지고 말았습니다 엄습해오는 죽음의 그늘에서도 생명수처럼 간직한 정념을 생각하신 당신 뒤척이는 삶자락마다 눈물이 고인 당신 허나 가다듬어 머리깃 빗었습니다 눈시울 감출 수 없이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사늘한 냉기가 감돌아 스미는 찬바람만 지나갔습니다 님의 분신 사랑하시던 아들, 딸 가슴이 터진들 영생의 뒤안길에 서서 지켜 보시겠조 가지가 꺾이고 잎이 지던 날 머리 풀며 울었습니다 산 옆 자락 이미 고인이 되신 고 000 지묘 고 000 지묘 한 점 구름처럼 당신을 맞이할 것입니다 손가락 마를 날 없으시던 옛날을 이야기 하시겠죠 하얀 잔설이 분분한 날 달빛과 바람 그리고 봄이면 뻐꾸기 소리 들리는 날 당신의 명복을 빌며 돌아다 볼 꺼예요 할머님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바) 큰 것보다는 작으나 소중한 것을 사랑하며 봄빛이 완연한 따뜻한 봄날에 외가 집 친척인 고종 사촌이 경영하시던 옷 매장에서 일하게 된 그 때의 나이가 22살이였다. 나는 그 곳에서 내 젊은 열정을 다하여 가게를 운영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언제나 늘 그 자리라고 생각되어 지던 나의 모습도 제법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변모되어 가고 있었다. 고종 사촌 언니와 힘을 모으며, 사업에 최선을 기우리며 큰 것보다는 작으나 소중한 것을 사랑하며 애착과 심혈을 기우린 결과 날로 달로 사업이 번창하였고, 목돈을 받을 수 있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랐다. 이래저래 푼돈을 모아 저축하며 근검절약하는 습관으로 미래의 삶의 터전을 조금씩 가꾸어 나갔다. 최신 유행에 걸맞은 의류들을 고객들에게 판매하기 위해서는 손님들에게 최선의 서비스와 친절 봉사에 힘을 써야 했다. 손님들에게 최대의 친절과 서비스로 고객들에게 다가갔다. 고객들의 신상을 컴퓨터에 입력을 하고, 고정 손님으로 만들어 가는데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날로 달로 손님들이 늘어만 갔다. 월말이 되면 재고 조사를 통하여 의류 수급의 수요와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면서, 힘겨운 줄도 모르게 열심히 노력한 결과 판매 실적이 날로 늘어감에 따라 언니로부터 보너스도 타 행복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 얼마나 열정적으로 맡은 일에 심혈을 다 했는지 모른다. 평소 근검절약하던 생활 철학인지 모르지만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터라 오늘 따라 생일을 맞이했는데도 영양이 풍부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일가친척들이 나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양력 11월 30일이 되면 나의 생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야하면 어머님 생각이 온 뇌리를 스쳐 지나는 것이 마음의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온갖 시련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큰 보람이 있어 행복했던 일들이 더 많았다. 그 때 나는 양어머니와 함께 죽도동 어느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보금자리를 만들고 살았다. 아침이면 오늘 하루를 계획하고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메모해 가면서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 하였다. 아침 10시에 문을 열면 오후 10시까지 그리 호락호락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체구가 작고 연약한 나에게는 힘도 들었다. 남의 간섭 없이 자유 경영인지라 그래도 홀가분하다는 느낌마저 들었고 행복했다. 나에게 주어진 임무에 온갖 열정을 다 바친 세월이 어언 8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다. 그러자 나의 통장에는 수천만원이란 목돈이 생기게 되었고, 이제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이제는 늘 미루어 왔던 행복의 둥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의 처녀기를 이렇게 알뜰하게 보낸 것도 평소 검소하고 절약하는 습관과, 크지는 않지만 작으나 소중한 것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는 내가 아닌가싶어, 어머님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사) 나는 외롭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지하는 선험적 경험이다. 나처럼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버려진 아이들은 부모님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여 소외됨으로서 인성 및 인격 형성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성장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사회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체감하지 않을 수 없는 특수 환경에서 자라야했던 나에게도 인격형성에 많은 장애가 있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자란다면 원만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짐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순수하지 않은 아이가 없다. 왜냐하면 “어린이의 눈을 봐라보아라” 그 얼마나 청순하고 순수하지 않는가? 다만 이 세상에 태어나 따뜻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아무리 국가에서 고아원이나 보육원 같은 곳에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의료 지원을 통한 아이들의 정상 발육에 힘을 쓴다고 치더라도, 그들의 올바른 인격형성에 큰 보탬이 된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부모님의 따뜻한 손길에서 순수한 감정으로 자라난 아이들은 그 인성도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아원이나 보육원 같은 곳은 아무리 아이들을 위한 시스템과, 전문적인 교육 활동 및 심리 치료를 한다고 치더라도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처럼 사랑과 애정이 있을까? 그러나 국가에서도 이들이 사회의 한 일원으로 성숙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특수 환경 때문에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남을 속여야 했고, 개개인의 소질을 계발할 수 있는 여건이 전무한 터이라, 문예활동, 보건체육활동, 실습노작활동, 여가문화활동 등이 잘 이루어지지 못한 우리들에게도 문제가 많음을 인정한다. 좁게는 우리들의 문제일 수도 있고, 크게는 우리 사회의 복지 활동 시스템의 문제일 수도 있다면 이율배반적일까? 이성은 감성을 초월할 수가 없다지만 나처럼 성장한 아이들에게는 합리적 사고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성보다는 감성적 행동 양상을 보이는 것이 보편적인 심리 현상이기 때문이다. 한 순간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은 여자의 일생을 참을 수 없도록 평생을 괴로워해야 하며, 그 원죄의 죄값을 반드시 받는다고 나는 믿고 싶다. 이제 우리 모두들 하느님 앞에 서서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며, 사회의 길잡이가 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소원하며 기도를 해 본다. 나는 외롭지 않다고 자부하면서 하루를 일구어 나갈 것이다. 아) 아침 이슬처럼 반짝이는 두 눈빛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나에게도 혼기가 된 나이를 먹었다. 그래도 양모께서는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이리 저리 모색하며 선을 보이기도 했다. 신선한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룬다고 생각하니 미아로 자란 내가 자꾸만 자격지심이 들어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는 갖추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고교를 졸업한 나에게는 온전한 가정에서 자란 것도 아니었고, 몸이라곤 그저 말라서 연약하기 짝이 없어 바람에 날아 갈듯하여 모든 것이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 가진 것이라곤 미혼모의 딸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도 양모 슬하에서 바르게 자랐다고 자부를 해 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선입견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혼기가 된 나의 친구들은 결혼의 조건이 뭐니 하면서, 잣대를 갖고 이상형을 말하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그런 여유조차도 없었다. 불행했던 나의 과거사만이 뇌리를 혼미 속으로 자꾸 빠져들게 하였다. 평소에 생각했지만 가장 행복한 결혼은 나의 처지와 가장 비슷한 사람만이 나를 이해하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가게 단골손님 중에 회사에 다니는 젊은 청년이 데이트 신청이 들어와 마음의 문을 열고 사귀어 온 터라, 나를 가장 이해해 주리라는 신념으로 사교를 통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혼기가 늦어서 조금씩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그이와 2001년도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두 딸을 둔 주부로 한 가정을 가지게 되어 무척 행복하게 살고 있다. 모정을 받지 못한 나는 유별나게 모성애라는 깊은 감정을 가졌다. 연년생으로 태어난 두 딸의 웃음과 재롱을 보며, 하루를 보내는 나에게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의 결핍으로 생긴 보상행위인지는 몰라도 나의 두 딸에게 헌신적으로 잘 키워 보겠다는 나의 열정인지 모른다. 두 아이들이 아침이면 유치원에 가야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 선잠에서 깨어 잠꼬대하는 아이들을 바라다 볼 때마다, 나 어릴 적 나의 모습을 하고 있을 그런 얼굴에는 은은히 스쳐가는 어머님의 얼굴도 있으리라 생각하곤 한다. 어쩌면 어머니를 닮았을 내 두 딸의 눈빛이 아침 이슬처럼 영롱이며 반짝이고 있어 행복을 가꾸어 가는 나에게도 힘이 솟는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는 오랜만에 어머님과 선생님에게 한 편의 시와 편지를 써 보았다. 빛바랜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을 받은 안개꽃이 저만치 기대어 나의 어머니처럼 작은 미소를 던진다. “영미야! 사랑한다”라는 소리가 아침 바람이 되어 창틈사이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나의 하루 일기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가위에 눌려 일어날 생각이 없다 아이들 유치원에 보낼 생각에 부시시 깨어 일어나 앞을 가리며 눈을 비벼 댄다 창틈으로 새어드는 햇살을 받으며 귀여운 딸들을 바라다보다 젖병을 만지작거리며 하루가 시작된다 선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을 바라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운 어머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그저 조건없이 주고픈 마음은 나의 애틋한 모성애의 발로가 아닐까? 큰 것보다는 작으나 소중한 것을 사랑하며 애착을 가지는 소박한 마음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을 챙기며 아이들 기다리는 마음으로 일과를 저축하고 생활하는 나 미래를 일구어가는 작은 소망이 아닐까? 두 몸으로도 하지 못할 일들을 혼자서 스스럼없이 해 내는 상심 속에서도 감내하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다 그래 아침 햇살이 커턴 사이로 스며들면 아이들의 환한 미소 짖는 얼굴을 바라보며 어머니가 하지 못한 일들을 챙기고 작으나 소중한 것들을 가꾸며 하루를 맞는다. 어머니를 닮은 나와 두 딸들은 비워둔 자리를 하루 종일 만들어 간다. 2008년 2월 12일 자) 가슴에 묻어둘 그리움은 무덤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운 어머니! 바람이 일렁이는 날, 성락원 뒤뜰에 너풀거리는 아이들의 옷가지들을 바라다보며, 어느 하늘 밑 어디선가 있을 법한 그리운 어머님을 그려 봅니다. 비탈진 산길을 따라 산을 오르니, 하얀 눈들이 뽀드득거리는 발자국마다, 밤이면 하얀 달빛이 와 고여 있을 법하여 가슴이 찡하게 저려 왔습니다. 봄이면 노랗게 피어 있던 장다리꽃 잎새에 찾아드는 벌 나비 좇으며, 걸음마를 배웠을 저에게도 파고드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듣지 않더라도, 멍울진 가슴에 묻어 있을 법한 심정을 헤아리며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과거를 만들어 가며 살아야 하는 여자의 일생, 어머니를 닮은 어머니가 된 한 여자로서, 가슴에 묻어둔 어머니의 상흔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인생의 뒤안길에 한 송이 국화꽃’처럼 완숙된 모습으로 살아가실 어머님에게 누가 된다는 것도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찾아도 찾지 않을 법한 어머니의 속내 깊이 평생 묻어두어야 할 사연들 속에는 아직도 그 성락원 뒤뜰에는 아이들의 옷자락들만 너풀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운 어머니!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여자이고 싶은 저에게도, 어머니 같은 어머니이기를 소망하고 싶습니다. 왜냐고요? 어딘지 모르게 어머니를 닮은 저의 얼굴을 보며, 당신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미를 당신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쯤 이순이 되었을 법한 어머니 우리들 모두 살아 숨 쉬는 날, 생각을 생각대로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들이 조금씩 조금씩 무덤으로 무덤으로 가고 있음을 인지 못하는 우리들이 아니였습니까? 생전에 얼굴이라도 보고 싶지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리운 어머니! 이 세상 모든 어머니는 다시 어머니를 창조 하듯이, 저에게도 두 딸을 두어 그저 행복하게 살아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 두 눈빛 사이로 잔잔히 흐르는 어머니 같은 모습을 보며,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아이들이 철이 들어가며, “엄마의 엄마는 어디 있어”라고 물으며 때를 부릴 때마다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평생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가야 하는 아픔 속에서 오늘 하루를 일구어 가는 장한 어머님의 딸이 여기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 끝으로 어머니!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하느님에게 빌어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 낳아준 어머니도 소중하지만, 길러주신 어머니가 더 소중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고 싶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길러주신 모정에 더욱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철부지였던 저에게 온갖 정성과 관심으로 이렇게 길러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으로 행복을 만들어 가시던 어머님의 정성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저도 아이를 낳고 보니, 철이 든 것 같아요. 어머님이 얼마나 고생하시며 저를 길어 주신 은혜로움을 마음 깊이 새겨 둡니다. 초. 중. 고를 졸업하게 해주시고, 결혼에 까지 신경 써 주신데 대해 감사드리고 앞으로 은혜에 보답하리라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늘 건강하시어 오래도록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날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2008년 2월 24일 아침 저를 아껴주시던 선생님에게 저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저만치 서서 늘 지켜보시던 선생님께서 미국에 있는 가족의 품으로 가시게 되어 이 또한 섭섭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저 어릴 적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던 분! 정말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선생님께서 떠나시던 날, 사과나무 이파리 사이로 은빛 날개를 펴어 한 점으로 사라지던 비행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애틋하리만큼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던 분이 아니었나 싶어 눈시울이 붉어져 옴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언제 다시 미국에서 귀국하시게 될지는 모르지만 거기 계시는 동안 몸 건강하시고 다시 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이들이 잘 커 가는 모습처럼 선생님의 앞날에도 늘 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저가 성장해 가는 모습 뒤에는 님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가 있었기에 저의 두 딸을 잘 키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그 날 성락원에 함께 가시어 저의 삶의 과정을 하나 둘씩 파악을 하시며 눈시울을 적시던 선생님의 고마운 마음도 가슴에 묻어 둡니다. 미아인 저의 어머니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용기를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차)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여자이기를 나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여자이기를 바라며, 어딘가 모르게 여자이기 때문에 한 평생 한 많은 생을 살아야 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함께 하고 싶기 때문만은 아니고, 같은 여자로서 마음의 상처와 상흔을 함께 하고 싶고 또 저의 처지와 같은 미아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시를 읽으며 창문을 열어젖혔다.
기다리는 마음 기다리다 돌아서 가는 곳만큼 애태우는 가슴앓이 하얀 달빛 달 그림자 금 그어 자취 감추고 담 너머 소슬바람 적신 옷깃에 이만치 기대어 가는 곳마다 묻어묻어 따라 나선다 돌아선 생각 더욱 깊어져 하얀 달빛 등뒤에 숨어 앉는다 저만치 멀어져 가는 곳마다 달빛 고인 발자욱 숨 죽인다 잠든 생각 선잠에 좋은 꿈꾸고 하얀 밤 지새워 마음 가더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