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4:10~16 /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
(행 24: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행 24: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행 24:12)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행 24:13)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행 24: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행 24: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행 24:16, 개정)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10~13 총독이 바울에게 말하라고 몸짓하자, 바울이 대답했습니다.
“각하께서 수년 동안, 이 민족의 재판장이 되신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관련된 일을 각하께 변명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11) 제가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러 올라간 것은 12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각하께서 조사해 보시면 금방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12) 그리고 저를 고소하는 사람들은 제가 성전 뜰에서 누구와 논쟁한 것이나, 회당에서나 도시 안에서나 사람들을 선동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13) 그리고 이들이 지금 저를 고소하고 있지만 총독 각하께 그 내용에 대한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증거(사실)를 강조합니다. 바울의 자기변호는 매우 논리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더둘로의 고발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구체적인 증거로 증명한 후 이제는 더둘로의 고발이 거짓되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바울은 소요죄에 대하여 무죄함을 증명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절에 의하면 바울은 구금 상태에서 풀려나지 않았습니다.
14~16 다만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예수를 따라서 하나님을 믿으며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앞의 정치적인 문제에 이어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변론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바울은 더둘로가 이단이라고 말한 것을 도라고 정정합니다.
유대교와 자기가 전하는 도가 동일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연속성에 대한 강조는 이 도가 유대교와 동일하게 로마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그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
총독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인이 되어 천국 가서 부활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향한 소망과 부활이 동일시되고 있고 그것은 곧 유대인들의 신앙과 동일시됩니다.
바울은 악인과 의인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말합니다.
거리낌 없기를 힘쓴다는 말은 범죄 하지 않기를 힘쓴다는 말입니다. 힘쓴다는 말은 부단히 연습하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고전 9:2715:31). 바울은 부활과 심판을 믿고 살았습니다. 부활과 심판을 믿을 때 우리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기본적인 의무를 하고 있습니다.(잠 3:4눅 18:2, 4),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로 율법을 요약하신 예수의 말씀과 결부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를 강조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인들은 사람 앞에서의 의를 위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상실하였습니다.(눅 20:46, 47).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동시적으로 의롭게 행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바울의 겸손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겸손하게 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