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문화의 독창성과 다양성
경주문화권은 신라 문화가 핵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경주문화권의 석탑과 불상은 신라 문화의 독창성과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에 경주 지역에는 많은 고분이 있었다. 신라의 지배층들은 고분의 봉토를 더 높이 쌓고 금관ㆍ금귀걸이ㆍ토기 등의 화려한 유물을 넣어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경주 지역에는 현세에 불국토를 구현하려는 의지로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국가통치이념으로 받아 들이며, 왕성인 월성 부근에 대규모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6세기 경 경주는 흥륜사ㆍ황룡사ㆍ분황사ㆍ영묘사ㆍ실제사 등 왕실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가득 찼다. 경주문화권 전역에도 포항의 법광사, 영천의 은해사, 울산의 동축사, 청도의 가슬갑사 등 여러 사찰들이 건립되었다. 경주 주변 지역에 불교문화가 차츰 전파되어 경주의 석탑과 불상 양식을 모방한 조형물이 세워지면서 경주문화권 안의 동질성이 강조되어 갔다.
신라 중대에 이르러 석탑 양식은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석가탑 형태가 주류였던 종래의 석탑 양식과 달리 새로운 양식의 다보탑이 건립되었다. 다보탑의 건립은 왕실이 절대적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이루어졌다. 석탑 양식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면서 삼국통일 직후 고구려와 백제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신라 문화는 정제미와 함께 패기를 갖추며 발전해 갔다. 다보탑과 같은 양식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지 않았던 것은 신라 왕실만이 갖는 문화적 자신감을 말해준다.
신라 불교문화의 특징은 남산에서 보다 확연하게 드러난다. 남북 8km, 동서 4km의 남산에는 골짜기마다 수많은 불상과 탑이 세워져, 불국토 신라를 구현하려는 의지가 짙게 배여 있다. 경주 사람들은 현세불인 석가불은 물론 미래불인 미륵불, 부처를 모시는 협시보살, 불ㆍ보살을 받드는 여러 신중을 남산의 바위마다 새겨 놓았다. 불상ㆍ보살상의 얼굴이나 옷주름, 팔ㆍ다리의 신체 등은 똑같은 수법이나 양식으로 조성되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신라 불교는 원효와 의상을 거치면서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특히 원효는 대부분의 불교 경전에 대해 주석을 붙이므로써, 신라 불교가 모든 교파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그 외 원광ㆍ태현ㆍ의적ㆍ경흥 등의 여러 고승은 많은 저술을 남겨서, 중국과는 다른 독창성을 가진 불교사상을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라 불교의 주류를 이룬 것은 의상계의 화엄종이었다. 의상의 사상은 절대적인 진리나 부처일 수 있는 하나 속에 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을 융섭하려는 특성을 지녔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지니면서, 하나 속에 서로 다른 교리나 사상을 통합하려고 하였다. 불교사상에 바탕을 둔 신라 문화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통합과 융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