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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컴앤씨월드미션 원문보기 글쓴이: 瑤翰 김요한
고전12장은 성령의 역사와 그 존재성에 대한 말씀이다.
사실 성령의 역사 곧 나타나심과 그리스도의 존재는 성격상 차이가 있다.
태풍의 핵과 태풍의 영향권과 월급의 본봉과 보너스의 비유가 적절하다고 본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나타나심 곧 보이는 역사성은 중요시하고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존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령의 나타나심은 쉬우나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존재는 하나님의 계시의 유무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바깥 표적은 비밀이 아니지만 안의 표적은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이시다.
1절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알아라’ 곧 4절의 은사들이다.
그런데 언제나 인간들은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이 문제이다.
신령한 것들과 성령님 자체와는 다르다.
신령한 것을 추구하다가 잘못하면 항상 욕심을 치우치고 만다.
이웃의 것들을 탐을 낼 수 있다. 바로 10번 째 계명에 걸리고 만다.
성경공부를 잘 못하면 방법론만 공부하고 만다.
꾸준한 묵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존재를 자신 안에 각인시키고
그와의 관계를 늘 의식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2절은 신령한 것들을 알아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하나님의 기준을 모르고 편견으로 보면 잘 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광명한 천사와 같으며 이 세상의 신이다. 때로는 하나님같이 흉내를 낸다.
모방의 천재다. 현혹한다.
신앙은 원리가 중요하다.
성령의 나타나심의 신령한 것들에 치중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하면 우상숭배를 하듯이 끌려간다. 그래서 성경은 그 열매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사실은 신령한 은사들은 전기가 흐르면 전기 자장이 저절로 생기듯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모시고 그 분과 바른 관계를 정립하면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자동이다.
‘말 못하는 우상’ - 왜 우상은 말을 하지 못한다고 강조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3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라 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그의 영에 의해 시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만 믿는 사람은 시인이 없다.
‘그러므로 알게 한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말하는 자는 예수를 십자가의
저주의 예수라 하지 않는다. ‘자신의 개인 주 예수’라고 시인한다.
예를 들면 어떤 분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교수형을 당했다면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 그 분이 항상 교수대에 달려 있다고 말을 하겠는가?
성령 안에서 말하지 않으면 ‘주 예수’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3절은 성령의 존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성령 안에서)
마7:21절의 말씀을 이 3절이 설명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성령의 외적인 역사만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참고 요3:34, 6:63, 14:12)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관심사는 3절이 아니라 4절이다.
그래서 고린도 전 후서의 결론은 고후13:5절이 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그런데 존재만 강조하면 그리스도가 충만하기 까지는 밋밋하고 재미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들이 그때까지 인내를 하지 못하니 중간에서 현혹이 되고 만다.
4-6절 은사는 성령의 나타나심이다. 직임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주어진다.
그리고 역사는 하나님이 하신다. 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그런데 그 분들의 역할 분담인가 유기적인 연합인가?
참조할 성경은 엡1:20절, 빌2:13절 살전2:13절이다.
엡1:20 -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사’ -역사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6절)
빌2:13 - 우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살전2:13 -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조직신학도 직임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고
성령은 은사이며 역사는 하나님이 하신다고 정리하고 있다.
은사는 선물, 직임은 사명자의 입장 그리고 역사는 사역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이 셋은 바로 하나이다. 한 세트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은혜이며 그 은혜는 사명으로 다가온다.
만약 사역을 천부적인 재능에 의해 되어진다면 그건 은사가 아니다.
그래서 사명은 자신의 소원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일이 아르바이트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소명이냐? 하는 이야기이다.
사명자는 하는 일이 좋던 싫던 다른 것은 할 수 없다.
그리고 역사는 사역을 위해서이다.
카리스마(은사)는 사명으로, 사명은 반드시 사역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사역은 카리스마 뿐만 아니라 직임이 있어야 한다.
전체적인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개체의 존재로 있어야 한다.
따라서 카리스마만 있다고 바로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 사명이 있어야 한다.
직임(사명)은 은사만 목적이 아니라 삶이다. 은사는 유익의 요소가 있어 이를 돕는 수단이다.
왜 세 분의 일하심을 구분하는가?
성령(은사 : 은혜로 주어지는 것),
주(그 분의 보내심을 받은 사명자)-사명자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한다.
사령관이 있어야 한다. 없으면 안하무인이 된다.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 하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 곧 그 분의 일이다. 우리 안의 내적역사이다.
이런 것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서로서로 보완해서 끌고간다. 어느 한쪽이 약하면 다른 부분이 보충을 하는 삼겹줄이다.
4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어느 한정된 다수를 말한다.
8-10절 사이에는 9가지 은사를 열거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성, 예술성, 기교, 현실성, 초월성을 다 포함한다.
사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무엇에 전문가인지 모른다.
부분 같으면서 전체를 알고 멍청한 것 같으나 매우 지혜롭다.
비도덕적인 것 같으면서 거룩하다. 예수님 당시에도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으로 봤다. 나타나지 않은 인격성 때문이다.
성령은 같고- 은사의 본질은 다 같다. 동질이다.
사도바울의 체험과 무디의 체험은 서로 달라도 본질은 같다(11절: 한 성령이 하시는 일)
8-10절 은사 직임 역사를 분류해 보면 모든 것이 다 그 분들의 은사요 직임이며 역사이다.
그러나 나타나는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
은사는 개인적으로 다르며 직임은 수동적이나 역사는 능동적으로 나타난다.
지혜와 지식의 말씀 -직임이다.
신유와 능력 - 능동적인 역사이다.
믿음은 은사, 예언 방언도 은사적인 것들이다.
서로 나눌 수는 없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사람의 기질에 따라 은사가 다르게 주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은사들이 다 한 성령의 나타나심이다(7절)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태풍의 핵이라면 성령의 은사는
태풍의 영향권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엔 성령’(in) 곧 안에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과
에피(on) 성령, 밖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의 차이는 지속적이냐 단회적이냐 하는데 있다.
이것이 바로 고전13장이 은사에 대한 말씀의 12장과 14장에 끼어 있는 이유이다.
그 분의 존재는 우리 안의 빛이며 그 분의 나타남은 바깥의 빛이다.
바로 세상의 빛이다.
7절 ‘유익하게 하려하심이라’ -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 곧 은사를
주신 목적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유익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고 은사는 사모하고(12:31) 사랑은 추구하라(고전14:1)고 말씀하신다.
12절 몸은 단수이다. 그러나 지체는 복수로 많다.
하나의 원리에 따라 여러 결과가 나온다.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 그리스도는 전체이다.
그 안에 지체들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고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성도들끼리 조화를 이룬다. 안 되면 어두움으로 쫓겨난다(가룟 유다처럼)
빛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 섞인다. 안 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다. 서로 찢어 놓는다.
이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몸에 있어서 지체는 자기 주장이 없고 오직 전체 몸을 위해서 존재하고 일을 한다.
오른 발이 잘 걷는다고 두 번 뛰려고 하지 않음과 같다.
13절 한 성령의 세례의 목적은 한 몸을 만들기 위함이다.
로마서 6장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한 몸이 안 되었으면 성령 세례에
대한 말씀을 듣고 성령세례를 받아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영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으면
이제 진리의 지식을 따라 지속적으로 보존해 나가야 한다.
한 성령을 먹고 마셔야 한다. 한 나무의 모든 줄기와 가지와 잎은
한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진액을 마신다. 일체이다.
14절 한 몸과 여러 지체 -원형의 교회와 모형의 교회(모임이나 공통체)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운 교회들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
계2, 3장은 원형교회의 표본과 유형들이다.
4장 이후는 천상의 원형교회를 보이신다. 특히 5장에서는 책이 열린다.
그리고 7장의 사건을 보면 보좌, 네 생물, 24장로,
인 맞은 144,000과 흰 옷 입은 큰 무리가 천상의 원형교회의 구성도이다.
그 외에는 모형교회 안에 있다 할지라도 심판의 대상이다. 의인중의 악인이 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모형인 지역교회에
집착하지 말고 이 원형교회의 성도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특히 고린도후서는 원형교회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주의 사명을 받아 추수하는 일꾼의 사명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일이다.
15절 손과 발이 서로 자기를 주장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손과 발이 머리의 지배를 받지 않고 각각 놀면 중풍병자가 아닌가?
16절 귀와 눈이 서로 주장한다. 참 난감한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이 모이는 불완전한 모형교회에서는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너와 내가 없고 존귀와 비천이 따로 없다.
이를 서로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가 성숙할 때 까지 참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전체 속에 하나의 개체로 보신다.
하늘 교회에 속한 땅의 교회이다. 그러나 이단은 이를 무시하고 자기들 것만 주장한다.
성막은 하늘의 참 성전의 그림자이다. 모형이다. 원형이 아니다.
만일 지체들 중에 분쟁이 있으면 그건 서로 지체가 아니다.
자신이 지체로서 확인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기생하고 있는가?
지체 중에는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그리고 귀한 것과 약한 것이 있다.
그러나 다 하나님의 가치성이 있다. 흡사 오케스트라의 악기와 같다.
발가락의 발톱은 발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발가락 없는 발은 균형도 안 잡히고 힘을 쓸 수가 없다.
몸의 각 지체는 창조주의 입장에서는 다 하나 같이 귀하다.
진정한 의미의 한 지체는 동고동락이며 일심동체이다.
그 관계성과 상태의 표현이 바로 25절이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아보게 하셨으니”
서로 하나가 되어 분쟁이 없고 서로 돌아보고 염려를 한다.
표현하지 않아도 고통이 같이 온다. 그리고 그 문제는 얼마가지 않아서 해결이 된다.
서로 중보의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영이며 한 신경조직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친숙한 관계라 할지라도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27절 롬6:1절 이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이 되어 죽고 함께 산 것’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는 공동운명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생명과 부활의 능력의 효력은 영원하다.
사건은 단회이지만 그 의미와 능력은 영원하다.
25-26절을 전제한 27절의 말씀이다.
한 몸으로서 분쟁이 없고, 같이 염려하며 지체의 고통과 영광을 같이 받는
‘너희는 이런 존재 곧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말씀이다.
성경이 1,600년 동안 40여명에 의해 기록이 되었으나
한 권이 된 것은 바로 천상에 있는 원형교회의 소속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적인 신앙만이 구원이 되는 것이다.
천사는 하나님께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구원을 선포하고
이를 위해 한 몸을 이루는 일을 돕는다. 그러나 마귀는 갈라놓는다.
욥1장처럼 이를 위해 두루 돌아다닌다. 마귀가 가는 곳은 어디나 참소와 심판을 일으킨다.
28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들... 이런 것들이 교회 중에 전체사람이냐 아니면 일부냐?
29절 다 그런 직분이나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일부다.
30절 국가에도 관원이 있고 백성이 있듯이 한정적인 다수이다.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보편적인 은사는 바로 13장이다.
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더욱 큰 은사는 복수이다.
그리고 14:1절 ‘사랑을 구하라’ -사랑을 추구하라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사랑을 구하라는 말씀은
의무적이고 은사를 사모하라는 보편적인 말씀이다.
은사를 사모하되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ex: 사도 선지자 교사 등등)
다시 말하면 능력적인 것 보다는 말씀의 사역자가 되라는 뜻이다.
말씀은 사람들의 생명이 된다(롬10:8-10)
그 반면에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 증거되는 유익이 있다.
‘제일 좋은 길’
질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을 초월해서 온전함에 나가는 길이다.
제일이라는 말은 넘쳐난다는 의미도 있다. 그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전도나 구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 힘이 안 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31절을 보면 개인의 신앙의 여정에 은사의 때가 있고
사랑의 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앙은 발전을 해야 한다.
대부분 신앙의 진보를 보면 처음에는 표적신앙으로 시작해서 은혜를 받고 사모하는
단계 그 다음에는 진리 안에서 영생을 누리고 하나님과 교제는 신앙으로 발전을 한다.
그 중간에 율법주의 도덕관의 신앙으로 빠질 우려가 있지만 항상 다음 단계로 진보를 해야 한다.
은사는 사랑으로 가는 길에 보조적으로 꼭 필요하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 머물러 있을까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은사가 필요하나 거기에 잡히는 것을 염려한다. 그리고 은사 자체는 구원이 아니다.
온전한 사랑이 바로 구원을 보증한다. 진리는 그 사랑을 얻는 방법이다
깨달음으로 오고 그리고 반복적인 적용을 통해 그렇게 살게 된다.
인간은 무엇에 푹 빠지는 기질을 다 가지고 있다.
좁은 길에? 아니면 넓은 길에 빠질까?
우리는 지금 오늘의 나의 말세를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떠나는 말세 곧 별세이다.
나를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날마다 자아와 욕심을 버리는 말세적인 신앙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복을 얻고 맛보고 있는가?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든 구원과 그 복을 죽은 다음으로 미루고 있다는 점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산앙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