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릉과 비문이 집안에 있다. 고구려 태왕들의 왕릉과 수 만기의 고구려고분군이 존재하고 있는 집안이 국내성이고, 차이나사료에 고구려 남쪽에 백제가 있고 백제 북쪽에 고구려가 존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는 유주자사을 임명하여 단군조선의 직할영토로써 단군조선의 화폐였던 [명도전]이 분포한 황하이북지역을 통치하였다.
백제토기 유물들과 왕궁기와 .동진과의 교류 토기등이 출토된 풍납토성이 동아시아 최대규모의 백제위례성이다. 석촌동의 거대한 왕급고분들과 한강지역에 수백개의 백제고분이 존재하고 있다.
아리수가 한강이다. 관미성은 한강하구 교동도에 있는 성이고, 관미성을 격파해야 백제위례성과 서해로 이어지는 한강하구를 막기때문에 백제 숨통이 끓어지는거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이 수군과 육군을 동원하여 20일 동안 공격하여 백제 관미성을 차지하고 백제의 숨통을 쥔 것이다.
신라를 구원한 광개토태왕의 호우총이 경주에서 출토되었다. 역사는 문헌과 고고학적으로 일치가 되야 학술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고구려 장수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내서 고구려를 협공하자는 백제 개로대왕을 참수하고 백제를 웅진으로 밀어 버리고 남진하여 충주에 고구려비를 세우고 제후국 신라에 고구려 군대를 주둔시켰다.
차이나사료에 [백제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백제 왕이 머무는 성은 동과 서에 존재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료내용은 백제 본국이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차이나동해안지역에도 백제 왕이 머무는 왕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니 백제도 차이나동해안지역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삼국사기/최치원 열전]과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듯이 백제와 고구려는 차이나동해안지역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했고 백제 동성대왕이 백가에게 암살당하고 백제권력내분이 발생할 때 고구려 문자태왕이 차이나동해안지역의 백제영토를 모두 차지했고 한반도 신라백성들을 천주(홍콩)지역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그래서 홍콩지역에 신라관련 지명이나 유적들이 존재하는 것이다.[윤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