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증과 설교
유 태 영 장로 (소망교회 장로, 건국대 교수,부총장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26~29).
여러분들이 이 성경에 대해서는 저보다 잘 알고 계실 줄 압니다만 여기서 육체라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라고 하는 말로 주석을 하면 아주 이해가 빠릅니다.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말아라. 세상에 천하고, 미련하고, 형편없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못나고, 없고, 형편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들어서 쓰신다면 세상적인 것이 능한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한다. 다시 해석한다면 내 자신이 그렇게 부족하고, 내 자신이 그렇게 없고, 못나고, 미련하고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은 즉 겸손하게 되었던지 사실이 그러던지간에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항상 곁에 계신다 하는 약속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자전적 에세이집, 말하자면 신앙 간증서를 냈습니다. 방금 소개한대로『언제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라는 책입니다. 사실은 6, 7년 전부터 여러 출판사에서 저에게 전기를 쓰자고 권유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전기라는 것은 대통령을 지내거나 국회의장을 지내거나 재벌을 하거나 하여튼 대단한 사람이 쓰는 것이지 나같은 촌사람 천민 출신이 무슨 전기를 다 쓰냐 하면서 다 거절을 했어요. 그런데 작년 가을에 국민일보사의 출판부의 책임자가 와서 이야기 하는데 전기를 쓰자고 말을 안하고 “유박사님의 간증을 많이 들었는데 간증을 듣다보니까 어렸을 때 그렇게 고생을 하고 청소년 시절에 그렇게 어려운 시련 속에서 신앙으로 극복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고 살아나온 그 경험들을 좀 써서 젊은사람들한테 좀 교훈이 되게, 희망을 갖게, 도전을 받게 해주는 것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 그런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훌륭한 사람이 무슨 역사의 뒤안길에 남은 어떤 이런 사실을 기록한 게 아니고 그냥 천민으로 살아온 그것들을 쓰자 이거예요. 그래서 그건 가만히 생각하니까 괜찮을 것 같애요. 그래서 썼습니다. 써서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더니 출판사에서 철자법 교정도 보고 그러는 가운데 출판사 직원들이 감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책임자가 하는 말이 앞으로 3년 이내에 2, 3억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더라구요. 말하자면 이제 책이 많이 팔린다 그말이겠죠. 그래서 그때 내가 선언을 했습니다. “이 책을 판 모든 이익금은 40년 전 유태영을 돕는 일에 쓰겠다.” 40년 전 유태영이, 무슨 소리여 이게. 40년 전 유태영은 길가에서 구두닦이 하고, 잘 때가 없어서 기차역에서도 자고, 길가에서도 자고, 많이 굶고, 길에서 쓰러지고 그런 생활을 십 몇 년을 했어요. 지금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소년 소녀 가장도 있고, 구두닦이 하면서 야간고등학교 다니면서 참 어려우면서도 신앙으로 버티고 사는 사람, 또는 신앙으로 인도할 사람, 그 사람들을 위해서 장학재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제가 사는 데가 경기도 분당인데 경기도에서는 지방도에서는 장학재단 만드는 데 최하 발족하는 데 기금이 2억입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하나님께서 역사를 해주시는데요 제가 전화를 여러 번 받아요. “아! 유박사님 유박사님의 책을 읽고 너무 감동이 되어서 이번에 50권을 사서 내고향 친척들한테 나눠줬습니다.” 어떤 사람은 100권을 사서 나눠준 사람만도 열 몇 명입니다. 50권, 30권, 20권,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교보문고 책방에 가서 이렇게 보니까 텔레비젼에서 가끔 보는 얼굴이 책가 위에 있더래요. 그래서 한 번 보자 하고 사서 본 날로부터 책 다 읽던 날까지 책을 손에서 놓은 일이 없대요. “그래서 오늘 두 번째 교보문고에 와서 30권을 지금 사가는 중입니다.” 참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더라구요. 지금 몇 만 권이 팔렸습니다. 그래서 인쇄로 들어온 것만 해도 벌써 몇 천만원이 됩니다. 제가 따로 그런 사업을 위해서 조금 저축한 돈에서 벌써 1억 4, 5천만원이 넘어갔습니다. 또 이 뜻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전화를 해가지고 계좌번호를 물어서 50만원, 100만원, 최근에는 누가 또 천만원을 입금시키면서 나도 거기다가 동참을 좀 하게 해달라고 합디다. 하루하루가 살아나가는 것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책 서문에 쓴 글을 하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게 있습니다. 여러 목사님들도 다 책을 많이 쓰실 줄 압니다. 서문은 제일 나중에 쓰지 않습니까? 글을 다 쓰고 교정을 다 보면 서문은 제일 나중에 씁니다. 저도 서문을 제일 나중에 썼어요. 그리고 이 글을 쓸려고 하다보니까 어렸을 때를 그냥 상상보다는 근거있는 회상을 하고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다 봤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어렸을 때의 제 자신에 대한 기록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제 나이가 금년에 67살입니다. 국민학교 때 시험지 가지고 있는 사람 있어요? 저 몇 장 있어요. 국민학교 때 교과서 서너 권 있어요. 출판박물관에서 한 권 달라고 해서 줬더니 삼성출판박물관이라고 큰 박물관입니다. 한가운데다 유리상자에다 특별히 보관해서 넣어서 “유태영 박사가 어린 시절 배운 교과서” 그렇게 전시해놓았더라구요. 내가 생각해도 골동품같이 생겼습니다. 그 시절에 너무 우리 나라가 어려우니까 신문을 녹여가지고 책을 만들었는데 신문 글자가 덜 녹아져서 거꾸로 옳게 배겨져 있어요. 그런 교과서, 군정청 항무국 해방후에 있었던 교과서입니다. 그때는 우리 나라 정부가 없고 미군정하에 있었잖아요. 그리고 1학년 때부터 통신표, 성적표, 졸업장, 상장, 모조리 있어요. 일기를 하루도 안빼놓고 썼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쓴 그 일기를 이렇게 된 것을 대충 대충 좀 읽었습니다. 어느날 일기를 하나 떠들었는데 국민학교 6학년 때의 일기였습니다. 해방 이후에 한 1, 2년 한글을 배웠습니다. 여기 나이 드신 분은 알잖아요. 일정 때 일본말로만 공부하고 학교에 가서도 조선말 쓰지도 못하게 하고 그랬잖아요. 한글이 있는 줄도 모르고 저는 국민학교 상급반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니까 1학년도 ㄱ, ㄴ, 3학년도, 5학년도, 6학년도 다 ㄱ, ㄴ이야. 1학년, 2학년도 없이 모조리 ㄱ, ㄴ 배웠어요. 그러기도 하고 필적이 안좋기도 했지만 글씨가 지금 보니까 국민학교 한 2학년이나 3학년 정도 필적이예요. 그런데 일기를 썼는데 내가 그 한날 그런 건 기억을 해요. 그 노트를 자세히 보니까 갱지를 사다가 어머니가 물감들이는 물감을 찍어가지고 노트처럼 초록색으로 줄을 쳤어요. 그리고 제일 위에는 빨간 물감으로 또 두 줄을 가늘게 딱 쳐서 얼핏보면 노트같아요. 말하자면 사제노트입니다. 그런데 위에다 뭐라고 했냐면 몇 월 몇 일 무슨 요일 그리고 맑음 오후에 흐림. 그리고 썼는데 내가 그 구절을 외워요. 그랬던가 할 정도로 일기를 읽기 전에는 몰랐는데 이번에 전기를 쓰면서 일기를 보니까 ‘어제 아침 밥을 못먹고 굶었다. 어제 점심은 물만 먹고 넘어갔다. 어제 저녁은 그냥 잤다. 오늘 아침에는 어머니가 쑥만 삶아서 쑥물을 주어 몇 모금 마시고 학교를 가니 기운이 없어서 걸을 수가 없구나. 왜 우리 농촌에 농민들은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할까?’ 뭐 이런 식으로 썼습니다. 그게 하루만 그런 게 아니예요. 그런 식으로 살았어요. 저만 그랬겠어요? 그 시대에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읽어보는 가운데 제가 전기에다가 쭈욱 썼습니다. 쓰면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배역’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더라구요. 배급한다고 하는 ‘배’자, 역할이라고 하는 ‘역’자, 배역. 이건 영화나 연극에 감독이 주로 쓰는 말입니다. 무슨 배역을 맡긴다고 큰 영화 제작하는 감독이 여기와서 여러분을 탁 보면 내가 얼굴을 봐도 여기 황후 될 분도 몇 분 계시고, 임금님, 장군될 분도 계십니다. 장군하라고 그러면 장군이 됩니다. 제가 왜 그 생각을 하냐 하면 7년 전인가 8년 전에 KBS에서 특강을 한다고 저보고 ‘유대민족의 자녀교육’ 한 시간 특강을 해달라고 해서 간 일이 있습니다. 갔더니 PD하고 만나서 얘기를 하는데, 대기실이 있는데 보니까 텔레비젼에서 보던 탈렌트들이 왔다 갔다 하더라구요. 처음 봤어요. 텔레비젼에서는 늘 보지만 실물은 처음 봤거든요. 신통해서 봤어요. 나도 곧 텔레비젼에 나올 사람이지만. 텔레비젼에서 왕, 세종대왕, 무슨 왕으로 나온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니까 텔레비젼에 나올 때는 왕같이 근사하게 보이더라구요. 거기 왔다 갔다 할 때 보니까 그냥 잠바 입고 왔다 갔다 하는데 동네 아저씨여. 동네 꼬마둥이야. 감독이 동네 꼬마둥이 같은 사람 하나 택하잖아요? 그러면 일류 의상 작가를 불러다가 옷을 해 입힙니다. 돈이 얼마가 들더래도 이 사람은 왕의 품위가 나도록 옷을 입혀라는 겁니다. 대통령 역할하는 사람은 대통령 옷을 입혀라 이겁니다. 일류 미용사를(방송국에서는 분장사라고 그래요) 데려다가 화장을 해요. 수염도 붙이고, 뭐 하여튼 다 해요. 그 다음에는 분위기를 조성해요. 그 사람이 걸어가면 사람들이 다 엎드리도록 한다구요. 그리고 그 사람이 말하기를 “여봐라 이리 와라” 그러면 “에이, 왕이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하냐? 짐이 말하노니” 이렇게 하라고 또 감독이 가르쳐요. 감독이 다 해줘버립니다. 여기 앞에 앉아계신 집사님인가 전도사님에게 여왕 한 번 하라 그러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감독이 시키는대로만 하면 뜹니다. 여왕으로 떠버려요. 인생이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감독이시고, 우리가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우리에게 맞는 배역을 주셨다 말입니다. 그 배역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가 아닙니까? 전기를 다 쓰고보니까 그 생각이 듭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많은 역할을 주셔서 내가 연출을 한 것이 아니냐? 두 가지 뜻이 있어요. 하나는 원래 자격이 없다 그 말이예요. 여러분, 요즘에 연속극 가끔 봅니다만 텔레비젼에 나오는 무슨 궁예다, 견훤이다 하는 사람 있지요? 궁예 자격 없어요. 궁예가 살았을 때 그 배우 나타나면 궁중 입구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구요. 그러나 감독이 입혀놓으니까 궁예 같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능력도 없고, 자질도 없고 아무 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장로로, 권사로, 여전도회장으로 이런 역할을 주실 때는 반드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환경과 정서를 함께 주신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나오는 것이 감사하다는 말밖에 없어요. 그래서 감사합니다 이말 밖에는 나올 일이 없어요. 제가 전기를 다 쓰고 보니까 그말 밖에 없습니다. 감사합니다는 말밖에 안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사람에게 엄청난 배역을 주셨습니다. 보세요. 1960년대에 덴마크라고 하는 지상낙원. 그 꿈의 세계같은 그 덴마크 나라에 유학을 갔잖아요. 거기가서 그 나라 말을 배우고 대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냥 유학생도 아닙니다. 그 나라 국왕이 특별초청을 해가지고 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나는데 일간지, 월간지, 주간지 매일 났습니다. 어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밥값을 안받습니다. 그저께 당신 기사를 읽었는데 우리집에 와서 밥 먹어준 것만도 영광이라 이겁니다. 여러분 상상 한 번 해보세요. 주말이 돼서 학교 근처 동네 골목을 산책하고 나면 창문을 열고 동네 아주머니가 내 이름을 부릅니다. 물론 덴마크말로 “유태영씨 유태영씨, 우리 집에 와서 차 한 잔 먹고 가라”고. 차 한 잔 먹고 또 이야기하면 밥 먹고 가라고 그래요. 내일 또 오라고 그래요. 동네가 다 우리 친척집과 같습니다. 내가 한국에서 신문배달은 해 봤지만 신문 인터뷰는 거기 가서 처음 해봤습니다. 아니 내가 어디에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런 줄 아시냐고. 공부를 잘 해서 갔냐?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 갔냐? 아닙니다. 백이 있어서 갔냐?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나중에 자세히 얘기를 드리겠습니다만은 다시 또 이스라엘에서 초청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서 또 이스라엘 말을 배우고 이스라엘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하는데도 열심히 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고 하니 일기에 보니까 도서관에서 책을 열심히 보다가 창문을 내다봤더니 노란 꽃이 피었는데 한 사흘 후에 생각나서 또 이렇게 봤더니 하얀 눈이 왔다니까, 세 철이 지나가는 것을 한 사흘 지나간 것으로 느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이라고 하는 대학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세계 10대 대학 중에 하나로 들어갑니다. 하버드, 예일, 옥스퍼드와 동격으로 끼워놓았어요. 거기서 석사학위를 할려면 보통 2년 내지 3년 걸려야 되고, 박사학위 할려면 5년 걸립니다. 이게 정상입니다. 제 지도교수가 저 보고 뭐라 그러는지 알아요? 자기 교수 25년 생활하는 동안에 너처럼 학위를 빨리 끝낸 사람은 본 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ㄱ, ㄴ을 배우기 시작한 날로부터 만 6개월만에 히브리 말을 다 끝내버렸습니다. 여러분 신학교 다닐 때 히브리말 배워서 아시잖아요. 6개월만에 대학원 입학시험을 이스라엘 말로 봤습니다. 면접을 그것도 한 시간이나. 그리고 석사, 박사학위를 만 4년만에 수석으로 했습니다. 학위증에 이스라엘말로 ‘빼어나게 구별된 성적으로’ 이 뜻을 가진 글자를 써주더라구요. 그 해에 그 글자 받은 사람은 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국립대학에서 교수로 초빙을 해줘서 동양사람으로는 제가 처음으로 이스라엘말로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서 몇 년 가르쳤습니다. ㄱ, ㄴ을 배우기 시작한 날로부터 정확하게 4년 반만에 교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유박사 머리 좋은가 보다.’ 천만에. 이 머리로 단어 하나 외울려면 다섯 번, 여섯 번 잊어버려야 내 단어가 됩니다. 콘사이스를 찾을 때마다 볼펜으로 콕 점을 찍어놓았거든요. 그게 건망증인지 뭔지 한 번 보면 자꾸 잊어버려요. 머리가 좋은 것도 못돼요. 그런데 기도하면서 공부를 하면 엄청난 능률이 올라요. 초능력적인 능률이 올라요. 내 이스라엘 학교에 들어가서 그러니까 6개월만에 들어갔으니까 다시 3개월 지날 때 즈음 되어서 대학원 세미나 시간에 내가 발표하게 되었어요. 내 발표 차례가 되었어요. 강의 듣는 것은 한글로 받아써버리면 되니까 대충 모르는 단어가 지나가더라도 짐작해서 쓰는데 이게 가서 강연을 하면 문제가 된다구요. 한 2, 3일 전부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생각하고 모르는 단어는 미리 콘사이스 찾아가지고 찾아놓고 가서 발표를 했는데 그때 발표 점수가 98점을 맞았어요. 그런데 내가 이 얘기를 98점 맞은 그 얘기를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참 발표를 하는데 내가 모르는 단어가 입에서 그냥 나가버려 깜짝 놀랬습니다. 가슴이 막 벌렁벌렁해요. 무슨 말을 하다가 “사람죽여” 그 소리가 나갔으면 어떻게 할거예요. 나중에 콘사이스를 찾아보니까 정확하게 맞는 단어, 맞는 장소에 써먹어졌다니까요. 그래서 보니까 점을 몇 점 찍어놨습니다. 그러니까 외웠다가 잊어버린 단어인데, 즉 말하자면 잠재의식 속에 있는 단어가 막 나가요.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덴마크에서도 그런 체험을 하고, 이스라엘에서도 여러 번 학술강연한다든지 할 때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덴마크에서도 그랬죠. 가서 3개월만에 덴마크말 마스터 해버리고 그 다음에 6개월만에 대학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9개월만에 여러 단체에서 저를 초청해서 한국을 소개하는 강연을 했어요. 그때 덴마크 사람들이 한국을 모르더라구요. 60년대 한국을 몰라요. 그래서 심지어 어떤 집에 가보면 “너희 나라에 텔레비젼이 있냐? 라디오 방송이 있냐? 신문이 있냐?” 세상에 이런 무식한 질문을 합니다. 한데 쥐어박아주고 싶지만 모르니까 그러겠지 하고 설명을 했어요. 그리고 내가 한국을 잘 안다고 서재에 가서 사진을 꺼내오는데 보니까 옷을 홀딱 벗고 배가 이만큼 나오는 애기를 찍어놓은 사진입니다. 왜그런가 하면 구호물자 모금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진을 많이 뿌리면서 한국 전쟁에 불쌍하니까 돈좀 내라 그러니까 한국을 알기를 애들마다 배가 이만큼 나온 줄 알아요. 나는 어떻게 꺼져가지고 갔는가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그렇지 않다는 얘기도 하고 이렇게 지냈는데 하여튼 그런 것을 보더라도 이게 하나님께서 저에게 준 은총입니다. 안그래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대학에서 학과장도 했지요. 대학신문사 주간겸 편집인 했지요. 학생처장 했지요. 그 다음에 박물관장했지요. 민족문화연구원장 했지요. 그 다음에 농과대학 학장을 했지요. 나중에 부총장, 부총장을 하니까 대학살림을 다 맡아보는데 건국대학교 살림을 보니까 건국대학교 교수 30년 있다가 나와도 살림 내용을 모릅니다. 보직을 깊숙히 맡아서 총괄을 해봐야 알지. 우리 건국대학교 규모가 학생들이 24,000명, 단과대학이 16개, 그리고 대학원이 12개, 전임교수들이 600여명, 강사들이 500여명, 직원들이 300여명, 그리고 1년에 쓰는 예산이 1,300억입니다. 대학 하나 운영할려면 1,000억 이상 있어야 운영이 됩니다. 그걸 제가 다 결제를 하고 학교 건축을 한다든지, 월급을 준다든지, 교수를 채용한다든지, 총장님은 주로 대외적인 일을 하고 제가 위에 심부름을 다 했던 일이 있어요. 교수로서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영광입니다. 보람이예요. 그것 뿐입니까? 학교 밖에서, 뭐 부산대학, 영남대학, 서울대학, 고려대학교 모든 교수들이 모인 학회가 있는데 그것도 전국 학회 회장을 했잖아요. 부회장도 하고 또 다른 학교 이사도 하고, 이런 것도 다 하나님께서 역할을 주셔서 잘 해냈습니다. 5년 전에는 루마니아에서 국제 학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또 투표를 해서 뽑는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교수들이 왔는데 제가 회장이 돼버렸어요. 대사관에서 우리 한국 교수가 학회장이 됐다고 축하를 하고 야단났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저를 시키는데 보니까 아주 쉽게 시키더라구요. 나는 할 생각을 안했어요. 국제학회에 회장을 한다는 것이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하고 기라성 같은 사람들 아니예요. 그런데 거기서 내가 회장을 하는데 일본 동경대학에서 온 교수가 회장은 나이든 사람이 막 명함을 자꾸 돌리고 그러더라구요. 이름 알리려고. 나는 그런 생각도 안했는데 내가 하나 특기가 있어요. 한국에서도 교수들이 많이 갔는데 덴마크에서 온 교수를 누가 만나면 손을 잡고 나한테 데리고 와요. “우리 한국에 유태영 교수가 있는데 덴마크에서 공부했다. 한 번 만나보지 않을래?” 궁금하니까 옵니다. 만나니까 반가워가지고 덴마크말로 얘기할 거 아니예요. 옆에 있는 사람들이 눈이 둥그레져가지고 쳐다봅니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소리거든요. 독일어나 스페인어나 중국어나 이런 것은 외국어 같은 생각도 들고 쓰는 사람이 많은데 덴마크말을 누가 써요? 덴마크 사람 아니고는 쓰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런데 동양의 새까만 사람이 샬라 샬라 하니까 너무 재미있어서 그런지 다 쳐다봅니다. 또 이스라엘에서 온 교수가 있으면 끌고 나한테 옵니다. 이스라엘 교수는 이스라엘에서 밥 먹었냐 안 먹었냐 그런 말만 가지고 돼요? 대학에서 강의를 할려면 한국말처럼 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하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너무 반가워서 저를 껴안고 뽀뽀를 해요. 이스라엘 사람은 반가우면 뽀뽀를 해요. 그러니 옆에 사람들이 들으니까 이건 더 이상한 소리네. 이스라엘말을 여러분이 배워서 알지만 목구멍 소리가 있잖아요. 내 이스라엘말 배울 때 애먹은 것이 목구멍소리, 맛있는 생선을 먹다가 목구멍에 걸려서 뱉아낼 때 내는 소리 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 한국에서 가르친, 이스라엘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은 그 발음 못하니까 그냥 비슷하게 발음합니다. 그러니까 들을 때 이상하거든. 그런데 또 일본에서 온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하고 젊은 사람들하고 차이가 있어요. 젊은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해요. 나이많은 사람은 영어를 못해요. 몇 시에 어디에서 밥 먹으라는 것도 몰라서 이리 밀려다니고 저리 밀려다니고 그럽니다. 국제학회에 가보면 그래요. 나는 일정 때 국민학교 상급반까지 학교에 가면 조선말은 쓰지도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일본말을 배웠고 그 뒤에 또 공무원을 하면서 신문도 보고, 책도 보고, 편지도 쓰고, 말도 잘 하지는 못하지만 그냥 한단 말이예요. 그래서 나이든 일본 교수들이 나 만나면 전부 나만 따라다녀요. 한국 사람 만나면 외국에 왔다고 외국이라고 해서 영어로 말할 것입니까? 한국말로 말해야지. 그러니까 외국사람들이 볼 때 한국말도 이상한 소리입니다. 소문이 쫘악 퍼지는데 유태영 교수는 머리가 어지럽지도 않는가 모르겠다. 여기서 한국말, 여기서 이스라엘말, 여기서 일본말, 그러니까 총회를 하는데 팬이 있어요. 나보고 한 마디 하라고 그래요. 나가서 전체 모였으니까 영어로 6, 7분간 얘기했죠. 학회는 이렇게 조직해야 되고, 이렇게 해야 되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투표를 하는데 다른 사람 이름을 알아야 쓰죠. 전부 내 이름만 써버려. 그래서 회장 되어버렸다니까. 무슨 능력있어서 된 것도 아닙니다. 회장 발표할 때 가만히 보니 하나님이 시켰다. 하나님이 시킨 거예요. 하나님이 내 뒤에 백으로 있으니까 나가서 당당하게, 그 때는 어깨를 쓱 올리고 나가서 취임사를 했지요. 그리고는 나라별로 카운셀 멤버하고 이사들 다 조사해서 임명해가지고 삼년 전에는 태국 방콕에다가 또 회의를 소집했어요. 300여 명 교수들이 모여가지고 4박 5일동안 멋지게 했어요. 그때도 태국 정부에다 교섭을 해가지고 거기서 호텔도 싸게 들고 장관이 나와서 축사하고, 장관이 리셉션도 열어주고, 정부에서 버스 내서 산업시찰도 시켜주고 이런 프로그램을 했더니 교수들이 전부 나보고 영원히 영원히 회장 해야 한다고 그래요. 작년 8월달에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총회가 열려서 거기서 후임 회장을 뽑아서 인계하고 왔어요. 왜 그런고하니 제가 정년 퇴임을 하거든요. 현직이 아닌 사람이 회장하면 쓰겠어요? 제가 이번 8월달에 학교는 정년퇴임을 해요. 그것도 아버지 덕에 2년을 더 했어요. 왜 그런고하니 호적이 2년이 늦어요. 옛날 우리 살던 시골에는 애기를 낳으면 금방 죽어요. 백일해만 걸려도 죽고, 홍역에 걸려도 죽고 그러니까 금방 애기 낳았다고 출생신고하면 서너 달 후에 또 사망신고 하러 가야됩니다. 그러니까 놓아둬봐. 저놈이 사는가? 죽는가? 한 1년 반쯤 지나서 아버지가 호적신고하러 갔던가봐요. 우리 아들놈 등적하러 왔다고. 호적이라고 하는 ‘적’자에다 오를 ‘등’자 등적하러 왔다고 그러니까 “언제 낳았냐?”고 묻습니다. 작년 언제 낳았다고 그러니까 면서기가 “아저씨, 과태료 내야겠네요.” 촌양반이 과태료가 뭔지 알아요? “과태료가 뭐예요?” “벌금입니다” 하니까 “예끼, 이 사람아, 자식 낳아서 이름 올리러 왔는데 무슨 죄졌다고 벌금이야?” 그러니까 면서기가 “아저씨 돈안내게 해드릴께요.” 쓱싹하는데 신고하러 오는 날을 생일날로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그런 덕을 볼 수가 어디 있어요? 요즘에 1년이면 어디인데 제가 1년 반이 틀려서 1년 반이나 교수를 더 해먹었다니까. 이런 것을 가만히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초청을 해서 강연을 많이 갔어요. 맨 처음에 미국을 갔어요. 20년 전에 미국 워싱턴에서 초청해서 갔는데 왕복 비행기표 1등석을 끊어서 보내고, 워싱턴에 크리스탈 호텔이라고 하는 1급 호텔에서 일주일간 머무르면서 구경 다 시켜주고, 좋은 음식이라는 좋은 음식은 다 대접해주고, 강의는 딱 50분간 했습니다. 갈 때 또 사례비를 줘서 비행기에 가서 이렇게 세어보니까 3,000달러 들어 있었어요. 그땐 큰 돈이었어요. 요즘에도 작은 돈이 아니지만 20년 전에 3,000달러 큰 돈이예요. 또 싱가포르에서도 초청해서 40분간 강연했는데 그것도 3,000달러 주고, 그 큰 호텔 거기서 며칠 머무르면서 일류음식 다 먹여주고 이렇게 호강할 도리가 없어요. 아프리카에 초청을 받아서 맨 처음에 간 데는 수단이라고 하는 나라였어요. 아프리카 중부 동쪽에 있는 나라인데 거기 가니까 군사 독재하는 나라인데 저를 공항에서 비행장 옆에다가 벤츠 자동차 갖다대놓고 거기서부터 태워다가 매일 저녁 문교부장관 초청만찬, 농림부장관 초청만찬, 시장 초청만찬, 만찬, 만찬 하고, 그 공관에다가 3, 40명 관계있는 사람 데려다놓고 간담회 하고, 정책자문을 하고, 또 강당에 올라가서 강의를 하는데 내가 여러분들을 이렇게 보면 얼굴들이 은혜받은 얼굴들이라 환한데 아프리카에서 처음 올라가봤더니 새까매. 머리 속으로 한 번 상상해보세요. 먹을 갈아가지고 착착 바르고 나왔어요. 뭐라고 말을 할까? 이상하더라구요. 꼭 고릴라들 모아놓고 얘기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하나님이 만든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되냐? 거기는 영국식민지니까 영어가 공용어예요. 영어로 강연을 하는데 좀 우스운 예화를 들었더니 여러분처럼 이쁘게 웃지 않고 입을 있는대로 벌려가지고 “와와와 와와와” 이렇게 웃더라구요. 조금 슬픈 이야기를 했더니 전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더라구요. 너무 감동을 받았다고 최고권력자가 나보고 석 달만 더 있어달래요. 여기 지도층인 사람들 전부 정신개혁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다음에 바로 케냐, 나이지리아, 다른 나라로 가도록 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더 못있는다고 이렇게 얘기를 했더니 애석해가지고 그러면 나중에 다음 방학 때 좀 와달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러자고 약속을 했는데 그때 내가 농과대학 학장시절에 갔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까 부총장 감투를 딱 씌워주니까 학교 부총장은 회사 전무같아서 토요일도 없고, 방학도 없어요. 매일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못가고 말았죠. 96년도에 또 여기 곽선희 목사님이 중국 선교사원에서 북경에서 큰 대회를 여는데 저보고 같이 가자고 해서 갔단 말이예요. 가서는 거기서 “한국 새마을운동과 중국 농촌계발” 이걸 또 강연을 했는데 너무 감동을 받았다고, 내가 쉐라톤 호텔에서 자는데 줄줄이 12시반까지 사람들이 와요. 각 성에서 자기 성에 와 달라, 자기 성을 도와 달라. 그래서 중국을 여러 차례 갔습니다. 여러 차례 갔는데 대접을 보통 받은 게 아닙니다. 2년 전인가 한번 제일 크게 대접을 받았는데 새단 차가 당 서기, 비서장, 뒤에 성장 조리, 부성장 이런 사람들이 끌고 앞에 경찰차가 웽웽하고 그러고 다녔습니다. 어떤 농촌에 가니까 시범농촌을 간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1,500명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말로 동네에 무슨 축제가 있는가보다 하고 차에서 내려서 봤더니 빨간 헝겊으로 프랜카드를 걸어놓았는데 검정 붓글씨로 “유태영 박사 열렬 환영”, 야! 가는데마다 당서기, 비서장들이 나와서 마중을 하고 제가 말하는 것 귀담아 듣고, 그렇게 대접을 받을 도리가 없어요. 음식도 한 번 나오는 것 보면 100여 가지가 나옵니다. 100가지, 150가지. 저 감숙성 저쪽에 가서는 세상에 낙타발바닥 요리를 다 먹어봤습니다. 나는 무슨 곰발바닥 요리는 알지만 낙타발바닥 요리 먹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렇게 대접을 받으면서 다니는 것이 뭐 때문에 그러느냐구요? 내가 장관을 했어? 무슨 대통령 아들이요? 손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묘하게 이렇게 저렇게 기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배역을 주셨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당서기든 누구한테든 당당하게 북경에서 전국 시장, 군수들 모아놓은 데서 당당하게 강연을 하고, 바로 20여일 전에도 북경에 있었습니다. 중서부 지역에 시장, 군수들 또 몇 백 명 모아놓고 네 시간 강연하고 왔습니다. 또 대만에서 세계 발전도상국가 35개국 대표들이 모여가지고 세미나 하는데 거기 가서 또 9시간씩 연속 강의를 영어로 합니다만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그 이튿날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제가 강연을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감동을 받았다고 주최자측에서 안빼놔서 지금 16년째 가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강의할 때마다 나는 반드시 15%는 전도입니다.
여러분 요즘에 EBS 방송 들으신 분 더러 있지요? 그 눈치 챈 사람은 채더라구요. 내가 전도할려고 하는데 방송국에서 하나님 얘기 좀 하지말라 이거예요. 기도, 교회, 예수 이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살살 돌려서 하나님 대신에 여호와라 그러고 성경 대신에 모세5경이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알지만 안믿는 사람은 여호와가 무엇인지 몰라요. 또 모세5경 그러면 성경이 아닌지 알아요. 그냥 모세5경에 자꾸 내가 그런 얘기 안합디까? 나중에 알고 봤더니 EBS방송국에 부사장, PD왕초 있어요. 기획상무, 또 PD, 내 프로그램 만드는 프로그램 담당 팀장 전부 불교신자예요. 평신도회장 뭐 그래요. 난 처음에 공영방송이니까 “하나님 얘기 좀 덜 하고 피해주세요” 그래서 보통으로 알아들었단 말이예요. 그런데 며칠 후에 그 부사장이 보자고 해서 갔더니 부사장실에 간부들이 다 모였어요. 그런데 부사장이 뭐라고 하냐 하면 내가 EBS에서 방송하는 방송도 다 그렇게 보지 않는데 유박사님 강의는 내가 빼놓지 않고 꼭 듣습니다. 아주 감동스럽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교회에 나가세요?” 그랬다고. 대개 예수 믿는 사람이 은혜스럽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표정으로 그렇게 얘기를 해서. “교회요?” 일생동안 교회 나가본 일이 없대요. “그런데 은혜를 받았다고 안그랬냐?”고 그랬더니 “나는 불교인입니다.” 아! 하나님 말 하지 말라는 소리 이제 알아들었다. 그래서 김용옥 교수같은 사람 불러다가 기독교 치게 하는 것이 그 의도가 있었더라구 보니까. 그런데 세 번, 네 번 방송이 나가니까 시청률이 최고로 올라가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 얘기해도 아무소리 안합니다. 처음에는 방송을 열 대여섯 번 하자고 하던 것이 자꾸 늘어나고 늘어나고 그래서 석 달을 하잖아요. 6월말까지 늘어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제것까지 해서 녹화는 다 끝내놨습니다. 미리 미리 다 녹화해요. 다 끝내 놨는데 방송 안된 것 딱 하나 있어요. 녹화를 다 했는데 성경을 줄줄 읽어도 아무소리 안해요. 시청률이 높으니까 아무 소리 안해요.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전화를 많이 걸은 모양이예요. “유박사 강의 많이 하게 하라. 당신 유박사 강의하게 한 것 잘했다” 그러니까 우쭐해가지고 그냥 참는 거예요. 그런데 엊그저께 전화가 왔는데 “죄송합니다. 녹화 한 것 중에 하나 불가불 방송을 안하게 됐으니 다른 주제로 하나만 더 해서 채워달라”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우상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아니 그 부사장이 은혜를 입었을 거예요. 내가 아브라함 아버지 얘기를 했거든요. 아브라함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우상장사였다는 얘기를 했어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어렸을 때부터 신앙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는 것은 어렸을 때 그 아버지가 우상장사를 했다. 우상장사가 뭐냐? 나무로 부처란 말만 빼고는 말에다가 날개를 붙인 것, 독수리 머리에다 사람 모양, 또 이런 저런 돼지 모양, 사슴 모양 이런 것들을 잔뜩 깎아서 만들어놓고 팔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다놓고 장사속으로 갖다놓고는 다 공들이게 하고 절하고 돈 놓고 절하면 돈을 먹고 그 재미로 우상장사를 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생각할 때 이게 못됐다 말이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잠깐 나간 사이에 아주 큰 우상한테 떡 하나를 딱 물려놓고 나머지는 박살을 내놨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와서 보니까 자기 사업이 망해졌거든. “어떤 놈이 이렇게 했냐?” 그러니까 아들이 나서서 “아버지 아버지, 내가 보니까 저 큰 우상이 어떤 사람이 와서 공을 들이니까 큰 우상이 떡을 딱 먹고는 저놈들이 먹는다고 몽둥이를 갖고 다 때려부셨습니다.” 내가 그 다음 말을 강조했거든요.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뭐라고 한 지 아세요? “야 이놈아 만들은 나무가 어떻게 때려부수냐? 감정이 있냐? 보기를 하냐?” 이 아들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아버지 그게 감정도 없고 나무나 돌로 만들은 것에다가 절을 하게 하고 공을 들이게 하고 거기에다가 기도를 드리게 하고 그러면은 얼마나 사기친 것입니까?” 이걸 강조했단 말이예요. 불교인들이 들을 경우에 뜨끔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회의를 하고 하지 말자 그랬대요. 그래서 내가 “그걸 보여주었어야 당신들이 통이 넓은데 통이 좁은 걸 내가 알겠다”고 그래버렸습니다. 하여튼 방송 녹화중에 하나가 불발이었고, 아마 그 부사장이 명령한 것 같아요. 평신도 회장인데 그걸 보여줬어봐요 자기 교인들한테 어지간히 항의를 받을 것 아니예요? 그것 좀 빼고 내가 살짝 할 걸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그 다음에서는 다 얘기했습니다. 거기다 놀라운 것은 마지막 여덟 번은 신앙간증을 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 책을 내가 줬거든요. 너무 감동을 받았대요. 그런데 이건 방송을 꼭 하긴 해야겠는데 기도, 하나님 소리만 조금 덜 하라고 하더라구요. 다 했지요 뭐. 그거 빼고 말이 돼요? “내 특정종교에 대해서 얘기해서 죄송합니다만 나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새벽마다 가서 기도를 하고 그러면 응답을 받습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은 그게 무슨 말인가 모르지만 마음에 욱하니 들어와서 느낌이 있는 것, 이것이 예수” 내가 그렇게 했습니다. 이러면서 방송 여덟 번을 전부 신앙간증 해버렸다니까요. 그런데 다 통과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한테 드린 얘기를 하나님, 기도의 색채를 조금 줄여가지고 좀 희미하게 칠해가지고 그냥 나갑니다.
자 보세요. 그 뿐이예요? 새마을 운동을 또 제가 일으켰다고 하면 아는 사람 별로 없을 겁니다. 제가 덴마크와 이스라엘에서 공부하고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건국대학교에서 농촌운동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들어갔지요. 오후 5시에 들어가서 밤 11시반까지 장관, 차관급 비서관들, 제일 높은 비서관들과 밤늦게까지 얘기를 하고 얘기를 한 끝에 열시 반이 되니까요 최고수석비서관이 대통령께 결재받았다고 하면서 와서 “유선생님, 내일부터 이 청와대에 와서 농촌운동 하시지요. 우리가 전적으로 대통령을 비롯해서 우리가 유선생님을 밀어드릴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요?” 그랬더니, 여기다가 사무실 챙겨줄테니 여기 출근해서 여기서 농촌운동 하라 이거예요. 초창기에는 새마을 운동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그러면 영광입니다” 그래야 할 것 아닙니까? 대통령을 모시고, 옛날 같으면 승정원에 승지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안돼는데요.” 깜짝 놀라요. “왜 그러느냐?”고 그래서 “내가 건국대학교 축산대학 학생들 교육훈련원 책임을 지고 있는 관장이고 강의도 있고 그런데 오늘 저녁에 결정해서 내일부터 어떻게 나옵니까?” 그랬더니 학교 사표내버리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때 권력이 하늘로 올라가고 군사독재정권시절 아닙니까? “안된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그냥 가라고, 알았다고 더 말을 안합니다. 이 양반들이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외국에서 막 돌아와가지고 뭣도 몰라, 권력구조를. 그러니까 권력구조를 아는 사람한테 지시하는 겁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학교에 갔더니 총장님, 이사장님이 새벽에 나와가지고 나를 기다리는 겁니다. 나중에 들으니까 중앙정보부에서 총장님 댁에 밤 12시에 전화를 건 거예요. “이사장님이 내일 아침에 유태영 선생이 출근을 하면 아무런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해가지고 청와대로 보내라.” 총장님이 그러더라니까요. 사무인계고 뭐고 아무 걱정말고 지금 내 차 타고 얼른 들어가래요. 뭐 걱정 말래요. 강의고 뭐고. 그때 정권을 알거나 제도적인 걸 아는 사람은 그렇게 벌벌 떨던 시절입니다. 나는 뭣도 모르니까 안된다고 그랬지. 들어가니까 앉을 자리도 없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거기서 담당관실을 만들었습니다. 또 같이 일할 사람 몇 있으면 좋겠냐고 그래서 내가 얘기했더니 자기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래요. 농촌에 가면 제일 높은 사람이 군수입니다. 정종택 장관이 뭐라고 하냐 하면 우리 내무부에 고등고시 양과를 수석으로 합격하고 전남 장흥에서 군수 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데려오라 했더니 이 사람이 이틀 후에 왔습니다. 어떻게 빨리 인계해버렸는지 아니 새 군수하고 헌 군수하고 어떻게 사무인계 빨리 했는지 이틀 후에 와버렸다니, 권력이 그렇게 무섭더라니까요. 그 다음에 농업협동조합중앙회에 지도과장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난 누군지 모릅니다. 농촌에 다니면서 농민들 지도하는 그 사람 있으면 데려오라 했더니 그 사람은 또 그 이튿날 저녁 때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방을 만드는데 전화놓으니까 오전 동안에 사무실이 딱 되어버려요. 책상 금방 금방 놓고 전화수가 전화 다는데 책상마다 전화가 다섯 대씩입니다. 전화 한 통 들기만 하면 전 군이 통해요. 육?해?공군. 또 하나 들면 전 경찰이 다 통해요. 또 하나 들면 내무부, 외무부 부처가 다 통해요. 또 하나는 구내전화, 또 하나는 일반전화. 책상마다 전화기를 착착 놓았는데 전화 한 번 걸어봤더니만 누가 통화중입니다. 끊어버리고 대 주더라고요. 누가 통화중이다고 잠깐 계세요. 말소리가 들려요. 이거 청와대 전홥니다. “잠깐 끊으세요” 하니까 착착 착착 길 비켜요. 대통령실이 그렇게 권력있는지 그때 가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다 나만 쳐다보는 겁니다. 유태영 선생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거든. 그래서 내가 덴마크에서 공부한 것, 이스라엘에서 공부한 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입니다. 갖다가 그렇게 훈련을 시킨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것을 100% 써먹은 것이 새마을 운동입니다. 그러니까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저는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백이니까. 우리 하나님을 믿으면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죽으면 천당가면 그만 아닙니까? 아침에 첫차 타냐? 막차 타냐? 그러는데 하루종일 뙤약볕에 다니다가 막차 타느니 아침일찍 태워주면 일찍 타고 가는 겁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가끔가다 우리 집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우리 집사람이 “아이구 이기적이다. 우리 식구들을 이렇게 놓고 당신만 버스타고 먼저 가냐? 당신이 제일 나중에 가야지.” “걱정마 내 다 보살펴주겠어. 나를 먼저 불러갈 때는 다 하나님께서 당신도 보살펴 줄테니까 걱정말라고. 나는 다음시간이라도 그러면 할렐루야 하고 간다 말이요.” 그러면 억울하다고, 더 있어야 된다고 그래요. 나는 “안돼 안돼.”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안그래요? 그리고 살려두고 일 시키면 또 하고, 능력 주는대로 또 하고, 이 감동만 믿는 겁니다.
EBS에서 방송하는데 감독이 나한테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방송하기 전날 아가씨 두 명이 학교 내 연구실에 왔어요. “아가씨는 뭣하냐”고 했더니 ‘코디’라고 합디다. 난 코디라는 말 처음 들었어요. 나 옷을 잰다는 거예요. 가봤더니 방송할 때 입는 옷 전부 가져오는 거예요. 방송할 때마다 좋은 옷을 입혔다가 도로 벗겨갑니다. 거기서 감독이 입혀요. 그리고 또 미용사를 대기해놓고 이쁜 미용사가 화장을 합니다. 나는 7년 전에 KBS에서 방송하러 갔더니 보통 인터뷰 할 때는 안그러는데 한 시간 방송 할 때는 반드시 화장을 해요. 그래서 처음에 아가씨가 와가지고 화장을 할려고 그래요. 그래서 “나 안한다고, 세수할 때 비누도 안쓰는 사람인데.” 진짜 그래요. 비누 쓰나 안쓰나 똑같더라구요. 우리 교회에서 어떤 권사님은 나를 보면 그럽니다. “아휴, 유장로님 눈좀 뜨고 다니세요”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눈 큰 권사님이 보는 것보다 이 작은 눈으로 보니까 더 잘 보여요” 그러죠. 그런데 칠한다고 해서 안한다고 하니까 나가더니 PD를 데려왔어요. 그런데 감독이 뭐라고 하냐면 “유박사님, 이쁘게 화장하는 것이 아니고 이게 조명을 하고 사진기가 여기 저기서 찍으면 대머리가 번쩍번쩍 합니다. 그러니까 혐오감이 안나게 번쩍거리지 않게 해야 할 것 아니냐”고 그래서 그러라고 이렇게 내밀었더니 가방을 여니까 화장품만 열 댓개 들었습니다. 이것도 바르고 저것도 바르고, 나중에는 빨간 립스틱까지 발라요. 싹 닦아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래도 조금 불그스럼해야 좋습니다.” 쬐끔만 바른다고 해서 쬐끔만 바르라고 그랬죠. 아 그러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 이뻐보이잖아요.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아이고 텔레비젼보다 실물이 더 예쁘네요.” 그래서 내가 “말할 줄 아네” 그랬어요. 하여튼 감독의 이런 일거수 일투족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줍니다. 저 얼굴이 못나면 좀 잘 나게 화장도 시켜주고, 머리도 빗겨주고, 좋은 옷도 입혀주고, 그리고 말도 잘 하게 해주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탈렌트가 되는 겁니다. TV에 떠요.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시키는대로만 하면 된다 그말입니다.
그런 유태영이라는 사람이 어떤 소년 시절을 지냈느냐? 이미 간증을 들으신 분이 계십니다만 저는 참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저처럼 가난한 사람은 이 중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깊은 산중에서 나서 논 한 평, 밭 한 평 없고, 집도 없고 아버지는 남의집 머슴살이를 한 15년 했습니다. 그 때 났어요. 어머니는 품팔이 하고 내 위에 형님이 두 분, 누님이 두 분 계시는데 한 사람도 국민학교에 입학한 일이 없어요. 입학하지 않았다는 것은 졸업하지 않았다는 얘기예요. 아버지도 무식하시고, 어머니도 무식하시고, 누님들도 형님들도 다 무식하고, 누님도 남의 집 식모살이 가고, 참 말도 못합니다. 내가 학교 들어갈 나이가 됐는데 자동적으로 못들어갑니다. 그래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다 안들어가니까. 그런데 가난하면 또 우리집만 가난한 게 아닙니다. 큰 집, 작은 집, 큰 당숙, 작은 당숙 모조리 가난합니다. 왜 그렇게 가난한 집에 모를 부어놨는지. 여러분 주변에 가난한 사람 봐요. 이상하게 다 가난해. 우리 주변의 집안에서 국민학교 들어간 사람 하나도 없다니까. 주위에서 아버지한테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 이 사람아 자식 하나는 까막눈을 떼 줘야지. 편지가 와도 까막까막 하고 모른다 그말이야. 그러니까 고놈이나 좀 떼줘라. 말하자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가라는 소리가 아니고 편지가 오면 편지가 온 지나 알게.” 그래서 아버지가 큰 마음을 먹고 그 다음 해에 저를 국민학교에 입학을 시켜줬습니다. 너무 가난하니까 수업료가 없어서 쫓겨날 때도 있고. 일본 시대니까. 그리고 노트 살 돈이 없으니까 길가에 붙은 광고지 그걸 뜯어다가 날짜 지낸 광고지 뜯어다가 노트 만들고 교실 청소할 때 몽땅 연필 주워가지고는 산죽이라고 대나무 끝에다가 끼워서 쓰고, 또 연필 깎다가 심 똑 분질러내버린 것 대나무 뿌리에다 구멍 뚫어가지고 거기다 끼워 쓰고 그렇게 공부했습니다. 말도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목회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어린 시절을 조금 말씀을 드립니다. 어린 시절을 보면 너무 가난해서 맨발로 다녔어요. 산이고 들이고 맨발로 다니니까 발바닥이 적응이 되어서 웬만한 것은 찌르지도 않습니다. 가을에 밤을 다 깠으니까, 맨발로 밤송이를 가만히 밟아서 앞으로 밀은 듯 하면 가시가 드러누워서 눌러집니다. 옛날 생각나서 지금 말이야 구두 벗고, 양말 벗고 할려고 하니 가만히 밟기도 전에 꾹꾹 찔러서 안돼요. 내가 아프리카 초청강연 갔을 때 부시맨들 보니까 일생동안 맨발로 다니는 사람 있잖아요. 발바닥이 구두바닥이랑 똑같아서 유리 깨진 것으로 싹 그어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적응되면 그런 거예요. 그 뿐이예요? 세상에 여성들 많은데 죄송합니다만 팬티를 입은 일도 없습니다. 옛날 아버지 어머니도 안 입었고, 열세 살 때 처음으로 어머니가 무명으로 작은 팬티를 만들어서 “태영아 이거 속에다 입어라.” “엄마, 바지 입었는데 또 입어?” 바지를 벗고 속에다 그 놈을 입고 바지를 입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입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안 입다가 입으니까 갑갑하고 답답하고 조이고, 없을 때는 그냥 훌렁훌렁 바람이 잘 통하던데, 완전히 원시인입니다. 그때 또 코를 얼마나 많이 흘렸습니까? 코 여기다가 닦은 동창은 여기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가을철이 되어서 감기가 들었는가봐요. 코를 질퍼득한 놈을 닦았는데 한참 있다가 나와야 괜찮을텐데 금방 나왔던 걸 또 닦으려고 하니까 질퍼득하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빨아먹어버렸습니다. 코를 한 번 빨아먹기 시작하니까 코맛을 알아가지고, 지금도 기억해요. 짭짤한 게 먹을만 하다고요. 요즘도 애들 코 빨아먹기 시작한 애는 자꾸 빨아먹어요. 내가 그런 아이입니다. 목욕이라는 건 한 일이 없습니다. 나만 안했나? 아버지 어머니도 안하는데. 옛날에 촌에서 누가 목욕했어요? 참말로 원시시대였습니다. 요즘에 연탄이 이, 빈대, 벼룩을 없앴어요. 연탄 때기 전에는 다 있었어요. 연탄가스 마시고 다 죽어버렸나봐요. 그런 아이에게 소망이 있겠습니까? 밥은 굶고, 맨발로 다니고, 소나무 겉껍질 벗기고 속에 송피 있죠? 여기 송피 먹은 사람 많이 있을 거예요. 우리 집은 유난히 송피 많이 벗겨다 먹고 소나무 잎사귀도 먹고, 칡뿌리 캐다 먹고, 도토리 따다 먹고, 고향이 전라도니까 물구라고 논에 파뿌리처럼 생겼고 난초꽃처럼 피는 것 있잖아요. 그 뿌리 캐다가 물구죽을 쒀서 먹으면 독해가지고 혓바닥이 좀 아르르 해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제 내가 그런 얘기를 했더니 식품의학을 하는 사람이 내 말을 듣더니 “아, 유박사가 건강한 이유를 내가 알았다”고 느닷없이 그래요. 무슨 말이냐 그랬더니 어렸을 때 먹었다는 그것이 전부 보약이라고 그래요. 물구는 신장을 좋게 하고, 항암제고, 소나무 껍질은 무엇을 좋게 하고, 칡뿌리는 위장을 좋게 하고, 도토리는 중금속을 해독하고, 하여튼 전부 보약이래요. 아무것도 안먹고 보약만 먹었으니까 건강하지 않느냐 이거예요. 아 누가 보약으로 알고 먹었나요? 죽지 않을려고 먹었지. 그런 아이에게 소망이 있겠어요? 생각해봐요. 그런 아이가 코나 빨아먹고, 길바닥에 앉았고, 물구죽이나 쒀 먹고, 하도 굶으니까 목이 길어져요. 가난하고 굶으면 목이 길어져요. 살이 찌면 목이 없어져요. 그렇게 생긴 아이에게 희망이 있겠느냐고? 문제는 시골에 온 목회자가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 시절에 시골에 개척교회가 생겼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열심히 교회를 다녔어요. 초가집 벽을 헐고 볏짚으로 짠 쌀가마니를 땅바닥에다 깔고 예배를 보는 그 교회, 어른들이라고 해야 약 20명, 애들이라고 해야 약 20명, 거기에 나가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나를 연출시킨 거예요. 나한테 그런 배역을 맡겼다 나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의 신앙, 어머니의 기도, 엄청나게 자녀교육을 시켜놓은 겁니다. 아니 무식한 어머니가 무슨 신앙이 얼마나 있고 어떤 차원높은 기도가 있었냐? 나는 기억납니다. 그때 학질이라고 걸리면 말입니다. 요즘 말하면 말라리아입니다. 학질에 걸리면 격일제로 열이 올라 바들바들 떨어요. 그때 긴기랍을 하나 사먹으면 낫는다고 했는데 긴기랍 사먹을 돈이 있어야지. 긴기랍이란 것이 요즘 말하자면 키니네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행주치마 떨어진 것을 물묻혀다가 여기다 올려놓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내가 그 기도이야기를 단순하시고 똑같은 기도를 늘 하기 때문에 내가 외웁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부부를 통해서 보낸 우리 태영이 부모된 나로서는 무식해서 가르치지도 못합니다.” 그냥 마음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하니까 내가 아픈 가운데도 마음에 ‘그렇지’ 이렇게 감동이 되더라고요. 왜? 학교에서 숙제를 내도 내 엄마한테 물어본 일이 없다고요. 한글도 모르는 엄마한테 뭘 물어볼거예요. 그러니까 무식해서 가르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가슴에 확 닿더라구요. “너무 가난해서 밥도 못먹입니다. 이렇게 아파도 약도 못먹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고통을 덜어주세요. 이 아이를 인도해주세요.” 그렇게 기도를 하더라니까요. 아플 때마다 똑같은 기도예요. 그런데 안아플 때 우연히 나무 그늘에서 엄마하고 둘이 앉았을 때 여름에 내 손을 잡고 또 그 얘기를 하십니다. 기도도 아니예요. 이제 눈 뜨고 “태영아 태영아, 너희 부모는 무식해서 너 가르치지도 못하고, 가난해서 너 먹이지도 못한다. 그러니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라. 하나님이 너를 반드시 인도하시리라.” 이게 어머니의 신앙이요, 어머니의 기도요, 어머니의 인생관입니다. 이게 이 소년의 가슴 속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갖다준지 아세요? 실지로 상황이 누구한테 의지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한테 의지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전도사님으로 부임하시는 분이 내 신앙의 아버지입니다. 참 신앙의 길을 제대로 인도하셨어요.
주일학교에 나간지 얼마 안되었을 때 전도사님한테 세 가지 큰 감격을 받았어요. 하나는 “예수님이 누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나?” 이렇게 물었다고요. 그러니까 애들이 합창으로, “우리들요.” 이렇게 대답을 했거든요. 그런데 전도사님이 틀렸다고 그래요. 당황이 돼요. 우리가 그렇게 배웠거든요. 예수님이 만민을 위해서 돌아가시고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배웠는데 그 보혈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배웠는데 틀렸다고 하니 어떻게 할 거예요. 저 뒤에 있는 학생이 “제가 압니다.” 다 쳐다보니까 그 학생이 일어나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하나님을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생각하니까 맞단 말이예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보고 “너 세상에 내려가서 만민의 죄를 지고 너가 대신 죽어야겠다. 그 보혈공로로 내가 만민을 구원하겠노라.” 그리고 보내서 그 하나님 말씀대로 돌아가셨으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돌아가신 게 맞잖아요. 성경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땀흘려가면서 세 번씩이나 새벽에 잠안자고 기도한 게 뭐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이 잔이란 건 뭐예요?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에 안죽게 해주십시오 그 말입니다. 인성과 신성을 겸비한 예수님 인간 예수로서 마지막 한 기도입니다. 세 번이나.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따른다고 가서 잡혀가지고 그때 십자가에 처형되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학생이 하는 말이 맞는 것 아니요? 그런데 전도사님이 또 틀렸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는 꽉 막혀버렸어요. 이것도 안맞고, 저것도 안맞고, 어떻게 되냐? 당황해 있는데 한참 있다가 하시는 말씀이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이게 바른 대답이다”라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거부반응이 확 나더라구요. 아니 예수님이 만민을 위해서 돌아가셨다, 또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다고 할 때는 우 들어가니까 묻어들어가기도 하고 있으나마나 거부반응이 없었는데 아니 구체적으로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 날도 아침 못먹고 굶고 교회를 갔다 말입니다. 머슴의 아들로 밥도 굶고 나오는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안믿어집니다. 우리 동네 면장 아들을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러면 믿겠는데, 설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시다니 말도 안되더라는 말입니다. 그날부터 문제가 생겼어요. 고민이 되어서 잠이 안와요. 안믿어지니까 교회를 안나가야겠거든. 안 나갈려니 마음이 불안합니다. 나갈려니 안믿어집니다. 한 사흘동안 굉장히 고통을 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가슴에 충격적인 감동으로 그게 믿어지는 순간이 오더라구요. 그게 믿어졌을 때 엄청난 변화를 느꼈어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지내게 되면 내 생활, 내 사고방식, 내 행동양식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백이라 말입니다. 자기 독생자 외아들을 처형해서 나를 구원하실 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믿어질 때 엄청난 변화가 생깁니다. 백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백이라는 말이 유행했어요. 백이라는 건 미국사람들이 우리한테 지어놓은 말이예요. ‘백그라운드’라는 말을 줄인 말이죠. 그러니까 요즘에 대통령 동생이다, 무슨 대통령 아들이다 그러면 줄을 서잖아요. 그렇게 나쁠 것 없어요. 중국말에 ‘백족지충은 불사이경이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다리가 백 개 달린 벌레는 죽어도 이쁘게 죽는다. 보세요, 풍뎅이 같은 것 죽을 때 보면 발랑 나자빠져서 죽는다고요. 그런데 지네나 다리가 여러 개 달린 벌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요. 이쁘게 엎드려져서 요렇게 죽으니까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친구가 많고 권력이나 명예나 돈이 있는 사람이 주변에 진심으로 친한 사람이 많은 사람은 억울하게 죽지도 않고 죽어도 얌전하게 죽는다 그 말이예요. 그러니까 친구 많이 사귀어라 그 말이죠. 백이라는 건 나쁜 게 아니예요. 아니 어린아이들 데리고 아침 일찍 나가봐요. 여섯 살, 일곱 살 되는 아이가 엄마만 옆에 있으면 열 살 짜리에다 발길질을 한다니까. 엄마 백 믿고. 삽살강아지 데리고 아침에 나가봐요. 큰 개가 지나가면 그 앞에다 대고 짖어요. 큰 개가 물으면 작살나버릴텐데. 그러다가 큰 개가 가다가 으르렁거리면 얼른 주인 가랑이 사이로 옵니다. 주인백 믿고 그러는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기가 살았다 말이예요. 엄마가 옆에 있으면 아이는 기가 살아요. 삽살강아지는 주인만 있으면 기가 살아요. 또 대통령의 동생이다, 대통령이 아무 때라도 전화걸면 국무회의 하다가도 받는다 그래봐요. 그 집에 사람들이 백 쓸려고 줄줄이 모여들거예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야 되고 일어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에 전도사님이 또 가르친 게 있는데, 그것은 기도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기독교 문화가 전혀 안들어와서 그랬던지 전부 가면 “무릎 꿇어”, “손을 모아”, “고개 숙여”, “눈감아”. 그게 기도입니다. 내가 맨처음에 눈감으라고 해서 다른 애들도 눈감았는가 하고 보니까 다 감았어요. 그래서 나도 감았죠. 그랬더니 전도사님이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자고 그러면 전부 무릎 꿇고 손 모으고 그러거든요.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기도란 것을 이야기하는데, 참 어렸을 때 신앙의 씨를 제대로 받았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광장이다. 요즘 말하면, 하나님과의 면회의 장소요, 하나님과의 대화의 장소다 이거예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무때라도 만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나라 대통령, 장관 만나기 힘들지만 하나님은 아무때라도 만난다는 겁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꼭 무릎 꿇고, 손 모으고, 눈감고 이렇게만 하는 게 아니다 그러더라구요. 눈 뜨고도 하고, 앉아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누워서도 한다고 그래요. 누워서도 한다는 바람에 거부반응이 확 나더라구요. 그렇게 끝났는데 “전도사님, 전도사님, 세상에 전능하신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만남의 광장이라고 하는데 방정맞게 드러누워서 기도하는게 어디 있냐고요?” 그랬더니 전도사님이 비시시 웃으면서 “우리 동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반신불수로 드러누워 있는 사람이 있거든. 대변도 받아내고, 소변도 받아내고, 밥도 드러누워서 먹어. 그 사람은 기도도 못하겠다. 무릎 꿇고 앉지도 못하니까. 그 사람은 누워서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서는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눈뜨고도 하고 이렇게 한다” 그러니까 이해가 확 되더라구요. “그런데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기도는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하는 게 제일 좋은 기도다.” 그래서 국민학교 5학년 시절, 그 이튿날부터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해서 일생동안 지금 다니고 있습니다. 그 이상 좋은 게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교육시킨다고 할 때 이 자녀의 손목을 잡아다가 우리 어머니처럼 하나님의 손목에 잡혀주는 것, 그 이상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냐구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걸 믿는다면 그 이상 중요한 게 없습니다. 과외 보내고, 점수 좀 올라가고, 뭣하고 이게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단 말입니다. 여기에 앉은 여러분 중에서 영어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고, 토플시험도 600 몇 점 맞고, 돈도 있고, 인물도 잘나고, 집안도 잘난 사람 미국에 유학보내라? 아무라도 보내요. 안그래요? 대학에서 성적이라면 올A, 토플시험 600 몇 점, 그러면 다 보냅니다. 그런데 영어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 인물도 못나고, 돈도 없고, 집안도 못나고, 그 놈을 미국에 보내라? 아무도 못보냅니다. 하나님만 보낼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 믿음의 진리 아닙니까? 이 믿는다는 것이 뭡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옛날 20여년 전에 서울에서 굉장히 가물어서, 요즘도 지금 많이 가뭅니다만, 비가 넉 달 동안 많이 안오고 요즘보다 더 가물었습니다. 장로님댁에서 아침예배를 보는데, 찬송가 부르고 기도를 하는데 아이들 다 모아놓고 장로, 권사님 집안에서 아침예배를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비를 내려주셔야겠습니다. 가뭄에 단비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다가 또 예를 들어요. “논에 심은 벼가 말라비틀어지고, 밭에 심은 작물이 말라비틀어지고 이거 야단났습니다. 높은지대에서는 수돗물이 안나와서 걱정이 되고 비를 내려주셔야겠습니다.” 또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하다가 제일 마지막에는 “오늘 비를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보통 있을 수 있는 기도죠? 그리고 다 “아멘” 하고 끝났는데 밥을 먹고 다 나가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니는 막내가 웃방에 갔다가 아랫방에 갔다가 옆방에 갔다가 왔다 갔다 하거든. “얘! 너 학교 안가고 왜 왔다 갔다 해?” “아빠! 여기다 우산을 놓았는데 우산이 안보여.” “우산은 왜?” “학교갈 때 갖고 갈려고.” “에이 이 미친놈아, 이 청천하늘에 무슨 우산을 갖고 가냐?” 구름 한점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삭신이 쑤시고 아린 것도 없고요. 그러니까 이 아이가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아빠! 아침에 아빠가 기도할 때 오늘 비를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멘 했다”는 겁니다. 믿는 놈은 얘 하나 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장로는 안 믿어요. 우리가 그런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냐 이거예요. 예수를 오래 믿는 장로, 권사, 집사, 또 목회자도 마찬가지죠. 그냥 기도하면 거미줄 똥구멍에서 실 나오듯이 졸졸졸졸 거룩 거룩부터 시작해서 서론, 본론, 결론 잘 하지요. 그리고 아멘 하고 안믿어버린다니까! 믿느냐 안믿느냐는 하나님만 아세요. 정말 이루어질 것을 믿느냐?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며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기도하는 것을 들어주신다. 이것을 아느냐? 믿느냐? 우리는 모두 알고는 있지만 믿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믿었을 때는 엄청난 기적과 같은 변화가 일어난 줄로 압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지게 지고 산에 가서 일하고, 중학교는 꿈에도 못가요. 새벽기도는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중학교 간 학생이 집으로 다녀오는 것을 멀리서 보았을 때 지게에다 짐을 잔뜩 지고 땀을 뻘뻘 흘리고 오다가 그 학생을 보는 순간에 얼마나 내가 울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왜 중학교 못가나?’ 그 이튿날 새벽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서원을 올렸습니다. “일생을 통해서 나는 공부를 끝까지 한 번 하겠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나는 끝이 어딘지도 몰라요. 그러는데 응답을 받기를, “현존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라” 그래서 현재 내게 준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리라. 새벽기도 갔다 와서 지게 짊어지고 들에 나가서 풀 한 짐 메고 와야 돼요. 하루종일 일해야 돼요. 집 모퉁이에 키우는 토끼 몇 마리를 팔아가지고 중학교 강의록을 사가지고 독학을 했습니다. 요즘 전과지도서 같은 걸로 선생님이 없어도 차곡차곡 보면 알 수 있는 그런 책입니다. 중학교 과정을 3년이나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길이 열리더라구요. 읍내에 중학교가 생기고, 읍내에 유지댁에, 장로님댁에서 그 소문을 듣고 저를 가정교사로 채용해줬습니다. 그때 제 나이 18살, 그 집에 여덟 살, 열 살짜리 애들을 가르치고 놀아주는 조건으로 그 집에서 먹고 자고 학교를 가게 해줬습니다. 그래서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중학교를 들어갔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니까 고등학교가 없어요. 지금은 있죠. 어머니한테 얘기해서 서울가는 차비를 해달라고 해가지고 기차를 타고 전라북도 임실역에서 서울까지 가는데 13시간 걸려서 갔습니다. 13시간 걸려서 서울에 왔는데 오라는데가 있어요? 갈데가 있어요? 서울이 6?25 직후였습니다. 한강 인도교가 폭격 맞아서 끊어져서 이어지지 않았을 때 서울에 왔습니다. 오라는 데도 없고 갈 데도 없는 거예요. 그 고생한 이야기를 다 일일이 여기서 말할 수 없습니다만 영등포에서 구두닦이를 했습니다. 나중에 미군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야간으로 고등학교를 들어가서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신문팔이 하고 신문배달하고, 그것도 한 달, 두 달이 아니라 몇 년을 신문배달하고 구두닦이 한 돈으로 밥 먹고, 옷 입고, 교통비 하고 등록금? 어림도 없는 소리예요. 굶었어요. 나중에 빈혈이 걸려가지고 길가에 가다가 쓰러지고 플라타너스 잡고 한참 엎드렸다가 가기도 하고요. 너무 굶고 지내니까 내가 신문배달을 하면서 쓰레기통에서 밥도 많이 먹었어요. 대문에다 신문을 놓고 옆에 돌아가면 쪽문이 있는데 거기 연탄재랑 내버려져 있어요. 이렇게 보니까 밥덩어리가 내버려져 있어요. 얼른 돌아와서 주우니까 연탄재, 모래 이런 것이 묻었어요. 다 떼어내고 먹었어요. 내가 한 번 더 먹은 기억이 납니다. 한 번은 갔더니만 곰보빵 같은 빵을 스물 몇 개를 내버렸어요. 그래서 웬떡인가 하고 돌아와서 주울려고 봤더니 빵에 파란 곰팡이가 다섯 개씩 피어 있어요. 콩알만한 곰팡이가. 그런데 그 중에 하나는 곰팡이가 끝에 하나만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주워가지고 끝은 분질러버리고 가면서 먹었어요. 먹으니까 매케하더라구요. 그래도 너무 배고프니까 먹었어요. 여러분, 거지 배탈났다는 소리 들어봤어요? 너무 안먹어서 그런지 배탈이 안나요. 그렇게 지내던 시절, 고등학교 1학년 구두닦이 하던 시절에 유학갈 걸 결심했어요. 왜? 내가 이번에 전기를 쓰면서 이번에 신앙 간증집을 내면서 그 때 일기를 봤을 때 내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매일같이 쓴 일기장을 보니까 그렇게 굶고, 쓰레기를 먹고 이렇게 살던 그 시절에 감사하다는 말로 가득 찼습니다. 매일같이 감사하다는 거예요. 아니 뭐가 감사합니까? 밥도 굶고 쓰러지고 그러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을 때에는 ‘오늘 이렇게 고생스럽게 지내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시련의 축복을 주신 것이다. 나를 쓰실려고 훈련을 시킨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는 이 프로그램을 오늘 잘 지내게 했으니 감사합니다. 내일도 감사하게 잘 지내게 해 주시옵소서.’ 이게 일기 내용입니다.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해주시고 사탄이 틈타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또 지내는 동안에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로 꽉 찼습니다.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두 개의 믿음만, 믿음의 두 개의 기둥만 확실하다면 오늘 내가 어려운 것 문제될 것 없잖아요.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들어주셔서 그러냐? 하나님이 나를 미워해서 그러냐? 아닙니다. 나를 쓰실려고 하는 겁니다. 나중에 대학도 야간대학 들어갔습니다. 누가 나를 보살피나요. 야간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너무 하나님 은혜가 감사해서, 권유하는 목사님도 계시고 그래서 신학대학에 학사편입을 했습니다. 목사나 전도사가 되고 싶은 소명의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하고 함께 다닌 학생들 전부 목사됐습니다. 그래서 2년 동안 기독교 교육학과에 학사편입해서 2년간 성경 공부하고, 조직신학 공부하고, 교회사 공부하고, 선교학 공부하고, 목회자들이 경험하는 것을 2년 동안은 제가 착실히 공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써 내 신앙을 지켜나가는 데 평신도로서 복음을 전하는 데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그것도 역할을 주시고 훈련을 시킨 걸로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촌에 가서 학교 선생을 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구두닦이 할 때부터 유학갈 걸 결심을 하고 기도를 드렸는데 13년만에 이루어졌습니다. 13년 되던 해에 기도를 하는데 응답을 받았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쓰고, 논문을 쓰고, 이렇게 해서 응답받았습니다. 일찍이 성천 유달영 박사가 쓴 『새 역사를 위하여』 라고 하는 책을 읽었거든요. 그 책이 1952년도에 나왔거든요. 그래서 덴마크에 가기가 소원이었습니다. 약소민족국가로서 세계 복지농업국가인 덴마크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 그걸 목표로 하고 기도를 드린 끝에 편지를 써서 덴마크 임금님에게 부쳤습니다. 임금님이 감동을 해서 저를 초청해 준 겁니다. 여러분, 그런 기적과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간 것도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 대통령한테 편지를 낸 것이 대통령 보좌관이 회답을 하고 나중에 덴마크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나를 불러가지고 “이스라엘에 어느 때에 올래? 왕복 비행기표, 생활비, 용돈 다 주마” 이거예요. 그래서 덴마크에서 바로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이스라엘에 처음에 갔을 때는 한국에 가서 빨리 농촌운동을 한다는 뜻으로 이스라엘로 오래 공부할 생각없이 6개월 동안 영어로 가르치는 국제연수원에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 들어와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 운동을 하다가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뜻이 있어서 이스라엘로 다시 또 유학을 갔습니다. 이스라엘에 편지를 내니까 또 왕복비행기표, 생활비 다 준다고 오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스라엘 유학갔습니다. 모든 것이 사람이 생각할 때 불가능한 겁니다. 가능성이 없는 겁니다.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데 그 때만 이루어졌냐? 요즘에도 그래요.
내가 최근 십 년 전에 저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교보빌딩이라고 해서 대한교육보험 창립하신 어른이 나 좀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만났더니 이런 저런 대접을 받으면서 농촌에 관한 얘기 너무 감동을 받았다고 또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대여섯 번 얘기하니까 돈을 100억원을 주시더라구요. 그래서 기금으로 해서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본래 그 분이 그런 걸 하고 싶어서 사람을 찾던 끝에 저를 만난 겁니다. 고향 사람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아니고, 선후배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남모르는 사람이 요즘 100억이면 적은 돈입니까? 만원짜리로 사과상자에 가득 넣어야 1억입니다. 100상자를 실어서 줬다고 생각해봐요. 한 번만 준 줄 아세요? 농촌운동 잘 한다고 또 100억을 줬습니다. 그래서 문학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부이사장 맡아서 하다가 나중에 그 집 아들이 이사장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100억을 또 줬어요. 그래서 교육재단 만들었습니다. 환경교육재단. 이런 일들이 저 보세요. 어디가 복이 붙었는가? 여러분, 선입감을 가지고 ‘유박사다, 장로다 어떻다 하니까 대통령 모시고 청와대에서 일을 했다, 국무회의에 늘 참석을 했다’ 그렇게 인상을 가지고 보니까 조금 낫게 보려는지 모르지만 어디서 삼베 적삼이나 입고, 밀짚모자나 쓰고 이렇게 나타나면 어디서 굴뚝 쑤시다가 나온 사람 같습니다. 나는 내 얼굴을 알아요. 내 존재를 압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래요. 내가 가장 어렵던 시절을 내 본전으로 생각합니다. 그거는 어느 때냐? 구두닦이 하던 시절이거든요. 길 가에서 자고, 굶고. 그게 내 본전이라고 생각하면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임금님보다 더 높아요. 너무 감사해서 못살아요. 매일같이 눈 뜨고 앉으면 감사하다는 말 밖에 더 나와요? 생각해봐요. 구두닦고 길바닥에서 자야 되는데 지금 그렇게 되어 있냐구요 이게. 이런 대접을 받고 산다는 것이 어떻게 말이 되겠냐구요? 하루 하루 사는 것 모두가 덤입니다. 내 분에 너무 너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살고 있다 그말입니다. 정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하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믿음의 기둥을 단단히 박고 지내게 된다면 우리의 생활이 달라지고, 우리의 미래에 빛이 나고,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가운데 큰 복 중에 살 줄을 믿습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하신 주님,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해주시고 기름부어주신 목회자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 불러주시고 아버지의 말씀을 상고하게 해주신 은혜를 감사드리옵나이다. 각기 각자 처한 입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려운 점을 많이 극복하는 목회자들 많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힘과 능력과 소망으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어려울 때 하나님이 항상 옆에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시옵시고 항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목회자들과 또 그 주변에 있는 교인들이 함께 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번 집회를 통해서 오순절 다락방처럼 성령의 뜨거운 감동이 함께 하여 주시옵시고 이곳을 다녀간 모든 사람들이 능력이 더욱 넘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집회를 주관하시는 목사님에게 함께 하여 주셔서 해마다 이런 잔치를 배설하는 데 큰 은혜로서 함께 하여 주시고 그 손길에 축복하여 주셔서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시고 아울러 영적으로 충만한 은혜가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