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만 하기에는
내가 일 년 사계를 분주하게 보내지만 봄철은 더 바쁘게 지내는 때였다. 그간 주말만 허여된 시간이라 그랬지만 내년 봄부터는 주중에도 자유로운 영혼이라 여유로움을 누리지 싶다. 봄날 주말이면 근교 산자락에 올라 여러 산나물을 채집해 일용할 찬거리로 삼느라 그러하다. 배낭을 불룩하게 채워온 산나물은 귀로에 이웃과 지기와 나누고 주점에서 전을 부쳐 곡차를 들기도 한다.
삼 년 전 거제로 와서도 주말에 창원으로 복귀하면 혼자서든 벗과 함께든 변함없이 산행을 다녀왔다. 이른 봄 둔덕 오실골에 절로 자란 머위부터 늦은 봄 양미재 산기슭에서 벌깨덩굴까지 갖가지 산나물을 뜯어왔다. 묵나물까지 저장하지 않아도 제철 풋나물로 잘 먹고 연사 와실까지 가져와 아침저녁 끼니마다 비빔밥을 비벼 먹었다. 거제 국사봉 곰취와 앵산 두릅도 따 먹은 바 있다.
봄철 근교 산자락에서 뜯어온 산나물 가운데 취나물과 바디나물은 양이 많아 즐겨 먹는다. 나는 이런 산나물이 어디에 잘 자라는지 근교 식생을 훤히 꿰뚫고 있어 쉽게 구할 수 있다. 봄철이 지나면 지인 텃밭을 순례하거나 고향 형님댁을 방문해 친환경 채소를 마련해 온다. 초여름 낙동강 강변 대숲으로 나가 꺾어오는 죽순도 삶아 초장에 찍어 반찬이나 곡차 안주로 삼기도 한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나이가 드니 기름진 음식과는 거리두기를 하는 편이다. 맑은 술을 들 때 고기 안주가 필요하지만 곡차는 산나물이나 두부로도 알맞다. 이번 주 연사 와실로 챙겨온 찬으로는 콩나물무침과 감자볶음에 고등어조림이 곁들여졌다. 와실에서 감자된장국을 끓여 반상에 같이 올려 먹었다. 주중이 지나 주말이 가까우면 냉장고 반찬통이 거의 바닥이 나고 있다.
교내 급식소에서 학생들과 점심 한 끼는 그럭저럭 넘긴다. 영양사의 차림표는 성장기 아이들 위주라 닭고기나 돼지고기가 자주 나왔다. 치즈가 든 요리나 피자도 가끔 나와 내 식성과는 맞지 않아 난감한 경우도 있다. 생선구이나 나물 비빔밥이 나오면 좋겠으나 그런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그래도 어느 날은 두부 요리나 계란찜 정도만 나와도 감지덕지로 생각하고 잘 먹기도 했다.
팔월 끝자락 태풍 전후 연일 흐린 하늘에 비가 잦다. 주중 목요일은 모처럼 날이 개어 화창했다. 와실에 머물면서 주중 한 차례 면소재지 농협 마트에 들려 시장을 봐 온다. 식품 코너에는 여러 채소들이 펼쳐 있고 1인 세대를 위한 반찬들도 팩에 포장해 팔았다. 즉석식품들도 있고 선도가 좋은 생선이나 회도 썰어 진열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찌개 끓일 두부와 한치를 세 마리 샀다.
거제는 바다와 접해서인지 내륙보다 마트에 파는 생선 선도가 좋은 편이었다. 겨울철 대구나 봄날 생멸치가 그랬다. 오징어나 호래기도 손수 손질해 데쳐 숙회로 먹어본 바 있다. 내장과 연골을 제거하고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썰어 초장에 찍어 먹으니 조리 절차가 간단해 좋았다. 나에겐 반찬이라기보다 곡차 안주로 제격이었다. 비린내가 적고 뼈가 나오지 않아 설거지도 간단했다.
마트에서 사 온 두부는 다음 주중 찌개를 끓일 재료로 남겨두었다. 한치는 냉장고에 보관할 일 없이 바로 내장과 연골을 꺼냈다. 얼마 되지 않는 내장에는 오징어처럼 먹물이 살짝 비쳐 깨끗이 헹궈 씻었다. 갑오징어처럼 생긴 몸통에 아직 눈깔이 똘망똘망한 멸치와 등이 굽은 새우가 들어 있음이 신기했다. 바닷속 어류들의 먹이사슬에서 새우나 멸치의 상위 포식자가 한치인 듯했다.
끓는 물에 한치를 데쳐 접시에 담았다. 저녁 밥상을 차리기 전 대작할 이가 없어도 안주로 삼아 곡차 잔을 채워 비웠다. 문득 십여 년 전 초봄에 입적한 법정 스님이 남긴 ‘홀로 사는 즐거움’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스님은 송광사에 딸린 불일암도 번잡하다고 강원도 산골 화전민이 떠난 오두막으로 찾아들었다. 문명의 도구를 멀리하고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주었던 분이다. 21.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