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단리(Geomdan-ri, 檢丹里)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에 있는 리(里).
정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에 속하는 법정리.
자연환경
동쪽은 곡천리, 서쪽은 은현리, 남쪽은 대대리와 접하고, 북쪽에는 운암산이 있다. 서쪽에는 서만들, 동쪽에는 옴달들이 있으며 마을 한가운데를 동서로 곡천천이 흐른다.
마을이 언덕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으로 곡천천이 흐른다. 마을에 검단사가 있었다 하여 검단리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검단리에서 청동기시대 집터 유적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정조(正祖) 때까지는 검단리였다가 1894년(고종 31) 암곡동(巖谷洞)과 검단동(檢丹洞)으로 나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암곡동과 검단동을 합한 후 법정리인 검단리로 하고 울산군 웅촌면의 관할에 두었다. 1962년 6월 법률 제1068호에 따라 울산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울산시와 울주군으로 분리되었다. 1991년 1월 울주군이 울산군으로 개칭되었고, 1995년 1월 울산시와 울산군이 통합되며 기존 울산군 지역을 관할하는 울주구가 신설되었다. 1997년 7월 울산광역시 승격과 더불어 울주구가 자치군으로 승격되면서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른다.
명칭 유래
검단리(檢丹里)는 마을에 검단사(檢丹寺)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전한다. 또 ‘궐곡(闕谷)’, ‘궐각단’, ‘곡각단’이라는 지명으로 미루어 이곳에 우시산국(于尸山國)의 궁궐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설이 있는데, 이런 점에서 본다면 ‘검(檢)’은 신(神) 또는 왕(王)의 옛말인 검으로 보인다. 또한 ‘단(丹)’은 곡(谷)의 고훈(古訓)으로 실(室) 또는 당(堂)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단계, 매암, 새검단, 솔정자, 용두끝, 탑거리가 있다. 새검단은 검단리 동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다. 마을에 사창이 있었다해서 사창이라고도 부른다. 솔정자는 마을에 큰 소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탑거리는 마을 골짜기에 탑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국가유산으로는 검단리 지석묘군이 있다. 특산물로는 단감이 있다.
현황
2017년 12월 31일 현재 면적은 3.62㎢이고, 인구는 341가구, 641명으로 남자 322명, 여자 319명이다. 행정리는 검단리와 암곡리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울주 검단리 유적(蔚州檢丹里遺蹟)[사적 제332호]과 고령김씨(高靈金氏) 재실, 은진송씨(恩津宋氏) 재실 등이 있다. 검단초등학교, 울주군통합관제센터, 작은마을복지재단이 있고, 남쪽에 울산컨트리클럽이 자리한다.
검단리(Geomdan-ri, 檢丹里)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에 있는 리(里).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에 속하는 법정리.
자연환경
검단리 남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요도천이 흘러가고 있으며, 요도천 변에는 논이 발달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민 상당수가 논농사에 종사한다. 마을 북쪽으로는 200~400m의 낮은 산지가 펼쳐져 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밭농사가 이루어진다. 검단리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국이다. 요도천 하류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홍수 피해가 많았다.
형성 및 변천
검단리라는 명칭은 1760년에 발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 나온다. 그곳에 보면 검단리는 이안면에 속한 5개 방리 중 하나이다. 당시 검단리에는 151가구에 792명(남 399, 여 393)이 살았다. 1898년에 나온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도 검단리가 나오며, 1912년에 이르러 상검단리와 하검단리로 나누어진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검단리가 되었으며 이류면[현 대소원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검단리는 대소원면에 속한 법정리로 상검단과 하검단 2개 행정리를 거느리게 되었다.
명칭유래
검단(檢丹)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은 거암단에서 왔다고 얘기한다. 거암(巨巖)은 큰 바위라는 뜻이 된다.
자연마을로는 삼베실, 큰골, 하검단이 있다. 삼베실은 상검단과 신촌 사이의 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샛골이라고도 부른다. 큰골은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검단은 검단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산물로는 사과순대가 있다.
현황
2008년 1월 31일 현재 면적은 3.21㎢이며, 총 272세대에 539명(남 286, 여 253)의 주민이 살고 있다. 남쪽으로는 만정리, 동남쪽으로는 충주시 용두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으로는 중앙탑면 창동리와 북서쪽으로는 완오리와 경계를 이룬다. 자연마을로는 요도천 북쪽에 상검단과 하검단이 있다. 1982년 충주대학교가 이주해 왔다.
검단리(Geomdan-ri, 檢丹里)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리(里).
평지가 대부분의 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서쪽을 무릉산이 감싸고 있으며, 동쪽에는 형산강이 흘러가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 하천이 유입해 들어오고 있으며, 그 주변에 많은 못이 분포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검단 마을 등이 있다. 검단 마을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솥모양 같다하여 금당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검단리로 개칭되었다. 특산물로 찰토마토가 있다.
검단리(Geomdan-ri, 檢丹里)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에 위치한 리(里).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에 있는 법정리.
자연환경
북쪽과 남쪽을 모두 300m 내외의 산지들이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에 위치해 있으며, 가운데로 검단천이 흐르고 있다.
무릉산 기슭에 자리한 산골마을이다. 검단천이 흐르고 검단 저수지가 있다.
형성 및 변천
검단리가 속한 칠북면은 전기 가야 연맹인 변한(弁韓) 12국의 접도국(接塗國)이었다. 고려 때인 940년(태조 23) 이후 칠원현의 북면이 되었다. 1895년 5월 현이 군으로 승격되어 칠원군 북면이 되었다. 1908년 함안군에 편입되면서 칠북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의 부·군·면 통폐합 시 칠서면·칠원면·영산군 길곡면에 속해 있는 일부 동리가 칠북면에 합쳐지면서 9개 동리로 개편되었고, 이때부터 검단리는 함안군 칠북면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3년에 칠북면에 속해 있던 운서리, 운곡리가 칠원면에 편입되었다.
명칭 유래
검단리(檢丹里)의 유계(柳溪) 마을은 옛날 이 곳에 버드나무가 울창하여 경치가 수려하였고, 타지방으로 가는 길목으로 주막이 있어 지나는 길손이나 풍류객이 쉬어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유목정(柳木亭)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행정 구역 개편 시 버드나무가 많고 동네 가운데로 하천이 흘러 유계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옛날의 하천은 경지 정리 사업으로 마을 외곽으로 옮겨져 흐르고 있다. 상촌(上村)은 골짜기의 상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옛 그대로 상촌이라 하였다.
단계(丹溪)는 글자 그대로 붉은 시내라는 뜻이며, 이 골짜기의 땅들이 대부분 황토 땅이라서 큰비가 오면 이 동네 앞으로 황토물이 시내 가득히 흘러가는 관계로 붉다고 하여 단계라고 불렀다. 아산(牙山)은 700~800년 정도 된 마을로, 옛날에 선인(仙人)이 기러기 목을 타고 살기 좋은 곳을 찾아 헤매던 중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마을 이름도 기러기의 목을 줄여서 기목이라고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 때 마을 뒷산이 멧돼지 어금니 줄기의 산이라 하여 어금니 아(牙) 자와 뫼 산(山) 자를 붙여 아산이라고 고쳐 불렀다.
자연마을로는 못골, 상촌, 유목정마을 등이 있다. 못골마을은 큰 못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지명이다. 상촌마을은 검단리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지명이다. 유목정마을은 버드나무가 많았다 하여 유목정이라 칭한다.
현황
칠북면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으며, 무릉산 기슭에 자리한 산골 지역이다. 2014년 12월 말 현재, 총 201가구에 362명[남 187명/여 17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행정리는 유계(柳溪)·단계(丹溪)·상촌(上村)·아산(牙山) 4개 마을이다. 유계동(柳溪洞)에는 64가구에 100명[남 52명/여 48명], 상촌동(上村洞)에는 52가구에 112명[남 60명/여 52명], 단계동(丹溪洞)에는 54가구에 97명[남 47명/여 50명], 아산동(牙山洞)에는 31가구에 53명[남 28명/여 25명]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