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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705년)의 집권
당 고종의 계후이자 무주의 유일한 황제로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이다. 중국사에서 전무후무한 최고의 여걸이자 괴걸로서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손꼽히는 여군주이지만 유교 사상을 가진 후대 역사가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허나 최초니 유일이니 하는 수사가 필요 없이 당시까지 이만한 권력의 자리에서 이토록 오랜 기간 권력을 휘두른 여성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통치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중국사에 길이 남을 여걸의 전형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별로 이견이 없다. 중국 역사상 나라를 주무른 여자들은 찾아보면 의외로 많았지만 본인이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측천무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황제로 즉위했는데도 노쇠할 때까지 아무도 들고 일어나지 못했으며 신하들의 거사가 성공한 다음에도 그들의 뜻을 따라 유일의 여자 태상황제로서 천수를 다 누렸다는 점에서 측천무후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역대 황제들 중 최고령(67세)으로 제위에 오른 황제이기도 하다. 30살에 황후가 되어 80살에 죽을 때까지 무려 50여 년을 권력의 핵심 자리에 계속 있었던 셈. 현대 기준으로 보아도 충분히 장수한 축에 들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하게 오래 살았다.
이름은 무조(武照). 로마자 표기를 할 경우 무측천(Wu Zetian(우 쩌톈))으로 쓴다. 황제 즉위 후 照와 발음이 같은 曌로 개명했다.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제명은 측천금륜대성신황제(則天金輪大聖神皇帝), 약칭 성신황제(聖神皇帝)이다. 그러나 후세의 사가들은 유교적인 관점에서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이유로 황제로 인정하지 않아 의도적으로 무측천(武則天), 측천무후 등의 명칭을 사용하면서 이러한 명칭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 태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와서 당 태종 사후 뒤를 이은 당 고종의 황후가 되었다. 이 따위의 개막장 족보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나라 황실이 원래 선비족과 한족의 혼혈이라 북방 유목 민족의 풍습에 익숙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유목 민족들 사이에서 아들이 아버지 사후에 자기 생모를 뺀 나머지 첩들을 자기 부인으로 삼는 것은 일상적인 풍속이었다. 사마천은 ❮사기❯ 흉노 열전에서 중항열의 입을 빌어 "전쟁으로 먹고 사는 종족이다 보니 집안의 계통이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이라고 설명하는데 그냥 여자를 가축과 같은 일종의 재산으로 취급하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다 보니 부자, 형제간 상속 내지 양도가 가능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훗날 당 현종도 자기 아들의 여자였던 양귀비를 도교 도사로 출가시켰다가 다시 입궁시키는 형태로 후궁으로 삼는다. 당 태종 사후 비구니로 출가했다가 환속해 당 고종의 후궁이 된 측천무후와 비교하면 종교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경우.
당나라가 선대(당 태종)에 신라의 선덕여왕을 두고 “여왕이 통치한다”며 조롱하더니 정작 자기들은 여제가 나온 것에 더해 나라 이름도 잠깐 갈아엎어진 걸 보면 재미있는 아이러니. 거기다 그 장본인도 이 당시에 벌써 입궁해 이 사건을 눈앞에서 목격했을 당 태종의 후궁이다.
당 고조 이연을 도운 개국 공신이던 태원 군공 무사확의 차녀로 태어나서 637년 당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하게 된다. 당시 후궁으로서 받은 지위는 정5품에 해당하는 재인(才人)이었으며, 태종에게서 별명을 받아 이후 본명보다는 거의 ‘무미랑(武媚娘 무씨 성의 예쁜이)’으로 불렸다고 한다.
당시 성격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있는데, 태종이 당시 궁궐에 새로 들여온 말이 하도 사나워서 대장군인 울지경덕이 몇 번이고 말에서 떨어지자 무재인이 나서서 자신이 저 말을 길들여보겠다고 하였다. 태종이 방법을 묻자 철편으로 때려서 기를 죽인다.
그렇게 해서 안 되면 철추로 후려친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찌른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태종이 “그러다가는 말이 죽을 텐데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죽이는 것은 지나치지 않으냐?”라고 하자, 무재인은 “폐하의 장수들은 모두 폐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충신들입니다. 말이 멋대로 날뛰면서 대장군을 다치게 했는데 어찌 말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라고 대답한다. 이는 태종이 울지경덕을 가볍게 웃음거리로 만든 것을 은근히 비판한 것으로, 태종은 크게 감탄하며 무재인을 존중하게 되었지만 총애하게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훗날 고종은 아버지가 이 때문에 무재인을 처녀로 남겨두었다고 주장하고, 이것을 그녀와의 결혼을 합리화 하는 이유로 내세운다. 태종이 사망한 이후에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출가해서 비구니로 지내게 되었지만, 태종의 9남인 고종의 명으로 정2품 소의(昭儀) 복귀되어 651년에 황궁으로 금의환향한다.
이 무렵 고종의 부인인 황후 왕씨와 후궁인 숙비 소씨의 사이에 암투가 있었는데, 왕황후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 당시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무소의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왕황후와 소숙비를 모두 제거하고 655년 새로운 황후로 즉위하게 된다. 또한,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친정이 한미한 것을 탓하며 이를 반대했던 장손무기나 저수량 등의 쟁쟁한 원로대신들을 정치 공작을 통해 모조리 죽이거나 귀양 보내며 그 정치적 능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장손무기와 저수량 등은 선제였던 태종을 따라 국난을 수차례 해결하고 황제 못지않은 권력을 쥐었던 무서운 인물들이었다. 게다가 나약한 고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그 위세가 가히 황실을 쥐고 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한 자들과 정치적인 대결을 벌여 제거해버린 일은 측천무후의 무서운 정치적 역량을 드러내는 예이다.
정사에 정력적이지 못한 유약한 황제가 장손무기 등의 원로대신을 처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당태종의 후궁으로 오래 황실에 몸 담았던 점, 왕황후와 소숙비의 암투 속에서 황후 자리를 쟁취한 점 등을 보아 황제보다는 무황후가 원로대신을 처리했다고 봐야한다. 무씨 일족의 대두 역시 아버지 무사확은 이미 사망하였고, 이들을 중용한 것은 당 고종이었다. 그리고 무삼사 등의 능력은 제법 유능하였기에 이들의 임용에 대하여서 별다른 반발이 있지도 않았다.
소숙비는 죽기 전에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고양이로 태어나겠다. 그래서 쥐로 다시 태어난 너를 물어 죽여주마!”라고 무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때 아무 이유 없이 쥐로 환생할 거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하는 일부 역사가들은, 무후의 생년을 쥐띠 해에 맞춰 628년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그 때문인지 측천무후가 살아있을 때는 고양이를 황실에서 키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귀신이 되어 복수하겠다!!”라는 말에 죽인 다음 시체의 사지를 잘라 술독에 담갔다. 일설로는 산 채로 사지를 잘라 술독에 빠뜨려 죽였다고도 한다. 그 후에 “술 취한 귀신이 과연 날 찾아올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덧붙여 고종이 왕황후를 쫓아내고 무후를 황후로 삼은 결정적인 이유는 무후의 어린 딸 안정공주가 황후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라는데, 과연 왕황후가 정말로 안정공주를 죽였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후가 황후를 몰아내기 위해 모함했다는 쪽으로 중론이 쏠려 있다. 안정공주는 단순히 유아 돌연사 했을 뿐이고, 그 시기가 하필 왕 황후의 방문 시기와 맞아떨어져 황후가 누명을 썼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무후가 갓난 안정공주를 목졸라 죽이고 황후에게 덮어씌웠다는 주장도 있다.
정치적으로 정력적인 편이 아니었다는 고종은 무후에게 많이 의존했다고 한다. 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된 무후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었던 대신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공신 가운데 살아남은 건 이세적 정도. 이세적은 장손무기와 저수량, 우지녕 등의 관롱귀족(關隴貴族)이거나 고위문신들에게 배척받던 사람으로 무측천의 정권장악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뒤엔 유골이 분쇄되어 바람에 날려지는 형벌을 받지만 이건 손자인 이경업이 측천무후에 대항하여 모반을 꾸몄다가 진압 당했기 때문이다.
656년 측천무후는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년∼664년)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 이홍을 황태자로 앉혔으나, 그 역시 곧 죽었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는 소숙비의 장녀 의양공주(義陽公主)와 차녀 선성공주(宣城公主)가 유폐되어 시집을 못 간 것을 이홍이 주선하여 보내겠다고 하자, 그것이 측천무후의 심기를 건드려 독살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홍의 사후, 당 고종과 무후는 크게 슬퍼하며 이홍을 의종(義宗) 효경황제(孝敬皇帝)로 추존했다. 아들이 부모를 추존하는 일은 흔하지만 부모가 아들을 추존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드문 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황태자가 된 뒤 과로사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그 후 자신의 차남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십팔사략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과 한국부인(무후의 언니)의 불륜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한다. 그 때문이었을까, 680년에 어머니의 숙청에 불만을 품자 폐위되고 3남 이현(李顯)이 황태자로 세워졌다. 이것이 바로 훗날의 중종이다. 이 와중에 672년 고종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대신 정치를 했으며, 675년엔 아예 수렴청정을 선언한다. 다만 이때까지도 어디까지나 최종 결재권자는 당 고종이었다. 무측천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면 반대파가 재상직까지 올라오는 꼴을 놔뒀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종이 죽은 후 황태자 이현이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아내 위황후와 그녀의 친정아버지 위현정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때 중종이 위황후의 친정아버지 위현정을 시중으로 삼으려다가 신하들이 반대하자 홧김에 “내가 천자인데 천자 자리를 준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라는 초대형 헛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폐위 당했다. 이 때도 무측천이 자기 아들을 나서서 자른 건 아니고, 재상 배염이 태후인 무측천에게 황제의 폐위를 먼저 거론하고 이를 추진하는 절차를 거쳤다.
무후는 4남인 상왕 이단, 즉 예종을 즉위시킨 이후 계속해서 일어나는 반대파들의 저항과 반란을 진압하고 권력을 강화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684년, 이세적(李世積)의 손자인 이경업(李敬業, 636년∼684년)이 일으킨 난이다.
그리하여 690년, 무후는 예종에게서 황위를 넘겨받아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그래서 이 시대를 무주시대, 즉위를 무주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드디어 여성 황제의 시대가 출현한 것이다.
공포 정치와 외척 정치 속의 안정된 내치
무후는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였는데, 사궤(四軌)라는 투서함과 불량배, 건달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경찰 혹리들을 바탕으로, 상대의 비리를 먼저 고발하는 사람이 빠르게 승진하는 밀고정치를 적극 추진하였다. 이게 신하들 입장에서는 마녀사냥이 열리는 수준이라 조정에 출근할 때면 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무사히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양 크게 기뻐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친 고발로 인해 자신의 인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무후는 정적들이 거의 제거되고 제위를 차지하자 사냥개 역할을 하던 내준신과 삭원례 등의 혹리들을 차례로 없애 이들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던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는다. 그야말로 토사구팽(兎死狗烹).
친정 가문인 무씨들은 그야말로 세도를 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전한 여후 이래 최초였을 정도. 측천무후가 조카인 무승사에게 제위를 넘겨주려고 말은 했지만 ‘조카가 당신 제사를 안 지내줄 텐데? 믿을 건 아들뿐’이라는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고 한다. 혹자는 무후가 다스린 시기의 내치는 당 태종에 버금가며 이후 현종 때 맞이한 개원의 치를 불러오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북주-수(北周-隋)제국 관롱집단들보다는 넒어졌지만, 여전히 협소한 범위의 문벌귀족집단으로 정계의 고위직을 독점하던 현상을 해소하고 수나라 시기 시범적으로 도입되던 과거제도를 점차 확대 시행하여 당 후기에 이르면 과거 급제 출신들이 주류를 차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당나라의 도자기가 그 특징을 확립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이 시기에 일처다부제가 실시되기도 했었는데, 거대 제국들 중에서 이런 사례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또한 인재를 아끼는 모습이 보이는데, 무후 시절 초당 4걸에 들 정도로 걸출한 문인 낙빈왕이 토무조격(討武曌檄)이라는 격문을 지어 이경업 거병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무후를 혹독하게 비판한 글을 읽고 이 글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어보고, 이를 낙빈왕이 썼다는 말을 듣자 재상에게 “왜 진작에 이 사람을 나에게 추천해 주지 않았나? 이런 인재를 내가 기용해 주지 않았으니 반란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지!”라며 낙빈왕의 재능을 아까워했다고 하며, 낙빈왕이 죽은 뒤에도 그의 작품을 모아 엮도록 했다. 즉위 후에도 적인걸, 장간지 같은 뛰어난 재상들이 등용되기도 했다.
몰락과 마지막, 그리고 역사의 전설 속으로
하지만 699년 이후 측근 관리에 실패해 폐단이 발생했으며, 705년 말년에 측천무후가 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이 들어왔다. 이 때문에 당시 황태자로 있었던 아들 이현(중종)에게 양위했고, 당나라 황실은 복벽했다.
놀라운 것은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타는 것과 동일시될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황제 자리에 오른 사람은 퇴위할 경우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데다가 대숙청도 보너스로 딸려오는 것에 비해, 신하들의 거사가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측천무후에게 당을 부활시키고 태상황제로 물러나면 더 이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은 것이었다.
이는 무후가 이미 병이 깊어서 오래 살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놔둔 것일 수도 있지만, 측천무후가 당 중종과 당 예종의 모후이며 당 현종의 친조모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도 크다. 당나라의 입장에서 측천무후는 당을 멸망시킨 역적이기도 했지만, 당 부활 이후 황제들은 예종의 직계였으므로 전부 측천무후의 후손이었다. 측천무후에게 더이상 처벌을 가할 경우 신정권이 어머니를 핍박한 패륜아 취급을 받을 수도 있을뿐더러 이후 황제들이 자손 대대로 역적의 자손이라는 정통성 시비까지도 벌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측천무후의 처단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권좌에서 쫓겨났다는 충격이 컸는지 그 해 말 측천무후는 황후의 예로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에 한 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한다. 측천무후가 왜 자신의 비석에 아무런 글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나의 행적에 대한 가치 판단과 평가를 모두 훗날의 역사에 맡긴다는 겸허함과 나의 공적은 너무도 커서 이런 작은 비석 따위에 다 새기기도 모자란다는 자뻑이었다는 2가지 상반된 해석이 존재하는데 어쩌면 둘 다를 노렸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겸손한 척하면서 자뻑하는 ‘무자 공덕비’는 측천무후의 전유물은 아니고 중국 역사상 몇몇 인물들이 남겼다. 또한 자신이 모함해 죽인 폐후 왕씨 일가를 복권시키라고 태자에게 간청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나는 이 나라의 황제다.”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한다. 아무튼 측천무후의 유언에 따라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글자가 없는데 그래서 ‘무자비(無字碑)’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중국의 소설가 샨사는 이 측천무후의 무자비 앞에서 소설 ❮측천무후❯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치세와 난세는 시세요, 존재와 멸망은 형세이다. 만일 걸주(桀紂)가 임금의 자리에 있다면 아무리 요임금(堯)이 10명 있다고 하여도 능히 다스리지 못하고, 만일 요순(堯舜)이 임금의 자리에 있다면 비록 걸왕이 10명 있다고 하여도 능히 어지럽히지 못한다. 여자가 겁이 많은 사내를 부리고, 적당한 때를 타서 세력을 얻고, 또한 백성의 생명을 가볍게 다스리기에 족하여, 방종하게 불의의 위세를 행사하였다. 무릇 무씨가 칭제한 해를 보고 있자면, 탁월한 재주를 지닌 자가 많았고, 가족과 헤어짐에 괴로워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으며, 조정의 위기에 분하여 주먹을 쥐었지만, 선제의 은혜에 능히 보은하지 못하며 임금의 자식을 지켰다. 이윽고 무고한 이들이 모함을 당하고 목을 내밀어 주륙되었으며, 천지를 삼태기로 삼았으니, 과거가 어찌 편안하였는가? 슬프구나! 옛날 여자의 참언은 옛날에 해악을 칭했고, 짐승과 같은 이의 독은 대대로 재앙을 낳는다. 무후는 적자의 지위를 빼앗을 때, 목구멍을 바짝 조르고 갓난아이들의 숨통을 끊었으며, 죄인의 시체를 젓갈에 담그고 후비의 뼈를 잘게 부수었으니, 그 부도덕함이 매우 심하였고, 또한 간사한 자가 여자의 상태를 강샘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치에 바른 언론이 널리 퍼지고 그 시대의 올바른 인물이 나왔다. 처음에는 비록 부인이 전권을 맡았지만, 종국에는 능히 아들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세간에 떠도는 말이 위원충의 죄를 바로잡았고, 교묘한 언사가 적인걸의 마음을 위로하였고, 시헌을 높이고 총신을 억누르며, 충언을 듣고 혹리를 주벌하였다. 임금의 뜻이 있었구나, 임금의 뜻이 있었구나!
나라와 백성에 재앙을 끼치는 여자가 얼굴을 바꾸고, 태자궁에 태자가 창성하였다. 어찌 창천이 되어, 이런 기허(夔魖)를 낳았는가? 제위를 강탈하고, 황거를 더럽혔다. 요사스러운 흰 머리가 다하니, 어떻게 아랫사람의 형편을 굽어 살폈는가.❮구당서(舊唐書)❯
사실 측천무후 역시 몇몇 여성 지도자들처럼 사망한 후 반대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긍정적인 면은 거의 감춰지고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었다는 평이 많다. 특히 무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상이 매우 강하다. 가장 큰 이유는 잔인한 숙청과 공포정치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롱집단의 위력을 강조하는 이들에 따르면 무후의 잔인함은 자신의 성격보다도 당시 시대 상황이 무후의 성향과 맞물린 선택이었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관롱세력의 위협을 강조하는 이들에 따르면, 애초에 남북조시대부터 이어져온 거대 세족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고, 당은 모양새만 한족 국가인 사실상의 호한 연합 정권으로서 세워진 것이었다. 애초에 당 왕조의 전신이었던 수가 허망하게 무너진 결정적 이유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을 위시로 한 거대 세족(관롱집단)들의 반발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세족을 숙청하는 일은 당 왕조의 흥망이 걸린 중대사였다.
정관의 치라고 추앙받는 태종의 시기에도 장손무기 등을 위시로 한 세족들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다. 이들을 속칭 무천진 군벌이라고 부르는데, 명신으로 칭송받는 위징조차 그런 세력들과 인척을 맺으며 신경을 쓸 정도였다. 태종 말년부터 당의 정치 체계가 문란해지기 시작했으며, 정관의 치에도 불구하고 중원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생산력 또한 수 문제 시절의 개황의 치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면이 있었다. 이건 당태종이 잘못한 게 아니라, 수양제가 워낙 제대로 말아먹은 탓에 수습이 제대로 안된 측면이 있다.
게다가 고종 또한 강인한 성격이 못 되어, 측천무후에게 숙청과 부패의 척결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숙청이 피비린내 난다고 하지만 제왕에게 요구되는 점에는 비정함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걸 상기하자면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 시점에 강인한 성격의 측천무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결국 더러운 일을 자기가 다 맡아 쓴 셈이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의 고종의 역할에 대해서 재평가를 하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고종이 체력적으로 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런 세력도 없는 측천무후가 고종의 협력 관계 내지는 동조 없이 무천진(武川鎭) 군벌을 등에 업은 황후 왕씨를 몰아내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는 것 때문에 측천무후가 고종을 쥐고 흔든 것이 아니라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고종 입장에서 무천진 군벌 정리를 위해서 측천무후를 기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무천진 군벌 축출은 측천무후의 입궐과 거의 동시에 이뤄지기 시작하는데, 이때는 측천무후가 자기 앞가림하기 바빴던 시절이다.
그리고 고종이 살아 있는 동안 측천무후는 절대 주도적으로 나선 적이 없는 것도 분명하다. 다만 고종의 경우는 워낙 체력이 약해서 수시로 쓰러졌기 때문에 사실상 고종과 측천무후의 협치에 가까웠는데, 사실 이것도 수나라 문제가 보여준 장면이었다. 수와 당 초기처럼 북방 계통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을 때나 종종 보이는 모습이다. 이후 고종이 상자의를 통해 무후를 폐위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상자의가 잘리고 무후가 고종을 협박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도 고종이 무후의 목줄을 부여잡은 것으로 어디까지나 제1권력은 고종에게 있었다. 더욱이 고종이 그 당시 골골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황권의 진공상태를 고려한 조치일 수도 있는 것. 무후는 이후 고종에게 한동안 허리를 굽혔다.
게다가 고종 시기에도 측천무후의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현명한 황후이자 보조자에 불과했던 탓에 고종의 첩들을 자신이 화가 난다고 죽일 만한 세력이 아니었으며, 결정적으로 죽였다는 첩들 외에도 고종에게는 여러 첩들이 존재했다.
고종 사후에야 여러 남첩들을 들였으나 그들이 정국을 쥐고 흔들만한 권력을 소유했다는 증거는 그다지 없다. 다만 무측천 제위 말년 통치력이 쇠퇴한 시점부터는 이들 남첩들이 궁중을 장악하면서 점차 입김을 늘려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측천무후는 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청나라의 옹정제처럼 특권 계층의 권리와 힘을 숙청을 통해 제어하며,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끌어올리고, 동맥 경화 현상을 보이는 기존의 주류 세력을 대신하여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수수하고 그 시대에 인정받기 힘들며 주류층과 권신들에게 군주에 대한 인기를 크게 상실하게 만드는 일이지만 국가를 위해서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해주어야 하는 일이다.
당의 사실상의 창건자가 태종이고, 고종 시절부터 무후가 통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후는 실질적인 당의 3대 황제가 된다. 조선의 경우 이방과는 징검다리라고 치면 실질적으로는 2대째인 태종이 숙청과 사병 철폐 등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3대째인 세종대왕이 조선의 기틀을 잡은 것이 된다. 반면 수 문제는 1대 황제로서 굉장한 업적을 이룩하고 태평성대로 이끌었지만 2대가 나라를 말아먹어서 박살난 것을 생각해보면 측천무후의 숙청을 통한 공포 정치는 시대의 필수적인 요구라고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측천무후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무후의 권력은 고종 사후에도 신하들에게 여러 번 도전을 받아야 할 정도로 절대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황후나 태후라는 위치를 최대한 부각시켜야 권력 유지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측천무후에게는 정치적 배경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고종과의 연계가 되지 않으면 그나마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훗날에야 절대 권력에 걸맞은 권력을 쥐게 되나 그 시기는 700년 즈음으로 무후 통치기의 말년 중의 말년에 해당되는 시기. 또한 혹리들도 고종이 죽은 683년부터 즉위하는 690년까지만 활동했을 뿐, 즉위 직후에 대부분 숙청했으니 측천 황제의 시대가 “공포정치”라는 것은 좀 거리가 있다. 게다가 측천무후를 까는 또 한 가지의 요소인 “음탕한 년” 혹은 “요녀”로써의 이미지도 과장된 것이 많다. 특히 측천무후가 죽였다고 하는 사람이 공식 기록상에서는 살해된 후에도 버젓이 활동하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여러 사료를 교차비교를 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과거 제도와 비관롱 집단 양성
과거 제도의 완성이자 황권의 강화책인 전시를 역사상 최초로 시행한 것도 측천무후였다. 측천무후는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방식인 과거 제도의 전시 시도와 더불어, 인재 등용을 위한 여러 가지 파격적인 제도를 제시하여 시행했다.
첫째, 스스로를 추천하는 자거(自擧) 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 이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출신을 불문하고 모두 능력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추천했고, 합격하면 바로 채용되었다.
둘째, 무거(武擧) 제도를 시행하여 유능한 무관을 선발했다.
셋째, 시관(試官) 제도를 시행하여, 관리의 소질을 보증할 수 있도록 했다.
넷째, 측천무후는 사회 최하층까지 사람을 보내 인재를 선발했다. 하층에서도 당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가 여럿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제과(制科)를 개설하여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재를 선발했다.
여섯째, 관원들이 유능한 인물을 추천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때 뽑혀서 측천무후의 친위 집단이 된 것이 북문학사(北門學士). 원래 관리가 궁궐에 입궐할 때,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하는 궁궐 남문으로 입궐하여 정사를 논하는 것이 원래 예법이었는데, 북문을 통해 몰래 측천무후의 정치적 브레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칭하는 단어가 바로 북문학사였다. 더불어 훗날 개원의 치로 칭송받는 현종의 치세를 이룩하게 한 기본적인 시스템과 요숭, 송경 등의 인재 풀은 사실상 측천무후가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위 계승에서 태평공주가 아닌 현종을 지지한 게 바로 이 신진 비관롱 집단이었다. 이런 면에서 측천무후는 최소한 용인과 정치력 자체는 발군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전시는 중종의 복벽으로 폐지되는 바람에 전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북송시대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후의 긴 치세는 여러 문제점을 남겼다. 우선 새로 뽑힌 신진 집단이 무후의 개인숭배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부병제를 비롯한 당나라의 여러 병폐가 치유된 것도 역시 아니었다. 후계를 튼튼히 할 수 없었다는 여제의 태생적인 한계 탓에 측천무후 사후 나라는 다시 한 번 계승 문제로 혼란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측천무후의 가장 큰 실패는 외치에서 있었다. 특히 당의 외치 정책인 기미정책(羈縻政策)의 붕괴가 일어난 것이었다.
측천무후는 비교적 성공적인 내치에 불구하고, 외치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정확히는 당의 최대 강역을 이룩한 고종 사후부터가 문제였다.
무후의 시대는 북방 민족과 수없이 투닥거렸지만 대체적으로 영향권과 영토가 크게 축소되는 양상을 보였다.
가르친링의 토번에게 1차로 10만, 2차로 40만을 보내고도 시원하게 망하면서 군사력에 거대한 공백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다음 전쟁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그 때문에 그 다음 전쟁에서도 성과를 내지 못하는 지독한 스노우볼링을 당하게 된다.
682년 돌궐 제2제국이 골돌록가한(일테리시칸)에 의해 부활했으며, 691년에는 묵철가한이 즉위해 쿠차(사주)와 돈황(안서도호부)를 위협했다. 한창 때는 하북은 커녕 산둥까지 털리는데도 손을 쓰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1차에 18만을 투입했다가 황장곡 전투에서 깔끔하게 괴멸되고, 2차로 30만을 투입했음에도 자력으로는 진압을 못 해서 돌궐의 지원을 받아 겨우 진압했고, 그나마 698년 돌궐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곧바로 거란이 재독립하며 요동과 요서의 통제력을 상실한 걸 보면 진압한 이후의 통제조차 혼자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약해졌다는 의미가 된다.
거란의 반란을 틈타 나라 세우겠다며 이주하던 대조영을 추격하지만 천문령 전투에서 대패하여 그토록 많은 인력과 물자를 갈아 넣어 간신히 문 닫게 만든 고구려가 발해라는 이름으로 재건되는 것을 지켜보는 처지가 된다.
이렇듯 그녀의 치세에 있어서 당나라는 북방, 요동, 티베트 지방에 있어서 위협 세력들이 커지는 것을 전혀 막지 못했으며, 이는 당나라 주도의 이민족 지배를 상징했던 기미 지배 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결과적으로 당 태종∼당 고종 대에 이어 쌓아온 외치 부문의 업적들을 죄다 말아먹어버린 것이다. 즉 내정에 있어서도 별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든데 외정과 군사적인 업적에 있어서는 무능한 인물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결국 이 여파로 당 중기∼말기의 국방은 부병제로서는 도무지 지탱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게 되어 절도사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며, 이 절도사의 폐해 때문에 당은 멸망하게 된다.
군사적인 실패의 이유도 그녀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관롱집단을 숙청하던 와중 정무정, 왕방익, 흑치상지 등 양장들이 숙청당한 부작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무측천 일가가 군사적으로 무능했다. 대표적으로 무측천의 백부인 하내왕 무의종, 건안왕 무유의, 설회의 등. 먼저 무의종의 경우에는 낙무정 산하의 거란군이 조주에 있는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상주로 달아나고, 조주가 도륙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무유의의 경우에는 그의 소속이었던 청변도행군대총관 왕효걸이 죽는 등 악재가 있었다.
다만 이런 사태의 책임을 측천무후 한 명에게 모두 떠넘기는 건 부당하다. 이유는 태종과 고종의 치세에 당나라는 한족 국가(엄밀히 말해, 건국집단은 선비족이지만, 성격을 따지자면 한족 문화권 국가라 봐도 무방)로서 최대 판도를 구축하고 이민족들을 기미체제로 편성했다. 하지만 이들 이민족들이 완전한 야만족도 아니고 돌궐, 고구려 등 국력이 통일 중국에 미치지 못한다 한들 중국에 맞선 강력한 국가를 이룬 적이 있는 존재들이었다. 비록 당에 패하여 기미체제 속에 편입되었지만, 기미 체제가 불안정해지면 얼마든지 독립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자들이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기미 체제의 불안정은 다름 아닌 당 고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측천무후가 이를 막지 못한 건 맞지만, 측천무후 한 사람의 책임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가족사가 조금 복잡한데 아버지인 무사확과 전처 상리씨 사이에서 나온 형제 두 명인 무원상과 무원경이 있었고 그 후 무사확과 양씨가 재혼해 언니인 한국부인과 여동생 무씨가 있다.
어머니인 양씨는 수나라 관덕친왕 양웅의 조카딸이자 시안공후 양사달의 막내딸로 명문가 출신이다. 훗날 무측천이 황후가 되자 영국부인에 봉해졌다가 죽은 뒤 노국부인으로 봉해져 시호를 받았고 왕의 예에 따라 함양에 안치되었으며 무측천이 이미 죽은 아버지를 태원군왕으로 봉하면서 어머니를 그곳의 왕비로 올려준다.
자식으로는 고종과의 사이에 어렸을 때 돌연사한 안정공주와 의종 효경황제, 장회태자, 중종, 예종, 태평공주의 4남 2녀의 자식이 있으며, 손자/손녀로는 예종의 아들인 현종과 중종의 딸인 안락공주 등이 있다.
중종과 예종을 보자면 어째 고종과 측천무후의 아들들은 어머니 측천무후에게 눌려 있었던 탓에 이후에도 기를 잘 펴지 못한 건가 싶을 정도로 황제답게 혼자 정권을 쥐고 있던 시간이 길지 않은 편이다. 측천무후의 장남인 이홍의 경우 일설에 의하면 어머니의 뜻을 자주 거스르다가 독살 당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차남 이현의 경우 역시 어머니에게 밉보였다가 쫓겨났다. 뭐가 되었든 지간에 이현은 측천무후가 죽인 게 맞다.
3남 중종은 예전부터 유약했다고 하며, 복위한 뒤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정사를 처리하는데 아내 위황후에게 의지했다. 이런 아들들에 비해 중종의 딸이자 측천무후의 손녀인 안락공주나, 무후의 막내딸 태평공주는 권력욕이 강했다고 한다. 안락공주는 어머니 위황후와 손을 잡고 자기 친아버지인 중종을 만두로 독살했을 정도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평공주는 성격이나 재능 면에서 측천무후와 닮은 점이 많아서 측천무후가 특별히 아꼈다고 한다. 그러나 태평공주가 중종보다 자기가 황제에 어울린다며 황태녀 자리를 요구하자 “네가 뛰어나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또 여자가 황제가 되려면 신료들을 또 다시 대숙청해야 할 텐데, 나도 그렇게 황위에 올랐지만 그건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세도는 남아 있어 4남 예종이 복위한 건 여동생 태평공주와 후에 현종이 된 아들 이융기 덕이 크며, 그가 재위한 동안은 거의 태평공주가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후의 판단은 적중하여 태평공주는 결국 나중에 황제로 즉위한 조카 이융기와 암투를 벌이다 져서 자신은 물론이고 일파까지 대숙청당했다. 이후 현종은 할머니의 치세를 바탕으로 개원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열었지만, 현종 천보 연간부터 당나라는 서서히 망조가 들기 시작한다.
훗날 당헌종의 추존 황후인 의안황후 곽씨는 측천무후를 까면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혐오했는데, 오히려 너무 개입하지 않다보니 환관들의 발호를 막지 못해 결과적으로 나라를 망치게 되었다.
측천문자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는데, 완전 다른 문자를 만들어낸 게 아니고 그냥 한자의 제작 원리에 따라 만든 글자, 즉 한자 몇 개 더 만든 셈이다. 이들 문자는 기존 한자보다 획수가 더 많고 복잡한 경우가 많아서 측천무후 시기가 끝난 뒤로 사멸해 갔다. 스스로를 노자의 후손을 자처하고 도교를 숭상한 당나라와 달리 측천무후는 불교를 숭상했다. 이에 한몫을 거든 건 그녀의 내연남인 풍소보(馮小寶)로, 미륵 신앙을 이용해 측천무후를 떠 받들었다.
실례로 낙양 근처에 있는 룽먼석굴의 대불은 측천무후의 얼굴을 본따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확실히 위압감이 느껴진다.
불경을 읽을 때 해당 불경을 찬미하기 위해 서두로써 읽는 개경게(開經偈)는 측천무후가 직접 지었다고 한다.
無上甚深微妙法(무상심심미묘법) 무상(無上)의 깊고도 깊은 미묘한 법은
百千萬却難遭遇(백천만겁난조우) 백천만 겁이 지나도 다시 만나기 어려워라.
我今聞見得受持(아금문견득수지) 나 지금 듣고 보고 받아 지니고자 하오니
願解如來眞實義(원해여래진실의) 바라건대 여래께서 진실한 뜻을 풀어 주옵소서.
유달리 문자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여, 명칭을 갈아치우는 것을 상당히 즐겼다. 3성 6부를 근간으로 하는 당나라의 관제는 그대로 두고 이름만 바꾸는가 하면 정적들의 성씨를 나쁜 뜻의 글자로 고치기도 했다. 보통 황제들의 시호는 한 글자 또는 두 글자가 일반적이었으나 무후가 집권하면서 고조와 태종, 고종의 시호를 대폭 늘리는 바람에 시호 인플레가 벌어져 당나라부터는 부득이 묘호나 연호로 황제를 통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15년도 채 되지 않는 재위 기간 동안 연호를 14차례나 바꾸어 역사가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측천무후는 미각이 뛰어났다고 한다. 재위 시절 중, 민가에서 엄청나게 큰 무가 나와서 그녀에게 진상했을 때, 측천무후는 황실 요리사에게 무를 이용한 요리를 만들라고 명했다. 요리사는 무를 채 썰어 녹두 가루를 묻혀 볶은 후, 오징어, 새우, 살코기를 넣어 측천무후에게 바쳤다. 이 요리를 그녀가 ‘가연채(假燕菜)’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식습관과 연관이 깊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비타민과 무기질이 많이 들어있는 식품을 많이 섭취했으며, 꽃으로 만든 음식을 즐겨 먹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명한 관상가 원천강이 무사확의 집에 들렀다 갓난아기였던 무측천을 보고 봉황의 목과 용의 눈을 지닌 귀한 상이며 여자아이라면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녀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녀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 한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당태종 당시 좌무위장군을 역임했던 이군선(李君羨)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능력 있는 인물이었는데도 화주지사로 강등된 뒤 반역죄로 죽었는데 바로 여주무왕의 예언과 더불어 그의 이력 때문이었다. 그는 낙주(洛州) 무안(武安)출신으로 아명이 오낭(五娘)이었으며 유무주(劉武周)를 토벌해 무련현공(武連縣公)에 봉해져 헌무문(玄武門)을 수호하고 있었는데 그의 이력에 무(武)자가 많고 아명에 낭(娘)이 들어가는 바람에 당시 여주무왕의 예언을 전전긍긍하던 당 태종의 본보기가 되어 여주무왕으로 지명되어 죽었던 것이다. 그리고 훗날 그의 가족들이 탄원을 올려 이군선은 명예회복이 되었고 관직까지 돌려받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군선의 명예회복을 시켜준 인물이 여주무왕의 당사자였던 측천무후였다. 다만 이 이야기가 야사라는 이야기도 있어 정확도는 알 수 없다.
측천무후와 관련된 일화 중, 용수나무에 관한 일화가 있다. 측천무후가 어느 날 가마를 타고 산책을 나갔을 때, 비가 갑자기 엄청나게 쏟아져서 시종들이 모두 무척이나 당황했다고 한다. 그때 측천무후는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거대한 용수나무를 보고 비를 피했다고 한다. 그 때 그녀는 무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듯, 용수나무 앞에 향을 피우고 “어느 날 뿌리가 마르고 손님이 주인이 되리라”라고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진짜 이씨 왕조 대신 무후가 황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측천무후는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후 모든 사찰에 용수나무를 심고 받들라 명했다고 한다. 이는 용수(龍樹) 즉 용화수나무에 담긴 불교적 의미와도 관련이 깊은데, 불경에서는 미륵보살이 마지막 부처로써 용화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용화수나무 아래에서 3번의 설법을 행함으로써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고 되어 있다. 불교를 숭상했던 측천무후 자신이 미륵의 화신임을 강조하고자 내세운 프로파간다 가운데는 ❮대운경❯이라는 불경에 “미륵의 화신인 정광천녀(淨光天女)가 중생을 구제한다.”고 언급한 부분도 있었는데, 이 ❮대운경❯을 토대로 여자로써 즉위한 자신의 위치를 정당한 것으로, 나아가 필연적인 것으로 굳히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이 대운경을 전국에 뿌리면서 각 지역마다 대운사라는 절을 새로 짓게 했으며, 이 제도는 일본에 전해져서 고쿠분지 건립에도 영향을 주었다(유명한 도다이지도 그러한 고쿠분지의 하나). 측천무후의 즉위나 통치를 반대했던 세력(특히 유학자)에서는 측천무후가 자기의 통치를 위해 아예 위경 하나를 새로 지어냈다고까지 몰아세웠고, 오늘날에는 ❮대운경(大雲經)❯ 자체는 위경은 아니라고 보는 반론도 나와 있다. 아예 가짜 경전을 지어냈든 원래 있던 경전의 내용을 끌어온 것이든 측천무후가 불교를 자신의 정치에 끌어들여 입지를 굳히려고 한 것만은 틀림없다.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는 큰 재미를 못 보다 보니, 재미있게도 최초의 판다 외교를 시도한 인물로서 알려져 있다. 측천무후는 2마리의 판다를 일본에 선물로 보낸다. 요동(발해), 동(신라), 서(토번), 북(돌궐)까지 당나라의 군사 영역이 크게 축소되다 보니, 동부의 신라와 발해를 견제함과 동시에 외치의 안정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나라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방향이라고 할 만한 북쪽에는 돌궐, 서쪽에는 토번, 동북-동해에 이르는 영역에는 발해-대신라가 들어서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제각기 한꺼번에 당나라를 견제하기 시작한다면, 연이은 참패로 군사 역량이 꺾인 당나라로서는 그 큰 땅덩어리가 도리어 악재로 작용하여 사방의 국경 지대가 공중 분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괜히 그 자존심 높은 중국의 황제가 일본에게 다급한 화친 의사를 보낸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그녀에 대해 안 좋은 평을 한 최초의 인물은 김부식이다. 심지어 권근은 “당태종이 선덕여왕을 왕으로 임명했기에 측천무후가 중국에 나왔다”고 비난했다. 사실 좀 알고 보면 권근의 이야기가 웃기는 이야기로, 맨 처음에는 당 태종이 오히려 사람을 보내어 대신 통치하도록 하려고 했고, 측천무후가 황제에 오른 것과 당 태종은 큰 관계가 없다. 측천무후 이후로 중화권에는 서태후 등 실권자를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여성 최고 지도자가 나오지 않다가, 2016년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이 집권함으로써 무려 1311년만에 공백이 깨지게 되었다.
관중18릉이라고 하는 당나라의 자연적인 산을 능침으로 만들었는데 기록으로는 5대10국시대(五代十國時代, 907년∼979년)의 온도(溫韜)가 건릉을 제외하면 모두 도굴 되었다고 하며 탐사를 해본결과 도굴되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측천무후 그녀의 성욕이 엄청나 남첩 3,000명을 뒀었다는 드립도 있는데, 측천무후를 포함한 여성 권력자 관련 섹드립은 이런 식으로 비상식적인 드립이 많다. 덤으로 남첩 3,000명 드립에 대해서는 측천무후 후대인 현종의 첩 4만 명 기록이 있다. 거의 동시대의 기록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을 봐서는 기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현재로서는 안정공주나 태자 이홍의 사망이 측천무후의 짓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정설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어서 받아들이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