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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유 1:11-16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유 1:11-16 / 그자들이야말로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들은 동생을 죽인 가인을 본받고 있습니다. 발람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거침없이 해치웁니다. 그들은 고라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죄로 저주받아 죽을 것입니다. 12)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여러분이 애써 차린 사랑의 식탁에 끼어 든다면 악취를 풍기게 될 뿐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큰소리로 웃고 떠들면서 먹어댑니다. 그들은 마치 메마른 땅에 비 한 방울 내려 주지 못하고 바람에 밀려 다니는 구름과 같아서 약속은 많이 하지만 실행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수확철이 되어도 열매 하나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들은 한 번만 아니라 이중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결국 뿌리째 뽑혀서 불에 태워 질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3) 그들이 뒤에 남겨 놓는 것은 모두가 해변에 밀려든 거센 파도가 남기고 간 더러운 찌꺼기와 같은 수치와 불명예뿐입니다. 그들은 하늘에 떠 있는 빛나는 별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갈 길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영원한 어둠과 암흑입니다. 14) 아담의 7대손이었던 ㄱ) 에녹은 이미 이런 자들이 있을 줄 알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께서 수백만의 거룩한 자들을 거느리고 오셔서 (ㄱ. 에녹1서1:9,5:4,60:8) 15) 온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앞에 세우고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의 무서운 반역 행위가 밝혀지고 또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온갖 불손한 말이 백일하에 드러나 그들은 응분의 벌을 받을 것입니다.' 16) 이런 자들은 언제나 불평만을 늘어 놓을뿐 결코 만족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떤 악한 일이라도 태연하게 해내며 큰소리를 치고 자기를 내세웁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는 때라곤 무엇인가 얻으려는 속셈이 있을 때뿐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가인의 길을 따르고, 발람의 길로 가며, 고라의 패역을 따르기에 주님의 날에 정죄를 받고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11-13) 유다는 거짓 교사들이 결국 당하게 될 멸망을 선언합니다.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선언문은 구약의 지혜문학과 예언서에 자주 등장하고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 이 문제가 어떠한 문제를 일으켰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습니다. 그는 시기심으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발람은 돈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려 한 선지자였습니다. 고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하였습니다. 앞으로 묘사한 거짓 교사들의 모습과 일치하는 예들입니다. 그들은 뻔뻔하게 성도들과 애찬을 먹고 지도자 행세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만 위해 사는 자들이고 성도의 신앙과 교제를 망치는 장애물과 같습니다. 결국 스스로 패망하며 몸 둘 곳 없는 방랑자들입니다.
거짓 교사의 모습(14-16) 유다는 아담의 7대손 에녹이 예언했다고 유대인 사이에서 전해지는 에녹서의 말씀을 언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경건하지 않다”라는 말이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행위 자체만 심판하지 않고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도 심판하십니다. 또한 경건의 열매는 가장 먼저 말로 드러납니다. 경건하지 않기에 악한 말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리고 이들은 원망과 불평을 습관처럼 늘어놓습니다. 자랑하는 말을 하다가도 언제든 이익을 위해서라면 아첨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들의 행동은 공동체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며 무너트리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겸손히 말을 절제하며, 경건의 열매가 우리의 입술에서부터 시작되어져야 합니다. 그 열매로 공동체를 하나 되게 만들고, 사랑하며, 섬기는 모습이 나타나야합니다.
적용: 경건을 지키기 위해 내가 지금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정체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면 싸워 이겨야 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밝은 것은/ 즐거운 노래로 가득 찬 것은/ 집집마다 어린 해가 자라고 있어서다/ 그 해가 노래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모를거야/ 아이들이 해인 것을~~~♪’
경제적인 이유로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세상은 말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돈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키웁니다. 돈이 아니라, 사랑으로 키운 아이라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로 자라게 됩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어려움도, 고민도, 수없이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지만, 그 아이가 자라면서 우리에게 주는 그 사랑스러움과 기쁨은 절대로 돈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 설 교 >
열매 없는 가을나무
유 1장 10~13절 / 엄기호목사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나무로 많이 비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든지,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등으로 표현한 곳이 많습니다. 이 세 나무는 이스라엘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유익하고도 귀중한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나무들이라고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저 밭의 땅만 차지하고 서있다면 땔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제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 포도가 웬일인고”(사 5:1-7)하며 나쁜 열매를 맺은 유다를 향해 탄식했고, 누가복음에는 3년 동안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눅 13:6-9). 또한 성경에는 시장하신 예수님이 열매를 구했지만 열매가 없는 무화가 나무를 보시고 저주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1:18-22).
한편 오늘 본문의 저자인 유다도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나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매 없는 가을나무’의 예로 역사적 교훈으로 악명 높은 세 사람, 곧 가인, 발람, 고라를 언급하면서 믿음을 지키지 않는 자, 거짓 선지자의 최후가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12, 13절).
이에 본문에 나오는 ‘열매 없는 가을나무’와 같은 이 세 사람을 통해 현재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해보고, 열매 맺는 삶이란 어떤 삶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열매 없는 가을나무, 가인
가인과 아벨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입니다. 세월이 지나 그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첫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야웨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였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창 4장). 이 일로 아벨을 질투한 가인은 결국 분노와 시기심,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동생을 죽이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요?
성경은 가인의 악한 행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 3:12). 성경은 인간이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창 4:7)고 했습니다. 가인의 악한 행실이 결국 그를 죄의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가인은 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성의 없고, 준비가 부족하며, 믿음도 없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즉 그의 제사는 피가 없는 제사이며, 피와 상관없는 제사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아주 독선적이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교만입니다.
반면에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히 11:4). 아벨은 바로 피 흘림의 제사, 겸손과 희생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드리는 우리 신앙인들 사이에도 아벨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인과 같은 마음의 자세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라 할지라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예물과 기도를 열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선택하며,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찾아내는 성도, 아벨과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열매 없는 가을나무, 발람
발람은 모압 왕 발락에게 매수되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속이고, 욕심을 부려, 삯꾼의 길을 걸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케 했습니다(계 2:1 ; 민 31:16).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놓은 올무에 미혹되어 모압 여자들과 음란하게 간음을 했으며, 우상의 제물을 먹고 우상에게 절을 하며 숭배하는 등 하나님 앞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질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이용하고, 배반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인권을 유린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또한 탐욕의 철저한 포로가 된 사람들은 임금착취, 부정한 뇌물을 받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손쉽게 부를 축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악의 길, 거짓된 길로 사람들을 인도했던 발람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유다는 “하나님의 화가 이르리라”고 말하며, 이들이 돌아갈 곳은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13절)일 뿐이라고 단언합니다(13절).
지금 우리 시대도 온통 거짓과 아첨과 기만으로 뒤범벅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서 거짓 조언과 가르침으로 안내하는 발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성도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발람과 같은 사람들, 거짓 교사와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듣기 좋은 말로 미혹하며 그릇된 판단을 하게 만드는 거짓 선지자 발람과 같은 사람들을 분별하기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해야겠습니다.
열매 없는 가을나무, 고라
어떤 단체나 집단의 지도자가 되어 그것을 이끌고 나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지도자가 어떤 미래의 꿈을 심어주느냐, 또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집단의 분위기가 크게 좌우됩니다.
그리고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겠지만, 위기를 당할 때 지도자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그 집단의 향방과 미래가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민수기 16장에 보면, 지도자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야웨의 종인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대항하고, 우리도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다면서 성직을 탐하고 시기 질투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라’와 ‘다단’과 ‘온’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당을 짓고 지도자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주목할 일은 그 당시 고라는 ‘유명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르고 이름이 알려지면, 더 높은 위치에 서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 위치에 오르기 전에 먼저 준비가 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무시하고 교만히 행하며, 반역하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확연히 보여줍니다(민 16:31-33).
그러므로 평신도이든, 교역자이든, 직책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께 위임받은 그 위치에 바로 서있는 사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이 만족하는 사람인 것을 깨닫고 작은 일이도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열매 없는 가을나무’와 같은 삶을 산 세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만과 오만을 행하며, 거짓으로 사람들을 미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뿌리까지 뽑힌 나무같이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야생 올리브 나무’라고 일컬어지는 유사 올리브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 하나만 제외하면 실제의 올리브 나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야생 올리브 나무가 있습니까? 이름만 그리스도인이고 열매는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영적 과수원에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많은 햇빛과 흙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실제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야생 올리브, 열매 없는 가을나무가 아닌지 반성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의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전도의 열매, 성령의 열매, 삶의 선한 열매를, 많이 맺고, 열심히 일을 하여, 많이 추수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가짜 신자의 예
유 1장 11~16절 / 스데반 황 목사(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11절에서 사도 유다는 거짓 신자를 향해 무서운 화가 있을 것을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거짓 신자들은 어떠한 존재들인지 세 명의 실제 구약 인물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그 세 인물은 가인과 발람과 고라입니다.
첫째는 가인입니다. 거짓 신자들은 가인의 길을 따라갈 것이라고 합니다. ‘길’이라는 것은 습관이 된 삶을 의미합니다.
가인의 길은 제일 먼저 거짓 예배입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가인의 예배와 여로보암의 송아지 우상 숭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배와 관련한 범죄 행위입니다. 한마디로 가인의 길은 교회 내에 들어와서 우상 숭배를 하는 죄입니다. 복음보다는 인간의 가증한 열심과 더러운 의로 감히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교만의 죄악입니다.
예배는 가장 거룩한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예배를 소홀히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탄이 가장 원하는 것은 예배의 타락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예배 자리에 자기가 올라가 예배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탄은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게 함으로 예배를 타락시킵니다. 그것이 가인의 길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볼 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습니다. 주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를 받으신 것은 다름 아닌 아벨이 지닌 어린 양의 보혈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지하는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로서 그 중심에 복음의 진리 선포가 있고, 성령의 역사를 의탁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고, 자신의 몸과 삶을 다 드리는 믿음의 표현인 헌물이 입습니다. 이때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에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세상의 복이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어린양을 저버리고 인간의 더러운 의로 거짓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의 길입니다.
또한 가인의 길은 하나님의 자녀를 미워하는 미움의 길입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은 남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는 있어도 남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1).
사탄은 언제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에 미움의 씨를 뿌립니다. 미움과 증오에 빠지도록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이때 가인의 길을 택하는 영혼들은 사탄의 밥이 되어 미움의 노예가 되고 증오 가운데 행동합니다. 특히 미움의 대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할 때 그가 바로 가인의 길을 걷는 거짓 신자입니다. 그 길은 어두움의 길입니다. 비참과 저주의 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벨을 향해 미움에 사무치다 못해 ‘심히 분하여’ 자기 아우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러한 거짓 신자가 제 멋대로 행하도록 방치될 때 교회는 그가 뿌리는 미움의 불길에 의해 조만간 지옥의 도가니가 될 것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하지만 참 신자들은 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미움에 속지 않고 주께 받은 사랑에 속하고자 노력합니다.
두번 째 실례는 발람의 어그러진 길입니다.
발람은 자기 영달을 위해 거짓과 속임수로 종교적인 봉사를 택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발람의 어그러진 길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발람 선지자가 누군지 알아야 하는데, 그는 돈을 밝히던 거짓 선지자로서 모압 왕 발락에게 고용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도록 부탁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발람 선지자는 모압 왕 발락의 요구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막으셨습니다. 심지어 당나귀가 직접 말을 하면서 발람의 저주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릴수 있도록 모압 왕 발락에서 좋은 방법을 제안합니다. 그것은 바로 바알과 아스다롯의 신전 잔치를 열어서 이스라엘 남자들을 초청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때 발람의 속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것이며 또한 행음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을 시켜 풍성한 잔치를 베풀게 하고 술을 준비하게 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초청하였습니다. 이때 발람은 모압의 그모스 신 창녀들과 미디안의 고스비 공주를 비롯한 음녀들을 불러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두령들과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대대적인 음행의 죄를 저지르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의 진노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
9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민 25:3, 9)
“보라 모압 백성이 발람의 꾀를 따라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민 31:1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고전 10:6-8).
이처럼 발람의 어그러진 길은 돈을 벌기 위해 교회 공동체를 타락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교회로 하여금 이방 여인과의 육체적인 음행을 통해 영적인 음행을 저지르게 하는 것이 발람의 어그러진 길입니다.
현재 이 땅의 수많은 교회가 동성애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인 상태에 있고, 신사도 운동, 관상 기도, 긍정 신학 및 형통 신학, 참된 교리를 무시하는 기독교 연합 및 종교 통합, 종교 다원화 등을 수용한 상태입니다. 이는 거짓 선지자 발람에게 속아 이방 신들과 음행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짓 신자의 세번째 실례는 고라의 패역입니다.
고라의 경우, 고라의 길이라고 하지 않고 패역이라고 한 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을 만큼 죄악이 무르익었기 때문입니다. 고라의 패역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당을 지어 반란을 일으키는 도전행위를 말합니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고라, 다단, 온” 제사장들이 당을 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을 지어서 모세를 중심으로 하는 지도층에 대적합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주의 참된 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이 시대의 부패한 목사들과 지도자들 중에는 고라의 패역을 말하면서 그들의 종교 권력을 확고하게 하려는 무서운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권력주의자들에게 굴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는 참된 종을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마귀의 짓이 분명한 것입니다.
민수기 16장 1절을 보니 3명의 지도자가 당을 짓습니다. 2절을 보니 그 당은 250명으로 확장됩니다. 19절을 보니 온 회중이 당을 지어 모세를 대적합니다. 이에 모세의 대답이 나오고 있습니다. 28절에서 30절입니다.
28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이요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 줄을 이 일로 말미암아 알리라
29 곧 이 사람들의 죽음이 모든 사람과 같고 그들이 당하는 벌이 모든 사람이 당하는 벌과 같으면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심이 아니거니와
30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민 16:28-30).
고라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이 세우시고 인정하시는 모세를 대항하여 당을 지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사실 하나님께 대한 대항이며 하나님께 대한 정면 반역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합법적으로 세우셔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하게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위임된 권위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합법적인 권위입니다. 그런데 고라를 중심으로 하는 제사장들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슬러 반역한 것입니다.
당을 지어 모세를 대적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31-35), 31절에서 고라, 다단, 온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소유가 지진과 함께 갈라진 땅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35절을 보니 그들에게 함께 속하였던 250명을 향해서는 여호와의 불이 나와서 전부 태워 버렸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반역한 강퍅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는 염병의 심판이 나타났습니다. 이때 염병으로 죽은 자가 14,700명이나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이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아무튼 가인의 길, 발람의 길, 그리고 고라의 패역을 답습하는 자들은 거짓 신자들입니다. 특히 12절을 보면 거짓 신자들에게 절대로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의 애찬’으로 표현된 ‘참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여기서 애찬은 아가페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참여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만찬을 말합니다. 아가페 사랑을 받아 아가페 사랑을 하는 자들의 교제가 애찬입니다.
그러나 거짓 신자는 아가페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거룩한 성도의 애찬에 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거짓 신자가 애찬에 낄 경우 그것은 거룩한 애찬에 더러운 오물이 낀 모습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성도와 거짓 성도를 나누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참된 신자는 사랑으로 인하여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 사랑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아직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아가페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도 유다는 참 신자가 거짓 신앙과 거짓 신자를 대항하여 싸우는 가장 중요한 힘으로 아가페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본래 죽은 자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살리셨습니다. 그 사랑이 죽은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을 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이 그들로부터 나타나야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의 그 사랑이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입니다. 사람이 되신 아가페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십자가 상에서 그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아가페 사랑을 압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러나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를 모릅니다. 그래서 사망에 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아가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반면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아가페 사랑을 알며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가페 사랑과 세상적인 사랑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 변함없는 사랑 – 훈련된 사랑 - 진리의 사랑 - 언약적 사랑 – 자기를 죽임으로 나타나는 사랑 - 희생적인 사랑 - 마음의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반면에 세상적인 사랑은 순간적 - 감정적 - 이기적 - 조건적 - 기분에 따른 사랑입니다. 바벨탑 사랑이요 육체와 정욕에 얽힌 짐승적인 사랑입니다. 나아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단 한 번도 아가페 사랑을 하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에게는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는 생명이 없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12절 이하는 가인, 발람, 고라에 속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죄성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첫째, 거짓 신자는 자기 배만 챙깁니다. 거짓 신자는 교회가 어떻게 되든, 그리스도의 영광이 땅바닥에 떨어지든 상관없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자신의 입장과 체면과 영달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참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챙깁니다. 참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인내하고 양보하고 일부러 저 줍니다. 즉, 공동체의 영광을 위해 내 주장과 내 의견을 내려놓습니다.
여기서 자기 배를 채운다는 뜻은 자기 영광을 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기준을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그 인생이 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 5:41-45 /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그러나 참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광 때문에 자기 영광을 내려놓는 자들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칭찬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다르게 표현하면 성령으로 거듭나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하나님의 칭찬만 구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거짓 신자는 오직 자기 영광을 위해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거짓 신자들에게는 영원한 목적지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명도 없습니다.
“그들은 비 한 방울 내리지 못하는 바람에 밀려 다니는 구름들이요, 가을이 되어도 열매 하나 맺지 못한 죽은 나무이며 나아가 뿌리채 뽑혀 두번 죽는 나무들이로다”(유 1:12, 스데반 황 역).
참신자는 성령과 말씀으로 인해 거룩하여지는 역사, 죄성을 이기는 역사, 변화의 역사, 아가페 사랑으로 살아가는 성장,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지만, 그러나 거짓 신자는 열매가 없습니다. 영생의 열매가 없습니다. 삶의 영원한 목적지도, 삶의 목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인 열매인 거룩과 참 사랑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구름 같은 허망한 썩을 것을 추구하며 계속 서로 허망된 약속을 합니다. 또한 목적지 없이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과 같은 허망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수년 동안, 수십년 동안 교회를 다닐지라도 결코 성령으로 인한 생명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죽은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생들과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거짓 신자들은 세상에 속한 썩을 것들을 약속하며 그것들을 추구합니다. 형통 신학과 번영 신학처럼 이 세상의 것으로 사람들을 부추기는 거짓 선생들과 선지자들을 주의하기 바랍니다. 그들은 영원한 영광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영원한 것들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교사는 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을 추구하도록 격려하며 참 신자는 썩지 아니할 참되고 영원한 것들에 대해 진심어린 관심을 갖습니다.
아무튼 거짓 신자에게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 열매를 전혀 맺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참된 열매는 맺을 수 있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마 7:15-21).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히 6:7-8 /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그러므로 그들의 인생은 이 땅에 있을 때에도 열매없는 죽은 나무였고, 이제 세상을 떠날 때는 뿌리채 뽑혀 불못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 3:8-9).
한편, 예수님께서는 참 신자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명이 있는 자들이라 하시며 그들이 열매 맺는 비결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신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늘 유지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4-6).
이때 영생의 열매는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구원의 역사, 그리스도를 닮도록 인격을 성장시키는 역사, 나갔던 자를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입니다. 특히 참 신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에까지 자라나는 변화가 복음의 능력과 생명에 의해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 와중에 참 신자는 더없이 하나님 나라의 평강과 희락과 의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넓고 깊게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어갑니다.
셋째, 13절을 보니 “거짓 신자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공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19).
이처럼 거짓 신자는 죄를 자랑하고 죄를 저지르는 것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결국 영원한 흑암이 될 것입니다. 14-15절을 제가 원어로부터 직접 번역하였습니다.
유 1:14-16 / 14 아담의 칠 대 후손인 에녹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도다. “주께서 그의 수많은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곧 오실 것이다. 15 주님은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인데, 불경한 모든 자들이 불경건한 방법으로 행한 그들의 모든 불경건한 행위들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실 것이며,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를 향해 내뱉은 모든 완악한 말들에 대해서도 유죄 판결을 내리실 것이다.”
16 이런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들이며 늘 (남의 약점과 문제점을 찾아) 불만을 토하는 자들이고, 그 정욕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건방짐과 교만 가운데 자랑하는 말을 하며 자기 유익을 얻기 위해 아첨하는 자들이다.
이처럼 거짓 신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대심판입니다. 그때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인데 불신자는 수욕의 부활로 일어나 불못으로 떨어질 것이고, 참 신자는 영광의 부활로 일어나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신자들은 모든 악한 행동, 악한 말들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불못에서 그들이 지은 죄악에 비례하는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유다는 16절에서 거짓 신자의 평소 습관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면 하나님을 곧바로 원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을 향해 불만을 토합니다.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늘 못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셋째는 정욕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정욕은 “에피쑤미아”입니다. 삶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욕망과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욕은 우상 숭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돈이 우상이든지, 여자 또는 남자 등 이성이 우상이든지, 인기가 우상이든지 권력이 우상이든지 학벌이 우상 등입니다.
그러나 참 신자는 정욕이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16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8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갈 5:16, 18, 22-26).
(롬 8:4-7. 10, 14).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경은 ‘에피쑤미아’를 탐심, 또는 욕심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탐심은 언제나 변장과 거짓의 탈을 쓰며 또한 반드시 죄를 낳습니다.
“너희는 탐심의 탈을 쓰지 말라”(참조, 살전 2: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약 1:14-16).
넷째는 건방짐과 교만 가운데 자랑하는 말을 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자랑은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랑은 사랑하기 때문에 자랑합니다. 한글로 자랑과 사랑은 점 하나 차이입니다. 자랑과 사랑은 언제나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거짓 신자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반드시 세상을 자랑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이 무엇을 자랑하는지 잘 들어 보기 바랍니다. 바로 그들이 자랑하는 것이 그들에게 소중한 것이요 그들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돈 자랑하는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학벌을 자랑하는 사람은 학벌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학벌이 그의 가치관이며 그 사람의 인생의 목표입니다. 자녀를 자랑하는 자들은 자녀가 우상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튼 사람은 자기 맘으로 사랑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자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자랑은 그 사람의 우상이 무엇인지를 쉽게 드러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 그 깊은 동기가 자랑을 통하여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가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진짜 신자인지 가짜 신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이러한 헛된 자랑들을 “다 악하다”고 알려줍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6).
또한 이러한 자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 2:16).
하지만 거짓 신자들은 늘 허탄한 자랑을 합니다.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 2:18-19).
반면, 참 신자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에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몇 가지 열거합니다. 예를 들어, 지혜와 용맹과 부귀(렘 9:23), 저지른 죄악들(빌 3:19), 장래일 또는 내일 일(잠 27:1; 약 4:13-17), 특히 자신의 의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빌 3:8).
참 신자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구원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즉,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합니다(렘 9:24). 또한 하늘의 시민권을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며 예수님을 자랑합니다(빌 3:20; 눅 12:8-9). 특히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마지막으로 거짓 신자는 자기 유익을 위해 아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아첨은 신실함이 없는 자, 그리고 마음이 간교한 자가 하는 것입니다. 맘에 전혀 없는 입바른 칭찬을 그 사람 앞에서만 하는 것이 아첨입니다.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시 5:9).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시 12:2-3).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잠 26:28).
성경은 거짓 선지자, 거짓 친구, 거짓 정치가, 거짓 지도자의 특징은 아첨이라고 밝힙니다. 즉,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지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편 아첨을 좋아하는 자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첨을 좋아하는 무리들과 아첨을 잘하는 거짓 선지자가 만나게 되어 가짜 교회를 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날이 가까우면서 그 어떤 때보다도 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출현할 것인데 그들의 분명한 특징은 아첨입니다. 즉,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며 그들을 추켜 세울 것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8).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거짓 신앙의 실예와 여러가지 특징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거짓 신자들에게는 오직 거짓 신자의 특성으로만 가득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거짓 신자로만 드러나면 그는 다름 아닌 마귀의 자녀일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참된 생명을 가진 참된 신자들이라 하더라도 그들 안에 아직 옛사람이 남아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도 그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옛사람으로 인한 여러 가지 죄성이 여전히 드러나곤 합니다. 물론 참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증거가 확연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가장 분명한 증거는 회개와 믿음, 그리고 거룩함과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거짓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죄성이 자신 안에서도 발견된다면 그 죄성을 철저하게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께서 주신 거듭난 생명으로 참 신자의 특성을 더욱 드러내기에 힘써야 할 것이니다. 이를 위해서는 복음의 능력을 얻기 위해 계속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가며 믿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참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골 3:1-10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성령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의 옛사람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 싸움은 우리 내면에서 있어야 하고 외적으로는 교회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죄를 죄라하며 거짓 교훈을 멀리하며 대항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늘 말씀과 성령 안에서 깨어 있는 참된 주의 백성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망 불평의 죄
유 1장 15~16절 / 김홍도목사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큰 죄가 아닌 줄 알지만 멸망과 불행을 가져오는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2주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40년 동안 광야를 맴돌다가 불평하던 사람들이 다 죽은 다음에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남녀를 합치면 약 100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15절에 보면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거스려 불평하고 원망한 강퍅한 말 때문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많이 체험하고 출애굽 해 나왔는데도 앞에 홍해가 가로 막히고 뒤에 애굽 군사가 쫓아온다고 금방 울부짖으며 원망하기를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이 광야에서 죽는 것 보다 낫겠노라”고 악한 말을 했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있어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찌니라”하고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 때 홍해가 갈라지며 육지가 되어 그 가운데로 건너가 구원을 받고 애굽 군사는 뒤따라오다가 모두 바다에 수장 지내고 말았습니다.
또 민수기 11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또 원망하고 불평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애굽 군사들이 병거와 함께 수장 지낸 것을 보았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함을 보면서도 그리고 아침마다 맛있는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으면서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민수기 11장 4-6절에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고 악한 말을 했습니다. 이 만나는 갓씨와도 같고 진주와 같이 생겼으며 기름 섞은 과자맛 같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맛있겠나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감사는 하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기를 코에서 냄새가 나도록 주어 먹게 한 다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민수기 13장에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두 사람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하고는 모두 백성 앞에 불신앙적인 말,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성읍은 견고하고 아낙 자손들은 얼마나 대장부들인지 우리는 그 앞에서 메뚜기 새끼와 같다고 보고하자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곡하였다(민수기 14장 1절)고 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불평 원망 했습니다.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한 그 말대로 40년 동안 광야를 맴돌면서 다 죽게 한 다음 불평 대신 믿음의 말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원망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도 복을 받지 못하고 가정을 불화케 하고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고 다른 사람을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불평과 원망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며 현재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욕심, 탐심을 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나 친척들 중에 원망 불평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복을 받지 못하고 불행해지고 암이나 기타 불치의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하는 말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평소에 하는 말 원망과 불평의 말도 다 들으시는 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원망 불평은 전염성이 강해서 유행병처럼 퍼져나갑니다. 처음에 “섞여 사는 무리”가 불평하기 시작하니까(민수기 11장 4절) 온 백성에게 퍼져서 온 백성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원망 불평하는 자를 극히 조심해야 됩니다. 그리고 열두 정탐꾼 중에 10명이 불평의 말을 하니까 온 백성이 밤새도록 곡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직분을 맡기지 않을 뿐 아니라 내쫒아 버립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시험 들게 하고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고 나아가서 교회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죄는 용서할 수 있으나 이런 분자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1. 원망과 불평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원망과 불평은 사탄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 입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의 종에게 불평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을 다 써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를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하면서 소 떼, 양 떼 모두 다 도적맞고 불타 죽고, 자녀 10남매가 대풍에 집이 무너지면서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입으로 원망의 말이나 불평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욥기 1장 21절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장 22절)고 했습니다. 마귀는 욥의 입에서 원망과 불평의 말이 나오게 하려고 온갖 고통과 불행을 갖다 주었지만 실패하고 도망갔습니다. 온몸에 악창이 나고 구더기가 버글버글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결코 그 입술로 범죄 치 않았습니다. 결국 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불평이 자꾸 나올 때는 내가 기도가 부족하고 은혜가 떨어져서 마귀가 나를 시험하는구나하고 빨리 회개하고 정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2. 원망, 불평은 축복을 가로막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할 때, 그들은 광야에서 고생만 하다가 죽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면 좋겠다”하는 말은 요사이 말로 “예수 안믿을 때가 더 좋았다. 천당이구 뭣이구 다 귀찮다. “에이, 교회 그만두자”하는 말과 같습니다. 마귀의 종노릇하고 죄의 종노릇하는 때가 더 좋았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진노하실 말입니까. 기도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의 말, 불평의 말을 다 들으시는 분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점치는 귀신을 쫓아낸 것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고 쇠고랑을 찼는데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쁨으로 찬송하고 기도했더니 쇠고랑이 풀려져 나가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옥사장과 그 가정을 구원할 수가 있었습니다. 불평할 수밖에 없을 때 오히려 찬송하고 감사하면 더 큰 기적이 일어나고 더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밖에 있는 자유인들에게 권면하기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더구나 저주 받고 지옥에나 가야 마땅한 사람이 구원 받고 엄청난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입으로 감사는 하지 않고 불평이나 하고 원망하는 말이나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섭섭해 하시고 괴씸히 여기시겠습니까? 불평, 원망은 축복을 도망가게 하고, 마귀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3. 원망과 불평은 모든 행복과 건강을 빼앗아 갑니다.
불평마귀에 잡힌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의복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아도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귀를 끌어들이는데 행복합니까? N.V.Peale 박사의 글에 보면 어떤 여자가 좋은 옷을 입고 비싼 반지를 끼고 기차를 탓는데,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시켜놓고는 음식 맛이 없다느니 종업원이 불친절하다느니 기차는 왜 이렇게 더럽냐느니 등등 계속불평만 늘어놓더랍니다. N.Peale 박사는 그 여자를 “불평 만드는 공장”이라고 한 것을 읽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불평 원망하는 사람은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고 교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자신도 결국 불치의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거나 죽고 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신경쇠약이나 노이로제나 위장병, 불면증 등에 걸려 건강한 생활을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했고,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징 13절)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장 6절)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원망, 불평 대신에 기도에 힘씁시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네가 불평거리를 광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상품을 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했습니다. 어떤 이는 “나는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나는 구두가 없는 것을 불평했다.”고 했습니다. 원망, 불평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싫어하시고, 사람들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