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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27 - 유대 반란을 진압한 티투스 황제와 동생인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7권을 “악명높은 황제들” 이라며 티베리우스 - 칼리굴라 -
클라우디우스 - 네로 황제의 4부로 적었으며 그리고 8권은 “위기와 극복” 이라고 한후
갈바 - 오토 - 비텔리우스 - 베스파시아누스 -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황제 순으로 적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39세에 즉위한 티투스 황제 만큼 좋은 황제가 되려고 애쓴 사람도 없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는데....... 당시에도 공복(公僕) 이라는 표현이 존재했다면
티투스 황제야 말로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철저한 공복이 되려고 애썼던 것이라 장담합니다.
로마 제국의 10대 황제 티투스는 두번째 세습 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번째 황제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장남이니 재위기간 2년 동안에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이 완공되었고.... 로마 시대 대참사 중 하나인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있었습니다.
39년에 로마에서 기사 계급 출신의 직업 군인 베스파시아누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팔라티노 황궁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후계자들과 함께 학문을 배웠는
데...... 동갑내기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브리타니쿠스와 사이가 돈독했다고 합니다.
브리타니쿠스가 네로에 의해 독살되었을 때 티투스는 브리타니쿠스와 음식을 나눠먹었기 때문에
자신도 중독되어 오랫동안 마루에 쓰러져 있었으니.... 이 일은 티투스의 인생에서
평생 잊지못할 사건이었고, 훗날 황제가 되자 엣 친구 브리타니쿠스의 상을 건립해 기렸습니다.
티투스는 서기 61년 부터 3년간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취임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와
함께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로마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64년에 로마로
돌아와 아레키나 테르툴라와 결혼했으나 사별하고 65년에 마르키아 프루닐라와 재혼했습니다.
새 아내 마르키아 프루닐라는 생가가 제위 후계자 네로의 반대세력에 속했기에 그는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고, 원로원 의원 피소가 주도한 네로 암살 의혹사건으로 반강제적으로 아내와 이혼했는데,
딸 율리아가 있었으며 티투스는 이후 결혼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에 이어 로마~ 유대 전쟁을 지휘합니다.
이제야 고향의 재난에 두손을 들었느냐? 너희들은 우리가 얼마나 강력한지, 너희들이 얼마나 약한지 가늠해
보지도 않은채 광기에 사로잡혀 동족과 예루살렘과 성전을 멸망으로 몰아넣었으니, 죽임당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되고 끊임없이 반란을 도모해 왔고 마침내 로마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자신만만해 했던 이유가 너희들의 많은 인원수 때문이었느냐? 로마군 극소수 병력만으로도 너희를 상대하기엔
충분했다. 너희가 믿었던 것은 동맹국들이었느냐? 허나, 어떤 종족이 로마편이 아닌 유대인의편에 섰겠는가?
신체가 강인하다고 믿었던 것인가? 저 게르만인들 조차 로마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강력한 성벽을 믿었는가? 저 거대한 대양 (大洋) 보다도 큰 장벽이 있을수 있느냐. 대양에 둘러싸인
브리타니아인들도 로마군에게 정복되었다. 뛰어난 전략과 영리한 지도자를 믿었는가? 지략이 뛰어난
카르타고인마저 굴복했다. 결국 너희들은 로마의 관용을 빌미삼아 감히 전쟁을 시작했다고 밖엔 볼 수 없다.
너희가 이 땅에 살도록 배려했고, 동족 가운데 왕을 세워주었다. 너희 조상들이 율법을 준수할수 있도록 존중했으며,
이방인과 함께 살면서도 율법에 따라 살도록 허락했다. 커다란 관용은 너희들의 신(神)에게 제물을 바치고,
예물을 수집하는 것을 허락해준 것이다. 너희들은 부유해졌고, 그 돈으로 우리와 전쟁을 벌일 군비를 마련할수 있었다.
그런데 특권을 누리던 너희가 그것을 허락한 우리에게 오만방자하게 등을 돌리고, 친절을 베푼 우리에게 독사
처럼 독을 뿜어댄 것이다. 마치 몸 속에 잠복해있다가 병이 악화된 후에나 뚜렷이 드러나는 금이
가고, 찢어진 상처 처럼 잠잠히 지내다가 본성을 드러내어 어림도 없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는 욕심을 부렸다.
'베스파시아누스' 가 이 땅에 온 이유는 너희를 징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을 파멸시킬 계획이었다면, 즉시 이곳 예루살렘부터 초토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는 갈릴리와 근방 지역 부터 공략하며 너희에게 다시금 숙고할 여유를 허락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약해서 호의를 베푼 것이라 착각하고, 관대함을 핑계삼아 무모한 짓을 계속 벌였을
뿐이다. 네로가 죽자, 너희는 비열한 악당이나 할만한 짓을 저질렀다. 제국이 혼란한
상황을 틈타서, 나와 내 아버지가 이집트로 떠난 상황을 이용해서 너희들은 전쟁 준비를 했다.
우리 부자 (父子) 가 전쟁 지휘관이었을때, 큰 아량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역을 꾀하며
오만하게 굴었다. 나와 내 아버지가 제국을 위기로부터 구해내고, 안정을 회복하자
다른 종족들은 축하 사절을 보내왔건만, 너희 유대인들은 또다시 우리를 적대시 하였다.
유프라테스 건너편에 있는 자들에게 반역을 선동하고, 요새 성벽을 새롭게 구축했으며,
소요를 조장시키고 명예욕에 사로잡힌 폭도들끼리 서로 내란을 일삼고는 마침내
모든 유대 땅에서 전쟁을 도발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극악한 자들이나 저지를 법한 일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이 평화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선 매우 기뻤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설득했다. 너희가 전쟁을 시작하자 장기전을 계획하며
관용을 베풀고자 했다. 도망쳐 나온 자들에겐 자비를, 피신해온 자들에겐 안전을 보장했다.
포로들에게 온정을 베풀었고 학대하는 로마 병사에겐 엄한 조치와 벌을 내렸다. 너희들의 성벽을
부수기 위해 어쩔수없이 공성무기를 사용했지만, 학살하려는 살기 (殺氣) 로 가득찬
내 부하들을 자제시켜야 했고, 승리를 거둘때마다 패배했는 것 마냥 먼저 너희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성전 가까이 접근한 후에도 전쟁 법칙을 무시하면서 까지 너희 성소 (聖所) 와 성전을 보존해야
한다며, 거듭 너희에게 호소했다. 너희들에게 자유로이 성지 (聖地)
를 떠날 기회를 주며 목숨을 보장했고, 너희가 원한다면 다른 곳에서 전투를 하겠다고도 했다.
이 모든 제안을 무시한채, 너희 손으로 직접 성전에 불을 질렀다. 파렴치한 짓들을 저지른 너희가
이제 나와 협상을 하겠다? 이미, 무너져버린 것 이외에 구할 만한 건덕지가 남아있단
말인가? 성전은 무너져버렸거늘, 너희들 스스로를 위해 지킬 것이 무엇이 남아있다는 것인가?
불행을 자초하는 자들아! 지금도 여전히 무기를 움켜쥐고, 극한 상황속에서도 뉘우침 없이 선처를 바라고
있구나! 무엇을 믿고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냐? 너희 동족은 살해당했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도시는 정복당했고, 너희 목숨은 내 손에 달려있지 않은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 영웅적인
행동이라 생각하는가? 광기에 맞장구쳐줄 생각이 전혀 없다! 《유대전쟁사》,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저
하지만 요세푸스가 쓴 유대전쟁사에, 로마군이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온갖 잔인한 학살들이
언급되며 반란과 관련이 없는 유대인 1,200명을 로마군이 경기장에 모아 죽이는
내용과 어린아이들 까지 로마군이 성벽 아래로 내던져 죽이는 내용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 민족주의자 열심당이 일으킨 전쟁은 큰 반란 사건으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67년에 유대
반란을 진압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될 당시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갔으니 직책은 중무장 보병 지휘관이었으며 재무관으로서도 병영에서 활동했습니다.
68년, 네로의 자살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끝나고 새로이 갈바가 황제에 오르자,
유대인들 과의 전쟁을 지휘중인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갈바에 대한
충성서약을 위해 로마로 향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그만 오토가 새 황제가 되었습니다.
다시 비텔리우스가 오토와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오토가 자살하며 로마군의 피냄새가 향기롭다고 한
돼지 비텔리우스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티투스는 로마제국 서방지역이 혼란에 빠져
있으므로 상황을 봐서 충성여부를 판단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귀환힙니다.
군단장으로 복귀한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시리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자 티투스 역시 아버지를 지지했고, 무키아누스가 비텔리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로마로 떠난뒤 아버지 마저 로마로 진군하자 유대 전쟁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유대전쟁을 총지휘하게 됩니다.
70년에는 유대 전쟁의 최고 지휘자로서 결사항쟁하던 열심당의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통곡의 벽 부분만 남기고 부숴버렸으며 73년, 여전히 항복
하지 않는 열심당 최후의 보루 마사다 요새를 제외한 팔레스타인의 유대 반란을 진압합니다.
티투스는 항복한 유대인들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지만, 항복하지 않다가 잡힌 포로들에
대해서는 하루에 500명씩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는데, 이스라엘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공격을 몹시 주저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으니 유대교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고,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돌이킬수 없는 분열이 생겨나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때는 유대인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다 같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둘 사이를 묶어줄 가시적 공통제도가 사라집니다.
71년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유대전쟁 개선식을 거행했으니 로마에 티투스 개선문에 남아 있으며,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고 아버지와 공동통치를 하며 호민관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몇차례에 걸쳐 집정관을
지냈으니 티투스는 제위 계승자이자 아버지의 러닝메이트로 정치가 겸 행정가로의 역량을 키워나갑니다.
예나 지금이나 양모는 특유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암모니아로 세척하는데, 당시에는 암모니아가
포함된 오줌을 사용했으며 로마의 양모 가공업자들은 공공화장실의 오줌을 공짜로
이용했고, 이런 양모업자들의 무임승차에 대해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감하게 오줌세를 거뒀습니다.
이에 양모업자들은 크게 반발했고, 티투스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아버지에게 이를 따졌는데
이때 베스파시아누스가 은화 한 줌을 아들 코앞에 쥐어 주며 "자 맡아봐라.
오줌 냄새가 나느냐?" 라고촌철 살인급의 대답을 하며 해프닝으로 반발을 수습
했다고 하며 베스파시아누스 사후 오줌세 때문에 희극에서 고인의 드립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극소수의 파트리키, 노빌레스 출신 원로원 의원들은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
재산이 현저히 줄고, 명맥만 유지해 "돈도 없고 가난함만이 남은 이들" 이라고 놀림감이 된
경우가 많았음에도, 추방형과 재판 회부등 고초를 겪었으며, 네 황제의 해 동안 벌어진
사건들 까지 끄집어 낸 다음 피해 입은 귀족들의 복수를 도와주고 지지를 얻는 영악함까지 보입니다.
79년 6월 24일에 황제로 취임했는데 이때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인들이 티투스가 "제2의 네로"
가 될까 봐 걱정했다는데..... 그가 유대 전쟁을 치르던 과정에서 만난
헤로데 왕조의 여왕 베르니케에게 홀딱 빠져 그녀와 정식 결혼하려고 한 일화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베르니케는 로마 시민들에게도 악명높은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의 딸인데다가 두 차례 결혼했다가 과부가
된 적이 있고, 남동생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와도 근친상간 관계였다고 알려져 로마 시민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티투스가 베르니케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써 티투스 즉위는 소란이 없었다고 합니다.
티투스는 황태자가 된후 돌싱이었으므로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려 했는데 어느날, 경기장에서 둘이
함께 있는걸 본 시민들은 그들에게 야유를 보냈고, 티투스는 끝내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으니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이 커플에 대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베르니케의 생일에 꽃과 선물을 보내던 티투스가 결국 사랑을 포기했다는 소식은 로마 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니, 로마인들은 티투스가 성격이 소탈한데다가 국가를 위해 사랑까지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는데.... 하지만 티투스는 오래 살지도 못했지만 끝내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검투사 시합을 빈번히 개최하거나 선제 베스파시아누스를 야유하는 희극이 상연되어도 책망을 하지
않았기에 인기는 높아졌으니 관대한 황제는 원로원과의 관계도 양호했으니 티투스는 짧은
제위기간이지만 죄를 묻더라도 '반역죄' 로는 처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죽기 전까지
지켰으며 남을 돕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에는 주변인에게 '하루를 잃어버렸다' 고 한탄했답니다.
티투스는 선정으로 국민, 원로원으로 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온갖 대사건들이 잭팟 터지듯이 줄줄이 일어나는
바람에 재해대책을 세우고 사태를 수습하느라 쉴수가 없었으니, 대표적으로 폼페이의 참사가
재위 2달만에 일어났으니 이 사건들은 하나만 터진게 아니고, 말 그대로 연달아 줄줄이 대사건들이었으니....
2011년 3월에 일어난 도호쿠 대지진 같은 사건이 연달아 계속 터진다고 생각해보면 끔찍한데.... 이때
에다노 관방장관이 나흘간 잠도 못 자면서 사태수습을 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됐던 걸 생각해
보면, 이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수습해야 했던 티투스의 건강에도 끔찍한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역대 로마 황제의 재위 기간이 20년을 넘긴 경우는 드물었는데 관료체계가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로마
황제는 모든 인사와 중요 서류 결재를 맡아야 했으니, 엄청난 격무이고 신체적으로 무리가 갈수
밖에 없으니, 아우구스투스는 44년간 황제 자리를 지킨 이면에는 아그리파가 대신 과로로 빨리 죽었습니다.
대사건으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인한 폼페이시(市)의 매몰이니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스타비아이 등의 도시들도 멸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산에 초토화되었으니
그는 베수비오 화산에 피해를 입은 캄파니아 지방에 지원을 보냈으며 신속한 대처로 위기를 수습합니다.
80년에는 로마에서 대화재에다가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 등이 잇달았고 4일간 벌어진 대화재는
티투스에게 로마 재건 및 리모델링을 해야했고 페스트까지 돌아 질병퇴치 및 구제사업에 진력해야
했으니 티투스는 황제로서 여가를 즐길 시간도 없이 재해대책으로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했으니
재해현장에 나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진두지휘한지라 로마 시민들은 그를 '인류의 총아' 로 경모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콜로세움으로 잘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설 사업이 마무리되었으니 티투스는 준공
기념으로 100일이 넘도록 검투사들과 맹수, 죄수들에겐 지옥이었던 축하행사를 벌였으며, 콜로세움은
티투스에 이어서 즉위한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1개 층이 증축되어 총 4개 층을 갖춘 형태로 82년에 완공됩니다.
한편, 테렌티우스 막시무스 라는 인물이 네로 황제를 사칭하여 파르티아의 힘을 빌려 반란을 꾀했는데.....
파르티아는 이 인물이 진짜 네로라고 여기고 적극 협력했으나 나중에 가짜인게 밝혀지자 처형합니다
하지만 열성적으로 재해지 구호에 힘쓰던 티투스는 축하행사 와중에도 재해대책에 몰두해야만 했고, 치세 2년
만에 열병으로 쓰려져 죽으니 81년 9월 13일 입니다. 그는 기품과 위엄있는 준수한 용모를 지녔고,
드물게 건강한 체질이었지만 키는 크지 않았고 배가 나온 편이다.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중 '티투스 편' 3
동생 도미티아누스 처럼 금발머리였지만 이마가 넓고 건강했는데, 키가 컸던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키는 작고 배가
나왔으며 얼굴은 네모형에 미간이 좁은데다, 플라비우스 가문의 이마가 넓은 단점이 있으니, 황실 내 황제
초상을 관리하는 관료와 예술가들은 티투스의 결점을 가리기 위해 최대한 배가 안 나오도록 신경썼다고 합니다.
티투스의 성격은 즉위 이후에는 관대함과 온화함으로 유명하지만, 즉위 전은 로마인들에게 냉정,
잔인함으로 더 알려져 있었고, 티투스는 매일 저녁 미소년이나 환관 무리에
들러싸여 밤 늦도록 놀고 마시는 것을 즐기고 이런 술잔치의 끝은 늘 폭음과 폭식이었다고 합니다.
동시대 로마인들의 황제로서 티투스에 대한 평가는 “치세 2년 내내 고생만 하다가 2년 만에 죽었던 황제, 나이도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꽃다운 41세” 였으니 황제로서의 능력은 아버지 처럼 뛰어났기에
제국을 문제없이 잘 통치했는데, 제국 황제의 업무량은 굉장히 무겁다 보니 건강을 갉아먹는건 당연한 일입니다.
티투스는 어린 시절 친구였던 황자 브리타니쿠스의 억울한 죽음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해 황제가 된후 친구의 살아
생전 모습을 조각한 동상을 금으로 제작할 정도로 천성적으로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도미티아누스
치세 이래 원로원에서 찬사를 받았으니 마키아벨리가《군주론》에서 그려낸 이상적 통치자에 부합하는 인물입니다.
반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유대인 사이에서 증오받고 있으니 로마에 티투스 문이라는
건물과 이름이 들어간 다리를 지날때, 정통파 이스라엘인 즉 하레디들은 지나는 것조차도 금기시한다지만,
티투스는 이스라엘인을 학살하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 멸망후 이스라엘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점도 있습니다.
원로원, 지식인 등 로마 상류층의 평가와 별개로 당대 기사계급, 일반민중, 군대에는 특유의 철저하고 꼼꼼한
성격 덕에 오히려 공정하다며 큰 지지를 받았고, 오늘날 도미티아누스의 통치와 행정,
국방 성과가 인정되니‘잔인하고 악랄한 폭군’ 이라는 오명을 벗고 행정가로선 뛰어난 황제로 재평가받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둘째 아들로 51년 로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기사계급 출신이었으며, 위로는 11살 연상인 친형 티투스와 여자 형제인 소 도미틸라가 있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승진을 거듭해 로마 주류사회에 편입된후 태어났기 때문에 나이 차이가 많은 형과는
성장 과정부터 달랐으니 티투스가 소년 시절까지 가난한 평민 가정에서 자랐다면, 아버지가
집정관에 취임하기 한달전 태어난 도미티아누스는 로마 상류층 자제로서 갖춰야 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서민적 풍모, 형 티투스의 다정다감한 성격과 달리 소년
시절부터 귀족적인 풍모를 가지고 있었고.... 황제 즉위 전까지 형과 달리 군복무를 경험하지 않았는데,
네로 사후 벌어진 내전시 로마에 있었으니 아버지와 비텔리우스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큰아버지
사비누스와 유피테르 신전 안으로 도망쳐 밤새 관리인 숙소에 숨어 있다가 변장을 하고 탈출해야만 했습니다.
이후 추격을 받다가 어머니의 친구 도움으로 여러번 목숨을 구했으며 얼마뒤 아버지가 내전 승리후
황제가 되자 로마를 관할하는 수도 법무관에 올랐는데 이때 도미티아누스는 명장
코르불로의 딸이자 아일리우스 라미아의 아내였던 도미티아 롱기나를 남편과 이혼시키고 결혼합니다.
도미티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지위를 가지면서, 아들이 없던 형 티투스의
후계자로 선언된 상태였으며 또한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6차례나 집정관을 지내는등
제왕 교육을 받아서, 형 티투스가 황제가 된 뒤에 아버지 생전 형이 누렸던 호민관 특권 등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티투스가 예전부터 동생에게 집정관을 양보하는등 배려있는 모습을 보여줬기에 가능한 요구였지만
그러나 티투스는 동생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런 까닭에 도미티아누스는
형 티투스를 적대해서 제위에 오른뒤 티투스의 신격화 허용 외에는 어떤 영예도 수여해 주지 않았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티투스의 갑작스런 사망후 황제에 즉위했는데 태생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의 황제들 처럼 파트리키가 아님에도 워낙 귀족적이고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려고
했으니 타고난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도미티아누스의 성격과 행동은 아버지나 형과 달랐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와 형이 죽은뒤 아버지 정부 카이니스가 해방노예 출신이란 이유로 입맞춤을 거부하고
손등을 내미는 행동을 저질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과 행동이 뻔뻔하고 무례해 젊은 시절부터
상냥한 사람이 아니라고 평가받았으며 실무 경험이나 군사 경험이 없는채로 즉위했기에 약점이 뚜렷했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즉위초부터 팔라티노 황궁, 도미티아누스 경기장, 네르바 포룸의 공사를 시작하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건축을 시작한 콜로세움을 준공했으며 아우구스투스 이후 100년만에 로마 병사들의 급여를 인상했고
라인강과 도나우강 사이 슈바르츠발트를 로마 영토에 편입하고 게르마니아 방벽을 세워 국경선의 방어를 강화합니다.
또한 법 집행과정을 공정하고 엄격하도록 노력했으며, 공공도덕을 강조하고 유죄로 판결난 사건들을 검토해
억울하게 유죄가 된건 취소시키고 돈에 매수되어 판결을 뒤집은 배심원들을 처벌했으니 로마는 행정관과
속주 총독들의 성실성과 청렴도가 높아졌고, 일반 시민들에게 축제를 제공하는등 선심성 정책들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원로원과 관계가 악화되니, 원로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기사계급을 중용한 탓도 컸지만, 개인적인 성격과 행동
탓도 컸으며 사치가 심했는데, 원로원과 부자들에게 유독 엄격했으니 풍속과 도덕적 양심을 이유로 원로원
의원들의 사생활까지 간섭하고 그리스문화에 빠진 나머지 동성애를 즐긴 원로원 의원들을 풍속위반 혐의로 처벌합니다.
아울러 그는 베스타 처녀 사제 중 최고 사제 코르넬리아를 비롯한 총 4명의 여사제들을 근친상간과 맹세 위반
혐의로 처벌했는데, 코르넬리아는 여러명의 애인을 뒀다는 혐의로 생매장이라는 로마에서 거의 사라진
전통 처벌방식으로 죽였고, 근친상간 혐의로 기소된 세 여사제는 스스로 사형 방식을 선택하도록 한후 처형합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상류층에서는 평판이 나빴지만 풍속 도덕 교화정책 중에 후대 로마인들에게 훌륭하다 평가받은
것도 있으니, 극소수의 부자들이 집안 남성노예를 거세시켜 환관처럼 만드는 불법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단호하게 금지하고 어길시 정한 규칙대로 무관용 처벌했습니다.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 조차도 공적 업무를 볼 때 양심적이고 성실한 황제였다고 했는데, 원로원에서는 독재자
라고 미워했음에도 자애로운 성격도 있다고 평했으니 훗날 콤모두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할 때 원로원에서
콤모두스 악행을 언급하면서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야만적이라 언급했지만 네로처럼 악랄하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네 황제는 개인 소유의 별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국고에서 비용을 충당해 황제 개인 소유의 별장을 짓지 않았는데, 이는 사치스럽고 자기과시적
이었던 칼리굴라도, 그보다 더 사치스럽고 스스로를 예술과 미학의 천재로 여긴 네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의 발상지 알바롱가에 자리잡은 도미티아누스 별장은 바다와 호수를 볼수있는 탁 트인 위치에
자리잡았으니 로마에서 20km 떨어진 별장은 인근에 자리잡은
폼페오 알바노 별장으로 불리는, 폼페이우스 별장 보다 화려했으니 리조트였고 놀이공원 이었습니다.
동시대 사가 플리니우스는 도미티아누스가 이 별장에서 보이는 호수에서 보트를 띄워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다고 하며, 호사가라는 평이 더 어울리는 변호가이자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도미티아누스가 이곳에서 열정적으로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말합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첩실, 측근과 최고급 호화선에 올라 눈치를 안보고 호수, 바다 위에서 선상 파티를 즐겼으며
원하면 극장으로 유명 배우, 가수를 불러 공연을 즐길수 있었고, 전차 연습도 자유롭게 할수
있었으니 수비대가 정주하면서 방어하고 변란이 벌어지면 틀어박혀 군대가 올 때까지 버티면 그만이었습니다.
트라야누스는 이곳 위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전쟁을 치르고 업무를 하느라고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으며
반면 예술가 기질이 강한 하드리아누스는 개인 취향에 어울리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티부르에 빌라 아드리아나라를 새롭게 지었으나 별궁이 예정기일보다 늦게 완공됐기에 잠시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시설이 좋고, 비상시 대피공간이자 방어시설로 유용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곳을
이용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75년 폭동 때문에, 안전상 이유로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처로 며칠 동안 이곳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이후 어떤 로마황제도 이곳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즉위초에 세밀히 국고와 세수 문제를 점검해 제국의 국고를 계산된 흑자 상태로 만든 성과를 남겼는데 콜로세움
완성, 공공건축물 개보수, 군대 월급 인상, 빈민 복지 향상, 문예가 후원 등을 했음에도 도미티아누스
가 암살된 후, 로마 제국에게 남긴 것은 건실한 국고 관리를 통한 수입액과 국고기금이라는 선물이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화폐의 은 순도를 90% 에서 98% 로 높이고, 은화 무게를 2.87g 에서 3.26g으로 증가시켰음에도
잉여금을 남겨줬으니, 85년 금융위기시 은화 순도와 무게를 93.5%와 3.04g 으로 평가절하함에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형 티투스가 건실하게 유지한 재정 수준 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국고를 채웠다는 것이라?
이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도 못한 것이었고.... 또 반대파를 제거해 호주머니를 채운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남긴 유산이었으니 도미티아누스는 역대 로마 제국의 황제
중 내정과 세수 관리, 행정 분야에 최고의 천재이니 이후 팍스 로마나가 도미티아누스가 남긴 작품이라고 평가받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연간 12억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을 로마 국고에 수입액으로 남겨주도록 설계했고, 1/3 정도는 로마군
유지와 군비 증강에 사용되도록 했으니 콤모두스, 카라칼라 처럼 황제가 기분에 따라 돈을 펑펑쓰면서 호화선물
을 뿌리거나, 트라야누스 처럼 국고 수입만 믿고 팽창정책을 펼치지 않는이상 구멍날 일이 없게 유산을 남긴 것입니다.
83년 게르만족중 하나인 차타족과의 전투 승리를 기념한 정식 개선식을 로마에서 거행했고, 원로원으로부터
'게르마니쿠스' 라는 존칭을 받았는데 원로원이 선사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스스로 원해서 얻어낸 것입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전쟁터에서 병력을 이끌고 원정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개선장군이 되었기
때문에 존칭을 받은 모양새가 떨어졌으니 원로원은 즉위 직후부터 아니꼬웠던
도미티아누스가 반강제로 얻어낸 칭호를 자랑스러워한 것을 놓고 쓴웃음을 지었다고 합니다.
도미티아누스의 치세에는 명장 아그리콜라가 활약했으니 그는 브리타니아에 파견되어
히베르니아 (아일랜드) 까지 토벌전을 나가 이름을 남기고 칼레도니아
(스코틀랜드) 를 합병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습니다. (아그리콜라의 칼레도니아 침공)
그러나 때마침 먼 본국의 도나우 강 지역에서 여러 군단과 군사를 잃어버리니, 85년 로마로의 귀환을 명령
받아 합병을 앞두고 정벌 도중에 그간 수년간의 고생길이 무색하게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85년, 도나우 강 북쪽의 다키아족이 로마로 쳐들어오자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족과 전쟁을 벌여 우여곡절 끝에
88년 다키아족을 무찌르는데 성공했고 이듬해(89) 에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이로 인해 훗날 황제가 되는 트라야누스가 등장하게 됩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초반을 제외하고 원로원에 나쁜 평가를 받았으니 매우 비타협적이고 단호했던 성격 탓도
있지만, 황제권을 강화하면서 자기 우상화를 지나칠 정도로 내세웠기 때문이었으니, 이전 여느 황제
보다 원로원을 대놓고 빈껍데기로 여기고 황제는 원로원의 말을 충고하고 존중만하면 된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에게 자신을 부를때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주인이자 신)' 라고 부르게 했으며
원로원과 고위관료들이 자신과 접견하거나, 황제가 공식연회를 베푸는 공간을 황궁으로 정한뒤
예법을 만들어 운영했으며 여러 첩들과 침대에서 레슬링을 한다는 등의 발언으로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85년 도미티아누스 자신이 종신 감찰관직에 취임하면서 결정적으로 폭발했으니 감찰관은 국세조사를 담당하는 직책
이었지만 또한 원로원 의원을 추방할 권한도 있었기 때문에 도미티아누스의 종신 감찰관 취임은 원로원 의원들은
위협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며, 반역죄를 활용함에 고문등 잔인한 방법을 사용한데다가 숙청대상 역시 광범위 했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개최한 경기를 주재할 때마다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으며, 또한 경기시 동료 심판들에게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쓰게해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이 우월함을 홍보했습니다.
게르마니아 총독이 게르만족 출신 점성가이며 예언가인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를 불경죄 체포해
로마로 압송했는데 프로클루스는 번개와 별자리로 점을 치다가 도미티아누스가 서기 96년
9월에 제 수명을 못 채우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기에 총독이 놀라 체포 후 로마로 보냈던 것입니다.
도미티아누스는 그에게 재차 점을 치게 했는데 점쟁이가 친 게르만족과 켈트족들이 사용한 점성술과 그리스 및
로마의 점성술 모두 똑같은 결과가 니오니 사형을 언도했지만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의 점괘에, 황제의
죽음이 이 해 96년 9월 18일이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사형 집행은 그가 예언한 날짜 이후로 연기합니다.
암살에 대비해 도미티아누스는 호위를 강화하고 배게 밑에 호신용 검을 두고 잤고, 변고 조짐이 있으면 즉시 고발을
통해 체포하고 심문했는데...... 그럼에도 결국 96년 9월 18일 저녁 그는 황궁 안에서 시종 스테파누스에게
암살됐는데, 일격을 당할때 배게 밑에 숨겨놓은 검이 없자 칼을 내놓으라고 소리지르고 침실을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인들에 의해 모든 문이 굳게 잠겨 도미티아누스는 탈출하지 못했고 맨손으로, 무장한 스테파누스 및
하인들과 싸워야 했으니 칼에 손이 베인 상황에서 부상당한 손으로 암살자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후벼 파려고 했지만 스테파누스와 암살자들에게 7번이나 칼에 찔려 치명상을 입고 44세 나이에 죽었습니다.
군대는 이듬해 네르바를 유폐한채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협박했고 스테파누스등 암살자들을 처형했으며
머리 끝까지 열받은 군대가 제정이 공화정보다 낫다며 무산시키자 원로원은 네르바를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플라비우스 왕조는 27년 만에 붕괴되고 네르바- 안토니누스 왕조가 뒤를 이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자, 원로원과 근위대는 놀라운 점괘로 미래를 예언한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에게 감탄하며 그를 풀어줬으며..... 수혜자인 네르바 황제도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에게 400,000 세스테르티우스 라는 거금을 내려줬다고 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착공한 콜로세움은 도미티아누스 치세때 완공되었으며 네로는 로마 대화재 때문에
우발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다면, 도미티아누스는 황제 숭배에 저항하는 그리스도교
를 박해했다는, 목적성에서 차이가 있으며 전제 군주정 칭호를 대놓고 사용한 최초의 로마 황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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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길이 없다고 했다
노년에 이르면 내면(內面)을 바라보며 길을 찾고,
꿈을 향해 걸어가라고 한다.
남이 보기에 아름답게 사는 것을 넘어
스스로 느끼기에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건강관리 잘하시고 품격 높은 삶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