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순명의 깨달음
일본에서 7년간 음악을 공부한 형제 자매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전공하다 공부를 하다 보니 바로크 음악들, 그러니까 17-18세기 순수 음악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공도 오르간과 바순으로 바꾸고 음악 그 자체의 매력에 흠뻑 젖어들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몇몇 대학과 일부 신학대학의 종교음악과에만 오르간 과목이 있고 거의 대부분이 피아노 전공자 일색이었습니다.
오르간과 바순으로 유학을 마친 이 부부는 한국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국에서 순수 음악인으로 산다는 일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강사 자리 하나 잡으려해도 거기에는 반드시 인맥과 봉투가 오가야 합니다. 음악이 아니라 이름과 간판이 대세를 이루고, 이미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빌붙어야 생활이 가능해지는 한국의 음악판에 질려버린 그 부부는 1년 만에 포기하고 다시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난 것입니다.
성공과 돈보다는 음악, 그 자체로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늦은 나이에 다시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하루 여덟 시간씩 오르간을 치고 바순을 불었습니다. 그렇게 네덜란드에서 부부가 나란히 바로크 음악을 제대로 공부한 몇 안 되는 음악인으로 손꼽힙니다.
10년 공부를 또 하였지만 그 사이 한국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음악은 그들만의 권력이었고 옹골진 밥그릇이었습니다. 또 다시 고민은 찾아옵니다. 한국에 들어가 자리를 잡을 것인가? 하지만 그 다음의 삶이 너무 뻔했습니다. 서서히 돈의 관성에 젖어들 것이며 편안함에 굴복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이제껏 부정했던 권력화된 음악에 결국 기생하며 살 것이 명약관화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없이 살아도 자유롭게 사는 삶을 택합니다. 불편해도 행복할 수 있는 자유를 택합니다.아내는 도서관의 사서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편은 작은 식료품점에서 일을 합니다.
그렇게 다시 10년이 흐르며 깨달은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세례는 받았지만 사실 기도도 별로 하지 않았고 특별한 활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루에 여덟 시간 바순을 부는 그 시간이 자기는 기도하는 시간이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시간이라 스스로 합리화시켰던 그 세월 속에, 하느님께 봉헌하는 기도가 아니라 결국 내가 좋아서 한 것 아니었는가? 라는 깨달음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 이후 이 부부는 진정으로 음악이 사람을 향한 봉사가 되게 할 때 비로소 온전히 순수한 음악임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아픈 환자가 있는 곳이든, 아니면 작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든, 소박한 가정과 교회 공동체의 자리든 가리지 않고 무료 공연을 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세월이 10년입니다. 네덜란드 현지 교회의 반주봉사와 성당의 반주를 맡은 지도 15년이 됩니다. 그러고서도 이 부부는 아직도 자신들이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이렇게 원 없이 사랑하는 음악을 하며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인데 하느님께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셨다고, 오늘도 작은 식료품점에 앉아 바순을 불며 그렇게 그는 기도하며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먼저 삶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의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의 본질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돈과 권력으로 대표되는 내 뜻의 성취로부터 찾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전투구를 합니다. 정상적이지 못한 과정을 합리화하고 길이 아니면서도 갑니다.
이렇게 행복의 변질적 진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마치 애벌래들의 군상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뒤엉켜 싸우면서도 그 꼭대기에 놓여 있는 감추어진 허무를 알지 못합니다. 좋은 대학, 좋은 자리, 높은 연봉, 이것 말고는 산다는 일에 있어 중요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덮어버립니다.
참된 행복은 첫째 <생명의 본질에 '솔직'해지는 일>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거창할 수 없습니다. 자유를 누리고 진리를 깨치며 사랑하고 사는 일입니다. 아주 보편적인 것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솔직하지 못할 때 이 당연함은 파괴됩니다.
돈과 힘과 권력은 사실 솔직하면 얻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을 준다고 말할 때는 그만큼 나의 자유와 진리와 사랑을 잃을 각오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것을 선택한 삶은 결국 노예의 질서로 서서히 나를 앗아갈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참된 행복을 위하여 선택해야 할 두 번째 결정이 <내가 행복해지는 길, 그 다음을 선택할 줄 아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남이 행복해지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참된 행복을 향한 성장입니다.
그리고 이 성장에서부터 행복을 통한 자유가 무엇인지, 진리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사랑하면서도 사랑이 그리운 삶이 무엇인지를 또한 깨닫게 됩니다.
나를 위한 선택은 능하면서도 남을 위한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국 보면 헛똑똑이들입니다. 행복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행복보다는 불행의 조건들을 더 많이 찾아내며 또 그것을 메우느라 세월을 허송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입니다.
행복과 불행. 극단적인 두 여자가 있습니다. 첫 여자 하와로부터는 '죽음'이 왔습니다. 그 이유는 '불순종'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를 통해서는 '생명'이 왔습니다. '순명'을 통해서입니다.
무엇을 향한 순명입니까?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향한 순명 때문이었습니다. 하와와 마리아, 둘 다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하와라는 여자는 자기가 행복하기를 바랐고, 마리아라는 여자는 하느님께서 행복하실 수 있기를, 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바랐습니다. 이 차이입니다.
참된 행복의 마지막 단계는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명의 정체이자 정신입니다. 복종 잘 하고 말 잘 듣는 것이 순명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일이 순명입니다.
하와는 이것이 안 되어 하느님을 떠나 인간의 행복을 구하다 낟알을 먹기 위해 땀을 흘리고, 커다란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고 남편을 갈망하지만 결국 그의 손아귀에 쥐일 뿐인, 그렇게 흙에서 난 몸 흙으로 돌아갈 신세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사랑했던 여자, 오로지 그 뜻 앞에 순명했던 여인은 시작과 마침을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이룹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복이요, 마리아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그 누구도 앗아가지 못합니다. 원죄의 책벌(무염시태)로도 죽음의 부패(성모승천)로도 그녀의 행복은 굳건하였습니다.
행복하고 싶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마리아와 하와. 우리는 과연 어떤 여자의 결정과 선택을 위한 깨달음을 살고 있는가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것을, 그대는 사랑하기 위해 살고 계시는가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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