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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
시베리아의 침묵
김윤배
시인의 말
연해주는 헐벗은 유민들에게 희망의 땅이었다.
조국이 그들을 거두지 않았으므로 연해주는 그들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남의 나라 땅에서 아이를 낳고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 살면서 더러는 러시아로 귀화 하고
더러는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더러는 풍요로운 정착을 했다.
고국은 늘 풍전등화였고 러시아는 볼세비키 혁명이었다.
크레믈린의 음모에 의해 연해주 한인 20만 여명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되었다. 한인들에게 강제 이주는 혹독한
시련이었다. 84년이 흘렀지만 한인 유민들의 서러운 여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들을 싣고 갔던 시베리아횡단열차는 오늘도 시베리아를 질주한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와 죽음을 묻었던 시베리아는 침묵한다.
2013년 7월 詩境齋에서
김윤배
목차
1. 아무르만의 안개
2. 신한촌의 분노
3. 라즈돌리니예 역의 어둠
4. 아무르 강의 속울음
5. 바이칼의 젖은 눈빛
6. 노보시비리스크 역의 겨울비
7. 우슈토베 역 광장
8. 부슈토베의 까마귀 떼
9. 시베리아의 무거운 시간
*발문 : 역사의 비극과 생명의 시적 전율 박철화
1. 아무르만의 안개
안개는 붉은 눈빛 숨기지 않는다
아무르만은 거대한 너울로 거친 숨 몰아쉬며
안개의 붉은 품으로 빨려든다
조용하고 무거운 굴종의 시간이
아무르만 가득 찬다
안개는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아무르만을 점령 한다
붉은 안개의 상륙을 저지할
시베리아의 강풍은 등을 보인지 오래다
안개의 붉은 혀는 거침이 없다
티진혜 삼키고 블라디보스독 삼키고
우수리스크 삼키고 하바로브스크 삼키고
캄차카를 삼킨다
안개의 붉은 혀는, 마침내
겨울 철새들 하늘 길 삼키고
순록 떼 지나간 눈길 삼킨다
시베리아의 길들 붉게 물들어 조용해지고
붉은 안개는 북극까지 붉은 혀를 뻗는다
안개의 붉은 혀는
대지의 허파, 수많은 늪을 삼키고
끝없이 펼쳐진 삼림을 삼키고
대지의 젖줄, 푸르른 강줄기 삼키고
오래된 사원을 삼킨다
사내들은 붉은 안개가 두려웠다
사내들은 거친 말소리로 두려움을 달래고 있었다
안개의 붉은 혀는
사내들 거친 말소리 삼키고 불안한 눈빛 삼킨다
사내들 쳐진 어깨 삼키고 두터운 발목 삼킨다
안개의 붉은 혀는, 사내들
밥그릇은 삼키지 못 한다
사내들은
대한제국이고 조선이고
발해이고 고구려이고
우랄이고 바이칼이었다
사내들에게 밥그릇은
하루였고 달빛이었으며
낡은 노동 화였고 무디어진 낫이었으며
영하의 부두였고 젖은 벽돌이었으며
쓰러지는 의지였고 먼 기다림이었으며
봉두난발이었고 핏발이었으며
밥그릇은, 눈물겨운 밥그릇은
단지斷指였고 도화선이었으며
젖무덤이었고 애기똥풀 꽃이었으며
막무가내 막무가내 고국이었고
신음이었다
아무르만 붉은 안개 사내들 밥그릇 핥는다
밥그릇은 진저리 친다
밥그릇은 목숨의 터여서
사내들 목이 메인다
밥그릇에서 울음 터진다
울음은 지극하고 깊다
*
사내들 뼈 속을 흐르던 오열은
광활한 대지를 소리 없이 적신다
울음이 내일이었던 사내들
울음이 뼈이고 살이었던 사내들
울음이 양식이었던 사내들
울음이 길이었던 사내들
울음이 동토였고, 묘지석이었던 사내들
사내들의 울음은 유장한 강이었다
사내들의 울음은 광활한 대지였다
사내들의 울음은 웅혼한 산맥이었다
바위 같은 사내들이 터뜨리는 오열로
아낙들 눈빛 깊어지는 밤이었다
사내들 어깨 흘러내리는 절절한 달빛이었다
사내들의 시베리아는
광활해서 두려웠다
사내들의 시베리아는
막막해서 두려웠다
사내들의 시베리아는
도전이어 두려웠다
사내들의 시베리아는
마침내 희망이여서 두려웠다
시베리아는 살아 있음으로 환희로움이었다
시베리아는 보이는 것들의 불평등한 미소였다
시베리아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깊은 상처였다
시베리아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사내들의 시베리아는
시베리아여서 축복이었다
시베리아여서 저주였다
*
시베리아
오, 시베리아
두려운 9월이었다
그해 시베리아의
9월은 붉은 안개였다
자작나무수림 한 계절을 완성하느라 적막하다
수림은 강철 침묵을 대지 위에 펼친다
대지는 강철 침묵 위에 알곡들의 묵묵한 축제를 펼친다
알곡마다 숨찬 노동의 근육들 무늬져 있었다
알곡마다 일생의 소리없는 웃음 숨겨져 있었다
알곡마다 아낙들의 긴 겨울이 담겨져 있었다
알곡은 사내들이
바람을 모아들인 어제였다
강물을 끌어들인 오늘이었다
달빛 그림자를 숨겨둔 내일이었다
시베리아의 9월은 바람이다
바람은 자작나무 몰래 뼈를 숨겨 숲으로 든다
뼈를 숨긴 바람은 착란이다
짧은 순간 자작나무 노란잎들 분분한 생을 종언으로 이끈다
바람에 베어진 잎들 수척한 얼굴로 검은 흙의 손을 잡는다
잎들이 자작나무숲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래 전에 닫혔다
뼈를 숨긴 바람, 그 착란의 계절이 오면
아무르 강물은 몸을 투명하게 굳힌다
강물 투명한 몸으로 서성거릴 때
투명한 몸 위로 돌아와 눕는 갈대 잎들
그 자리에서 긴 겨울 보낼 채비를 한다
갈대잎 위에 차가운 달빛 흐드러질 때쯤
사내들 달빛 밟고 강 건너 늑대 발자국 쫒는다
사내들은 피 묻힌 칼날을 눈 위에 꽂아놓고 늑대를 기다린다
시베리아 늑대는 칼날의 피를 핥으며 죽어간다
사내들은 늑대가 무릎을 꿇는 순간을 잰다
사냥에서 돌아오는 사내들 어둡다
시베리아의 겨울 풍경은 피 냄새로 얼룩진다
시베리아의 9월은 사내들 피 묻힌 칼날의 계절이다
사내들 9월이 불안하다
묵묵한 계절, 순백의 침묵이 불안하다
불온한 명단 위에 그어지는 붉은 선이 불안하다
9월은 크렘린이었다
9월은 시베리아의 거대한 음모였다
*
조선은 백성 굶주려 슬픈 나라였다
함경도는 왕실에서 멀어 허기진 눈빛 보이지 않았다
굶주림을 탈출할 길은 막막했다
무산의 기막힌 사내*
경흥의 서러운 사내**
함경도 농민 열 세 가구 이끌고
1863년, 국법 어기고 월경 감행했다
목숨 건 월경이었다
달빛은 설원을 서럽도록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
지친 그림자 설원 위에 흔들리고 흔들렸다
설원은 아득하고 아득했다
살아서 이 행로를 끝낼 수 있을지
수리부엉이 달빛 차고 날아올랐다
등에서 잠들었던 아이 깨서 칭얼거렸다
물푸레나무로 만든 설화는 국경 넘지 못했다
감각이 사라지면서 뜨거운 열기가 언 발에서 솟았다
그것이 힘이었다
걸어도 걸어도 길은 설원에 머물러 있었다
두 사내는 말이 없었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생의 마지막 길이라고 믿었다
서로에게 믿음 보내며 죽음도 함께 하자고
살아서 함께 하는 길이라면
축복처럼 살자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무산의 최원보
** 경흥의 양응범
몇 십 마장을 걸었으니
월경죄로 죽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설원의 끝은 나지막한 능선이었다
그리고는 기적처럼
꿈결처럼 북으로 산줄기가 이어져있었다
죽음처럼 몰려오는 잠을
흔들어 깨우며
차고 서러운 밤을 밀어냈다
잠들고 싶었다
잠들어 눈 쌓인 벌판에 스며들고 싶었다
두 사내는 서로의 목숨을 일으켜세웠다
*
아침 해가 붉게 솟아올랐다
설원 붉게 물들고
사내들의 가슴도 붉게 물들었다
남루한 목숨 맡긴 땅이 시베리아 먼 동쪽 구석진 티진혜
몇 일 밤 낮 걸어서 월경한 땅은 함경도에서 멀지 않은 러시아 영토였다
물 설고 산 설고 말 설어 두려운 땅이었다
사내들은 티진혜를 지신허로 이름하였다
지명은 사람들을 거느렸다
지신허는 궁핍한 꿈이었다
지난한 내일이었다
새로운 지명을 찾아 고향을 버린 사내들
지신허에 연자방아를 세우고
구들을 놓고 우물을 팠다
여럿의 예카제리나가, 여럿의 빅토르가 태어났다
지신허에 아이들 울음소리 청대밭이었다
지신허 강 아이들 울음을 받아 축복처럼 흘렀다
강은 지신허 사내들 기르는 젖줄이었다
고단한 삶을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5년 지나며 지신허의 유민들 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1869년, 큰 흉년이 들었다 기사(己巳)흉년이다
참혹한 기근이었으며 형벌이었다
강풍과 흙비로 모든 작물이 말라죽었다
아침마다 붉은 햇무리가 서고
강바닥이 드러났다
농심은 풀풀 흙먼지로 날았다
초근으로도 목피로도 기근을 견딜 수 없었다
굶주림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조국을 버렸다
조국은 주린 배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러시아 국경을 쉽게 넘었다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갔다
초겨울, 수 천 명의 사내들이 지신허로 몰려들었다
헐벗은 채 굶주린 식솔들을 힘겹게 이끌고 나타났다
눈빛은 흐리고 검은 광대뼈가 솟아 있었다
지신허는 이미 이상향이 아니었다
지신허는 신기루였다
새로운 지명이 불러들인 사내들이었지만
먼저 온 사내들이 일군 땅은 작고 초라했다
지신허는 수 천 명을 거둘 식량도 가옥도 없었다
허기 위에 덮친 허기는 견디기 힘든 수난이었다
혹독한 추위를 막아줄 한간의 흙벽이 아쉬웠다
지신허는 생지옥이었다
먼저 온 사내들은 난감했다
천여 명이 겨울 날 식량을 수천 명을 위해 풀었다
그 식량으로 며칠을 버틸까
속수무책의 계절이었다
속출하는 아사자들을 매장할 땅은 삽이 들어가지 않았다
최초의 사내가 다른 사내에게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내가 목숨 걸고 일군 지신허는
수 천의 유민을 거둘 수 없는 절망의 땅이 되었다
어제는 아이 낳던 아낙이 죽었다
남편은 사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최초의 한 사내가 핏덩이를 안았다
닭울음소리가 사라졌다
개 짖는 소리가 사라졌다
돼지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소와 말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핏덩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살아 있는 소리들이 사라졌다
굶주림 너머 또 다른 굶주림이었다
혹독한 계절은 느리게 흘렀다
핏발 선 눈빛들, 남쪽 하늘을 보았다
핏발 선 눈빛들은
조금씩 미쳐가고 있었다
누가 우리를 지신허로 데려 왔는가
누가 우리를 로스께의 땅에서 죽게 만들었는가
누구도 그들을 지신허로 데려오지 않았다
누구도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지 않았다
최초의 한 사내*는 새 땅 찾아 나섰다
고난의 행군은 북으로 이어졌다
자작나무숲이 유민의 길을 따라와주었다
자작나무숲은 언제나 설레임이었다
구릉을 넘고 광활한 벌판을 건넜다
그리고 수이푼이었다
새 희망의 땅, 수이푼이었다
수이푼을 추풍이라 이름하였다
새로운 지명은 새로운 삶을 거느렸다
서른다섯 가구를 이끌고
최초의 한 사내, 추풍에 자리 잡았다
개 짖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자작나무숲을 태워 밭을 만들고
돌을 골라 논두렁을 세웠다
집터를 다지고 물길을 내고
* 최운보
볍씨를 틔우고 못줄을 띠웠다
벼를 파종하는 기쁨은 추풍을 덮었다
풍물을 치고 두레를 놀았다
달콤한 고난의 세월이었다
천 이백 여명의 유민들이 추풍의 새로운 주민이 되었다
추풍은 넓은 가슴으로 유민들을 맞았다
추풍은 드넓었다
사내들은 새벽마다 지평선에 시선을 박았다
사내들의 발은 언제나 흙 속에 묻혀 있었다
아낙들은 가슴을 풀어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아낙들의 젖은 대지였다
수이픈 강이 흐르는 추풍은 사내들의 가슴이었다
우수리스크지역의 추풍사사秋風四社는 그렇게 세워진 한인마을이었다
코르사코프카, 크로우노브카, 푸질노브카, 시넬리니코프 마을 세우며
사내들 흥겨웠다
집집마다 일찍 불을 껐다
사내들은 밤에도 힘찼다
매일 밤 황홀한 연옥을 넘나들었다
*
지신허에 남아있던 최초의 다른 사내*는
지신허가 황폐해지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더는 지신허의 이름으로 사내들을 묶을 수 없었다
사내들을 서북쪽을 이끌었다
사내들의 가슴은 가뭇없이 넓었다
사내들의 눈빛은 밤마다 흔들렸다
새로운 땅이, 새로운 하늘이, 사내들을 설레게 했다
미지의 바람이 사내들을 호명했다
사내들 다시 유민의 길에 올랐다
사내들이 이끄는 그림자가 지평선에 걸렸다
* 양응범
지평선에 붉은 해가 오래도록 머물렀다 지쳐 쉰 곳
그곳이 얀치혜였다
사내들 얀치혜를 연추라 이름하였다
새 지명을 입힌 땅은 새 삶을 경작하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연추에 마음 뉘였다
마음은 지쳐 너덜거렸지만 절망을 노래하는 사내는 없었다
사내들은 달빛 가득한 마당을 갖게 되었다
집집마다 머루알 같은 예까쩨리나 혹은 빅토르의 눈망울이 마당을 채웠다
어린애 우는 소리가 개 짖는 소리를 덮었다
연추로 사내들이 흘러들었다
아낙의 흐트러진 머리에서 이삿짐이 부려졌다
사내들은 두툼한 손으로 새로 온 사내들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서 손바닥으로 따스한 마음 흘렀다
가난은 지극할 뿐, 마음은 새벽이어서
사내들 가슴은 한결 넉넉했다
그 넉넉함으로 우물 다시 파고 고샅길 열었다
고샅길 넘치며 연추마을은
상연추, 중연추, 하연추 마을로 나뉘였다
사내들 ‘카레이스키 사드’라 불리운
‘조선인들의 정원’을 만들었다
버드나무 연두빛 잎새 연못에 드리웠다
허기는 잠시 머물다 가는 구름이었다
아낙들 진달래꽃잎 물고
사내들 해바라기 닮아갔다
얀치혜 강 사내들을 흘렀다
강은 풍요로웠으며 아낙들의 허리를 밤마다 감아 흘렀다
추수 마당은 웃음소리 넘쳤다
사내들 웃음 위에
사내들 웃음이 쌓였다
세월 흐르며 사내들의 웃음 뒤로
연추가 낡아갔다
사내들 희망도 낡아갔다
*
낡아가는 연추마을 더는 유민들의 누울 자리가 아니였다
먼저 온 사내들 뒤에 온 사내들 위해 마을 넘겼다
사내들은 다시 유민의 길 떠났다
유민의 길이 사내들의 길이었다
길 위에 길을 쌓으며 사내들은 걸었다
구릉이 겹쳐 지나가고 먹구름은 지평선을 숨겼다
칭얼대는 어린것들로 행군이 흐트러질 때가 된 것이다
사내들은 아무르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고단한 어깨를 풀었다
아무르만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아무르만은 사내들 탯줄이었다
용기가 아무르만에서 왔다
결기가 아무르만에서 왔다
생명의 약동이 아무르만에서 왔다
아무르만 감돌아 하루 뱃길이면 동해였다
동해가 그들의 태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사내들 정처없어 유민이었다
떠돌다 머문 곳이 삶의 터전이었다
정처없는 유랑의 길은
사내들의 숨소리였고 고함이었고 분노였고 결기였고 의지였다
사내들의 가슴 속 불덩이였다
유민들 고국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다 머문 곳이 노보고로드만이었다
조선 지극한 사내들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겠다했다
조선은 그리움이었다
함경산맥 낭림산맥 추가령산맥 그리는 사내들
산맥 멀지 않은 포세트 만에 멈춰 섰다
강물은 유민들 가슴을 흘러 눈물겨웠다
그 강이 수이픈 강이었다
가을 수이픈 강물은 은빛 비늘이었다
강이 야위고 강물 투명하게 머물며
자작나무숲 그늘 담을 때
사내들 수이픈 강을 건넜다
강물에 유민들 검은 얼굴 오래도록 남아 흔들렸다
조선에서 얀치혜로 석 달 걸려 넘어왔던 사람들
한 사내는 아낙이 없다
석 달 연추로 이동하며 굶주림 견디지 못하고
아낙을 팔았다
아낙은 울지 않았다
사내 아이 둘, 입술 파랗게 질렸다
며칠 째 굶은 창자 살 에이는 바람에 펄럭였다
아낙 스스로 아낙의 길 택했다
사내는 울며 말렸다
아낙이 흰 허벅지를 내보이며
내 살을 베어 먹이라
할 때 사내 머리를 떨구었다
아낙은 남의 눈이 무섭다며 한 밤중
러시아 남자를 따라나섰다
푸른 달빛이 아낙의 접힌 어깨 출렁이는 걸 보았다
그렇게 얻은 양식이 옥수수 한 말이었다
그것으로 한 달 버텼다
사내에게 연추는 지극한 슬픔과 상실의 땅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행을 결심한 사내는
남쪽으로 길게 뻗은 벌판 보고 통곡했다
목숨 걸고 찾으러 오겠다 한 약속 지킬 수 있을지
사내는 연추 떠나며 수없이 무너졌다
연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이주 길은
아내에 대한 속죄의 길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사내들에게 희망의 땅이었다
새 문물은 사내들을 꿈꾸게 했다
하늘이 새로웠다
양지와 그늘이 어디서 자라는지 알게 되었다
사내들에게 내일의 땅, 블라디보스토크는 양지였다
양지에서 내려다보는 아무르만은 따뜻했다
사내들에게 빅토르가 태어나고 예까쩨리나가 태어났다
수이픈 지나 하염없는 북행의
새로운 땅이 스챤이었다
유민들은 그곳을 수청이라 이름하였다
새로운 지명은 새로운 삶을 꿈꾸게 했다
새로운 삶이 낡아질 때까지 꿈은 유효했다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한 유민들은 얼굴 붉었다
*
사내들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사내들은 우수리스크에서
하바롭스크로
다시 캄차카로 올라갔다
그 미지의 땅에서
반년이 겨울인 계절을 이기고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태어난 아이들은 볼 붉어
자작나무숲 환했다
사내들은 가는 곳마다
새로운 지명을 만들고
지명에 올릴 예까쩨리나 혹은 빅토르를 낳았다
지명 새길 연자방아를 세우고
지명 데울 구들을 놓았다
유민들의 새 지명마다
붉은 안개 스며들었다
붉은 안개 사내들의 모든 마을*에 느릿느릿,
그러나 완강하게 스며들었다
* 연해주의 주요 한인 마을은 국경지역의 티진혜, 얀치혜, 파타쉬, 노보끼예프스크, 포시에트 등이며, 블라디보스톡 인근에 아지미, 시지미, 바바라쉬, 라즈돌로니예 등이고, 우수리스크 인근에 시넬리코보, 쁘칠로프카, 코르사코프카, 크로이노프카, 보라소프카, 미하일로프카, 우수리스크 등이며, 스챤 인근에 프로프스카, 니콜라에프카, 타우제미, 스챤 등 600 여 곳이나 되었다
2. 신한촌의 분노
아무르만 남쪽 둔턱마퇴에
아지랑이 꿈결 같았다
그 아래 저지대 웅덕마퇴에
자지러지는 웃음소리 넘으면
제국의 바다, 아무르 만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군항은 제국의 지느러미였다
군항은 베일에 싸여 야망 깊어지고 물빛은 검푸렀다
사내들은 군항 건설 현장에도 있었다
군항 공사판 땀으로 적시며 태평양 품고 싶었다
독크를 짓고 대함 포대를 구축했지만
설계도의 이면에서 근육을 부풀리는 일이었을 뿐
제국 함대 태평양 어디쯤서 험한 물살 가르고
남의 나라 국권을 찬탈할지 모를 일이었다
우박은 아무르만을 촘촘하게 뚫었다
아무르만이 허연 배를 뒤집으며 헐떡이고
우박 후에는 찬비였다
사내들 찬비 맞으며 철근 자르고,
휘고, 묶었다 철근은 순응하는 의지였거나
사각 콘크리트에 갇혀 오랜 시간 반성 없이 산화하는
불굴이었다 불굴은 허약한 근육이었다
사내들의 거처는 블라디보스토크 중심부의 밀리온까였다
밀리온까는 역설하는 백만장자여서
중국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그곳에 사내들이 몰려 살았다
지신허 거쳐 연추 거쳐 이곳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올라온
사내들은 아무르 만에
지친 시선 던져넣어 하루하루를 끝냈다
사내들은 시베리아철도 건설 현장에도 있었다
침목은 사내들 마음처럼 무거웠다
북국의 차운 달을 따스하게 녹이는 일은
모든 근육을 당기고 푸는 힘든 일이었다
달빛을 방으로 옮기며 터득한
사내들의 힘쓰는 법은 사내다움의 질펀함이었다
그 힘으로 레일은 날마다 몇 킬로미터씩 그림자를 늘렸다
장딴지의 힘이 작업화에 무쇠덩이로 내려박히는
힘은 작업화 바닥을 지나 드넓은 대지에 닿았다
대지는 조용히 사내들의 힘을 받아 단단해지고
자작나무숲 노랗게 물들고 나면 겨울은
까마귀 떼와 함께 오는 것이다
사내들, 헤진 잠방이 틈으로 벌건 무릎이 바보처럼 웃었다
가끔 조용한 주검이 중국인들 거주지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 사내들이 보드카와 함께
눈 더미에 쳐 박혀 동사하는 일이 있기는 했다
봄은 사내들 곡괭이 끝에서 왔다
대지가 곡괭이 끝으로 파고드는 사내들 힘을 받아
푸르르 떨기 시작하면 공사가 재개 되는 것이었다
백야가 시작되면 레일의 그림자가 매일 더 늘어났다
사내들은 새로 깐 레일에 한발 올리고
우수리스크나 하바롭스크
더 멀리 캄차카를 꿈꾸기도 했다
사내들은 농토 위에도 있었다
광활한 대지는 처녀 몸이다
함경산맥이나 낭림산맥
혹은 개마고원 어느 골짜기 벗어나도
이처럼 가슴 뻥 뚫리는 대지는 처음이었다
어떤 사내는 핫산 지나 울었고
어떤 사내는 티진혜 지나 울었고
어떤 사내는 블라디보스톡 지나 울었다
연해주 드넓은 대지는 사내들 울음이었다
땅은 소원이고 포한이었다
사내들 기다리고 있던 연해주는 씨앗 품어보지 않은 처녀지였다
목 놓아 울던 하루는 평생의 울음이었다
사내들 울음 위에 지평선 희붐하게 열리고
붉은 해 올랐다
강물도 품었던 자작나무숲 깨운다
사내들 가슴 온통 붉었다
씨앗 품어보지 못했던 처녀지들
수 천 년 어둠 가르는 날카로운 삽날 맞고 싶었다
가슴으로 토지를 안고
가슴으로 지경 넓히는 날
가슴으로 달빛 건너왔다
달빛 가슴 건너는 소리 나지막한 지붕이 들었다
지붕이 홀로 부끄러워 움츠렸다
아랫배 부풀어 오르는 달빛
사내들 탕탕한 웃음이었다
사내들은 고깃배 위에도 있었다
아낙들 설레임으로 밤을 지새웠다
사내들 가슴에서는 캄차카 바닷내음 물씬했다
바다 내음 속으로
아낙들 허리가 활처럼 휘어져들어왔다
허리는 격랑의 파고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어항은 어둠 깊었다
갑판에 선 사내들 대안의 어둠 속에 잠든
낮은 목조 지붕들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대안도 목조 지붕도 자작나무숲도 어둠의 순한 짐승이었다
그물 끌어올리는 사내들 등 뒤로 파도가 산처럼 솟았다
어선은 파도 속으로 밀려들어가고 밀려나왔다
파도는 사내들 가슴이었다
파도는 사내들 열린 묘지였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은 묘비명이었다
살아서 쓰는 묘비명은 비통도 분노도 아니었다
묘비명은 갑판에 펄떡이는 내일이었다
사내들 그물 끌어올렸다
그물은 욕망의 꽃이었다
그물은 바다를 포획하는 사내들의 힘이었다
수십 톤의 명태들이 갑판으로 쏟아져내렸다
은빛으로 펄떡이는 저 희망들 저 아름다운 묘비명들
*
사내들의 거처 밀리온카는
더럽고 냄새나는 이주 노동자들 주거지였다
1893년, 러시아 당국은 이들을 새로운 거주지로
이주시켰다 사내들에게 강제이주는 일상이었다
새 주거지는 나지막한 언덕,
아무르만 남쪽 둔턱마퇴와 웅덕마퇴에 이르는
블라디보스토크 항 왼쪽 경사 지역, 사내들의
뜨거운 숨소리 기다리고 있었다
밀리온까에서 중국인들과 부대끼던 시절은
추억이었다 서러운 추억이었다
이곳이 까레이스까야 슬라보드카,
한인 이주 역사가 시작되는 땅이었다
그 땅에 새로운 지명 ‘개척리’를 앉히며
사내들 야심찬 첫 날의 설레임 정강이뼈에 새겼다
개척리는 사내들의 새로운 날개였고 둥지였다
지명은 역사이고 사람이고 숨결이다
지명은 하늘이고 땅이고 새벽이다
지명은 보이는 것들의 내일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어제이다
개척리는 이 모든 것들이다
개척리에 민족학교가 문을 열었다
모국어를 가르쳤고 조국을 가르쳤다
아이들 눈동자가 세상 밖을 보기 시작했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무질서이며 질서였고
억압이며 해방이었다
고국은 풍전등화였다
사내들 가슴은 분노로 차올랐다
개척리의 하늘은 늘 우울했다
우울한 사내들이 모이는 아지트는 암울했다
1909년 3월 2일 연추 하리, 봄은 멀었다
시베리아의 칼바람이 뼈 속을 파고들었다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만년 빙하였다
아직 무명지 성한 사내는 왼손무명지를 도마 위에 올렸다
동지들도 왼손 무명지를 도마 위에 올렸다
사내는 오른 손에 잡은 단도 높이 올렸다
단도에서 깊고 푸른 섬광이 일었다
단도는 사내의 서슬이었다
사내의 무명지 첫째 마디가 잘려나갔다
무명지에서 선혈이 뿜어져 동지들이 얼굴로 튀었다
동지들의 단도 날이 바람을 갈랐다
촛불이 흔들렸다
순간 열한 개의 무명지 첫째 마디가 바닥으로 떨어져나가고
선혈이 흔들리는 어둠을 그었다
동지들은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혈서를 썼다
그것으로 단지동맹의 결연한 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늙은 일본제국을 암살하지 못하면
자결로 속죄 할 것을
맹약 하는 것으로 침묵의 의식은 끝났다
1909년 10월 19일
무명지 자른 사내*는 연추 하리의 집을 나섰다
젊은 아낙의 눈빛이 떨렸다
어린 것들도 애비의 출타가 불안했는지
아낙의 치마폭을 놓지 않았다
잠시 배 멀미가 왔다
블라디보스토크 항은 낯설지 않았다
마주 앉은 대동공보사의 사내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건넸다
무명지 자른 사내는 피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
경술년은 치욕이었다
근정전은 무기력했고 경복궁 용마루의 햇살은 쇠잔했다
조선왕조 27대 519년, 대한제국 18년의 역사는 서러워
1910년 8월 29일이었다
개척리에 뜨거운 기운이 감돌고
울분으로 가슴 치는 젊은 사내들 모여들고
백성들이 땅을 치며 울었다
* 안중근
중국에서 독립 운동 하던 투사들 모여들고
밤이면 웅덕마퇴 낮은 길목에서
사내들은 서로의 목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러시아 기병단 소속 기마병들
까레이스카야 울리챠 거리를 질풍처럼 내닫는다
개척리를 유린하는 기병들의 말발굽소리는
한인들 가슴에 거대한 얼음덩이로 굴러떨어졌다
기마병들 하늘 높이 채찍 휘두르면
말은 개척리를 차고 오른다
하루에도 몇 번 씩 기병들은
개척리 사내들 가슴을 휘저었다
기마병들 사라진 한인 거리에 검은 흙먼지 자욱했다
역병은 소문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중국인 거리에서 시작된 콜레라였다
콜레라는 개척리를 피해 가지 않았다
아이들이, 노인들이, 아녀자들이
마침내
사내들이 고열을 견디지 못했다
콜레라로 개척리를 묻겠다 했다
아니다, 말발굽으로 개척리를 묻겠다는 음모였다
1911년 5원 28일,
그건 속박이며 명령이었다
그건 청천병력이며 분노였다
그건 상실이며 원망이었다
그날까지 새로운 땅으로
이전을 마치라는 지상명령은 개척리를 숨죽이게 했다
강제 이주는 사내들에게 숙명이었다
개척리 18년은 사내들의 어제였고 오늘이었다
개척리는 더 이상 사내들의 영토가 아니었다
사내들은 개척리 떠나 새로운 삶의 터로 옮겨갔다
새로운 삶의 터는 사내들의 목숨으로 숨쉬기 시작할 것이다
목숨을 주지 않으면 대지는 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걸
사내들은 알고 있었다
사내들 떠나자 한인 거리,
까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는 기병단의 말발굽소리로 채워졌다
마방이 지어지고
기마병들의 막사가 지어지고
장교들의 숙소가 지어졌다
개척리를 뒤흔들던
말발굽소리
사내들 가슴에 역신의 저주로 남았다
말발굽소리 속으로 개척리는 사라졌다
*
새로이 시작된 사내들의 영토는
아무르만 동쪽 해안지대 라게르늬 곶
쿠즈네쵸프 곶 사이의 산비탈이었다
개척리에서 몇 마장 떨어진 메마른 땅
아무르만이 내려다보여 사내들에게 위안이었다
밀리온까에서 개척리로
개척리에서 거친 산비탈로
사내들의 전망은 어두워져갔다
블라디보스토크 짙은 안개 속에
사내들은 지친 꿈을 뉘였다
사내들은 목조 가옥을 세우고 유리창을 달았다
유리창은 마법이었다 창마다
다알리아와 패랭이꽃과 애기똥풀 꽃을
불러들여 아낙들에게 안겼다 안개와 해변과 너울을
불러들여 사내들에게 안겼다
창으로 아무르만의 낙조를 불렀다
창으로 자작나무숲을 불렀다
사내들은 유리창을 웃었다
유리창은 사내들에게 문명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바야 까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를
사내들은 ‘신한촌’이라 이름했다
새로운 지명은
새로운 사람을
새로운 내일을 거느렸다
새로운 지명이 거느리게 된
사내들 붉은 가슴 속으로
아무르만 출렁이고 출렁였다
아무르만 안개는 사내들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신한촌은 사내들에게 꿈이었으므로
신한촌은 아낙들에게 현실이었으므로
시가지를 지나 공동묘지를 지나
멀리 아무르만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은 가옥 천여 채
사내들은 사내들끼리
아낙들은 아낙들끼리
빅토르들은 빅토르들끼리
예카테리나들은 예카테리나들끼리
까레이스카야 거리를 모국어로 채웠다
모국어는 어미의 젖이었다
달차근하고 서럽고 뿌듯했다
자음과 모음 혀끝으로 굴리고 나면
모두가 혈육이었다
*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영사관 침침한 불빛
일본 제국주의 어둠의 회로를 만들어갈 때
신한촌 골목마다 핏발 선 사내들 눈빛 부딪고
어둠 속에서 낯선 사내들 어깨 부딪고
신한촌은 지루한 게릴라전에서 헤진
군화 벗어 젖은 흙 터는 휴식처였다
군화 속에서 바람에 쓸려가는 비명소리 들렸다
군화는 숨 쉬는 묘비명이었다
군화는 목숨의 전령이었다
군화는 감옥이었고 함성이었고 해방이었다
군화는 사내였다
어둠의 시간들이 굳어진 채
군화는 계곡에서 낡아갔다
군화는 총소리 들릴 때 마다 산기슭을 내려섰다
군화는 주인 잃은 군화의 어깨에 기댄다
군화는 필경 흙먼지로나 신한촌에 닿을 것이다
군화는 사내 속의 사내였고
군화는 어둠 속의 어둠이었고
군화는
마침내 고국 속의 고국이었다
*
연해주의 오월은 봄이었다
봄은 사내들에게 설레임이었다
신한촌을 세우며 항일결사*를 조직한 사내들
사내들에게 독립은 영혼이었다
신전을 불사르는 제의였다
독립은 전쟁이었다
전쟁은 신전을 불살라
새 신전을 세우는 참회의 기도였다
전쟁만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두 주먹 불끈 쥐는 사내들
눈빛 언제나 붉었다
젊은 사내들은 광복군으로 몰려들었다
‘조국 독립’은 아무르 강물소리처럼 가까이 들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제국을 제물로 삼았다
러시아는 전시체제를 선포했다
역사는 신한촌 사내들을 절망으로 밀어넣었다
*
* 1911년 5월에 항일결사 권업회가 결성됨
사내들에게 세상을 보는 창은 교육이었다
사내들은 한인학교*를 세웠다
한인학교는 연두 빛 초원이었다
어린 예카테리나와 어린 빅토르는 파릇파릇 자랐다
민족대학**은 젊은이들의 창공이었다
젊은이들 가슴은 젊어 푸르렀다
젊은이들 풋풋한 염원은 조국독립이었다
젊은이들은 사내들의 또 다른 사내들이었다
젊은이들에게
영토의 설레임을
영토의 뿌듯함을
영토의 미래됨을
심어주고 싶은 사내들,
옥저의 영토였고
고구려의 영토였고
발해의 영토, 솔빈부였던
지금은 남의 땅
연해주
수이픈강은 도도하고 유유했다
젊은 영토여!
그대들이 내 나라여서
그대들이 고구려이고
그대들이 발해이고
그대들이 고려이고
그대들이 조선이고
그대들이 대한제국이다
사내들은 언제나 눈빛이 붉었다
*
* 개척리의 계동학교와 1911년에 개교한 신한촌의 한민학교
**조선사범대학과 원동종합대학
젊은 영토들
수이픈강 기슭에서
유격전 익히고
산으로 들었다
끓어오르는 붉은 피, 광복군이었다
분노로 타오르는 눈빛, 독립투사였다
일장기 찢어 태우는 저항, 빨치산이었다
게릴라는 사내들의 조국 밖의 조국이었다
몸은 영토였으므로
몸은 탯줄이었으므로
기관총과 장총이 몸이었고
수류탄과 권총이 몸이었고
군용외투와 탄알이 몸이었다
몸을 받은 게릴라들의 몸은 뜨거웠다
몸이 영토이며 몸이 조국이어서
신한촌은 독립전쟁의 병참기지였다
독립 전투는 계속되었고
무기는 늘 부족했다
용기만으로
분노만으로
적개심만으로
전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밀사는 게리라 전 중에도
게리라 전이 끝난 후에도
수시로 야음을 타
신한촌을 다녀갔다
그때마다
군자금을 마련했다
군자금은 사내들의 노동으로
아낙들의 속주머니로 마련되었지만
태부족이었다
*
깊은 산속 양귀비는 현란한 꽃잎을
자작나무숲 그늘 향해 흔들고 있다
짧은 계절 더 요염한 양귀비에게서
생아편을 채취하는 무리들은
사내들에게 높은 값으로 넘겨주었다
사내들, 국경 넘어
중국인들에게 생아편을 파는 일은
목숨 거는 일이었지만
유혹은 아편처럼 강렬했다
사내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공동묘지를 올랐다
영아의 시신 묻고 돌아서며 혼절 거듭하던
이웃 아낙 얇은 어깨 흔들리던 묘지였다
영아의 영원한 거처를 마련해 준 것은 사내였다
세마포에 영아를 조심스럽게 감은 것도 사내였다
사내는 영아의 시신을 파냈다
달빛 아래 영아는 잠든 듯
고요로웠다
아가야 가자
영아의 시신 안고 공동묘지 내려온 사내는
영아의 얼어 있는 배를 가르고
배 속에 아편을 채웠다
아가야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사내는 헛소리처럼 미안하다를 외웠다
사내는 영아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낙에게 길을 재촉했다
아낙은 영아를 업었다
영아는 울지 않았다
영아는 아낙의 등에서 평화롭게 잠들었다
중국 국경수비대는 잠든 영아를 들여다보고는 돌아섰다
연해주에서 살 수 없어 국경을 넘는다는 사내의 말을 믿는 듯 했다
중국인은 어둠 속에서 사내를 맞았다
사내는 영아의 뱃속에서 아편을 꺼내 넘겼다
아낙이 혼절했다
사내는 아낙을 일으켜 영아를 업혔다
영아는 아낙의 등에서 다시 잠들었다
사내는 영아를 안고 공동묘지로 올랐다
영원한 요람에 영아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나지막한 봉분으로 영아를 재웠다
사내는 영아를 향해 큰 절 올렸다
신한촌에서 멀어지면 양귀비 재배로 살아가는 사내들 있었다
아편은 삶의 방편이었다
소작의 치욕보다 생아편이 나았다
몇 사내 깊은 숲 속에서 생아편 농사 끝날 때쯤
마적 떼들 숲 속 마을 쳐들어와
생아편 강탈해갔다
사내들 목숨으로 지키려한 생아편이었다
마적 떼는 생아편 사냥 끝나면 사람 사냥을 했다
아녀자 겁탈하고 말발굽으로 짓이겼다
겁에 질려 우는 어린 것 하늘 높이 던져놓고 권총으로 쏘았다
어린 것의 피가 비처럼 내려 놈들 얼굴을 적셨다
사내들은 사라지는 마적 떼 망연자실 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양귀비를 재배했다
그 일이 사는 일이어서
그 일이 살아 고국 돌아가는 일이어서
시내들은 양귀비 황홀한 꽃잎에 영혼을 넘겼다
신한촌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
러시아 국적의 한인들은 이미 지주였다
무상으로 대여 받은 넓은 땅은 권력이었다
무국적 한인들이 그 땅 빌려 농사를 지었다
땅 없는 서러움은 고국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국적은 폭력이었다
무국적 사내들에게 귀화를 강요했다
귀화한 거드름 보아줄 수 없었다
러시아인 지주보다 더 악랄한
귀화 한인 지주들이었다
소작료는 매년 올려 받았다
거드름은 소작료였다
소작료는 공민증 없는 사내들에게 수탈이었다
고국이 버린 머슴이었다
수탈은 더러운 폭력을 불렀다
곡식 창고는 사내들 발소리로 어수선했다
낫이 항변일 때도
주먹이 반항일 때도
살인이 정의일 때도
무국적 사내들에게 형벌은 가혹했다
러시아 국적 취득하는 사내들 많았다
사내가 러시안이 되자 기적처럼 땅이 왔다
사내는 땅을 바라보고 바라보았다
사내는 땅에 엎드려 울었다
울다 일어나 흙 한 줌 쥐었다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흙 맛이 달았다
땅에 처자식 찌든 얼굴 어렸다
광대뼈를 타고 주루룩 눈물 흘렀다
사내는 흐르는 눈물 주먹으로 훔치며 미친듯 웃었다
사내의 웃음소리 자작나무숲 흔들었다
땅은 사내들에게 소망이며 족쇠였다
러시아가 조국이 되었으므로
사내의 사내는 러시아를 위해 입대했다
귀화는 사내들의 뼈와 피를 바꾸어갔다
땅을 얻고 더 많은 것들을 잃었다
개 같은 일들이 신한촌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났다
아낙들은 단추공장에서 일했다
단추는 아낙들의 즐거운 상상이었다
단추는 1917년에도 아낙들의 손끝에서 반짝이며 굴러떨어졌다
그것이 10월 혁명이었다
볼세비키 무장봉기의 날 1917년 10월 24일에도 아낙들의 단추는 빛났다
그렇게 러시아에 새 시대가 왔다
모스코바에서 동쪽의 먼 땅 원동에도 볼세비키는
단추와 함께 왔다.
단추는 새로운 계급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서 단추는 힘이었다
단추는 권력이며 유형이었다
저, 저주로운 레닌의 금빛 단추여!
신한촌의 분노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