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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筆분과 방 작가와 작품(46) -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
이동민 추천 0 조회 76 22.02.19 06:22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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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2.02.19 06:23

    첫댓글 작가인 메리 셀리는 남편을 따라서 제네바에 머물 때 남편인 셀리, 시인 바이런과 함께 대담을 나누면서 얻은 자료로 구상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런 유의 괴이 소설도 있었다. 여기에 자극을 받았다고 하였다.
    프랑켄슈타인과 가장 유사한 소설은 고딕 양식의 소설인 드라큐라일 것이다. 이 작품은 공포 소설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유니버셜 사에서 영화로 만들면서 본래의 작품을 왜곡하고 과장하였다. 그래서 현대인의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는 대부분이 소설이 아닌 영화에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은 호르 장르 소설의 고전이 아니고 초현대적인 기술로 만들어 낸 테크노호러에 가깝게 변형이 되었다.

  • 작성자 22.02.19 10:17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간이 자연의 파괴를 저지할 수 있을 때까지 과학을 발전시켜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불가능한 욕망이 우리의 공포를 유발한다.
    죽은 자의 부뢀은 현대 호러물의 가장 중심이 되는 테마이다. 자연의 질서를 깨고, 노화와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한 듯이 생각하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은 아직까지 이런 꿈을 꿀 수 없었던 시대에 쓰여졌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미래를 예젼하고, 기대하는 일은 인간 욕망의 기본이다. 오늘에도 이 소설이 널리 읽혀지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서구 사회가 산업사회가 되면서 탄생한 현대의 악몽을 표현한 소설이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여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오래 동안 꿈이었다. 동시에 죄의식과 두려움이 뒤섞인 꿈이었다. 그 꿈과 두려움을 표현한 소설이다.
    셀리라는 여자 소설가가 남성의 영역으로 생각해온 과학 공상 소설을 썼다고 하여 여성주의자들이 높이 평가한다.

  • 작성자 22.02.19 15:47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셀리(1797-1851)> 괴기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영국의 여류 소설가이다. 아버지는 영국의 사상가인 골드윈이고, 남편은 시인 셀리이다. 인간과 같은 기능을 가진 인조 인간이 이 소설의 소재이다.
    어머니는 그녀를 낳은 지 한 달도 채되지 않아 죽었다. 그녀는 아버지에 의해 자랐고, 그녀가 자신의 것을 고수하도록 격려했다. 그녀가 네 살 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웃 여인과 결혼함으로 셀리가 어려움을 는다. 아버지는 진보좌파주의자 였다.

    1814 년 퍼시 비쉬 셸리과 사귀었다. 퍼시 셀리는 아버지의 추종자이며, 시인이고, 유부남이었다. 그녀와 메리 셀리는 남편인 퍼시 셀리와 프랑스로 떠나 유럽을 여행했다. 그 후 2 년 동안 그녀와 퍼시는 배척주의, 끊임없는 빚, 조산 된 딸의 죽음에 직면했습니다. 그들은 퍼시 셀리의 첫 번째 부인 인 Harriet의 자살 후 1816 년 말에 결혼했습니다.

    1816 년에 이 부부는 바이런 경이 있는 제네바로 여행가서 프랑켄슈타인 전설 이야기를 듣고 소설을 구상했다. 셸리는 1818 년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고 삶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1822 년, 그녀의 남편은 그의 범선이 폭풍으

  • 작성자 22.02.19 15:48

    1816 년에 이 부부는 바이런 경이 있는 제네바로 여행가서 프랑켄슈타인 전설 이야기를 듣고 소설을 구상했다. 셸리는 1818 년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고 삶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1822 년, 그녀의 남편은 그의 범선이 폭풍으로 침몰했을 때 익사했습니다. 셀리는 영국으로 돌아와 아들의 양육과 전문 작가로서의 경력에 ​​전념했습니다. 그녀의 삶의 마지막 10 년은 질병에 시달렸는데, 아마도 53 세에 그녀를 죽인 뇌종양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소설은 오늘의 과학소설(SF)의 선구이다. 메리는 이외에도 마지막 사람(1826)과 로노이(1835)를 발표하였다. 로노이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다.

  • 작성자 22.02.19 21:19

    책의 역사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의 책은 필사본이었고, 두르마리였다.(한 권 주문에 한 권 생산)
    종이가 싸지면서 글자와 간격, 행과 행사이가 넓어졌다. 그래도 책은 비쌌으므로 종교서적이 주류를 이루었다. 오락거리에 불과한 문학책에 귀중한 종이를 낭비할 수 없었다. 책이 널리 읽히기 위해서는 인쇄비가 싸야 하고, 책이 저렴해야 하며, 돈을 가진 인구가 많아여져 한다.
    1804년에 비평가 슐레겔이 쓴 글은 ‘인쇄기 발명과 도서산업의 팽창으로 완전히 무가치한 책들이 쏟아진다.’라고 했다.
    처음에는 소량의 책을 찍어 비싸게 팔았다.(대량으로 찍으면 재고가 남아서), 책의 단가가 비싸지고, 부유한 사람, 지식층이 읽는 어려운 책을 소량 찍었다.
    1700년 경에는 인쇄-출판 산업이 확장되어 단가가 낮아지고, 소설책의 출판도 많아졌다.

  • 작성자 22.02.19 23:41

    픽션 즉 소설은 문학의 저급한 장르로 다루었다. 소설가도 격이 낮은 학자로서 보통 사람이고,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는 시는 우월한 장르였고, 소설은 저급한 장르였다. 그러나 대중은 소설이 주는 보편적 즐거움에 열광했다.
    발자크도 저급한 장르의 작가로 취급받았다.(자기의 격을 높이려 무지 노력하면서, 그 노력이 저급한 행태였다고 또 비난받는다.) 그러나그의 책은 고급 작가가 쓴 책보다 헐씬 많이 팔렸다. 토마스 만이나 도스트엡스키도 좋은 대우를 받지 못ㅎㅆ다.
    저급한 소설을 읽는 독자는 노동자이지만,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고, 책을 읽은 여유도 없어서 1800년 경까지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소설가 자신도 격이 낮다고 생각하고 익명으로 소설을 쓴 사람이 많다.
    그러나 19세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소설이 봇물이 터지듯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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