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
(작품의 부제는 근대의 프로메테우스 이다.)
작가 ; 메리 울스턴크래포트 셀리 (1797-1851)
초판 발행 ; 1818년
줄거리는
제네바의 물리학자 프랑켄슈타인은 죽은 자를 뼈를 모아서 키가 244cm나 되는 인형을 만든다. 인형에 생명을 불어 넣어서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이 만들어졌다. 이 괴물은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에 대한 증오심으로 동생과 신부를 살해ㅣ하고 자기의 배우자를 구해내라고 강요한다. 프랑켄슈타인은 복수를 하기 위해 굄불을 쬐다가 죽는다는 줄거리이다.
좀 더 상세히 보면 프랑켄슈타인은 편지 형식으로 쓰여진 액자 이야기이다. 로버트 월튼 대위와 그의 여동생 마가렛 월튼 사빌 사이의 허구적인 서신을 기록하고 있다. 이야기는 18세기에 일어난다. 로버트 월튼은 실패한 작가로, 과학 지식을 넓히고자 북극 탐험에 나선다. 항해 중 승무원들은 거대한 인물이 운전하는 개 썰매를 발견한다. 몇 시간 후, 승무원들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거의 얼어붙고 수척한 남자를 구출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월튼의 선원들이 관찰한 거대한 남자를 추적해왔다.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노력에서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는 월튼에서 자신을 파괴한 것과 같은 강박관념을 보고 경고로 월튼에게 자신의 삶의 비참한 이야기를 되뇌어 본다. 재조명된 이야기는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의 틀 역할을 한다.
빅터는 그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부유한 제네반 집안에서 태어난 빅토르와 그의 동생 어니스트와 윌리엄은 알퐁스 프랑켄슈타인과 전 캐롤라인 보퍼트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빅터는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그는 연금술사 이론을 연구하는 데 집착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러한 이론이 상당히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빅토르가 5살이 되었을 때, 그의 부모는 수용된 이탈리아 귀족의 고아가 된 딸 엘리자베스 라벤자를 입양하고, 이후 빅토르는 결혼한다. 빅터의 부모는 나중에 윌리엄의 유모가 되는 또 다른 아이 저스틴 모리츠를 데려간다.
그가 독일 잉골슈타트 대학교로 떠나기 몇 주 전, 그의 어머니는 성홍열로 죽는다; 빅토르는 슬픔을 다루기 위한 실험에 몰두한다. 대학에서, 그는 화학과 다른 과학에 뛰어났고, 곧 무생물에 생명을 전할 수 있는 비밀 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휴머노이드 제작을 맡지만, 인간의 미세한 부분을 복제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빅터는 이 생명체를 약 2.4m의 높이에 비례하여 크게 만든다. 빅터가 아름다운 모습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과 동시에 크리쳐는 물기가 많은 하얀 눈과 그 밑의 근육과 혈관을 거의 가릴 수 없는 노란 피부를 가진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의 일에 거부감을 느낀 빅터는 달아난다. 다음날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소꿉친구 헨리 클레르발을 만나 괴물을 보게 될 헨리의 반응을 두려워하며 헨리를 아파트로 데려간다. 하지만, 빅터가 실험실로 돌아왔을 때, 그 생명체는 사라졌다.
빅터는 그 경험으로 병이 들지만 헨리의 간호로 건강을 되찾는다. 4개월 만에 회복된 그는 아버지로부터 형 윌리엄의 살해를 알리는 편지를 받는다. 제네바에 도착한 빅터는 범죄 현장 근처에 있는 생명체를 보고 자신의 창조물이 자신의 소행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윌리엄의 유모인 저스틴 모리츠는 윌리엄의 주머니에서 캐롤라인의 미니어처 초상화가 담긴 로켓이 발견돼 유죄 판결을 받는다. 빅터는 그가 저스틴의 이름을 밝히려고 하면 아무도 그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결국 그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비탄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빅터는 산으로 물러난다. 몽블랑산의 메르 드 글라스를 타고 올라가던 중 갑자기 빅터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간청하는 프랑켄슈타인이 그에게 다가온다...
첫댓글 작가인 메리 셀리는 남편을 따라서 제네바에 머물 때 남편인 셀리, 시인 바이런과 함께 대담을 나누면서 얻은 자료로 구상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런 유의 괴이 소설도 있었다. 여기에 자극을 받았다고 하였다.
프랑켄슈타인과 가장 유사한 소설은 고딕 양식의 소설인 드라큐라일 것이다. 이 작품은 공포 소설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유니버셜 사에서 영화로 만들면서 본래의 작품을 왜곡하고 과장하였다. 그래서 현대인의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는 대부분이 소설이 아닌 영화에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은 호르 장르 소설의 고전이 아니고 초현대적인 기술로 만들어 낸 테크노호러에 가깝게 변형이 되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간이 자연의 파괴를 저지할 수 있을 때까지 과학을 발전시켜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불가능한 욕망이 우리의 공포를 유발한다.
죽은 자의 부뢀은 현대 호러물의 가장 중심이 되는 테마이다. 자연의 질서를 깨고, 노화와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한 듯이 생각하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은 아직까지 이런 꿈을 꿀 수 없었던 시대에 쓰여졌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미래를 예젼하고, 기대하는 일은 인간 욕망의 기본이다. 오늘에도 이 소설이 널리 읽혀지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서구 사회가 산업사회가 되면서 탄생한 현대의 악몽을 표현한 소설이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여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오래 동안 꿈이었다. 동시에 죄의식과 두려움이 뒤섞인 꿈이었다. 그 꿈과 두려움을 표현한 소설이다.
셀리라는 여자 소설가가 남성의 영역으로 생각해온 과학 공상 소설을 썼다고 하여 여성주의자들이 높이 평가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셀리(1797-1851)> 괴기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영국의 여류 소설가이다. 아버지는 영국의 사상가인 골드윈이고, 남편은 시인 셀리이다. 인간과 같은 기능을 가진 인조 인간이 이 소설의 소재이다.
어머니는 그녀를 낳은 지 한 달도 채되지 않아 죽었다. 그녀는 아버지에 의해 자랐고, 그녀가 자신의 것을 고수하도록 격려했다. 그녀가 네 살 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웃 여인과 결혼함으로 셀리가 어려움을 는다. 아버지는 진보좌파주의자 였다.
1814 년 퍼시 비쉬 셸리과 사귀었다. 퍼시 셀리는 아버지의 추종자이며, 시인이고, 유부남이었다. 그녀와 메리 셀리는 남편인 퍼시 셀리와 프랑스로 떠나 유럽을 여행했다. 그 후 2 년 동안 그녀와 퍼시는 배척주의, 끊임없는 빚, 조산 된 딸의 죽음에 직면했습니다. 그들은 퍼시 셀리의 첫 번째 부인 인 Harriet의 자살 후 1816 년 말에 결혼했습니다.
1816 년에 이 부부는 바이런 경이 있는 제네바로 여행가서 프랑켄슈타인 전설 이야기를 듣고 소설을 구상했다. 셸리는 1818 년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고 삶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1822 년, 그녀의 남편은 그의 범선이 폭풍으
1816 년에 이 부부는 바이런 경이 있는 제네바로 여행가서 프랑켄슈타인 전설 이야기를 듣고 소설을 구상했다. 셸리는 1818 년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고 삶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1822 년, 그녀의 남편은 그의 범선이 폭풍으로 침몰했을 때 익사했습니다. 셀리는 영국으로 돌아와 아들의 양육과 전문 작가로서의 경력에 전념했습니다. 그녀의 삶의 마지막 10 년은 질병에 시달렸는데, 아마도 53 세에 그녀를 죽인 뇌종양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소설은 오늘의 과학소설(SF)의 선구이다. 메리는 이외에도 마지막 사람(1826)과 로노이(1835)를 발표하였다. 로노이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다.
책의 역사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의 책은 필사본이었고, 두르마리였다.(한 권 주문에 한 권 생산)
종이가 싸지면서 글자와 간격, 행과 행사이가 넓어졌다. 그래도 책은 비쌌으므로 종교서적이 주류를 이루었다. 오락거리에 불과한 문학책에 귀중한 종이를 낭비할 수 없었다. 책이 널리 읽히기 위해서는 인쇄비가 싸야 하고, 책이 저렴해야 하며, 돈을 가진 인구가 많아여져 한다.
1804년에 비평가 슐레겔이 쓴 글은 ‘인쇄기 발명과 도서산업의 팽창으로 완전히 무가치한 책들이 쏟아진다.’라고 했다.
처음에는 소량의 책을 찍어 비싸게 팔았다.(대량으로 찍으면 재고가 남아서), 책의 단가가 비싸지고, 부유한 사람, 지식층이 읽는 어려운 책을 소량 찍었다.
1700년 경에는 인쇄-출판 산업이 확장되어 단가가 낮아지고, 소설책의 출판도 많아졌다.
픽션 즉 소설은 문학의 저급한 장르로 다루었다. 소설가도 격이 낮은 학자로서 보통 사람이고,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는 시는 우월한 장르였고, 소설은 저급한 장르였다. 그러나 대중은 소설이 주는 보편적 즐거움에 열광했다.
발자크도 저급한 장르의 작가로 취급받았다.(자기의 격을 높이려 무지 노력하면서, 그 노력이 저급한 행태였다고 또 비난받는다.) 그러나그의 책은 고급 작가가 쓴 책보다 헐씬 많이 팔렸다. 토마스 만이나 도스트엡스키도 좋은 대우를 받지 못ㅎㅆ다.
저급한 소설을 읽는 독자는 노동자이지만,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고, 책을 읽은 여유도 없어서 1800년 경까지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소설가 자신도 격이 낮다고 생각하고 익명으로 소설을 쓴 사람이 많다.
그러나 19세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소설이 봇물이 터지듯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