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개념이나 사물을 처음 설명할 때 가장 직관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비유(比喩)이며, 이것은 문학의 한 분야인 과학소설(Science Fiction; SF)을 논할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모든 오해와 몰이해를 일거에 불식할 수 있는 완벽한 비유 따위는 이 지상 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SF의 핵(core)에 해당하는 개념을 누구든지 알기 쉬운 형태로 드러내보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소망은 평론가들의 오랜 숙원이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아래에서 보듯 SF의 보편적인 정의(定義)를 확립하려는 노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과학소설이란 쥘 베른, H. G. 웰즈, 에드거 앨런 포 타입의 이야기이며....과학적 사실과 예언적 비전이 융합된 매력적인 로망스이다.
--휴고 건즈백 <어메이징 스토리즈>, 1926년
SF는 과학의 방법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문학이며, 과학의 방법론에 의해 구축된 이론과 마찬가지로, 기계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간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를 외삽법(外揷法; extrapolation)을 통해 ‘예상’해야 한다.
--존 캠벨 Jr. <어스타운딩 스토리즈>, 1940년대
과학적 소설이란 가상적인 발명 또는 자연과학적 발견에서 비롯된 모험과 체험을 묘사한 이야기이며....이 발견은 과학적인 것이어야 한다----작가는 적어도 그 발견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J. O. 베일리 <공간과 시간의 순례자>, 1947년
SF는 사변소설(思辨小說; Speculative Fiction)이며, 관찰, 가정, 실험 등의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현실의 가상적 국면을 고찰하는 문학 양식이다.
--주디스 메릴, <연간 SF 걸작선>, 1950년대
<어스타운딩> 따위의 잡지가 과학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네이처 Nature>, 혹은 아무 과학 학회지라도 좋으니 한 번 집어들고 훑어보라. [SF와] 과학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J. G. 발라드, 1960년대
사이언스 픽션이란 인간의 정의 및 우주에서의 그 위상--현대의 진보한, 그러나 혼란된 지식 상태(과학)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정의--을 추구하는 것이며, 고딕, 혹은 포스트 고딕 소설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색을 찾을 수 있다.
--브라이언 올디스, <10억년의 잔치>, 1973년
사이버펑크 SF에는 일정한 중심 주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육체의 침략이라는 주제가. 인공 사지(四肢), 육체에 이식된 회로, 성형수술, 유전자 개조, 그리고 더욱 강력한 테마로 정신의 침략을 들 수 있다. 두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인공지능, 신경화학----이것들은 인간성을, 그리고 자기(self)의 성질을 근본적으로 재(再)정의하는 기술이다.
--브루스 스털링, 1986년
SF가 자연과학의 전통적인 방법론에 영향을 받은 비(非) 리얼리즘 문학 내지는 환상문학--굳이 고딕의 전통을 이어받지는 않았더라도--의 한 형태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 정의를 둘러싼 논쟁이 지금도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1세기를 넘는 역사를 가진 이 역동적인 장르를 마치 필름을 인화하듯 기술(記述)하려고 시도할 때 맞부닥치게 되는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매우 부적절한 ‘왜색’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공상과학> 내지는 <공상과학소설>이라는 표현이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여전히 국내에서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과도 맥이 닿아 있다고나 할까. 그 어원이 무엇이든 간에, "SF = (터무니없는) 공상 + 과학"이라는 알기쉬운(?) 편견을 우리 독자들의 뇌리에서 일소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것을 대체할만한 이미지를 제시하기 전에는.
2. SF에 대한 인식
그 이미지의 강고함과는 별도로, 역시 가장 큰 오해는 SF가 특유의 방법론을 고수하는 ‘얼어붙은’ 장르라는 관념에서 비롯된다. 공시적, 통시적 관점 양쪽을 모두 채택하는 것은 언어학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적 관찰의 기초을 이루는 분석틀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SF의 정의가 기술적(記述的)인 현재 진형형에 머무는 경우가 많은 것은 과학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과 SF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SF와 과학이 완전히 별도라는 J. G. 발라드의 도발적인 화두는 매너리즘에 빠져 퍼즐 미스터리를 방불케하는 강고한 장르의 틀 안에 갖혀 옴쭉달싹도 못 하던 1950년대의 영미(英美) SF에 대한 철학적인 안티테제이지, 과학적 방법론 자체에 대한 부정은 아니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해외 SF의 공급자가 직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1) 아동용 <공상과학>의 이미지에 고착되어 있는 문화 사회적인 편견과, (2) SF의 통시성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3) 독자들을 매료할 수 있는 SF 번역서의 절대량 부족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출판 유통 구조나 번역문학의 후진성은 우리나라에서는 보편적인 조건에 해당되므로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SF 팬덤 내부에서 농담삼아 "SF 기획자의 삼중고(三重苦)"로 불리곤 하는 이 문제들은 그중 어느 하나만을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궁국적 목표의 하나인 창작 SF의 활성화와 마찬가지로 포괄적인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는 이상은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것들이다. 결국 이런 문제점들의 중심에는 제대로 번역된 SF의 캐넌(canon; 正典)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자리잡고 있다. 현실적으로 이들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총서(叢書)라는 결론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와 있었다.
그리고 일단 총서의 틀이 갖춰진 이후에는 앞서 언급한 이미지 전략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전략이라고 하면 홍보나 광고를 머리에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좀더 근원적인 존재 원칙을 바로 세운다는 편이 더 정확하다. 총서 출범의 첫 번째 목적은 물론 SF 독서시장의 활성화이며, 나아가서는 국내 작가와 비평가들을 위한 1차적 자료의 풀(pool)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칭[SF]과, 그것이 내포한 메타 원리[외삽법]와, 형태[픽션]가 분리된 채로 따로따로 놀고 있는 현 상황을 탈피, 과학-상상-문학 사이의 철학적인 연결 고리이자 사고(思考) 메커니즘으로서의 SF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혹자는 이런 주장이 시대착오적이며, 뉴웨이브 이전의 SF 황금시대, 즉 1950년대에 <어스타운딩>의 명편집장이었던 존 캠벨 Jr.가 제시했던 외삽 지상주의(至上主義)의 변주일 뿐이라고 폄할지도 모르지만, 시대착오적인 것은 우리나라의 출판 상황이지 원칙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있다고 한다면 추리소설을 주축으로 한 최근의 장르소설 출간 붐이 SF 출간의 도약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종래의 무협지 시장과 10대의 미디어 취향이 어우러져 자연발생한 한국형(韓國型) 창작 팬터지 시장의 경우에는, 장르소설 시장의 다양화 및 고급화라는 측면에서는 공보다는 과가 훨씬 더 많았다.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로버트 A. 하인라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SF가 도피문학으로 오해받는 이유는 평론가들이 그것을 종종 판타지와 혼동하기 때문이다. 이 의견을 우리 상황에 맞게 변형시키자면, SF가 도피적인 일회용 읽을거리로 오해받는 이유는 독자들이 그것을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공상과학소설’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SF의 공급자는 차별성의 강화를--이것은 상업적인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평론적인 입장에서도 지극히 정당한 행위이다--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출판 관계자들이나 일반 독자들이 실제 독서 여부와는 상관없이 ‘과학소설’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머리 속에 있는 SF의 이미지와 실제 독서 패턴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3. 문화 컨텐츠로서의 SF총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넓은 맥락에서 보면 SF는 리얼리즘 문학에 대비되는 포괄적인 환상문학의 한 축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토도로프류(流)의 수입된 정의(定義)는 있되 독자층의 뚜렷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이렇다할 의미가 없는 피상적인 개념의 유희에 가깝다. 이러한 개념상의 혼란이 실해(實害)를 끼친 비근한 예로 2000년대의 한국영화를 들 수 있다. 국민의 정부 시절의 한국 영화계에서 "SF 영화" 내지 "SF 애니메이션"은 굳이 힘들게 물건을 만들어 해외에 내다팔지 않더라도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자본 투자만으로 엄청난 부(富)를 창출해낼 수 있는 이른바 ‘문화 컨텐츠’의 첨병으로 떠받들어졌고, 그 결과 2001년에서 2002년에 걸쳐 이 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SF 장르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이해조차도 결여한 크리에이터들은 결국 헐리우드나 홍콩 영화의 모방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알멩이를 결여한, ‘무늬만 SF’인 영화들이 범람하게 된 작금의 상황은 운이 나빴다기 보다는 필연적인 결과이며, 이런 영화들은 결국 스타파워에 의존한 극소수의 성공작을 제외하면 한국영화의 ‘시한폭탄’이라고 불릴 정도로 골치아픈 존재가 되고 말았다. SF와 SFX(Special Effects; 특수효과)조차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면서도 해외에 ‘SF 블록버스터’ 영화를 수출하겠다는 국내 영화감독들의 존재를 웃어넘길 수는 있어도, 그 실패가 가져온 사회경제적인 파급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선정적인 구호만을 앞세운 천박한 자본 논리가 그에 못지 않게 천박한 영화계 특유의 레밍주의와 야합함으로써, 한국의 SF시계를 적어도 10년 뒤로 되돌려놓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1977년에 조지 루카스의 영화 <스타워즈>가 전세계를 석권했을 때 미국의 많은 SF팬들이 “[문학으로서의] SF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위치를 이 영화가 하루아침에 30년 전으로 되돌려놓았다”라고 비분강개했다는 에피소드에서 연대감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국내의 SF 인식과 SF의 본가(本家) 사이의 그것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결국 이것은 ‘국내의 크리에이터들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1차 자료, 즉 한국어로 번역되는 본격 SF소설이 (국내 출판계의 규모에 비하면) 전무하다시피 한 현실의 한 단면이다. 선동적으로 말하자면, 영미권을 위시한 식민 종주국이 언어를 통해 과거의 식민지들을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SF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 미국, 그리고 일본은 문화적 소프트웨어의 성격을 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통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지금 우리는 그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선진국들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서 문화입국을 하자는 관계자들의 소박한(?) 소망에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넌센스이지만, 문제는 그들이 자료로 삼는 것들이 1차 자료에 해당하는 SF문학이 아닌, 이미 문화적으로 저작(詛嚼)되고 소화된 다음 멀티미디어의 당의(糖衣)를 입혀 수출된 해외의 2차 자료라는 데 있다. 이것을 인간의 섭생에 비유하자면 음식물을 섭취하는 대신 외국에서 수입한 영양 주사와 비타민 정제만으로 살아가려는 꼴이다.
모든 문제는 발달단계로 귀결된다는 사회과학의 금언이 시사하듯, 이것은 우리가 문화경제적인 변방에서 주요 소비자로, 나아가서는 생산의 주체로 나가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산통(産痛)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대중문화 발달사가 “외국에서는 100년 걸린 일을 30년만에 이루어냈다”는 급격한 경제발전과 수많은 상사점(相似點)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그 과정에서 빚어진 여러 부작용을 치유하려면 결국 지금이라도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는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해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반복설은 생물학에서는 이미 많은 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오류투성이의 패러다임이지만, 적어도 우리 독자들에게 효율적으로 SF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계통발생의 패턴을--어느 정도의 단순화를 감수하더라도--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굳이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다양한 하위 장르에서 선별한 다양한 시대의 SF들을 총서의 형태로 꾸준하게 출간해서 기초를 쌓는다면 누적적(累積的) 독서에 의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리라는 점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4. 미지의 대륙----SF소설의 세계로
행복한책읽기 SF총서는 각 작품을 시대별로 고전SF(1890년대 - 1930년대), 신(新)고전SF(1940년대 - 1970년대), 그리고 현대SF(1980년대 - 현재)로 크게 나누고, 각 시대에 포함되는 대표적인 걸작, 명작들을 체계적이고도 균형잡힌 형태로 소개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휴고 건즈백이 세계 최초의 본격 SF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즈> 1호를 발간한 1926년 4월 이전의 고전들을 프로토[原] SF라고 지칭한다. 프로토 SF란 글자 그대로 SF의 프로토타입을 의미하는 비평적 용어이며, 후대(後代)에 나온 여러 SF소설의 원형(元型)을 제공하고, 그 내용을 규정했던 작품들을 의미한다. 흔히 "SF의 아버지"로 불리곤 하는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 영국의 H. G. 웰즈와 아서 코난 도일, 프랑스의 쥘 베른 등은 서로 미묘하게 다른 문학적 성향과 방법론을 구사한 프로토 SF를 발표함으로써 근대 SF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직 SF와 팬터지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의 활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들 프로토 SF의 영향은 영속적이며, 세련되고 극도로 세분화된 21세기의 현대 작품들에서조차 이들 19세기의 작가들의 영향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SF사(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SF의 이미지를 확립해야 한다는 발상은 어떤 면에서는 비장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지만, SF의 모드/코드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독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팬터지가 인간의 종족적 무의식의 문학적 총합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를 역사적 자각으로까지 발전시킨 문학 장르라고 한다면, SF가 기본적으로 공간적 확산이라는 벡터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존 클루트를 위시한 여러 평론가들에 의해 지적된 바가 있다. 그리고 공간적 확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비일상적(非日常的)인 ‘모험'에의 충동이며, 이러한 모험의 자각은 정주지를 마련한 인류가 생활공간(Lebensraum)의 확충을 꾀하면서 자연발생한 도시-황야의 경계선을 의식적으로 넘을 때 발생한다. 이것이 윈시적인 수렵 채취 행위의 연장이든, 개척 정신을 앞세운 제국주의적인 착취든, 우주 개발이든, 혹은 지적인 탐구이든 간에, 미지(未知)의 영역의 ’발견‘은 필요조건으로서 모험 행위 자체에 선행한다. 이런 연유로, 발견과 모험, 그리고 제국주의적 착취를 한 데 통합한 <탐험> 행위는 19세기 유럽인들의 낭만주의적 문학 사조와 결합되면서 비경(秘境) 탐험소설이라는 대중문학의 한 장르를 탄생시켰다. 환상과 사실이 뒤섞인 일종의 프로토 모험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분야의 가장 위대한 선구자로는 영화나 아동용 축약판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솔로몬 왕의 동굴>의 작가 H. R. 해거드(1856-1925)가 있다. 프로토 SF는 프로토 모험소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아서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는 이런 경향을 SF의 하위 장르로까지 승화시킨 불후의 명작이자, 카타르시스를 동반한 현대적인 모험소설의 효시이기도 하다.
5. 어느 빅토리언의 초상 - 아서 코난 도일
아서 코난 도일은 1859년 5월 22일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미들 네임인 ‘코난’은 아버지 찰스 도일의 어머니 쪽 성을 따온 것이지만, 켈트 전설의 유명한 영웅 이름이기도 했다. 도일 일족은 본래 정복자 노르만인과 켈트 구 지배층의 피를 이어받은 유서깊은 집안이었고, 대다수의 아일랜드인들처럼 경건한 카톨릭이었던 탓에 1171년 이래 아일랜드를 줄곧 철권 통치했던 영국의 끊임없는 박해를 받으며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 도일 가문의 장자였던 존 도일은 초상화 화가로 대성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수도 더블린을 떠나 런던으로 이주한다. 처음에는 무일푼이나 다름없었지만, 신문에 게재한 정치 풍자 만화의 성공으로 부와 명예를 얻는다. (중상모략이 횡행하던 당시의 살벌한 정치 풍자화에 비해 외부인인 도일의 그것은 상대적으로 젊잖은 동시에 예리했고, 이것이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던 것이다.) 존 도일과 아내인 마리안나는 슬하에 5남2녀를 두었으며, 사내아이들은 모두 상류계급의 교육을 받고 각자가 학자, 미술 감정가, 삽화가로서 큰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막내인 찰스 도일만은 예외였다. 아버지의 예술적인 재능을 이어받아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몽상가의 기질이 농후한 찰스에게는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가던 영국인들의 이상이라고 할만한 ‘적극적인 자기계발‘의 소질이 전혀 없었다. 이를 보다못한 아버지는 17세의 찰스를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딘버러로 보내 건설국의 기사로 취직하게 한다. 1849년의 일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열여덟 살의 나이로 즉위한 후 12년째를 맞은 있는 대영제국은 그 영광의 정점에 서 있었다. 유럽 최고의 공업 생산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전세계로 뻗어나간 영국 자본은 전세계의 자원을 독점하다시피 했고, 현지인의 저항에 직면하는 경우에는 예외없이 전쟁을 일으켰으며, 큰 인적 희생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확실하게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자국의 이권을 보호했다. 19세기의 주된 전쟁인 아편전쟁, 크리미아 전쟁, 보어 전쟁 등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일어났다. 역사상의 여느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피압박민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대영제국의 신민(臣民)들, 특히 부(富)를 독점하다시피 한 상류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빅토리아 시대는 황금시대나 다름없었다. 영국 특유의 계급 의식과 가혹한 형벌 제도 탓에 정치사회적인 불만은 유럽 대륙과는 달리 급진적인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하층 계급조차도 100년 전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생활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족’한다는 식이었다. 특히 산업혁명에 의해 부를 축적한 부르조아 계급은 앞서 언급한 자기계발과 자조(自助)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었다.
실의에 빠져 에딘버러로 간 찰스 도일을 맞이한 것은 그가 자라고 호흡했던 런던의 상류층 지역과는 딴판인 스코틀랜드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환경이었다. 찰스는 토목국의 기사로 근무하며 화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해 보려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수입을 얻어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환경에 휩쓸려 완만한 알콜 중독의 길을 걷게 된다. 생전에 그는 하숙집 여주인의 딸이었던 메리 폴리와 결혼, 장남 아서를 포함한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다. 빈한한 환경에서도 아서를 실질적으로 교육시키고, 세계적인 작가로까지 성장시켜 준 사람은 바로 이 어머니였다. 코난 도일이 언제나 ‘더 맘 ‘the Ma'am'이라는 독특한 호칭으로 부르곤 했던 이 총명한 여성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 상류계급의 혈통을 이어받은 카톨릭 교도였고, 영국을 정복했던 플랜태저넷 왕가의 먼 후손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드믈게 프랑스에서 문장학(紋章學)을 공부하고 돌아왔던 그녀는 어린 아서에게 그의 가계(家系)와 중세의 기사 로망스 등을 되풀이해서 이야기해 주고, 독서를 적극 장려함으로써 훗날 작가가 된 그의 성장 과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장남인 아서에게 빈한한 집안을 일으켜세울 것을 기대한 그녀는 교육면에서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덕택에 어린 아서는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인근의 예수회 계열 기숙학교에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고, 10대가 된 후에는 스토니허스트에서 장래의 선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고전 및 수학 교육을 받는다. 어린 도일에게 이 시기는 무미건조하고 고통에 찬 시기였지만, 철저한 어학 교육 탓에 14세 때는 이미 원어인 프랑스어로 쥘 베른을 읽고 있었다. 애독서는 월터 스코트의 <아이반호>였고, 애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에서도 큰 감명을 받았다. 장래에 작가가 되고 싶다는 구체적인 희망이 싹튼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학교에서는 싸우기를 좋아하고 체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반항아였지만, 열여섯 살에 대학 검정에--주위 사람들 일부의 의견에 따르면 “기적적으로”--합격하고, 1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예수교 자매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876년 명문 에딘버러 대학의 의학부에 입학한다. 복싱을 위시해서 격렬한 운동을 즐겼던 탓에 당시에는 이미 육척 장신의 당당한 체구를 가진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와 많은 형제들 탓에 빈한한 가정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젊은 아서는 고학생의 길을 걸어야 했고, 1880년에는 작은 포경선의 의사 자격으로 7개월 간의 긴 항해에 나선다. 이때 아서가 경험했던 북극해의 가혹하면서도 아름다운 자연과, 이를 상대로 생과 사를 건 투쟁을 벌이는 사내들의 모습은 소년 시절 어머니에게 들었던 기사도 이야기 못지 않게 그의 정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학 시절의 성적은 평범했지만, 당시 가장 중요한 응용과학 중 하나였던 의학을 공부함으로써 심령주의에 심취했던 말년까지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과학적 방법론을 철저히 익혔다. 가문의 정신적 뼈대였다고 할 수 있었던 카톨리시즘에서는 이미 마음이 떠난 지 오래였다. 1881년에 의사 자격을 취득하고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한 아서 코난 도일은 고생 끝에 항구도시인 포츠머스 인근의 사우스시에서 개업하고, 1885년에는 고객의 딸이었던 루이즈 호킨스와 결혼함으로써 삭막했던 독신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의원에 거의 손님이 들지 않았던 탓에 그는 부업을 한다는 생각으로 문필업에 다시 손을 댔고 (학창 시절 그는 이미 라는 단편을 발표했고, 1884년에는 "거들스톤사 The Firm of Girdlestone"라는 제목의 장편을 탈고했지만, 출판해줄 곳을 찾지 못했다) 1년만인 1887년에 셜록 홈즈 시리즈의 기념할만한 제1작 <주홍색 연구 A Study in Scarlet>을 완성한다. 조금 진부한 표현이 되겠지만, 추리작가 도일의 그 이후의 행보는 역사의 일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작가의 다양한 지적 편력이랄까, 정신적인 여로(旅路)에 관해서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부분이 많다.
애드거 앨런 포의 명탐정 뒤팽에 착안해서 창조한 명탐점 셜록 홈즈가 자신에게 가져다준 세계적인 명성에 대해 그가 시종일관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그의 대표적인 역사소설들, 이를테면 <마이카 클라크 Micah Clarke>(1889)라든지 "백의 결사 The White Company"(1891) 등의 걸작을 읽어보면 역사 문학가로서 평가받기를 원했던 그가 왜 소설상의 인물인 셜록 홈즈를 죽이려고 했고, 실제로 죽이기까지 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기사도, 특히 빅토리아 시대풍의 애국주의와 결합한 기사도 정신은 말년에 더 두드러진 심령주의에의 경도(傾倒)와 더불어 코난 도일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지주였으며, 대영제국 쇠락의 첫 번째 징후였던 1899년의 보어 전쟁,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그의 정치 성향을 규정했다. 현대적이면서도 낭만적인 기사도 이야기를 써서 독자들을 열광시킨다는 아이디어는, 현실과 이상과 취미를 일치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더할나위없는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시대적 정체성을 추구했던 ‘의인(義人)’ 도일을 현대의 윤리적인 잣대만으로 정의하는 데는 무리가 있지만, 100여년에 걸친 <평화의 시대>가 끝나고 전란의 시대인 20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가 취한 정치적인 행보는 보어 전쟁 참전을 포함해서 현대인의 눈에는 시대착오적으로 비치는 것들도 적지 않다. 여장부였던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생득적으로 명쾌한 것을 선호하는 그의 성격이, 그로 하여금 일종의 <과학주의>에 심취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대작가답게 도일은 왕성한 지적 탐구심과 그에 걸맞는 뛰어난 지력(知力)의 소유자였으며,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볼 수 있듯이 일생의 어느 시기에서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인물이나 사건들을 기록하고, 나중에 픽션의 배경이나 플롯으로 통합하는 일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추리 작가로서는 당연한 마음가짐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1909년에 영국 남부의 크로우보로로 이주한 뒤에는 인근의 채석장에 있던 선사 생물의 발자국 화석을 발견했을 때는, 너무나도 큰 흥미를 느낀 나머지 대영 박물관에 조사원의 파견을 요청했으며 (이것은 이구아노돈의 그것으로 판명된다), 같은 시기 지중해를 항해하던 중 고생대의 어룡(Icthyosaur)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저명한 동물학자이자 대영 박물관의 관장이었던 에드윈 레이 랭캐스터(1847-1929)와 교유를 시작했으며, 남미의 우림지대 연구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한 박물학자 앨프레드 러셀 월러스의 과학 저작에 감명을 받고, 저명한 남미 탐험가인 퍼시 포셋 대령을 만났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훗날 포셋은 브라질의 광대한 마투 그로수 지역에서 고대 도시의 유적을 찾다가 실종된다.) 기사도적인 정의의 구현이라는 입장에 서서, 원죄(怨罪) 사건의 해결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던 도일은 리우 데 자네이루의 영국 영사였던 서(Sir) 로저 케이스먼트와 기자인 에드먼드 모렐에게서 고무 채취를 위한 남미의 노예제도의 종언에 관해 들었다. 베네수엘라, 가이아나, 브라질의 3국이 국경을 맞대는 오지에 위치한 로라이마 산(Mt. Roraima)에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등반한 서 에버라드 임 썬과도 지기였다. 로라이마산은 26평방 마일에 달하는 거대하고 편평한 대지(臺地) 모양의 정상을 가진 탁상 산지(卓上山地; table mountain)이며, 가이아나 고원의 최고봉(2772미터)이기도 하다. 많은 소년들을 고생물 학자의 길로 나아가게 만들고, 수많은 모방자들을 만들어냈던 장편 SF <잃어버린 세계>는 이런 정보들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6. <잃어버린 세계>
아마존강 유역에서 열병에 걸려 사망한 미국인 화가가 남긴 스케치북에는 존재할 리가 없는 기괴한 선사 시대 동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20세기에도 공룡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연인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영웅이 되고 싶어하던 런던의 젊은 신문기자 에드워드 멀론은 이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목적으로 동물학자 챌린저 교수, 비교해부학자 서멀리 교수, 저명한 탐험가 록스턴 경과 함께 남미로 떠난다. 브라질에 도착한 후 현지인들을 일꾼으로 고용한 일행은 온갖 장애를 넘어 아마존 강을 거슬러올라가고, 결국 주위 환경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대지(臺地) 위로 올라가는 데 성공하지만, 어떤 사고로 인해 바깥 세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을 차단당한다. 네 사람은 이에 굴하지 않고 쥐라기의 사나운 육식공룡들이 활보하고, 잔인한 원인(猿人)들이 지배하는 이 <잃어버린 세계>의 탐험에 나선다.
장편 <잃어버린 세계>는 명탐정 셜록 홈즈 시리즈로 대표되는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역사, 모험, 공포, SF 등 넓은 영역에 걸쳐 뛰어난 작가적 수완을 발휘했던 아서 코난 도일의 대표적인 SF소설로 간주되는 동시에, 공룡을 다룬 소설의 원조(元祖)이다. 이 소설은 몇 번이나 영화화되었고, <킹콩>과 마이클 크라이튼의 <쥐라기 공원> 및 <잃어버린 세계>(본서와 제목이 같다)를 위시한 수많은 유사 작품들의 모태(母胎)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본래 성인을 위해 씌어진 이 작품은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아동용의 극히 짧은 축약판으로밖에는 소개된 적이 없으며, 본서는 국내에서 최초로 출간되는 완역판이다.
셜록 홈즈의 모델이 되었던 벨 교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과대학 시절의 은사였던 러더포드 교수를 모델로 도일이 창조한 챌린저 교수는 엄청나게 큰 머리통, 고릴라 같은 역삼각형의 몸집에, “앗시리아인 같은 북슬북슬한 수염으로 뒤덮힌 얼굴 안에서 두 개의 회청색(灰靑色) 눈이 예리하게 빛나는” 괴이한 용모의 소유자이고, 괴팍하고, 우쭐대기 좋아하며,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하지만, 실은 유머러스하고 따스한 성격을 지닌 매력적인 인물이다. 이 천재 동물학자의 이름을 따서 <챌린저 교수> 연작이라고 불리는 이 시리즈는 장편 <잃어버린 세계>를 포함해서 모두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질과 양에서 셜록 홈즈 시리즈에 필적하는 코난 도일의 가장 중요한 작품군(作品群)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서가 출간된 1912년은 셜록 홈즈 시리즈의 대성공으로 코난 도일이 부동의 작가적 명성을 확립한 시기였으며, 개인적으로도 가장 활력에 차고 행복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코난 도일 자신이 챌린저 교수로 분장하고 친구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초판본에 실려 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본서 <잃어버린 세계>를 썼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도일은 이 분장 그대로 밖으로 나가 런던 거리를 활보했다고 한다.)
본서의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반쯤 어른인 소년에게, 혹은 반쯤 소년인 어른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 씌어진 이 소설은, 챌린저 교수를 위시한 네 명의 개성적인 등장인물들이 자아내는 절묘한 콘트라스트와, 이들 사이의 유머러스한 (때로는 포복절도할만한) 교류로 독자들을 매료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최악의 상황에서도 결코 객체와 주체에 대한 시각을 잃지 않는 영국적인 유머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모험소설 특유의 시니컬한 관점, 그리고 네 사람의 빅토리아인들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계급적, 사회적, 민족적 갈등이 빚어내는 다양한 대화체의 뉘앙스는 한국어로의 번역 과정에서 사라져버릴 위험성이 가장 큰 부분이며, 옮긴이가 가장 고심했던 대목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두 명의 교수들보다 한 세대는 젊은 존 록스턴 경이, 거의 무례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말투로 이들을 대하는 이유는 귀족인 그의 계급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고명한 학자지만 계급을 따지자면 중상층 자유민(yeoman) 출신인 챌린저는 바로 이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민족 국가 영국에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혈통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던 작가 코난 도일이 <아일랜드산 아일랜드인>인 멀론의 ‘민족성’에 관해서도 언급하는 구절도 여러 개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해야겠지만, 필자가 참고삼아 훑어본 아동용 축약본에서는 미묘한 계급적인 뉘앙스는 고사하고 멀론의 짝사랑 상대인 글래디스에 관한 언급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은 국내에서 이 작품이 오랜 기간 동안 성인용이 아닌 <아동용>로 치부된 가장 큰 이유중 하나이다.
발표되자마자 사계의 격찬을 받고, 속편을 원하는 독자들의 편지가 빗발쳤다는 후일담이 있는 본서는 흔히 쥘 베른의 <지구 중심으로의 여행>(1864)의 연장선상에서 거론되는 경우가 많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이유에선가 고립된 식물상과 동물상을 가진 세계를 과학적 입장에서 묘사한 비경(秘境) SF의 효시에 해당한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는 심해(深海)를 무대로 역시 ‘잃어버린 세계’ 테마를 전개한 장편 <마라코트 심연>이 유명하며, 이 책은 코난 도일의 대표적인 SF 단편들과 함께 <코난 도일의 SF 2>라는 부제를 붙여 행복한책읽기 SF총서에서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