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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일 마지막 LG경기를 보려고 목동구장을 찾은 박종호. 그는 19년간의 현역생활을 접고 제2의 야구인생을 준비 중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불길한 예감
# “어디니?” 휴대전화의 통화버튼을 눌렀을 때 박종호의 첫마디는 그랬다. “잠실야구장”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야구장에서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루 전 잠실구장에서 LG 관계자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관계자는 2군에 있는 박종호의 상태를 묻는 말에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조만간 가부간의 결정이 날 것 같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한창 시즌이 진행 중인 5월 말 프로야구판에서 ‘가부간의 결정’이라면 그건 바로.
“나 은퇴한다.” 잠실구장에서 만난 박종호는 악수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개나리처럼 얼굴이 노래졌다.
5월 27일 박종호는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1992년 성남고를 졸업하고 LG 유니폼을 입은 뒤로 19년 동안 뛰었던 정든 그라운드를 떠나겠다는 뜻이었다. 1973년생 동갑내기이자 누구보다 치열하게 1990~2000년대를 살았던 동시대인으로서 박종호의 은퇴는 ‘젊은 날의 퇴장’이자 ‘익숙했던 것과의 이별’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에게 해줄 말이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고생했다”는 말밖엔.
6월 1일 목동구장에서 박종호와 다시 만났다. 늘 그라운드에서 <스포츠춘추>를 반겼던 박종호를 이제 기자실에서 <스포츠춘추>가 반겼다. 박종호는 난생처음 그라운드가 아닌 기자실과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전했다. 동갑내기 두 친구는 기억이란 바다에 소금이 돼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박동희의 Mr.베이스볼 '박종호'편은 2편으로 나눠 게재합니다.)
갑작스럽게 무슨 은퇴야.
갑작은 무슨, 줄곧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며칠 전에 너 만나서 이야기한 거고. 사실 시즌 초부터 느낌이 있었어.
어떤?
스스로 느끼기에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더라고. (혼잣말을 하듯) 그래 열정이 많이 식었지.
열정?
왜 그럴 때 있잖아. 뭔가는 하고 싶은데 몸은 안 따르고, 마음만 급해질 때. 정말 야구는 하고 싶은데 현실은 그 반대일 때 느끼는 무력감 같은 거 말이야. 예전엔 하루만 야구 안 해도 미칠 것 같았는데 이젠 벤치에 앉아 있어도 무덤덤한 하더라고. 속으로 ‘이젠 그만둘 때가 됐구나’ 싶었어.
은퇴를 두고 가족과는 상의해봤어?
대구에 있는 아내한테 전화했지. “사정이 이래서 은퇴해야겠다.” 아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더라고. 아, 뭐라더라.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그래. 자기는 남편이 일없어서 집에서 쉬는 건 못 보니까 뭐든지 일거리를 찾으라고 하더라고(웃음).
말은 그렇게 해도 아내 기분도 착잡할 거야. 물론 넌 말도 못하겠지만.
2008시즌 중반에 삼성에서 웨이버 공시됐을 땐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눈앞이 깜깜했어. 하지만, 이번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에 충격이 크지 않았어. 나 자신도 한계를 인정했으니까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지.
원래 구단에서 은퇴 이야기가 있었나.
구단에서 사전에 언질은 줬지. 하지만, 삼성에서도 한번 웨이버로 공시됐었는데 또 한 번 되는 게 좀 그렇더라고. 후배들의 길을 터줘야할 시점이 온 것 같기도 했고. 그즈음 김용달 전 LG 타격코치님을 뵙고 상의를 드렸어.
김 전 코치님이 뭐라던.
처음엔 “무슨 소리야! 은퇴는 무슨 은퇴. 더 해야지” 하고 말씀하실 줄 알았어. 선수 때처럼 그렇게 자신감을 심어주실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웬걸. “잘 생각했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더라고(웃음).
박종훈 LG 감독님은?
5월 27일 잠실구장에서 감독님께 “은퇴합니다”하고 말씀드렸더니 처음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 잠시 뒤에 “나도 참 마음이 아프다”하시는데, 참 죄송하더라.
시즌 중 웨이버 공시자는 잔여연봉이 나와도 은퇴자에게는 지급되지 않는 게 상례잖아. 차리라 웨이버 공시를 선택하는 게 현실적으로 낫지 않았을까.
네 말대로 웨이버는 (잔여연봉이) 나와도 은퇴하면 나오지 않을 거야. 하지만, 구단에서 배려해주셔서 잔여연봉을 받게 됐어. 은퇴 전후로 구단에서 여러 가지로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할 뿐이야.
![]() 1991년 4월 3일 자 <주간야구>에 실린 성남고 박종호(사진=스포츠춘추) |
'유격수 수비 하나 만큼은 전국에서 첫손에 꼽히는 유망주. 넓은 수비 폭과 강한 어깨,센스를 고루 갖춰 물샐 틈 없는 수비를 자랑한다. 1학년 때부터 손발을 맞춰온 2루수 박경호와의 키스톤 콤비 또한 일품.
타격에서도 공을 맞히는 순간 힘을 모으는 능력이 뛰어나 팀에서 4번 타자를 맡고 있다. 서울 구암국민학교 3년 때 야구를 시작,성남중을 거치며 줄곧 유격수로 뛰었다. 자신도 “수비는 누구한테도 뒤지고 싶지 않다”며 자신감을 보인다. 단지 타격에서 변화구에 약한 게 흠.
파이팅이 좋은 이만수,화려한 수비를 자랑하는 류중일을 좋아해 삼성라이온즈의 팬이기도. 고1이던 1989년 43회 황금사자기대회에서 13타수 6안타, 타율. 462로 타격 2위를 차지하며 돋보이기 시작했다. 정인용 감독도 “타구처리 동작이 부드럽고 나무랄 데가 없다. 정신력만 다듬으면 뛰어난 선수가 될 것”이라고 칭찬한다.
73년 7월 27일생으로 176cm,69kg의 체격. 박윤재 씨의 3형제 가운데 둘째아들. 8월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한 · 미 · 일 고교야구에 청소년대표로 뽑히는 게 올해 목표다.'
<주간야구>에 기사도 실리고 그때 참 잘 나갔다.
뭐 그랬지(웃음). 고교 때 내가 조금 인정받긴 했어. 서울에서 수비 좀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니까. 하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광주일고 김종국(현 KIA 코치), 공주고 홍원기(현 넥센 코치)보단 지명도에서 달렸던 게 사실이야.
고3 졸업반 때 팀 전력이 조금 약하지 않았나. 그래서 전국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면도 있는 것 같은데.
2학년 땐 3학년생이던 강병규 선배와 봉황대기대회에서 우승을 맛보기도 했지만, 3학년 졸업반 땐 확실히 팀 전력이 약했어.
어쩌면 그래서 대학 진학에서도 원하던 결과를 못 얻은 게 아닐까. 원래 프로보다는 대학에 가려고 했잖아.
그랬지. 사실 난 연세대나 고려대에 가고 싶었어. 왜 어렸을 때 로망인 팀이 있잖아. 그런데 고3 때 당시 성남고 감독님이 나보고 “성균관대에 가라”는 거야. 뭐 그때는 감독님이 하라면 그대로 따라야 할 때니까 성균관대행을 결정했지. 하지만, 당시 집안환경이 별로 좋지 않았어. 거기다 결정적인 게(물 한 컵을 벌컥 들이마시는 박종호)
결정적인 게?
당시 LG 내야진에 이종열(현 LG 코치), 이우수 선배가 뛰고 있었어. 두 분 다 내 1년 선배였거든. 속으로 생각해보니까 한번 실력을 겨뤄도 해볼 만할 것 같더라고. 마침 LG에서도 날 지명하고.
그래서 LG에 입단한 거야?
LG에서 날 지명하고서 내가 먼저 서울 여의도 쌍둥이 빌딩으로 찾아갔어. 그때 구단 사무실이 거기에 있었거든. 찾아가선 “입단하겠습니다”하고 말씀드렸어.
기다리면 알아서 찾아올 텐데 뭐하러 구단 사무실까지 찾아간 거야?
뭐하러 가긴. 계약하러 간 거지(웃음). 가자마자 계약서에 사인하고 바로 나왔지. 어차피 LG에 뼈를 묻기로 했으면 빨리 계약하고 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봤거든.
![]() 박종호는 안정된 수비와 넓은 수비범위를 자랑하며 골든 글러브를 3회(1994, 2000, 2004)나 수상했다. 그것도 LG, 현대, 삼성 유니폼을 입고 말이다(사진=삼성) |
당시 계약금으로 1천200만 원을 받았어. 요즘 고졸 선수들이야 몇억 원씩 받는다지만 당시엔 그것도 꽤 큰돈이었다.
그땐 그게 고졸 최고대우였지.
막상 프로구단에 입단하니까 느낌이 어떻든?
1992년 입단했을 때 LG는 김재박(전 LG 감독), 이광은(현 연세대 감독)선배님 같은 대스타들이 은퇴하고 ‘막’ 세대교체를 할 시기였어. 선배들의 면면을 보니까 1군 진입도 겨뤄볼 만하겠더라고. 2군에 있을 때도 항상 ‘난 1군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 보자 (기억을 더듬으며) 아마 그해 5월 5일(주 : 확인결과 5월 9일) 인천 태평양 전이 프로 데뷔 첫 경기였을 거야. 그때 대수비로 나갔다가 3타수 무안타에 그쳤을 거야.
입단 첫해 때만 해도 주로 유격수를 봤지?
응. 당시 민경삼(현 SK 단장), 김동재(현 KIA 코치) 같은 훌륭한 수비수들이 많아서 주전으론 못 뛰고 선배들이 지쳤을 때 주로 대수비나 대주자로 나갔어. 물론 포지션은 유격수였고.
그러다 1993년부터 차츰 2루를 보기 시작하지 않았나. 당시 이광환 LG 감독도 널 꽤 잘 본 것으로 아는데.
날 예뻐하셨지(웃음). 그때 이 감독님은 내가 유격수로서 뛰기엔 조금 어깨가 약하다고 보신 것 같아. 어느 날부터인가 2루수로 뛰어보라고 하시더라고.
1994년 프로 무대에서 처음으로 100경기 이상에 출전했어. 그해 타율 2할6푼, 6홈런, 56타점, 21도루면 프로 3년 차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여기다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끄는데도 네가 큰 역할을 담당했어.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냥 선배들 틈에 묻어간 거지(웃음).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참, 그때는 LG 선수들의 단합이 장난아니게 잘 됐어. 무슨 찰흙이 굳은 것처럼 그렇게 단단할 수가 없었다니까. 선·후배 할 것 없이 모두 ‘우승’이라는 목표가 뚜렷했고, 운동도 정말 열심히 했어. 특히나 당시 유지현, 서용빈(이상 현 LG 코치), 김재현(SK) 이른바 ‘신인 트리오’와 (이)종열 이형 같은 젊은 선수들이 무척 열심히 했거든. 그 젊은 선수들이 누구보다 앞장서다 보니까 팀 동료도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 같아.
‘LG의 단합’이라, 오래된 농담처럼 들리는 말이다.
야구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니뭐니해도 이기는 거야. 이기려면 자기가 희생도 해야 하고 동료를 도와줘야 할 때도 있어. 내 욕심만 부리면 경기 흐름을 전혀 못 읽을 수 있거든. 그러니까 안타 욕심이 나도 팀 배팅하고 번트를 대야할 때는 확실히 대야 하거든. 1994년 LG가 우승할 땐 선수들 사이에 그런 희생과 노력이 있었어. 돌아보면 포수 김동수(넥센 코치), 투수 김용수, 1루 서용빈, 3루 한대화(현 한화 감독), 유격수 유지현 등 2루였던 나빼고 모두 쟁쟁한 선배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우승도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어.
당시 ‘최선참’이었던 한대화 감독이 그렇게 무서운 존재였다고 하던데.
우리들의 정신적 지주였지(웃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었다고나 할까. (스르르 눈을 감으며) 그땐 선배 무서운 줄도 알고 존경할 줄도 알았던 때였지. 지금이야 뭐….
1994년 LG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뒤로 ‘신바람 야구’가 LG 야구의 모토가 됐잖아. 도대체 ‘신바람 야구’의 정체가 뭐였을까 늘 궁금했어.
신바람 야구라, 그거야 뭐 운동장에서 후회 없이 온 힘을 다하자는 거 아니겠어. 그땐 정말 선수단은 신나서 야구했을 때고. 구단에서 알아서 캐치프레이즈로 ‘신바람 야구’를 들고 나온 것 같아(웃음).
![]()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순간 LG 선수들이 부둥켜 안고 있다. LG는 '신바람 야구'를 앞세워 한국프로야구의 패러다임을 바꿔놨다(사진=LG) |
네 야구인생의 첫 번째 단추를 채워준 이를 꼽는다면 단연 이광환 감독이 아닐까 싶다. 널 계속 기용하고, 포지션도 조정해준 이가 바로 이 감독이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우신 분이지. 이 감독님은 ‘자율야구’라고 해서 선수들을 믿고 기다리는 스타일이셨어. 여느 감독들님처럼 선수들을 윽박지르거나 비난하는 스타일이 절대 아니셨지. 어쩌면 그런 감독님의 성향과 감독님이 만드신 온화한 팀 분위기가 나처럼 어린 선수가 팀에 빨리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만약 조금만 못했다고 소릴 고래고래 지르고, 2군으로 내려 보냈다면 과연 지금의 내가 어떻게 됐을까 싶어.
![]() 박종호가 꼽는 '인생의 롤모델' 김용달 전 LG 타격코치(사진 왼쪽)(사진=LG) |
그즈음 김용달 LG 타격코치가 신인 박종호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너, 스위치 타자 한번 해볼래?”
박종호는 귀를 후볐다. 잘못 들었나 했다. 아니었다. 김 코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줄곧 봐왔는데 넌 스위치 타자가 제격이야. 지금부터 스위치 타자로 전향하는 게 어떠냐?”
그때까지 박종호에게 스위치 타자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미 메이저리그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날 믿고 따라오면 좋은 타자가 될 수 있다. 주전도 문제없고.” 김 코치의 장담에 박종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지옥훈련이 시작됐다. 왼손 타석에 적응하려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스윙연습을 했다. 토스 배팅과 프리 배팅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살이 뭉개지고 군살이 자라나는 가운데 다시 새살이 돋길 반복했다. 그러나 해도 해도 왼쪽 타석은 부자연스러웠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그때마다 김 코치는 박종호를 다그쳤다.
“백업요원으로 전전하다 소리 없이 유니폼 벗고 싶으면 다시 오른쪽 타석으로 돌아가도 돼!”
박종호는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일어나 다시 힘차게 스윙했다. 저승사자처럼 자신을 몰아대는 김 코치가 야속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은혜를 갚던, 욕을 해대던 일단 성공하고 볼 일이었다.
6년 뒤 박종호는 타율 3할 타자가 됐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00년엔 타율 3할4푼으로 타율왕에 올랐다. 타율왕에 등극했을 때 박종호는 가장 먼저 김용달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지금도 달라진 건 없다. 박종호는 말한다. “그때 김 코치님이 고집을 부려 날 스위치 타자로 만들지 않았다면 한참 전에 유니폼을 벗었을 것”이라고.
스위치 타자 연습은 언제부터 한 거야?
입단 첫해 진주 마무리 캠프 때부터 했지. 잘 알겠지만, 당시 김용달 타격코치님이 강력하게 ‘스위치 타자’의 필요성을 역설하셨어.
어느 면을 보고 널 스위치 타자감이라고 생각했을까.
“넌 다리도 빠르고 콘택트 능력도 있고, 무엇보다 앞으로 왼손 타자가 유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 (잠시 침묵하다가) 음, 그래. 고교 때 기억에 남는 게 있는데 왜 친구들끼리 장난삼아 찜푸(주 : 배트 대신 주먹으로 공을 치는 게임)라고 했잖아. 찜푸할 때 보면 이상하게 왼 주먹으로 때려야 공이 더 멀리 정확하게 나가는 거야. 고교 때 슬럼프에 빠져 거울 보면서 스윙 연습할 때도 이상하게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보면서 교정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더라고.
인위적으로 오른손 타자를 왼손 타자로 만든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훈련이 꽤 고됐다고 들었어.
말도 마. (한숨을 길게 쉬며) 그때 생각하면 끔찍하다(웃음). 타격훈련의 90%를 왼손으로 하는데, 이건 뭐 고행이 따로 없었어.
사실 김 코치가 LG에서 스위치 타자로 기르려던 건 너뿐만이 아니었어.
맞아. 나 말고도 몇몇 선수가 스위치 타자 수업을 받았어. 결국, 그 선수들은 몇 년 안에 야구를 관두고 나만 남은 거지. 그러다 한참 뒤에 이종열 선배가 스위치 타자 수업을 받고 성공했지.
팀도 우승하고, 스위치 타자로서 성공 가능성도 보일 즈음. 그런데 반대로 출전경기수는 급감했어. 1995, 1996년 2년 연속 경기출전수가 60경기대로 ‘뚝’ 떨어졌단 말이야.
이유가 있어. (담담한 목소리로) 1995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홈으로 들어오다가 롯데 포수였던 강성우(현 한화 코치) 선배와 부딪쳤어. 그때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손목이 탈골됐더라고.
탈골?
병원 가서 'X-레이'를 찍어보니까 손목이 완전히 뒤틀려 있더라고. 그날 이후 아주 오래 쉬었지(웃음).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아무리 재활해도 왼손 근력이 오른손과 비교하면 60%밖에 되지 않는 거야. 그때 부상이 내 야구인생의 최초의 고비가 아니었나 싶어. (풀죽은 목소리로) 1996시즌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목까지 다치지 않나….
타자에게 ‘손목이 약하다’는 건 꽤 치명적인 결점이야.
왜 아니겠어. 그때 손목부상 이후로 타격할 때 힘이 많이 달리더라고. 특히나 높은 공에 무척 약했어. 왜냐? 원체 손목힘이 부족하다 보니까 스윙이 계속 밀리는 거야.
![]() 김용달 타격코치를 만난 뒤 박종호는 스위치 타자로 변신했다. 1993년 5월 4일 태평양 전에서 그는 왼쪽 타석에서 오른손 투수 안병원을 상대로, 오른쪽 타석에선 왼손 투수 김홍집을 상대로 각각 홈런을 뽑으며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한 경기 양타석 홈런이란 진기록을 세웠다. 야구전문가들은 지금도 '가장 성공한 스위치 타자'로 박종호를 꼽는다(사진=LG) |
어제인가 김영직 LG 수석코치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네 이름이 나왔어. 네 은퇴를 무척 아쉬워하시더라고. 그러다 1998년 시즌 도중 네가 현대로 트레이드 됐을 때를 회상하는데 “그즈음 구단에서 박종호의 손목부상이 심해서 선수로서 수명이 끝났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고 하시는 거야. 취재해보니까 실제로 당시 LG에 있던 관계자 대부분이 너의 재기를 불가능한 것으로 봤던 듯싶어. 김 수석코치가 너를 가리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기적의 사나이”라고 하는데,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랬을 거야. 그땐 주변에서 다 그렇게 말했으니까. 음, 아마 8월 8 일었지 싶은데. 롯데 전을 치르려고 마산으로 내려가던 중이었을 거야. 그날이 트레이드 마감일인가 했는데. 김용달 타격코치님이 나를 부르시더라고.
불러선 뭐라고 하시던?
“종호야, 미안하다. 트레이드됐다” 하셨어. 알고 보니까 현대 최창호 선배와 내가 맞트레이드가 됐더라고. 이야, 어린 나이에 충격이었지. 난 영원히 LG맨으로 남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뭐 어떻게 하냐. 이미 결정 난걸. 새벽에 짐 싸서 바로 인천으로 갔지.
![]() 현대 시절 박종호는 한 시즌 도루 20개를 넘지 못하면서도 센스있는 감각과 한 베이스 더 가는 적극적인 주루로 베이스러닝에 뛰어난 주자로 꼽혔다(사진=삼성) |
우승제조기 박종호
# 지금은 사라진 왕조가 있다. 현대 유니콘스다. 1995년 9월 태평양 돌핀스를 470억 원에 인수한 현대는 풍부한 자금력을 실탄삼아 김재박 감독을 중심으로 정상급 선수들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박재홍, 박경완(이상 현 SK), 전준호(현 SK 코치)이 차례로 현대 유니폼을 입었고, 정민태, 정명원(이상 넥센 코치), 위재영 등 당대 최고의 투수들이 힘을 합쳐 투수 왕국의 토대를 닦았다.
불과 창단 3년만인 1998년 현대는 결국 정규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면서 첫 우승의 감격까지 맛봤다. 이때 현대의 우승을 이끈 이 가운데 이적생 박종호도 있었다.
1998년 처음 접한 현대는 어떤 팀이었어?
말이 필요없는 팀이었어. 팀 전력이 어찌나 탄탄한지 타자면 타자, 투수면 투수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팀이었어.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지 아니?
글쎄.
‘과연 내가 여기서 주전을 꿰차는 게 가능한가?’ 싶었다니까. 당시 이명수(현 넥센 코치) 선배는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2루수였거든. 나야 뭐 만날 백업 신세였지(웃음).
하지만, 그해 현대가 한국시리즈에서 LG를 꺾고 우승하면서 두 번째 우승 반지를 끼었어.
그랬지. 사실 난 한국시리즈에서 별로 한 게 없었어(주 : 3경기에 출전해 3타수 1안타). 그래서 미안하긴 했지. 하지만, 내가 현대로 이적한 첫해 팀도 한국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우승하니까 무척 기쁘더라고. 상대가 LG였다는 게 참 씁쓸했지(웃음).
2000시즌에도 현대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컵을 안았어. 그땐 네가 주전으로 뛰었는데.
1994, 1998시즌에서 우승을 경험했지만, 난 2000시즌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아. 왜냐하면, 당시 현대가 두산에 종합전적에서 3대 2로 이기는 상황에서 6차전에 내가 선발출전했거든. 그런데 (입맛을 다시며) 내가 연속으로 실책 3개를 범했지 뭐야. 나중에 기록 한번 찾아봐라. 틀림없이 한국시리즈 한 경기 최다 실책일 거야.
2000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5회 2사 1, 3루 박종호가 삼성 투수 김태한의 공을 받아쳐 좌월 3점 홈런을 친 뒤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사진=삼성)
그때 실책은 나도 기억이 나. 현대가 1-0으로 앞서던 4회 네가 두산 선두타자 강혁의 타구를 실책해 출루시키는 바람에 역전의 빌미를 제공했고, 4-4 팽팽한 접전을 이어가던 9회 1사1루에서 심정수의 타구를 네가 또다시 놓치면서 1, 2루 위기를 허용했지.
여기다 1사 1, 2루에서 홍성흔의 병살타성 유격수 땅볼 때 2루로 토스한 유격수 박진만의 공을 네가 2루를 밟고 1루로 던진다는 게 악송구가 되면서 어이없는 결승점을 헌납하고 말았어.
그때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라운드를 빠져나가던 네가 기억난다.
속으로 ‘이게 다 꿈이고, 연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했었어. 정말 팀원들한테 미안해 죽겠더라고. 다음날 열리는 7차전에 과연 나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김재박 감독님이 지명타자로 출전시키시더라고. 정말 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4타수 무안타에 그쳤어. 이야, 그때 정말 더 죽겠더라(웃음). 다행히 외국인 타자 톰 퀸란이 홈런 두 방을 치면서 쉽게 이길 수 있었어.
만약 그 경기에서 현대가 졌다면….
말하면 뭐하니. 완전 역적 되는 거였지(웃음).
그해 3번째 한국시리즈 챔피언 반지를 낀 여세를 몰아 시드니올림픽에도 출전했어.
내가 올림픽 대표팀의 일원으로 뽑힐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그거 아니?
뭐?
난 프로에서 평생소원을 풀었다니까.
한국시리즈 우승?
(고개를 흔들며) 아니. 난 아마추어 때 태극마크를 한 번도 달아보질 못했어. 프로 와서야 올림픽 대표팀에 뽑히면서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아봤다니까(웃음). 기분이 묘하더라고.
그해 타율 3할4푼으로 타율왕에 올랐으니 당연히 뽑힐 만도 했지.
사실 주변에서 다 도와주신 거지.
![]() 올림픽 출전 사상 첫 메달을 획득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야구대표팀(사진=KBO) |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긴 했지만,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일본을 꺾고 동메달을 딸 때 참 전국이 떠들썩했다. 그렇지?
난 솔직히 다른 건 기억을 못 하겠고, 일본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현 보스턴)를 상대로 2안타를 뽑은 게 기억에 남아.
2000년 9월 23일 올림픽파크 야구장에서 벌어진 올림픽 야구 예선리그 6차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마쓰자카를 상대로 1안타, 27일 같은 곳에서 치러진 3-4위전에서 다시 마쓰자카를 상대로 1안타를 기록했어. 지금도 훌륭한 투수지만, 당시엔 ‘괴물’로 불리던 마쓰자카였는데.
일본과 처음부터 만났으면 모르겠는데 이전에 호주, 쿠바, 미국팀이랑 경기를 치르면서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이미 상대했던 뒤였어. 여기다 마쓰자카가 몸은 좋지만, 서양 선수들에 비해선 작은 편이었거든. 그래서 더 자신 있게 상대하지 않았나 싶어.
한·일전의 긴장감이 대단했을 것 같아.
긴장감은 말도 못하지. 일본 하면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상대잖아. 거기다 마쓰자카는 당시 일본에서도 최상위 투수였고. 과연 내가 마쓰자카의 공을 칠 수 있을까 싶었지. 하지만, 그때 내 컨디션이 아주 좋았어.
돌아보면 네가 대표팀에서 2번 타자 2루수를 보면서 꽤 좋은 활약을 펼쳤어. 예선리그 호주전에서 동점타, 쿠바전에선 추가 타점, 4강 관문이었던 네덜란드전에선 결승타점을 때리며 대표팀을 위기에서 구해냈어. 올림픽 때 22타수 10안타 타율 4할5푼4리 4타점으로 이름값을 톡톡히 했어. 맹활약의 원동력이 뭐였다고 생각해?
너도 알잖아. 그 사건.
- 주 : 여기서 그 사건이란 ‘시드니 올림픽 카지노 사건’을 말한다. 약체 호주 등에 덜미를 잡혀 예선통과가 불투명했던 순간에 대표팀의 일부 선수들이 시드니 시내 한 카지노에서 밤새 도박을 하다 발견돼 여론의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 -
잘 알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노는 덴 젬병이잖아(웃음). 다른 선수들은 몰라도 난 그때 숙소에만 있었거든. 밤의 세계를 잘 모르니까. 아마 그 덕에 올림픽 때 잘했던 것 같아.
동메달은 집에 있어?
고이 모시고 있지. 연금은 아버지가 용돈 삼아 꼬박꼬박 30만 원씩 받고 계시고(웃음). 아쉬운 게 있다면 그때 금메달 땄으면 100만 원씩 용돈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아쉽단 말이야(웃음).
![]()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이치로는 박종호에게 터닝 포인트를 제공했다. 사진은 제2회 월드베이스볼 아시아예선 당시 해설가로 변신한 사사키 가즈히로(사진 왼쪽)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치로(모자 쓴 이)(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이전까지 타율 2할7푼 이상을 한 번도 기록하지 못한 박종호는 그저 그런 백업선수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어쩌면 이때 그에게 터닝 포인트는 야구인생의 끝을 향해 나르는 암울한 비행일지 몰랐다. 그때 박종호에게 손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릭스 블루웨이브(현 버펄로스)에서 뛰던 이치로 스즈키(현 시애틀)였다.
박종호는 지금도 이치로를 만난 순간을 자기 인생의 진정한 터닝 포인트로 꼽는다.
1998시즌까지 100경기 이상을 뛴 해는 1994시즌이 전부였어. 1997시즌까지 한 시즌 100안타 이상을 쳐본 적도 없었고. 그러다 1999시즌 갑자기 119안타를 치며 타율 3할1리, 10홈런, 55타점을 기록했어. 이렇게 극적으로 성적이 변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대단한 발전을 보였는데.
완전 이변이 일어났지(웃음).
계기가 있었어?
1998시즌이 끝나고 경기도 고양시 원당구장 숙소에 틀어박혀 있었어.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훈련에 매달렸지. 하루는 숙소를 기웃거리는데 비디오 옆에 비디오테이프들이 쌓여 있는 거야. 처음엔 뭔가 싶었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참 인생이란 게 희한하지. 내 눈에 다른 테이프는 보이지 않고 ‘이치로’라고 쓰인 테이프만 보이지 뭐야. 그 테이프를 손에 쥔 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이지 않나 싶어.
‘이치로’ 테이프의 정체가 뭐였던 거야?
이치로의 타격분석을 한 테이프였어. 리모컨으로 플레이를 누르고 가만히 보는데 (손뼉을 치며 감탄사를 연발하고서) 이건 안타를 치는 게 아니라 안타를 만들어 내는 거였어. 뭐랄까, 그래 손으로 그라운드 빈 곳에 공을 던지듯이 정말 말도 안 되게 안타를 만들어내는 거야. 거기다 원체 이치로 타격폼이 특이하잖아. 비디오를 보면 볼수록 계속 빠져들게 하는 뭔가가 있었어.
그걸 보고 이치로 타격폼을 따라 한 거야?
따라 했지. 그리고 결국 그 폼을 내 타격폼으로 만들었지.
오릭스 시절의 이치로 타격폼이라면 ‘시계추(진자) 타법’을 말하는 거 아닌가. 왜 왼발은 고정한 채 오른발을 홈플레이트 위에서 왔다갔다하는 게 시계추와 비슷하다고 일본에서 그렇게 이름 붙였잖아.
맞아. 우리가 ‘진자 타법’이라고 많이 했지. 재미난 게 이치로 타격폼에 익숙해지니까 그전엔 공을 때리기 바빴는데 이후로는 내가 원하는 코스의 공을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정확히 칠 수 있게 됐어.
‘내가 원하는 코스의 공을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정확히 칠 수 있다’라.
타격할 때 이전보다 훨씬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졌어. 이전엔 다리를 그냥 들었다가 내리는 게 다였는데, 이제는 투수의 타이밍에 맞춰 앞발을 길게 끌고 가거나 줄이면서 타격 타이밍을 잡을 수 있게 된 거지.
말이 모방이지 ‘진자 타법’은 보통 노력으로 따라 할 수 없는 타격폼이야. 일본에서도 이치로를 따라 했던 선수들이 대개 실패로 끝났거든.
정말 틈만 나면 ‘진자 타법’을 연구하고, 수천 번씩 스윙하면서 따라 하려고 노력했어. 특히나 타격폼을 연구하면서 이치로가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분석했어. 거짓말 같겠지만, 이치로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연구했다니까. 타격 준비동작부터 폴로 스루까지 빠짐없이 연구한 건 말할 필요도 없고.
하지만, 1990년대 후반이면 아직 한국야구계가 매우 보수적일 때야. 그런 타격폼을 이해해줄 야구인이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인데.
처음 시도할 땐 코치진에서 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였어. 하지만, 잘 치니까 거기에 대한 지적이 '쑥' 들어갔지 뭐야. 역시 프로는 잘하고 봐야 해(웃음).
1999시즌부터 ‘진자 타법’의 효과를 확실히 본 셈이네.
내가 야구하면서 처음으로 5번 타자까지 쳐봤다니까. 물론 원체 다른 선수들이 부진해서 5번을 쳤지만, 그땐 정말 타격에 물이 올랐다고 봐도 좋을 때였어. 2000시즌 때는 안타를 치는 게 아니라 안타를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공을 앞에 세워놓고 쳤다고 말할 정도로 컨디션이 정말 좋았어. (갑자기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내가 왜 그때 그랬는지 몰라. 참,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 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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