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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4월26일/주일복음말씀묵상/ †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눈이 열리다(루카24,13-35;루카24,35-48; 마르16,12-13))
1. 지식과 교리 상태에서는 우리도 엠마오의 제자들일 뿐이다(루카24,13-35).
엠마오로 길을 가고 있는 두 사람은 사도에 속하지 않고 9절에 나오는 모든 다른 제자들에 속한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함께 그 두 제자에게는 예수에게 걸었던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진다. 21절에서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는 유대 민족적인 사상이 표현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죽은 자의 생명은 3일까지는 아직 시체 곁에 배회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 한 번 그 시체 속으로 되돌아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제 3일에 일어난 부활을 결코 예측하지 못한다. 4-7절에서 천사들이 근심에 싸인 여자들을 만나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도 슬픔에 잠긴 제자들을 만나셔서(17절하) 질책하신다.
여기서 “이 어리석은 자들아”는 문자 그대로 말하면 “너희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아”라는 뜻이다. 그리고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예수께서 예전에 하신 말씀을 지시하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의 말씀들을 깨닫게 하신다. 그 말씀들에 의하면, 곧 그 말씀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뜻에 따르면, 메시야는 자기의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셔야만 한다.
여기에 헬라어 원문에, ‘…해야 한다’를 뜻하는 조동사가 사용된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제자들은 그것을 알 수 있어야만 했으며 또한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부활하신 분 자신이 이제 그들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도록 인도하신다. 주님이 움직이셔야 성경의 말씀(로고스)이 실제로 살아서 말하기 시작하고(레마), 냉랭한 마음이 ‘뜨거운 마음’으로 변하게 된다(25절, 32절).
늘 읽든 성경 말씀이 어느 날 깨달음으로 와서 많은 이들에게 생명으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언제나 체험하며 이를 간증할 수 있다. 이 말에는 후대의 교회공동체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요구가 들어 있다. 그 첫째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고는 예수의 길은 이해할 수 없다. 둘째는 그 경우에 부활하신 분 자신이 그들에게 이해와 깨달음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27절은 44절과 45절에서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고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이 낮선 길손은 비밀스럽게 그 작은 집단의 선생이자 중심인물이 되었다.
예수님은 본래 그 다른 두 사람의 손님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또한 가정의 가장이며 손님을 모시는 주인의 역할을 담당한다(30절). 이제 주님께서 주인이 되시므로, 그들은 그분을 알아본다.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제자들의 눈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분의 부활하심의 의미와 목적이 이루어졌다.
26절에서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부활하신 그분은 하느님의 불가시성, 곧 인간의 눈에는 원칙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광’ 안으로 되돌아가실 수 있다. 그러한 불가시성과 영광은 그분이 본래부터 거하실 곳이다. 이것은 자기의 사람들로부터 공간적인 거리를 두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절 이전에 있었던 예수님과의 교제의 옛 형태는 이제부터 과거에 속한다는 사실을 오해의 여지없이 보여준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신다는 것을 체험하면, 제자들은 마음을 돌이켜서 다른 사람과의 친교를 회복하게 된다. 그 사이에 근본적인 것이 일어났다.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34절).”
베드로에게 일어난 현현에 관해서는 신약 성경에서는 아무 곳에도 자세히 보도된 곳은 없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그 현현은 처음이자 결정적인 현현이었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은 베드로의 현현 체험에 이제 또한 자기들의 체험도 덧붙인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35절).”
이 체험은 루카의 눈에 특별히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시대의 교회에게, 또한 모든 시대의 교회들에게 부활하신 분을 만나고 그를 ‘알아 볼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두 제자들의 눈이 열려 그들이 그분을 알아보자 곧 “그들로부터 사라지셨다”고 말한다.
축어적으로 여기서 헬라어는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않게 되셨다”는 의미이다. 그분은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단지 보이지 않게 되셨을 뿐이다. 루카는 주 예수님이 떠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은 떠나는 것과 다르다. 여기서 사라지는 것은 숨는 것의 한 방법이다. 그분은 다만 그분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육신 안에 계시지 않는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영이신 그리스도(pneumatic Christ), 곧 그 영(The spirit, 성령)이 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여전히 몸을 갖고 계신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실의에 빠져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크게 격려 받고 다시 돌아 왔다.
그렇다! 이제 그분은 하늘에도 계시고, 또한 나의 가장 깊은 곳, 곧 내 영 안에도 계신다. 그분을 만나면, 곧 내 영 안으로 돌이키면, 그분은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신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시는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두려움과 침체에서 벗어나 열광하게 하고, 우리의 영은 살아나 축복의 통로가 되어, 우리 안에서부터 생명의 생수가 흘러내린다.
지식과 교리 상태에서는 우리도 엠마오의 제자들일 뿐이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2. 계시란 하느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셨다. 그러므로 이제 계시가 필요할 뿐이다(35-48).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제자들은 베드로의 주님 현현 체험에 이제 자기들의 체험도 덧붙인다. 여기서 길을 가고 있는 두 사람은 사도에 속하지 않고 9절에 나오는 다른 제자에 속한다. 루카24,35절에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말한다.
이 체험은 루카의 눈에는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시대의 교회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의 교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아 볼 수 있는’그들의 고유한 가능성에 관해서 중요한 어떤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곧 지식과 인격적 체험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32절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그리고 35절에서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것”을 말하고”, 45절에서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들은 너무나 중요하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과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을 열어 뜨겁게 하시고, 그분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은 성령이시다. 곧 성경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완전한 기록과 계시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활짝 열려지지 않았으므로, 그분은 그들에게 거룩한 말씀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나오셨다. 주님께서는 두 제자와 동행하셨고(15), 그들과 함께 유하셨지만(20), 그들이 떡을 드려 그것을 떼시기까지 그들의 눈은 열리지 않았고 그분을 알아보지도 못하였다.
에페1,17-18절에 “우리 주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느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지혜와 계시의 영을 가지고 부활의 능력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이것은 다만 그분이 무덤에서 일어 나셨다는 것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 속에 부활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눈이 열리는 것, 곧 “계시”란 앞으로 하느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지금 현재 또는 미래의 어느 날에 그들의 생활 속에서 겪는 생의 미약함이나 실패에서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기만하면, 그들은 이런 나약함이나 실패가 십자가 위에서 이미 모두 처리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 사함, 구속, 성령을 주심이 이미 다 완성된 사실임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며, 계시 외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실제로 적용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여전히 그런 나약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여전히 무력한가?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그런 능력을 가지셨지만, 왜 우리는 계속해서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가? 우리가 알지 못함이 그 이유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계시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된다면 모든 일이 잘되어 나갈 것이다.
계시는 단순히 교리나 성경적 지식이 있다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게 되는, 곧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어느 날에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이 변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 가르침이나 지식의 전달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실 때, 우리는 즉시 ‘오! 하느님, 이 일이 이루어짐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것이다. 지혜는 우리로 이해하게 하고, 계시는 알게 한다! 지혜는 어떤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계시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31절에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고 말한다. 루카는 예수님이 그들을 떠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과 떠나가는 것은 다르다. 여기서 사라지는 것, 곧 보이지 않는 것은 숨는 것의 한 방법이다. 그분은 영이신 그리스도(pneumatic Christ), 곧 성령이 되셨다. 그리고 무소부재하시다!
36-43절에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기를’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모여서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한 예수님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들려 올려진 후 제자들에게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신 것이다(요한14,3, 18-19).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신다. 인간의 실존은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불안과 공포를 가져다주는 사탄의 세력을 꺾었기에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이 “평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구원을 가리킨다. 죽은 자의 출현을 그 죽은 자의 영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는 유령신앙의 영역이나, 환각으로 치부하는 당시 그리스(헬라)의 사상과 문화와는 반대로, 루카는 육체성으로 증명되는 부활하신 분의 실재성, 곧 손과 발과 몸을 가지고 계시고, 생선을 잡수시는 그분의 현현(顯現)을 강조한다.
또한 부활하신 분의 현현이 실제적인 사건으로 증명됨으로써 이미 예전에 루카복음의 기본적인 특징이었던 기쁨이 새롭게 그리고 더욱 깊이 있게 나타난다(41). 예수님의 오심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가져오며,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는 기쁨을 일으킨다(요한20,19-20).
44-48절에서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말한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은 예수 당시의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세 부분이다. 곧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약의 여러 곳에서부터 그가 메시야이며 고난을 받아야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보여주셨다(46). 이미 천사들이 무덤에서 그랬던 것처럼(6-7), 이제 부활하신 분 자신도 마무리로 다시 한 번 그분께서 전에 자기 자신과 자기의 길에 관하여 말씀했던 것(9,22,44)을 지적하신다.
그것은 메시야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걸어야만 하는 길에 대하여,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며, 또한 그것을 성취시키신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 사건은 이제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이 모든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비로소 종결된다(47).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항상 선교 명령을 동반하는 것이 신역성경의 공통점이다. 예루살렘이 항상 분명하게 구원의 약속의 첫 번째이자 본래적인 수신지로서, 그리고 그 외의 세상을 향한 구원의 시발점으로서 전제되었듯이, 루카복음에 있어서 부활하신 분의 지시도 “예루살렘에서 시작하라”고 말한다(사도1,8; 로마15,19).
바로 제자들의 눈앞에서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에서 성경이 이루어졌다. 제자들은 그 모든 것의 목격자들이다. 목격자들로서 그들은 이제 예수 안에 나타난 구원에 대하여 온 세상에 증언해야 하며, 그들의 말씀 전파를 통하여 그 구원을 모든 민족들에게 접근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48).
그와 같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 구원사의 마지막 단계(47)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49절에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의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바, 성령을 가리키는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알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