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로부터 『알퐁스 도데 작품선』을 선물 받았다. 책에는 도데의 많은 작품
가운데 30여 편이 실려 있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도데의 작품은 달랑 셋이다.
학교 다닐 때에 교과서에 실렸던 단편 〈마지막 수업〉이 첫번째였고 그 다음이
〈별〉이었다. 후일 비제(J. Bizet)의 작품 <아를의 여인 모음곡>의 소재가 된,
단편이자 희곡인〈아를의 여인〉이 세번째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가운데 황순원의 〈소나기〉가 연상되는〈별〉은 작품집 《풍차방앗간의 편지》
에 실린 다섯번째 이야기이다.
프로방스 지방의 한 목동과 주인집 딸 스테파네트 아가씨와의 어느 며칠을 쓴
짧은 이야기이다.
단편 〈별 (권지현 옮김)〉 전문을 아래에 둔다.
* 본문 중 '별자리에 관한 민담'은 원문에서 밝힌 대로 아비뇽에서 출간된 <프로방스 달력>
의 내용을 번역한 것임
※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 프랑스 프로방스 출생 - 1897년 사망)
소설가, 극작가, 시인
<편집 권오신>
뤼브롱 산에서 양을 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몇 주 동안이나 사람이라고는 구경도 못 해보고, 그저 나의 개 라브리와 양떼
들과 지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따금 몽드뤼르 산에 은거하고 있는 산사람이 약초를 캐러 근처를 지나가거나, 피에
몽에서 일하는 숯쟁이의 검게 그은 얼굴만 잠깐씩 눈에 띄었을 뿐이었지요. 하지만 그
들은 소박한데다가 말도 통 없었습니다. 모두들 외롭게 지내다보니 말하고 싶다는 생
각을 잃어버렸나 봅니다. 게다가 산아래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름마다 음식가지를 싣고 농장에서 올라오는 노새의 방울
소리가 들려오거나, 농장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나 노라드 아주
머니의 붉은 모자가 언덕 너머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면, 나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
었답니다. 이런 날엔 그동안의 마을 소식을 한꺼번에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어느 집
아이가 세례를 받았는지, 누가 결혼을 했다든지 말이지요.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주인집 딸인 스테파네트 아가씨에 관한 소식을 제일 관심 있
게 묻곤 했습니다. 이 고장에선 제일 예쁜 아가씨였죠. 나는 아가씨가 파티나 모임에
자주 나가는지, 아가씨에게 관심을 보이는 청년들이 또 나타났는지 묻곤 했어요.
하지만 아가씨에 대한 관심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답니다. 하릴없이 산에 죽치고
있는 목동 주제에 웬 관심이냐고 하실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나도 스무 살 먹은 어
엿한 청년이었고, 스테파네트 아가씨는내가 만난 여자 중 가장 예쁜 여인이었으니 당
연한 일 아닐까요?
그 일요일에도 보름치 양식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때가 되도 오지 않는 것이었어요. 아침에는 그냥 단순하게 생각했죠.
'대미사 때문에 늦어지나보다.'
정오쯤에는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그러니 길이 나빠져서 노새가 출발하지 못
했나보다고 생각했지요. 오후 세 시쯤 하늘이 개고 빗방울이 햇빛을 머금어 온 산이
반짝거리고 있을 때, 풀잎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는, 불
어난 시냇물의 노랫소리를 뚫고 마침내 노새의 방울이 즐겁게 딸랑딸랑 울려퍼졌습
니다. 마치 부활절에 울리는 큰 종소리 같았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노새를 몰고 나타난 사람은 심부름꾼 아이도, 노라드 아주
머니도 아니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바로.....스테파네트 아가씨였습니다. 진짜 스
테파네트 아가씨 말입니다!
허리를 똑바로 펴고 등나무 바구니 틈에 앉아 있는 아가씨의 볼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
었습니다. 아마도 산바람과 소나기가 내린 뒤 서늘해진 공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노새에서 내리며 '심부름하던 아이는 몸살이 났고, 아주머니도
휴가를 내 가족들을 만나러 갔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도중에 길을 잃는 바람에 늦어지
게 되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어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숲속에서 헤맸다기보다는
일부러 늑장을 부린 것 같았습니다. 일요일이라 꽃 리본도 달고 고운치마도 입고, 레
이스도 달아 한껏 예쁘게 치장을 했더라니깐요.
캬! 정말 깜찍했습니다!
아가씨만 쳐다보느라 정신이 쏙 빠질 정도였죠.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
거든요. 겨울에 양떼를 몰고 산 아래 평원에 내려가 지낼 동안은 농장에서 저녁식사를
했지만,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는 모습만 잠깐씩 보았을 뿐이었으니까요.
아가씨는 하인들에게 좀처럼 말을 거는 일이 없었어요. 항상 경계하는 것 같았고, 어
찌 보면 잘난 척하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가씨를 이렇게 코앞에서 바라보게 되다니. 그것도 나 혼자! 이러니 제정신
이었겠습니까?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바구니에서 먹을거리를 꺼내더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행여 더러워지기라도 할까 나들이를 위해 특별히 꺼내 입은
치마를 살포시 들어올리며 산장 안으로 들어가더군요. 내가 어디서 잠을 자는지 궁금
했나봅니다.
짚 위에 양털 이불을 덮은 침대와 벽에 걸어놓은 커다란 망토, 지팡이와 부싯돌을 보고
아가씨는 매우 재미있어 했습니다.
"어머, 이런 곳에서 지내는구나? 가엾기도…. 내내 혼자여서 외롭겠다. 뭐 하면서 지
내니? 무슨 생각하면서 살아?"
나는 바로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아가씨 생각이요.'
거짓말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마음이 너무 울렁거려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
가씨도 이런 나를 눈치 챘는지 얄밉게 자꾸 짓궂은 농담을 해대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네 여자 친구는 가끔 여기 올라오니? 여자 친구라면 황금 염소가 맞겠
지? 아님 산꼭대기에서만 뛰어다닌다는 요정에스테렐이든가…….”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아가씨의 모습이야말로 정말 요정같았습니다. 머리를
뒤로 한껏 젖히며 환하게 웃음짓는 아름다운 모습이나, 빨리 돌아가려고 서두르는
모습도 말이죠.
"잘 있어, 목동아.”
"살펴가세요, 아가씨.”
아가씨는 빈 바구니를 가지고 결국 집으로 향했습니다.
언덕길로 내려가는 아가씨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자, 노새의 발굽에 차이는 돌멩이
가 마치 내 심장에 하나하나 꽂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이들이 떠나가는 소리를 끝
없이, 끝없이 듣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까지도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꼼짝 않고
있었답니다. 움직이면 내 꿈이 날아갈까봐서요.
골짜기 아래도 어둑어둑해지고 양들도 서로 몸을 비비며 산장으로 돌아올 저녁 무렵,
갑자기 고갯길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언뜻 보니 아가씨 같았어
요. 조금 전과는 달리 얼굴에 웃음기도 사라지고 대신 온몸이 흠뻑 젖어 추위와 두려움
에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소나기로 불어난 소르그 강을 건너려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것 같았습니다.
이런 밤늦은 시간에 농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꿈도 못 꾸었기에 몹시 난처했습니다.
지름길이 있긴 했지만 아가씨 혼자서는 길을 잃을 게 뻔했고, 나도 양떼를 그냥 놔두고
갈 수 없었기에 더욱 애간장이 탔습니다. 산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아가씨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걱정하는 가족들 때문에 말이죠. 나야 물론
아가씨를 최대한 안심시키려 했지요.
"칠월에는 밤이 짧잖아요, 아가씨……. 조금만 참으세요.”
이렇게 말하고서 나는 곧바로 불을 지펴 소르그 강물에 젖은 아가씨의 발과 치마를 말
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아가씨에게 우유와 치즈를 가져다 주었지요. 그런데 아
가씨는 가엾게도 불을 쬐려고도, 음식에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더라고요. 아가씨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는 것을 보니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어느새 밤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산꼭대기에는 사라져가는 태양빛이 한 떨기 걸려 있었고, 떨어지는 태양은 붉은 빛만
어렴풋이 내비치고 있었습니다.
'아가씨가 산장에 들어가 좀 쉬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래서 짚도 새로 갈고, 한 번도 쓰지 않은 예쁜 양털로 특별한 잠자리를 만들어드린
뒤, 아가씨에게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건네고 나왔습니다.
나야 문간에 나와 앉아 있었죠.
사랑의 불길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고 있었지만, 나쁜 생각이라고 는 하나도
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아실 겁니다.
무엇보다도 양떼들이 신기하게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아가씨가 이 세상에 서 가장 고
귀하고 뽀얀 양처럼 내가 지키는 산장 한구석에서 잠을 잔다고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오늘밤처럼 하늘이 넓고 깊게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별은 또 얼마나 반짝거리던지….
그런데 갑자기 산장 문이 열리더니 아름다운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나오는 게 아니겠
습니까.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양들이 뒤척이는 바람에 깊이 사그락거렸고, 잠꼬대처럼 울어대기도 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아가씨는 모닥불 옆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아가씨 어깨에 양털 숄을
덮어드리고 불꽃도 키웠지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답니다.
한번이라도 바깥에서 밤을 보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잠든 밤에는 또 하나
의 신비한 세계가 고요와 침묵 속에 눈을 뜬다는 것을 느껴보셨을 겁니다.
시냇물도 한층 맑은 소리로 노래하고, 연못 위에서는 자그마한 불빛들이 장난을 쳐댑
니다. 그리고 산속의 정령들이 모두 자유롭게 오가며, 허공에는 들릴락 말락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떠다닙니다. 마치 나뭇가지가 뻗어나는 소리, 풀이 자라는 소리를 듣는
듯하죠. 낮은 인간과 동물들의 세상이지만 밤은 사물들의 세상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조금 무섭기도 하죠. 아가씨도 두려움으로 몸을 떨더니 조
금만 소리가 나도 내게 몸을 바싹 붙여왔습니다.
그러던 중 저 아래 반짝이던 연못에서 출발한 길고도 서글픈 소리가 물결치듯 우리가
있는 곳까지 몰려왔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쁜 별똥별이 우리 머리 위를 지나쳐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방금 들린 소리가 마치 별똥별을 이끌고 온 것처럼 말이죠..
"저게 뭐야?”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속삭이듯 물었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영혼이에요, 아가씨.”
나는 성호를 그었습니다. 아가씨도 나를 따라하고는 한참 하늘을 바라보더니 깊은 생
각에 잠겼습니다. 이윽고 아가씨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목동들은 다 마법사라던데, 사실이야?"
"아니에요, 아가씨. 아무래도 우리가 별을 가까이서 보고 지내니까 평지에 사는 사람
보다 별에 대해 더 잘 알아서 그런가봐요.”
아가씨는 턱을 괴고 여전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양털 숄을 그렇게 걸치고
있으니 마치 하늘나라의 목동 같더라고요.
"와! 별이 정말 많구나! 어쩌면 저렇게 예쁘지! 이렇게 많은 별을 본건 처음
이야. 너, 저 별들 이름이 뭔지 아니?"
"물론이죠. 자, 우리 바로 위에 있는 별은 성 야곱의 길[은하수]이라는 거예요. 프랑스
에서 곧장 스페인으로 향하고 있지요. 용감한 샤를마뉴 대제가 사라센과 전쟁을 하러
갈 때 길을 알려준 사람이 바로 갈리시아의 성 야곱이었죠.
저기 저 별은 영혼의 마차[큰곰자리]랍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네 개의 바퀴를 보
세요. 그 앞에 있는 별 세 개는 세 마리 말이고, 세 번째 말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별이
마부랍니다. 그 주위로 마구 쏟아지는 별들이 보이시죠? 하느님이 천국에 들이지 않
는 떠도는 영혼들이에요. 조금 밑에 있는 별은 갈퀴라고도 하고, 세 임금[오리온]이라
고도 부르는 별이죠. 우리들에겐 시계 역할을 해주는 별이에요. 보기만 해도 벌써 자
정이 넘었구나, 하고 알 수 있거든요. 같은 남중 방향에서 조금 더 밑에 빛나고 있는
별은 밀라노의 요한[시리우스]이죠. 별들의 대장이랍니다.
이 별에 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날 밤, 밀라노의 요한과 세 임금, 병아리집[묘성]이 친구의 결혼잔치에 초대되었
답니다. 병아리집은 바쁜 나머지 제일 먼저 길을 나섰기 때문에 맨 위쪽에 있죠. 저기
저 하늘 위쪽을 보세요, 세 임금이 그 다음으로 병아리집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
데 게으름뱅이 밀라노의 요한은 늦잠을 자버렸답니다. 그래서 계일 뒤처진 거예요.
화가 난 밀라노의 요한은 두 친구들을 멈춰 세우려고 지팡이를 힘껏 던져버렸죠. 그래
서 세 임금을 밀라노의 요한이 던진 지팡이라고도 부르는 거랍니다. 하지만 아가씨,
뭐니 뭐니 해도 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별은 바로 우리들의 별, 양치기 목동의 별
이랍니다. 새벽녘에 양떼를 몰고 길을 나설 때나 저녁에 돌아올 때 길을 안내해주죠.
목동들 사이에선 아직도 이 별을 마글론느라고 부르곤 한답니다. 칠년마다 프로방스
의 피에르[토성]와 만나 결혼식을 올리는 아름다운 마글론느 말이에요.”
"그게 정말이야? 별들도 결혼을 해?"
"그럼요, 아가씨.”
별들이 어떻게 결혼하는지 설명해주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갑자기 상큼하면서도
부드러운 뭔가가 내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졸음
을 이기지 못하고 무거워진 아가씨의 머리였지요. 곱슬곱슬한 머리에 매단 리본과
레이스가 앙증맞게 사그락거렸습니다.
아가씨는 그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밤하늘의 별빛이 엷어지고 급기야는 사라질 때까
지 그대로 있었답니다.
나는 아가씨의 잠든 모습을 자꾸만 들여다보았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리기는 했지만,
맑은 밤하늘 덕택에 아름다운 마음만 간직할 수 있었지요.
우리 주위로는 별들이 마치 순한 양떼처럼 천천히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아
잠들어 있다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