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습니다.(눅2:22~23) 태어난 아기의 포피를 칼로 베는 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맏이에게 행했던 관례였습니다.(레12:2~3)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라는 상징 행위입니다.(출13:2)
포피를 칼로 베는 할례는 위험한 시술이기도 했습니다. 위생상 문제로 상처가 아물지 않아 죽을 수도 있고, 피 냄새를 맡은 들짐승의 공격을 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 할례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이어서, 할례를 받으면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기도 했습니다.(창34:24~25)
할례에는 고통과 위험을 통과해야 비로소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 녹아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관례를 치렀다 해서, 거룩해 지는 건 아닙니다. 사람은 할례같은 의식을 치르며 거룩해지는 게 아니라, 인생을 살아내며 거룩해집니다. 포대기 속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위험이 아니라, 두 발을 땅에 딛고 맨 가슴으로 맞이하는 고통과 위험을 겪으며 거룩해 집니다.
태어난 지 일주일이 겨우 지난 아기 예수에게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아기가 겪게 될 고통과 위험에 대해 예언합니다. 아기를 축복하며, 고통과 위험에 대해 말합니다.
“34시므온이 그들을 축복한 뒤에,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35-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눅2:34~35)
아기 예수는 장차 ‘비방을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 예언합니다. 아기를 축복하면서, 하는 말이 ‘비방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니요.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겐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것이라 ‘축복’합니다. 엄마 가슴에 칼이 박히고, 아기는 비방 받는 표징이 되는 것. 이것이 시므온이 베푼 ‘축복’이었습니다. 시므온의 축복은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처럼 들립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구별 안 되는 시므온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 로마 관료, 심지어 제자에게까지 ‘비방을 받는 표징’이 되셨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를 보아야 했습니다. 예수의 손목과 발목에 박힌 못은, 마리아의 마음에 박힌 ‘칼’이 되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를 향한 시므온의 예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유효합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고통과 위험이 있을 것입니다.(눅2:38)
‘구원’은 ‘속량’이라 번역되기도 합니다. ‘속량’이란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속량’이란 땅을 잃고 노예가 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땅을 차지하고 자유민이 되는 것입니다.(레25:47~55)
우리가 사는 땅에서 해방과 자유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 그저 흙뭉치로 사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사탄의 체제’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과 위험이 있습니다. ‘사탄의 체제’에 저항하며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려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위험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통과 위험을 피할 순 없습니다.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이 전하는 고통과 위험에 관한 예언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거짓이 아닙니다. ‘위로’를 기다리는 자가 예언한 ‘고통’과 ‘위험’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입니다.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이 ‘고통’과 ‘위험’을 예언한다는 것은, ‘성령의 지시’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지요.(눅2:25~26) ‘성령의 지시’를 따라 예언된 고통과 위험은 분명 있을 것입니다. 닥칠 것입니다. 구원을 바라는 자에게 닥칠 고통과 위험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피할 순 없을까요.
“아기는 자라나면서 튼튼해지고, 지혜로 가득 차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 하였다.” 다른 번역으로 한 번 더 읽겠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2:40)
고통과 위험을 피할 순 없습니다.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와 은혜로 고통과 위험을 이기게 하십니다. 예수께선 고통과 위험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라며 강하여 지고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고통을 이길 만큼 강해지고, 위험을 극복할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고통과 위험을 피할 순 없지만, 제압할 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위’에 있어, 고통과 위험을 견딜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궁핍’과 ‘비천’과 ‘배고픔’이 있어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빌4:11~13) 하나님은, 내가 능력 있는 존재가 되길 기대하십니다. 궁핍과 비천과 배고픔을 이길만한 능력을 주십니다. 능력 있는 존재여서 고통과 위험을 제압하고 거룩하길 원하십니다.
능력은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빌4:12) 풍족한 자는 손을 펼 줄 알고, 가난한 자는 손을 벌릴 줄 아는 게 능력입니다. 풍족한 자는 미안해하고, 가난해도 당당한 게 능력입니다. 풍족한 자는 절제하고, 가난한 자는 인내하는 게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능력으로 인생 중 고통과 위험을 이기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관례는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못합니다. 인생이 사람을 거룩하게 합니다. 인생 속 고통과 위험과 궁핍과 비천과 배고픔을 통과하며, 사람은 포피가 아니라 마음을 베며 거룩해집니다.
고통과 위험, 잘 지나오셨습니다. 또, 고통과 위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처럼 고통과 위험을 통과하며, 우리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