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光庭(1552-1627)이 홍세공의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전 생애와
활동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글.
2권 1책의 문집전체 분량에 비해서 양이 많은 편이고
내용 역시 여타 부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눈에 띤다. 그 중 중요한 부분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어려서부터 비범했던 그의 재능과 활동은 국가적 위기였던
임진왜란 시기에 크게 발휘되었다.
왜란 직전 그는 江界府使로 있었는데‚
당시 강계에 유배 중이던 鄭澈이 유배지를 이탈하여 大駕를
호위하려하자 ‘舊規를 어기는 것’이라 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가 위기에서도 원칙을 지켰다고 평가하여
호조참의로 서용하여 明軍에 대한 군량공급의 大任을 맡겼다.
그는 1592년 7월 調度使로서 평안도 熙川·運山·博川 등지에서
569석의 군량을 마련하였고 이후 平安道巡察御使가 되어
列邑을 순행하면서 募兵과 調食에 진력하였다.
1593년에는 평양성 패전 이후에도 함경도에 남아 있던
加藤淸正 휘하의 왜군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고
다시 關北지방을 순행하면서 기민을 구제하여 백성들을 安集하
는데 힘썼다. 또 관북지방의 무기와 城池 등이 형편 없는
상황으로 방어대책이 제대로 구비되지 않은 것을 중시하고
조정에 대비책을 촉구하였다. 또 전란 중에 공을 세우거나
백성들을 학대한 수령의 功過를 기록하여
그에 합당한 상벌을 내릴 것을 촉구하였다.
1593년 6월 전주부윤을 거쳐
1594년에는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그해 9월 대기근으로 ‘
人相食’의 지경에 이르러 도적이 크게 일어나자
그들의 소굴을 불태우고 그를 진압하였다.
1595년 당시 남원에는 劉綎이 지휘하는 명군이 수천명이나
주둔해 있었다. 또 명나라가 豊臣秀吉을 日本國王으로 봉하면서
일본에 다녀온 李宗城‚ 楊方亨 등 명나라의 고위사신들이
전라도에 들어왔다. 따라서 이들을 접대하고 뒷바라지하는 것이
큰 일이었을 뿐 아니라 이들과 연관하여 왕래하는 使節 등에
대한 送迎의 비용이 엄청나서 민들이 대거 離散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조정에 대해 민들의 逋欠을 견감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이를 관철하여 민들을 어느 정도는 安集시켰다.
전라도 지역의 방어태세를 강화하기위해 關防을 설치하고
蟾津江·八良峙·六十峙 등의 요해처에 장수를 선발해 배치했다. 또 전통적으로 심했던 이 지역 土豪들의 武斷행위를 근절시키고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수령들을 도태시켰다.
1596년 조정으로 돌아와 右副承旨를 거쳐 다시 평안도조도사가
되었다. 당시 각지에 왜군의 패잔병들이 屯聚하여
약탈을 일삼고 도로를 막아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單身으로 임지로 부임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명군이 다시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조정은 그에게 명군에 대한 군량 보급의
임무를 전담시켰는데
그는 동분서주하면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病死하였으니
향년 58세였다.
죽어서 그는 長湍의 선영에 묻혔고
왜란 직후인 1600년 조정은 그의 ‘竭心奉公’을 인정하여
이조참판으로 추증하였고
1607년에는 唐城府院君으로 봉작되고 領議政兼世子師로
다시 추증되었다. 그는 宏厚한 인품에 孝友忠直하였고
대인관계에서 상대의 善·不善에 따라 好惡가 분명하였다.
그가 전주부윤으로 있고 李廷馣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그는 이정암에게 워낙 예의를 엄격히 갖추어
이정암이 그를 말릴 정도였다.
그런데 후일 그가 전라감사가 되고 이정암이 전주부윤이 되었을
때 이정암이 예의상 다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자
그는 가차없이 이정암의 태만을 힐책하였다고 한다.
왜란 당시 북부지방에서의 그의 역할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고
‘평안도에서는 이원익을 그리워하고
남방에서는 홍세공을 못잊는다,(西路思元翼 南方憶世恭)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신망이 깊었다.
그의 부인은 高靈朴氏 壽春의 딸이었는데 왜란 중
咸興의 山中에서 왜적에게 항거하다가 죽었고
후에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