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고개역 1번 출구는 혼돈(混沌)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길의 출발점이라 할만하다. 그곳을 출발하여 남산 정상까지 가는 길은 아물지 않은 역사의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서울의 여러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게 하여 준다. 길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남산 정상은 길의 끝인 동시에 혼돈(混沌)의 속살을 더듬어 들어가는 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남산 정상 턱 밑까지 올라오는 노란색 버스는 나무 터널 사이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은, 꽃이 만발한 늦봄이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흐린 날 버스를 타면, 아주 잠깐이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봉수대 서쪽 바로 밑까지 올라오는 케이블카는 공중에서 서울 도심의 장관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얼마 전에는 아래 쪽 케이블카 승강장 바로 옆에 ‘남산 오르미 승강장’이라는 곳이 문을 열었다. 오르미는 남산 2호 터널 북쪽 출입구와 케이블카 승강장을 이어주는 경사 엘리베이터이다. 오르미를 타면 대연각 빌딩과 그 너머 명동 초입의 다양한 건물들을 내려다보면서 짧은 시간에 힘들이지 않고 무료로 남산을 오르내릴 수 있다.
걸어서 남산을 하산하는 여러 갈래 길들은 제각각 풍경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6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서울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눈썰미 있는 하산 객이라면 그 길들에서 쓰라린 상처들을 한 번 더 만나게 될 것이다.
[신궁(神宮)]
조선신궁 올라가는 계단 조선신궁 올라가는 계단, 지금의 모습
조선신궁 신궁과 식물원 터
봉수대에서 케이블카 승강장을 오른쪽으로 지나치면서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 안중근 기념관이 있는 광장을 만나게 된다. 이 광장에 남산 식물원이 있었고, 서울역 쪽에서 올라오는 계단은 지금도 남아있다. 남산 식물원 앞에서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모습은 20세기 대한 ‘뉘우스’를 장식하는 첫 화면으로 종종 사용되었고, 계단에 걸터앉아 네온사인이 명멸하는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장면은 20세기 한국 멜로영화나 청춘영화의 단골 장면이었다. 그 남산 식물원이 있던 자리는 1925년에 조선신궁이 세워졌던 자리다. 그 자리에서 서울역 쪽으로 난 계단은 서울역이나 숭례문에서 조선신궁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신궁 터 앞 광장에 만들어진 안의사 광장. 기념관은 공사 중
조선 신궁 아래 광장. 지금 그곳에는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조선신궁(朝鮮神宮)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부의 남산에 세워졌던 신사(神社)이다. 신사는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의 신성 공간이다. 조선신궁에는 일본 건국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이 모셔졌었다고 한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위패를 모신다는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와 비교해보면 이 신궁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겠다. 신궁이 세워졌으므로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었던 조선의 민간 신앙의 신들을 모시던 국사당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0년대에는 일제가 조선인에게 이른바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고, 이를 거부한 조선의 종교인은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해방 후 조선신궁 자리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계단 아래 광장에는 이시영 선생과 김구 선생의 동상이 모셔졌다. 역사적 상처의 치유책이었을 것이다.
[비(碑)]
한양공원 비석 앞면 한양공원 비석 뒷면
신궁 올라가는 계단은 20세기 초에 유명해졌지만, 회현동 아파트 단지 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20세기 말에 유명해졌다. 그 계단에는 ‘[내 이름은 김삼순] 마지막 장면 촬영 장소’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그 계단을 내려서서 횡단보도를 건넌 후 케이블카 승강장 쪽으로 조금 걸으면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 쓰여 진 비석이 있다. 비석 앞면 글씨는 대한제국 황제의 친필이다. 1905년 을사 늑약 후 일제는 남산 일대 일본인의 집단거주지와 통감부 주변에 공원을 조성하였는데, 그 때 허울뿐인 대한제국 황제에게 공원 이름을 새길 비석의 글씨를 청하였으니 황제가 그 글씨를 기꺼운 마음으로 쓰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도 명필이라 할 만한 비석의 앞면 글씨를 보고, 비석의 뒤로 돌아 가보면, 어이없게도 새겨진 내용들이 모두 훼손된 것을 볼 수 있다. 해방 후 그 비석 뒷면에 자기 이름이 올라있는 것을 숨기려고 누군가가 훼손한 것일까? 이러한 추측이 맞다면 그런 짓을 한 사람은 대단히 기회주의적인 자일 것이다.
오르미라는 이름보다는 오르내리미라는 이름이 적절할 듯
한양공원 비석을 뒤로 하고, 남산 오르미 승강장과 케이블카 승강장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길 건너 산비탈에 반공 건국 청년 운동 기념비가 서 있다. 1945년에서 1953년 사이에 군인도 경찰도 아닌 신분으로 ‘빨갱이’와 싸우다 목숨을 잃은 17,274명의 위패가 모셔진 비석이다. 비석에는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 라고 적혀있는데 ‘조국에’ 부분은 하얀 색이 입혀져 있다.
[묘(廟)]
비석을 뒤로 하고 남산 산책로에 올라선 후 국립극장 있는 동쪽 방향으로 걷다보면 인왕과 북악이 내려다보는 계곡에 와룡묘(臥龍廟)가 있다. 와룡묘 경내에는 제갈량과 관우를 모신 와룡묘와 단군을 모신 단군성전, 산신 칠성 독성을 모신 삼성각이 있다. 중국 민간 신앙의 신격과 한국 고유 민간 신앙의 신격을 한 곳에 모신 독특한 신성 공간이다.
내목신사 돌물그릇 '손 씼으시는 집 한 채'
와룡묘 동쪽으로 산책로를 따라 조금 더 걷다가 ‘서울특별시 균형발전본부’ 안내 팻말을 따라 노란색의 리라 아트 고등학교 건물을 왼쪽에 두면서 걸어 내려가면, 길이 끝나는 곳 오른쪽에 남산원이 있다. 남산원 입구에는 러일전쟁에서 활약한 일본의 장군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1849~1912]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내목신사(乃木神社)의 흔적이 있다. 신사 들어가기 전에 손 씻는 곳에 놓여있던 돌물그릇, 조각물의 받침대, 건물의 일부였던 석물들이 남산원 입구에 놓여있다.
와룡묘
느티나무 아래 돌판 두 장
남작 임권조 군 상. 2007년 초여름에 촬영한 사진.
내목신사 유물들을 뒤로 하고 리라 아트 고등학교를 나와서 오른쪽의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동랑예술센터, 남산빌딩, 한양 스튜디오를 지나 서울특별시 소방방재센터와 교통방송 사이의 주차공간을 가로질러 건너면, 두 그루의 거목이 지키고 서 있는 유스호스텔 진입로가 보인다. 오른쪽 나무로 다가가 보면, 넓고 얇은 돌판 두 장이 깔려있다. 그 돌판들 가운데 한 장에는 ‘남작 임권조 군 상(男爵 林權助 君 像)’ 이라고 새겨져 있다.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1860~1939]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을 성사시킨 공으로 1907년 남작작위를 받은 일본의 외교관이다. 지나쳐온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가 통감부 터이고, 그 뒤는 러일전쟁 승장을 기리는 내목신사 터이니 하야시 남작 상은 아마 그 어디엔가 있었을 것이다.
그 지역은 1961년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 이후 김종필 중령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할 때 본부로 사용하였던 바라크(막사,幕舍)들이 있었던 곳이다. 하야시 남작 상 관련 유물들이 있는 거목 옆의 계단을 따라 산을 오를 때 주위에 보이는 건물들이 대개 중앙정보부가 사용하였던 건물이라고 한다.
[사정(射亭)]
산길로 중앙정보부 터를 가로질러 ‘TBS 방송국’ 이라는 팻말이 있는 지점에서 남산 산책로로 다시 접어들어 국립극장을 향하여 가되 지름길로 접어들지 않고 긴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면 활터인 석호정(石虎亭)이 나온다. 석호정은 조선조 인조 때인 서기 1630년경 세워진 활터이다. 국립극장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활 쏘는 곳 앞에 ‘습사무언(習射無言)’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돌이 놓여 있었다. 도를 연마하는 자는 말을 아끼는 법. 역사는 역사일 뿐 되뇌이며 곱씹지 말아야 하나?
석호정 현판
'습사무언', 솔밭, 과녁
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은 소나무 숲 너머 과녁이 서 있다. 지나간 한 세기 동안 남산에 새겨진 상처들을 계속 만나게 되는 이 길의 끝에서 사계절 푸르고 조용한 석호정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작지 않은 위안이 된다.
* 조선신궁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은 일본의 출판사 国書刊行会에서 펴낸 『目でみる昔日の朝鮮(Old Days of Korea through Pictures)』에 실려있는 것들이다.
글/사진 이유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