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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약 7년 전에 설교한 창세기를 곽 집사님이 문단을 정리하고 설교 제목에 페이지를 붙이는 수고를 하셨습니다.
01. 빛이 있으라-1페이지
02. 보시기에 좋았더라-4페이지
03. 안식-7페이지
04. 사람됨-10페이지
05. 유혹-13페이지
06. 찾아오시는 하나님-16페이지
07. 죄의 소원-19페이지
08. 가인의 후손-22페이지
09. 하나님과 동행-23페이지
10. 죄악의 관영-25페이지
11. 방주에 있던 자만-28페이지
12. 하나님의 권념-31페이지
13. 언약-34페이지
14. 덮어줌의 은혜-37페이지
15. 영걸-40페이지
16. 바벨탑-43페이지
17. 택한 백성-46페이지
18. 복의 사람-49페이지
19. 애굽으로 간 아브람-52페이지
20. 다시 가나안으로-56페이지
21. 십일조-59페이지
22. 아브람의 상급-62페이지
23. 언약체결-65페이지
24. 이스마엘-68페이지
25. 전능하신 하나님-71페이지
26. 나그네 대접-74페이지
27. 웃음-77페이지
28. 아브라함의 기도-80페이지
29. 농담으로 여긴 사람들-83페이지
30. 롯의 처를 기억하라-86페이지
31. 아브라함과 아비멜렉-89페이지
32. 분리-92페이지
33. 브엘세바-95페이지
34. 여호와 이레-99페이지
35. 사라의 죽음-102페이지
36. 이삭의 결혼-105페이지
37. 아브라함의 죽음-108페이지
38. 선택-111페이지
39. 장자 만들기-114페이지
40. 이삭-117페이지
41. 이삭의 축복-120페이지
42. 벧엘-123페이지
43. 서원-127페이지
44. 우물가에서-130페이지
45. 총이 없음-133페이지
46. 경쟁-136페이지
47. 야곱과 하란-139페이지
48. 돌아가라-142페이지
49. 얍복 나루에서-146페이지
50. 얍복강 이후-149페이지
51. 다시 벧엘로-152페이지
52. 야곱의 허리-155페이지
53. 야곱의 복-158페이지
54. 라헬의 묘-161페이지
55. 에서의 형통-164페이지
56. 요셉의 꿈-167페이지
57. 유다와 다말-170페이지
58. 요셉의 형통-173페이지
59. 하나님의 섭리-176페이지
60. 죄를 깨닫게 함-179페이지
61. 유다의 희생-182페이지
62. 자신을 알리는 요셉-185페이지
63. 애굽으로 간 요셉-188페이지
64. 야곱의 유언-191페이지
65. 야곱의 예언(1)-194페이지
66. 야곱의 예언(2)-198페이지
67. 유다-201페이지
68. 야곱의 죽음-204페이지
69. 요셉의 죽음-207페이지
이장우 목사
창세기 1:1-5 “빛이 있으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무엇으로 창조 하셨습니까? ‘말씀’ 성경은 누구의 말씀 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너무 쉬운 질문을 하였지요? 이제 조금 어려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말씀의 능력’ 한 가지만 더 질문 합니다. 교회는 어떻게 유지됩니까? ‘말씀의 능력’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이라든가 교회유지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힘으로 되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이고 거대한 건물이 있더라도 무늬만 교회일 뿐이지 내용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창조 사건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원래 있던 빛이 나타났습니까? 원래 없던 빛이 말씀의 능력으로 만들어 졌습니까? 이것을 무에서 유로의 창조다 그러지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만이 가득한 곳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그 말씀의 능력으로 빛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어떻습니까? 이미 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의 능력이 있기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만 말씀으로 창조 하시고 지금은 팔장끼고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창조를 하고 계십니까? 처음 창조한 것이 인간의 범죄로 뒤틀려 졌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재창조의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재 창조의 작업으로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믿음’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믿음을 자꾸만 자기가 믿어 준 것을 믿음이라고 우깁니다. 만약 믿음이 사람이 믿어 주었기에 믿음이 생겼다면 그럼 믿음은 인간의 신념의 산물이지 하나님의 선물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믿음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셨지요? 그때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무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순종해서 살아났습니까? 아니지요. 죽은 자가 무슨 수로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주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살려내신 것이지요! 윤형주씨가 작사 작곡한 복음성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바디메오가 눈을 떴다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네. 예수님 예수님 나에게도 말씀 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 시켜 주세요.
말씀의 능력이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것도 말씀을 통하여 만나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의 사람 되는 것도 주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교회 역시 사람들은 사람들이 세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동기 목사들도 개척을 하기도 하고 개척을 준비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개척할 때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일 큰 문제가 돈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한 장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세울 수 있다면 모양은 교회 흉내를 낼 수 있어도 내용은 아닙니다. 교회란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 값으로 사서 세운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특정 건물이나 사람의 조직이 아니라 바로 예수 믿는 여러분이 교회요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를 누가 세울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하여 피 흘렸습니까? 목사입니까? 이 교회 개척멤버 입니까? 혹시 사람이 피를 흘리고 땀을 흘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교회를 세우시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 달리 그 말씀이 이루어 내시는 것이기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도 창조력이 있어서 자동차도 비행기도 만들어 내지 않느냐고 말하지요?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 무에서 유의 창조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신념을 가지고 커다란 계획을 가지고 과학을 발달시키면서 인류를 더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수록 인류는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발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이제는 발전이란 개념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발전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 인류의 현실입니다. 끊임없이 더 좋은 차, 가전제품, 생필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으니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가 내리막길로 달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라는 유대인 랍비는 수렁에 빠진 황새에 비유합니다. 수렁에 발이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황새가 꾀를 내었습니다. 자신의 긴 부리를 땅에 박고서 발을 빼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걸 어쩝니까? 발은 빠져 나왔지만 부리가 수렁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미래는 이와 같습니다. 모두가 무너질 바벨탑을 열심히 열심히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관심 있게 보아야 하고 그 약속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온천지는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을 알고 있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성경의 끝을 잠시 보면서 말씀이 왜 이다지도 중요하며 왜 말씀대로만 되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계시록 18:1-4절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 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주의 말씀으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세상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방향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이란 고아와 과부를 환난 가운데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왔습니다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나오시는 분의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알고 우리도 그의 말씀에 함께 참예하는 것입니다.
이제 빛이 있으라는 그 말씀의 위력이 단지 천지를 창조하신 것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역사하는 말씀인줄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내가 그래도 뭔가 믿음의 뒷받침을 해야지 하는 분을 위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면 기부터 먼저 죽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오기는 아브라함의 영웅적인 믿음만을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시자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그리고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다 이런 식의 아브라함만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자 그럽니다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가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지 사람의 영웅적인 결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 당장 나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안 떠나고 버틸 수 가 있겠습니까?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능력이 아브라함을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25년의 수많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직접 목격하고서야 아들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이루어 낸 것을 보고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 안 믿어집니까?
로마서 4:1-3, 17을 봅시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게 하십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더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 아닙니까? 우리는 믿음이 없는데 믿음의 사람으로 불러 주시니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결심과 의지를 믿는 것이 아니지요?
이러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 한 곳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아 거의 외우는 말씀인데 사도행전1: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을 가지고 대부분 표어를 삼는데 증인이 되자 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기에 증인이 되기 싫어도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유대인들에게만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복음이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 넘어가리라는 주의 약속이 지연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가하여 흩어지게 하심으로 사마리아와 이방인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가 사도행전입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전하였지만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도록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시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따라 가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시자 마지못해 나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의 역사가 바로 주님께서 사도행전 1:8에 말씀하신 그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보면 볼수록 처음에는 내가 말씀을 보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말씀이 말씀을 당깁니다. 그리고는 말씀이 나를 삼켜버리는 것이지요. 마치 술 먹는 사람들 이야기 비슷합니다. 이제 우리가 말씀에 취할 때입니다. 계시록 1:3절에는 때가 가깝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더욱 주의 말씀의 능력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 8:11-13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오늘 우리의 목마름과 배고픔이 양식과 물이 아니라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심을 믿으시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하듯이 우리의 심령이 주의 말씀을 갈급해 하는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한곳 더 찾아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4:12-13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의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이 살아있어 운동한다고 합니다. 어떤 살아있는 운동을 합니까?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예리한 칼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의 칼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온갖 죄악들이 말씀의 검으로 도려내져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 아프고 때로는 분노가 일어 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염려는 마십시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주의 말씀의 능력이 그러한 것도 넉넉히 이기게 하셔서 주님을 찬양케 될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창세기 1:6-31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몇 번이나 나왔지요? 여섯 번입니다. 1:4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까지 합하면 창세기 1장에 7번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나셔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창조세계에 잘 나타났기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도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자기 뜻대로 되었을 때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을 만들어 놓은 것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의 차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편을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만들어 내는 것은 결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만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인이기에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만들어 내어도 거기에는 반드시 좋지 않는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법으로 농사지은 제품을 찾고 있습니다. 워낙 인위적인 농산물이 많이 나오니까 무엇이 제철에 나오는 것인지 농사짓는 사람도 모를 지경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농부들이 어떻게 하든지 농산물의 희소가치를 높여서 가격을 높게 받으려고 비닐하우스를 하고 인위적으로 농산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야! 좋다 이제 비싸게 물건을 팔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품이 모양과 빛과 맛은 낼 수 있어도 제철에 자연 상태에서 나온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요. 심지어 덜 익은 과일을 먹으면 배탈이 나듯이 겉모양은 익은 것 같더라도 속은 억지로 마지못해 온도와 열을 받아 만들어 졌기에 덜 익은 과일에서 나오는 독소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들이 자연 그대로의 식품이 좋은 것인 줄 알고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사람과 계약을 하여 농약 치지 않고 농사를 짓게 합니다. 그래서 소출이 적고 비싸더라도 자연 그대로의 식품을 좋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농산물뿐만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이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내신 것이 보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중심으로 증거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만드실 때에 사람과 의논하셨습니까? 아니지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의논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신적 작정이라고 말합니다. 천상의 회의를 할 때에 누가 하나님의 창조에 보탬을 주었습니까? 오직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세상을 선물로 받았을 뿐입니다. 만약 사람이 공기를 돈을 주고 사서 마신다면 얼마를 주어야 할까요? 1분에 얼마를 받으면 적당할까요? 1분에 1억이라도 정말 공기를 사서 마셔야 한다면 1분을 살기위해서 공기를 사야지요? 그러면 저는 0.1초 분량의 공기도 살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100억대의 재산이 있어도 겨우 100분 동안만 살 수 있지요? 그런데도 인생이 얼마나 교만한지 하나님의 창조를 우습게 여기며 감사치 않고 있는 자들이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지요? 출애굽 때처럼 얼마든지 구별하여 재앙을 내리듯이 비도 구별하여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렇게 크시니까 사람들은 으레히 있는 것처럼 당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공기뿐입니까?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런 좋은 세상에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좋지 않은 것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만들어 놓으신 것을 사람이 망쳐 버린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을 보십시오. 도대체 선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은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쪽으로 무엇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발전이라고 하지만 발전이 좋은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좋음과 인간의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낸 것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좋아 합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을 좋아합니까?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을 좋아합니까?
우리의 원망과 불평의 거의 전부가 무엇 없음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선한 것 없어서 안타까워하십니까?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 없어서 안타까워합니까? 거의 후자일 것입니다. 냉장고 세탁기 없을 때는 그것만 있으면 행복할텐데 하였지만 냉장고 세탁기 사들이는 순간 소니제품이 나오니 어제까지 좋던 것이 오늘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의 선함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 사실 인간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지금 새벽기도회때 산상설교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누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하여 마음이 애통하며,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철야기도, 금식기도 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기도원에서 구국 기도회 하는 곳 많지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회 보았습니까? I.M.F 극복 기도회는 보았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 보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을 좋아 하는지 아십니까?
세상은 그렇다 해도 교회는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만들어 놓았으니 교회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만으로 감사하고, 좋아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교회마저 하나님의 솜씨를 좋아하기 보다는 사람의 솜씨를 좋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신 것 창조의 모든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이 당연 할뿐 아니라, 주의 피로 재창조하심으로 주시는 영생, 죄사함, 하나님의 자녀, 그러므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 이러한 것에 대하여 정말 감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꾸만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엄청난 일보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자꾸만 하나님의 일처럼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어떻게 구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배당을 크고 멋있게 짓는 일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주시는 일은 누가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 안에서 조차 이런 구분이 안되어 있기에 사람의 일을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자꾸만 독려를 합니다. 하나님의 일 하자고 외치는 그 일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일이 아니라 얼마든지 사람의 힘만으로 가능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우기면 안되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떠한 것에도 하나님의 선이 유지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정리가 좀 되십니까? 정리 보다는 혼돈이 더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한 곳 찾아봅시다. 출 20:25 “네가 네게 돌로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돌단을 쌓을 경우 그 돌을 정으로 다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듬으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로 단을 쌓을 때 다듬으면 쌓기도 쉽고 보기도 좋을 텐데 다듬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왕궁에 가보면 얼마나 많은 돌을 잘 다듬어 바닥에도 깔고 층계도 만들어 놓았습니까? 석굴암도 돌로 다듬어 만든 것이지요? 이처럼 돌로 다듬어 세우면 견고하고 멋있고 위엄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왕적인 권위가 드러나고 종교적인 제단에는 사람의 현란한 기술이 동원되어 그들이 섬기는 신적 권위를 높이는 일에 동원됩니다. 물론 성경에도 성막을 만들 때 솜씨 좋은 사람이 주의 신의 능력을 입어 성막도 성전도 짓습니다만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인위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베드로 대성당 같은 거대한 건물을 만들면서 무엇을 팔았습니까? 면죄부를 팔았지요? 헌금 한 것만큼 죄가 용서받는 다는 것 이지요 예수님의 속죄를 돈 주고 사려고 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건축헌금 하면 복받는다는 말과 꼭 같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루어 놓으신 것을 사람이 얼마나 망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화랑에 가면 작품 밑에 무어라고 써놓았습니까?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손대면 망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깨끗이 세탁하여 다리고 있는데 아이가 흙 묻은 손으로 거들어 줄려면 뭐라고 하십니까? 가만히 좀 있어라 가만히 있는 것이 돕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은혜가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은혜란 너무나 생소한 것입니다.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 하지 아니합니다. 도대체 날 뭘로 보고.. 자존심 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주님으로 받고만 사는 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한량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자꾸만 다듬어 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만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선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거칩니다. 사형 형틀입니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입니다. 미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무슨 수로 포장을 하겠습니까? 이것도 찾고 저것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붙들든지, 아니면 적당하게 각색하고 다듬어서 사람의 솜씨와 사람의 영광도 함께 드러내 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끝으로 예화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현주 목사라는 글 쓰는 분의 책에 다듬지 말라는 이 말씀을 하면서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를 실어 놓았던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충청남도 아산에 학이 많이 살고 있어서 학촌이라는 곳이 있답니다. 이곳에 박생원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이들이 알에서 갓 태어난 새끼학을 소나무 둥지에서 꺼내 와서는 놀고 있는 것을 보고 학은 귀한 생물이라고 호통을 치면서 도로 올려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울상을 하면서 벌써 죽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니 정말 죽은 것입니다. 어린 새끼를 주물렀으니 죽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죽은 새끼라도 올려놓으라고 하였는데 그 다음날 아이들이 왁자해서 내다보니 그 학 새끼가 살아났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직접 둥지에 가보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죽은 새가 다시 살아나다니 하면서 그 둥지를 살펴보니 그 둥지 바닥에 주먹만한 돌이 있었죠. 죽은 새가 저절로 살아 날리는 없고 아마 이 돌에 신통력이 있을꺼야 하고 돌을 꺼내 와서는 서울에 사는 자신의 친척 박승지에게 건네주었고, 박승지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넓은 땅이니 이 돌을 알아 볼 자도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들고 갔죠?
죽은 학을 살린 돌이 조선에서 왔다는 소문을 듣고 어떤 상인 두 사람이 왔는데 돌을 보자는 겁니다. 보고서는 참으로 귀한 물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돌이오? 천년에 한번 날까 말까하는 돌인데 서해 유사 지경에서 가끔 나오는데 죽은 자도 가슴에 이 돌을 품어두면 살아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환혼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금을 주고도 못사는 것이랍니다. 천금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하여 천금을 주시겠소 그러자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하면서 몇 일만 말미를 주면 돈을 장만해 오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몇 일 동안 무료하게 있는데 도대체 이 돌이 무엇인데 천금이나 하는가 하여 보자기에 싸 두었던 돌을 구경이나 하려고 꺼내어 보았는데 새똥도 묻어 있고 지저분하였지요. 그래서 이 박승지가 그 더러운 것을 깨끗이 닦아 내기 시작 하였겠죠? 몇 일을 정성끗 곱게 곱게 닦다보니 드디어 깨끗하게 반질반질 빛이 나는 것입니다.
드디어 약속한 날짜에 그 상인이 와서는 그 돌을 달라고 합니다. 천금을 마련하여 왔지요. 그래서 돌을 꺼내는 순간 낯빛이 어두어지면서 소리를 질렀지요. 허어 이거 큰일이로군. 아니 왜 그러시오? 누가 이렇게 반질반질 닦아놓았소? 그야 나지요. 이제 이 돌은 환혼석이 아니오. 참으로 귀한 보물을 못쓰게 만들어 놓았구려 하면서 돌아갔고 이제 자신의 손때로 정기를 잃어버린 환혼석만 물끄러미 내려다 봤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아직도 아산땅 학마을에 남겨져 떠돌고 있답니다.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 이지만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조금의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가 만들어 낸 것보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더욱 풍성히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홀로 이루어 내셨기에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은 상태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다고 하실 곳은 한 곳 뿐입니다. 주님 홀로 십자가 지고 가시면서 이루어 내신 그 십자가의 사건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좋다는 평가를 받는 길이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있는 길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 주님의 십자가 그늘에서 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1-3 “안식”
안식이 무엇입니까? 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신 이유는 힘들어서 쉬었겠습니까? 아니겠지요.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죠? 하나님께서 실수 없이 잘 만드셨기에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시기에 그 창조 세계가 보시기에 선한 것입니다. 좋더라는 표현이 그냥 눈으로 보기에 좋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힘이 들어서 쉬신 것이 아니라 더 손될 것이 없도록 완성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완성된 상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기에 이 날을 복주고 거룩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날을 나중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제 4계명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안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율법으로 받아 자신들이 법조문처럼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창조의 완성된 그 안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날 지키는 일에만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도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안식교인 들이지요? 이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들 끼리 모여서 삼육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까지 만들어 토요일은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무엇을 보여 주는지를 모르고 아직도 그림자인 날짜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교인만 날을 붙들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 외의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인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믿고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일성수 한다니까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에서 어떤 전도지를 만들었는가 하면, 교회사 역사 중에서 로마 황제가 태양 숭배하는 날을 예배하는 날로 바꾸었기에 주일을 지키는 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이방신의 날이다 하면서 교회사 몇 페이지 하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평생 훈련받은 것이 주일성수 십일조만 하면 예수 믿는 것이고 천국 가는 것처럼 배웠으니 이들의 말에 현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모입니까? 날마다 모이죠? 그래서 모이기를 힘쓰는 것이지요. 이 말을 전에 청년회에서 하였는데 마침 그 주에 친구집에 갔는데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주일을 지키는 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날인데 당신은 무슨 날 지키느냐고 해서 나는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언제 모이느냐고 해서 초대교회처럼 날마다 모인다고 하였더니 그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하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기 보다는 자기가 지키는 날짜를 붙들다 보니 이런 이단들 앞에 말 한마디 제대로 대답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안식과 우리로 하여금 안식하라신 그 뜻을 성경에서 찾아보고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창세기에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사람들에게도 안식케 하신 이유는 노동을 그치고 쉬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신의 활동에 둡니다. 그래서 활동을 잘하면 제대로 된 인간으로 여기지만, 활동을 못하는 식물인간은 인간 대접을 잘 못받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엿새는 일하고 7일째는 쉬라고 하신 것은 쉼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근거가 자신들의 노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에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창조 하실 때 사람의 손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그 상태, 보시기에 좋으신 그 상태를 쉼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식일이 앞으로 어떻게 영원한 안식으로 올 것인지를 나타내는 안식입니다. 이 안식일이 율법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이미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의 안식이 방해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일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안식에서 이제 재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시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안식이 구원의 안식으로 발전하고 있음이 이미 구약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8-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창조를 말씀하면서 안식일을 쉬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5장 12-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15절) 이 말씀은 애굽에서 구원 받았음을 인하여 안식일을 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창조와 구원 모두가 사람의 노동과 상관없이 주어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도 우리가 그 선하신 분의 일하심으로 받는 것처럼, 구원도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이 구원하였다는 것이 사람의 일함이 아니라는 뜻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의 날 지킴을 통하여 앞으로 참된 안식을 주러 오실 분을 내다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오히려 안식일 날 지킨다고 참된 안식의 주인을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에서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안식일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이기에 이제는 날과 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왜 날과 달과 안식일지킴이 아닌지를 신약 두 곳의 말씀만 찾아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10-11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하노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나서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라 하니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바울이 수고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데 그 십자가의 능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것이지요?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림자의 역할은 실체가 옴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림자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시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날에 붙들려 있는지, 일요일 낮예배는 많이 오면서 밤과 수요일은 등한시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는 날을 정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날마다 모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법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의 교제가 좋아서 모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날짜를 지키기 위한 모임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 하신 것은 누구를 위한 안식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안식을 먼저 생각하시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안식을 먼저 챙기시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구원도 내 중심의 구원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위한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최종적인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도 하나님의 안식에 우리가 동원되어짐으로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이 최종 목표가 되어 버리면 지금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올 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천사들이 열심히 우리집을 짓고 있다는 것을 보고 왔다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공력에 따라 평수가 결정된다고 하면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내신 것은 하나님의 안식하실 처소를 만드시기 위하여 구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손으로 직접 거처할 처소를 만드시는데 그 일을 위하여 구속하여 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좀 보신 분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처소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하신 말씀을 아실 것입니다. 이 처소도 우리가 거할 집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처소로 삼으신다는 말씀이 출애굽 직후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구속하여 내신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 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의 처소를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처소가 완성되면 하나님은 안식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 안식은 처음 창조의 안식과 달리 영원한 안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안식 역시 힘들어서 쉬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재창조가 하나님의 손으로 온전하게 완전하게 마무리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재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주님의 처소가 다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계획안에는 완성되었으나 지금도 주의 처소를 찾아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를 신원해 달라고 요청하자 아직 순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 수가 다 차면 하나님의 처소가 완성되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에 동원된 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9-22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거대한 건물을 연상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주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즉 성전이 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성될 때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 된 자라면 이 안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날짜를 지킴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안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안식을 얻지 못한 자는 이 세상에서도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4:11, 13절에 보면 밤낮 쉬지 못하는 자와 쉬는 자가 나옵니다. 주안에서 죽는 자는 쉼이 있는데 그렇지 못한 자는 쉼이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안식에 참여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안식을 선물로 받은 자는 이 안식의 소중함을 알고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보고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 4:1-11절 “함께 봉독”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 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창세기 2:4-25 사람됨
창세기 1장은 창조를 순서적으로 나타낸데 비하여 2장은 사람의 창조를 우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조의 마무리가 인간의 창조라는 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게 하시려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창세기 1장 26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이, 같은 흙으로 만든 동물과 새들과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됨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며 보살피는 것을 수행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람됨입니다.
이것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사람이 창조세계를 다스림을 통하여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피조물이기에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한 가지 기준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한가지의 법을 통하여 자신의 피조물됨을, 즉 사람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당합니까? 아니지요 지극히 당연하시고 마땅한 것입니다. 100가지를 금한들 안지키면 안되는 것이 지음받은 자의 자세이지요?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텐데 하는 말을 합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요? 그러한 생각은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죄된 속성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말씀은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상태가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뱀의 유혹을 받아 따 먹게 되지요? 이때 뱀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너도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셔야 하는 선악의 기준을 이제 사람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한 의미가 아니라 타락한 죄인으로서 선악의 체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불행의 시작입니다. 아니 선악을 알아서 잘 대처를 해야 하는데 왜 선악을 아는게 잘못 되었고 불행의 시작이라는 것입니까?
그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선과 악이 결정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사람의 입장에서 선악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됨이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름이 사람됨인데 이제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자기중심적인 선악체계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자기의 기쁨, 자기의 이익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내가 기쁘고 이익이 되면 선이고 나에게 손해가 오면 악인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선악체계가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창세기 3장에서 바로 증명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실 때 아담이 숨어 있다가 하나님께서 내가 먹지 말라한 것을 네가 먹었느냐? 물으실 때 아담이 뭐라고 합니까? 창세기 2장 23절에서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해놓고는 이 여자 때문에 따먹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이 여자가 내게 주어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진리관이 들어 나지요? 자신에게 손해가 오는 것을 악으로 여기고 그 책임을 하나님과 여자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는데도 똑같은 현상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니까 부인할 수 없는 아담의 후손인 것입니다. 아담만 그렇습니까? 하와도 꼭 같이 뱀에게 전가를 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잘되면 자기탓 못되면 조상탓 하는 것도 역시 선악과 따먹은 후손의 표시입니다. 그러면 자기탓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하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탓이라고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대부분 “그래 알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래!” 이러는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 더러워서 내 잘못이라고 해준다는 것이지요. 워낙 세상이 남의 탓만 하다가 보니 카토릭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차에다가 스티카를 붙여 다니는데 어디에 붙여야 내 탓이요가 됩니까? 운전적 앞에 붙여야지요 그래야 볼 때 마다 내탓이구나 할텐데 차유리 뒤에다 붙여 놓으니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됨에서 멀어진 그 값을 우리가 함께 주고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이익에 따라 선악을 결정하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하여 악을 행하면 자신의 선한 행위로 악을 상쇄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양심이다, 도덕이다, 인간의 이성이다 라고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이러한 선악의 구조를 사람들이 스스로 정하여 놓고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착한일 하면 복받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고, 나쁜 일 하면 벌받고 죽어서도 지옥에 간다고 모두가 말합니다. 전도를 해보면 거의다가 예수믿어서 천국가는게 아니라 자기 행위로 지옥도 천국도 간다고 말합니다. 이건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아이든 어른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실감이 안되면 전도를 해 보십시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 그러면 뭐라고 그래요 예수믿는 니나 잘해라 그러지요 니가 천당가면 나는 만당간다 그러지요 예수믿는 니보다 내가 양심 더 바로 쓰고 산다 내걱정말고 니 걱정이나 해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소리를 듣는 우리가 잘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보다 더 독하고 더 악착같고 사기꾼 거짓말쟁이가 많으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좁은 문 좁은 길이 되어야 합니다. 넓은 문 넓은 길로 자가용타고 쑥쑥 들어가는 그런 곳 말고 좀 수구려서 겨우 들어가는 그런 교회가 되면 사람이 좀 적게 올련지,,, 어떤 사람이 불고기 집과 교회의 공통점이 주차장이 넓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욕을 얻어 먹는 일은 우리가 회개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변하지 아니하는 사고방식, 내 죄는 내가 책임져야지 어떻게 남이 책임지느냐는 이 생각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어느 시골의 할머니가 짐을 이고 길을 가는데 경운기를 몰고 가든 아저씨가 할머니를 태워 주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할머니가 잘 타고 있는지 돌아보니 한 손으로는 경운기 난간을 붙들고 한손으로는 여전히 머리의 짐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짐을 내려놓으세요. 아이고 내가 탄 것만 해도 고마운데 짐까지 어떻게 내려놓는감.... 이게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이 선악의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피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인과율이라고도 하지요. 온통 세상이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에 은혜란 너무나 낯선 말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 은혜란 들어갈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뻔뻔스럽게 지옥갈 죄도 용서 받았다고 믿고 있으니 이게 세상의 윈리로는 불가능 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 선악을 책임지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체계로 가득 차 있으니 사람이 주님을 믿을 수가 없지요. 자기행위를 믿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다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많이 자신의 선악의 원리를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배를 빼먹고 어디 가다가 교통위반으로 순경에게 걸려서 딱지를 받게 되면 뭐라고 생각합니까? 예배 빼 먹었니 이랬구나 하는 생각 들지 않습니까? 어떤 손해가 오면 내가 뭘 잘못했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생각도 때로 유익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너무 농땡이 부렸더니 하나님이 손대시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생각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매사를 인과율로 계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여서 아무른 어려움 없이 지낸다면 어느 정도를 하여야 할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대로 갚으신다면 오늘도 우리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인과율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고 계산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노림수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차단하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선악의 기준을 따라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을 쌓아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한 예수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됨이란 자신의 선악체계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부터 자신의 행위를 믿지 아니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되므로 스스로 선과 악을 조율하여 살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단절, 이것이 죽음입니다. 물론 육신의 죽음도 죽음입니다만 더욱 심각한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라고 하십니다. 범죄의 결과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요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홍수로 온 세상이 심판아래 하나님께로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완성이 바로 새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됨이란 인간의 범죄로 단절되었으나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렘 31:31-34입니다. “봉독” 새 언약은 옛언약과 같지 아니합니다. 이제는 마음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언약은 죄를 사하되 그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는 그런 용서의 언약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흘리신 언약의 피입니다. 이 피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킴으로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창조된 자들은 이제 원래의 하나님의 사람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악의 체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이 욥기서입니다.
욥과 욥의 세 친구의 논쟁을 우리가 잘 압니다. 욥의 세 친구의 반박은 무엇입니까? 네가 죄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 받는다고 공격합니다. 우리가 욥기서를 보면 욥의 세 친구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을 만큼 논리 정연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의로와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가 없다 그러니 욥의 너의 시련은 죄 때문에 왔으니 회개하라. 그런데 욥은 나 죄 지은것 때문에 이런 재앙이 온 것이 아니다 라고 항변 하지요 그러니 욥을 보고 너 교만하다 그러면서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욥이 죄 때문에 고난 온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설명하시지 않고 다른 말로서 입을 막아 버립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욥이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간구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아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내려있는 선악체계가 뽑혀 나가고 주의 은혜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범사에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 나의 공로가 전혀 없도다 라는 진정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됨이 더욱 풍성해 지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3:1-8 유혹 1999. 8. 1
성경에 나타나는 최초의 유혹이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최초의 유혹이 어떻게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얼마나 교묘한 질문입니까? 분명히 금하신 것이 선악과 하나인데 모든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더냐 며 물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예 할 것은 예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하는데 여기서 지나치는 것이 악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예 아니요의 대답이 아니라 어중간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동산 나무 과실을 다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하셨다’라는 대답이 아니라 여운을 두는 것입니다. ‘죽을까 하노라’ 안죽을 수도 있을거라는 여운을 두는 겁니다. 이 틈새를 노리고 들어오지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면서 거짓 확신을 심어 주면서 왜 못 먹게 하였냐를 설명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기에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의 유혹도 꼭 이처럼 다가옵니다. 성경에 술먹지 말라는 말이 어디 있느냐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나는 술 취하도록 먹지는 않는다 하면서 자신의 술 먹는 것을 정당화 하지요 그러면서 성경을 좀 더 안다는 사람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을 가지고 약으로 쓰도 된다고 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것은 사실 자기 정당화의 방편으로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술을 즐기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잠언서를 한번 보셔야 됩니다. 잠언 23: 29-39 한번 읽어 봅시다.
31절에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미 술을 즐기는 자는 중독된 것입니다. 이런 자는 술을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보는 순간 그 유혹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유혹 보다는 더욱 심각한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내려는 유혹입니다. 사단의 유혹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려는 것이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과 대등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유혹의 본질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언제나 중심이 되고자 하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입니다. 어떤 모임에서도 사람들이 큰소리가 나는 것은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말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나이나 계급이나 힘에 눌려서 그렇게 못할 뿐이지 다른 사람에게 단 마음으로 순종하기란 사람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경우도 있고 무협소설 같은데서는 그것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것도 하나의 영웅아래 작은 영웅이 되는 것이기에 그 조직과 단체를 위하여 희생함으로 자신은 신으로 남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이 이미 우리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시작이 어떠합니까? 여자가 선악과를 보니, 보니까 유혹이 더 생기는 것입니다. 견물생심이라고 좋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면 유혹이 없을텐데 좋은 것을 보니 유혹이 더 생기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먼저 따먹고 남자에게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책임을 여자에게만 돌리는데 사실 책임이란 남자에게 있습니다. 그 대표가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타락을 아담의 타락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함께 있는 아담에게 주었지요. 함께 있으면서도 말리지 않은 것은 자기도 함께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이 결과 사람에게 모든 죄된 본능이 다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는 선악 체계에 대하여 말씀드렸지요? 인간의 범죄후의 선악의 기준은 자기에게 이익이면 선 손해이면 악,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이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여 행동함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사람에게 본능적인 욕망으로 자리 잡은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금요일 저녁에 세부적인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선악과를 본 첫째 느낌이 무엇입니까? 먹음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정욕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을 봅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첫째가 먹음직이지요. 이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먹어야 한다는 본능이지요. 이것은 비단 밥만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먹는다는 표현을 하지요 저속한 표현이지만 예쁜 여자를 보고 남자들이 뭐라고 하나요? 따 먹는다고 그러지요. 이것이 육신의 정욕적인 표현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다른 경쟁업체를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잡아먹어야 한다고 그러지요?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 먹음직한 유혹, 육신의 정욕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욕망 속에 살다가 한평생을 보냅니다. 이것을 경제적인 욕망이라고 합니다.
둘째가 어떤 유혹입니까? 보암직하지요. 이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일단 먹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죠. 배고픈데 무슨 금강산 입니까? 그러므로 경제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져야만 보암직한 것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치적인 욕망이라고 하는데 예술이 보암직한 행위이지요. 특히 순수예술을 하는 자는 더욱 자신의 예술 행위를 보암직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중이 인정을 하지 않아도 아직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자신의 예술성을 스스로 미화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국산 영화 치고는 아주 돈을 많이 들인 영화 가운데 ‘쉬리’와 ‘이재수의 난’이 있는데 전자는 한국영화의 신기록을 세우며 흥행에 성공하였고 후자는 흥행에는 참담한 실패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실패한 감독이 자신은 시장성을 염두에 두는 감독이 아니라 작가주의 감독이라면서 볼 줄 아는 자만 보라는 식입니다. 이러한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예술 뿐 아니라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정치활동은 철저하게 남을 위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보암직한 유혹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에서 봉사활동을 주업으로 하거나 사회사업을 하는 자들도 남을 위해 멋있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결국 사람들이 스스로 이루어 낸 업적들을 인하여 스스로들 보암직해 하면서 자화자찬하고 있는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한다는 우리 안에도 얼마든지 들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하는 줄도 모르고 그것이 주님의 일인 양 알고 행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은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다고 하는데도 자신의 정치적인 욕망에 붙들려 하는 것이지요. 이런 자를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일이야 많이 하였지요. 교회를 위해서도, 노회를 위해서도, 총회를 위해서도 총회장도 지내고 크고 굵직 긁직한 일을 이루어 놓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야망을 위하여 한 것이라면 주님과 아무를 상관없는 일입니다. 장유에 제 친구가 전도사로 있는 교회에 얼마 전에 장로 투표를 하였는데 예배드리고 나서 투표하는데 갑자기 살벌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교회안의 일만이 아니라 총회 안에서 총회장 되기 위하여 수억 원을 쓴다는 말이 다 알려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이루는 것이지 어찌 주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먹는 문제 해결되고 나면 무엇에 관심을 가집니까? 멋에 관심을 가지지요. 어떻게 보암직하게 보일까? 겉멋만이 아니라 속멋까지 내려고 하지요. 이 모든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중,고등학생 중에 교회를 나오다가 안나오는 아이가 있어 왜 안나오느냐고 알아보니 입고 나올 옷이 없어서 못 온다고 그럽디다. 정말 옷이 없어서 벗고 있을 정도는 아니지요. 멋있는 옷이 없어서 그렇지요?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멋내는 일에 관심을 많이 둡니까? 이 모든 것이 안목의 정욕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오실 때 너무 좋은 옷 안입고 오셔도 됩니다. 앞으로 저도 양복 안입고 강단에 설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것도 또 다른 안목의 정욕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양복 안입고 설교하더라 멋있지 않느냐 하는 식이 되면 역시 안목의 정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에 관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지요. 결국은 자신이 신의 지혜를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욕망입니다. 이생의 자랑입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 잘먹고 잘 입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자신은 많은 선행을 쌓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영역에서 자기를 신격화 하는 것입니다. 보통사람으로는 안될 만큼 뛰어난 능력을 소유합니다. 절제하고 금욕하고 세상의 것들과 차별화된 종교의 영역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는 점점 집단화 하여 이 집단을 신성시하고 신비화하여 나갑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욕구가 이생의 자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신처럼 되고자 하고 자신이 신이 못되면 특별한 신적인 자 앞에 엎드림으로 그 신의 후광을 입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P.D수첩에서 사이비 종교 들추어내어도 그들은 여전히 이탈하는 자 없이 건재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정명석 교주에 대하여 다루었지요. 그런데 몇주 전에 제가 창원대 앞에 주보 복사하러 갔더니 그 집에 새벽말씀이라는 표지의 책을 만들어 놓았길래 누가 이렇게 열심히 새벽기도 설교내용까지 책으로 만들어 보는가 하고서 잠깐 보았는데 성경을 이야기 하면서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골키퍼를 8명을 세워 놓고 공을 차 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자신이 매일 새벽에 수천 번씩 연습하고 또 자신이 모든 부분에 통달하듯이 말하는 그런 내용인데 그런 것을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얼마 있으니 젊은 여자들 몇 명이 그 책을 찾아갑디다. 이러한 세계 안에 있는 자들은 계속하여 종교적인 욕구에 붙들려 있기에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교를 금하시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1,2,3계명이 어떠한 종교도 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본능들이 우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본능을 정당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덩어리를 어떻게 해야 구원하실 수 있습니까? 어떠한 종교적이 규칙과 고행을 제시하면 인간의 종교적인 본능이 있기에 다 해내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가 속한 종교 단체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죽이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의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고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나의 구원이 없습니다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위하여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 그 시험을 이겨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종교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예수님의 시험 받으심을 잘 알지요. 처음 아담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세 가지 유혹을 모두 이겨내신 것입니다.
첫째, 40일 주리신 후에 돌로 빵을 만들어 먹어라, 먹음직 이지요. 육신의 정욕이지요, 경제적인 욕구를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 하시지요. 둘째, 산위에서 세상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영광을 너에게 주겠노라. 보암직 이지요 안목의 정욕이지요, 정치적인 욕망입니다.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주님께만 경배하라고 하시지요. 셋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종교적인 슈퍼스타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생의 자랑이요, 종교적인 욕구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물리치십니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혹이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후의 본능적인 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이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다면 주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이 믿음도 주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주님께서 주셨기에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혹은 우리에게 계속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에서 이길 수 있음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안에 이 유혹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죄된 본능들이 사실은 서로 서로 묶여 있는 한 덩어리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이 교회의 이슈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시장조사를 하듯이 사람들이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분석하여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면 사람은 몰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뜬다는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이미 미국에서 오래전에 시행하는 방법을 그대로 도입하는 것이지요. 뒤에 있는 교계신문을 보시면 잘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도 교회 컨설팅을 해주는 곳이 생긴 것입니다. 안그래도 욕망 덩어리에 욕망의 불을 붙이니 불나방이 죽을 줄 모르고 불에 달려 들 듯이 달려들고 있는 그러한 유혹에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요한일서 2:15-17까지 한번 더 읽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창세기 3:9-24 찾아오시는 하나님
아담이 범죄후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범죄한 인간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시면서 찾아오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찾아오시지 않고 범죄하였으니 그대로 벌받아 죽으라 하셔도 할 말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삭개오 이야기를 잘 압니다. 세리장 삭개오, 키가 작은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보기 위하여 뽕나무 위로 올라갔지요. 이것을 가지고 얼마나 다르게 설교가 되는지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부분 삭개오 이야기를 하면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보기 위한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유도순 목사님이라고 나이 많으신 목사님이 어느 부흥회를 참석하였답니다.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이고 또 교계에서 아주 유명한 부흥사이기도 하여 한번 참석하였는데 그 본문이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는 장면인데, 모든 초점이 삭개오에게 있더라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어떻게 준비 하였으며 어떤 자세였는지 그렇게 열심히 만나려 하였기에 주님을 만났다는 설교를 듣고서 분노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설교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죄인 삭개오를 찾아오신 것이 놀라운 복음의 사건이지 어떻게 죄인이 만나기로 한 그 일만을 그렇게 부각시키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면서 삭개오를 부르지 않고 지나가셔도 할 말이 없는 자가 삭개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신 것은 이미 주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시기를 작정하시고 삭개오를 부르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삭개오에게로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며 주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관점이 옳다고 보십니까?
삭개오가 준비를 잘 하였기에 그 준비에 주님이 감동되어 삭개오를 만나 주셨다고 가정한다면 아직 죄가 무언지를 모르고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지은 인간은 결코 주님을 찾아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거저 두려워하여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죄인이 스스로 하나님앞에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자신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리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스스로 어떤 신을 찾아 나간다면 그런 신은 우상입니다. 이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든 천주여 라고 부르든지간에 스스로 자신의 정성을 바침으로 신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사람이 찾아가는 신은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 신은 결국 자기를 위한 신입니다. 자기를 지키고 자기 집을 지켜주고 자기 나라를 지켜주는 그런 수호신으로서의 신을 찾아가는 종교적인 본능을 성경은 거부합니다.
십계명의 제 2계명에 보면 너를 위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를 위한 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예수 믿어 내가 덕을 보려고 하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주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놓고 복 안주나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벌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첫째,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십니다. 따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아담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고 나무밑에 숨는 일입니다. 죄 지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제부터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의 재주를 가지고 자신을 가리워 가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부실합니까?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린들 제대로 가리워지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나마 가리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들어 내는 문명이 바로 바벨탑입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자신들의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행위입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서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다수 속에서 힘을 가지고자 합니다. 홀로 단독자로 주님 앞에 서야 하는데 스스로 군중속에 숨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전으로 여기고 힘으로 여기는 것이 범죄 이후에 자신을 가리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라도 자신의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을 가지고 나가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는 것과 같은데도 이러한 스스로의 가리는 일을 그만 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남 기독교 연합회에서 8월 15일 창원 공설 운동장에서 연합으로 예배드린다는 공문이 두 번이나 왔습니다. 그 제목이 ‘광복 54주년 기념 경축예배 및 단군신상건립 저지 기도회’ 라는 것입니다. 이 제목으로 모이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광복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꼭 연합하여 예배를 해야 합니까? 올 봄에 부산 사직 실내체육관에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해 보았더니 이건 예배가 아니라 사람들의 수를 결집하여 세를 과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도 않는 시장이 와서 무슨 경축을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단군신상 건립한다고 사람들이 우상숭배라고 하는데 성경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교회가 단군신상보다 더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시편 8편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 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대적을 친다는 것은 사람의 수나 힘의 결집을 하나님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께서 세상의 여우같은 헤롯을 세력 규합하여 대적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곳에 관심 없습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주님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나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어떤 사람들이 들어갑니까? 주님의 택한 자들만 들어가는데 이들의 특징은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경남기독교연합회의 공문에서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많이 참석하여 힘을 모아 주십시오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힘을 모아 단군상 건립을 저지 하겠다는 발상이 이미 비성경적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이런 힘을 요구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형집회를 계속 마련합니다. 여의도에 몇십만 명이 모였다 기독교의 세력을 보라 하니까 천주교에서 더 많이 모였다 그러니 불교에서도 연합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인생은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만이 모아놓는 것이 세상에는 통하지만 주님의 나라에는 통하지 아니합니다.
지금 세계 인구가 60억이 넘었습니다. 60억 인구 중에 예수님 재림시까지 단 한명만 예수 믿었다고 하면 재림을 연기 하실까요? 그대로 집행 하실까요? 나머지 59억9천9백9십9만9천9백9십9명이 모두 예수 안믿었다면 주님께서 타협하시겠습니까? 구원받은 자가 너무 적다 전도 열심히 해라 재림연기 한다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때 단 한 가정 외에는 몽땅 수장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안에 들어 있지 아니하면 수에 치지도 아니합니다. 그런데 수를 모아 힘을 모아달라고 하는 것이 이미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되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가리는 힘으로 가리려는 죄된 모습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대로 두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나뭇잎 갈아입느라고 세월 다 보내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짐승을 희생시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 오셔서 가리워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아무리 힘을 모으고 멋진 일을 이루어 낸다고 하여도 우리가 한 일은 나무 잎사귀로 가린 것임을 알고 오직 주님 가리워 주시는 것으로만 가리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이 찾아 오셔서 하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15절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것인데 뱀의 후손은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세상은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한쪽은 뱀의 후손으로 한쪽은 여인의 후손으로 서로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의 특징은 뱀처럼 생긴 것이 아니라. 뱀의 유혹을 받은 그 특징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신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악체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제 신은 필요없다 우리가 신이다 자 이제 우리의 이름을 내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자기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을 세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 비해 여인의 후손은 약속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생명으로 나가는 길은 차단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두루 도는 화염검을 가지고 지키는데 누가 생명나무로 나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됩니다. 생명나무와 단절입니다. 이제 어떤 인간도 스스로 생명을 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생명을 주시는 분에 의하여만 생명을 받는데 그것이 바로 여인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아담은 여자를 뭐라고 이름을 부릅니까? ‘하와’라고 합니다. 하와란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고 말합니다. 이 이름이 범죄후에 아담이 하와에게 지어 주었다는 것은 새로운 약속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로 나가는 길은 차단되었지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길이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정복하게 될 때 일어날 것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는 그 씨에 대하여 구약은 계속하여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의 자손이 등장하는 것을 사탄은 방해 합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싸움은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 서로의 배후 세력이 다른 것입니다. 특히 시편에서 이러한 싸움이 치열하게 나타납니다. 시편 2편에 보면 여호와와 그 기름부은 자에게서 주의 백성들을 끊어 내려고 합니다. 이 세력이 여호와의 백성을 무고히 괴롭힙니다. 시편에서 의인과 악인이 대별되는 것은 의인은 자기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입니다. 이들이 약속의 자녀이며 여인의 후손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이란 자기의 선악체계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 내겠다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대결구도가 계속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도속에서 세상적으로 볼 때에 약하고 힘없어 보이는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이 신약에 가면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이 이미 이사야 7장14절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여인의 후손의 등장입니다. 갈라디아 4장4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이렇게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마귀를 없이 하시려고 예수님이 여인의 후손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랍니다. 이것을 요한일서 3:8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마귀를 이깁니까?
골로새서 2:15에서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의 일입니다. 이것을 이미 창세기 3:15절에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 내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쥐고 있는 마귀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주신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15절을 원시복음이라고 사람들이 부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승리 하셨는데 왜 아직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까? 저는 이렇게 봅니다. 뱀의 머리가 십자가에서 깨어짐으로 결정적인 승리는 이미 확정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틀되는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6장 20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사단이 십자가에서 깨어졌는데 아직 그 힘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까지도 속히 너희 발아래 상하게 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이들이 결국에는 불과 유황못에 던지워질 것을 계시록 20장 10절에서 말씀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이 있지만 머리를 상하여 꿈틀되는 정도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승리를 주의 성령이 우리를 찾아 오셔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복된 자리로 불러내어 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주의 백성들은 마귀의 후손들이 의지하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만 바라보며, 주만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모신 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 4:1-15 죄의 소원 1999. 8. 15
오늘이 광복절입니다. 광복절 되기 전까지 이 나라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독립이었지요. 그러나 자력으로 이루어진 독립이 아니기에 남북으로 분단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이 나라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지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남북통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만유의 통일입니다. 에베소서 1:10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유가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음이 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에 방해세력이 있으니 그것이 죄의 소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죄인이란, 사람이 원래는 죄인이 아닌데 환경과 상황으로 죄를 짓게 됨으로 죄인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목록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죄의 소원입니다. 죄도 인격처럼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소원을 가지고 무얼 하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된 모습이 오늘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서로 싸울 것을 말씀합니다. 여인의 후손이 궁극적인 승리를 하지만 서로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뱀의 후손과 여인이 후손의 특징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계시가 어떠한가의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가인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 하였다고 가인 즉 얻었다는 이름을 지었는데 한 명은 뱀의 후손의 특징을 보여주고 한 사람은 여인의 후손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창세기 3:15절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사가 아닌 아벨의 제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데 아벨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아벨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서 그렇게 간구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아벨은 정성껏 드렸으니 받아 주셨을 거야 그러니 우리도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자 아마 그런 생각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씀을 나의 정성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여서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라는 의미이지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드린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정성이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잘 합니다. 비록 제물로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빌지라도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빌고 또 빕니까? 심지어 겨울이라도 찬물로 목욕재계까지 합니다. 마을의 동제를 지내려면 제주를 마을의 어른 가운데 뽑습니다. 제주로 뽑히면 그 기간동안 술도 먹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도 않고 이발하고 목욕재계한 다음에 동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형태가 신에게 나의 정성을 바쳐서 화는 멀리 쫓아 버리고 복은 불러들이자는 원화소복(遠禍召福)의 내용입니다.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 먼저 내장되어 있기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 그러면 앞 뒤 말씀을 보지도 않고 그저 정성껏 예배하라 최선을 다하라 그런식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도 그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덮쳐온 죄의 소원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데도 자꾸만 사람의 드림의 조건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보는 경우 -즉 사람의 조건으로- 어떻게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구별합니까? 가인은 땅의 소산 즉 곡식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양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양의 첫 새끼를 드렸기에 하나님이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우리가 이미 어린양의 의미를 아니까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예물이 율법으로 주어졌을 때에도 곡물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됩니다.
신명기 26:2절을 보면 모든 토지 소산물 즉 땅의 소산물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맏물이라고 하였기에 가인은 땅의 소산이지 첫 소산 즉 맏물이 아니다 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물의 내용과 방법을 계시하기 전이기에 제물의 내용과 방법 때문에 받고 안받으신다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한 가지 차이는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면 된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우리의 어떠한 선행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은혜로 열납하여 주셨다는 것이 믿음으로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서 어떤 조건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15년전쯤 기독교사상이라는 월간지에서 이 말씀의 설교를 보고서 많이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가 하면 가인이 첫 아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장남 선호하듯이 우리 장남 우리 큰 아들하면서 아담과 하와가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뜻과 자기의 고집대로 다 이루어지는 그런 아들이었다는 가정을 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모든 아이들이 전부 자기가 왕자요 공주인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요구사항을 안들어 주면 마구 때를 쓰는 것입니다. 그저 오냐 오냐 키워 놓으니 거절당하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거절되어 지면 얼마나 많이 화를 냅니까? 그러므로 김용옥씨 같은 경우는 이렇게 아이를 키우면 모두가 잠재적인 독재자를 키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되는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 안에 수백만의 독재자를 키우는 것입니다.
요즈음 왕따와 학원 폭력이 사회 문제가 되는데 오늘 우리 가운데 학교다니면서 한두 번은 왕따도 당해보고 맞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회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자녀가 보통 5-6명입니다. 형에게 맞아가며 형제간에도 따돌림 당해가며 그렇게 지냈기에 그러한 문제는 극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두 명이니까 그리고 현대 교육을 받았다는 신세대 부모들이 자녀들의 기를 살려 놓은 것입니다. 이러니 거절당해 보지 않은 가인이 자기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안색이 변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새롭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의 후천적인 교육과정과 환경으로 보기에 죄로 인한 것임을 보여 주기는 부족한 것입니다.
지금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선악체계에 붙들려 있는 죄인된 상태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 나며,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어떻게 대립되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의 특징이 자기 공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자기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자 왜 자기의 제물은 안받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제물이 무엇이 부족하여 안받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물을 받으시고 안 받으시는 것은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습니까? 받으시는 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조건과 행위에 메이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자신들이 정성을 안바쳐서 그렇지 정성을 바치기만 하면 언제나 제물을 받고서 복주는 그런 신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면 세상은 싫어합니다. 안색이 변합니다. 이것이 뱀의 후손의 특징입니다. 너보다 내가 어떤 면으로 보아도 내개 나은데 왜 너만 하나님이 선택하고 나는 버리느냐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 공평을 자신들의 행함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어떠한 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나는 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색이 변하는 이유입니다.
TV프로그램 중에 멋진 만남이라는 프로가 있지요. 이휘재, 남희석이 한 여인을 상대로 온갖 정성을 다하여 데이트를 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선택을 여인이 하게 합니다. 이 때 선택당하지 못한 남자의 표정이 어떻습니까? 안색이 변합니다. 단지 벌칙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멋진 데이트 코스를 정하여 맛있는 것 사 먹여가면서 공을 들렸는데, 왜 나를 선택하지 않느냐고 안색이 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안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안색이 변하였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가 자기의 주인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라는 목사의 책중에 당신의 기도가 하늘나라 창고에서 잡동사니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안해서 그렇지 많이만 하고 정성만 바치면 어떤 기도도 응답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든 제물이든 받고 안받으시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정성과 나의 드림이 당연한 것이지 나의 드림의 행위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안색이 안변합니다. 그러나 안색이 변하였다는 것은 죄의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소원이 있기에 그 소원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자기 제물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이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며 사는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 너의 실력으로 죄의 소원을 다스려보라 스스로 죄짓지 않고 선을 이루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떻게 합니까? 죄의 소원에 지고 맙니다. 가인을 돌로 쳐 죽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의 말씀에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이니이까? 하는 가인입니다. 얼마나 죄의 소원이 무서운지를 아시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말씀 합니다. 이것이 의인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 피가 증거가 됩니다. 그리하여 그 피의 고발을 근거로 악의 소원에 붙들려 사는 뱀의 후손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다가 성경이 관심하지 아니하는 부분에 관심이 많습니다. 야곱의 꿈에 하늘에 이르는 사닥다리를 보았다고 하니 그게 몇 계단인가 하는 생각을 하듯이 가인이 하나님의 벌을 받아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셨을 때 그 벌이 너무 중합니다. 만나는 사람이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을 보고 아담과 하와가 첫아들이 가인이면 아벨은 죽었는데 다른 사람이 어디서 나오는가 합니다. 아담이 몇 년 살았습니까? 창 5:3-6절입니다. 아벨후에 셋을 낳은 것이 130세인데 이때부터 800년을 지내며 아이를 낳았으니 도대체 몇 명을 낳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만약 이름만 기록하여도 다 기록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인이 그렇게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표를 주셔서 죽지 않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표도 어떤 표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표가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왜 가인이 사람에게 죽지 아니합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도 죄인이기에 사람을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뱀의 후손에 의하여 여인의 후손이 먼저 침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피에 근거하여 뱀의 후손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먼저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때 그 머리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승리입니다. 오늘날 주의 피로 거룩함을 입은 자는 그렇지 않은 자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바른 믿음을 가진 자를 핍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처럼 그렇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4:28-29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왜 나의 이 정성을 몰라주고 안받는단 말인가?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입니다. 나의 제사는 나의 공로가 아님을 아는 자가 아벨의 계통을 따라 예배하는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히브리서 12:18-24절까지 읽어 봅시다. “ 봉독” 이제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4:16-24 가인의 후손 1999. 8. 22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입니다. 뱀의 후손은 여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인의 후손은 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세상은 두 종류의 인간이 싸움을 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서로 다른 세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로마서 5: 12-21절을 봅시다. ‘봉독“ 사망의 왕노릇과 생명의 왕노릇이 나옵니다. 이러한 두 세력의 모습을 구약에서 모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이런 식의 대조를 보게 됩니다. 이 두 편의 특징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그 벌로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을 수가 없기에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가야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가인이 무엇을 하며 그의 후손들이 무엇을 하는지 오늘 말씀에 보면 에덴 동편 놋땅에 거합니다. 여기서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아니라 가인의 후손 에녹입니다.
가인이 아내를 취하고 자녀를 낳고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성을 쌓는 일입니다. 그 성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합니다. 왜 성을 쌓았을까요? 성이란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가인은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명이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면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글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신은 시골을 만들었는데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가인이 최초로 성을 쌓은 것은 도시 문명의 시작입니다. 도시가 형성되는 이유는 사람의 편리를 위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성을 만들었는데 그 후손들은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봅시다.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고,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이루어 내는 사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고서 자기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창상을 인하여 사람을 죽였고 자신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가인을 위하여는 7배이지만 자신을 위하여는 77배라고 합니다. 자신은 과격한 복수로 사람을 죽여 놓고 자신을 헤치는 자는 벌이 77배라고 임의로 정하여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후손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원리가 가인의 후손들이 사는 방법과 꼭 같은 것입니다. 자기의 안전을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스스로 성을 쌓고 스스로 보호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셋 계통의 후손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주를 의지하는 자이며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에녹같은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처럼 살고 있습니까? 에녹처럼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마땅히 주를 의지하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인처럼 사는 것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안전지대를 만들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4:25-5:32 하나님과 동행 1999. 8. 29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습니다.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셋이 아벨 계통을 이어가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5:1절부터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면서 소개되는데 가인의 족보는 4장에서 따로 소개함으로 아담의 후손에서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벨대신에 셋을 주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기에 여기에서 가인의 계통을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벌써 분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계보가 소개되고 그들의 나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려 천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수 있는 것은 그 당시의 환경이 지금보다 좋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좇겨났지만 노아 홍수 이전까지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급격히 수명이 짧아지는데 그 이유를 과학자들이 하늘의 물층이 없어져서 그렇다, 육식을 하게 되어 그렇다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단지 참고로만 들으시면 됩니다. 우리의 관심은 장수의 비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록 천년 가까이 살았지만 결과는 무엇입니까? ‘죽었더라’입니다. 죽었더라, 죽었더라가 아담의 계보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계보 속에서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이 에녹인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그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969세를 살아도 므두셀라는 죽었는데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계보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봅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면서 이어지는 계보에서 무슨 말이 없습니까? 죽었더라 하는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분명히 죽었는데 죽었더라는 말은 없이 ‘낳았더라’는 말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이 왕노릇 할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안에 있기에 사망의 권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새로운 계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이기는 권세가 아담의 후손가운데서 다 ‘죽었더라’는 계보 가운데서 에녹은 예외가 됨으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창세기에서 이미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간 에녹의 그 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에녹에게 오셔서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면 사망의 권세도 이기는 것입니다.
창5:21-24을 다시 봅시다.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셀라를 낳고 삼백년을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65세 되기 까지는 동행 하였다는 말이 없다가 므두셀라 낳고서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을 보면 므두셀라 낳을 때 무슨 사건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았기에 300년을 하루같이 하나님과 동행 하지 않았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겠습니까? 유다서 14절에서 15절을 보겠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이 예언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예언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였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심은 뭇사람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았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신약성경에서 동일하게 계시를 받은 유다가 에녹이 심판을 예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부터 계속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창던지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성경학자들이 말합니다. 창을 던지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가 창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것처럼-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결혼과 자녀 이름과 벌거벗고 다니는 것과 모로 누워서 지내야 하는 행동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므두셀라는 자신의 삶이 마감하는 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창이 날아가서 꽃히는 것을 생각하면 므두셀라가 죽는 때에 심판이 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짜를 계산해 보니 꼭 들어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숫자를 이상하게 해석하여 성경을 푸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3으로 풀어내고 4로 풀어내고 7이나 12등등의 수를 가지고 성경을 다 푸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성경은 숫자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물론 수자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떤 숫자풀이에 메이면 이상한 종말론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에녹은 언제 심판이 임할지는 그 날짜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소개된 사람들의 나이를 추정해보니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사람의 이름과 나이를 다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볼 수 있느냐하는 의문은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들의 나이를 한번 계산해 봄으로 므두셀라가 죽든 해에 노아홍수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므두셀라 187세에 라멕을 낳습니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습니다. 그런데 노아 몇 세에 홍수가 납니까? 7:11절에 보면 노아 600세에 홍수가 납니다. 이 세 숫자를 더하면 므두셀라 나이가 나오는 것이지요. 얼마입니까? 969. 므두셀라 죽는 해에 노아홍수가 난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날자 계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어떤 자세로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살았습니다. 므두셀라가 잠시 안보이거나 조금만 이상이 있어 보여도 오늘이 심판하시는 날인가 하는 자세였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신앙이란 주님의 재림을 늘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포항의 어느 집사 말을 듣고 자기를 따라 가야 종말을 대비한다고 집단 가출 하는 그런 종말론이 아닙니다. 에녹은 기도원에 가거나 집단 공동체를 이루어 종말을 기다린 사람이 아닙니다.
5: 22절입니다.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를 받고서도 자녀를 낳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심판이 있을 텐데 자녀는 왜 낳느냐 학교도 직장도 그만두라는 그런 종말론과 전혀 다릅니다. 자녀만 놓고 맨날 기도하러 기도원에나 다니면 자녀는 누가 돌봅니까? 그런 삶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 주님과 동행하는 삶 이것이 죽음을 이긴 힘입니다. 이러한 동행은 우리가 동행하여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에게도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라는 말씀이 6: 9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하나님이 동행해 주셨다로 번역 되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사람은 언제나 종말론적으로 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5:28-29절을 봅시다. 라멕이 아들을 낳고 노아라고 이름 지은 것은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에게 안위를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노아라는 이름이 안식의 뜻입니다. 이러한 안식이 어떻게 옵니까? 놀랍게도 노아 홍수와 함께 오는 것입니다. 모두가 저주아래 심판을 받고 있는데 안식을 누리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 역시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이 심판의 땅입니다. 이곳에서의 안식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요청하여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누리는 복인 것입니다. 심판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주님의 동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은 자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취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로 살아가시기를 소원합니다.
창세기 6:1-22 죄악의 관영 1999. 9. 5
세상이 심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악이 관영하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관영하다는 것은 죄가 가득찼다는 것입니다. 물이 가득 차면 보이지만, 죄는 가득차도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죄악은 냄새도 안나고 색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가득 차서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에서 떨어지는데도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유황불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롯과 그 아내와 그 딸들이 미적거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롯의 사위들은 죄악이 가득찼으니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 죄가 가득함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쾌락과 자신들의 정욕을 만족시켜주는 좋은 환경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윤리 도덕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문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결국은 죄가 관영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가 가득한 모습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셋계열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보아야 합니다. 이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이 재주가 많았지요? 성벽을 쌓고 악기를 다루고 문명에 앞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골 총각이 서울의 세련된 아가씨를 보게 되면 시골의 옆집 갑순이가 갑자기 촌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시골에 있을 때는 가장 이쁜 줄 알았는데 그러니 이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아내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눈에 아름다운 여자를 자기 마음의 소욕대로 아내를 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혼뿐만이 아니겠지요. 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쁜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일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37-39을 봅시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죄가 아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모든 것을 자기의 기쁨을 위하여서만 하였지 주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고 결혼 하는 것을 왜 하느냐고 물어 보십시오. 그러면 한결같이 왜 한다고 합니까? 자신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세와 태도가 죄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을 몰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니 나의 기쁨을 채우면 되는 것이지 내가 왜 남의 기쁨을 채워 주어야 하는가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때로 남의 기쁨을 채워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로 인하여 궁극적으로는 나의 보람 나의 뿌듯함이라는 대가가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이기적인 움켜짐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이지만 결국은 자기 영광입니다. 이런 모습이 죄가 가득한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 이지만 성경이 이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 하고 하늘나라 시민이라고 하면서도 사는 모습이 방금 말한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나의 모습을 보고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5-35절을 봅시다. “봉독”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처럼 여기고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처럼 하고,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장가가면 어떻게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고 여자가 시집가면 어떻게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때 신앙은 못믿는다 그러지요 시집 장가 가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시집을 가든지 장가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오늘 우리는 범사를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가정생활, 직장생활, 자녀교육, 장래계획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점검 하셔야 합니다. 순전히 자기의 안락과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면 세상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죄가 관영한 모습입니다. 로마서 14: 7-8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도 나를 위하여 죽어도 나를 위하여 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윤리 도덕적으로 나쁜 짓하는 것만 죄악이 관영한 것이 아니라 주인을 몰라보고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죄악이 관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동할 때 욕망에 이끌려 행동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욕망에서 나오는 행동은 결국 어떤 모습으로 가게 됩니까? 소유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길에 가다가 예쁜 꽃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꺽어다가 자기 소유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 홍수 때의 사람의 죄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의 죄도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독신문에 나온 이렇게 전면광고를 통하여 목사와 장로가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자기거라는 소유욕의 싸움입니다.
이러한 죄악이 관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죄가 관영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죄인되었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착한데 죄를 자꾸 지어서 죄가 가득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가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통해서 나오는 후손들이 어떤 자들 입니까? 네피림이라고 그 당시의 용사라는 것입니다. 이 네피림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을 천사에게도 하니까 천사와 사람의 딸들을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천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그렇게 보기는 무리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결혼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후손을 바보가 되게 하시면 될텐데 오히려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들이 시대의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자녀가 고시를 패스하고 사(師)자 달린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아합니까? 저 집이 복 받았다 그러지요. 그런데 청문회 보니까 그렇지도 않은데 자꾸만 그러한 영웅, 유명한 사람을 좋아 하는데 그런 자가 나온다고 죄악이 관영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있다고 심판이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영웅과 유명한 자를 원하여도 이들의 마음의 생각과 그 계획이 어떠합니까? 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가끔 악한 것이 아닙니다. 늘 착하다가 한번씩 악한 것이 아니라 항상, 늘, 언제나 악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세상에는 죄악만 관영한 것입니다. 12절을 한번 더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적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썩어 있었다.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그냥 두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사람뿐만 아니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다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가득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탄식 앞에서 돌이켜 봅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나의 소유를 확장하면서 그것을 오직 나의 기쁨만을 위하여서만 사용하여 왔습니까? 겨우 십일조하고서 헌금의 의무는 다 한 것처럼 마음 홀가분하게 여기고 나의 나됨을 나의 실력으로 여겨오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우리의 전부가 주의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이러한 세상이기에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심판 하셔도 노아 홍수때 심판당한 사람처럼 아무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 나 이것 하였잖아요. 저것도 하였는데요. 그런 것으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라야 심판을 면제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 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이것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얼마만큼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아무도 자신있게 나는 나보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저주받아 심판받고 멸망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믿으십니까? 기도할 때만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이라는 그 말이 이처럼 우리 가까이 우리안에 함께 들어붙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쯤 말씀을 들으시면 우리에게 어떤 반응이 나타납니까? 그래도 나는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든지 아니면, 그래 인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심판을 면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가르쳐 다오 그러면 내가 목숨을 걸고라도 내가 이루어 내어 나의 구원을 따 내겠다 하는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경우입니까? 그래도 나는 안심이야 하는 분계십니까? 저는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얼마나 내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인지를 함께 살아보지 않고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두 번째를 기대 해볼까요? 어떻게 하면 심판을 면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분명한 비결을 알려주거나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된다는 규칙을 정하여 주는 곳이 이단입니다. 기존의 교회를 부정하고 자신의 또 다른 몇 가지의 방법을 제시하여 그것을 지키고 이룸으로 심판을 면제 받으려는 발상이 이미 틀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죄를 지적하며 우리의 할 말이 주여 긍휼이 여기소서 라는 말 외에 무슨 할말이 있느냐 그러니까 어떤 집사님이 그 말을 외워 두어야지 그러는 것입니다. 웃으며 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8절을 봅시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도 그 시대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노아가 심판을 받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 이 길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은혜를 받는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가 무언지를 모르니 은혜받는 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주시는 분의 마음입니다. 우리쪽에서 무엇을 하였기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내는 비결은 없습니다. 무슨 비결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지만 비결은 없습니다. 오직 은혜를 입은 자만 아는 것이고 은혜를 입은 자만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 천하가 물의 심판이 임하여도 노아는 구원받습니다. 오직 은혜를 입은 노아만 구원에 이릅니다. 노아의 가족은 노아의 그 은혜에 함께 참여된 자들입니다. 가정으로 보자면 단 한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그 시대에 의인이라 완전한 자라 칭함을 얻고 하나님과 동행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도 은혜를 입은 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참으로 자신이 멸망받아 마땅한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범사에 주님을 생각하기 보다는 범사에 나의 기쁨 나의 행복에만 관심을 가지는 우리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죄악의 관영함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세상의 주인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희생당하신 그분이 희생시킨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은 자는 오직 그분의 말씀하나 표정 하나에도 온갖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은혜를 입은 자라면 그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신 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그 머리털, 여인의 면류관이라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향유를 붓고 그 발에 입맞추는 그 여인의 심정을 우리가 헤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속에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알아가며, 또한 그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6:13-7:24 방주에 있던 자만 1999. 9. 12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야 진리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도 과학적으로 입증하면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서 방주의 파편을 찾는 다든지, 방주를 실제 크기로 만들어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방주를 만든 사람이 있었는데 네덜란드의 쟌센이라는 사람이 성경의 규빗을 환산하여 방주를 만들었는데 길이가 137m, 폭이 23m, 높이가 14m로 나오는데 톤수로는 약 32.000-35.000톤까지 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배의 모양이 상자처럼 생기고 3층이니까 똑 같은 배보다 1/3을 더 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하워드 오스굳이라는 박사는 이 방주안에 2,400종의 포유동물, 1만종의 조류, 1천종의 사류, 1250종의 도마뱀류, 10만종의 곤충류와 1년간 먹을 양식을 실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여 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군에 있을 때 노아 방주에 대한 특강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성지공전 조선공학 교수라는 분이 노아 방주에 대하여 상세하게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요즈음도 사람이 손으로 나무를 사용하여 배를 만드는 사람의 하루 작업 분량이 있답니다. 그러므로 그 작업분량을 계산하여 노아 가족 남자 4명 곱하기 120년에서 안식일 빼면 정확한 배의 톤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 첨단 과학으로 계산해 보면 폭풍우에 가장 잘 견딜 수 있는 배가 이 정도의 크기이며, 모든 짐승의 무게와 사람이 함께 일년간 먹을 양식을 계산하니 조금 남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왜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배 안에서는 활동이 거의 없고 또 배가 울렁거리니 육지에서의 절반 정도만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게를 빼니 정확하게 노아 방주의 만든 기간, 톤 수, 먹을 양식까지 정확하게 계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방주안에 있었던 기간은 1년 하고 17일 이지요. (7장 10-11, 8:13-14)
이정도로 노아 방주의 정확한 재원을 설명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의 창조과학회 하는 분들이 이런 일을 통하여 성경을 증명하고자 하는데 그렇게 하여 성경이 증명된다고 하여도 예수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특강을 듣고 나서 한사람에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 보니 이 사람이 바닷가 출신이라 직접 배를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 뭐라고 하는가 하면 배의 가장 중요한 연결하는 핀이 그 정도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겠느냐고 합디다. 상자처럼 지어졌다고 말한다 해도 그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말씀을 역사적인 증거와 고고학적인 증거를 통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어떻게 낳습니까? 다 웃을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과학이라는 범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싸움을 싸우는 것 자체가 믿음의 세계를 이해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과학적으로 창조가 아니라 진화가 맞다고 온 세계 과학자들이 다 들고 나와도 우리는 아니야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나, 노아 홍수, 다른 기적들을 그런 관점에서 싸우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서 과학자가 되었는데 과학자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는 일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런 일을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노아 홍수를 통하여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언약을 하셨고 그 언약을 어떻게 실현하시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약의 책이라고 구약 신약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 노아 방주의 크기나, 그 많은 물이 어디에서 나왔느냐의 관심보다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 언약이 무엇인지 찾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노아의 이름이 무슨 뜻입니까? 5:39절에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식을 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에게서 안식의 사건이 나올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안식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안식이 주어지기 위하여서 세상의 죄악이 관영한 것을 청소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쉴 때도 청소가 되어 있어야 쉬어도 편하게 쉴 수 있지요.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상에 죄악이 관영한 것을 청소하셔야 쉬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홍수라는 커다란 빗자루로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속속들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13절에 보면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멸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에게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는데 17절에서 18절을 봅시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데 그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니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명하신 대로 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않은 자는 120년 동안 증거하여도 아무도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였다는 말씀이 베드로후서 2:5절에 나타납니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노아가 120년간 방주를 만드는 그 행위가 의를 전파하는 것이 됩니다.
배를 만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을 증거 하는데도 단 한사람도 그 증거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죄악이 관영하였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오늘 이 시대도 꼭 같습니다. 지금 이 세상이 불살라 없어 질 것이라고 말씀은 증거하고 있지만 그것을 믿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야 원래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면서 우리는 종말에 대하여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하고 나서 교회의 교회됨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셨는데 교회란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이런 자세로 살면 틀림없이 세상 사람과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땅에서만 태어났기에 땅의 일만 생각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위로부터 났기에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노아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주업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방주를 만드는 일입니다. 부업은 먹고 사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하신 그대로 방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6:22절을 봅시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자신의 비젼과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시 하신대로입니다. 방주를 만들었는데 방향키도 없습니다. 돛대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키신 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방향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드디어 방주가 완성되었습니다. 짐승들이 스스로 방주로 나아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명하셨기에 그렇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에 들어가고 일주일 후에 홍수가 40일을 쏟아집니다. 땅에서는 샘들이 터져 나옵니다. 주야로 40일을 땅에 쏟아지니 온 땅에 물이 가득합니다. 가장 높은 산위 십 오 규빗까지 물이 차 올랐습니다. 그리고 150일 동안 물이 땅에 가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땅위의 호흡있는 것을 다 끊어 버리셨습니다.
23절을 봅시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방주에 있던 자만” 이것이 언약의 무서운 면입니다. 방주 밖 즉 언약밖에 있던 모든 것은 다 멸절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언약안에 있습니까? 언약밖에 있습니까? 언약안에 있는 자란 나의 계획과 야망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언약을 따라 살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사람의 관심은 하나님의 언약에 늘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삽니까? 베드로후서 3:1-14절입니다. “봉독” 말세에 종말이 없다는 자들이 나와서 조롱하는 것입니다. 말세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자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과 물의 넘침으로 멸망당한 것을 부러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말씀, 물로 심판하신 그 동일한 말씀이 이제 불 사르기 위하여 남겨 져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주님의 재림을 약속 하셨기에 그 약속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십니까?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십니까? 이것이 종말을 사는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렇다고 될 대로 대라는 식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수많은 천재지변을 보면서도 우리는 동요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지 그러한 천재지변에 허둥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난리에 난리의 소문이 나리라는 말씀은, 이런 세상에 기대를 하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사인으로 받는 것입니다. 지진을 조사하고 천재 지변을 조사하는 식이 아니라 잠잠히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은 모든 소망이 거기에 있으므로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한 기대가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대하여 바라는 것을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사람의 욕망이 따를 뿐입니다.(주보의 인사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에서 믿음, 소망, 사랑이 바르게 피어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사람의 집념으로 보이고, 소망은 욕망으로 드러나게 되고, 사랑은 애정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한 이런 면을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삶은 세상에 안주한 삶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노아 홍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관심이 주님의 약속에 있어야함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약속은 다시 오마 하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안에서 주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사시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방주안에 있는 자만 살았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8:1-22 하나님의 권념(眷念) 1999. 9. 19
노아 방주에 없는 것이 무엇일까요? 방향키가 없습니다. 방주의 설계를 노아에게 말씀하시면서도 방주를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방향키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주의 특색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방향이 다 있습니다. 자기의 꿈과 인생의 희망사항이 다 있습니다. 그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인생의 노를 저어 가는 것입니다. 평생 노를 저어 가는 것이 인생인데 그 목표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의 이상의 실현입니까? 우리는 나의 이상도 실현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그러나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노아 방주를 보면 사람이 움직여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념, 돌보심만이 방주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방주에 있던 모든 짐승까지 권념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셔서 물을 감하게 하십니다. 비가 그치고 물이 점점 물러가니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습니다. 이곳에 노아가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스스로의 빈틈없는 인생의 계획을 위하여 달려가면 그런 삶의 모습에서는 사람의 집념과 불굴의 의지만 보이지만 은혜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보다는 사람들의 목표를 따라 나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향키를 사람이 잡고 있는 것입니다. 말은 주여 주여 하면서도 종이 아니라 자신이 주가 되어서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계획과 뜻이 포기되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살려주시고 권념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이 나올 수가 있는데 지금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권념,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는데요 그러니 목사님이 알아서 정해 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몇 가지 시키면 그것만 열심히 해 내면 신앙생활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오늘날 한국교회가 주님의 교회인지 목사 장로의 교회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주로 믿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고백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주님의 인도와 돌보심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우리가 우리 의도대로 이루어 진 것이 얼마나 됩니까? 나는 나의 계획을 차질 없이 이루어 내었다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아마 어려서의 꿈과 청소년 때의 꿈을 모두 하향조정하여 살고 있을 것입니다. 보통 사는 삶이 이러한 대도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망에 붙들린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한평생 이루지 못할 꿈만 꾸다가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주를 탄 사람입니까? 방주란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자신은 죽은 자입니다. 스스로 방향 설정을 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주도권의 포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번째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 내면 사람의 이름이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 아니기에 오직 주님의 계획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에 주님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 뜻은 부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자세입니다.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서 온가족이 배를 타고 넘어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김만철씨 이지요. 북한에서 의사로 있으면서 먹고 살기가 힘드는 상황에서 탈출을 결심하고 탈출하였습니다. 그 분의 간증을 들어 보았는데,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왔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먼저 믿었고 자신은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먼저 탈북하여 예수믿은 자들이 하도 권하기에, 자기가 그래도 엘리트인데 성경을 한번은 보고서 비판을 하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거짓말도 잘해 놓았다는 느낌만 받고서 그래도 계속 읽어 나가다가 한 곳에서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탈출하다가 바다에서 당한 일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시편의 말씀에서 어찌 이럴 수 있느냐는 하면서 놀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107편 23-32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폭풍우를 만나 죽을 고생을 하였는데 나중에는 엔진고장이 나서 바다 물결따라 떠내려간 것입니다. 한국에 와서 안기부에 지금은 국정원이죠 조사를 받는데 너희들이 탈출하였을 때 북한에서 비행기가 추격하였는데 공격하지 않은 것은 너희가 간첩이 아니냐고 물었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다 가운데 이리 저리 떠돌아다닐 때 커다란 구름이 자기들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은 한 가지 이유입니다. 자신이 탈출 하였지만 엔진고장입니다.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자신의 힘과 방법으로 인생을 끌고 가려고 하는데 사방이 적입니다. 도움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남을 헤쳐서라도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비극인데도 우리는 자꾸만 그 쪽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안에 있는 자는 자기의 힘과 기술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가는 것임을 알기에 인생의 키를 주님의 손에 넘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된 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발전이 없지 않느냐고 말하지요. 적어도 50년 전만 해도 발전이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발전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 취급받을 만큼 발전에 대하여 회의적입니다. 문명인들이 덜 문명한 자들을 보고서 미개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과 편견인지를 인류학자들이 증거해 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지어낸 것이 좋음이나 발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발전과 성공과 꿈의 실현에 속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것 외에는 다 쓸어버리시는 것이 노아의 홍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 외에는 다 흔들어 버리고 다 불태워 버린다는 말씀을 믿는다면 맹목적인 발전의 노예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노아의 홍수와 방주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이제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노아가 가장 먼저 하나님께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의 희생물은 어떤 짐승입니까? 짐승과 새 중에서 정결한 것입니다. 노아 방주에는 정결한 것만 탄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도 탔습니다. 7:2,8절에 보시면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함께 탑니다. 그런데 이 부정한 것이 정결한 짐승의 희생에 의하여 정결함을 얻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희생이 뒤에 있지만 부정한 것의 구원이 정결한 짐승의 희생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제사를 규정하기 전에 나온 희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결한 짐승의 희생의 향기를 하나님이 받으시고는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의 계속이 9장에도 이어지는데 앞으로 전혀 심판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불로 심판할 때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데 여호와의 증인이나 인본주의 자들은 이것을 믿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사람으로 인하여 다시는 저주를 안하시겠다는 것은 무슨 말씀 입니까?
첫째는,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에 노아 홍수처럼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노아홍수로 죄를 청소하셨지만 그러나 사람이 어려서부터 마음의 계획이 악하기에 하나님이 그 악대로 심판하시면 하루에 한번씩 노아 홍수를 퍼부어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계획과 꿈을 자꾸만 시비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기에 어떠한 인간의 위대한 업적도 악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6:5절을 봅시다.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벌하시면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심판받아야 하기에 그냥 미루어 두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처리 하시는 것입니다.
저주를 안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하지만 대신 희생당한 정결한 피안에 있기에 심판과 저주를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가 내리지 않고 그래도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하나님이 언약하신 그 언약대로 이 땅이 있는 동안 심음과 거둠과 사계와 밤낮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심판을 받아 겨울만 계속되고, 심었는데 수확을 못하고 하여도 할 말이 없는 자인데 하나님이 노아의 드린 그 희생 제물의 향기를 흠향하시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이 계속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자연의 당연한 이치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그 언약대로 오늘도 낮과 밤, 사시사철, 심음과 거둠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농사를 주업으로 하지 않지만 농사를 조금은 알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자연히 당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 짐승의 희생의 덕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마땅히 심판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이야 자신의 노력으로 산다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이 드러나야 하는데 이것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세대에 대하여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는 모습을 통하여 정죄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7을 봅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방주를 만드는 것이 세상을 정죄하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의 비젼을 정죄하는 기능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일에 경고를 받은 노아가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기다린다면 그것을 경외함으로 기다리는 자세가 이 세상을 정죄하는 기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모습보다 이 세상에서 더 영웅적으로 살고 싶은 모습이 드러난다면 우리가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죄를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갈라디아서 1: 4-5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이 악한 세상에서, 성경은 이 세상을 악한 세대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입니다. 자기의 꿈과 포부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한 세상입니다. 이런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분을 모독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 떠나기 싫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결국, 노아의 희생제사가 보여주는 궁극적인 모습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신 희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입고 가는데도 하나님의 희생은 간 곳 없고 자신의 공로만 자신의 의만 드러낸다면 이것이 바로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의 키를 주님이 쥐고 계심을 믿으시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시다. 이것이 믿음이요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범사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하루에도 수백 번 더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대신 저주 받으신 우리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감사하며, 자랑하며, 주님의 돌보심 아래 늘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창 9:1-17 언약 1999. 9. 26
하나님은 자신이 언약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전능이란 못하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을 전능으로 생각하게 되면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것을 나의 힘으로는 이루어 낼 수 없으니 내가 열심히 기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으로 무엇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하나님의 전능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어린아이가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는 병인데 부모가 치료를 거절하여 병이 악화된 경우를 보았습니다. 부모가 왜 치료를 거부하는가 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을 들이대면서(출 15:26)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자신은 확신하기에 병원치료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오늘날 하나님의 전능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의 형편에 10억 정도의 예배당을 지을 계획을 하고서 발표를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불가능 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사 불러서 부흥회 한번 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면 불가능은 없습니다. 다같이 믿음을 가지고 나아갑시다. 어느 교회는 더 어려운 형편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역사 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식의 전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여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모아낸 것이지 하나님의 전능이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능은 어떠한 전능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일에 전능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하신 약속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립 운동하여 출애굽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출애굽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모세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집사님이 어느 분의 설교를 듣고 모세의 부모가 아니었다면 모세라는 이름이 성경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틀렸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모세의 부모의 신앙의 용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어떠한 세력도 막거나 깨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왕이 방해할 수 없습니다. 홍해가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전능을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그 전능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것에 사용하시는 힘인 것입니다.
늘푸른교회 예배당을 짓는 일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몇장 몇절에 늘푸른 예배당을 사파동 어디에 지으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지요. 그러므로 예배당을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못 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형편되면 지을 수도 있고, 안되면 안하면 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에게도 멋진 예배당 하나 주세요 라고 하면 전능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에 무능하십니다. 무능하다고 하니 너무 과격합니까? 여기 황금색의 타종이 있습니다. 이것을 색깔만 황금이 아니라 진짜 황금으로 하나님이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 언약이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주시는데 그 언약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셨고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9:1절을 봅시다. 먼저 1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언제 주어진 말씀입니까? 창세기 1:28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축복의 말씀을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에게 또다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죄를 청소하시고서 또다시 9:1절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말씀도 헛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7절에서 한 번 더 반복합니다. 2절입니다. 지상의 모든 생물이 사람을 두려워하며 무서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붙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나운 짐승들이 인간을 잡아먹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사나운 짐승들과의 전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들은 사람이 사는 곳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는 곳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밖에 있게 되면 사나운 짐승이 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와 경계로 인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우리 인간이 살아남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짐승들 속에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어 사람을 해칠 수 없게 하였다. 우리의 감사의 제목이 또 늘어납니다. 지난주에는 사시사철과 심음과 거둠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어지듯이 사나운 짐승의 밥이 안 된 것도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짐승이 사람을 해치는 경우는 사람이 짐승을 위해하였을 경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짐승이 아무리 사나워도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인 줄 알고서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3-6절입니다. 창조때는 식물만 사람의 음식물로 주셨는데 이제는 짐승도 사람의 식물로 허용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금하는 것은 피 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만 상고 하고자 합니다. 피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피가 생명이기에 짐승을 잡아먹을 때 피 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도 흘리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피를 흘리면 그 피값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생명으로만 속하여 지는 것입니다.
5절 하반절에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절에서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피가 생명이기에 생명은 생명으로만 속하여 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피를 흘리는 죄를 지었으면 자신이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상처의 피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성경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의 값을 받아야 하는데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여기에서 피를 말하게 되는 것은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피를 흘린 자는 자신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피가 생명이기에 생명을 속하려면 반드시 피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도 나타납니다. 신명기 12:23에 피는 그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서는 피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 피에 대한 성경의 증거가 너무 많습니다. 성경 전체를 한 글자로 줄이라면 ‘피’라고 할 만큼 구약의 제사가 피흘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에 피흘림을 통하여 죄를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온전한 피흘림으로 우리를 속량하신 것을 히브리서에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11-22 “봉독”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피란 생명입니다. 생명이 희생되어야 생명을 속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담긴 핵심 내용입니다. 이 언약이 구약에서는 희미합니다. 그러나 점점 더 뚜렷하여 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피뿌림이 우리에게 새 언약의 완성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약의 책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2:20절을 봅시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것이 새언약의 완성입니다. 피가 생명이라는 희미한 말씀이 창세기에 있는데 예수님의 피흘림이 생명을 희생함으로 속량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언약이 더욱 구체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언약을 받은 자로서 이제 역으로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한번 더 추적하여 봄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창세기 9:8-17절까지 다시 한번 봉독합니다. “봉독” 언약이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오십니까? 몇 번이나 나옵니까? 7번이나 언약이라는 직접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이 언약은 누구의 언약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언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의 희생제사를 받으시고 언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노아가 정결한 짐승을 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정결한 짐승의 희생에 의하여 부정한 짐승도 살아남았듯이 하나님의 언약은 이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무엇을 주십니까? 무지개를 주십니다.
무지개가 노아 홍수 전에 있었느냐 없었느냐 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노아홍수 때에 위의 물층이 쏟아져서 홍수가 되었다고 보면 홍수 이전에는 무지개가 나타날 수 없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전에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내는 새로운 의미로 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노아 홍수 이후에 무지개가 새롭게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지개를 전에도 보았다면 무지개 있는데 홍수가 났다면 언약의 의미가 새로운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떠하든 하나님이 이제 무지개를 보는 자들이 물로는 심판 하지 아니하심을 믿게 되고 하나님도 무지개를 보면서 내 언약을 기억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땅의 모든 생물과 세운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메튜 헨리라는 주석가는 무지개가 활모양인데 활이 하나님쪽으로 휘어져 있기에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준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알레고리라 그러는데 저는 이보다 좀더 알레고리로 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서 힌트를 얻었습니다만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면서 심판을 하시지 않는 것은 자신의 언약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사하시는 것입니다. 활을 자기에게로 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좀 무리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정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노아 언약에 대하여 이사야 54장 9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노아 언약을 한 것처럼 다시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 넘치는 진노로 진노하시지만 영원한 자비로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에 고난받는 종의 노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신 고난을 담당하는 희생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언약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기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구하여 내시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은 어디에서 안전을 누립니까? 무지개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지개를 보면서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은 아직도 유효한 영원한 언약입니다. 이제는 새 언약의 안에서만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이 언약을 이루어 내신 십자가의 증표를 날마다 바라보며 언약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9:18-29 덮어줌의 은혜 1999. 10. 3
노아홍수 이후에 노아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고 거두어 포도주를 만들어 먹고는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 잤습니다. 이때 함이 들어와 보고서는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은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비의 하체를 덮어 주었습니다. 술이 깨어 일어난 노아는 이 사실을 알고 함은 저주하고 셈과 야벳은 축복합니다. 자기가 실수 해놓고 함을 저주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노아는 자신이 술먹고 취하여 벌거벗어 누눴는데 그걸 말했다고 저주를 하는데 가나안은 함의 아들입니다. 함의 후손의 대표적인 이름이 가나안이기에 가나안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나안, 즉 함의 후손은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저주를 선포합니다. 그냥 형제의 종이 아니라 종들의 종은 더 비참한 것입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가려 주었는데 어떤 복을 받습니까? 셈의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셈을 통하여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야벳은 창대케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준 것은 이렇게 큰 복을 받고 수치를 덮어주지 아니한 자는 이렇게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가지고 효도하면 복받는다는 식의 말을 합니다만 그러며 자기의 실수를 알렸다고 저주를 퍼붓는 아버지는 올바릅니까?
그러므로 아버지의 저주의 선포와 축복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의 윤리 도덕적인 교과서로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엉망으로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 그러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 따지고, 말 잘하고 세상살이에 더 악착같기에 고개를 흔드는 것 아닙니까? 왜 그렇게 삽니까? 헌금 많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알기에 다른 사람보다 돈 더 악착같이 많이 벌어서 하나님의 일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총신 신대원 개강 수련회에서 주강사로 온 어느 목사가 자기 교회에서 예배당을 100억인가 들여서 짓는다고 그를 강사로 초청하였는지 모르지만 설교 때에 ‘사탄의 돈을 교회로’ 라는 만세 삼창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부한 세상의 힘을 교회로 끌어드리려는 이런 일에 할렐루야 아멘 하는데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하였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빨리 죽기를 소원하고 사는 사람, 세상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어 하는 삶의 모습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방향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표지여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땅에서의 잘됨만을 바라지만 우리는 이미 준비되어 있는 은혜의 나라가 있기에 어지간한 손해를 보고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윤리 도덕 말하다 길어졌습니다만 노아가 자기 아들을 저주하고 축복한 것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어느 아들이 저주받기를 원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노아홍수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무엇입니까?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당세의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의인에기 다만 참예함으로 다른 식구들도 살아남은 것입니다. 이들은 노아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인 것입니다. 방주를 만들었으니 구원을 받았지 하는 것은 알미니안 입니다. 배를 만들고 준비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120년을 한결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아니하는데 그러므로 이런 것을 성경이 말할 때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창세기 7:16절에 보면 방주의 문을 하나님이 닫으시는 것입니다. 방주 문을 닫으니 비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방주 안에 있었다는 것이 하나님이 천하를 물바다가 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덮으심이 구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덮으심이 정결한 짐승의 희생에 있음을 홍수 후에 제사로 확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덮어짐의 은혜를 입었기에 이 은혜를 드러내어야 하는데, 함은 이 은혜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를 받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덮어주시는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 저주임을 함을 통하여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덮어주는 것, 가리워 주는 것을 성경은 얼마나 많이 말씀하고 있는지 성경 몇 곳을 보면서 확인하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가리움을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스스로 부끄러워, 숨고 가리웠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행위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를 하나님이 짐승의 가죽으로 가리워 주셨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가리워주심이, 덮어주심이 이스라엘 전체에 나타나는 모습은 유월절 밤에 일어납니다. 물론 9가지 재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은 보호하셨지만 그 절정은 유월절 밤입니다. 이때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집에 방탄유리가 덮어져 있는 것처럼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월절의 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중심은 제사에 있고 제사의 중심은 대신희생을 통하여 가리움을 받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덮어주심의 은혜가 모세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 출애굽기 33장에서 보면,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서는 살 수 있는 인간이 없기에 모세를 바위틈 사이에 두고서 하나님의 손으로 덮으시고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덮으시지 않았다면 모세도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덮어주시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이러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돌판을 직접 주시는 것입니다. 그 처음 돌판은 금송아지 숭배로 깨어집니다. 만약 그 돌판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금송아지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판을 받습니다. 두 번째 돌판하면, 이스라엘의 반역이 증거를 담고 있는 돌판입니다. 금요일 저녁 성경공부 시간에 잠시 말씀을 드렸는데 그 돌판을 담아두는 상자가 무슨 상자 입니까 언약궤입니다. 다른 말로는 법궤이지요. 이 언약궤를 만들어 그 안에 두 번째 돌판을 담아 두는데 그 상자에 뚜껑을 덮어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16-22절을 봅시다. “봉독” 언약궤위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이 속죄소 양 끝에 그룹을 쳐서 만들어 속죄소와 연결되어 지도록 합니다. 그 속죄소를 그룹의 날개로 덮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속죄소의 이름이 각주에 다르게 나오는데 시은좌입니다.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입니다. 여기에 대제사장이 피를 들고 가서 언약궤에 뿌리고 이 뚜껑에 바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리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대로하면 모두가 죽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를 덮어두는 뚜껑의 기능이 죄를 속함으로 덮어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서 보여주는 덮어줌의 은혜입니다. 언약궤의 뚜껑 이름이 속죄소입니다. 덮어두시지 않으시고 열려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가 가리워지고 덮어지기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살아가는 자는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달은 자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시면 자신의 죄와 더러움 때문에 나는 이제 죽었다는 고백이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다고 고백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 죄를 가리워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얼마나 기쁘고 복된 소식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복음의 복음된 능력이 없어진 이유는 자신이 얼마만큼 죄인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확인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교자도 죄를 지적하기 보다는 멋지게 주님의 일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사람의 가능성을 높이 드러내기에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 나의 죄를 가리워 주소서 덮어 주소서 하기 보다는 보아라 나는 이렇게 멋진 업적을 이루어 놓았다고 자랑하기 바쁜 곳에서 어찌 덮어줌의 위력이 나타나겠습니까? 덮어줌의 그 은혜와 능력은 자꾸만 없어져야 사람의 업적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반대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수록 이 덮어줌의 은혜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속죄소라는 말이 덮어줌에서 나온 말입니다. 덮어줌이 히브리어로 카파르인데, 속죄소는 카포레트라고 합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의 행복을 보겠습니다. 시편 32:1-2절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복입니다. 그 죄가 사하여 진 것입니다. 사하여 짐은 덮어줌입니다.(5절) 오늘 우리의 최고의 복이 이것임을 믿으십니까? 이렇게 큰 복을 받고도 왜 원망과 불평이 있습니까? 주님의 용서가 우리가 짜증내고 불평하는 그것보다 시시하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가리워주심의 은혜를 뭘로 아는 것입니까? 함이 저주 받은 것은 하나님의 가리워 주심의 은혜를 무시하면 이러한 저주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4:6-8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한 것도 없이 이 행복을 받았습니다. 일한 것이 없기에 은혜요 선물입니다. 이것은 일함으로 도저히 갚아 낼 수 없기 때문에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선물이 시시합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지금 죽어도 아무런 후회가 없지요 좀 손해를 당해도 이 큰 복을 받았으니 웃어 넘길 수 있지요. 교회란 이상한 곳이라서 잘해도 욕먹고 못해도 욕먹는 이상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싱긋이 웃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네가 회장이라고 그럴 수 있냐며 니가 목사면 목사지 나에게 그럴 수 있냐며 쌍심지 켜고 나서시겠습니까? 덮어줌의 복을 제대로 받게 되면 바울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손해를 보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덮어줌의 은헤를 받는 자의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그 덮어줌의 용서가 자녀에게 우리의 형제자매에게 나타납니까?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나에게 화나게 하면 더 크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덮어줌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나는 또다시 덮어줌의 은혜를 사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참으로 이 큰 은혜가 나를 덮어서 남의 허물도 용서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것이 성령의 열매이지 나의 행함의 능력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성령의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금식도 철야도 해야 하는 것이 바르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보 되고 쪼다 되기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우리가 무엇으로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증명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가리워 보려고 애쓰는 일이 얼마나 무능한 것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59:5-6절입니다.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가릴려는 것은 거미줄로 옷을 짜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로는 자신을 가릴 수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로 자기를 가리워 보려는 것이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를 무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4:6절에서는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 우리의 스스로의 옷은 다 더러운 옷이기에 잎사귀처럼 바람에 날려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리움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후에 스스로 신이 되고자 스스로의 의를 쌓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데 어떤 심판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어린양의 의의 세마포를 입지 않은 자에 대한 심판입니다. 계시록 6:16-17절입니다.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나님께 가리움을 받지 못한 자는 어린양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산과 바위보고 가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로 가리움을 받은 자는 7:9-14절에 보면 흰옷을 입고 나오며 큰 환난에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오늘 우리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리움과 덮음을 받은 자라면 마땅히 행복해 해야 하며 그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10:1-32 영걸 1999. 10. 10
노아가 세 아들에 대한 예언이 무엇이었습니까? 함의 후손 즉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리라 하였고, 셈은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축복을 받고, 야벳은 창대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장에서 나타나는 족보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영웅이 나오는 곳은 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야벳의 후손은 2-5절, 셈은 21-31절인데 비해 함과 가나안은 6-20절로 가장 많은 분량입니다. 야벳은 유럽 쪽으로 나아가고, 함은 바벨론 지역과 가나안 지역을 다 차지하고, 셈은 바벨론 지역으로 갔다가 함의 세력에 밀려 산쪽에서 살았습니다(10:30).
그러면 노아가 세 아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한 것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기에 그대로 이루어 져야 하는데 더 강대하게 된 것은 함의 후손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됩니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무엇이나 일등을 하여야 되고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시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의 몇 구절을 가지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하는 말을 잘 사용하는데 그러나 그러한 복은 하나님의 계명을 100% 지켜서 하나님의 의가 있을 때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였다면 복이 아니라 저주인 사실을 우리는 생각을 못 하고, 또 안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기에 다른 사람이 안하는 몇 가지만이라도 하나님께 행하면 복 주실거야 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100%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복은 고사하고 저주만 떨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보면 셈의 계통에서 영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함, 저주받은 함의 계열에서 영걸이 나오는 것입니다. 영걸이란 영웅입니다. 힘있는 장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힘있고 세상에서 출세한 영웅이 어느 계열에서 나오는지를 알면 우리는 잘못된 세상의 영웅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영웅이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8절을 봅시다.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는데 세상에서 처음 영걸이라는 것입니다. 힘있는 사냥군 입니다. 고대사회에서 힘있는 사냥군, 특이한 사냥군이라면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하루 종일 들과 산으로 쫒아 다녀도 겨우 토끼 한 마리 잡아오는데 비하여 니므롯은 나갔다 하면 사슴 노루 등을 몇 마리씩 잡아오면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형제도 좋아할 것이고 동네 사람들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특히 처녀들은 니므롯을 보면서 어쩌면 니므롯의 눈에 한번 들까를 생각 하였을 겁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다른 사람은 한달 열심히 일하여도 겨우 먹고 살만큼 벌어오는데 어떤 사람은 설렁 설렁 노는 것 같은데 수백 만원 수천 만원 벌어 준다면 누가 영웅대접을 받습니까?
니므롯이 특이한 사냥군이라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많은 사냥물을 획득할 수가 있고 그 남은 획득물로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그에게 힘이 집중되고 정치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서 니므롯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제적인 영웅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니므롯이 우리의 왕이 되면 먹고 사는 문제 해결되고 또 외부의 적이 쳐들어와도 든든히 지켜 줄 것이라는 생각이 되지요.
텔레비젼 드라마 중에 안녕 내사랑 이라는 드라마에 재벌의 아들이 자기보다 여러 면에서 나은 친구를 무엇으로 종속시킵니까? 돈으로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또 자기들은 있는게 돈 뿐이니까 권력과 명예를 가진 집안과 사돈을 맺으려고 하는 것도 결국 경제력이 바탕이 되니 정치력까지 얻어서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모습입니다. 드라마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이세상의 돌아가는 현실이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니므롯이 사는 땅이 어느 곳입니까? 10절에 보시면 바벨이 나옵니다. 바벨론지역이 니므롯이 사는 땅입니다. 이곳에 바벨탑이 세워집니다. 바벨탑은 다음주에 11장에서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이 바벨론 지역은 우리가 아는 대로도 4대 문명의 발상지 이지요. 이곳을 차지하려면 힘있는 부족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 20절까지 지역도 역시 함의 후손 가나안이 차지합니다.
바벨론에서 가나안땅까지를 비옥한 초생달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 외의 지역은 사막이고 산악지역이라 살기 힘드는 곳이지만 이곳은 살기 좋은 곳인데 누가 차지합니까? 함의 후손들이 다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영웅이나 좋은 땅을 차지하고 산다고 하여 그들을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영웅이 되는 것을 왜 부러워합니까? 이들의 결국은 저주와 멸망인데 그들의 강대함이 더욱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웅을 구하고 있습니까? 금요일 저녁 성경공부 하면서도 말씀 드렸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탄은 이미 거짓 메시야 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놓았던 것입니다.
빵문제, 경제문제를 해결해 줄 영웅적인 메시야,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영웅적인 메시야,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영웅적인 메시야 이것이 사탄이 심어놓은 사람들의 영웅관이며 메시야관입니다. 사실 이 나라의 경제를 보면서 시원하게 해결해줄 사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 아닙니까? 이 나라의 정치를 보면서 훌륭한 정치적인 영웅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피 하다가 안되니 거대여당을 만들기로 하는 것이 영웅적인 정치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욱 영웅적인 지도자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죽은 박정희라도 살려내자는 것이 오늘날 모습입니다.
교계는 어떠합니까? 통합측에서는 작년 부총회장 선거가 부정으로 드러났으며, 고신측은 총회장이 공동의회를 연 것처럼 교인의 도장을 도용하여 교회 재산을 유지재단에 등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재산을 총회 유지재단에 등록해야 총회장에 출마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총회장에 교인들이 데모하러 갔습니다. 합동측은 어떻습니까? 전직 총회장이 전국여전도회연합회 부지문제를 해결하면서 뇌물을 받았다고 하고 아니라 하고 신문에 광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손해를 볼지언정 세상 법정에 교인의 일을 고발치 말라고 하였는데 온통 세상법정에 고발한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늘푸른교회는 나으뇨?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환경과 여건이 안주어져서 그렇지 우리도 수천 명의 교인이 되고 헌금이 넘쳐나면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계에서도 영웅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웅주의의 현실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이러한 영웅과는 정반대의 말씀과 활동을 하시는 예수님을 세상은 가만히 두지 않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영웅 노릇을 안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가룟 유다가 열혈당원인데 예수님이 워낙 영웅적인 행동을 안하시니까 사지로 몰아넣으면 혁명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예수님을 넘겼다는 말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웅을 기대하는 것만 아니라 자신이 또한 영웅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학생이 영웅대접 받는 길은 공부 잘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와 자녀의 영웅대접을 받는 길은 돈 잘벌어 오는 것입니다. 목사가 영웅 되는 길은 개척 3년만에 천명만 모으면 한국교회에서 영웅대접 받습니다. 이러한 영웅이 어느 족속에서 나왔습니까? 저주받은 함의 후손입니다. 세상의 영웅을 세상은 부러워하여도 우리는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저주받아 지옥가는 자들을 부러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함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경의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고자 합니다. 함의 후손이 비록 몇백 년 몇천 년을 영웅으로 강한 민족으로 살았지만 이들의 결국이 종의 종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력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어느 후손입니까? 창세기 11:10, 26절을 봅니다. 셈의 후예는 하고서 족보가 죽 이어져 가는데 결국은 누구를 지목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을 지목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셈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을 지목하여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브라함이 할 일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시지요. 함의 후손을 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언약을 맺으시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리라고 하십니다. 기존의 세력은 함의 세력입니다. 바벨론도 그렇고 가나안도 그렇고 그 당시 가장 강대국인 이집트도 함의 후손입니다.
시편 78:51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 기력의 시작을 치셨으나” 시편 105:23,27, 106:22절에도 애굽을 함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을 시적이 애굽에 대한 표현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에서 애굽을 함의 장막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왕이라는 그 시대 최고의 영웅이 함의 후손입니다. 이러한 함의 후손을 치기 위하여 셈의 후손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한 함의 영웅을 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세상의 영웅과는 전혀 거리가 먼 양떼를 몰고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내를 두 번이나 자기 동생이라고 속인 그런 약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힘은 어김없이 시행됩니다. 사라를 취하려고 하였던 바로 왕이 아브라함에게 비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왕이 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셈의 후손을 통하여 함을 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구체적으로 들어난 사건이 유월절입니다.
시편 78: 51-52절을 보시면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 기력의 시작을 치셨으나 자기 백성을 양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애굽에서 함의 후손을 치고 이제는 가나안땅에 있는 함의 후손을 셈의 후손이 치러 가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에 사는 자가 창세기 10:15-20절에 나타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부족의 이름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여도 함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을 치시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창세기 15장 12-21. “봉독”
아브라함에게 4대만에 이 땅을 너희 족속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지금 모세가 출애굽한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진격하는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에 가서 그곳에 사는 부족들을 진멸하고 또 종의 종을 삼아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은 함의 후손의 특징을 지닌 이 세상에 대하여 전면전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함처럼 덮어줌의 은혜를 모르고 무시하는 이 세대를 향하여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우습게 여기고 오늘도 내일도 영웅주의로 달려가는 이 세대를 향하여 하나님은 심판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영웅됨을 거절하여 십자가의 길로 가셨건만 이 세상의 수많은 주를 따른 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그 영웅주의에 빠져서 영웅을 만들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함의 속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는 이 세대를 향하여 셈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1-24절을 교독합니다. 이 바벨론의 멸망은 바벨탑에서 한 번 더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바벨론이 무너지는 것을 말씀만 읽고자 합니다. 계시록의 바벨론은 구약의 지역적인 바벨론이 아닙니다. 세상의 거대한 세력이요 조직이요 세상의 국가요 영웅을 추구하는 함의 속성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들이 결국 무너져 내린다는 사실입니다. “봉독” 이러한 바벨론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무너지고 망할 바벨론에서 어떻게 합니까? 모든 영웅주의를 버리고 탈출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8:4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바벨론의 원리로 살아가는 세상의 원리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고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와야만 영원한 형벌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삶을 살기 위하여 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나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살길임을 아시고 날마다 탈출을 꿈꾸며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