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 > ( Jesus' Final Odyssey ) 제2회
제 Ⅰ부 임종의 자리에서
제1장 임종을 맞이한 한 노인의 회상
제2장 12살의 유월절
제3장 소년 예수, 인도 유학길에 오르다
제4장 예수는 헤미스 복음서에서 말한다
우리의 심각한 문제는 예수를 그릇 믿는 것이며,
더 심각한 것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릇된 믿음이 우리의 모든 불행을 자초한다.
- 레오 톨스토이
제 1장 임종을 맞이한 한 노인의 회상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히말라야 산맥 남쪽의 일부에 자리 잡은 해발 1,700m이상의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여 접시모양의 분지를 이루고 있는 인도 서북부 자무와 카슈미르 주(州) 수도 스리나가르에 예수가 묻혀있다.
페르시아나 인도의 옛 시인들은 이 땅 카슈미르를 「지상의 천국」이라고 칭송했다.
특히 12세기 페르시아의 위대한 시인 ‘사디’는 카슈미르를 이렇게 극찬했다. “만일 지상에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이곳, 바로 이곳, 오로지 이곳뿐이라네!” 또한 15세기 위대한 시인 ‘자마’는 이곳을 일컬어 요정들이 출몰하는 경이로운 땅이며 인간이 살기에 최상인 ‘지상의 낙원’이라고 노래했다. 예술과 문화의 후원자이자 지지자였던 16세기 무굴제국의 제4대 황제 '자항지르'는 카슈미르를 ‘지상의 천국’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이런 이유로 수세기 동안 많은 민족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왔었는데, 그 중에는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이동했던 상당수의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동으로 동으로 이동하여 중국까지 가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살기도 했다. 예수가 카슈미르에 도착하여 정착한 것은 힌두교 왕 아크가 재위하던 시기로 예수가 실크로드를 따라 그 동남쪽 자락인 탁실라에 와서 이 년여를 지낸 이후의 일이다.
예수가 이곳 카슈미르에서 보낸 십 년 남짓한 세월은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에서 어쩜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던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묻힌 곳: 자무와 카슈미르 州都 '스리나가르'위치(좌) / 인류의 영원한 고향 '카슈미르'(우)
지난 팔레스타인에서 열렬 청년, 투사, 혁명가, 선지자로 살아 온 그의 모습은 없고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노쇠한 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남다르게 치열한 생을 살아 온 그에게 오늘은 예사로운 날이 아니다. 오늘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기도 한 그의 생을 마침내 마감해야 하는 그런 날이기에 그렇다.
그는 자그마한 집 안방에서 다리는 서쪽으로 두고 머리는 동쪽으로 향해 누워 지긋이 눈을 감고 있다. 그의 발치에는 그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여러 곳에서 온 제자들과 신도들이 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또한 집의 앞뜰에도 그의 마지막을 보고자 또한 성인의 마지막 말씀을 듣고자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그의 머리맡에는 네명의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앉아있다. 며칠 전 탁실라로 부터 험한 길을 달려 온 그의 동생 도마, 지난 십 년 간 예수의 선교와 목회를 도와 준 머리 희끗 희끗한 카슈미르인 장로 아바비드, 그리고 지금 한참 젊고 아름다운 카슈미르의 여인이자 예수의 3번째 부인인 마리온과 그의 외아들 아호이아 - 킴이라는 소년이다.
아내 마리온은 한 손은 예수의 손을, 다른 손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있다. 그녀는 가끔 스푼으로 물을 떠서 예수의 마른 입을 축여주고 있다. 예수가 팔레스타인을 떠난 것이 벌써 십 수 년! 임종을 눈앞에 둔 오늘, 예수의 머릿속에는 갈릴리에서의 그의 소년시절, 그 후 청장년기의 격렬했던 삶에 대한 기억들이 중첩되어, 그의 머릿속을 꿈결처럼 지나가고 있다.
이윽고 방안이 급격히 어두워지고 호흡이 점점 가파진다. 팔레스티나를 떠나 동방에서 10여 년을 보내면서 가슴에 병이 들만큼 그리워했던 어머니! 8남매를 키우면서 우독 큰아들 장남 예수에게만 편애에 가까운 사랑을 쏟은 그 어머니가 그의 옆에 와 계신다. 그윽하고 사랑스런 눈으로 그를 내려다 보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그리며 예수는 깊고 다시는 깨어 날 수 없는 영면에 든다. 그 때가 서력기원 71년, 그의 나이 칠십 팔세였다.
웅장하고 화려한 헤롯성전(聖殿)(좌) / 예수가 다녔던 시나고그(유대인 예배당(禮拜堂)(우)
제2장 12살의 유월절 ( Passover, 逾越節 )
예수는 어린시절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는 12살 유월절을 맞아 부모님과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갔을 때를 기억한다. 갈릴리의 작고 한적한 한 어촌마을에서 황량한 돌길을 150Km를 걸어 도착한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감격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과거 어른들의 이야기로만 듣던 헤롯성전은 자신이 다니던 시골의 작은 시나고그(synagogue, 유대 교회당)에 비하면 그 장대함과 화려함이란? 그는 그기에서 구름같이 몰려드는 순례자들의 하나같이 남루한 차림에 가난에 쪄들고 삶에 지친 모습들을 본다. 그런 그들은 성전 앞마당에서 양이나 비둘기 같은 희생의 제물을 산 다음 그들의 피를 내어 하나님께 바치며, 많고 많은 간곡한 기도를 올린다. 어린 예수는 경건해야 할 성전에서 벌어지는 이런 혼란스런 광경을 목격하면서 강한 의구심에 사로 잡힌다. “이건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게 아닌가?“ 사제들마저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돈을 챙기고 있다. 그들은 순례자들이 희생물로 바친 동물들을 뒤로 빼돌려 상인들에게 반값에 되팔고 그 상인들은 그 동물들을 또 다시 다른 순례자들에게 팔아 돈을 챙기고 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고향 마을 시나고그의 푸근한 텁수부리 랍비가 새삼 그리워진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세상 이치에 조금씩 눈을 떠가는 예수에게 이런 모순과 부조리는 더욱 크게 보이고 마음은 혼란스럽다.
이 번 유월절 순례에서 12세 유대 소년 예수는 유대전통에 따라 성인식을 치른다. 유대전통 성인식 바르 마츠바 bar mitzvah는 육체탄생에 이은 제2의 탄생, 즉 성년이 된다는 사회적 탄생을 의미하는 통과의례이다. 이제 예수는 사회의 한 일원으로 유대사회의 계율을 지키고, 유대교 예배의식의 일부를 담당해야하는 자격과 막중한 의무가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는 집에 가지 않고 성전에서 사흘동안 랍비들과 교리문답으로 교의(敎義)를 깨치고 있었다. 당시 성인식 이전의 아이에게는 랍비에게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말하거나 질문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오로지 피교육자로서 듣는 것만 허용되었다. 랍비들은 하나같이 예수에 대한 칭찬 일색이다.
"참으로 영특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요즘 아이들과는 다르군요. 교리에 관심이 많아 질문도 많이 하고, 끝까지 이해하려고 애쓰는군요. 요즘 저만한 나이의 아이들이 어디 그런가요? 우리 랍비들이 가르쳐 주면 으레 잔소리로 여길 뿐이지요."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랍비 한 분이 요셉에게 특별한 당부를 한다.
“자기의 생각도 제법 조리 있게 답하는 걸 보니 좋은 선생들에게 배우게 하면 크게 될 아이요, 잘 키우도록 하세요.”
라고 했다. 그간 아들 예수를 찾아 다녔던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얘야, 왜 이렇게 집에도 안들어 왔니? 네 아버지와 나는 걱정되어 너를 찾아 다녔단다.”라고 하자 예수는 “어찌하여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제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장차 성직자가 되고자하는 예수의 대답이다. 예루살렘 유월절 순례에서 돌아온 예수는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인간의 삶의 불공평함과 비참함, 불의에 대한 분노, 눈앞에 일어나는 여러 상황과 사물에 대한 자신의 무지와 몰이해에 대한 안타까움, 어느 누구도 답해주지 않는 일련의 근본적 의문들, ... 이런 것들이 어린 예수의 마음을 혼란스럽고 방황하게 하고 있다.
성찬식의 기원이 된 유월절 식사 (좌) / 유월절 행사의 시현(어린양의 피를 제단에 바침)(우)
“우리 유대인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민족이 아니던가? 그런데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비참한가? 로마인들 때문인가? 그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해서인가? 아니, 그럼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예루살렘 성전 순례도 좋고 희생의 제물을 바치는 것도 좋다. 각자의 행복을 간구하는 것도 다 좋다. 그러나 그 이상의 근원적으로 해야 할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하고 예수는 스스로 되묻는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나를 이 세상에 내 놓으셨나?”라고 이렇게 예수가 자신의 열두 살 소년시절의 유월절을 맞아 그가 예루살렘에서 겪은 경험, 성년식 그리고 뛰어난 감수성등은 그의 삶의 방향을, 크게는 그의 운명을, 대략적이긴 하지만, 결정하게 만든다.
복음서에 남겨진 그의 10대에 대한 단 한 줄의 기록을 끝으로 예수는 팔레스티나에서 사라진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복음 2:52)
그 후 오래지 않아 결국 그는 지고(至高)의 이상과 가치를 찾고자 멀고 먼 동방으로 긴 여행길에 오른다. 예수의 동방 오딧세이가 시작된 것이다. 그 후 16년 후 그는 29세의 청년으로 홀연히 팔레스티나에 다시 나타난다.
과연 그는 동방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그 16년에 대한 예수에 대한 기록은 왜 복음서에 없을까? 동방유학을 간게 확실한데 성서에는 왜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유월절 [Passover]
유월절은 유대의 최대 명절이다. 출애굽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신은 이집트가 히브리 노예들을 풀어주도록 하기 위해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린다.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에서 태어난 모든 첫 아이(가축도 포함된다)들의 죽음이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두면 밤에 신이 보낸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그냥 지나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유월절의 시작이다. 이 첫 유월절은 무교병(발효시키지 않은 빵)의 축제라고도 부르는데, 출애굽기 12장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히브리인들은 서둘러 이집트를 떠나야 했으므로 신은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발효된 빵이 아니라 발효시키지 않은 빵을 만들라고 명했다.그렇게 의미가 깊고 중대한 날인데도 후대 사람들은 그 날짜를 잊었다. 모세의 수백 년 뒤에 요시야 왕은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했다(열왕 23:21~23).
그 뒤부터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충실히 지켰다. 유월절 축제 기간은 7~8일 정도다. 첫날밤에는 세데르라고 부르는 식사를 함께하면서 출애굽기 12장의 이야기를 읽는다. 이때 무교병을 먹는 게 전통이다.예수의 시대에 독실한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신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보내고 싶어했다. 예수가 체포되고 처형된 때가 유월절 기간이었으므로 유대교의 유월절과 그리스도교의 부활절은 비슷한 시기다. 예수가 제자들과 가진 유명한 최후의 만찬은 바로 유월절 식사였다. 유월절 축제는 억압과 압제로부터 자유를 쟁취했음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로마는 유월절 기간이 되면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예루살렘을 엄중히 감시했다. 그런 상황인지라 빌라도와 유대 사제들이 예수를 위험인물로 낙인찍을 수 있었다. 요한복음은 로마 총독이 매년 유월절을 맞아 유대인 죄수를 한 명씩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전한다. 다만 공교롭게도 군중은 예수가 아니라 정치 혁명가인 바라바의 이름을 외쳤다고 한다.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예수를 '신의 어린 양',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불렀다(고린도전서 5:7). 그래서 유월절은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점차 중요성을 잃어갔다. 그들은 유월절보다 더 중요한 일, 즉 예수의 처형과 부활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출처] <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 > ( Jesus' Final Odyssey ) 제2회|작성자 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