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킨 소로야(Joaquim Sorolla i Bastida, 1863 – 1923)】"어머니"
호아킨 소로야 이 바스티다 (Joaquin Sorolla y Bastida , 1863~1923)
인상주의 화가 호아킨 소로야 이 바스티타(Joaquin Sorolla y Bastida : 1863~1923)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님이 콜레라로 세상를 떠나는 바람에 여동생과 함께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인생 역정이 묻어난 아머니와 아기 그림에 머문다. 아기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있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기 때문에 한몸이다. 어쩌면 그는 함께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다 이 그림을 그렸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외삼촌의 보살핌으로 성장할 수 있있었다.
14살 부터 미술공부를 시작한 호아킨은 18세되던 해에 마드리드로 가서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대가들의 작품을 모작하면서 실력을 쌓았다. 그의 열정이 통했던지 군복무를 마치고 나자 4년간 로마 유학을 지원 받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빛의 효과를 표현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습득하였다.
파리에서 근대미술을 처음 접한 호아킨은 로마 유학이 끝나자 전시회 출픔을 목표로 한 작품을 제작한다. 역사적 상황이나 도양의 풍물, 신화적인 것 그리고 사회의 단면을 주요 소재로 했는데 출품한 전시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걷우면서 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평생 동안 2,200여점이라는 놀라운 작품수의 다양한 양식을 선보인 화가였다 초기 소로야의 작품은 사실주의 경향을 띠는데 어둡고 슬픔에 가득찬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한 순간과 유명인사들의 특성을 포착하는데 집중하는 그의 작품은 어둡고 슬픔에 가득찬 사람들을 주로 그렸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로 정의되는데 그것은 소로야가 초상과 풍경 같은 가장 인기 있던 주제를 매우 상세하게 그려냈기 떄문이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슬픈 유전 Sad Inheritance> (1899)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였다. 그는 의식적으로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전의 슬픔과 동정심을 유발하는 장애아이들에 대한 주제에서 벗어나 고향 발렌시아의 바닷가로 나가 눈부신 햇살과 거대한 에너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따사로운 지중해의 풍경화 일상생활의 모습을 화려한 빛으로 표현해 나갔다
1900년경, 초기의 어둡고 슬픔에 가득찬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그린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난 호아킨 소로야 이 바스티다(1863-1923)는 보다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듬해에 스페인 인상주의의 선두주자로 다시 태어난 그는 고전주의적 형태의 견고함을 포기하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 관심을 갖는 등 큰 변화를 추구해 갔다.
또 그는 지중해의 빛과 운동감을 묘사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소로야는 초상화와 일상적 주제들을 주로 그렸으나, 가장 밝고 화려한 그림은 해변을 그린 회화들이었다. 자신의 고향 발렌시아의 눈부신 햇살에 매료된 그는, 대담하고도 즉각적인 원근법 속에 이를 반영해 갔다.
<발렌시아 해변>은 소로야의 강점을 보여주는 완벽한 예이다. 그림 속 해변과 모래, 바다에 비친 강렬한 햇빛과 그림자는 이 회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일 것이다. 나아가 화가의 거침없는 붓질은 이 고요한 구성을 지배한다. 이와 같은 거침없는 양식과 그림자를 다루는 탁월한 솜씨는, 소로야가 프랑스 화파의 이상을 비교적 준수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색채에 대한 좀더 개인적인 해석을 드러내고 있다.
스승의 딸과 결혼한 호아킨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는데 큰 딸 마리아는 성장하면서 아빠의 모델 역할을 한다. 발시아 바닷가에서 해수욕를 즐기는 장애 어린이를 묘사한 <슬픈 유전 Sad Inheritance,1899>이후 명성은 더욱 높아졌지만 그후로 살롱 전시회 출품을 목적으로 한 작품 제작은 더이상하지 않는다
1906년 호아킨으 작품 전시회가 파리 파리 조르주 쁘띠 갤러리(Galeries Georges Petit)에서 큰 성공을 걷우었는데 전시 작품 수가 500점 가까이 되었다고 한는데 풍경화 초상화 그리고 해변 풍경화 들이었는다고 한다. 그 뒤로도 호아킨의 전시회는 성공의 길을 달리는데 1909년 미국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출품된 356점 중 195점이 판매되었다고 하니 전시회 출품작 수나 판매량도 대단한 것이 었다
1911년 그의 국제적인 명성에 힘입어 미국에 있는 히스패닉 교민회에서는 그에게 뉴욕의 도서관을 위한 장식용 그림을 의뢰하였다. 그는 1912년부터 1919년까지 이 거대한 작업을 완성시키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1920년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3년 넘게 몸이 마비된 채 투병생활로 고통받다 1923년 어느날 그의 정원에서 초상화를 그리다가 69세로 끝내 사망했다. 그가 죽은 후 소로야 미망인은 남편에 대한 스페인사람들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남은 작품을 모두 스페인 정부에 기증하였고 스페인 정부는 마드리드에 소로야 박물관를 지어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호아킨이 남김 초상화의 수도 적지 않지만 초상화는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주요 장르로 삼지는 안았다. 활기로 충만한 대기와 햇빛이 쏟아지는 해변가, 그 속에서 산책을 하거나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의 풍경은 따사로우면서도 깊은 애정을 느끼게 한다.
빛과 물, 그리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마치 스냅사진의 한 컷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이면서 인상주의가 아닌 그만의 독특한 화법을 보여준다.
주요 작품에는 <해안가의 아이들 Children data-on the Seashore> (1903), <해변 산책 Walk data-on the Beach> (1909), <두 자매 The Two Sisters> (1909), <정원에 있는 아내와 딸들 My Wife and Daughters in the Garden> (191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