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다 외 2편
최희강
잠시 동안 눈을 뜨고 싶다
어제의 눈꺼풀은 어제의 기억과 함께 초승달 모양으로 기울어진다 살려줘
청량리 역사
붙어있는 의자에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는 남자는 누군가와 면담 중일까
입이 간지러운 걸까 할 말이 많아 보인다 때묻지 않은 옷을 보니 돌아갈 집은
어딘가에 있어보여 괜찮다
중얼거린다 전쟁이다 전쟁
문득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그에게서 도망쳤다
1202호 병실 문을 열고 그에게로 간다 눈을 뜨지 않아 호흡 수를 세어 본다
모르핀 주사를 맞고 잠시 고통 없이 누워있는 말기암 환자는 웃지 못한다
아니 몸을 맡긴다
사랑은 기억조차 하기 싫다는 남자가 있다 자연에 묻혀 살고 싶어 하는
꽃에 취해 살련다 그 중 양귀비꽃을 심은 사랑밭에 맨발로 다닌다
발이 시커멓다 속이 타들어간다
살면서 눈 감을 때까지 사랑 한번 하기도 힘들다
살면서 사랑할 순간아
나를 지켜다오 세상아
진주 귀걸이
함정이다 귀가 간지러워 새끼손가락을 넣어 본다 팔이 아프다 어깨가 아프다
왼쪽으로 기울어진다 왼쪽 귀는 외톨이다 기가 막힌 귀를 뚫고 앵무새 소리
듣고 걸어간다 가끔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짧기만 하다
주름진 이마에 입술을 대면 아바나의 항구로 담배연기 품으며 달려가겠지
음악처럼 살다 갈 시인이 있다 그런데 위험스럽다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여자의 귀를 만진다 피아노 건반 위로 모든 귀들이 소리를 모으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 살며시 안기고 싶다 뚫어진 귀
특별한 초대
떼어내려고 그에게로 간다 거미가 옷에 달라 붙었다고 소리친다
거미줄을 감고 거미 춤에 허우적거린다
움직이지마
단지 곁에 있었을 뿐인데 그가 거미를 날려 보낸다
에미레이트 항공 A380 서울에서 두바이 매일 운항
그녀가 매일 꿈꾸는 곳이 아르마니 호텔과
세계 최고층 건물인 부르즈 칼리파 124층 전망대에 초대 받는 것
흐르는 물 위에 찬란한 빛
남태평양 팔라우의 상어는 평생을 움직여야 살 수 있다
물이 아가미를 통과하도록 해주어야 숨을 쉴 수 있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지느러미를 휘저을 수밖에 없다
흐뜨러진 지느러미를 닮은 여자가 수족관 유리를 닦고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63씨월드 입구 상어 모형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흔들리는 몸과 이빨을 누군가에 기대어 걸어가는 지금
혼자가 아닌 게 다행이다 눈물 닦아 준 그가 보인다
비밀의 문 틈으로 담배연기를 품어내고 있다
그녀는 아직도 거미줄에 잘 걸린다
시를 위하여
풍차를 돌리는 것은 바람이다. 바람의 에너지를 느낀다. 변화의 바람이 불 때 어떤 이는 보호벽을 쌓고 어떤 이는 풍차를 돌린다는 격언도 있다. 시는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강원도 선자령 풍차를 보았다. 회전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플라이 휠. 높이 있을수록 바람의 힘이 세듯 누구나 무엇을 추구하면 일인자가 되고 싶어 한다. 시를 위하여 높은 시를 쓰고 싶고 높은 구두를 신는다. 또각 또각 걷고 싶다. 시마를 위하여 밤을 지새워야 하는가. 어느 잡지는 시마에 사로잡힌 순간을 주제로 글을 썼다. 한번이라도 시마에 걸려 들고 싶다.
마흔이다. 올해 불혹의 나이, 유혹이 많다. 시의 유혹은 받아들인다. 정진규 시인의 「미필未畢」이다.
나는 개구리라는 말로 개구리를 보고 있었다 올챙이라는 말로 올챙이도 물론 줄창 그리하였다 망개나무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망개나무가 빠알갛게 눈 맞고 서 있다고까지 쓴 걸 보면 알쪼다 애인이라는 말로만 애인까지 껴안고 있었던 걸 보면 더욱 알쪼다 개구리도 올챙이도 제대로 알았을 리가 만무하다 나의 애인들은 사흘이 멀다 하고 떠나가 버렸다 지리산 꽝꽝나무 라고 쓴 적도 있는데 그건 더욱 캄캄이었다 이젠 개구리로 개구리를 보고 올챙이는 물론 망개나무도 망개나무로 보고 있다 안경도 쓰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다 보여서 떳떳하다 도감도 찾아 보았고 실물도 속리산 가서 확인하였다 망개나무 자생지는 속리산이다 애인과 꽝꽝나무는 아직도 미필로 남아있다 할 일이 남아있다 미필이 힘이 된다 특히 애인이 생기면 애인을 애인으로 껴안을 작정이다 별정別定도 있다 어려서부터 드나든 안성 칠장사 소나무는 그 때도 미필이 아니었다 그가 돈독하게 손잡는 허공까지 상세하게 보았다 나는 거기 태생胎生이다
──「미필」 전문
물론 나의 시로 유혹하고 싶다. 특별하게 초대하고 싶다. 시 ‘특별한 초대’는 거미줄 여인이 되어 무언가에 다가가고 싶었다. 소리치고 싶었다. 세계 최고층 건물에 꼭 가보리라. 높이 있을수록 높은 시가 나올까. 시의 플라이 휠 도봉산에 오른다. 사계절 옷을 사 입으며 즐거워한다. 바위 등에 앉아도 보고 타본다.
이번 겨울에는 경주에 가볼 작정이다. ‘우연을 점찍다’라는 말도 있듯이 같이 가고픈 사람이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시를 위하여 시의 종을 울리리라. 시종일관 시를 때리리라. 음악처럼 살다 갈 시인이 있다. 그렇게 살고 싶다. 아바나의 항구로 달려가리라.
살면서 눈 감을 때까지 사랑한번 하기도 힘들다. 살면서 사랑 할 순간아 나를 지켜다오. 세상아 사랑 할 순간아 나를 지켜다오. 세상아! 새벽에 전화해서 나오라고 했다. 시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시와 통화중이다. 아니 내통하고 있다. 부러워라. 냄새까지 풍기고 싶다. 풍차를 돌리자.
널리 널리 퍼져라. 한때 그런 적이 있다. 쎄쎄쎄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엽서 한 장 써 주세요 구리구리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하고 있었지. 얼굴에 미소를 가득 채우고 손에 손벽을 치며 피가 나는 손바닥에도 웃음을 지었지. 혈血로 시를 쓰리라. 시를 위하여.
최희강 / 1971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으며 2006년 『시를사랑하는사람들』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