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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제가 없는 동안에 김경재 목사께서 강의를 한 프린터물을 자세하게 읽어봤습니다. 읽고나서 느낀 소감은 경동교회의 교인들이 정말 큰 축복을 받은 교인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김목사님의 강의가 얼마나 귀한 메세지였는가를 과연 몇 사람이나 깨달았을까? 좀 죄송한 이야기지만 그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이 문제는 지난 2000년동안의 기독교 역사에서 심각한 문제습니다. 또 오늘도 이것은 전혀 해결이 안됐고, 앞으로도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한 사람이 우리 나라에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김목사님이 전세계교회의 선각자들이 해왔던 흐름을 굉장히 잘 정리 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1962년에 열린 바티칸 공의회와 세계교회 WCC의 종교대화국에서서 낸 바아르 선언문 을 잘 정리해서 소개하셨습니다. 더구나 김목사님은 학자이기 때문에, 그 중에서 도 깊이 생각하신 부분들을 골라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죽 경험으로 배워온 제가 봤을때는, 바티칸 공의회의 문서나 바아르 선언문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글이 세계교회의 주류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세계 교회의 선구자들은 종교의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앙은 그의 구원과 능력과 활동영역을 제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활동을 인간이 어떻게 이것을 할 수 있고 이것은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 이것만 하시고 저것은 하지 마시오 라는 제한을 우리 인간은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이 주신 프린터물에 '다른 종교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서 성령의 활동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이이야기가 나오는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연하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한가지 실례를 들죠. 제가 다른 종교와의 대화모임을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사람입니다. 1965년 이 대화모임을 하고 난 후 굉장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보수파는 말할 필요도 없고, NCC계통에서도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온양에서 이 문제에 대한 협의회를 열었습니다. 그 협의회에서 NCC간사되는 젊은 목사가 일어나서 '이제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속에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 지금 어느 교단의 최고 대표가 되시는 한 목사님이 그 자리에서 발칵 화를 내고 일어나서 '네가 목사냐? 당장 취소해라. 만약 취소를 못하면 당장 NCC에서 해직시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취소는 하지 않고, 그 젊은 목사가 '예, 잘못했습니다. 제가 부덕하고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용서를 하십시오'라고 사과하고 넘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서 성령의 활동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한 것의 근거는 제가 늘 이야기했던데로 우주적 그리스도와 사랑의 에너지의 신앙에다가 거점을 둡니다. 'Cosmic Christ'는 아주 중요합니다. 신약성경의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읽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곳의 예수는 우주적인 그리스도입니다. 전 우주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리고 우리는 구원을 제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김목사님은 대화적인 신학을 주장하며 대화적인 관계를 통해서 인간해방과 생명의 창조적 보존을 위해 실천적으로 공동전선을 펴나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셨는데, 굉장히 잘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수정을 할 것도 없고, 되풀이 강조할 것도 없이, 김경재 목사님의 강의에 대해서 한마디로 아멘하고 받아들입니다.
다만 학자로서 학문연구를 통해서라기보다는 몸으로 살아오면서 실천을 해온 한 사람으로서, 하나의 문제를 제시하고 싶은데, 우리교회 안에서 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교회선교에 어떻게 반영을 시켜야하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아마도 이런 문제들은 학자들이 이야기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 중,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건이 일어난 것은 주후 49년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회의입니다. 예루살렘회의의 가장 중심되는 문제가 그리스도인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할 것이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대인에게만 할 것이냐? 라는 문제였습니다.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반드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고 개종을 해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이 되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회의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도바울에게 축복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로서 이방인에게 길이 열린 것입니다. 49년도에 예루살렘 회의가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여러분이나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길이 열리고 이방인의 세계로 복음이 나갔는데, 교회는 조직이 되면서 소위 교회를 보호하려는 호교론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하고 교회 아닌 세계와는 담을 쌓고, 구원을 좁게 몰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제일 처음 위대한 신학자가 두 사람 있었습니다. 한 명은 오리게네스이고, 또 한 명은 성 어그스틴입니다. 지금까지도 어그스틴의 영향력은 굉장합니다. 어그스틴은 어린 아기가 나서 세례를 안 받고 죽으면 반드시 지옥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아직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못 얻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구원을 받을려면 신자가 되어야하고, 신자가 되려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를 받는 그 순간에 성령이 들어오고 하나님이 들어와서 새생명을 준다는 겁니다. 그것이 없이는 절대로 천당에 가지 못하고 지옥 밖에 갈 데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까 여부를 막론하고 전도를 하게 됩니다. 전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입니다. 어딜 가던지 종교가 없는데가 없으니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이냐? 그 사람들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이고 그것 밖에 길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자기 종교를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느냐? 그대로 지옥가게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건 강압적으로라도 믿게 해야한다. 그래서 생긴게 십자군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군대를 만들어서 정복하고 강제로 세례를 받게한거죠. 이것이 죽 내려온 싸움이 십자군 전쟁입니다. 전쟁 중 가장 긴 전쟁이 십자군 전쟁이죠. 그리고 그것을 또 거룩한 전쟁(Holy War)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들이 여행하게 되면 특히 북아프리카를 가보십시오. 모로코, 튀니지, 터어키, 이런 지역을 가보게 되면, 십자군 전쟁에서 일어난 잔인하고 비참했던 전적지가 다 그대로 있습니다. 북아프리카나 유럽에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군이 러시아에도 들어와서 정복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추운 겨울 사람들을 전부 끌어내다가 얼음을 깨고 사람을 강에 집어넣는 세례를 하게 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표를 하나줍니다. 그것이 우리로 말하면 주민등록증 같은 거죠. 그런 식으로, 러시아의 아르메니아가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 301년이고, 러시아가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 구백 몇년이 됩니다.
십자군 전쟁과 그리고 거기서 따라나온 종교재판은 결국에 신학적으로는 어디로 가게 되는가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다' 라는 생각입니다. 지금도 저는 헨델의 메시야를 좋아하지만, 딱 듣기 싫은게 '만왕의 왕'이라는 가사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입니다. 그런데 그걸 기독교가 완전히 정치적인 정복에다 이용한 겁니다. 땅위에 있는 예수의 대리자는 교황뿐이니까 어느 한 국가의 왕이 될 때 교황의 승인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 역사가 아시다시피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는 적대감정과 그들을 정복대상으로 보는 것이 기독교에서 처음 문제가 제기 된 것은 1928년입니다. 1928년에 예루살렘에 모인 세계선교회의(IMC,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였습니다. 거기서 비로서, 그리스도의 빛이 꼭 기독교회당 안에만 비치느냐? 그런 문제가 제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다른 종교를 믿는 우상숭배자들를 바꾸어야된다고 하는 선교를 전제로 하고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신학적으로 처음 문제가 제시된 것은 1938년입니다. 60년이 채 안됩니다. 1938년 인도의 탐바란이란데서 세계선교회의가 모였습니다. 이교도와 비기독교의 세계에서 세계선교회의가 모였다는 것도 놀라운 이야기 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영국사람 핸드릭 크레마가 거기에서 발표한 것이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크리스챤의 메세지입니다. '기독교가 아닌 종교에 대해서 기독교가 할 말이 무엇이겠는가'라는. 여기서부터 이런 문제가 논의가 됐지만, 큰 맥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 김목사님이 이야기한 1962년의 카톨릭의 제 2 차바티칸 회의입니다. 그땐 벌써 제가 WCC의 위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입니다. 카톨릭하고 우리하고 공동으로 하는 위원회도 이때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러면 카톨릭은 싹 바뀌었느냐? 선언문을 보면 그렇게 됐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령 그 바티칸 공회 이후에 교황에게 이런 것을 물었습니다. '개신교나 동방정교회 예배에 참여해도 무방합니까?' 그렇게 물어보니까 교황이 답하기를 '참여하되 가슴은 차게 가져라'고 했답니다. 제 이야기를 하나 하지요. 한국교회역사에서 카톨릭교회에 제일 처음 강론을 한 사람은 접니다. 1972년입니다. 그때 교황이 내려보낸 교서에 1월 첫주일은 평화를 위한 주일이기 때문에 카톨릭 신부가 아닌 사람이 강론을 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갔습니다. 그날 우리교회 교인들이 다 갔습니다. 성가대원들도 다 갔습니다. 개신교에서도 개신교 목사가 카톨릭교회에 가서 강론을 한다니까 많이 왔어요. 실제로 그날 명동성당이 꽉 찼는데, 아마 카톨릭 신자보다는 개신교 신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거기가서 참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매주일 반드시 성찬예식을 합니다. 제가 박영호 신부랑 같이 앉았는데, 성체를 나누다가 내 앞으로 그냥 썩 지나가는 것 이었습니다. 내게는 주지 않았습니다. 나를 생각해서인지 옆에 앉았던 박영호 신부도 거절을 했습니다. 성체가 끝나고 나니까 예배인도하던 신부가 제단의 불을 꺼버리는 겁니다. 그리고는 '미사는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오늘은 개신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강론을 하는데, 들을 사람은 들으십시오'라고 그 신부가 말했어요. 그러니까 머리두건을 쓰고 있었던 여자들이 전부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주일 교회일치 주일에 카톨릭의 황성민 주교를 우리 교회에 데리고 왔습니다. 우리 예배에는 그분을 똑 같이 참여를 시켰습니다. 1972년도 이야기 입니다.
개신교 WCC 에서 만든 바아르 선언문은 한마디로 기가 막힌 문서입니다. 이제 이 바아르 선언문이 나오기 까지의 일들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바아르 선언문을 낸 WCC 산하 종교대화국의 위원이 된 것이 1968년입니다. 그리고 1984년까지 관계를 했습니다. 맨 처음에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Dialogue with Other Faith)'라고 이름 붙였는데, '다르다'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이렇게 해도 되느냐는 문제가 생겨서 이름을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Dialogue with Living Faith)'로 바꾸었습니다. 이것도 통과시키는데 굉장했습니다. 반대도 많았습니다. 이것이 1970년대가 가까이 되어서 태국에서 그 모임을 가질 때, 이름을 'Dialogue in Community'로 바꾸었습니다. 발전은 되었지만, 1975년 케냐 나이로비 WCC총회에서 우리 부서의 보고가 나갈때, 독일의 신학자가 나와서 WCC가 이따위 짓을 하게 되면 혼합주의 종교(syncretism)를 만드는 것이라고 반대했습니다. 그때 제가 뛰어나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이야기는 이겁니다. '그래 너희가 혼합주의를 걱정하는데, 이미 기독교가 혼합주의 된 것 아니냐? 로마에 들어가서 예수의 탄생일을 결국에 로마 사람들이 섬기는 태양신의 날에 맞추어 놓은 것은 누가 했느냐? 우리 동양 사람들이 그랬느냐? 그 지역의 문화에 들어가면 다 혼합주의화 되는데, 왜 서구문명 속에서 혼합주의화 된 것은 괜찮고 동양에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거냐, 그런 사고방식이 어디에 있느냐?' 제가 그렇게 나이로비 총회에서 공격을 한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해결이 안된 상태이지만, 선각자들의 힘은 차츰차츰 커가고 있고, 초창기처럼 무조건 반발을 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이만큼 세상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이 문제는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오늘의 타종교에 대한 교회내의 몇가지 대표적인 태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다 우상숭배라고 보는 그런 십자군적인 정신, 그것이 지금까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4월 초파일이 지나갔습니다. 4월 초파일이 지난 다음에 조선일보에 사설까지 나왔습니다. 불교에서 만들어 놓은 것을 밤사이에 가서 다 훼손을 하고, 심지어는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 그거 길안내를 위해서 세운 것이지 신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가서 다 잘라버리고, 그건 으례히 기독교가 한 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불교 선교단이 있습니다. 불교만 예수를 믿게 만드는. 불교 선교단을 만들어서 부흥회를 하는데, 그것 어떻게 하는가하면, 강단을 만들어 놓고 부처를 위에 올려놓고, 부처 꼭대기에 십자가를 꽂아놓습니다. 그리고선 불교를 믿다가 예수를 믿은 사람의 증언을 시키는 그따위 짓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라면 으례 우상숭배라는 식의 철저한 배타주의적인 사고가 여전히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그 이류를 찾습니다. 십계명에 첫계명에 나외의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계명에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들은 십계명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분명히 성경에 나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도 나옵니다.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성경구절을 가지고 그렇게들 하는데, 그 사람들은 성경을 잘못 읽었다는 겁니다. 대단히 잘못읽었다는 겁니다. 나외의 다른 신이라고 할 때, '나'인 하나님을 다른 종교의 신과 대등하게 놓고, 다른 신을 섬기지말고 하나의 신인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겁니까? 그런거라면, 야훼하나님은 여러 신 가운데의 하나(one of many gods)입니다. 이거야말로 우상숭배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이던지 초월해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그 지식적으로 알 수도 없는 초월해계신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을 믿으란 말인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이 one of many gods이 됩니다. 그리고 형상이라는 것 가지고 말이 많은데, 형상 없이 예배를 보는 데는 미국의 퓨리탄 밖에 없습니다. 세계 기독교는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조다윗 목사가 모스크바에서 전도강연을 하다가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러시아 에는 기독교 가 없다, 우상숭배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꼭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겁니다. 러시아 정교회에 들어가게 되면 여러가지 상이 있거던요. 그러니까 우상숭배라고 생각하는 거죠. 카톨릭과 성공회도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나 십계명의 2 계명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가령 하늘에 있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철학으로 말하자면 어떤 형이상학적인 도그마를 절대화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을 절대화를 하게 될때, 하늘에 있는 형상을 만드는 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인데, 그 '나'가 뭡니까? 기독교입니까? 기독교 장로회입니까, 예수교 장로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교 장로회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곧 나다 라고 하셨습니까? 다들 제멋대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라고 했지, 기독교 장로회를 이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합동측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아주 베타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한국교회의 90% 이상입니다.
두번째 태도는 소위 WCC에서 회의 때마다 문제가 되는 혼합주의(syncretism)입니다. 결국 혼합주의를 아까 제가 말씀드린데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syncretism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각 종교에서 좋은 점을 뽑아 모아서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것은, 부분적인 정당성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태도는 종교의 고유한 주체성을 희석시키는 것이고, 특히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은혜, 진리, 생명이 가득 차 있다는 신앙은 그럼 어떻게 됩니까?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번째 태도는 요사이 종교인 평화회의 다니면서 보게되는 태도인데, 힌두교나 다른 불교에서 많이 말하는 종교연합입니다. UR 운동이라고 합니다. United Religion 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별히 원불교가 이것을 많이 주장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진리를 산봉우리라고 예를 들면서, 산봉우리는 누구도 올라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산봉우리를 향해 올라가려고 할 때 길이 여러갈래이다, 그 길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라는 길이고, 하나는 불교라는 길이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산봉우리룰 향해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상당히 이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꼭 부정적으로 볼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지 못하는 봉우리를 향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로 분명하신 그리스도를 향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고 더 하고 싶은 것은 구원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문제가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게 아니라 불교를 잘 믿어도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도 성실하게 믿기만 하면 구원이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열심히 반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찬성은 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보수적인 것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 같지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길이 열린다는 것을 그대로 믿습니다. 이것이 과연 편협한 것일까요? 1961년도 뉴델리 WCC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다' 였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불타가 빛이다, 알라신이 빛이다고 이야길 합니다. 그럼 왜 예수만이 빛이냐? 그게 다른 종교에서 제시된 문제였습니다. 그때 비자트 후트 총무가 좋은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빛이다 라는 어쩌면 배타적이고 폐쇄적일 수도 있는 이 이야기를 정말 잘 알게되면, 전우주를 품는 개방적인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 이라고 했을 때, 그때의 그리스도가 누구냐? 우주적 그리스도입니다. 빛 또한 교회당 안에만 비치는 빛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인지를 알게되면, 그 빛은 모든 데 개방된 빛임을 알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종교 간의 대화에 전력을 다해온 지가 내년이 30주년입니다. 우리 나라의 6대 종교가 모여서 첫 대화를 한 것은 65년 10월 25일 용당산 호텔에서 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죽 이 일을 해오면서 제가 가진, 대답이라기 보다는 느꼈던 갈등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불교계에는 제가 존경하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그 분들하고 이야기를 할 때, 저는 불교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왜 그러냐? 저는 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 스스로가 잘 수행을 해서 깨달아 부처로서 성불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못됩니다. 아무리 해봐야 도저히 안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죄인입니다. 인간들 중에는 의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나오는 성경말씀이기 때문이 아니라, 제 자신이 실존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용서 없다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소박하게도,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은 예수 그리스도, 피흘리시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는 그 사죄의 은총, 무덤을 헤치고 일어난 부활, 이런 놀라운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성령, 이런 것을 떠나서 제가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중생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모임에서 '너희하고 우리하고 사실 같다, 종교의 이름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같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한번도 한 일이 없습니다. 분명히 다르다는 겁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확실한 주체성이 없으면, 다른 종교와 대화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대화가 필요합니까? 다 합해버리면 되는 거죠. 오늘은 불당에 가서 법회를 하고, 내일은 교회에 가고, 모레는 다른 데에 가면 되는 거지. 그러나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주체성을 명백하게 하자는 겁니다. 어물어물하지 맙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임을 명백하게 하면 할 수록 더 개방적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종교와 연대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주체성이 확실하면 할 수록 연대성의 폭이 넓어집니다. 그것이 제 생각이고, 저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작년 감리교신학대의 변선환 교수 문제 때, 어떤 신문에서 와서 '불교를 믿는 사람도 구원을 얻느냐?'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어요.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제가 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틀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 해당 되면 구원을 얻고, 해당 되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다면 이 사실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야지 구원을 얻는다, 저는 그대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파가 만들어 놓은 요리문답에 나오는 그겁니까?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가 경동교회입니까? 저는 요즈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요즈음 같으면 저는 목사가 못될 것 같아요.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서약을 합니다. 요리문답에 나오는 질문 같은 것을 여기서도 하는데, '당신 이것을 믿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예'하고 대답을 해야하구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것은 믿지 않아요. 다만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느냐?' 하면, 저는 확실히 '예'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신학이론으로 만들어진 질문을 만들어 '이런 것을 믿느냐?'고 하면, 정말 지금은 확실하게 대답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제가 목사가 될 때는 거짓말로 대답한게 아니라 확실하게 대답했었는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와서 우리 죄를 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마직막에는 알파와 오메가로서 새하늘과 새땅이 됩니다. 우리는 부활과 새하늘과 새 땅 사이의 중간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중간시대에 선교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선교활동이 오늘의 상황 속에서 뭡니까? '인간화'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대우를 받고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평화(Shalom)'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저는 선교활동의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선교활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기독교만 해야 합니까? 지금 간단한 예를 하나 들죠. 환경문제, 생태계문제, 생명문제를 가지고 종교 간의 대화를 여러번 했어요. 한국에서도 했고 아시아에서도 했고. 여기에서 이론적인 신앙으로서 제일 뒤떨어진 것이 기독교입니다. 불교도 우리하고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심지어 천도교는 자연을 해치는 것은 어머니의 살을 깎아내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거기서는 대지와 자연을 어머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뭐 잘났다고 '기독교만' 하고 떠듭니까?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오늘의 이 시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다 보니까, 생명문제, 환경문제, 인권문제, 성차별문제, 가진 자와 못가진자의 문제, 남북간의 분단, 이런 모든 문제들이 있더라는 겁니다. 그 문제가 기독교만의 문제입니까? 다른 종교와 같이 협력해야합니다. 실제로 같이 협력을 하지 않는 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들과도 연대해야합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합니까? 우선 우리가 좀 겸손하게 많이 배워야 합니다. 많이 배움으로서 신앙의 성숙한 경지에 가야 합니다. 다른 종교인들의 신앙을 배운다고, 우리 신앙이 없어진다면, 그 정도의 신앙은 버리는 게 낫습니다. 자기 신앙이 있다면 그 신앙의 그릇에다가 다른 사람의 신앙을 담아내야 합니다. 저는 다른 종교인들을 예배시간에까지 데려올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의 여신도회나 다른 그룹에서, 불교의 고승 같은 분들을 모시고 이야기 나누는 것은 어떻습니까?
제가 딴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지금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과거에는 시민회관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전국불교 대회가 있었어요. 이청담 스님이 그때 전불교의 종정이었구요. 전국에서 머리 깎은 스님들과 신도대표가 그 시민회관에 꽉 차게 모였는데, 이청담 스님이 저를 불러 제가 거기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만약 제가 이청담 스님을 기독교들이 모두 모인데 불러서 강연하게 하면, 기독교인들이 오지도 않겠지만, 저를 죽일놈의 자식이라고 욕하지 않겠어요? 실제로 이청담 종정이 세상 떠났을 때, 제가 동국대학교의 장례식에 참여해서 종교계를 대표해 헌화를 했습니다. 이것이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많은 기독교인이 '저 자식, 빨리 불교로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편협해서 뭘 할 수가 있겠어요? 오히려 우리가 겸손하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불교도들을 모아놓고 기독교를 가르칠려고 애를 쓸려는 것이 아니라, 물론 우리도 가르쳐야합니다, 그러나 먼저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될 것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를 우리가 같이 취급을 해야하느냐? 이것이 참 문제입니다. 세계종교인 평화협의회 중앙위원회가 1986년 북경에서 모였을때, 헌장을 만들면서, '우리는 모든 종교에 문을 연다 (open to all religion)'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호머 자끄라는 분이 강단에 뛰어올라와서 '통일교도 들어오겠다고 하면 받아주겠다는 말이냐?' 그래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명백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대화모임을 1965년도에 시작할 때 부터, 6대 종교에 한정을 시켰습니다. 카톨릭, 기독교, 불교, 천도교, 유교, 원불교. 지금도 한국에서는 6개 종교에 한정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모임에는 천리교도 들어가 있고, 통일교도 들어가 있고, 다른 종교도 들어가 있습니다. 제가 관계하는 곳에는 그런 것을 뺏습니다. 제가 1986년부터 아시아 종교인 평화회의 의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여기는 18종교가 회원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시아에서는 18종교와 한국에서는 6종교로 제한시키는, 자격과 카테고리가 뭐냐? 역시 새로운 하나의 배타주의가 아니냐? 항상 애매합니다. 문제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근본적인 입장이 있습니다. 그 종교의 본질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인간화'에 공헌을 하느냐? 역행하는 것이냐? 라는 겁니다. 평화의 실현, 전쟁방지, 핵무기 문제, 군축, 생태계보호,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 종교가 실천하고 있느냐? 아니면 자기 종교만의 욕심만을 채워주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역기능만 하고 있느냐? 이렇게 '인간화'에 역행하는 종교는 포함 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현재까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토인비도 Higher Religion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것을 다섯 종교로 이야기 했습니다만, Higher Religion과 Lower Religion을 과연 어떻게 구분하느냐는데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
이제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 하고자 합니다. 종교가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거냐? 나쁜 일을 하는거냐? 종교가 어느 쪽의 일을 많이 하느냐는 겁니다. 작년에 세계종교 100주년 대회가 시카고 에서 열렸을 때, 제가 한 미국사람이랑 논쟁을 하였습니다. 종교가 '평화를 만들어가는 근원(Source of Peace)' 이냐, 그렇지 않으면 '갈등을 만들어가는 근원(Source of Conflict)'이냐? 라는 문제였습니다. 저는 Conflict 쪽에 강조를 두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저를 반박하면서 미국의 마르틴 루터 킹에 대해서 이야기을 했어요. 마르틴 루터 킹이 큰 일을 많이 하지 않았느냐, 그겁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을 했어요. 마르틴 루터 킹은 흑인을 사람대접받게 하자고 하다가 죽은거 아니냐? 그렇다면 흑인들이 사람대접 못받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 미국의 기독교가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노예대접받는 이들을 사람대접하라고 한 사람은 위대하고, 근본적으로 흑인을 노예로 만들어 버린 기독교에 대해서 왜 당신은 말하지 않느냐?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끝내면서, 헉슬리의 '기독교가 역사에서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역사에서 기도교가 나쁜 짓 한 것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박수를 사람들이 내 편에다가 많이 치더라구요. 그렇다고 할 때, 그러면 저는 종교반대운동을 해야합니까? 역시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참된 관계에 있어서, 김경재 목사가 이야기했던 아시아적인 영성과 그리스도교의 영성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를 김경재 목사님이 앞으로 할 기회가 있을텐데, 김목사님 아니면 듣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야기를 정말 깊이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영성(spirituality)문제가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성령론만 가지고 하나님의 영성 이야기가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문제만 던지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전도를 해야 되느냐? 제게는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까지를 읽으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부탁한 대명령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다른 종교인들에게 전도는 하지 않고 환경보호나 같이하자고 하면 되는 거냐? 우리가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우주적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은 기독교인에게만 비춰지는 겁니까? 모든 인류와 모든 피조물에게 비추어집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나오는데로, 하나님께서는 햇빛을 선한 사람, 악한 사람, 이방인 다 비추어 주십니다. 다만 다른 종교인들이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있고 성령의 알려주심으로 아는데, 그걸 다른 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사랑은 저들에게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테만 비추어지고, 저기는 비추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는 것이 전도라면, 그 전도를 할 때, 큰 소리를 치지 말자는 겁니다. 지옥간다고 협박하지 맙시다, 그런 식의 개종주의는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직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대화입니다. 나머지는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 기독교가 혹은 우리 교파가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결국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 편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안에서 새하늘과 새땅의 구원을 믿는다면, 우리는 겸손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