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입학을 하고 25일 후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6.25 당일 1기
선배인 육사 10기생들과 같이 포천 전선에 투입되었다.
선배인 육사 10기는 그런대로 1년간 교육을 받아서 군인 티가 나는 상황이었지만
박경석 생도 기는 제식 훈련과 집총 훈련 정도만 겨우 진행되고 있던
상태였다.
출동 직전 영점 사격 3 발을 해본 것이 사격의 전부였다.
맨 왼쪽이 포천 전선을 공격했던 북한군 3사단장 이영호- 최용건 계의 빨치산.
윗줄은 김일성의 직계 류경수[좌-105 전차 여단장]와 동해안 공격의
766부대
오진우[우-오랜 세월 북한의 민족 보위상을 했었다.]
남침 때 두 인간은 물론 이영호까지 무자비한 학살을 많이 저질렀다.
그러나 원체 다급해진 전황으로
육사의 교도대는 물론 생도대도
전원 전선에 투입되었다.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의 명령이었다고 한다.
잘못되었어도 크게 잘못된 결정으로서 이것은 북한군 침공 후
35살의 경험없던 채병덕 장군이 북 침공 사흘 동안 범한
여러 큰 실수의
한 작은 경우였다.
북한군 3사단의 공격에
맞서 배치된 박경석 생도 동기들은
이 무모한 전투에서 무려 86명이나 전사했다.
현실 감각 없었던 국군 간부의 또 다른 행태로서 육사 교장 이준식 장군은
피를 흘리고 모교로 후퇴한 생도대 부상병들은 이 신성한 육군
사관학교에
저런 패잔병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다 내쫓았다고 하니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이들 중에 다수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원에 입원했다가
북 105 전차 여단 소속 병사들에게 모두 학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망과 분노에 빠져 수원 남쪽으로 후퇴한 생도대는 모두 돌격해서
옥쇄하자고 결의하고 공격 개시선으로
이동 중에 백선엽 1사단장이 제지하는
바람에 단념하기도 했었다. 생존한 생도들은 모두 부산 동래에 집결해서
종합학교라는 이름으로 급조된 군사학교에서 단기 훈련을 받고
정식 소위로 임관하였다. 박경석 장군의 기는 나중에 육사 생도 2기생으로
불리게 된다.
그의 동기들은 한 명만 빼고 전원 당시 신설 사단인 9사단
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
사단장은 후에 참모총장이 된 장도영 장군이었다.
1950년 10월 25일 창설된 9사단 [백마부대] 엠브렘
9사단은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밀려 전선이 남쪽으로 내려온 상황에서
강원도 평창에서 남진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띄고
작전에 임하고 있었다.
소속된 3대대장은 평창의 1,077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적 연대 병력의 주력을
격퇴하라는 명에 따라 두 개 중대에게 야간 이동을 명령했다.
밤새 산등성이를 타고 7부 능선까지 올라가서 대기하다가 동이 트는 새벽 6시에
고지를 공격하는 작계[作計]에 따른 것이었다.
장진호에서 이동하는 미 해병들,
1077 고지 공격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1,077고지라면 서울 북쪽 북한산과
비슷한 높이며 서울 남산보다 다섯 배나 높은 산이다.
이런 산의 고지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다는 정보만으로
판단하고
아무런 사전 정찰이나 훈련도 없이 야간 이동과 공격을 명령한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올라가는 길은 가파른 경사지에 무릎 깊이까지 눈으로 뒤덮인 그런
지형이었다.
험한 등산길에 길을 잃은 중대원들은 후래쉬를 여기저기 비추고
침묵해야 할 무선망까지 열어버려서
자기들의 위치를 고지의 북한군에게
스스로 다 노출해버렸다. 국군의 접근을 발견한 고지의 북한군들은
산 중턱까지
내려와서 매복했다가 기습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죽은 북한군과 포로가 된 북한군 포로
무능한 중대장은 북한군의
출현에 놀라서 도망쳐 버리고 대대장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의 혼란한 상황에서 소대는 소대대로 싸워야 했다.
이때의 야간 전투 경험을
살렸는지 그가 재구 대대장으로서 월남에서
베트콩 부락을 공격해서 승리한 작전은 문자 그대로 '치밀' 그대로였다.
맹호부대의 베트콩 부락 야간 기습
파월 훈련시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안고 자폭한
강재구 중대장 - 그의
이름을 딴 재구 대대는 맹호부대 최강의 전공을 기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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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는 잘 싸웠으나 전투
진행 중에 박경석 소위는 접근한 적이 던진 수류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소대는 그대로 후퇴해서 대대에 박경석
소위 전사 보고를 했다.
박경석 소위는 정신을 잃고 아침까지 쓰러져 있다가
전장 정리를 하던 북한군에게 발견되었다.
대개 후퇴한 적이 남겨놓은 중상자는 사살하는데 박소위는 나이도
어리고
잘 생겨서 북한군은 박소위를 여자로 오해하고 상관에게 보고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박경석 장군은 지금 80이 넘은 나이에 보아도 잘 생긴 미남이다.)
결국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 소동으로 박소위는 즉결처분 당하는
운명을 피해서 북한군 후방으로
호송되었다.눈을 떠보니 박소위는
어느 동굴같은 곳의 응급 치료소에 누어 있었다.
귀의 고막이 날아가고 허벅지에 큰 파편상을 입었으나 북한군 군의관과
여자 간호 장교가 잘 돌봐주어 완쾌할
수 있었다.
지금도 박장군 다리에는 북한군 군의관이 가정 집에서 쓰던 바느질용 무명실로
꿰맸던 굵은 바늘
자국의 상처가 남아있다.
다부동 방면을 공격하였던 북 13사단 사단장 최용진을 쏘고
미군에
투항했던 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 미군이 그를 포로 수용소로 보내자
그는 분개해서 다시 전향하고 포로 교환
때 북으로 갔다.
박소위가 이 동굴의 가마니 위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어느 날
밖이 수런스럽더니 갑자기 북한군 간부 하나가 들어왔다.
어깨에 왕별 하나를 부착한 북한군 사단장이었다
첫댓글 https://namu.wiki/w/%EB%B0%95%EA%B2%BD%EC%84%9D
에 소개한 박경석 장군의 생애를 읽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