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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7;12-18, 계속 하세요. go ahead, 2018, 3, 5.
논어의 학이 편에 ‘과이불개(過而不改) 시위과의(是謂過矣)’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하고서도 고치지 않으면, 이것은 잘못이다. 라는 뜻입니다. 공자는 잘못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논어에 잘못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미 잘못한 부분에 대하여 과거를 나무라기보다는 그 잘못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잘못을 했을 때는 곧장 바르게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학이(學而) 편에 군자의 수양에 관하여 군자는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학문을 해도 견고하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서 충성을 하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친구로 하지 않는데, 이런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다보면 바꾸고 고쳐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계절을 따라 옷을 바꾸고, 생활용품도 바꿔야 합니다. 때로는 집도 바꾸고 때로는 직업도 사업도 바꿔야 될 때가 있습니다. 생각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 가지고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신앙 정신입니다. 믿음입니다. 생각입니다.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에서 정결하지 못한 물이 나오면, 그래서 좀 깨끗한 물을 얻고자 하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페인트칠을 하고, 주변에 예쁜 꽃도 가져다 놓고, 정리를 한다고 그 샘물이 깨끗한 물로 바뀌어 질까요? 근본적으로 고쳐야지요. 삶이 바뀌고 문제가 해결되려면 심령을 바로 세워야 온전한 변화를 맛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그만큼의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믿음과 신앙의 苦難과 역경을 극복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이것을 개척정신이라고 합니다. 쓸모없는 땅, 버려진 땅, 남들은 기대하지 않던 그 땅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고 개척자, 선구자입니다. 여러분, 다 만들어진 좋은 조건 속에서 쉽게 일하는 사람은 개척자가 아니고, 선구자가 아닙니다. 어려운 조건과 악조건 속에서 낙심하지 않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창조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고, 선구자이고, 개척자입니다. 오늘 말씀은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진리와 교훈을 줍니다.
1.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큰 복을 받은 요셉 지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가나안땅을 입성하고 정복을 합니다. 그런데 정복한 가나안 땅의 왕들의 이름이 수12;7-24에 31명이 나오는 것을 보면 가나안 정복이 이스라엘에게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해 줍니다. 물론 아직 점령할 땅이 있지만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여호수아가 12지파에게 제비를 뽑아 분배를 합니다. 그런데 12지파 중에 요셉지파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특히 17;1 이하에 므낫세는 복을 받아서 요단 동편, 서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여자들이 후손인 슬로보핫의 딸들도 기업을 받았습니다. 이미 요단 동편은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지파가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요단 서편에서 여리고성점령을 시작하여 아이성과 아모리의 다섯 왕들을 점령하고, 31명의 왕들이 통치하는 땅을 정복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스라엘 민족이 점령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직 점령하지 못한 땅에 대해서 먼저 선 분배하고 후 점령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땅을 분배하던 중에 유다 지파의 갈렙이 험준한 헤브론산지를 두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의 열두 명의 정탐꾼 중에 한 명이었던 갈렙은 45년의 세월이 흐른 후 85세가 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었고, 45년 전이나 85세가 된 지금이나 여전히 40세, 개척정신, 청년정신을 가졌습니다. 그는 산세가 험하고 거인 아낙자손이 사는 헤브론 산지를 내게 달라며, 도전하는 신앙정신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요셉지파의 자녀,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반지파가 땅을 분배받고, 나머지 일곱 지파 반도 땅을 분배 받습니다. 그런데 17;14절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요셉자손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여러분, 요셉지파는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큰 민족이 되었습니까? 큰 민족과 복을 받은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요셉 가문을 크게 축복을 하셨습니다. 다른 지파보다 크게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큰 민족으로 복을 받았다는 것은 요셉의 후손,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아버지반열, 삼촌의 반열에 똑 같이 지파의 대우를 받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12명의 자녀들입니다. 그 중에 요셉이 끼여 있습니다. 그런데 땅을 분배를 받을 때에 레위지파는 제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1지파가 분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지파를 축복하셔서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당당하게 삼촌과 같이 지파의 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12지파에 들어가고 12지파의 대우를 땅으로,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이 것이 요셉지파가 받은 축복이고 큰 민족입니다.
그런데 각 지파마다 제비를 뽑아 분배되는 땅을 말없이 다 수용을 하는데 요셉 지파,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지파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불평을 합니다. 왜 우리에게도 다른 지파처럼 한 몫만 줍니까? 우리는 큰 지파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이 이 말을 하는 배경 속에는 특권의식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선조는 요셉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누굽니까?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요셉 때문에 11형제가 다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공을 내세웁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멋진 답변을 합니다. 15절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여러분! 왜 이 말이 멋진 말입니까? 여호수아는 어느 지파 사람입니까? 바로 요셉의 자손인 에브라임 지파 사람입니다. 자기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와서 한몫을 더 달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언지하에 스스로 개척하라고 합니다. 참으로 매몰차게 보입니다. 어떻게 자기 친족들이 와서 부탁을 하는데 이렇게 한마디로 잘라버릴 수 있을까요? 자기가 속한 지파 이익을 추구치 않는 그 여호수아의 자세, 이것이 정말 개척자의 정신이며 올바른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요셉자손들, 에브라임, 므낫세의 불평이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두지파이기에 두 몫을 달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주어진 땅은 산지요, 점령키 어려운 땅을 개척해서 갖으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들에게 이렇게 하셨을까요? 대부분 산지요, 그곳은 장대한 가나안 족속이 철 병거를 가지고 진을 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주었을까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께 이 요셉지파와 같은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기둥인데, 내가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는데, 내가 이일, 저일, 감당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왜 이 모습으로 복을 주실까? 왜 삶은 더 고되고 힘든 일만 계속 되는 것일까? 주님! 정말 이럴 수 있습니까? 나에게는 두 몫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바로 그 때, 주님은 뭐라 하실까요? 14절에 요셉지파는 큰 민족으로 복을 받았습니다만 이어지는 말씀은 황당합니다. 당신이(여호수아)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요셉자손에게 복을 내려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으면 감사해야 할 일인데. 이어지는 말씀은 여호수아에게 불평과 불만과 원망을 말합니다. 심정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는 땅이 비좁다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복을 하기 전에 축복을 하고 약속을 하고 예언을 하셨는데 민수기33;5절에 너희의 종족을 따라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각 제비를 뽑은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조상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받을 것이니라. 여러분, 크면 큰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주라는 것입니다. 단 제비를 뽑아서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행동에 이해가 갑니다. 분배받은 땅이, 살 땅이 비좁긴 하지만 그러나 요셉자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이 큽니다. 그러면 감사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불평, 불만, 원망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모습이 그렇지 않나요? 주님께서 나의 삶 가운데 큰 복을 주시고, 많은 것들을 누리게 하셨지만, 지금 당장 내 눈 앞의 상황이 좀 나쁘다고 하여서 주님께 불평하는 모습들. 이런 모습들이 내 안에 있진 않나요? 죽었던 우리들을 구원하셨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살리셨는데, 불평, 불만, 원망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까지 인도하심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축복입니다. 큰 민족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복, 이미 주어진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오늘 본문의 중심내용은 스스로 개척하라는 개척정신입니다. 삼림이라도 스스로 개척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요셉자손의 이러한 불평과 불만과 요구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을 하나요? 15절에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을 하라. 하지만 요셉자손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16절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무슨 말인가요? 여호수아는 요셉자손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아 큰 민족을 이루었으니까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할 것을 말하지만, 요셉자손은 그 땅에 거주하는 자들은 다 철 병거를 가지고 있어서 점령하기 힘이 드니까 다른 땅을 분배라는 거예요. 요셉자손은 쉽게 차지할 수 있는 땅을 분배하라고 여호수아에게 요구합니다. 개발의 부적절함을 조목조목 따집니다. 생각으로 따집니다. 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위대한 비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무엇이 위대한 비전입니까? 요단 온들 위에 세우는 목표입니까? 에덴동산과 같은 곳에 세우는 바벨탑입니까? 애굽의 나일 강과 같은 풍요로운 곳에 세우는 소돔과 고모라입니까? 오늘 요셉자손의 모습을 보면서 14장에 나오는 갈렙을 봅니다. 갈렙은 85세라는 노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지파 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파들이 다 꺼리는 헤브론 산지를 요구합니다. 스스로 정복할 수 없는 산지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요셉자손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큰 민족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쉬운 땅을 분배받을까를 놓고 이리저리 계산하는 모습입니다, 갈렙과 비교가 됩니다. 여러분, 어디에 서 있습니까? 남들보다 더 많은 것, 남들보다 더 쉽게 차지할 수 있는 것, 남들보다 더 어렵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는 그러한 모습과 생각이 있지는 않은가요? 갈렙은 85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있고, 도전하는 정신이 있었기에 청년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많아도 젊은 생각, 도전하는 정신, 열정이 있으면 늙지 않습니다. 그러나 젊어도 생각이 늙고, 도전정신이 없고, 열정이 없으면 노인과 같고, 이미 노인입니다.
작가 한비야 선생님의 『그건 사랑이었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서 그는 지금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불가능한 꿈을 꾸되, 현실도 보라고 합니다. 현실에 도전하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꿈꾸고, 소망하고, 그것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맘껏 누리며 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쓰실 때에 우리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비전은 그냥 탄탄대로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열매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믿음이 적용되는 산지에서 이루어지고 믿음으로 바라보는 산림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개척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타타오 입니다. 그 뜻은 열린다는 뜻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바로 닫혀있고 불가능하다고 낙심하는 그 문을 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고 개척자입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생각을 바꾸어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세상 모든 사람은 낙심하고 있는 그 문제 앞에서, 세상 모든 사람은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상황에서, 세상 모든 사람은 그것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바로 그런 불가능 속에서 해결의 문, 축복의 문을 여는 비전의 사람, 개척자입니다. 우리 가운데 현재 참으로 힘겹게 삶을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경제문제, 건강문제, 사업문제, 사람과의 갈등문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때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비전의 사람, 개척자의 자세를 갖추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전의 개척정신입니다. 갈렙같이 개척정신을 스스로 가진 사람을 요구합니다. 나무에서 사과 떨어지기를 바라는 요셉지파에게 여호수아는 바로 개척정신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15, 18에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은 창조정신이 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바라 레하, 잘라라 는 너를 위해 만들라, 라는 단어로 창세기 1:1 베레쉬트(태초에) 바라(창조하셨다) 엘로힘(하나님이)라는 첫 문장의 두 번째 단어와 같은 단어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바라레아는 자르다, 개간하다 입니다. 바라(창조하다)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개척정신은 창조성으로 연결이 됩니다. 세상을 돌파해 나가는 모든 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창조성입니다. 바로 창1;1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불평만 하지 말고, 벧 스안, 이스르엘 지역, 므깃도 등을 스스로 개척하라, 개간하라고 합니다. 창조성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창조성이 드러나나요?
2-1. 믿음 안에서 스스로 개척해야 합니다. 신앙으로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해야 생각이 되고, 고민이 되고 창의성이 나옵니다. 새롭게 개척하라, 스스로를 개척하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왜 개척하라고 말씀 하실까요? 이 말속에 장차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엄청난 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내가 비전의 사람이 되어, 개척자가 되어 앞길을 스스로 개척하면 주님이 허락하신 복을 누리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지시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명령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요구하신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눈앞에 전개되어 있는 현실만 바라보지 말아야 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까지 주어진 주변 환경을 보고 한탄하고 낙심하고 나는 못한다고 불평하십니까? 이제는 끝났어, 이제는 소망이 없어 라고 자포자기하십니까? 주님은 그런 분을 향해서 안 된다고 하지 말라, 못한다고 하지 말라, 네가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 고 말씀하십니다. 해보지도 않고 노력도 안 해보고 일찍부터 손 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복을 받을만한 사람에게 주십니다. 재능에 따라 더 주십니다. 누가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요? 축 쳐져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눈앞에 나타난 현실에 절망, 자포자기, 원망 불평하는 사람에게 주실까요? 아니면 현실은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우나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빛나는 눈빛으로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기독교는 예수님의 十字架입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버리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핵심진리가 주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땀, 눈물, 피, 생명 부활을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고 피를 들이고 생명을 드릴 때 하나님은 내게 축복과 은혜와 승리와 면류관을 주십니다. 바로 이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축복도 없고, 은혜도 없고, 면류관도 없습니다. 요셉자손은 그동안 많은 은혜를 누렸고 많은 특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는 많은데 감당해야 할 십자가는 안지고, 미래가 보이는 십자가는 안 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소망이 없고 열매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놓인 삶을 스스로 개척해야 합니다. 여러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무엇에 대한 발상입니까? 믿음은 시선입니다. 믿음은 용기이며 그 용기의 출처가 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라고 할 때, 믿음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늘 내 눈으로 바라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내게 아무리 용기가 있어도 하나님이 의식되지 않는다면, 매번 일을 저질러 놓고 나서 후회만 한다면 어떻게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목도하고 날마다 스스로 개척하시기를, go ahead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믿음 안에서 현재의 위치, 복 받은 큰 민족의 인정입니다. 주신 은혜와 복을 인정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능력이 있으니 개척하라고 합니다. 요셉자손은 많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파가 두지파입니다. 민수기에 의하면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만한 자가 에브라임이 40,500명, 므낫세가 32,200명 도합 장정만 72,700명입니다. 막강한 힘입니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앉아서, 편안히, 좋은 땅, 넓은 땅을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힘과 능력을 누리기만을 원치 않습니다. 그 주신 힘과 능력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건강하십니까? 왜 주셨을까요? 재물이 있습니까? 왜 주셨을까요? 배운 지식이 있습니까? 왜 주셨을까요? 주긴 누가 줘! 내가 얻은 것이지, 하는 사람은 아직 무엇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오,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힘과 능력을 주셨을까요? 일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왜 주셨을까요? 주의 일에 사용하라고, 하나님 보시기에 멋진 일 하라고 주셨는데 어디다 쓰셨나요? 형편을 앞세우고 엉뚱한데 쓰지 않으셨나요? 나와 내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 내 사업을 위해 쓰셨나요? 아니면 땅속에, 수건 속에 감추어 두셨나요? 복 받은 것을 인정하십시오. 큰 민족으로 성장한 것을 인정하세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고 책임져 주는 자신을 인정하세요. 그러면 여기서부터 스스로 개척하는 삶이 시작이 됩니다. 신앙인은 개척을 하는 것입니다. 계속하는 것입니다.
go ahead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가 여러 가지입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먼저 타세요. 무엇을 사거나 입장하는 곳에서 줄을 서 있지 않아 누가 먼저인지 분명하지 않을 때 Go ahead. 합니다. 이 때는 양보입니다. Go ahead 는 이렇게 양보할 때뿐 아니라 어떤 행동을 허락할 때도 많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좋아. 해봐 하는 흔쾌한 수락이기도 하고, 하고 싶으면 해 라는 의미도 됩니다. 상사나 윗사람이나 어떤 일을 진행시켜도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이 Go ahead! 면 결재 사인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Ahead 는 앞으로, 미리 라는 뜻의 부사, 형용사인데, 계속 한다는 뜻입니다. Plan ahead. 하면 미리 계획을 짜라는 말이고 약속을 당길 때도 ahead입니다. 경기에서 이기고 있을 때도 ahead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멀리 떨어진 앞(전방) 에 공사 중임을 표시할 때 삽질하는 그림과 함께 ROAD CONSTRUCTION AHEAD 란 사인이 있습니다. Road Ahead는 앞에 펼쳐질 길, 미지의 길, 미래를 예견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It's okay~ go ahead!는 계속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먼저 인정, go ahead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인정 가운데 계속하라고 합니다. go ahead 하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도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go ahead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속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3. 현실과 문제의 겉모습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문제 앞에 go ahead 해야 합니다. 현실과 문제의 겉 모습에 넘어지면 아니 됩니다. 산지에 철병거로 무장한 사람들! 그들의 겉모습에 놀랍니다. 희생정신, 죽을 각오가 없습니다. 12절에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쫒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을 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쫒아내지 아니 하였더라. 겉 모습을 보고 현실의 문제를 보면 타협을 합니다. 연기합니다. 늦춥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도리어 상대가 결심을 하고, 행동에 옮깁니다. 그런데 왜 현실을 보고, 겉모습을 봅니까?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이 정말 여러분의 힘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메뚜기 思考方式에 메이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요셉 자손의 약한 마음을 메뚜기사고 방식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나온 말입니까? 12명의 정탐꾼들이 와서 보고 할 때 믿음 없는 10사람들이 와서 보고했지요? 뭐라고 했어요?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다. 오늘날 메뚜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안돼! 나는 실패 할꺼야!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메뚜기 사고방식을 갖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도전의식을 가진 개척자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렸습니다.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당신을 죽이려는 결사대들이 조직 되어 가지고 당신을 죽일 텐데 올라가지 마십시오. 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대로 따라 갑니까? 내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면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네 삶을, 네 인생을 개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실은 철 병거입니다. 산지와 삼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실의 문제와 겉모습만을 보지 않는 그래서 스스로 주님 안에서 개척하는, go ahead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그러면 신앙인들이 왜 실패를 할까요?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go ahead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철 병거는 어디서 유용한가요? 평지와 평야입니다. 산지와 삼림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섭습니까? 가지고 있는 사실만으로 안 된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용성을 보십시오. 어느 때 쓸 수 있는지를 보십시오.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용할 수 있어야 위대한 철 병거가 됩니다. 요셉자손이 깜빡 했습니다. 왜 깜박할까요? 왜 go ahead 하지 않을까요?
3-Ⅰ.작은 이익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요셉 지파는 눈앞에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가나안 백성들을 쫒아내지 않았습니다. 쫒아내기 보다는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거나 조공을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5년 동안 그렇게 살았어요. 우리도 결정할 일을 앞에 두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눈앞의 이익 따라가면 무조건 실패를 합니다. 의사결정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입니다. 말씀에 따라 움직이고 모든 결정에 앞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작은 이익에 매 달리지 않는 go ahead 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2. 주신 힘과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은 사용하면 할수록 강해집니다. 에너지가 폭발 됩니다. go ahead하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납니다. 17에,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사용해야 될 때에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 때나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40: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기적도 많고 생각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용하면 할수록 강해집니다. 성령의 능력, 기도의 능력, 사용해야 지경이 넓어지고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은사를 가지고 하면 되지 않는가? 바로 이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십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지파는 그들에게 있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시선이 삶의 현장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위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상황에서 연약하고 한계적이며 허망한 가치만을 부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절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조성의 큰 능력을 주셨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큰 권능이 너에게 있으니 행하신 기적이 많고, 나를 향한 주의 생각이 많습니다. 선포하면 됩니다. 뛰어들면 됩니다. 주신 능력을 go ahead 사용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3. 개척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유다 지파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축복과 능력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씨앗은 땅에 부려지고 심겨질 대 그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미련한 농사꾼이 씨앗 주머니를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심으면 열매를 얻어 굶어 죽지 않을 텐데 그것을 아까워하다 굶어 죽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개척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교회는 축복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요셉지파의 약점은 개척정신이 부족합니다. 18절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능력을 주셨는데도,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이 신앙이라면, 내게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지 간에 그 상황에 순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가고, 세상 사람들이 고지식하다고 놀리는 상황에서 정도를 걷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 있는 한 사람에 의하여 역사는 바뀝니다. 그렇다면 그 용기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나입니까? 만약 용기의 출처가 나라면 그것은 만용입니다. 용기의 출처가 내가 될 때 나는 언제나 이겨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합니다. 참된 용기, 참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그 용기의 출처가 언제든지 주님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능력이 있는데 무너진 이유는 개척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변화시키기 위하여 주어진 능력을 사용하는, 스스로 개척하고 정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믿음과 신앙 안에서 스스로 개척하기를 go ahead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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