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조선왕릉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권정희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
왕세자 남편,
조선왕조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을 온 몸으로 겪어낸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
|
|
|
1. 피눈물의 기록 <한중록>
한 여인이 울고 있다.
"나는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죄를 지었다.
나는 어미로서의 도리도 다하지 못한 여인이었다.
나 때문에 친정 식구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나는 열(烈)에도 죄를 지었다.
나는 자(慈)의 도리도 이루지 못했다.
나는 효(孝)도 저버린 사람이 되었다.")
기막힌 운명.
원통과 한으로 점철된 인생.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억울하고 원통할 뿐이다."
이것은 250년 전 구중궁궐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
그 아픔을 한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한 왕실 여인의 이야기다.
조선 시대 궁중 문학의 백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널리 알려진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 임금의 어머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정치사가 아니라 '혜경궁 홍씨'라는 한 여인의 삶이다.
정치와 권력을 두고 벌어지던 남성들의 싸움.
그 틈바구니에서 며느리, 아내,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여인.
이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조선 시대 여인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서울국립국악원.
2008. 5. 14. 제 28차 IPA(국제출판인협회)를 축하하기 위해
이곳에서 특별한 공연이 펼쳐졌다.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베푼 회갑연 '진찬연' 재현 무대.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정조가 혜경궁 홍씨에게 <한중록>을 헌정하는 장면이다.
온갖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고 성대한 회갑연을 맞이하는 이 자리가
그녀는 물론 아들 정조에게도 특별한 감회로 다가왔다.
<한중록>(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은
영조, 사도세자, 정조,
3대 약 60년에 걸쳐 일어난 조선 왕실의 비극을,
그 한 가운데서 겪은 혜경궁 홍씨가
회갑연을 맞은 해부터 시작해
70세가 될 때까지 십여 년 동안 4차례에 걸쳐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여 써내려간 육필 증언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유례가 없는 기록이다.
여기에는 남편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는 물론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과
친정집 식구들에게 밀어닥친 정치적 참화에 간한 내용까지 담고 있다.
책의 곳곳에는 60여 년 동안 그녀가 가슴에 묻어두었던
억울하고 원통했던 심정들이 절절이 기록되어 있다.
'설움' '비통' '한탄' '원통'
| ||||||||
"원래는 작가가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으로 제목을 굳이 다시 붙인다면,
제1편은, 한가할 때 썼기 때문에 '한가할 한(閑)'자를 붙여 <한중만록(閑中만錄)>으로 부르는 게 맞을 것 같고,
제2편과 3편은, 굉장히 피눈물 나는 기록이므로 <읍혈록(泣血錄)>이 맞을 것 같고,
그 다음 마지막 4편은, 자기 생을 뒤돌아보면서 한 많은 생을 기록했기 때문에 '한할 한(恨)'자를 써서 <한중록(恨中錄)>이 맞을 것 같습니다." - 정은임 교수(강남대 국어국문학과)
2. 가난한 명문가 10살 소녀, 일국의 세자빈이 되다!~
그녀의 기억은 영조 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나라에서 간택단자를 올리라는 명이 내렸다. 그러나 그때 우리집은 심하게 가난하여 옷을 새로 해 입을 방법이 없었다."
가난한 집안의 딸에게 내려진 간택령.
서둘러 언니의 혼수에 쓸 옷감으로 치마를 만들고 낡은 천으로 속옷을 지어입은 채 궁궐로 나아가야 했다.
조선시대 왕비나 세자빈을 선발할 때는 나라 전체에 금혼령을 내리고,
명문가 규수를 대상으로 세 번에 걸쳐 최종적으로 배우자를 선발했다 - '삼간택(三揀擇)'
처음 임금님을 뵙는 자리. 영조는 어린 혜경궁을 보고 단번에 마음을 결정했다.
"내가 아름다운 며느리를 얻었도다. 너를 보니 네 할아버지 생각이 나는구나"
당시 혜경궁의 집안은 비록 가난했지만 조상 대대로 조선에서 손꼽히는 명문 가문이었다.
<풍산홍씨족보(豊山洪氏族譜)> 혜경궁의 친정 집안은 왕실의 사돈 가문이었다.
그녀의 5대조 홍주원(洪柱元)은 정명공주와 결혼, 임금의 부마가 되었다. 고조할아버지 홍만용(洪萬容)은 예조판서(禮曺判書)를 역임했고, 영조가 말한 할아버지 홍현보(洪玄輔)도 예조판서를 지냈다.
"풍산홍씨는 노론계 명문가입니다.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 많이 태어난 집안이고, 정치색도 (영조와) 상당히 유사했습니다.
영조 개인으로 봤을 때 자기 생모가 무수리 출신이니까,
자기 자식, 손자는 정통 가문, 명문가에서 태어나게 하려는 의도와 명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 김문식 교수(단국대 사학과)
장차 일국의 왕이 될 세자의 빈이 된다는 것. 그것은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꿈꿀 수 있는 최대의 지위였다.
뿐만 아니라 친정 집안도 왕실의 외척으로 부와 권세를 보장받을 수 있는 영광스런 자리였다.
그러나 왕실의 외척이 된다는 것이 반드시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는 미리 내게 경계하며 말씀하셨다. "세상 경험 없는 선비의 집이 갑자기 왕실의 외척이 된다면 이는 복의 징조가 아니라 화의 시초일 듯 싶습니다."
그때 궁중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우리 집안에 재앙은 없었을 것이다. 그게 후회스럽고 한이 되는구나."
한 번 들어가면 영원한 이별이 될 궁궐생활. 더구나 시집살이를 하기에는 너무 어린 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는 이제 곧 정든 집과 부모님 곁을 떠나야 한다는 막연한 서러움과 두려움뿐이었다.
"집에 머물 날이 점점 줄어들자 내 마음은 갑갑하고 슬프고 서러워 밤이면 부모님 품에서 잤다."
<사도제자와 혜경궁 홍씨의 가례반차도>
1744년(영조 20년). 처음 간택에 임한 지 5개월 지난 이듬해 1월.
혜경궁은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혼례를 치뤘다. 10살의 철부지 소녀는 이제 일국의 세자빈이 되었다.
손이 귀한 왕실로서는 예쁘고 귀여운 며느리였다.
"눈이 넓어도 궁중에서는 보통 모르는 일이니, 모르는 척하여 결코 아는 빛을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영조
하지만 궁중의 법도는 지엄한 것이다. 왕실의 여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일반 사대부가 여인들보다 한층 엄격한 법도와 처신을 지키는 것이었다. 왕통을 이을 후계자를 생산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창경궁. 어린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이곳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낯선 궁궐에서 엄격한 법도를 지키며 생활해야 했지만 그래도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친정집에도 경사가 거듭 되었다.
결혼 당시 혜경궁의 친정아버지 홍봉한의 직책은 세자시강원 소속의 정9품 세마(洗馬), 최말단의 하급관리였다.
하지만 딸을 왕실로 시집보내면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기 시작한다. 승지(정3품), 참의(정3품)을 거쳐 그리고 불과 9년만에 정2품 예조판서에 이르게 된다.
궁으로 들어온 지 9년만인 18세가 되던 해. 마침내 혜경궁은 왕위를 이을 세손, 즉 정조를 출산한다.
영조의 기쁨은 컸다.
"내 늘그막에 오늘과 같은 경사를 볼 줄을 어이 알았을까. 네가 정명공주의 자손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웠구나."
"이 때 궁중에 복록이 끊이지 않고 친정집이 번성하여 모든 궁인들이 나를 우러러 칭찬하고 축하하였다. 이 때 내 팔자를 누가 부러워하지 않았겠는가"
3. 사랑받지 못한 병 - 사도세자의 화증
그러나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혜경궁 홍씨의 생활에 비극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세손을 낳고 행복감에 젖어 있던 그 때, 남편 사도세자에게 정신질환의 증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임신년과 계유년 사이(세자 18세 ~19세)에 병환이 있으셨다."
결혼 당시 혜경궁 눈에 비친 사도세자는 총명하고 너그러운 인품에 소유자였다.
"동궁의 글 읽는 소리도 크고 맑았으며 글의 뜻을 이해함에도 그릇됨이 없으니 뵙는 사람마다 동궁의 거룩하심을 일컬어 좋은 명성이 많이 떠돌았다."
그러나 총명한 사도세자에게도 그늘이 있었다.
아들을 대하는 부왕 영조의 태도는 서먹서먹하기 그지없었고 아들 사도세자 역시 아버지 영조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친정집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10세 된 아기네가 감히 마주 앉지도 못하였고 신하들처럼 몸을 굽혀 엎드리고 보셨으니 어찌 그리 지나치게 하셨던가 싶다."
"너는 옷차림새가 왜 그 모양이냐."
"이 구절의 뜻이 무엇인지 속히 말해보거라. 왜 대답을 못하는게냐..."
영조는 아들의 옷차림에서부터 공부 태도까지 모든 일에서 항상 엄하게 꾸중을 하곤 했다.
"무슨 일이나 손에 잡히면 소조를 꾸중하셨다."
"엄했습니다. 영조 스스로가 상당히 어려운 과정을 겪어 왕이 되었고, 자기 자식이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갖기를 바라는 어버이로서의 마음을 가졌다고 보여집니다. 다만 방법에 있어서 너무 엄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김문식 교수(단국대 사학과)
영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매사에 부지런하고 민첩한 성격의 군주였다. 그러나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사람을 대할 때 심한 편견을 가졌다.
"두 부자분의 성품이 너무 달랐다. 경모궁께서는 효성이 깊고 덕량이 거룩하셨지만 행동이 민첩하지는 않으셨다."
평소에는 명민하고 너그러운 성품의 사도세자였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만 서면 대답을 빨리 하지 못하고 우무쭈물하는 일이 잦았다.
그럴수록 영조의 꾸중은 더 엄하고 아들 사도세자는 부왕을 점점 두려워하고 기피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관계가 악순환 되어가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는 점점 더 엄해지고 아이의 실수를 가지고도 맘먹고 야단치게 되고,
아이는 그걸 느끼면서 반발하면서도 아이는 아이대로 소심해지고 강박증이 되고,
아버지는 또 강박증을 보며 야단치고 이러면서 사이가 더 나빠지게 됩니다." - 민성길 교수(연세대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사랑했고 기대가 컸기에 더 엄격하게 가르쳤던 아버지. 그러나 아들에게 아버지는 단지 공포스런 존재로 비칠 뿐이었다.
왜 영조는 아들을 엄격하게 가르치려고만 했을까?
"영묘는 똑똑하고 모든 일을 자상하게 살피는 성품이었다. 그런데도 끔찍이 소중한 자신의 아들이 병드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혹 아드님을 못 믿었더라도 사랑으로 감싸주셨으면 어떠했을까"
"나만 혼자 아득히 애쓰던 말들을 어찌 다 기록하리요!~"
한번 꼬인 부자 관계는 점점 더 오해와 갈등으로 이어졌다.
"어마마마! 소신이 왔소. 속히 원기를 회복하소서!"
경춘년 2월 중전 정순왕후가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 때 사도세자는 극진히 간호를 했다.
정순왕후는 비록 생모는 아니었지만 세자를 친아들 이상 극진히 사랑해주었기에 사도세자의 슬픔은 더욱 컸다. 이는 평소 부왕에게서 얻지 못한 사랑을 대비전으로부터 받으셨기 때문이다."
이 때 영조가 병문안을 오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아버지를 보자마자 세자는 어쩔 줄을 모르며 방 한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아무리 부왕이 무서워도 우시고 싶으면 울고 인삼차도 계속 흘려 떠 넣으시고 병환 증세라도 말씀이나 올렸으면 좀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방 한 구석에서 황송해하며 엎디어 있으시니 아까 그 모습을 영묘께서 어찌 아시겠는가!~"
영조는 다짜고짜 세자의 옷차림새에 대해 불같이 야단을 쳤다.
"내전 평안이 이러한데 넌 어찌 옷차림새가 그따위냐!"
병간호를 하느라 흩트러진 옷매무새와 행전 때문이었다.
자꾸만 어긋나는 부자 사이. 그러나 지엄한 국왕과 세자 사이 갈등에서 어린 며느리이자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차마 '아까는 저리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 위에서는 버릇없다고만 하시니, 내 속이 타던 것을 어디에 비하겠는가!"
자신이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야단만 맞는 아들. 돌아가면 서러움에 복받쳐서 울었다. 그리고 쌓이고 쌓인 마음의 상처는 정신질환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부터 세자는 걸핏하면 잘 놀라는 증상을 보이는 '경계증(驚悸症)'을 보이고, 특히 천둥과 벼락이 치는 날에는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모르는 '뇌벽증(雷霹症)', 옷차림새에 대한 거듭된 꾸중은 옷 입기를 두려워하는 '의대병(衣帶病)'으로 나타났다.
"아버지 앞에 나갈 일이 있으면 옷을 정제하고 나가야 하는데, 옷을 입을 때 아버지한테 나가기 싫은 두려운 마음에,
옷을 안 입으면 못 나가니까 옷을 안 입으려고 하는 무의식의 작용으로,
아버지에 대한 공포가 옷에 대한 공포로 전이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 민성길 교수
세자의 병은 점점 더해져 울화증으로 나타났다.
부왕에게 꾸중을 들은 날이면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시중이나 궁녀들을 폭행하기 시작한다.
"경진년 이후 내관과 내인이 상한 일이 많아 다 기억하지 못한다."
혜경궁 홍씨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변하는 남편을 지어미로서 받아내야만 했다. 너그럽고 온화한 평소의 성정을 잃고 점차 폭력적으로 바뀌었다.
"소조께서 서 있는 내게 바둑판을 던져 내 왼쪽 눈이 상했다. 하마터면 눈망울이 빠질 뻔한 것을 다행히 그 지경은 면하였다."
"화증 현상은 화를 내거나, 누가 이해해주면 병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우울증으로 빠지거나, 이 화증이 풀어지지 않으면 그 분노가 극단적 형태, 폭력으로 터져 나옵니다. 안 그러면 자신에게 향해 자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민성길 교수
깊어가는 지아비의 병증. 속으로 곪은 마음의 병은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것이었다.
"소조의 병이 이상한 것이 처자나 애쓰고, 내관, 내인이나 두려워하며 지냈지, 자모도 자세히 모르시고, 부왕께서도 알지 못하였다. 어른들을 뵐 적과 신하를 대할 적에는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다."
운명의 장난같은 어쩔 수 없는 부자 사이. 그러나 한 번은 기회가 있었다.
무인년 2월. 대저께서 또 무슨 일로 소저를 찾아가서 꾸중하셨다.
"네가 사람을 상하게 한다는데 어찌하여 그리 하느냐?"
"마음이 상하여 그리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마음이 상하였노?"
"마마께서 사랑해 주지 아니하시기에 서글프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서 화증이 되어 그러합니다."
그때 잠시나마 천륜이 동하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는 그리 하지 않겠다."
부자간에 그런 말씀은 처음이었다.
나는 또 무슨 변이 날까 혼비백산하여 애를 쓰다가 의외의 하교를 듣고 너무 감격하여 울고 웃으며 말씀을 올렸다.
"그렇다 뿐이오리까? 어려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여 마음의 병이 되어 그러합니다. 아버님께서 은혜와 사랑을 주시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리 한다 말하고 밥은 어찌 먹는지 잠은 어찌 자는지 내가 묻는다고 하여라."
대저께서 가시고 소저를 뵙고 말씀드렸다.
"대조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이제 부자 사이가 더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아버님께서 사랑하는 며느리기에 그 말씀을 곧이 다 믿는가? 일부러 그리하신 말씀이니 믿을 것 없네! 두고 보소! 필경 내가 죽고 말 것이네!"
여인의 법도가 지엄한 유교사회. 도저히 화합이 되지 않는 부자 사이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던 여인은 그저 가슴을 조이며 그저 하늘을 탓할 따름이었다. "내가 만난 세월이 몹시 살기 어려움을 서러워할 뿐이구나!" 4. "어쩔 수 없이 불행한 일을 당하셨다"… 임오화변! 혜경궁은 현명한 여인이었다. 만일 그녀가 일반 사대부가의 여성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시아버지나 남편에게 말해 잘못 꼬인 부자 관계를 풀어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어쩌면 왕실의 여인이었기에 혜경궁의 아픔은 더 컸을지도 모른다. "모년 모월의 일을 내가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창경궁 문정전 앞뜰. 1762년 임오년 5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 즉 임오화변이 일어난다. 장차 왕이 될 남편의 죽음. 남편을 따라 여인의 운명이 결정되던 시절이었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이후 혜경궁이 겪는 모든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그녀의 태도는 의외로 담담하다. "영모의 처분도 애통망극한 가운데 부득이 하신 일이요, 경모궁께서도 병환으로 어쩔 수 없이 불행한 일을 당하셨다." 영조의 처분은 애통하지만 어쩔 수 없이 취한 행동이고, 사도세자는 병 때문에 불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혜경궁에 의하면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고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하늘이 내린 병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왕가의 법통은 계승 관계 , 정통성의 계승 관계였습니다. 영조서 사도세자, 사도세자에서 정조로 이어지는 정통성에서, 혜경궁으로서는 어느 한쪽도 깰 수 없는 것, 영조를 부인할 수도 없고, 사도세자를 부인할 수도 없고, 정조를 부인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 김문식 교수 임오화변은 예고된 비극이었다. 아들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은 깊어만 갔다.
거듭된 부왕의 꾸중과 냉대에 지친 사도세자는 점차 삶의 의욕을 잃어갔다. "소조께서 '자살하려 한다' 하였다." 심지어 억울하게 꾸중을 듣고난 후 우물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우물에 빠지려고 했다."
이때부터 세자는 후원에 병장기를 갖다놓고 무예 연습을 하며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점점 더 부왕과 만나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몇 달씩이나 부자간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현의 예를 행하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다." 세자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그 반대 세력들은 그 틈 사이를 파고들었다. 세자를 모해하는 세력들은 끊임없이 모함을 했고 마침내는 세자를 해하려는 논의까지 일어났다. '감히 들을 수 없는 말(不敢聞之敎仍命)' 사도세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무사치 못할 듯하니 어찌할꼬!" "안타깝지만 차마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이 그러할꼬? 아버님이 세손을 귀하게 여기시는데 세손이 있는 이상 내가 없다고 한들 크게 상관하시겠는가?" "부자는 화목을 같이 하는데 설마 어찌하시겠습니까?" "자네는 생각을 못하네. 나를 몹시 미워하여 일이 점점 어려운데 나를 폐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으시면 어찌하겠나?" 사도세자의 예감은 당시 정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5. 강한 어머니 혜경궁, 목숨을 보전하여 아들만은 지키리!~ 임오화변 일 년전. 영조는 세손의 성균관 입학례를 명하고,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관례식을 올리게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영조는 왕세손의 가례를 행하도록 지시한다. '왕세손의 입학례를 행하다(王世孫行入學禮)' '왕세손의 관례를 행하다(王世孫冠禮)' '왕세손의 가례를 행하다(王世孫嘉禮) "영조로서는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습니다. 사도세자가 왕이 될 확률은 적어졌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사도세자의 후계자 세손 정조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세자가 안된다면 정조를 왕으로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임오화변 전후로 정조를 격상시키는 조치를 합니다." - 김문식 교수 영조는 계속해서 세손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조치를 이어갔다. "종사를 세손을 믿고 세손에게 나라를 의탁하겠노라."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기뻐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영조가 세손을 두둔하고 칭찬하는 말들은 사관을 통해 그대로 사도세자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소조도 세손을 사랑하셨다. 그러나 당신은 어릴 적에 자애를 못 받은 것이 지극한 원한이 되었는데 그 아들만 칭찬하시니 소조의 격한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비록 부자지간이지만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군왕의 자리. 더구나 아버지로 인해 마음의 병을 갖고 있는 사도세자의 분노가 자칫 세손에게 향할 위험성도 있었다. "세존을 보존하여 종사를 잇게 할 기틀은 소조께서 그 기록을 보시지 못하게 하는 일에 있었다." 이때 혜경궁은 사관에게 부탁하여 영조의 말 중에서 세손을 칭찬하는 말들은 삭제한 후 사도세자에게 전달하도록 조치한다. "만일 세손을 칭찬하시던 상교(上敎)를 소조께서 그대로 다 보셨다면 세손께서 놀라실 일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을 줄 알겠는가." "왕실의 여성, 그러니까 세자빈으로서, 왕비가 될 혜경궁에게 있어, 첫번째는 왕위의 계승을 돕는 일입니다. 왕위를 어떻게 하느냐, 친정에서도 그런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또 결혼하기 위해 왕실에서도 똑같은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지금 사도세자를 잘 보필해서 왕으로 만드는 게 아내로서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순위는 아들입니다. 아들을 잘 보존해서 훌륭한 국왕을 만드는 것이 그 다음 당면한 우선 순위였습니다." - 김문식 교수
"내가 어찌 내 한 몸만을 위해 그리했겠는가!(豈爲予一身而然)" "뉘라서 이 상황을 결단코 막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종사를 위해 의로써 결단한 것이다!(宗社以義斷之)" 아들을 죽여야만 했던 아버지. 임오화변 이후 영조는 자신이 취한 처분이 정당했다고 강변한다. 아무리 아들을 미워했어도 일부러 죽이기까지 했을까? 부모로서의 아픔을 딛고 국가와 종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라는 것이었다. 혜경궁도 시아버지의 명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그리 된 것이 서글프지, 점점 그 지경에 이르신 것을 어찌하겠는가 감히 대조께 이렇다 원망하지도 못한다." 남편을 잃은 지어미의 슬픔을 넘어 그녀는 세손을 보호하여 종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공적 의리'를 지켜야만 했다. "슬픔은 나의 슬픔, 의리는 나의 의리"
그래도 그녀는 통곡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여염집의 부자 사이처럼 아드님을 친근하게 가르치며 정을 나누셨더라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 아버지도 잘못이었고 남편도 잘못이었다고 이야기는 했지만은, 그러나 그 죽음에 이르도록 한 원인 제공자는 시아버지였다는 것을 작품에서 이야기 하고, 그러니 결국 차마 입에 담을 수는 없지만 곳곳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그 불화의 원인을 파헤칠 때에 왜 시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한 여인으로서 남편을, 소천(소천)을 잃었는데요. 그후 혜경궁의 모든 비극이 남편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거든요." 개인적인 아픔조차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 그것이 바로 왕가의 여인이 떠안아야 할 숙명이었다. 혜경궁의 아픔은 결코 자신의 의지나 행동으로 빚어진 건 아니었다. 비극은 항상 숙명처럼 다가왔다. 그녀에게 주어진 건 단지 운명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절박함뿐이었다. 아들 세손마저 죽일 수 없다고 혜경궁은 고백한다. 이 세상의 어머니들 마음이 아닐까. 6. "저희 모자가 목숨을 보존한 것은 다 성은이옵니다."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년, 영조38년 윤 5월 13일)이 벌어지던 그날. 사도세자가 세자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뒤주에 들어가기를 명령받던 그 시각. 혜경궁은 굳게 닫힌 문밖에 있었다. '살려 달라'는 사도세자의 절규에 아내와 아들은 그저 통곡할 따름이었다. 하늘과 땅이 맞붙고 해와 달이 캄캄해지는 강변. 그러나 남편을 따라 죽을 수도 없었다. "내가 없으면 세손의 성취를 어찌하겠는가. 참고 참아 하늘만 부르짖었다." 그녀에겐 아들이 있었다. 그날 혜경궁은 세손과 함께 친정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세자빈이 아니라 죄인의 처로서 영조의 처분만 기다려야 했다. 궁으로 들어간 지 18년만이었다. 친정 오라비들 - "세손께서 석고대죄를 하게 하시옵소서" 혜경궁 - "석고대죄가 당연하지만 차마 어린 아기에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가 죄를 입어 뒤주속에 갇혀 있는 상황. 아들 세손도 마땅히 석고대죄를 통해 용서를 구하는 게 자식된 도리였다. 그러나 혜경궁은 이를 말린다. "정조로서는 자기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석고대죄를 하는 게 정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조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명을 철회시키려는 정치적 행위로 비춰졌을 때 그 아들에 대한 분노가 손자에게까지 옮겨갈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되면 혜경궁으로서는 세손까지 보호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듯 합니다." - 김문식 교수 그때 나는 세손이 놀라 혹 병이 날까 망극해하며 말했다.
"나는 네 아버지의 아내로 이 지경이 되고, 너는 네 아버지의 아들로 이 지경을 만났구나. 누구를 원망하며 탓하겠느냐. 서러울수록 네 몸을 보호하거라. 비록 한은 많지만 착하게 행동하여 아버지의 한을 갚으라." 남편이 죽어간 그곳. 혜경궁은 아들을 데리고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사도세자의 일은 그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는 금기사항이 되었다. 혜경궁에게는 이제 세손을 보호해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남아 있었다.
영조는 혜경궁의 칭호를 다시 회복시켜 '혜빈(惠嬪)'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세손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세손을 '동궁'으로 부르게 했다(世孫稱東宮)'
8월 대저께서 창경궁으로 오셨다. 경모궁께서 돌아가신 지 석 달만이었다.
내 서러운 회포가 어떠했겠는가. 하지만 조금도 풀지 못하고 여쭈었다.
"저희 모자가 목숨을 보존한 것은 다 성은이옵니다."
"네가 이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내가 너 보기를 어렵게 생각했더니, 오히려 네가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구나. 아름답도다."
남편을 빼앗아 갔지만 감히 원망은 커녕 시아버지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먼저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는 며느리의 말에 영조는 기뻐했다.
그리하여 영조는 효성스러운 며느리라 하여 혜경궁의 거처에 '가효당(嘉孝堂)'이라는 현판까지 내린다.
혜경궁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세손을 경희궁으로 데려가셔서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가 세손을 떠나 견딜 수 있겠느냐?"
"세손이 저를 떠나 마음이 섭섭한 것은 작은 일이지만, 대조를 모시고 배우는 일은 큰일이옵니다."
"세손을 음해하고 왕의 후계자로 못가게 하려는 많은 세력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인데 그걸 피하는 길은 사실은 영조한테 넘기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가 데리고 있다가는 어떤 변을 당할 지, 사도세자와의 관계 때문에 자식의 앞날에 큰 장애가 되겠다 싶어서 굉장히 판단을 잘한 겁니다." - 박현모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 학예연구원)
떠나간 아들과 어머니는 오로지 편지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해야만 했다.
"세손이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새벽에 깨어나 내게 편지를 하면 서연전에 내 회답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그 사이 모자가 한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어린 세손은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의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세손이 차마 너를 떠나지 못하여 저리하니 두고 가자."
당신은 세손을 자애하시는데 세손이 어미만 못잊어한다 서운해 여기실까봐 내가 아뢰었다. |
"내려가면 위가 그립고,
올라가면 어미가 그립다 하더이다.
환궁후에는 또 아버님을 그리워하여 이리 울 것이니 데려 가십시요."
"그럼 내가 데리고 가랴."
"세손은 어미가 인정없이 떠나 보내는 일을 섭섭히 생각하여 무수히 울고 갔다.
그때 내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아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조는 세손을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라는 명을 내린다.
"정조가 왕이 되었을 때
자기는 영조를 계승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
사도세자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도세자는 어쩠거나 죽음을 당했고
나중에 정조가 왕위에 올라 복권하니까요.
만약에 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면 죄인의 아들로 계승한 것이니
그 장애를 없애기 위해서 영조는 자기의 죽은 첫째 아들 진정,
즉 효장세자의 아들로서 정통성을 계승한 것으로 바꾼 것입니다."
- 김문식 교수
세손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한다는 건
부모의 자격을 공식적으로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혜경궁에게 남은 것은 어머니로서의 역할뿐이었다.
혜경궁은 이때의 비통한 심정을
남편을 잃은 임오화변에 못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망극하고도 슬프기는 모년(임오화변)보다 덜하지 않았다."
"굉장한 한이죠.
자기에겐 남편같은 아들인데,
어떤 아들인데 법적으로 내 아들이 못 된다는 건
그 어머니로서의 한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영조가 처신을 잘한 것입니다."
- 정은임 교수
또 다시 남편이 당한 화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아픔.
이렇게 보낸 세월이 15년이었다.
"참고 참아 하늘만 부르짖었다."
보통 사람들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한스러운 삶이었지만
그녀는 울고 있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냉철한 이성으로 헤쳐 나가는 의지의 여인이었다.
아들을 떠나보낸 15년후,
마침내 혜경궁은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녀의 불행은 끝이 난걸까?
- 한국사전을 보고 (늘 좋은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