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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 (洪命喜)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洪命喜. 1888~1968) ... 호는 벽초(碧初), 가인(假人 또는 可人), 백옥석(白玉石)으로 일제 강점기에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발표하여 한국 역사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아버지 홍범식(洪範植)과 어머니 윤씨 사이에서 맏아들오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을 익혔다. 1906년 일본 동경의 대성(大成)중학을 입학하여 이광수, 최남선 등과 사귀었는데, 이후 이들은 "조선의 삼재(三才)"로 불렸다.
한일합병 때, 錦山郡守이었던 아버지가 자결한 뒤 귀국하였는데 이때부터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후 1913년 만주,북경 등지를 방랑했으며 귀국 후에는 충북 괴산의 3.1운동을 주도하여 투옥,옥고를 치렀다.
한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였고, 1927년에는 시대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신간회(신간회)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오산학교 교장, 연희전문 및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다. 8.15해방 이후 좌익운동에 가담하여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에는 민주독립당을 만들고 이듬해 越北하였다. 1948년에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후 남한의 정세가 악화되자 월남하지 않고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앞줄 가운데 金日成, 오른편 洪命喜, 왼편 朴憲永
그리고 북한에서 남한 출신으로는 드물게 한차례의 정치적 위기도 없이 초고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948년부터 1962년까지 김일성이 수상을 맡은 북한 초대 내각의 副首相을 지냈으며, 이어서 1968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최고위직을 역임한다. 그의 사후에는 그의 자손들까지 후광이 계속되었다.
홍명희의 思想
그의 사상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대체로 마르크스주의자보다 사회주의에 공명하는 진보적 民族主義者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공산주의자와 비타협적이었던 신간회(新幹會)의 핵심 간사로 활동했던 것은 그의 사상이 양쪽을 아우를 수 있는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는 방법으로, 적극적인 정치 투쟁이나 무장투쟁이 아니라 신간회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활동과 문필활동을 선택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8.15해방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남한 출신의 중간파 인물로서 민족통일전선의 상징으로 중용되었던 것이다.
홍명희의 문학활동
홍명희의 유일한 역사 소설인 "임꺽정"은 조선 명종때의 도적 임꺽정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이다. 처음에는 "임거정전(林巨正傳)"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는데, 1928년 조선일보에 처음으로 연재한 이래 여러차례 중단되었다가 결국 未完의 상태로 머물고 말았다.
그는 특히 민중의 풍속과 언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연재가 시작되자 각계각층의 찬사를 받았다. 황석영의 "張吉山"이나 김주영의 "客主"는 이 작품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평론으로는 "신흥 문예의 운동" "언문소설과 明淸小說의 관계" 등을 발표하였으며, 수필집으로는 "학창산화(學窓散華)"가 있다.
분단의 비극 ... 통념상 洪命喜의 생가로 표시되어야 하는데.. 북한의 부수상을 지낸 경력으로 그의 부친 洪範植으로 표시되었다. 홍범식도 금산군수를 지내면서 한일합병 소식에 최초로 자결한 애국지사이었지만...
홍명희 生家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의 1... 홍명희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이 곳 생가는 25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고가이다. 좌우 대칭을 이룬 ㅁ 字 모양의 안채와 사랑채로 된 이 집은 조선 양반 가문의 정형적인 가옥구조와 공간배치로 중요한 민속자료이다.
원래는 1,000여평 대지에 90칸의 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헐리고...홍명희의 先祖가 이 집에 터를 마련한 것은 19세기 중엽 고조부 홍정주(洪定周)때 부터이다. 조선 후기 명문 사대부가의 하나이었던 풍산홍씨(豊山洪氏)의 종가이었던 이 집은 홍명희가 어릴 적만 해도 50여명이 살았을 정도로 큰 집이었고, 대가족이었다.
小說, 임꺽정
단란하고 유복하였던 홍명희 집안은 일제의 침락과 함께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 당시 금산군수이었던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洪範植)이 경술국치(경술국치 ..한일합방 )에 항의 전국에서 최초로 자결하였다. 부친의 3년상을 마친 홍명희는 만주,상해, 월남, 싱가포르 등으로 7년간에 걸친 방랑의 길에 나선다.
1919년 해외 유랑에서 돌아 온 홍명희는 다음 해 충북 괴산에서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1년 넘게 복역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 간 홍명희는 좌우합작기구인 신간회(新幹會)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임꺽정"을 쓰기 시작하였다.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1928.12.21~1939.3.11)하는데, 무려 12년간 연재하였다. 홍명희는 이 소설로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화되던 1920년대 후반, 한 신문 연재 소설이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소설 연재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독자들의 관심은 뜨거워졌고, 문단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찬사가 쏱아졌다. "조선 문학의 대 유산" "朝鮮語의 풍부한 寶庫" "역사 소설의 백미" 등 찬사가 이어졌다. 이처럼 홍명희의 유일한 소설 "임꺽정"은 발표 직후부터 우리 근대문학의 걸작으로 평가 받았다.
조선 중기 백정의 아들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양반,평민, 노비 등 각 계층의 삶과 갈등을 생생하게 그린 이 소설은 일제시대 민족의 애환과 해방의 염원을 껴안으며 신문잡지에 12년동안 연재되는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홍명희가 신간회(新幹會)사건으로 검거되었을 때, 일제가 유치장에서도 소설 집필을 허용할 수 박에 없었던 일화는 이 소설의 인기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남북의 분단 그리고 재평가
그러나 남북의 분단은 "임꺽정"과 홍명희를 금단의 세계로 가두어 버렸다. 홍명희의 월북으로 임꺽정은 오랫동안 전설 속에 묻혀야 했으며 홍명희는 우리의 뇌리에서 지워야 하는 금기 인물이 되었다. 홍명희는 "洪 某"라고 불리우고, 1985년에는 "임꺽정"을 출판한 출판사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단 반세기, 급제와 억압을 뚫고 소설 임꺽정이 부활하였다. 1988년 드디어 소설 "임꺽정"이 해금되었고 이어 최근에는 작품과 작가 홍명희에 대한 문학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소설 임꺽정이 TV드라마로 각색되어 방영되기도 하고, 홍명희의 고향 충북 괴산에서는 홍명희문학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그러나 아직 홍명희 생가 안내표지판은 "홍명희 생가"가 아니라 그의 부친 이름으로 "홍범식 생가"로 되어 있다.
홍명희 文學碑
홍명희는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의 副首相을 지낸 탓에 그를 거론하는 것조차 禁忌視되었었다. 그 후 越北作家에 대한 解禁조치가 이루어지고, 1998년에 그를 기리는 문학비(文學碑)가 세워졌으나, 이 과정에서 말썽이 일어났다.
보훈단체들이 "민족 해방운동의 봉우리" 등의 碑文 내용에 異議를 제기하여 한때 철거되었다가, 원원래 비문에서 "민족 해방운동의 봉우리" 그리고 "평생 민족의 자주 독립과 문화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등 保守團體가 반발한 문구를 삭제하기로 합의하였고, 보수단체들도 "전범(戰犯)"이라는 표현대신 "1950년 북한 부수상 재임시 6.25라는 민족 상잔(民族相殘)이 있었다 "는 등의 문구로 후퇴하였다.
碑 文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도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 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洪命喜와 金日成
흑백의 이 사진은 1958년 국제노동자절 행사가 끝난 직후 촬영한 것으로 김일성의 인품을 소개하는 수 많은 사진 중에서도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간부들에게 이 사진을 자신이 직접 찍었다고 하며, 이 사진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였다. 당시 내각 부수상으로 일하던 홍명희가 일부 종파분자들의 모함으로 마음 고생하던 시절.. 김일성은 이를 헤아려 바쁜 시간을 내어 홍명희를 평양 교외의 한 호수로 데려 갔다고...
어느덧 배가 잔잔한 호수 한가운데 이르고 홍명희와 감일성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정일은 사진기를 들고 있던 간부에게 빨리 그 장면을 촬영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 간부는 노을 저을 줄 몰라 결국 김정일이 직접 노를 저어 김일성과 홍명희가 탄 배 근처로 다가가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 때 김정일의 나이 16세이었다.
실제 인물, 임꺽정
임꺽정(? ~1562)...16세기 중반 몰락 농민과 천인들을 규합하여 수탈 정치에 저항, 정국을 위기로 몰아 넣었다. 홍길동(洪吉童), 장길산(張吉山)과 아울러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 진다.그는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백정(白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巨叱正)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 삼았다.
임꺽정의 亂 ... 1559(명종 14) ~ 1562(명종 17)
明宗代의 정치 혼란과 계속된 흉년으로 관리들의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해지자 임꺽정은 물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義賊)행각을 벌였다. 이들의 행각에 백성들이 호응하면서 官軍의 토벌이 있을 경우 미리 정보를 알려주어 자신들의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559년 3월 이러한 행적이 보고되면서 조정은 충격에 휩싸인다. 이 시기의 임꺽정은 황해도 고을의 수령들이 자체 병력으로는 진압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이 막강하였다. 급기야 조정에서 긴급대책을 마련하여 황해도 일원의 모든 관리는 武官으로 교체되었다.
갈수록 임꺽정의 활동무대는 더욱 확대되었다. 황해도에서 평안도, 강원도, 경기도로 옮겨 다니며 종횡무진 출몰하였다. 급기야는 한성까지 나타나 조정을 위협하였다.임꺽정이 토벌군과 전면전을 전개한 3년동안 임꺽정의 본거지인 황해도는 조정의 공권력이 마비된 無法地帶이었고, 백성들이 도적만 무서워하고 국가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실록에 기록될 정도이었다.
임꺽정은 왜 ? 갈대밭
기록상으로 보면 임꺽정이 도적활동을 시작한 곳은 황해도 봉산(鳳山)이었다. 白丁이었던 임꺽정은 봉산에서 갈대로 삿갓이나 밥그릇 등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황해도 봉산일대는 갯벌지대라 갈대만 무성하고 농토가 척박한 곳이었다.
그래서 갈대밭은 임꺽정과 비슷한 백정들에게는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그런데 명종 8년 실록에는 놀라운 기록이 등장한다. 권세가들이 갈대밭을 빼앗아 私有地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갈대를 팔고 있다는 것이다. 분노한 봉산 백성들이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결국 삶터를 빼앗긴 임꺽정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산으로 들어가 도적이 된다.
조선 초기에는 농민들이 경작하는 모든 토지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公田制度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인구도 늘고 특히 世宗 이후 발달된 농업기술은 필연적으로 농토확장을 위하여 개간을 장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개간지는 개인 소유로 인정하게 된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황해도 간척을 주도한 사람은 明宗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이었다. 그는 백성들을 징발하여 平山과 海州를 잇는 제방을 쌓아 사유지로 만들었고 심지어는 농민들의 토지도 빼앗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결국 농민들은 양반지주의 小作農을 전락하거나 임꺽정의 무리에 합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임꺽정의 활동 및 최후
1559년 (명종 14)에는 개성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자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소굴을 소탕하러 갔지만 오히려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8월에는 임꺽정 일당이 서울까지 출몰하였다가 장통방(長通坊 .. 종로 2가 근처)에서 임꺽정의 아내와 부하들이 체포되었고,
12월에 서울 전옥서(典獄署)에 갇힌 아내와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던 중, 숭례문 박에서 참모 서림(徐林)이 체포되었고, 이어서 황해도에서 임꺽정의 兄 가도치(加都致)가 순경사 이사증(李思曾)에게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감악산 .. 임꺽정 굴
1561년에는 일당을 잡기 위하여 경기도,강원도,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군사들이 대거 동원되어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들이 약간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으며 모두 잡아 가두면서 심문을 하는 바람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監事와 兵事에게 임꺽정 일당의 체포를 일임하고 다른 군사들은 모두 돌아 가도록 조치하였다. 1562년 정월에는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이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으로 도망간 임꺽정을 추격하여 체포하였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하였다.
孤石亭의 전설
고석정(孤石亭) 건너편에 암꺽정이 석성(石城)을 쌓고 함경도에서 조정으로 상납되는 조공(租貢)을 탈취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졌다는 전설을 안고 있다.
한편 조정에서는 林巨正을 체포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썼지만, 그때마다 "꺽지"라는 물고기로 변신하여 고석정 및 한탄강 깊은 물속으로 숨어 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훗날 사람들은 林巨正을 임꺽정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홍명희의 소설에는 이 곳 고석정에 관한 언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