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새소식 인터뷰> 커피 마케터에서 개발자로, 아로마빌커피 노환걸 대표
상자를 열면 낱개로 질소 포장이 된 스틱형 원두가 나온다. 절취선을 따라 뜯으면 은은한 커피 향기가 후각을 자극한다. 종이로 된 일회용 드리퍼를 컵에 올려놓은 후 원두를 넣는다. 그리고 정수기나 전기 티포트를 들어 뜨거운 물을 부어주면 끝이다. 분쇄기에 원두를 갈 필요도, 종이 필터를 따로 구비할 필요도 없다. 캠핑이나 야외 활동을 하는 사람을 위해 일회용 컵이 동봉된 제품도 있다. 이 상품의 이름은 ‘핸드립’, 사회적기업 ‘아로마빌커피’가 출시한 제품이다. 원두의 깊은 향기만큼 진한 여운을 전하는 ‘아로마빌커피(경기도 화성시 팔탄면)’의 노환걸 대표(남, 55세)를 만났다.
* 시력을 잃고 커피 마케터에서 개발자로 거듭나
노 대표는 ‘아로마빌커피’를 창업하기 전에도 커피와 관련된 일을 했다. 동서식품 마케팅 부서가 그의 직장이었다. 그가 시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각한 건 커피 포장 디자인 회의에서였다.
“포인트가 없으니 빨간색을 더 넣자고 말했더니 분위기가 싸해졌죠. 이미 빨간색이 들어가 있었는데, 제가 그걸 인지하지 못한 거예요.”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망막색소변성증이었다. 시신경이 서서히 손상되면서 시력을 상실하게 되는 퇴행성 질환이다. 현재는 빛만 감지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나날이 업무 실수가 잦아졌고, 식사와 보행 등 생활에 불편도 심해졌다. 그때마다 좌절과 공허감이 엄습해 왔다. 결국 40대, 한창나이에 회사를 퇴직하기에 이르렀다.
“별일 아닌데도 괜히 자격지심이 들어서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어요. 그러다 시각장애인 등산 동호회에 참가하면서 마음이 달라졌어요. 비슷한 사람들을 만난 게 행운이었죠. 나 정도의 고충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 고뇌 끝에 다다른 것은 ‘커피’였다. 그가 가장 오래, 그리고 최선을 다해 매달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이번에는 마케팅이 아닌, 상품을 개발하는 일을 맡았다. 목표는 시각장애인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맛있고 질 좋은 커피 개발이었다. 아내가 운영하던 작은 커피 공장이 연구 공간이 됐다. 그것이 바로 아로마빌커피의 시작이었다.
* “불가능에서 불을 빼면 가능이고, 불편함에서 불을 빼면 편함이죠”
“원두커피 한 잔 마시려면 분쇄기와 추출 과정을 거쳐야 하니 시각장애인이 접근하기 어려웠죠. 그런 점을 어떻게 해보자 싶었어요. 커피믹스에서 원두커피로 흘러가는 트렌드도 한몫했고요.”
컵 형태의 드리퍼 샘플을 만들기 위해 전국 종이컵 공장에 발품을 팔았다. 그런 한편 맛있는 커피를 개발하기 위해 하루 수십 번 넘게 잔을 들었다. 이런 노력에 대한 보답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이마트 임원이 지방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들른 식당 자판기 커피의 맛을 보고 상품성을 잡아낸 것이다.
“대형 마트가 우리 회사처럼 작은 곳에 직접 연락한 게 믿어지지 않았죠. 처음엔 사기꾼인가 의심도 했었다니까요(웃음).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 같아 흐뭇하기도 했고요.”
이를 계기로 간편한 핸드드립 커피 개발에도 탄력이 붙었다. 그렇게 아로마빌커피의 주요 상품인 ‘핸드립’이 태어났다. 현재까지 ‘핸드립’으로 출시된 원두는 케냐의 ‘오타야AA’, 콜롬비아의 ‘칼다스 수프리모’, 에티오피아의 ‘예가체프G2’로 3가지가 있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입맛을 고려한 선정이다. 다른 상품으로는 ‘레인보우 모카골드 커피믹스’, ‘초간편 컵 커피믹스’, ‘컵 스프 티’ 등이 있다. 이마트를 비롯해 담터, 웅진, 남양유업, 티젠 등에 납품되고 있다. 힘든 시기를 함께 이겨낸 아로마빌커피 25명의 직원 덕분에 연 매출 50억 원을 달성하는 건실한 중소기업으로 거듭났다. 그렇다면 노 대표가 지향하는 경영 철학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눔’이다.
“‘핸드립’ 개발은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룬 성과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포장 디자인이 ‘사회적기업진흥원’의 협력으로 더 보기 좋게 개발됐죠. 그런 의미에서 다른 기업들과 공존하며 함께 성장하고 싶어요.”
지난해부터 사회적기업 ‘쿡커피랩’과 공동브랜드 업무협약을 맺어 상생하는 홍보를 기획 중이다. 또 장애인, 노인, 탈북자 등 사회적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일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 실제 아로마빌커피에서 근무 중인 직원 중 10명은 노년층이다. 그러나 고민이 없지는 않다. 그는 당면 문제로 자금과 인력 부족을 꼽았다.
“기계의 설비, 좋은 원두의 구입, 인력 채용까지 들어갈 곳이 만만치 않아요. 지금은 제가 회계도 보고, 영업도 뛰고 하는데 회사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분야별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역시 모든 게 자금으로 이어지네요(웃음).”
올해는 수출, 특히 미국 시장을 겨냥한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 등에 수출하고 있는 현재 시스템에 더하여, 미국의 아마존이나 월마켓을 중점적으로 공략할 계획이다. 노 대표의 목표는 2027년까지 취약계층 1,000명 고용, 매출 1,000억 원을 이루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회적 소외계층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것이 그의 최종 바람이다.
“‘불가능’에서 ‘불’자를 빼면 ‘가능’이 되죠. ‘불편함’에서 ‘불’자를 빼면 ‘편함’이 되고요. 이제 커피뿐 아니라 사회적 불편도 편하게 바꾸고 싶습니다. 쉽진 않겠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핸드립’처럼 편해지지 않을까요?”
(2019. 2. 15. 점자새소식 제10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