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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용인 레이크 랜드 원문보기 글쓴이: 思庵 황윤진
풍수지리
‘풍수’라는 용어는 중국 동진(東晉)의 곽박(郭璞)이 쓴 ≪장서 葬書≫에 “죽은 사람은 생기에 의지하여야
하는데……그 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져버리고 물에 닿으면 머문다. 그래서 바람과 물을 이용하여 기를 얻는 법술을 풍수라 일컫게
되었다(葬者乘生氣也……經日氣乘風則散界水則止……故謂之風水).”라는 기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부터 풍수라는 말이
쓰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풍수의 본래적 의미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생활환경을 대변해 주고 있는데, 풍(風)은 기후와 풍토를
지칭하며, 수(水)는 물과 관계된 모든 것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풍수의 대상은 현대 지리학의 관심분야와 다를 것이 없다. 도읍이나 마을의 자리 잡기, 집터 잡기, 물자리 찾기, 정원수의 배치, 길내기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땅을 보는 기본적 시각, 즉 풍수의 사상성은 인문주의적 입장과 같다. 또한, 철저한 윤리성과 인과응보적 토지관은 오늘날 사회지리학자들의
지역불평등에 대한 태도와 일치된다. 이런 면에서 풍수는 인류의 출현과 함께 자연스럽게 형성, 발전되어 온 땅에 대한 태도의 체계화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살아 있는 사람과 땅의 관계뿐 아니라, 죽은 사람의 경우까지 매우 중요시한다는 점에 풍수의 특징이 있다. 풍수의 기본논리는 일정한 경로를 따라 땅 속을 돌아다니는 생기(生氣)를 사람이 접함으로써 복을 얻고 화를
피하자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 혈관이 있고 이 길을 따라 영양분과 산소가 운반되는 것처럼 땅에도 생기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경락(經絡)과 같은 것이 땅에도 있다는 것으로, 경락은 혈관과는 달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몸의 기(氣)가 전신을 순행하는 통로로서, 지기(地氣)가 돌아다니는 용맥(龍脈)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땅 속 생기의 존재 자체는 아직 증명되어 있지 않으나 그 존재가 전제되어야 설명되는 현상들이 많이
있으며,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있는 사실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산 사람은 땅의 생기 위에 얹혀 삶을 영위하면서 그 기운을 얻는 반면, 죽은 자는 땅 속에서 직접 생기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산 사람보다는 죽은 자가 얻는 생기가 더 크고 확실하다. 죽은 자가 얻는 생기는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진다고 여겼는데, 이를
동기감응(同氣感應) 또는 친자감응(親子感應)이라고 한다. 이러한 풍수지리이론을 수록한 풍수서는 중국의 것이 대종을 이룬다. ≪장서≫를 비롯하여 ≪지리사탄자
地理四彈子≫·≪청오경 靑烏經≫·≪입지안전서 入地眼全書≫·≪탁옥부 琢玉斧≫·≪인자수지자효지리학 人子須知資孝地理學≫·≪설심부 雪心賦≫·≪양택대전
陽宅大全≫ 등이 널리 알려진 풍수지리서이다. ≪명산론 明山論≫·≪산수도 山水圖≫ 등은 우리 나라의 명혈(名穴)·길지(吉地)를 지도와 함께 수록한
풍수실용서이고, ≪도선답산가 道詵踏山歌≫·≪금낭가 錦囊歌≫·≪옥룡자유세비록 玉龍子遊世祕錄≫ 등은 가사체로 된 풍수지침서이다. 이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풍수서가 나와 있으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대개는 앞서 나온 책을
베끼고 거기에 주석을 다는 형식을 취한 것이 많다.
풍수지리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원리는 산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데 용(龍)은 바로 산을
지칭한다. 그리고 용맥의 좋고 나쁨을 조산(祖山)으로부터 혈장(穴場)에 이르기까지 살피는 방법을 간룡법이라 한다. 용 속에는 감추어진 산의 정기, 즉 지기가 유행하는 맥이 있어서 간룡할 때에는 용을 체(體)로, 맥을
용(用)으로 하여 찾는다. 맥이란 사람의 몸에서 혈(血)의 이치가 나누어져 겉으로 흐르는 것과 같이 땅 속의 용의 생기가 그 이치를
나누어 지표면 부근에서 흐르는 것이며, 사람이 맥을 보아 건강상태를 진단하는 것처럼 용의 맥도 그 형체를 보아 길흉을 판단하는 것이다. 명당에 자리잡은 혈장을 찾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풍수지리에서 명당 주위의 지형·지세를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는 문제는 풍수지리의 이해에 중요한 대목이 된다. 장풍법이란 명당 주위의 지세에 관한 풍수이론의 통칭이다. 정혈(定穴)은 결국 장풍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만큼, 실제로 도읍이나 음택(陰宅) 또는 주택을 상지(相地)함에 있어 장풍법은 요체가 된다. 장풍은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左靑龍右白虎前朱雀後玄武)’라 하여 혈이 남향인 경우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의 네 가지 산, 즉 사신사(四神砂)에서 대종을 이룬다. 현무는 주산(主山)으로 국면의 기준이 되는데, 주산은 혈장 뒤에 두어 절(節) 정도 떨어져 솟아 있는
높고 큰 산이다. 주작은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으로 나누어지는데, 조산은 혈 앞에 있는 크고 높은 산이며, 안산은 주산과 조산 사이에 있는
나지막한 산으로 주인과 나그네가 마주하고 있는 책상과 같다는 의미이다. 현무와 주작의 관계는 주인과 나그네, 남편과 아내, 임금과 신하 사이로 인식된다. 청룡과 백호는 각각
동과 서에서 주산과 조산을 옹호, 호위하는 자세를 취하는 산이다. 중국의 풍수지리에서는 산보다도 오히려 물길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여 많은 풍수서가 득수법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풍수지리설이 흥성하였던 중국 북부지방의 적은 강수량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우리 나라
풍수지리설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산·수를 음·양에 비기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따라 득수법을 무시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크게 보아 물은 반드시 길한 방위로부터 흘러들어와 흉한 방위로 나가야 한다. 물에서 탁취가 나거나 흐리면
안 되고 혈전(穴前)에 공손히 절을 올리듯 유장하게 지나가야 한다. 직급류하여 혈을 향하여 쏘는 듯 내지르는 것은 좋지 않다. 이때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면 불길한 것이며, 남녀상배(男女相配)하고 음양상보(陰陽相補)하는 원리에 따라 산수가 상생하여야 좋은
것이다. 혈이란 풍수지리에서 생기가 집중하는 지점이다. 혈(穴)과 경혈(經穴)은 서로 대응될 수 있는데,
주자(朱子)는 <산릉의장 山陵議狀>에서 “이른바 정혈의 법이란 침구(針灸)에 비유할 수 있는 것으로, 스스로 일정한 혈의 위치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추호의 차이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경혈은 사람의 경락에 존재하는 공혈(孔穴)을 뜻하며, 생리적·병리적 반응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침구는 이 경혈의 부위에 실시하게 되므로 이 위치를 잘 알아 장부(臟腑)의 병을 치료한다. 풍수지리에서도 혈을 제대로 잡아야 생기의 조응을 받게 되며, 진혈(眞穴)을 잡지 못하였을 경우
생룡(生龍)은 사룡(死龍)이 되며, 길국(吉局)은 흉국(凶局)이 되므로 혈법(穴法)을 정하기가 어려움을 알 수 있다. 산·수·방위·사람의 풍수지리 기본요소 중에서 좌향론은 방위에 관계된 술법이다. 원래 좌향이란 혈의
위치에서 본 방위, 즉 혈의 뒤쪽 방위를 좌(坐)로, 혈의 정면을 향으로 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북쪽에 내룡(來龍)을 등지고 남쪽에 안산과 조산을 바라보는 혈처의 좌향은 북좌에 남향이지만
풍수에서는 24방위명(方位名)을 따라 자좌오향(子坐午向)이라 부른다. 하지만 보다 넓게는 혈처의 좌향뿐만 아니라 산과 수의 방위문제 전반에
관련이 된다. 좌향은 방향의 개념과는 다른 것으로 한 지점이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하나의 건축환경이 특정한 좌향을 갖기까지 검토되는 향은 절대향과 상대향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절대향은
인간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는 천체, 특히 태양의 운행에 의하여 결정지어지고 시간성을 내포하며, 상대향은 지세·시계(視界)·실존성·사회성을 지닌
것으로, 풍수지리의 좌향론은 두 가지의 복합적인 형태를 취한다. 실제로 답산(踏山)하여 길지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눈으로 직접 길흉을 판별할 수 있는 유형분류의 필요성이
생긴다. 이때 산천의 형세를 인물금수(人物禽獸)의 형상과 유추하여 판단함으로써 비교적 쉽게 지세와 길흉을 알 수 있다. 우주만물은 유리유기(有理有氣)하여 유형유상(有形有像)하기 때문에, 외형물체는 그 형상에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풍수지리설에서는 산혈형체(山穴形體)와 보국형세(保局形勢)에 따라 이에 대응되는 정기가 땅에 응취(凝聚)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만물에 차이가 나는 것은 각각이 지니고 있는 기(氣)의 차이 때문이고, 이 기의 상(象)이 형(形)으로
나타나는만큼 형으로 물(物)의 원기를 알아낼 수 있다는 입장이 형국론으로 발전된 것이다. 주로 땅을 쓸 사람에게 관계되는 논리체계이다. 즉, 적선과 적덕을 행한 사람에게 길지가 돌아간다거나,
땅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거나[地各有主], 땅을 쓸 사람의 사주팔자(四柱八字)가 땅의 오행과 서로 상생관계이어야 한다거나 하는 주장이 그것으로
택일(擇日)의 문제도 포함된다. 이상과 같은 일곱 가지의 논리체계는 편의상의 분류일 뿐 실제 간산(看山)에서는 모두 일체가 되어 판단에
사용된다. 전체의 국세(局勢)는 상극·궁핍·산발·고단함·무정함·쏘는 듯함 등은 안 되고, 상생·상보·생기·변화·둘러싸임·유정함·순조로움·모여듦
등 조화와 균형의 분위기를 지녀야 좋다. 온화 유순하고 부드러우며 결함이 없어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주위환경, 각(角)이 지지 않은 방위와 유장한
산의 흐름, 찌를 듯하지 않는 물길, 그러나 변화무쌍하여 결코 단조롭지 않은 산수의 배열, 이러한 조화의 자연에 적덕한 사람들이 사는 것이
풍수적인 길지이다. 풍수지리설은 일종의 생태론적·환경론적 토지관의 표출이며 경험적인 지리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풍수설의 기본원리가
음양론·오행설·역의 체계라 하더라도 그 원리 역시 자연환경의 논리적 정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풍수지리설에 대한 철학적 반론 중에 풍수지리설은 하늘에 맡겨 두어야 할 자연의 신비적 힘들을
조작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결여하게 된다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길지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의 여부는 여전히 하늘에 달려 있어 억지로 되지 않는다고
주장되고 있으며, 길지는 인자(仁子)와 효자에게만 주어진다고 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촌락 입지에서 배산임수·남면산록 같은 곳은 북반구 중위도 지역의 민족들에게 공통된 길지였다.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의 지리관을 지녔으며, 이를 더욱 발전시켜 삼국 초기에는 자생적인 지리사상을 형성하여 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풍수지리의
확립된 이론체계는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 명백하다. 중국의 경우 언제 어떻게 구체적인 이론으로 정립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고대의
천부지모사상(天父地母思想)에 음양론이 가하여지고, 여기에 사신도(四神圖)로 대표되는 천문사상(天文思想)이 첨부되어 전국시대 말기부터 구체적인
이론으로 정립되었다. 기원전 5, 4세기경의 이 시대는 도참비술적 사상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대(漢代)에 이르러
음양론이 본격적으로 도입됨으로써 풍수지리설이 정착되게 된다. 남북조시대에 이르러서는 한층 발전하여 대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이때 집터인
양택(陽宅) 위주의 풍수에 묘터인 음택(陰宅)이 추가된다. 그 뒤, 당·송·원·명·청대에도 수많은 풍수서와 유명한 풍수가가 출현하였다. 삼국시대에 중국의 풍수지리 이론이 도입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사신도신앙·음양오행설, 그리고
점상술(占相術)·참위비기류(讖緯祕記類) 등이 수입되어 풍수지리와 유사한 관습이 있었다는 흔적이 있다. 고구려를 침공하였던 관구검(毌丘儉)의 묘를 보고 당시의 유명한 음양가가 묘형이 고독한 상형을 이룬
흉격이기 때문에 장차 멸족의 화를 당하리라는 예언 내용의 기록, 선덕여왕이 여근곡(女根谷)이라는 산 모양 때문에 백제의 매복군사를 발견하였다는
설화, 신라 제4대 탈해왕이 토함산 위에 올라 초사흗날 달처럼 생긴 지세를 보고 자기의 살 터라고 생각하여 그곳을 사술로 빼앗은 이야기,
고구려·백제의 고분벽화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 등이 그 예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라 원성왕 때에는 ≪청오경≫이 수입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있어 풍수지리가 도선(道詵) 이전에
도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나라로부터 본격적으로 풍수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도선에 의해서이다. 도선은 최치원(崔致遠)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선문구산파(禪門九山派) 중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개조 혜철(惠哲)로부터 인가를 받아 전라남도 광양의 옥룡사(玉龍寺)에서 독자적인 선문을 개설하고 있던 승려이다. 그가 중국인 일행으로부터 직접 풍수지리를 전수받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나, 대체로 그의 이론을 습득한
것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일행은 위도를 측량하고 역법을 정리하기도 한 매우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사람이었는데,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도선의
풍수지리설도 극히 경험주의적 입장에 경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선과 그의 제자들은 국토를 오늘의 인문지리학적 시각에 가깝게 재해석하여 한반도 지체 구조의 가장 큰
특징인 경동지괴(傾東地塊)를 파악하였고, 수도의 위치가 동남방에 편재된 경주보다는 중부지방이 더 낫다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고려 개국의
이념적·실리적 바탕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선종과 도선류의 풍수지리설에 크게 힘입어 나라를 세운 만큼 그에 대한 경도는
지극하였고, 이후 고려시대를 통하여 풍수지리설은 지속적인 영향력을 확립하였다. 태조의 <십훈요 十訓要>는 풍수지리 중시의 대표적
사실(史實)이라고 볼 수 있다. 사원의 개창에 관한 제1조로부터 모든 사찰입지를 도선이 정하여 준 곳이 아니면 쓰지 말라는 제2조,
서경(西京)을 귀하게 여기라는 제5조, 국토에 대하여 순역(順逆)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제8조 등의 해석은 철저하게 풍수지리적이다. 이후 성종과 현종의 동경(東京), 즉 경주에 대한 지속적 관심, 그리고 문종 이후 꾸준하게 계속되어 온
남경(南京), 즉 서울에 대한 관심은 고려 말까지 계속되며, 서경천도론은 묘청의 난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고려시대의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예외없이 풍수지리설이 근저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수지리설이 강력하게 영향을 미쳐왔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 역시 도참과 결부되어 성행하던 풍수지리설에 크게 영향받은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치기반 확립에 유효적절하게 이를 이용하였다. 나라 이름을 새로이 정하기도 전에 국도의 전도(奠都)부터 꾀할 정도였다. 당시 국도 후보로 거론되었던 한양(漢陽)·모악(母岳)·계룡산(鷄龍山)·개경(開京) 등지의 풍수적 입지에
관한 당대 풍수지리가들의 논전은 풍수사에 빛나는 업적으로 남을 만한 기록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보다 분명하게 유교국가의 이념이 확립되면서 풍수사상은 양기(陽基) 위주의 도읍풍수로부터
음택 위주의 묘지풍수로 전환되었다. 사회가 안정되었다는 점 외에도 효(孝)의 관념이 적극적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이 이 같은 전환의 주요 이유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세종이나 성종 때까지는 합리적인 양기풍수가 간헐적으로 논의되기는 하였다. 예컨대 북악산(北岳山)과
취운정(醉雲亭) 내맥(來脈)을 둘러싼 국도 주산 논쟁과 명당수(明堂水)인 청계천(淸溪川)의 오염문제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중기 이후에는 묘지 혹은 개인의 주택을 대상으로 하는 이기적 성격의 풍수가 대종을 이루게 되어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창한 실학자들에게 망국의 표본으로 격렬하게 공격당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세계관을 표출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홍경래나 전봉준 등은 풍수사상의
메시아니즘적 측면을 강조한 인물들로 풍수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선 3교를 통합하고, 나아가 전통적 민족사상까지 포괄함으로써 민중의 구심점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풍수지리는 미신으로 치부되어 모멸을 받는 입장에 처하여 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효능을 전면 부정하지 못하고 은연중 기대하는 측면도 강하게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근래에 이르러 전통사상 전반에 걸친 새로운 관심과 함께 풍수지리설도 몇몇 분야의 소장학자들로부터
부분적으로 긍정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지리학과 건축학 분야에서 재해석되고 있는 측면은 취락입지, 집터잡기, 대지(垈地) 내의 건물배치에
관한 풍수지리설의 입장으로 땅에 대한 유기적 관련성의 강조는 오늘날 매우 합리적이라는 평가이다. 명당으로의 진입에서 지현(之玄) 형태의 동구(洞口) 배치가 환경심리학에서 말하는 완충공간의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이라는 개인공간에서 외부의 사회공간으로 나아갈 때, 개인이 받는 심리적 불안감과 충격을 구불구불한 동구가 완충공간으로
흡수하기 때문에 풍수지리적 마을배치는 합리적이며 타당하다는 견해이다. 묘지풍수의 경우에도 지하수맥과 관련된 자리가 좋지 않다는 실증적 사례들이 발표되고 있으며, 주택의
경우에도 상주 공간인 방은 구들에 반드시 동판을 깔아서 지하수맥으로 인한 피해를 제거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묘지풍수의 2대 원칙인 “좋은 일을 한 가문이 길지를 차지한다(積善之家必有餘慶).”와 “산소의
크고 작고 장대하고 누추한 것(大小壯陋)은 문제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아직도 많은 사람이 망각하고 막대한 돈과 노동력을 투입하여 넓지도 않은
국토를 훼손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서울시 지역의 넓이보다 훨씬 더 넓은 면적을 묘지가 차지하고 있고, 날이 갈수록 그 면적이 늘어가고 있는
현실적 책임의 일단이 풍수지리적 사고에 있다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우리 나라에서 풍수사상이 가장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논의된 것은 조선 개국 초 수도를 정할
때였다. 이때 후보지로 거론된 곳은 선호(鐥岵)·불일사(佛日寺)·적성(積城)·장단(長湍)처럼 잠깐 물망에 오르다가 그친 곳도 있었으나,
논의대상에 꾸준히 오른 개경·계룡·모악·한양 등은 오늘날의 도시입지론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 타당성이 돋보인다. 이곳은 전 왕조의 수도로서 일차적으로 수도의 물망에 올랐다. 한반도의 중앙부를 차지하며, 예성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강화(江華) 북안에 연접되어 있는 지역이다. 백두산의 영기가 간백산(間白山)·북포태산(北胞胎山)·남포태산 등 마천령산맥을 거쳐 두류산(頭流山)에서
함경산맥을 만나고, 낭림산맥을 지나 원산 서쪽 마식령산맥에서 남서향하여 임진강 상류에까지 연결되는 형태이다. 그러나 개경 부근에 이르러서는 산세의 험준함은 없는 편이고, 대체로 저산성의 구릉지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저산성이기는 하지만 주위가 거의 모두 산지로 되어 분지상(盆地狀)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규국(規局)은 넓지 못한 편이다. 왕궁의 소재지인 만월대(滿月臺)를 중심으로 북쪽 5리에 개경의 진산인 부소(扶蘇) 또는 곡령(鵠嶺)이라
하는 송악산(松岳山, 588m), 그 북쪽으로 천마산(天磨山)·성거산(聖居山), 그리고 국사봉(國師峰, 764m)이 있는데, 천마산과 국사봉이
마주하고 있는 계곡 사이에는 부성(副城)으로서 대흥산성(大興山城)이 축조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일출봉과 남산, 서쪽으로는 월출봉과 봉명산, 남쪽으로는 외성터인 용수산·진봉산·광덕산·군장산
등 해안지대로서는 상대적으로 험준하다고 볼 수 있는 산세가 둘러싸고 있어, 오관산(五冠山)의 정기를 축적할 수 있는 풍수상 전형적인
장풍국(藏風局)이다. 오관산이 개경 정기의 진원지임은 ≪택리지≫에도 명백히 지적되어 있다. 이 산은 도선이 말한
수모목간(水母木幹)의 형세로 산세가 극히 길고 심원하며 대단(大斷)하여 송악이 되었는데, 풍수가에서 말하는 주천(湊天)의 토성(土星)이 바로
그것이다. 기세가 웅건(雄健), 박대(博大)하고, 의사가 포축(包畜), 혼후(渾厚)하다. 동서로 강이 있고, 남쪽
바다로는 강화와 교동 두 큰 섬이 가로막고 있으며, 북으로 한강의 물을 가두어 은연중 하류는 앞산의 바깥을 둘러싸서 깊고 넓다. 풍기(風氣)가 평양에 비하여 더욱 짜임새 있고 견고하며, 박연(朴淵)·화담(花潭) 등 주위 경관이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장풍에 따라 주변 산세가 조밀하여 국면이 관광(寬廣)하지 못하고, 북쪽 산 여러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계류수는 모두 중앙에
모이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수세가 거칠고 분류(奔流)가 급격하여 순조롭지 못한 결점이 있다. 이와 같은 역세(逆勢)의 수덕(水德)을 진압하고, 지덕(地德)을 비보(裨補)하기 위하여 도선의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을 응용하여, 계류의 합류점과 내수구(內水口)에 사찰을 건립하였다. 하천의 범람이 우려되는 취약지점과 합류점에 사원을
건립함으로써 인공 건조물에 의한 하천의 측방 침식을 억제하고, 승려들로 하여금 하천을 감시하게 하는 동시에, 유사시 그들의 노동력으로 대처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라 여겨진다. 한양은 오늘날 서울의 사대문 안쪽이고, 모악은 신촌·서강 일대이다. 모악은 하륜(河崙)이 거의 독단적으로
주장하였던 땅으로 나라의 중앙에 있어 교통도 편하고 수리의 이점도 있으나, 불행히 한 동네에 위치하여 궁전과 종묘를 넓게 잡을 수 없으며, 명당
좌처(坐處)가 협착하고 주산이 저미(低微)하여 겨울철 한랭한 북서계절풍을 막기 어렵고, 수구(水口)가 관쇄(關鎖)하지 못하여 한양에 비길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개경과 한양은 거시적 안목에서 보자면 매우 비슷할 수도 있지만 국토의 통할이라는 측면에서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특히, 추가령지구대를 이용하여 함경도지방과의 유통을 꾀하는 데 있어서는 한양의 입지가 개경보다 월등한 편이다. 또한 규국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한양이 탁월하다. 한양은 풍수상 장풍과 득수를 고루 갖춘 전형적인 풍수 명당의 지세이다. 현무인 주산은 북악산이 되고
청룡은 낙산(駱山), 백호는 인왕산이며, 주작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안산은 남산, 조산은 관악산이다. 외수(外水)인 객수(客水)는 한강인데,
안산과 조산 사이를 빠져 흐르며 명당을 크게 감싸안고 있는 형세를 취한다. 내수(內水)인 명당수는 청계천인데, 객수인 한강과 명당수인 청계천은 그 흐름의 방향을 반대로 하는
내외수류역세(內外水流逆勢)의 형국이다. 청계천이 동쪽으로 도성을 관통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는 데 대하여, 한강은 서진(西進)하기 때문에 명당수와
객수는 완연히 역세의 국면을 가지게 된다. 좀더 부연하면 한강은 서울 부근에서 한양을 북으로 감싸듯 돌며, 서울 남쪽을 지나 북서진하는 대규모의
곡류하천 형태를 취한다. 이때 현재의 동작·영등포·노량진·강서구 일대가 곡류하천의 공격면이 되고, 용산·서빙고 쪽이
포인트바(point-bar) 면을 이루기 때문에 한강이 범람하는 경우에도 포인트바 쪽인 도성 안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그에 겹쳐
내외 수류가 역세이므로 심한 범람이 일어나는 경우라 할지라도 도성 안이 침수되는 것을 방지하여 주고 있다. 청계천은 포인트바 쪽인 뚝섬에서 한강에 합류하기 때문에 홍수 발생시 도성 안의 하수와 지표수를 쉽게
배수할 수 있는 이점을 갖는다. 즉, 공격사면 쪽에서 유입되는 지류가 본류의 수압 때문에 배수 불능이 되는 경우일지라도 포인트바 쪽은
본류의 수압이 휠씬 낮기 때문에 지류의 배수가 공격사면 쪽보다는 휠씬 유리하다. 그러나 북악산과 인왕산을 연결시켜 주는 부분인 한양의 건방(乾方:북서쪽)이 허결(虛缺)하여
황천살(黃泉煞)로 볼 수 있는 단점이 있다. 계룡산 신도안은 크게 보아 한양과 같은 득수국과는 거리가 멀고, 개경과 유사한 장풍국으로 해석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말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자주 표현되는 말이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과 회룡고조(回龍顧祖)라는 것인데, 이는 모두 계룡산과 그
주위 산천의 형세를 가지고 말하는 일종의 형국론적 술어이다. 이 두 가지는 성격상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산태극과 회룡고조란 같은 형세에 대한 이중표현으로, 진안의
마이산·덕유산의 맥이 무주―영동―대전 동부―회덕을 거쳐 공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공주군 계룡면과 반포면의 경계를
따라 이어져 태극 모양을 이룬다는 것으로, 용세가 머리를 돌려 근원을 돌아보는 고조(顧祖)의 형세라는 관점이다. 수류(水流) 역시 금강의 줄기가 장수―진안―무주―영동―대전 동부―부강―공주―부여―강경을 거쳐 장항과 군산
사이로 빠지는 동시에, 용추골 용동리의 명당수가 청룡의 뒤를 돌아 크게 우회하여 금강에 합류하는 거대한 태극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수태극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호순신(胡舜申)의 ≪지리신법 地理新法≫에서 제시된 것처럼 “수파가 장생 방위라 반드시 망할
땅(水破長生 衰敗立至)”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뿐 아니라, 제신(諸臣)의 반대론에서 명백히 제시된 바와 같이 위치가 남방에 치우쳐 동·서·북
삼면과 떨어져 도리의 균형을 얻지 못한 곳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큰 하천이 없어 조운(漕運)과 용수(用水)가 불편하며, 해안으로부터의 거리가 멀어
그에 따른 불편함이 상당함은 물론, 둘레가 지금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계룡산 연맥에 의하여 깊게 둘러싸인 일종의 좁은 산곡 분지상 지세이기 때문에
국도로서는 개경이나 한양에 비길 바가 못 된다.
풍수는 도읍이나 군현(郡縣), 혹은 마을 등 취락풍수에 있어서는 양기풍수라는 용어를 쓰고,
개인의 주택에 있어서는 양택풍수라는 말을 쓰며, 산소의 자리잡기 등 묘지풍수에 있어서는 음택풍수라는 개념을 씀으로써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그러나 양기·양택과 음택의 풍수 술법은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 ≪설심부≫에 “양택이 음택과 다른 점은 그 지세가 넓어야 한다는 점이다. 양택은 국면이 좁으면 안
된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의 해의(解義)에서 양기와 음택의 법술이 다르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양택은 사람 사는 곳이고 음택은 분묘이다. 양택이든 음택이든 그
조산(祖山)·내룡(來龍)·과(過)·협(峽)·기(起)·정(頂)과 청룡·백호·조산(朝山)·안산·나성(羅城)·수구 등이 두루 같은 것이지 다른 것은
거의 없다. 다만 다른 점은 양택의 경우는 그 혈장이 넓어야 하고, 음택의 경우는 혈장이 꽉 짜이게 좁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양지(陽地)는 면(面)이요, 음지(陰地)는 선(線)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양택은 반드시 그 지세가
관평(寬平)하고 명당의 규국이 넓어야지, 그렇지 못하고 가깝게 붙고 좁아서 답답하면 뭇사람의 집을 포용하기 힘든 것이다.” 따라서 양기나 양택을 보는 경우, 모든 것을 음택 보는 방법에 준하여 생각하면 될 것이고, 다만 규국이
중거(衆居)를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지의 여부에만 신경을 더 쏟으면 된다. 그러나 산수취합(山水聚合)의 규모가 큰가 작은가에 따라서 양기의 종류는 달라져야 하는데, ≪양택대전≫은
“제일 넓은 곳에는 기전(畿甸)이나 성성(省城)이, 그 다음 규모에는 군(郡)이, 그보다 작으면 주읍(州邑)이, 그리고 아주 작은 곳에는
시정(市井)이나 향촌(鄕村)이 들어선다.”고 보았다. ≪탁옥부≫도 그 용어만 다르게 표현하여 “용이 수천 리에 이르면 경도(京都)를, 수백 리면
성군(省郡)을, 백여 리면 주읍을 이루는데, 시진(市鎭)과 향촌이라도 반드시 수십 리는 되어야 한다. 이것보다 짧으면 역량을 중(重)히 볼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인구 부양력이나 식수 및 생활용수의 공급,
그리고 대지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와 같은 양기풍수이론은 대단히 합리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양택대전≫에서는 평야인 경우 득수가 중요하고, 산곡인 경우 장풍이 우선된다고 하였다. 평야에서는
관평의 욕구는 충족되지만, 대체로 대강(大江) 연변에 입지하는 관계로 수해(水害)든 한해(旱害)든 강의 피해에 대한 대책이 제일 먼저 마련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득수법에 관한 풍수술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산곡의 경우는 수해가 크게 문제되지 않기 때문에 득수에 대한 술법을 우선시킬 필요는 없다. 이때는
오히려 요풍(凹風)에의 두려움 등 국지 기후적인 영향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얼마나 안온한가 하는, 다시 말해서 주변 산세의 환포성(環抱性)을
염두에 두어 장풍법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양기·양택·음택은 이중환(李重煥)의 다음 여섯 가지 지리조건을 적용하여야 한다. 첫째, 수구는
휴소(虧疎), 공활(空闊)하지 않고 반드시 관진(關鎭)이 있어, 안으로 평야가 전개되는 곳이 좋은데, 관진은 이것이 서로 겹칠수록 대길의 지세라
하였다. 둘째, 야세(野勢)는 무릇 사람이 양기(陽氣)를 받아야 하므로 천광(天光)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광야가
더욱 길지라 상정하였다. 셋째, 산형(山形)은 주위의 산이 너무 고압(高壓)하여, 해가 늦게 뜨고 일찍 빠지며 밤에는 이따금
북두성도 보이지 않는 곳을 가장 꺼리는데, 이런 곳은 음랭(陰冷)하여 안개와 장기(瘴氣), 그리고 잡귀가 침입해서 사람을 병들게 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들판에 낮은 산이 둘러진 것은 산이라 하지 아니하고 모두 들이라 한다. 넷째, 토색(土色)은 사토(砂土)로서 굳고 촘촘하면 우물이 맑고 차서 좋은 땅이 된다. 이런 곳은
음택으로 쓴다 하더라도 바로 그 위에만 시신을 모시지 않는다면 관계가 없다. 다섯째, 수리는 산수가 상배하여야 조화의 묘를 다하는 것인만큼 물이
없는 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 여섯째, 조산(朝山)은 산이 멀면 청수(淸秀)하고, 가까우면 명정(明淨)하며, 일견 사람을 환희하게 하고
증오하는 모습이 없으면 길상(吉相)이다. 조수(朝水)는 소천(小川)·소계(小溪)에 있어서는 역조함이 길상이나, 대천(大川)·대강(大江)에
있어서는 역으로 흘러드는 곳이 결코 좋지 못하다. 물이 흘러오면 반드시 용과 향합(向合)하여 그 음양을 합하고, 또 꾸불꾸불 흘러서 천천히 가야
하며 직사하듯 흐르는 곳은 좋지 않다. 음택에 있어서는 시신이 직접 묻히게 될 광중(壙中)을 찾는 데에는 정혈과 좌향이 중시되는데, 이를 위하여
무수한 술법이 개발되어 있다. 조안(朝案)·분수합수(分水合水)·천심십도(天心十道)·태극 등의 정혈법, 이십사향(二十四向)·팔십팔향(八十八向)
등에 의한 방위결정법과 십오도수법(十五度數法)·향향발미법(向向發微法) 등의 산수방위의 길흉해석에 관한 방법 등이 그 예이다. 양택에 있어서는 삼요(三要)를 중시하는데, 첫째 대문, 둘째 주된 거처인 방 또는 대청, 셋째 부엌을
뜻한다. 유지로(由之路)·거지소(居之所)·식지방(食之方), 즉 대문·안방·부엌은 현대적인 주택계획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생각할 때,
풍수에서 이 삼요의 배치방식을 논한 것은 매우 타당한 일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대문이 중시되는데, 대문은 기(氣)의 출입구이며 기구(氣口)는 사람에 있어서의 입과
같기 때문이다. 입이 바르면 호흡과 음식 먹는 것이 편하고, 대문이 바르면 당기(堂氣)를 받아들이고 인물이 출입하는 데 편한
까닭이다.
도참의 종류는 대단히 많으나 그 중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내용이 포괄적인 것은 ≪정감록
鄭鑑錄≫이다. 도참서들은 주로 국운이 쇠퇴하고 국정이 불안할 때마다 나타나, 말세의식을 형성하였고 부패한 현실을 부정하는 정신적 기반을
만들었다. 즉, 민중은 이러한 괴서(怪書)에 가탁하여 숨막히는 폭정과 암흑으로 뒤덮인 현실의 피안(彼岸)에 구세주의
도래를 갈구하였고, 그 결과 집권계층의 거주지인 현 왕도의 지기는 쇠하고 다른 곳에 기맥이 새로이 흥왕하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이때는 혼란기여서 피란·보신(保身)의 사고관념도 두드러졌을 것이므로, 이러한 도참사상에 풍수사상이
가미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 경우는 주로 양기풍수가 해당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감록≫의 감결(鑑訣)에 “천지는 음양이 먼저 주장이 되는도다.”라는 대목으로, 이는
풍수지리설이 음양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는 선언으로 평가된다. 둘째, 국역(國域) 풍수의 내맥에 관한 대목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대체로 ≪정감록≫ 감결의 경우
조산(朝山)은 곤륜산(崑崙山), 종산(宗山)은 백두산으로 하여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근간으로 차령산맥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이 분리되는 이른바 양백간(兩白間)이 크게 주목을 받고 있음이 특징이다.
≪삼한산림비기 三韓山林祕記≫에도 내맥의 내용은 거의 같으나, 차현(車峴) 이남이 배역(背逆)의 지세라는 점을 추가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국도 풍수에 대한 지적으로는 우선 감결에 한양의 풍수지세가 기재되어 있고, ≪삼한산림비기≫에는
국도로서의 우선 순위를 금강·송악·한산(漢山)·평양·경주·원주·전주·가야산·마니산 등으로 열거하고 있다. ≪도선비결≫에는 계룡산이 운위되어
있는데 이는 금강의 동류인 듯하다. 끝으로, 도읍·주거 풍수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도참서류에 등장되는데, 대종은 역시
피란·보신적인 십승지지(十勝之地)에 관한 것들이다. 감결 뒷부분에 나오는 십승지지는 ① 풍기 차암 금계촌 동쪽 협곡 소백산 두 물길의
사이(豊基車巖金鷄東峽小白山兩水之間), ② 화산 소령의 옛터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 동촌으로 넘어 들어가는 곳(花山召嶺古基在靑陽縣越入奉化東村), ③
보은 속리산 네 시루목이 이어진 곳(報恩俗離山四甑項延地), ④ 운봉 행촌(雲峰杏村), ⑤ 예천 금당실(醴泉金堂室). ]⑥ 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양수지간(公州鷄龍山維鳩麻谷兩水之間), ⑦ 영월 정동 상류(寧越正東上流), ⑧
무주 무봉산 북동방상동(茂朱舞鳳山北銅傍相洞), ⑨ 부안 호암하(扶安壺巖下), ⑩ 합천 가야산 만수동(陜川伽倻山萬壽洞) 등이다. 이상의 십승지지의 위치가 모두 확연하게 알려진 것은 아니다. 그 중 확인된 영월·영춘·풍기를 대상으로
조사한 십승지지의 지세적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명백한 협곡이다. 주위는 급사면으로 둘러싸여 있고, Ⅴ자 모양의 지형으로
협곡 내 일부에는 퇴적 평탄면이 나타나기도 한다. 둘째, 대산맥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다른 지역과의 교통이 매우 불편하며, 전략지점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와는
전략적 가치를 도외시하여도 될 정도의 위치에 있다. 셋째, 반드시 한쪽 면은 좀더 넓은 도읍지에 연결되어 있으나, 연결된 협곡의 폭은 병폭과 같이 좁다.
넷째, 협곡 내에는 반드시 하천이 있는데 이 하천은 병목 같은 협곡의 입구를 지나면 그대로 대하천에 연결이 된다. 대체로 이러한 지역은 영속적인 주거지로서는 부적합하고, 다만 일시적인 피란지로서의 기능은 인정할 만하다.
게다가 분지상 협곡이기 때문에 요풍을 가장 두려워하라는 ‘최파요풍(最怕凹風)’의 풍수 금기를 어기고 있어서 겨울나기가 몹시
어렵다.
풍수지리설은 흔히 풍수사상이라 칭한다. 따라서, 그것은 민족의 정신적 유산이자 관습의 축적임을
암암리에 표출하고 있다. 풍수사상을 알아봄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연관·토지관·지리관을 추출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은 너무나 타당하다. 풍수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조화와 균형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조화된 풍토와 자연환경은 풍수가 궁극적으로 찾아내고자 하는 이상향의 상태임이
분명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산수 상보한 조화, 균형의 땅에 사람의 마음을 지각상 포근히 감싸줄 수 있는
유정한 곳, 그러나 속된 기가 흐르지 않는 성소(聖所)를 추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풍수사상의 측면에서 본 우리 민족의 자연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룡의 맥세는 북룡(北龍)의 시조인 곤륜산으로부터 수려, 장엄하고, 광채나고 둥글며 맑은 생기에
찬 산으로 연면히 이어져, 길지인 혈장 뒤쪽의 주산에까지 뻗어내려야 한다. 이 연맥(連脈)은 주위 산들의 공손한 호위를 많이 받을수록 좋으며,
생동, 변화하면서도 조화와 안정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 둘째, 혈을 중심으로 국면을 구성하고 있는 길지 주변의 산세는 사신사의 원칙, 즉
현무수두(玄武垂頭)·주작상무(朱雀翔舞)·청룡완연(靑龍蜿蜓)·백호순부(白虎馴頫)의 형세를 갖추어야 한다. 풀이하면, 주산은 주인이나 임금답게
위엄을 갖추어야 하나 험악하거나 지나치게 위압적이면 좋지 않고, 안산·조산(朝山)은 신하나 아내처럼 결코 주산을 압도해서는 안 되며 내리
눌러서도 안 된다. 실제로 마을은 북쪽의 높은 주산에 기댐으로써 추운 북풍도 막고 심리적 안정감도 얻을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가까이 안산이 아담하고 멀리는 조산이 뒤를 받쳐주어 안온함을 형성하게 된다. 좌우의 청룡·백호는 명당의 국면을 전체적으로 감싸안은 듯하여야 하고, 거역의 자세를 취하여서는 안 되나
그렇다고 너무 핍착하여 답답한 감을 주어서도 안 된다. 산의 모양은 둥글고, 단정하고, 밝고, 맑고, 유연하고, 중첩되고, 아름답고, 유정하여야
한다. 셋째, 물은 반드시 길한 방위로부터 슬며시 흘러들어와 흉한 방위로 꼬리를 감추듯 빠져나가야 한다. 물에서
탁취가 나거나 흐리면 안 되고, 혈전(穴前)에 공손히 절을 올리듯 유장하게 지나가야 한다. 급직류하여 혈을 향하여 쏘듯 흐르면 안 된다. 이때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면
불길하며, 남녀상배하고 음양상보하는 천리에 따라 물과 산이 어우러지듯 하여야 좋은 것이다. 넷째, 혈자리는 음양의 조화가 집중적으로 표출된 곳이기 때문에 “음으로 오면 양으로
맞아들이고(陰來陽受), 양으로 오면 음으로 맞아들이는(陽來陰受)” 생기집중의 장소를 정확히 잡아야 한다. 이는 속의 자리에서 성소를 정하는 것으로 국면의 지고지선의 장소를 뜻하며, 경관 인식상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산세가 높으면 혈도 높은 곳에 있고, 낮으면 혈 역시 낮은 곳에 있게 되는만큼, 국면구성의 면에서는 역시 조화가 바탕이
된다. 다섯째, 좌향은 산수로 대표되는 국면의 전반이 일정한 형국으로 좌정되었을 때 전개후폐(前開後閉), 즉
혈의 앞쪽은 트이고 뒤쪽은 기댈 수 있는 선호성 방위를 선택하여야 한다. 끝으로 풍수의 윤리성으로 길지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옥룡자유세비록≫의 다음 대목들이 이러한 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연장칠십(年將七十) 늙은 몸이 감천지성(感天至誠) 효자로다. 적덕수선(積德修善)하온 후에 이 혈을
얻으리라. 천장지비(天藏地祕)하였으니 허욕을 내지마라. 어와 벗님내야 길지를 얻을진대 아는 것도 쓸데없고 순천적덕(順天積德) 하여서라. 그르친
것 물욕이오 해로운 것 혈기로다. 우리 선생 날 가르칠 제 조선산수(朝鮮山水) 길흉지(吉凶地)와 선악인심취택(善惡人心取擇)하야 주인 찾아
맡기라니 팔로를 둘러보나 혈 줄 사람 전혀 없다.” 이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의 심성임을 잘 보여주는 가사이다. 조화와 균형을 이룬 따뜻한 남쪽땅,
자연과 어우러진 인공의 시설물, 천지인상관적(天地人相關的)인 있음 그대로의 존재성, 갈등이 조절되는 인간관계 등 우리 민족의 풍수적 자연관은
있음 그대로의 상태, 즉 자연 그 자체를 본받고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원 리]
[역 사]
[국도(國都)의 풍수적 해석]
[양택풍수와 음택풍수]
[도참류의 풍수]
[풍수와 민족성]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