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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기도로 세운 나라
(누가복음 17:1-8)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어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시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말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미국에 올 때 일본 사람은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가지고 왔고, 중국 사람은 식당을 가지고 왔고, 한국 사람은 교회를 가지고 왔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 가든지 똑같습니다. 지금은 많이 변해서 한국의 자동차와 전자제품들이 세계 시장을 누비고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우리는 꿈도 못 꿀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우리 한국인들은 교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막 11:17)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누구나 와서 기도하는 집이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 제1선에 우리 한국인들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1. 대한민국은 기도로 시작된 나라입니다.
대한민국 국회는 5월 10일의 선거에서 선출된 의원들로 처음 개원한 날은 1948년 5월 31일이었습니다. 일컬어 제헌국회라고 합니다. 그 날 오전 10시에 중앙청 중앙 홀에서 시작 되었던 회의에서 맨 처음 행한 절차가 임시의장을 선출하는 순서였습니다. 임시의장은 국회의원 중 최고령자가 맡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임시의장으로 뽑힌 이승만 박사가 의장석에 등단하자 국회의원 일동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승만 임시의장은 독특한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의 말로 역사적인 사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본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감리교회의 장로님이셨던 이승만 임시의장의 이 발언에 따라 국회의원이면서 목사이셨던 이윤영 의원이 단상으로 올라가 간결하면서도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윤영 의원은 기독교 목사의 신분으로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분이었습니다. 기도는 국회의원 전원이 기립한 가운데 드려졌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일이 기적이라 할 것이 대한민국이 세워지게 되면서 처음 뽑힌 국회의원들 중에는 종교와 사상이 실로 다양하였기 때문입니다. 종교로 말하자면 기독교, 불교, 유교 및 민족종교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있었고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자유민주주의자 등이 골고루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함께 일어나 고개를 숙여 대한민국의 건국을 감사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었습니다. 실로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세울 때에 맨 먼저 기도로부터 시작한 일이 어찌 기적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윤영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복을 주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정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하옵건데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 평화를 이루어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내딛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김진홍 목사님은 이 기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기도 첫 부분의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게 된 부분은 마치 출애급기를 다시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하며 그때 이미 분단 된 조국의 통일과 자주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에 이르러서는 ‘아멘’을 함께 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리고 민생(民生)의 도탄이 길면 길수록 악한 세력 공산주의가 확대될 것이란 부르짖음은 지금까지 멈출 수 없는 기도가 되고 있다. 당시 제헌국회의원들이 그 어려운 여건 중에서도 이 나라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 위에 세워 주었기에 그를 기반으로 삼아 이 나라가 이 만큼이나마 살아가게 된 것임을 생각할 때 깊은 감회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 기도에 중요한 세 가지의 소원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남북통일, 둘째는 민생의 복락, 셋째는 세계의 평화입니다. 우리나라의 국회는 물론 새 정부도 이런 목표를 가지고 출발한 것입니다. 특히 셋째인 ‘세계평화’라는 목표는 우리나라 같은 작은 나라로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소원이요, 분수도 모르고 하는 기도하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2. 지금은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1)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① 『남북장성급회담 북측 단장은 지난 4월 10일, 남측에 통지문을 보내 “심리모략 행위를 중지하기 위한 납득할만한 대책을 강구하고 그에 대해 공식 통고하지 않는다면 우리 군대는 해당한 결정적인 조치를 곧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이날 보도했습니다. 북측 단장은 통지문에서 북측의 여러 차례 경고에도 불구하고 “남측이 반공화국 심리 효과를 높이기 위해 우리 체제를 비난하는 불순한 삐라와 추잡한 녹화물, DVD삐라까지 대량 살포하고 있고, 여기에 동서해 지역 북남관리구역을 통행하는 남측 인원들도 적극 가담하고 있다”고 말했다.』
②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잠수함의 어뢰로 우리 초계정 천암함에 발포하여 침몰시켜 놓고, 자기들이 하지 않은 척하면서, 이제는 뻔뻔하게 대북 삐라 살포행위를 막아달라고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무엇을 가장 무서워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어떤 무기보다도 삐라를 무서워합니다. 삐라에는 진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본래부터 거짓 위에 세워졌습니다. 어둠을 좋아하고 거짓말을 만들어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짓을 끊임없이 자행했습니다. 그래서 북한 백성들을 전부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벙어리가 되게 하였는데, 이제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보고 듣고 깨달은 사실들, 곧 북한에서 배웠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아서 그것을 밝혀 이제는 더 이상 속지 말자고 하여 만든 삐라를 통해 북한의 백성들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게 되니까 그것이 가장 두려웠던 것입니다.
③ 또한 삐라는 북한의 산골 구석구석까지 들어갑니다. 그러니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민간인들은 그것을 줍지도 못하게 하고 군인들이 주워서 처리하도록 조치하였지만, 군인들이 그것을 주우면 안 보겠습니까? 누구나 호기심이 생겨서 더 보고 싶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진실은 날로 날로 퍼져나갑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삐라를 담은 풍선 안에 남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DVD나 USB 같은 것을 넣었습니다. DVD는 값이 싸고 지우고 다른 것을 녹화할 수 없지만, USB는 값이 비싸고 용량이 커서 얼마든지 다른 것을 저장해 둘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일반 백성들도 볼 수 있지만, 컴퓨터가 흔하지 않기에 컴퓨터를 가진 고위층의 자녀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들어가게 되면 북한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되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④ 과거 좌파정권 10년 동안 북한에 보내준 100억 달러의 돈은 모두 핵개발하고 미사일을 만들고, 잠수함이나 최첨단 무기를 사오는 데에 썼습니다. 결국 내가 도와준 돈으로 인해 내가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삐라는 김정일과 그의 하수인들이 얼마나 악독한가를 깨닫게 해 주고, 그들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막강한 무기가 됩니다. 진실의 위력입니다. 잠깐 동안은 거짓이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진실이 이깁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진실을 두려워합니다. 자기들이 6.25사변을 일으킨 것도 백성들이 알게 될까봐 두렵고, 이번 천안함을 침몰시킨 것도 발각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6; 눅 8:17; 12:2)라고 하셨으니,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습니다. 곧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⑤ 이것이 기도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북한의 작전은 핵무기로 공갈을 치는 것이고, 남한의 사회에 불평과 불만을 고조시키고 사회를 혼란케 하여 혹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볼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한의 작전은 너무도 다릅니다. 우리는 평화적 방법을 씁니다. 햇볕정책입니다. 김대중 씨는 무조건 퍼주기를 하였지만, ‘무조건’이라는 말은 안 됩니다. 하나님도 ‘무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을 열어서 바깥세상을 보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를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진리를 알게 해주어 스스로 자기를 고쳐나가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의미와 일치되는 것입니다. O. 할레스비 목사님은 그의 저서 「기도」라는 책 첫머리에서 기도를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첫째는 계시록 3:20 말씀을 들어서 “기도란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안에서 문을 여는 것”이라고 했고, 둘째로는 요한복음 2장 가나 혼인집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라고 한 말 한 마디에 그 의미가 다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나의 딱한 사정을 아뢰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해결방법은 내 영역이 아니고 주님의 영역이므로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⑥ 풍선 삐라는 소리도 없이 날아갑니다. 구석구석까지 날아갑니다. 그런데 그 효과는 핵무기보다도 훨씬 더 강력합니다. 핵무기는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지만, 그래서 천암함도 격침시켜 우리 해군 병사들 47명을 죽게 했지만, 삐라는 사람을 살리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삐라를 보고 북한을 탈출하여 자유를 얻고 그리스도를 만나 천국백성들이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이 삐라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김정일 도당은 이 삐라를 두려워합니다. 진실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뿌린 삐라는 어느 곳에 떨어질지 누가 읽어보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도 그러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그 기도가 어떻게 응답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 한 마디가 하나님의 신기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2) 이 영적 전쟁에서 우리는 기도로 승리해야 합니다.
① 북한이 먼저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6.25가 그랬고,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를 보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 대통령을 암살하려던 일이 그랬고, 이틀 후인 1월 23일 푸에블로 호와 승무원 83명을 나포한 사건도 그러했습니다. 1974년 광복절 기념행사장에 문세광을 보내 박 대통령을 저격하였으나 육영수 여사가 죽었던 일이 그러했고,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도끼만행사건’이 있었는데, 이것도 그러했습니다.
1983년 10월 9일에는 버마의 아웅산 국립묘지에 폭발물을 장치하여 우리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던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천만다행히도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에 폭발하였기에 대통령은 화를 면했지만, 아까운 각료 17명이 죽었습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 11월에는 우리의 KAL기를 폭파하여 귀국하던 중동근로자 승객들을 다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금강산에 관광 간 사람을 붙잡아 놓고 괴롭힌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그러다가 현 정부 들어와서 북한은 2008년 7월 11일 새벽에 금강산 관광에 나섰던 박왕자(53) 씨를 북한군 초병이 박 씨의 등 뒤에서 총을 쏴서 죽였던 일도 있었습니다. 2009년 9월 6일 임진강 상류 황강댐의 물을 예고 없이 방류했는데, 이로 인해 남한 임진강 수위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강가에 천막을 치고 자던 우리 국민 6명이 익사했습니다. 그러나 6.25도 남쪽에서 먼저 쳐들어왔던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무장공비들의 일은 남한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하고, KAL기 사건도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떠듭니다. 박왕자 씨를 이렇게 죽여 놓고도, 한 마디도 사과할 줄 모르는 악한 놈들입니다.
② 이 세상에 이렇게 악독한 놈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이런 악한들을 얹어놓고 삽니다. 언제 무슨 짓을 할지 위태하고 불안한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들이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실은 우리가 기도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하지 않았으면 벌써 공산화되었고, 아마 이런 일들이 일어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함으로 영적으로 강해지니까, 원수의 힘도 강해지고 그 수단이 더욱 악랄해지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운동시합을 보아도 서로 실력이 비슷해서 누가 이길지 도무지 예측하기 힘들 때에 그 경기는 인기가 있습니다. 관중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실력이 워낙 차이가 나서 보나마나라고 한다면 누가 비싼 돈을 내고 가서 구경하겠습니까? 이것이 영적 세계에도 그대로 통합니다. 우리 교회들이 기도함으로 대한민국은 나날이 발전하여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그 반대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자유가 없는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면 그 지옥이 금방 망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이렇게 실력이 엇비슷하기에 한국은 더욱 놀랍게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스포츠 경기는 누가 이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영적 싸움은 이미 승부가 결정된 상태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적이 아무리 강하고 악랄해도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 마귀의 편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귀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깁니까? 한국 교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편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저렇게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진짜로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 만민을 위하여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집이기에 하나님이 책임을 져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③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는 백성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과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면 우리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진정한 주인으로 똑바로 모시고 숭배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한없는 복을 받았으면서도 완악하여 그 은혜를 모르거나 가볍게 생각하고 자기가 잘 나서 복을 받은 줄로 착각하고 살지나 않았습니까? 1950~60년대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해서 필리핀에는 비교도 못할 만큼 가난했고, 캄보디아나 아프카니스탄보다도 더 가난했을 정도로 지구상 북반구에서는 끝에서 두서너 번째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지지리도 가난하고 못났던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지금은 어느덧 완전한 원조공여국으로 성장해서 캄보디아 필리핀 아프카니스탄 같은 나라들을 저 밑에 한참 눈 아래 나라로 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발전하고 성장하였습니다. 그 성장의 저변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잊지 말아야 하고 그 은혜에 보답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어느 부자가 많은 재산을 모아서 곳간에 넘치게 쌓아두고 이르기를 “곳간이 이만큼 넘치니 이제는 먹고 마시고 즐기자.”했을 때, 하나님이 부자에게 말씀하기기를 “너의 생명을 오늘 저녁에 거두면 그 재산이 뉘 것이 될 것이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지금의 풍요를 마시고 즐기기만 하고 교만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교만을 벌하시면 우리의 처지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거두어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오로지 하나님을 똑바로 숭배하는 것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3) 기도는 우리를 진리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무서운 것입니다.
①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일 대 일로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이루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누가 기도하겠습니까? 기도하면 응답이 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나날이 믿음이 자라갑니다.
② 또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대화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도 그를 사랑하십니다. 기도를 많이 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강하게 임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③ 나아가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 사이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모든 거짓을 배제했을 때에 거기에 진리가 움틉니다. 기도를 많이 할수록 우리는 진리의 사람이 됩니다. 기도는 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듣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성경을 많이 읽게 되고, 깊이 깨닫게 되어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복을 주십니다.
1) 운동시합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것은 역전승(逆轉勝)이라는 것입니다.
① 탐정소설이나 탐정영화나 공통점은 처음에는 악인들이 항상 이기고, 의인이나 경찰 또는 탐정은 항상 패하고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극적인 반전(反轉)이 일어납니다. 운동시합에서 극적으로 역전이 이루어져서 이기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②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렇게 됩니다. 마귀가 더 강하고 다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겁쟁이들은 마귀에게 얼른 굴복하고 의를 배반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는 일제에 굴복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마 24:13)고 말씀하셨습니다.
③ 하박국 선지자를 비롯하여 많은 선지자들이 똑같은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왜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왜 악인이 더 잘되고 있습니까?” 그때에 하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려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3-4). 아멘.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①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실례는 성경에 수없이 나오지 않습니까? 요셉도, 모세도, 다윗도, 베드로도... 그러나 그 절정은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어도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인류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②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고난을 당할 당시에는 너무도 고통스럽고 원망스럽기도 하겠지만, 나중에 지나고 보면 그것이 놀라운 복이 되었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국민이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③ 우리 개개인의 삶을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 위의 주님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에 감격을 느끼게 되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새 힘이 옵니다. 성령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고후 4:8)라고 하였습니다. 낙심하니까 우울증에 걸리고, 우울증에 걸리니까 결국 자살하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을 믿고 그분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더욱 크게 승리하시기 축원합니다. (2010년 4월 25일)
[기도로 세운나라]를 읽고
나균용목사님 설교를 읽으면서 대한민국 국민의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감리교회의 장로님이셨던 이승만 임시의장의 이 발언에 따라 국회의원이면서 목사이셨던 이윤영 의원이 단상으로 올라가 간결하면서도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본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윤영 의원은 기독교 목사의 신분으로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분이었습니다. 기도는 국회의원 전원이 기립한 가운데 드려졌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일이 기적이라 할 것이 대한민국이 세워지게 되면서 처음 뽑힌 국회의원들 중에는 종교와 사상이 실로 다양하였기 때문입니다. 종교로 말하자면 기독교, 불교, 유교 및 민족종교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있었고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자유민주주의자 등이 골고루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함께 일어나 고개를 숙여 대한민국의 건국을 감사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었습니다. 실로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이 기도로 하니님께 올려졌고 애국가 에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고백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니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저는 오늘도 목사님 설교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장중에 붙잡고 쓰시는 계시는 이유가 기도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때문이라는 믿음의 확신이 생겼습니다.
. 41.선민의 글자(1) - 훈민정음
(신명기 9:9-10)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야를 산에 거하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네게 주셨나니 그 판의 글은 하나님이 친수(親手)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1. 글자의 중요성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 온 세례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소리’이고, 예수님은 그 소리의 본체이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가 중요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실 때에 돌판에 친히 써 주셨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서 5:5-6에 보면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였는데 벨사살이 자기의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왔던 금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여 왕이 그의 귀인들과 왕후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그 금은동철 목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보았습니다. 이에 왕이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의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치더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 글을 읽지도 못했는데, 다니엘이 읽고 해석을 하지 않았습니까?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바르신, 곧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런가 하면 예수님도 간음 중에 잡혀온 여자를 심판하실 때에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구약의 왕이었던 벨사살은 죽었고, 신약의 죄인이었던 그 여인은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이 글자를 쓰시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일어납니다. 마치 왕이 죄수의 판결문에 싸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는 사형으로, 누구에게는 무죄 석방으로 결정됩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십계명을 하나님이 친수로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도 죽느냐 사느냐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고, 글자입니다. 지난 4월 열방을 품는 연합 기도성회 때에 주강사로 오신 김종필 목사님은 “히브리 글자는 심히 오묘한 글자로 세계 제일”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선민에게 많은 복을 주시지만, 그 중에서도 세계 제일의 글자도 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이렇게도 세밀하십니다. 당신의 백성에게 항상 제일 좋은 것을 주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선민이 누리는 복이 아닙니까? 그러나 내가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히브리 글자가 훌륭하기는 해도 모음이 발달되지 않았고 매우 제한적이어서 모든 소리를 다 적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글자 자체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한자(漢字)가 최고입니다. 한자는 상형문자로부터 나온 것이고, 따라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무엇인가를 상형하고 있으므로 다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자는 너무 어려워서 모든 백성이 배울 수가 없고, 100년 전만 해도 중국의 문맹률이 90%를 넘어 세계 제일의 문맹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은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문맹률을 9%까지 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성큼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5만 자나 된다고 하는 글자를 어떻게 다 배워서 자유롭게 쓸 수 있겠습니까? 비록 대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중국의 고대 문서들을 읽는 데는 문맹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맹률(文盲率)이란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문맹률이 높다는 것은 문맹자가 많다는 뜻이고, 문맹률이 낮다는 것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적다는 뜻이니 문맹률은 낮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1940년대 일제시대에는 70%를 넘던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이제는 0%에 가깝게 낮아졌고, 그 결과 자랑스럽게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많아서 문맹률이 3%, 일본ㆍ독일ㆍ영국ㆍ프랑스는 1%, 이탈리아는 5% 정도라고 합니다. 아시아의 방글라데시가 71%, 인도는 41%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지역은 문맹률이 높습니다. 중앙아프리카와 감비아는 73%, 가나 70%, 말라위 78% 등이고 문맹률이 파악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자기의 글자도 없는 나라나 종족은 문맹률을 측정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계 제일의 글자를 주셔서 문맹률이 0%라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곧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랑을 많이 받은 백성이 곧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2.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자입니다.
1) 글자는 크게 표음문자(表音文字)와 표의문자(表意文字)로 나눕니다.
① 표음문자란 음만 나타내는 문자입니다. 영어의 알파벳이나 한글이나 일본 글자도 다 음만 나타냅니다. 히브리 글자도 그렇고, 헬라 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자(漢字)는 글자 하나하나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자를 표의문자라 합니다. 옛날에 서당에서 “하늘 천, 따 지, 감을 현, 누루 황”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배우면서 외워서 썼습니다.
② 우리나라 사람들은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는 것을 가리켜 “글을 배운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이렇게 한문 글자를 배우던 것에서 유래하여 그런 말이 생겼을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은 곧 글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아가 말을 배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한문 글자를 많이 아는 사람이 유식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지금은 영어를 잘해야 유식하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나라말도 제대로 못하면 어찌 유식하다 하겠습니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참으로 무식한 사람입니다. 세상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면 무식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하면서 지혜롭게 살면 그 사람이 제일 유식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③ 표음문자는 그 수효가 적어서 배우기 쉽습니다. 영어는 26자, 한글은 24자밖에 안 됩니다. 일본글자는 50자나 되지요. 그렇지만 그 정도는 아주 쉬운 편입니다. 한자는 무려 3만 자, 5만 자나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많은 것을 전부 외워서 써야 합니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공부하여서 썼습니다. 그러니 머리가 좋고, 환경도 좋아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그런 대로 많은 글자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머리가 둔하든지, 환경이나 형편이 어려워서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서 표현할 수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2) 우리에게는 세종대왕이 만들어 주신 훈민정음이 있습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오늘날 한글이라고 하는 우리 글자의 원래의 이름입니다.
① 그런데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시고 반포하실 때에 그 서문에 한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의 말소리가 중국의 것과 달라서 문자끼리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도다. 내가 이것을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히게 하여 매일 사용함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國之語音이 異乎中國하야 與文字로 不相流通할새 故로 愚民이 有所欲言하여도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라. 予 一爲此憫然하야 新制二十八字하노니 欲使人人으로 易習하야 便於日用耳니라.)라고 하였습니다.
②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한자를 그냥 썼습니다. 어렵거나 말거나 당연히 배워야 하고 써야 하는 줄로 알고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많은 백성들이 문맹(文盲)이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세종대왕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생각할까요? 세종대왕은 많은 업적이 있지만, 그가 훈민정음을 만들어서 우리 백성에게 주었다는 사실은 단지 우리 민족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도 획기적인 큰 공로인 것입니다.
③ 그런데 이 서문을 보면 세종대왕이 우리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진실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글을 만들려고 했을 때에 신하 중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미 좋은 글자가 있는데, 왜 다른 것을 만들려고 하느냐?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든다고 해도 한자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 수 있겠느냐? 또 우리가 만일 한자를 버리고 다른 글을 쓴다면 중국의 미움을 받게 되지 않겠느냐? 우리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공연히 글자를 새로 만들자고 하여 지금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것이냐?”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묵묵히 밀고 나갔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왕을 따랐습니다. 마침내 위대한 글자를 만들게 된 것이었습니다.
④ 우리는 세종대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일국의 왕도 백성들이 자유롭게 의사가 소통되도록 글자를 만들어주려고 그토록 애를 썼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더 애를 써 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시편 127:1에 있는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가 아닙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세종대왕이 한 것 같지만, 실은 그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셨음을 우리가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만 주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⑤ 사람마다 인생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는 것밖에 모릅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더 좋은 차를 굴리고, 더 좋은 보석으로 몸치장을 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부와 영광을 한껏 자랑하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까? 그러나 비록 소수의 사람일지라도 그들과는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을 찾아갑니다. 명예를 등지고 자기 이름이 나지 않는 곳으로 갑니다. 고난을 당하고 따돌림 받는 길로 걸어갑니다. 이것이 도의와 예절과 정의와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입니다. 그들은 돈이나 먹을 것보다 문화(文化)라는 것을 추구합니다.
해방 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은 놀라웠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려고 해도 수업료를 내야만 했습니다. 중고등학교도 입학시험을 보아야 했고 합격이 되면 비싼 입학금과 수업료를 선납해야 비로소 입학이 가능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온 나라가 가난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 하에 집을 팔고 논을 팔고 소를 팔아가면서 자식들을 대학교에 보내고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가난하면 자녀가 어리다고 해도 돈을 벌어오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어느 것이 더 큰 것입니까? 돈입니까, 공부입니까? 우리 부모 세대의 사람들은 자녀들을 위해 돈보다 공부를 택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렇게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⑥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의 첫 번 시험이 무엇이었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떡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자녀들을 공부시키기는 해도 그 목적이 돈에 있고 세상 명예와 권세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마귀의 유혹이요,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얼마 전 고국의 이어령 교수가 한국 교회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읽었는데, 그는 한국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일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이는 일에 더 열심이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습니다. 선교사라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구제 사업에 더 바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택해야 합니다. 빵이 아니라 글을 택하는 것입니다. 문화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의식주의 문제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3) 우리의 글이 얼마나 뛰어난 글인가는 다른 나라의 글자와 비교해 볼 때에 너무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 비교를 좀 해 보겠습니다.
① 『중국인이 컴퓨터 자판을 치는 모습을 봅시다. 3만 개가 넘는다는 한자를 어떻게 좁은 자판에서 칠까요? 한자를 자판에 나열하는 게 불가능해 중국어 발음을 먼저 영어로 묘사해 알파벳으로 입력한 다음에 단어마다 입력키를 눌러야 화면에서 한자로 바뀝니다. 불편한 건 더 있습니다. 같은 음을 가진 글자가 20개 정도는 보통입니다. 그 중에서 맞는 한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타이핑을 많이 하는 전문직 중국인들은 한자의 획과 부수를 나열한 또 다른 자판을 이용합니다. 자판을 최대 다섯 번 눌러 글자 하나가 구성되므로 오필자형(五筆字型)이라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그래도 속도가 빠르지만 익히기 어려워 일반인은 못합니다.』
② 『일본인은 어떨까요? 컴퓨터 자판을 보면 역시 알파벳입니다. 일본인들은 ‘世’를 영어식 발음인 ‘se’로 컴퓨터에 입력하는 방법을 씁니다. 각 단어가 영어 발음 표기에 맞게 입력돼야 화면에서 가나로 바뀝니다. 게다가 문장마다 한자가 있어 쉼 없이 한자 변환을 해줘야 하므로 속도가 더딥니다. 나아가 ‘추’로 발음되는 한자만 해도 ‘中’을 비롯해 20개 이상이니 골라줘야 합니다. 일본어는 102개의 가나를 자판에 올려 가나로 입력하는 방법도 있지만 익숙해지기 어려워 이용도가 낮습니다. 이러니 인터넷 친화도가 한국보다 낮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③ 말레이시아처럼 언어가 여러 가지인 국가들은 컴퓨터 입력방식 개발부터 골칫덩어리입니다. 물론 앞으로 과학이 더 발달하여 좋은 방법이 나오겠지만, 아무리 발달된다고 해도 우리 한글처럼 간단하게 처리되는 글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④ 24개의 자음·모음만으로 자판 내에서 모든 문자 입력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한글은 하나님의 특별한 복(福)이요 과학입니다.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낼 때 한글로 5초면 되는 문장을 중국, 일본문자는 35초 걸린다는 비교가 있습니다. 한글의 입력 속도가 일곱 배 정도 빠르다는 얘기입니다. 정보통신(IT)시대에 큰 경쟁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인의 부지런하고 급한 성격과 승부근성에, 한글이 ‘디지털 문자’로서 세계 정상의 경쟁력이 있는 덕에 우리가 인터넷 강국이 됐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⑤ 26개인 알파벳은 한글과 같은 소리문자이고 조합도 쉽지만 ‘a’라도 위치에 따라 발음이 다르고 나라별로 발음이 다른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글은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소리만 갖습니다. 어휘 조합능력도 가장 다양합니다. 소리 표현만도 8800여 개여서 중국어의 400여 개, 일본어의 300여 개와 비교가 안 됩니다. 세계적 언어학자들은 한글이 가장 배우기 쉽고 과학적이어서 세계 문자 중 으뜸이라고 말합니다. ‘알파벳의 꿈’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거의 0%인 세계 최저의 문맹률(文盲率)이 가능하게 된 것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한글의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반영한 음성공학적 문자여서 세계의 언어를 다 표현해냅니다. 모음도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외우기 쉽습니다. 맥도널드를 중국은 ‘마이딩로우’, 일본은 ‘마쿠도나르도’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합니다.』
⑥ 영어와 한글을 가지고 기계화, 문서화를 시험해보았더니, 한글이 영어보다 7배가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현재는 영어가 세계 공용어지만, 앞으로 한글의 인터넷문화가 선도하는 기계화 문자세계에서는 한글이 공용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는 것입니다.
4) 한글을 외국에 수출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자기네 글자가 없는 종족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한글로 문자를 만들어 주는 운동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① 네팔도 자기네 문자가 없습니다. 가장 쉬운 글자는 한글입니다. 외국인에게 5분만 설명하면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쓰게 할 수 있습니다. 한글은 기계적 친화력도 가장 좋아 정보통신 시대의 준비된 문자입니다. 세계화의 잠재력이 적지 않습니다.
② 인도네시아 술리웨시 주 부퉁 섬 바우바우 시는 문자가 없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찌아찌아어를 표기하기 위해 한글을 도입했습니다. 물론 한글을 수출해서 돈이 벌리는 것은 아니지만, 한글 수출은 선박이나 자동차나 전자기기 수출 못지않게 중요한 그리고 자랑스러운 수출 품목이라고 여겨집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과 사명을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문화민족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① 세상에는 힘의 종류가 많습니다. 육체의 힘, 무기의 힘, 돈의 힘, 권력의 힘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가장 큰 힘은 문화의 힘입니다. 로마가 그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였지만, 오히려 로마는 그리스에게 문화적으로 점령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로마가 유대나라를 점령하였지만, 유대인들은 라틴어를 쓰지 않고 그리스어를 썼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여기에 문화의 힘이 있고 그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② 예나 이제나 이 세상에서는 돈의 힘, 무기의 힘 등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문화의 힘이 큰 민족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무기나 돈은 마귀에게 이용되어 파괴와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문화는 하나님께 쓰임 받아 새로운 건설로 나아갑니다. 철학이나 종교도 문화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문화가 하나님께 쓰임 받느냐, 마귀에게 쓰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이 우리를 문화민족으로 만들어주셨으니, 이제 그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문화를 꽃피워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문화, 성경 문화를 새롭게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자를 주셨습니다.
① 하나님이 친수로 십계명을 써 주셨습니다. 글자를 영어로 letter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3:6-7에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으로 인하여 그의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이라고 할 때의 ‘의문(儀文)’이 영어로 letter입니다. 구약은 letter요, 신약은 ‘영(靈)’ spirit입니다. 글자는 letter요, 그 정신(의미)은 spirit입니다.
② 그리스도가 구약에서는 글자(letter)로 나타나셨고, 신약에서는 영(spirit)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글자 뒤에는 말씀이 있고 성령이 계십니다. 글자가 있어야 말씀이 전달됩니다.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자와 말을 우리 민족에게 주신 것입니다.
③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보배를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정말 귀중한 것은 알아보지 못하여 천대하고, 하찮은 것을 오히려 귀하게 알고 사랑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백성에게 주신 것은 가장 좋은 글자요, 그 글자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성경을 더욱 사랑함으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왜 이런 엄청난 복을 주셨을까요? 세계에서 제일가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심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글자가 쉬워서 성경을 열심히 읽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배워야 합니다. 우리 백성들이 정말로 복이 많은 백성입니다. 교회에 이렇게 열심히 나와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우리는 엄청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공부합니다. 그것도 세상 헛된 공부가 아니라 천국 공부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모두가 굉장히 유식한 사람들입니다.
① 우리의 사명은 세계복음화가 아닙니까? 온 세계에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쉽고 좋은 글자를 주셨고, 복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②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로 기록된 책입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더욱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의 글자 한 자, 한 자를 잘 살펴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깊은 뜻이 살아나고 깨달아집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을 때에 드디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나타나고 그 큰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③ 우리 민족은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말씀을 더욱 사랑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세계에 선교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자를 주시고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4) 큰 것을 받으면 작은 것들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곧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큰 것을 구할 줄 모르고 작은 것만 달라고 기도하고, 그 작은 것을 위해 목숨을 걸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결국에는 모든 것이 허무한 것으로 끝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큰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값진 것을 알고 그것을 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주시면 무엇을 내려주실까요? 금은보화입니까? 아닙니다.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신 28:1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때를 따라 내려주시는 비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2010년 5월 30일)
41.선민의 글자(1) - 훈민정음을 읽고
오늘도 나균용 목사님 설교를 읽고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종대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일국의 왕도 백성들이 자유롭게 의사가 소통되도록 글자를 만들어주려고 그토록 애를 썼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더 애를 써 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시편 127:1에 있는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가 아닙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세종대왕이 한 것 같지만, 실은 그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셨음을 우리가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만 주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자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보배를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정말 귀중한 것은 알아보지 못하여 천대하고, 하찮은 것을 오히려 귀하게 알고 사랑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백성에게 주신 것은 가장 좋은 글자요, 그 글자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성경을 더욱 사랑함으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도 평범하게 생각했던 것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마음에 새길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축복이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였습니다.
42. 선민의 글자(2): 한자(漢字/韓字)
(고린도전서 14:10-12)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소리의 종류가 많아도 뜻 없는 소리는 없다고 했습니다. 뜻을 모르면 야만이 된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글자가 많이 있지만 그 뜻을 모르면 역시 야만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글자 중에서도 그 뜻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글자가 바로 한자입니다.
지난 광복절을 기해 일제 때 훼손되었던 광화문 현판을 복원(復元)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부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새로 복원되는 현판(懸板)을 한글 현판으로 달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답니다. 마치 한글 전용만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펼치는 이 사람들은 光化門 현판을 한자(漢子)로 달면 우리나라가 중국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가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광화문 현판은 한자로 쓰여 있었습니다. 한글로 바꾼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대륙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그대로 보존하지 않는 것은 결국 훼손하는 것이니 문화민족으로서 더욱 부끄러운 일입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전적비도 모두 한자로 되어 있으며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비롯해서 고려사 등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기록도 모두 한자로 되어있습니다. 특히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의 조선왕조실록도 모두 훈민정음이 아닌 한자로 되어 있는데 이것 또한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광화문은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변질시키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것이 됩니다. 만약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날까지 한자를 우리 글자로 사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자는 애초부터 우리 글자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한자를 쓰는 것을 수치로 알지 않으며 자기네 글자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실은 우리 조상들이 한자를 일본에 전파하지 않았습니까? 한자를 쓰는 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자도 우리 글자임을 자랑해야 합니다.
1.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도 실은 우리 고유의 글자입니다.
1) 강호(江湖) 동양학자로 한국CEO연구포럼 연구위원장인 김종희 님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漢字는 한국의 문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한자’라고 쓸 때에는 중국 한나라를 뜻하는 한수 한(漢)자를 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 한(韓)자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한자(韓字)는 너무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① 우리가 보통 한자(漢字)라고 말하는 것은 중국의 한(漢)나라 때(BC 202~AD 5)에 만들어진 글자란 뜻이 아니라, 은(殷)나라에서 만든 갑골문이 발전해온 것을 漢나라 대에 이르러 자기의 글과 글자로 삼았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은나라란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으므로, 한자란 중국의 한(漢)족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님이 확실합니다.
② 여러 설이 있지만, 삼황오제 중 한 사람인 태호(太昊) 伏羲氏가 창제했다는 설과 黃帝 헌원씨(軒轅氏)의 사관인 창힐(蒼詰)이 창제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모두 우리 민족인 東夷族입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태백일사에 있는 신시본기(神市本紀)에 따르면 복희씨는 환웅천황의 5대 자손인 환웅의 막내아들이고 창힐은 치우 씨의 후예입니다.
③ 환웅천황은 우리 한민족의 시조이며 치우 역시 한민족입니다. 고대 한민족의 활동영역은 한반도와 만주를 거쳐 산동 지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현재 산동성 제남 부근에 많은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순임금도 제나라 시조가 된 태공망 여상도 모두 우리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한자를 썼습니다. 또한 단군 임금님은 나라를 세우며 국호를 한자로 ‘朝鮮’이라 지었습니다. 이후 오랜 세월 한 민족은 한자를 사용해 왔습니다.
④ 우리가 우리 민족의 시조를 단군왕검이라고 부르는데, ‘왕검’의 ‘왕’자는 실은 ‘王’이 아니라 ‘천간 임(壬)’자라고 합니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열 개를 천간(天干)이라고 하지요? 거기에 아홉째로 나오는 ‘임’자인데, 우리가 ‘임금 왕’자로 잘못 알아서 단군왕검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임’으로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단군 임검’ 곧 ‘단군임금’입니다.
2) 한자(漢字)는 중국 한족(漢族)만의 문자가 아니고 고대에 우리 민족(桓民族=韓民族)의 역사와 생활과 문화와 철학이 녹아있는 우리의 생활문자입니다.
① 중국인들은 지금 한자(漢字)의 자의(字意)구성과 역사적인 내용을 다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활경험이 전혀 없었던 글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 대표적인 것이 ‘집 가’(家)자인데 이 글자는 보통 갓머리라고 하는 ‘지붕 면’(宀)자와 ‘돼지 시’(豕)자를 합자(合字)한 것으로 이는 고대에 뱀 같은 파충류가 집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집 아래 지상에 땅을 파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던 환민족(桓民族)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글자입니다. 그래서 대만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돌아온 이들은 한문자는 중국문자가 아니고 東方文字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답니다. 중국의 학자들도 한문자의 대부분을 환민족이 만든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답니다.
② 인제대 석좌교수로 국제한자진흥협의회 3대 회장이 된 진태하(陳泰夏) 교수의 <동방문자뿌리>라는 책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한문자는 중국의 고유문자인데 우리가 빌려 쓰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나, 한자는 중국 한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이 한족의 나라라고 하는 진나라와 주나라를 거슬러 올라가 우리 한민족의 옛 조상인 환민족[桓民族] 곧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인 상왕조(商王朝), 즉 은(殷)나라 시대에 거북이나 짐승의 뼈에 글자를 새겨 썼던 것으로, 이른바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쓰였던 것을 <은허(殷墟)>라고 하는데, 이는 은나라의 유적지에서 발굴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③ 한자에서 ‘글자’의 뜻으로 쓰고 있는 文字의 ‘글월 문’(文)자는 ‘무늬’이고, ‘글자 자’(字)자는 파생의 뜻이었을 뿐 글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것인데 훨씬 후대에 와서 글자의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漢字라는 ‘한수 한’(漢)자도 은나라 때에는 없던 것이랍니다. 은나라에서 처음으로 글자의 뜻으로 쓰인 글자는 ‘홰 걸(桀)’자 형태인 글자였는데 뒤에 ‘큰 대(大)’자를 더하여 ‘맺을 계(契)’자를 만들었습니다. 이 契자의 음은 본래 ‘글’입니다. 글(契)이라는 글자는 본래 고조선의 역사와 더불어 생긴 것이며 뜻은 나무에 칼로 금을 그어서 말(語)을 대신할 수 있도록 부호문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갑골문자이며 죽서, 죽간(竹簡)으로 남겨진 것입니다. 이 글(契)자를 <글>이라고 그대로 발음하는 민족도 우리 한민족뿐입니다.
④ 글(契)이라는 글자를 만든 민족은 중국의 한족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의 옛 조상인 桓民族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큰 민족으로서 ‘환하다. 밝다. 희다. 크다. 높다. 하나다. 제일이다.’라는 뜻인 <환(桓)=한(韓)>이라는 글자를 민족이나 나라이름에 썼고, 또 ‘밝다, 환하다, 희다’는 뜻의 박달산(朴達山), 백두산(白頭山), 불함산(不咸山)을 민족의 진산 이름으로 쓰고, ‘선(鮮)’이라는 글자를 나라와 민족의 이름으로 써서 오늘날 ‘조선’(朝鮮)이 된 것입니다.
3) 한국은 소리글 훈민정음(訓民正音)과 뜻글 한자(韓字/漢字)를 보유한 문화강국입니다.
① 또 한자를 한자(韓字)라고 할 중요 이유는 중국 등 한자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와는 달리 우리만의 읽고 소리 내는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의 70%가 한자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음법이 중국이나 일본과 다릅니다. 또한 중국은 간자(簡字), 일본은 약자(略字)라 하여 획수를 주려서 간략하게 새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글자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나라는 대만과 우리나라뿐입니다. 우리에게는 한글이 있어서 의사 표현에 불편함이 없기에 한자를 약자로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자는 약자로 만들면 그 본래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대로 두어야 의미가 고스란히 보존됩니다. 또한 옛날의 우리 조상들이 써놓은 책들도 어려움 없이 읽고 해석할 수 있으니, 이것은 우리의 큰 장점입니다.
② 그래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로 ‘어음(語音), 곧 말소리가 중국과 다름’을 가장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가령 ‘北京’을 한국인은 ‘북경’이라고 읽지만 중국인들은 ‘베이징’이라 발음합니다. 따라서 ‘베이징’ ‘상하이’라고 하면 우리는 전혀 못 알아듣게 됩니다.
③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은 세계적인 소리글 훈민정음(訓民正音)과 뿌리가 깊은 뜻글자 한자를 보유한 문화강국입니다. 오늘날 배우기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 한자를 가르치지도 않고 있는데, 이는 엄청난 보물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조금 힘이 들더라도 잘 배워놓으면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넉넉히 써먹을 수 있는 큰 재산을 갖게 되는 것이니 이 얼마나 좋습니까?
2. 한자(漢字)의 특징을 살펴봅시다.
1) 한자의 가장 큰 특징은 표의문자라는 점입니다. 표의문자란 그림문자인 회화문자나 사물의 특징을 그대로 본떠 그린 상형문자와 같이 시각에 의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문자입니다. 따라서 글자의 모양[字形]만 보면, 나타내고자 하는 뜻[字義]을 직접 알 수 있는 글자입니다. 한자는 글자를 하나하나 모두 읽지 않더라도 눈으로 한번 훑어보면 문자의 뜻을 대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자수가 너무 많고, 형태가 복잡하여 기록하거나 읽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단점도 있지만, 한자가 표의문자로서 갖는 장점으로는 조어력 함축성 상징성 기억력 추리력 지각력 등이 표음문자에 비하여 훨씬 뛰어나다는 점은 놀라운 장점입니다.
① 포괄성(包括性) - 한자의 부수(部首)를 보면 그 부수에 해당하는 한자는 모두 포괄적인 동질성을 띄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얼음 빙(氷) 부수가 들어간 한자는 차갑거나 얼음에 관련된 성질을, 풀초 초(艹) 부수가 들어간 한자는 모두 풀과 관련된 뜻을 가진 경우가 많으므로, 부수 또는 그 부수의 조합을 보고, 그 한자의 개략적인 뜻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② 변별성(辨別性) - 한글은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가 많으므로 한자를 사용하지 않으면 뜻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고등학교가 시합에서 삼연패를 했다고 하면 세 번 연속하여 졌다는 뜻인지(三連敗), 삼년 계속하여 우승했다는 뜻인지(三連覇)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원수라는 말도 국가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 같은 元首인지, 군인 계급의 오성장군인 元帥인지, 마땅히 복수해야 할 적군인 怨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방화라고 하면 불을 지른다는 放火인지, 화재를 막자는 防火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③ 함축성(含蓄性) - 한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한자와 조합할 경우, 그 경우의 수만큼 많은 어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기초한자 1800개로 약 10만 개의 단어가 이루어지고, 3000자를 알면 약 60만 개의 단어를 만들 수 있으며, 또한 의미를 확장할 수 있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 수 있는 조어력이 뛰어납니다. 비행기를 처음 보고, 해당되는 뜻의 한자를 조합하여 비행기라는 단어를 즉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한자밖에 없을 것입니다.
④ 시각성(視覺性) - 한자는 그림글자이기 때문에 보는 순간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며, 잘 모르는 한자라도 그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쉴 휴(休)는 사람(人)이 나무(木) 곁에 있는 글자요, 사내 남(男)은 “밭(田)에서 사람이 힘써(力) 일하니 남자”라는 식으로 눈으로 글자를 보아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므로, 한자문화권에서는 어느 곳을 가든지 종이에 글자를 써서 의사소통을 하는 필담(筆談)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소리글인 표음문자는 머릿속에서 일일이 발음을 해서 의미를 파악하므로 더디고 힘듭니다. 즉 눈의 정보처리 속도는 귀의 1000배 이상이므로, 한자는 이런 점에서 탁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⑤ 축약성(縮約性) - 긴 단어는 간단히 줄여서 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을 한국으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전교조로, 중앙정보부를 중정으로 쓰고 누구나 쉽게 이해합니다. 이는 언어의 경제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상당히 유리합니다. 그러나 영어나 한글에서는 이를 구현하기 힘듭니다. 영어에서는 very important person을 고작해야 V.I.P.라고 나타내는 정도인 것처럼, 한자어가 아닌 순 우리말 고유명사들은 줄여서 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⑥ 예술성(藝術性) - 한자는 글자 자체의 형태에 조형미와 예술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筆法이 생겨났고, 마침내 문자예술의 단계인 書藝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잘 쓴 글씨를 達筆이라 하고, 품격과 아름다움을 갖춘 글씨를 名筆이라 하고, 고도의 예술성을 갖추어 入神의 경지에 이른 글씨를 神筆이라 합니다. 서예는 단순히 글씨를 잘 쓰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수양과 인격의 완성을 그 목표로 삼습니다. 秋史 김정희의 글씨나 王羲之의 글씨는 그 자체로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글자 자체로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한자가 유일하며, 영어나 일어 등은 아무리 잘 써도 예술의 경지에까지 이르기는 힘듭니다.
2) 한자의 둘째 특징은 단음절어라는 것입니다. 즉 한자는 각각의 글자가 하나의 음절로 되어 있는데, 영어와 같은 표음문자의 단어가 다음절어인 것과 구별됩니다. 예를 들면, 영어의 [beautiful]은 [beau-ti-ful]의 세 음절로, [water]는 [wa-ter]의 두 음절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에 해당하는 한자는 아름다울 [美], 물 [水] 등의 한 음절로 되어 있습니다.
3) 한자의 셋째 특징은 고립어(孤立語)라는 점입니다. 한자는 어순이나 문장의 전후 관계에 따라서 그 뜻이 달라질 뿐, 글자 자체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어와 같이 시제나 품사에 따라 형태가 바뀌는 굴절어(屈折語)나, 우리말처럼 명사에 조사를 붙이거나, 어미를 활용하는 첨가어(添加語)와는 구별됩니다. 한자는 명사의 단수와 복수, 대명사의 격변화, 시제나 인칭에 따른 변화가 없는 고립어입니다. 그래서 한자의 수가 많게 됩니다. 따라서 문법적 기능은 문장 안에서의 어순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水淸]이라고 하면 [물이 맑다]는 뜻이며, [淸水]는 [맑은 물]이 됩니다. 한문에서는 어순이 이처럼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3. 한자가 우리의 구원과 어떻게 상관 됩니까?
앞에서 한자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제가 성경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한자에는 놀라운 특징이 더 들어 있습니다. 곧 어떤 사물을 글자로 표현할 때에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이유나 원리에서 철학적인 의미, 또는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싱가폴의 중국인 C. H. Kang이 중국이 아직 공산화되기 전 기독교병원 선교사로 있을 때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실을 밝힐 수 있는 문제와 씨름하다가 배 선(船)자가 노아의 여덟 식구가 탄 배로 분해됨을 발견하고 연구 시작했고, 미국의 병리학자 E. R. Nelson 박사는 한자의 기원에 창세기의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연구를 시작하여 두 사람이 함께 「창세기의 재발견」이라는 책을 써서 52개의 한자를 창세기 내용과 연관시켜 풀이해 놓았습니다.
1) 한자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나 섭리가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① ‘금할 금’(禁)자를 봅시다. ‘나무 목’(木)자 두 개 밑에 ‘보일 시’(示)자를 썼습니다. 두 나무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단순히 우연히 된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이 두 나무가 에덴동산에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이것을 아담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느 것을 택할 것입니까? 이 ‘금할 금’(禁)자의 의미를 깨달아서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아담이 왜 금단의 열매를 먹고 낙원을 잃어버렸을까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② ‘배 선’(船)자에도 성경적 의미가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배 주’(舟)자 옆에 ‘여덟 팔’(八)자와 ‘입 구’(口)자로 되어 있습니다. 배에 사람 여덟 명이 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 글자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이것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 글자를 만든 분은 노아의 사적을 익히 알고 있었던 분이고, 그 당시 사람들이 이를 다 알았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③ ‘벗을 라’(裸)자는 ‘옷 의’(衣)자 옆에 ‘열매 과’(果)자를 썼습니다. 금단의 열매(果)를 따먹고 벗은 줄을 알게 되어 옷(衣)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한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비밀이 가득하게 들어 있습니다.
① 죄(罪)라는 글자를 봅시다. 넉 사(四)자 밑에 아닐 비(非)자를 썼습니다. 곧 죄란 네 가지 아닌 것, “네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마 이 글자를 만들 당시에는 율법이 네 가지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참 후인 단군 시대에는 8조 금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죄가 많아져서 여덟 가지를 금했다는 것입니다.
② 무엇이 악입니까? 악(惡)이라는 글자도 보면 ‘버금 아’(亞) 밑에 ‘마음 심’(心)자를 썼습니다. 곧 모든 일에 우리는 두 가지 마음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처음 떠오르는 좋은 마음이 있고, 바로 이어서 그것을 반대하는 다른 마음이 떠오르는데, 그 둘째 마음은 악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나쁜 뜻의 ‘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첫째로 찾아오는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 의(義)란 무엇입니까? ‘양 양’(羊)자 밑에 ‘나 아’(我)자를 썼습니다. 내가 양을 머리에 얹은 모습입니다. 또는 양 밑에 내가 있는 모습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옛날에 제사를 드릴 때에 양을 제물로 잡아서 머리에 얹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이 아닙니까? 나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우리도 제물 양을 머리에 얹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도 잘 몰랐고, 옛날 우리 조상들도 잘 몰랐던 그 제물양이 신약에 와서 드디어 밝히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머리에 얹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④ 어떻게 해야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새 신’(新)자를 파자하면 ‘설 립’(立)자 밑에 ‘나무 목’(木), 그 오른편에 ‘도끼 근’(斤)자로 되어 있습니다.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오른편에 도끼가 놓여 있는 형상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었던 말씀이 아닙니까? 열매 맺지 못하면 도끼로 찍어버린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사람은 새로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⑤ ‘구원할 구’(救)자를 봅시다. 간구한다는 의미의 ‘구할 구’(求)자 옆에 ‘아비 부’(父)자를 썼습니다. 구원이란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께 간구해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옛 어른들이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와를 속여서 타락시켰던 마귀는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⑥ 거룩하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냈습니까? ‘거룩 성’(聖)자는 어떻게 씁니까? ‘귀 耳’자와 ‘입 口’자를 나란히 쓰고, 그 밑에 ‘천간 壬’자를 썼는데, 이 글자는 ‘밝을 제’라고도 읽고, ‘착할 청’자도 됩니다. 곧 거룩함이란 무엇보다도 귀와 입이 밝아야 한다, 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⑦ 내가 누구입니까? ‘나 아’(我)자를 세로로 둘로 나누어서 보면 ‘손 수’(手)자와 ‘창 과’(戈)자로 되어 있습니다. 곧 “손에 창을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조각목, 곧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사람이 아카시아와 같다는 뜻입니다. 풍도의 설시(舌詩), 곧 “혀에 대한 시”에 보면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인간의 참 모습임을 글자를 통해서 잘 표현한 것입니다.
3) 글자 하나하나에도 이런 심오한 의미가 들어 있다면 성경에는 얼마나 놀라운 진리와 비밀이 들어 있겠습니까? 이 깨달음이 우리를 십자가 진리의 깊은 세계로 인도하지 않습니까?
① 이렇게 글자 하나하나를 연구해 볼 때에 옛 사람들의 철학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창조신학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이런 글자가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놀라운 글자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했습니다. 그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감(靈感)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비록 배우기가 좀 힘들다고 해도 우리가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힘들여 배운 것일수록 더 큰 가치와 유익을 주지 않겠습니까?
② 그런데 이 놀라운 글자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했습니다. 그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감(靈感)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비록 배우기가 좀 힘들다고 해도 우리가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돈도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학문의 세계는 어떠하겠습니까? 힘들여 배운 것일수록 더 큰 가치와 유익을 주지 않겠습니까? 실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편하게 사는 사람은 인생의 가치가 적습니다. 어렵게, 고난을 많이 받으면서 산 사람이 나중에 큰일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③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눈에 보이는 분으로 나타나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마치 우리가 말하려는 것을 글자로 쓴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추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글자로 나타난 성경을 통하여 만나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요 5:39)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 눈이 열려서 한자의 글자 하나하나 속에 나타난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나아가 그 글자 하나하나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아가 모든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글자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 뜻 없는 소리가 없고, 뜻 없는 글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깨달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 모두가 열린 눈으로 살면서 세상이 온통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것을 새롭게 깨닫고 주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42. 선민의 글자(2): 한자를 읽고
오늘도 나균용 목사님의 설교를 읽고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특별히 지난 주에 이어 글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까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소리의 종류가 많아도 뜻 없는 소리는 없다고 했습니다. 뜻을 모르면 야만이 된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글자가 많이 있지만 그 뜻을 모르면 역시 야만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글자 중에서도 그 뜻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글자가 바로 한자라는 것입니다.
한자(漢字)는 중국 한족(漢族)만의 문자가 아니고 고대에 우리 민족(桓民族=韓民族)의 역사와 생활과 문화와 철학이 녹아있는 우리의 생활문자입니다.
한자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나 섭리가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① ‘금할 금’(禁)은. ‘나무 목’(木)자 두 개 밑에 ‘보일 시’(示), 두 나무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이 두 나무를 상징하고 하나님이 이것을 아담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금할 금’(禁)자의 의미를 깨닫고 아담이 왜 금단의 열매를 먹고 낙원을 잃어버렸을까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② ‘배 선’(船)은 ‘배 주’(舟)자 옆에 ‘여덟 팔’(八)자와 ‘입 구’(口)자로 되어 있습니다. 배에 사람 여덟 명이 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방주 사건이고 이 글자를 만든 분은 노아의 사적을 익히 알고 있었던 분이고, 그 당시 사람들이 이를 다 알았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③ ‘벗을 라’(裸)는 ‘옷 의’(衣)자 옆에 ‘열매 과’(果), 금단의 열매(果)를 따먹고 벗은 줄을 알게 되어 옷(衣)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한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비밀이 가득하게 들어 있습니다.
① 죄(罪)는. 넉 사(四)자 밑에 아닐 비(非)인데, 곧 죄란 네 가지 아닌 것, “네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② 악(惡)은 ‘버금 아’(亞) 밑에 ‘마음 심’(心)인데, 곧 모든 일에 우리는 두 가지 마음이 갈등,. 처음 떠오르는 좋은 마음이 있고, 바로 이어서 그것을 반대하는 다른 마음이 떠오르는데, 그 둘째 마음은 악이라고 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첫째로 찾아오는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 의(義)는 ‘양 양’(羊)자 밑에 ‘나 아’(我),즉 내가 양을 머리에 얹은 모습 또는 양 밑에 내가 있는 모습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우리도 제물 양을 머리에 얹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머리에 얹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목사님으리 설교를 통해서 글자 하나하나에도 이런 심오한 의미가 들어 있다면 성경에는 얼마나 놀라운 진리와 비밀이 들어있는지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43. 솔롱고스의 민족
(창세기 37:1-4)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비가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몽골은 우리나라를 몽골말로 ‘솔롱고스의 나라’라고 합니다. 몽골은 다른 국가들처럼 ‘코리아’나 ‘조선’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몽골은 한국에 대해 독자적인 이름을 사용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롱고’가 ‘무지개’니까, 솔롱고스는 ‘무지개’ 또는 ‘해 뜨는 곳’, ‘아름답다’ 등을 뜻합니다. 몽골에게 있어서 한국은 ‘무지개의 나라’요, 한국 민족은 ‘무지개 민족’이며, ‘해 뜨는 나라의 민족’이고, ‘아름다운 민족’입니다. 그렇다면 몽골은 우리나라를 왜 무지개의 나라라고 했을까요? ‘무지개’라는 말이 기분 좋은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한국을 왜 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몽골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항간에는 수많은 설이 떠돕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 네 가지를 소개합니다.
①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색동저고리를 보고 무지개와 닮았다 하여, ‘솔롱고스’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와 같은 색동저고리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무엇보다 색동저고리는 오늘날 어린이들이 입는 옷이 아닙니까? 한복은 다른 민족의상에 비해 비교적 단아하고 단순한 것이 특징인데, 유독 고려 사람들의 옷을 보고 ‘무지개’라는 이름을 붙였을지 의문스럽습니다.
② 한국과 몽골은 형제와 같이 가까운 나라. 형제의 나라를 예우하여 ‘무지개의 나라’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습니다. 특히 공산주의 시절의 몽골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소련의 지배를 받았고, 중국과는 원래부터 견원지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중국은 몽골의 절반도 더 되는 땅을 빼앗아 자기 것이라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나라 중에서 그나마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북한 정도가 아니었겠습니까? 이렇게 ‘솔롱고스’라는 이름은 1921년 혁명 이후 교과서로 교육 받기 시작하면서 불렀던 이름이고, 그 이전의 동부 몽골에서는 ‘고올링올스’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는 ‘고올리의 나라’라는 뜻인데, 몽골 역시 이 ‘고올리’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지개의 나라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최근의 일이라면 누가, 언제 이 이름을 지었는지는 알 수 있을 텐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③ 만주족이 우리나라를 부를 때, ‘솔호’ 또는 ‘솔호구룬’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몽골 음운으로는 솔롱고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몽골의 무지개라는 말과 기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④ ‘솔롱고스’는 몽골 고대문어에 유래한다고 합니다. 칭기즈칸이 발해 유민국의 훌란이라는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답니다. 이 훌란 공주는 몽골사상 전설적인 미인으로 알려지고 있어 원말의 기황후와 함께 한국 여인은 아름답다는 인상을 몽골인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고려 여인입니다. 당시의 솔롱고스는 발해 유민국이었고 고려로도 자칭했기에 솔롱고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1. 솔롱고스는 하나님의 언약을 뜻합니다.
1) 홍수로 심판하신 후에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다시는 이렇게 큰 홍수로 온 인류를 멸망시키는 심판은 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호요, 위에 계신 하나님이 타락한 땅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상징이었습니다(창 9:13-16).
2) 무지개를 영어로는 rainbow라고 하지 않습니까? rain(비)과 bow(활)가 합해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비 가운데 활을 걸어 놓았습니다. 활을 걸고 약속해 주셨다는 말도 되고, 활을 놓고 심판을 경고하셨다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모든 육체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평화롭게 자기의 활(무지개)을 구름 속에 걸어 두셨으니, 무지개는 하나님의 선하고 은혜로운 뜻을 재확신시키는 표시입니다. 무지개는 언약의 표징이며 증거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나타내며(겔 1:28),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습니다(계 4:3). 영광은 힘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겼을 때에 영광이 있습니다. 시험에서 장원급제했을 때에 영광이 있습니다. 무지개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겠다는 놀라운 은혜의 약속입니다.
3) 우리는 무지개가 7개의 빛깔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3색으로 보았고, 중국은 5색이라고 보았습니다. 기독교 미술은 무지개를 삼위일체에 맞게 3색이라고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과학자 뉴턴은 무지개를 11개 색으로 보았다가 그 뒤 5개 색으로, 1704년 「광학이론」 책에서는 7개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곱 빛깔과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관계일까요?
일곱이란 숫자에 대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의 표식이며, 어원적으로 ‘맹세하다’와 동일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일곱은 ‘맹세’ 또는 ‘계약’과 상호 혼용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21:29-31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손에서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서 아브라함이 이 우물을 판 증거를 삼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역시 일곱과 언약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또한 무지개가 하나님의 약속을 표징하는 것은 맹세를 뜻하는 빛깔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곧 일곱 빛깔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맹세를 생각하게 됩니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렀어도 하나님이 하신 이 약속을 우리가 후대에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창세기 9장에 무지개 언약이 나오는데, 11장에는 노아의 후손들이 이 약속을 잊어버리고 바벨탑을 쌓게 되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너무도 빨리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반역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약속을 따라서 복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그 약속을 따라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
4) 한민족이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 중에 자미대제(紫微大帝), 칠성(七星)님 등이 있습니다.
① 자미대제의 자(紫)는 ‘자줏빛’이고, 미(微)는 ‘작은 것’입니다. 자줏빛은 하나님의 색깔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마태복음에서는 홍포를 입혔다고 했고(27:28,31), 마가복음에서는 ‘자색 옷을 입혔다’(막 15:17)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홍포가 곧 자색 옷입니다. 이것은 별들의 세계, 곧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칠성님이라는 말은 북두칠성을 가리키는 말인데 역시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을 ‘일곱 별’과 ‘일곱 영’을 가지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북극하늘에 있는 일곱 개의 별을 가리켜 ‘北斗七星’이라고 부릅니다. 북두, 북두성, 칠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일곱 개의 별은 국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斗)는 ‘별 이름 두’뿐만 아니라, 곡식이나 액체의 분량을 헤아리는 단위나 용기를 가리키는 글자이기도 합니다. 곧 국자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두(斗)’라는 한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북두칠성에는 ‘큰 국자’(Big Dipper)라는 별칭이 있습니다.
② 이러한 북두칠성에 대한 한민족의 신앙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본래 우리 민족의 민간신앙에는 별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거의 없는데, 유독 북두칠성에 관한 신앙과 그 흔적은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칠성단, 七星經, 칠성바위라는 것이 있고, 칠성사이다라고도 했고, 7사단의 마크는 북두칠성이고 칠성사단이라고 하였습니다.
③ 한민족에게 있어서 북두칠성은 각별했습니다. 특별히 북두칠성은 하나님을 별로 나타낼 때 붙여지는 이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동이족은 북두칠성을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후손인 조선족 역시 하나님을 ‘칠성님’ 또는 ‘칠성신’(七星神)이라고 부르며 섬기기도 했습니다. 용인 무봉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칠성각에는 ‘자미대제통성군’(紫微大帝統星君)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자미대제께서 별들을 다스린다.”는 말로, ‘자미대제’는 북두칠성을 신격화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곧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태산과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태산북두(太山北斗)’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권위자’, ‘제일인자’ 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가장 우러러 받듦을 받는 자’라는 뜻으로 신적 존재나 그러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④ 성경도 하나님의 모습을 일곱 별과 연관시켜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보좌 앞의 일곱 영’(계 1:4), ‘오른손에 일곱 별과 일곱 금촛대가 있는 분’(계 1:16,20; 2:1),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계 3:1), ‘보좌 앞에 켜진 일곱 등불과 하나님의 일곱 영’(계 4:5),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는 어린양이신 하나님의 일곱 영’(계 5:6)으로 앞으로 오실 주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인간의 생사회복을 주장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신 30:15,19; 렘 21:8). 그렇다면 일곱 개의 별인 북두칠성을 하나님으로 여겼던 한민족의 신앙은 일곱 별과 일곱 영을 가지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흔적이 아니었을까요?
2. 솔롱고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민족임을 나타내줍니다.
1) 야곱이 요셉을 지극히 사랑하여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아들들에게는 이런 채색옷을 입히지 않은 것입니다. 이 옷은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고, 나아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는 채색옷, 색동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옷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색동옷을 입은 민족이고, 이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①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색깔의 의복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코레인 루트」라는 책의 저자 강상순 님에 의하면 흰색은 하나님께 대한 신성과 순종, 검정색은 어두움과 죄악, 붉은색은 태양이 붉게 타오르는 모습, 푸른색은 가을 하늘의 푸름, 초록색은 초목들의 색깔, 쪽빛은 푸르른 물빛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색깔들을 번갈아가며 수를 놓듯 옷을 지은 것이 색동옷입니다. 고구려벽화에서는 여러 색의 천으로 멋을 낸 색동치마를 즐겨 입은 여인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요즘에 와서 색동옷은 설날이나 특별한 기념일에 어린이들이 즐겨 입는 것으로 인식돼 있지만 실은 어른들도 입었던 옷이라는 것입니다.
② 그런데 강상순 님은 이러한 색동옷이 ‘하늘에서 무지개를 통해 알려준 일곱 가지 색깔로 만든 옷’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색동옷은 하나님이 주신 옷으로 일 년에 한 번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경배의 표시로써 입었던 고귀한 옷”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돌이 지나는 날이 되어야만 아이들에게 색동옷을 입힐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달라는 간구가 배어있던 의례(儀禮)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귀신들을 불러 배를 채우려던 무당들이 신 내림의 옷으로 도구화했다고 강상순 님은 지적합니다.
3. 솔롱고스 민족이란 곧 제사장 민족을 뜻합니다.
1) 옛날 대제사장이 입었던 옷인 에봇 역시도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짠 것이었습니다(출 28:4-6). 우리가 삼원색이라고 하는 노랑, 빨강, 파랑 외에 자색을 더 추가했습니다. 그런데 에봇 위에 매는 띠 역시도 동일한 실로 짰으며, 판결 흉패 역시도 동일한 실로 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출 28:8,15).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마다 여러 가지 색실로 수놓은 이 에봇을 입고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2) 제사장들의 옷에 이미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은 모든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누가 온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색동옷을 입혔던 것입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이 참 대제사장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을 때와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놀라운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 앞에서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무지개를 입고 나아가야 합니다. 색동옷, 채색옷을 입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옷을 입은 사람은 제사장이지만, 이런 옷이 없으면 제사장이 되지못합니다.
4. 솔롱고스는 해가 뜨는 나라를 뜻합니다.
1) 솔롱고스가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이니까, 솔롱고스의 나라는 “해가 뜨는 나라”가 됩니다. 실제로 우리 조상들은 아라랏산에서 내려온 후 해가 뜨는 곳을 찾아 동방으로, 동방으로 옮겨와서 드디어 동해에 이르러 멈추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동방의 해 뜨는 곳에 사는 민족으로 불리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시성(詩聖)이라 하는 인도의 타고르가 한국에 남긴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세계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쉼 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② 일본이 자기네가 해가 뜨는 나라라는 뜻에서 일장기를 만들었는데, 실은 우리나라가 해가 뜨는 나라입니다. 이것을 영적인 의미로 보면 어떻게 됩니까? 의의 태양이 뜨는 나라, 곧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가 떠서 계시는 나라가 아닙니까? 그런데 일본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해가 뜨는 나라의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민족에게는 광명이 있고, 희망이 있고, 천복(天福)이 임합니다.
③ 특히 말세에는 대환난이 일어나게 되고, 온 세상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캄캄하게 됩니다. 그때에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에 임하십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을 21세기의 태양이라고 선전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태양으로 임하실 것을 마귀가 먼저 알고, 엉뚱하게 김일성을 내세워 21세기의 태양이라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태양은 백성들에게 빛을 주지도 않고, 따뜻함을 주지도 못하는 가짜 태양이요, 실은 암흑 덩어리가 아닙니까? 이제 진짜 태양이 우리 위에 떠오르게 됩니다.
2)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나타낼 때 무지개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① (겔 1:28)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② (계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③ (계 10: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④ 그렇다면 무지개의 나라라고 불리는 우리 민족은 “죄를 속하는 대제사장의 직분과 인류 구원을 위한 일곱 가지의 말씀을 언약으로 받은 민족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하늘과 땅을 잇는 무지개처럼 인류에게 하나님과 그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이 우리 한민족의 색동옷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무지개로 오셨습니다.
① 곧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전을 구약, 예수님 이후를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옛 약속은 노아와 맺으신 것이고, 아브라함과 맺으신 것이며, 모세와 맺으시되 이스라엘 민족과 맺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새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 모든 인류와 맺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말세에 우리 민족을 택하셔서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② 야곱의 총애를 받지 못했던 레아가 아들을 많이 낳았지만, 레아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여자는 남편의 사랑을 받을 때에 최고로 행복합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은 라헬을 통해 하나님은 요셉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베냐민을 낳고는 죽고 맙니다. 남편의 사랑을 이렇게 많이 받았지만, 그는 너무도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지 않습니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교회에 예수님이 탄생하시는데, 그 교회는 마귀의 공격 대상이 되어 많은 고난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계시록 12장에서는 해를 입은 한 여자로 나타납니다. 이 여자가 아이를 해산하게 되매 일곱 머리에 일곱 면류관을 쓴 큰 붉은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합니다. 이는 그 여자가 낳은 아들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1260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고 했습니다(계 12:1-6).
③ 하나님의 지극한 총애의 대상은 친아들이신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성경의 모든 인물 중에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바로 채색옷을 입었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 모든 민족 중에서 색동옷을 입은 민족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입고 싶어서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혀주셔서 입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민족이 바로 우리 한민족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특권과 함께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입은 옷을 하나님의 채색옷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 옷에 일곱 색 무지개가 나타나야 합니다.
5. 우리 마음속에 무지개가 있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언약을 가집시다.
① 옛 언약은 언약궤 안에 있습니다. 곧 십계명입니다. 지켜 행하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는 민족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버리면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백성이 됩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들에게는 양극화 현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노벨상을 가장 많이 탄 자랑스러운 백성들이지만, 동시에 히틀러에게 600만 명이나 학살을 당하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던 유랑민족이었으며, 지금도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는 가장 불행한 백성들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버렸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악인들이 되었기에 스스로 저주의 길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② 그러므로 우리는 각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악행을 그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판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항상 주님과 동행해야 하겠습니다.
③ 하나님의 언약이 육신을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나셨는데,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언약을 주셨고, 우리에게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을 때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2) 진리의 사람들이 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성령을 체험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아갑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배워야 하지 않습니까? 음식을 만드는 것도 잘 배워야 합니다. 운동도 잘 배우고 열심히 연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섬기는 것도 더욱 잘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와서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아가 날마다 감사하면서 삽시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자꾸 생깁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주위에 우리보다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깊이 깨닫고 더욱 큰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43. 솔롱고스의 민족을 읽고
오늘도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몽골이 우리나라를 무지개의 나라라고 “솔롱고스”민족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무지개가 하나님의 약속을 표징하는 것은 맹세를 뜻하는 빛깔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곧 일곱 빛깔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맹세를 생각하게 됩니다.
창세기 9장에 무지개 언약이 나오는데, 11장에는 노아의 후손들이 이 약속을 잊어버리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도 빨리 잊어버기 때문에 반역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약속을 따라서 복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그 약속을 따라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색동옷을 입은 민족이고, 이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무지개를 입고 나아가야 합니다. 색동옷, 채색옷을 입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옷을 입은 사람은 제사장이지만, 이런 옷이 없으면 제사장이 되지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무지개로 오셨습니다. 곧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전을 구약, 예수님 이후를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옛 약속은 노아와 맺으신 것이고, 아브라함과 맺으신 것이며, 모세와 맺으시되 이스라엘 민족과 맺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새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 모든 인류와 맺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말세에 우리 민족을 택하셔서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성령을 체험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아갑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배워야 하지 않습니까? 음식을 만드는 것도 잘 배워야 합니다. 운동도 잘 배우고 열심히 연습해야 합니다
오늘도 귀한 설교를 통해서 은혜 받을수 있어서 넘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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