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30.주일오후찬양예배 설교
*본문; 삼하 6:16~23
*제목; 사무엘하서강해(6) 돌아온 법궤
1. 빼앗긴 법궤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물이고 상징입니다. 그 안에는 ‘모세의 두 돌판, 만나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물이요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이를 순종해갑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쳐들어옵니다. 그들의 기세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고 판단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믿음과 순종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믿음과 순종의 상징물인 ‘하나님의 법궤’를 단순히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어리석고 믿음 없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믿음과 순종의 기준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돌아봐야 합니다. 정말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예배하고 말씀 듣고 순종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어떤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인지?
후자라면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블레셋 전쟁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전쟁터에 등장했는데도, 이스라엘을 대패하였고 그 귀한 ‘하나님의 법궤’마저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으로 넘어간 하나님의 법궤는 어떻게 됩니까? 다곤 신상과 신전을 훼파하시고, 블레셋 다섯 도시를 쑥밭을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는 잠잠하셨습니까? 믿음 없이 행동하는 이스라엘을 깨우치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그 믿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내 어떤 목적을 채우려고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서는 잠잠하십니다. 이렇게 하실려고 우리를 만난 것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항상 세상과 나의 욕구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2. 돌아온 법궤
블레셋은 이제 도저히 ‘하나님의 법궤’를 감당할 수 없어서, 다시 돌려보내려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니 마지막 순간까지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우연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젖나는 암소’ 즉, 막 새끼를 낳아 젖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수레에 묶어서 하나님의 법궤를 실어서 ‘벧세메스’로 보냅니다.
새끼 소리를 듣고 암소가 다시 돌아오면 우연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소가 벧세메스로 가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하 6:19’을 봅시다.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삼상 6:12)
암소가 울면서도 그 길을 곧게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암소가 더 낫습니다. 우리는 울면서도, 내 자식과 생명을 포기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합니까?
법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하자 또 큰 재앙이 발생합니다.
벧세메스 주민들이 법궤 안을 들여다 본 것입니다. 이는 블레셋 전쟁 때와 똑같은 상황입니다. 블레셋 전쟁에는 믿음 없이 하나님의 법궤를 도구로 사용하려 하다가 큰 패배를 당하였고, 오늘 벧세메스 주민들은 두려움(경외감)없이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대하다가 큰 재앙을 당한 것입니다. ‘삼상 6:19’입니다.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삼상 6:19)
때문에 하나님의 법궤는 돌아왔지만,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동안 방치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 법궤를 다시 다윗 성으로 옮기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을 쓰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처럼 수레에 실어서 옮기려 한 것입니다.
그들은 몰라서 그런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너무도 잘 아는데 “효욜성”만 생각하고 “거룩성”은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은 효율성이 아니라 거룩성이 우선이고,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베레스 웃사”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법궤를 땅에 떨어뜨리려 하시는데, 웃사가 이를 막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법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웃사는 자신의 생각으로 이를 막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삼하 6:6~7’입니다.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 6:6~7)
법궤를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 우선입니다.
3.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시다!
그래서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보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집이 법궤를 보관하고 나서 복을 누리게 됩니다. ‘삼하 6:11’입니다.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삼하 6:11)
이것이 원래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고, 자녀들을 구원하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 욕심으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 앞에 서고, 사람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기 때문에 재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예배하고 순종합니까? 아니면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비슷하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암소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갑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효율성을 하나님께서는 거룩성을 보십니다. 거룩합시다. 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이지 재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기에 복대신 재앙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하나님의 명을 좇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과 새끼들의 목숨조차 돌보지 않고, 울면서 벧세메스로 갔던 암소들... 이것들의 믿음보다 우리가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낱 미물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가는데, 인간이 우리가 제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