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빅 픽처 이론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지점은, 인생의 '완성'을 가정한다는 데 있다. 현재를 완성된 삶을 위한 어떤 '단계'로 보는 한, 우리는 영영 미완성의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자기계발서를 읽고, 똑같은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똑같은 메인 뉴스를 보고, 똑같은 성공 병을 앓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살아왔다. 인생은 '발전'돼야 하는 것이고, 자기는 '계발'돼야 하는 거라고.
그런 세계에서 오늘의 나는 늘 좀 더 노력해야 하는 부족한 존재일 수밖에, 지금의 삶은 아직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미진한 단계일 수밖에 없었다. 빅 픽처는 인생에 큰 기대를 걸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주 실망하고 만다. 그럼 작은 기대를 걸고 자주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걸까?
목표가 없는 삶은 게으른 삶인가? 꿈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걸까? 인생에서 꼭 대단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야만 할까?
(중략) 보이지도 않는 하나의 빅 픽처보다 매일 눈앞에 보이는 스몰 픽처를 100개, 1000개 그리며 살고 싶다. 오늘은 큰 그림의 일부가 아니라, 그냥 오늘이니까.(pp. 24-25)
나는 이제 다가올 나이를, 아직 가 보지 않은 여행지에 대해 말하듯 얘기하고 싶다. 그곳은 분명 근사한 곳일 거라고, 거기 도착하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하지 못했던 얘기를 나눌 수도 있을 거라고. 그리하여 그곳에서라면, 내가 마음에 들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 볼 수 있을 거라고.(p. 51)
저녁을 먹느라 틀어 놓은 TV 속에선 다큐멘터리에 나온 손흥민 선수가 좀처럼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중략) 그의 이름을 딴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만큼 세상은 그를 궁금해한다. 궁금한 만큼 함부로 짐작한다. 저런 인생은 얼마나 근사할까, 저런 인생에도 걱정이란 게 있을까, 하면서. 하지만 경기에서 진 뒤 어두운 방에서 영상으로 그날 경기를 곰곰이 복기하는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종류의 문제.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서만 일어나고 사그라드는 감정들. 뭇사람들에겐 '넘사벽' 같은 인생을 사는 그에게도 행복이란 역시 어려운 거겠지. 결국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의 크기에는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미안합니다, 손흥민 선수. 잘 알지도 못하면서...)(pp. 53-54)
잘 산다는 게 대체 뭘까? 그건 그냥 내가 오늘 하루를 마음에 들어 하는 그런 일이 아닐까? 우리는 어떤 즐거움을 찾아다녀야 할까? 크든 작든 우리가 느낀 즐거움들에 이미 그 답이 나와 있는 게 아닐까? 언제 즐거운지, 언제 웃었는지 기억하고 산다면 그걸로 충분한 인생인지 모른다. (p. 57)
결국은 그런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일상을 그냥 흐르게 두지 않겠다는 마음.
지난해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대.
누구의 뜻도 아닌 내 뜻대로 행복해지겠다는 의지. (p. 82)
내가 머물렀던 곳의 풍경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는다. (p. 91)
목적지에만 진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인생을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으로 구분하고, 나머지 날들을 '아무것도 아닌' 시간들이라 치부하지 않는 것. 내게 필요한 건 그런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삶의 시간이 다 그렇다. 대학에 합격하기 전, 취업하기 전,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나누어 놓고 그 전의 시간을 다 '준비' 시간으로 여기면 우리 앞에 촘촘히 놓여 있는 시간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출퇴근하며 입버릇처럼 "빨리 토요일 되면 좋겠다"라고 하는 순간 평일은 인생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그건 참 이상한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대체 월화수목금요일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주말에 도착하기 위해 버리는 날들?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싶은 벌칙 같은 시간?
행복한 순간 앞에서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아까워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식으로밖에 시간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게 아닐까? 그 외의 시간들을 하찮게 대할 때, 우리가 버리고 있는 건 시간이 아니라 인생인데도. 그동안 숱한 평일을 인생에서 지우며 살아오고 있었던 나처럼.(pp. 96-97)
한번 닫히면 시간의 이편에서 다시 열어 볼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문.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기억해 두는 일밖에 없다. (중략)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누구나 애틋해지고 마는 걸까. 언제 어디서든 이 시간에도 '끝'이 있다 생각하면, 사람은 생각보다 별거 아닌 것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인 걸까?
그렇다면 새로 살게 될 동네에서는 달력에 매일 x 표시를 하는 기분으로 살고 싶어졌다. (중략)
그 시간 동안 행복해야지.
추억할 게 많은 날들을 보내 둬야지.
그런 마음으로라면 왠지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pp.140-142)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방식을 찾는 건,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들처럼 여행하려는 사람은, 사는 것도 남들처럼 살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것은 여행이 내게 알려 준 유일한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남의 여행을 곁눈질하는 대신, 나의 여행을 하라는 것. (p. 152)
뭘 또 잘하려고 해, 그냥 해도 돼. (p. 182)
그러니 우리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닌데 마치 전부인 것처럼 오해받고 있다고 속상해하면서, 상대에 대해서는 같은 오해를 반복하니. 나를 규정하듯 하는 말에는 나에 대해 뭘 아느냐고 불쾌해하면서 다른 이에게는 그런 말을 서슴지 않으니. (중략) 외로운 우리가 조금 덜 외로워지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상대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는 일일 것이다. 여기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게 그토록 많은 일들이 겹겹이 일어난 것처럼, 그 시간들이 포개지고 포개져 지금의 내가 된 것처럼 누구에게나 그렇다. 지금의 그를 이룬 크고 작은 일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연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종내는 우리를 끌어안고 울게 할지도 모를 사연이. (pp. 227-229)
"내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을 곁에 둬야 한다. 그리고 나도 상대의 마음을 궁금해해야 한다. 나에 대한 마음을 궁금해하는 것 말고 그냥 상대의 마음이 궁금해야 한다. 우리는 궁금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따뜻한 경험인지." (p. 236)
남들하고 비슷한 나이에 최대한 비슷한 성취를 이루면서 살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생은 같은 트랙을 달려 결승점 리본을 누가 먼저 끊고 들어가느냐의 문제가 아닌데.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그 길에서 무얼 겪고 보았느냐가 자기만의 인생을 만드는 건데. 우리는 결국 모두, 다른 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p. 243)
나하고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혼자 있을 때 깃드는 고요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 너무 많이 만나지 않고, 너무 많이 말하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 해야 할 말들만 한 뒤 다시 혼자로 잘 돌아오는 사람이고 싶다. 우리는 혼자 있는 법 역시, 평생을 살아가며 배워야 하는 존재들이니까. (p. 270)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일인지도 몰랐다. "나무가 나무지 뭐" 같은 말을 더는 하지 않게 되는 일. 똑같은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 (중략) 슬픔이 무슨 슬픔인지 알아보는 사람이 된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우리는 내 슬픔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슬픔을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중략) 그건 분명 반가운 일이다. 슬퍼할 수 있는 일이 많아져서. 우리가 좀 더 사람다워져서. (중략) 아름다운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 사람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 장면은 때로 자연이었다가 때로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pp. 273-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