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화를 걷다] 르네상스 예술과 사회
이탈리아의 정치, 문화, 메디치 가의 손바닥 위에 놓이다.
13세기 이후 봉건 유제(遺制)의 잔존과 상업도시로의 발전이라는 중층적 사회질서 속에서, 피렌체는 ‘혁신’과 ‘변화’를 주도하는 권력의 주체와 밀접한 관계에 놓인다. 여기서 당대의 권력이라 함은 고위 성직자, 인문학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상인을 말한다. 신흥 상인계급은 동서무역을 통해 막강한 부를 소유한 계층으로, 그 규모만큼이나 ‘내용’ 면에서도 수준을 갖추게 되면서 도시국가 경제의 주체로 성장해 정부를 통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을 사회적 혁신으로 만들었던 ‘내용’이란 바로 ‘예술’이다. 따라서 상인 계층에 의해 주도됐던 ‘상업혁명’은 ‘예술혁명’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미술사는 지배층의 것으로, 철저하게 권력자의 편에 서서 서민들을 계도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민중은 작품을 감상하는 소비자가 아니기에 예술 탄생의 배후에 지배 권력의 권익이나 목적을 위한 체제 유지 수단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세경제사학자 로버트 로페즈는 자본을 축적한 신흥 상인세력이 미술 소비를 주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과시하고, 나아가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분석한다. 즉, 당시 상인은 작품의 소비자이자 감상자로서, 이미지의 양적 생산을 조절하는 주체가 된다.
더욱이 흑사병이 휩쓸고 간 뒤 자리 잡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세가 아닌 사후 세계를 갈구하게 한다.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간의 태생적 두려움을 감추는 기술로 자본과 예술을 이용한다. 성당과 수도원이 사후 상인들의 면죄부적인 구원 장소로 제공되면서, 그들이 누리는 특권에 의무를 동반하게 만든다. 즉, 예배당 건축과 장식의 후원을 통해 이미지의 생산을 요구한 것이다.
피렌체의 예술과 권력을 논하는 데 있어 메디치 가문에 대한 언급은 필수적이다. 14세기 조반니(Giovanni di Dicci, 1360-1429)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 코시모(Cosimo, 1389-1464), 증손자 로렌초(Lorenzo 또는 Il Magnifico, 1449-1492)에 이르기까지 메디치 가문은 금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다. 재계의 약진은 정계의 약진으로 이어진다. 피렌체공화국 막후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시민출신의 메디치 가는 시민 공동체 중시 가치관을 바탕으로 지배력을 정당화하고 권력 체계를 완성해가면서, 도시의 정치, 문예 활동을 지휘한다. 당대 흐름에 따라 성당과 수도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메디치 가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와 권력을 앞세워 자신들의 세속적 욕망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세속적 욕망은 상상력과 창의성을 만들어내고, 그들의 부를 바탕으로 생산된 이미지는 성직자와 인문학자들의 지식과 융합되면서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화’를 피렌체에 꽃피운다. 자신들의 성공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려는 메디치 가문의 욕망은, 이미지 생산과 수요의 조절 능력이 정치 세력 간의 견제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지 보여준다.
바로 베노초 고촐리(Benozzo di Lese, 1420-1497)의 ‘동방박사의 행렬’(1459)이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흑사병이 유럽을 관통한 뒤 권위적인 신은 관용과 위로를 주는 존재로 변모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평신도들이 주축이 돼 행해졌던 당시 피렌체의 대표 시민 축제 ‘동방박사의 경배’가 방증한다. 조용히 메디치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코시모는 하층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 축제를 배후에서 후원한다. 종교적 지지를 바탕으로 피렌체를 예수 탄생이 재현되는 곳으로 신격화시켰고, 그 중심에 메디치 가문이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메디치 왕조를 만들어가면서도 시민들의 반발을 사지 않으려는 가문의 탁월한 능력은, 소박한 외관 안에 화려하게 장식된 그들의 도심형 주택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의 심장부라 불리는 ‘팔라초 메디치’가 그것으로, 바로 본 예배당 벽에 고촐리의 작품이 장식돼 있다. 원래 성당이나 수도원 내부를 장식하는 작품의 주제는 성직자들의 종교지식에 좌우됐으나, 이후 부호들의 비호와 후원을 받던 인문학자들이 주제 선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고촐리의 그림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당대 사회를 배경으로 이미지의 사적 허용을 얼마나 능통하게 누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오랫동안 교회 내부 문제의 핵이었던 동서교회 분열을 해결하고자 공의회가 열렸는데, 코시모의 외교적 노력으로 그 장소가 피렌체로 정해진다. 피렌체 공의회에 동로마제국 대주교인 요하네스 베사리안과 동로마제국 황제 요하네스 8세가 참석하면서 가톨릭교회 대통합을 향한 우호적인 시도가 이뤄진다. 이런 배경을 토대로 그려진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행렬’은 예수의 탄생과 메디치 가문의 탄생을 연결 짓는다. 작품의 배경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피렌체다. 작품 속에는 동로마제국 대주교와 황제, 그리고 고대영웅을 연상시키는 월례관을 쓰고 행령을 이끄는 젊은 인물이 각각 동방박사로 등장한다. 이 젊은이는 당시 차기 후계자로 지목된 로렌초 메디치로서, 가문의 신성화와 세습화를 향한 코시모의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방박사의 행렬’이 완성된 20여 년 후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75-1476)는 고촐리의 작품을 마무리하는 ‘동방박사의 경배’(1475)를 그린다. 보티첼리 역시 동일한 성서의 내러티브를 이용해 메디치 가문의 지위를 확인시킨다. 이 작품에서 아기예수를 경배하며 봉헌하는 인물로 코지모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이 작품은 라마 가문의 가스파레라는 인물이 메디치 가문을 위해 주문한 그림이다. 당시 금융을 장악했던 메디치 가문은 누진세를 적용함으로써 세제 개혁을 이뤄 하층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는데, 명문귀족 가문이나 대규모 상공업자들의 세액은 전적으로 메디치 가문의 의사에 따라 움직였다. 보티첼리에게 의뢰해 가스파레 본인의 얼굴을 작품에 삽입시킨 점은, 가스파레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이권을 확보하고자 메디치 가문과 연계되기를 갈망하는 세속적 욕망을 드러내면서 이를 위해 얼마나 전폭적인 충성과 아부가 이뤄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메디치 가문은 자신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시각적 이미지를 생산하면서 부(富)를 소비한다. 바로 당시 ‘상업 혁명’의 주체가 미술 ‘혁명’의 그것과 일치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대와 지배 권력, 그리고 예술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