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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병 일기>
2009. 11. 22
## Prologue
‘내가 군대 있을 때 .....’
이 말은 군대 갔다 온 남자가 죽을 때 까지 평생을 써 먹는 말이다.
보통 2-3 년간의 찗은 군대생활에 비하여 얘기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가까이에서 지켜 본 사람 만나기 어렵고 증명할 길이 없기에 절반이상이 뻥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사실 악의있는 뻥이 아니고 이야기의 흥미도를 높여 청취자에게 즐거움을 주고자하는 충정에서 생기는 일이니 애교로 보고 알아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것이 좋은 매너라고 본다.
나는 만 34개월 일주일을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의 24개월에 비하면 매우 긴 군생활이다. 그렇지만 나보다 몇 년 선배들은 청와대 담장 밑에까지 침투했던 무장공비 ‘김신조’사건으로 인하여 36개월에서 40개월 가까이 군생활을 한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신체적으로 매우 허약했으며 정신적으로도 나약하여 그 당시의 춥고 배고프고 힘들고 위험한 군 입대가 두렵기도 하였지만, 한편 나같이 못난 남자가 정신적 신체적으로 개조를 하여 진정한 남자로 재탄생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지기도 하였다.
국민의 4대 의무인 교육, 병역(국방), 납세, 근로의 의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강제규범에 해당하는 병역의 의무는 신체 건강한 정상적인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필자는 국가가 보증한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병역의무의 징집 체계를 살펴보면 만 19세에 신체검사를 받고 건강에 이상이 없으면 20세에 입영 영장을 받고 군대에 간다. 그러나 건강, 학업 등 여러 사정으로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다가 20대 후반에 군대에 가는 사람도 더러 있다.
지정된 날짜에 훈련소에 가면 곧바로 군대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논산 제2훈련소로 입대하는 경우 논산 제2훈련소는 체계가 수용연대, 연무대(훈련소), 배출대 3군데로 나누어져 있다.
일단 수용연대에 들어가서 여러 항목의 신체검사, 적성검사를 다시 받고 모두 통과되면 비로소 군번과 지급품을 받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후 연무대로 들어가 육군 기본 훈련을 받게 된다.
훈련을 마치면 작대기 하나 이등병 계급장을 처음으로 달고 배출대대로 나와서 잠시 대기병 생활을 하다가 후반기 교육을 가거나 특과학교 교육 또는 앞으로 몸담을 자대 배치를 받는다.
자대에서 항상 춥고 배고프고 졸린 등신 비슷한 쫄병 생활을 거쳐 중고참으로서 물오른 군대생활을 하고 고참이 되어서는 내무반에서 신의 대접을 받다가 군 생활을 모두 마치면 자대에서 곧바로 ‘고향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각 거주지 도별 예비사단에 가서 형식적인 사회적응 교육을 받고 예비군복을 지급 받은 후 비로소 집으로 가게 된다.
지금부터는 내가 군대생활을 한 경험을 기억나는 대로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여 보고자 한다. 벌써 제대한지 35년이 다 되어가므로 부족한 기억력으로 오류도 상당부분 있을 것이 예상이 되나 나는 더 잊기 전 나의 역사로서 기록을 할 뿐이니 그냥 믿거나 말거나 야담과 실화를 읽는 기분 정도로 가볍게 보아주기 바란다.
기회를 빌어 34개월 군대 생활 중 훈련소 6주를 뺀 나머지 32개월 이상을 미군부대에서 몸 편한 KATUSA(일명, 카추샤) 나이롱 군대생활을 한 사람으로서 같은 시기에 전후방에서 엄청난 고생을 한 동년배들에게 심심한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1. 입대영장
나는 호적상 나이가 준 탓으로 22살, (고교를 졸업하고 경쟁율이 꽤 되는 시험을 거쳐 교원양성 교육을 받고 교사가 되고도 일 년 쯤 지난 후) 1971년에 신체검사 통지서를 받았다.
그 당시 전국의 행정구역상 면 단위이하 시골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도로도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며 교통편도 아주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여름방학 때 군청소재지 온양에 있는 규모가 큰 초등학교를 빌려서 신체검사를 하였다.
보통 1박 2일 정도를 했기 때문에 나는 우리 동네와 인근 동네의 친구들과 아산군청 소재지인 온양 시내 여관에서 잠을 자며 장정 신체검사를 받았다.
-군에 입대하여 군번을 받아 군복을 입고 ‘군인아저씨’가 되기 전까지는 ‘장정’이라 불린다.-
해마다 일어나는 일이지만 군내의 20을 갓 넘은 젊은이들이 모두 모여 들끓으니 시끌벅적 매우 소란한 큰 행사이다.
당연히 밤에는 여기저기 술판이 벌어지고 혈기왕성한 젊은이들끼리 지역별로 무력충돌이 일어나기 쉽다. 대부분 대물림이 되기도 한다.
고향 선배들이 ‘야, 작년에 우리동네 애들이 인주 애들한테 깨지고 왔다. 올해엔 우리 동네에 힘깨나 쓰는 애들이 좀 있으니 복수 좀 해봐라.’ 든가 ‘선장 애들을 만나면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작년에 우리한테 당해서 아마 올해는 이를 갈 꺼다.’ 뭐 이런 정도다.
인상적인 것은 신검장에 들어가면 군의관 앞에 옷을 홀랑 발가벗고 속속들이 몸을 앞뒤로 다 보여주고 팔다리를 흔들어 신체의 이상유무를 파악하게 하는 육안 검사도 있다.
넓은 교실에서 젊은이 여러명이 옷을 벗고 신체검사를 받는 것이 나는 영 쑥스러웠다.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요즘도 그렇게 한다면 아마 인권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지 의문이다.
다음해 해가 바뀌자마자 2월초 쯤에 입대영장을 받았다.
날짜는 1972년 12월 7일, 장소는 논산 연무읍에 있는 육군 제2훈련소!
지루하게도 거의 일년을 기다려 입대를 한다. 하필 제일 추운 겨울에 꼬박 훈련을 받게 생겼다. 나 추위 무지하게 타는데......!
직장인 학교에 가서 얘기했더니, 아직 경험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군대 갈 사람이라고 3월 초에 있는 학급 배정 및 업무분장에서 부담이 적은 4학년과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가벼운 업무를 주었다.
아이들 하교 시키고 나면 할일이 없어 교실 바닥에 자리 깔고 잠을 자거나, 조퇴하고 멀리 평택으로 버스타고 나가서 영화구경을 하기도 하고, 무더운 여름이면 수영 팬티 바람으로 학교 중앙부에 있는 우물에 가서 물을 두레박으로 퍼 올려 몸에 좍좍 퍼 붓는 등 자유분방하게 생활했으나 나는 완전 열외로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환갑 넘으신 후덕한 교장선생님께서 가끔 내다보시고
“어이, 김선생! 시원하시겠어?”
그해는 늦가을 벼베기는 끝나고 아직 벼떨기도 끝나기 전 많은 눈이 내렸다.
미리부터 추위가 닥쳐 올 겨울 훈련받을 일이 무척 걱정스러웠다.
이어서 여러 곳에서 송별식이 있었다.
학교에서도 공식적인 친목회 송별식, 가까운 젊은 남교사들 사이의 송별식, 고향동네 친구 들의 송별식, 개별적으로 만나게는 사람들과의 송별 술자리 등등 11월 한달은 술 속에 파묻혀 살았다.
드디어 12월 7일 날짜가 되어 같은 날 입대를 하게 된 한 동네의 고향 친구 만태와 동네를 한바퀴 돌아 인사를 하고 하루 전날 마을을 떠나 보무도 당당히 논산으로 향했다.
아버지께서는 편지 봉투에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쓰시고 용돈을 듬뿍 넣어 주셨다.
눈물 많은 우리 어머니는 방안에서 울기 바빠 나오지도 못해서 나 떠나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셨다.
마침 내가 하숙하던 집의 큰 따님이 먼저 하숙하시던 선배 선생님과 결혼을 하여 그 선생님 고향인 연무읍으로 갔는데 꼭 거기 가서 자라고 하숙집에서 권하여 친구와 함께 그집을 찾아들어갔다.
시내 여관에서 잤더라면 입영을 앞둔 젊은이들의 소란 속에 편히 잠들기 어려웠을 텐데 편안하게 잘 잠들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는 이발소에 들려 머리를 깎았다. (훈련소 들어가서 깎으면 돈이 들지 않지만 훈련소 이발병의 악명 높은 소문 때문에 돈을 들여 미리 깎은 것이다.)
내 박박 깎은 머리를 보고 지금은 선배 강태수 선생님 사모님이 되신 하숙집 따님 왈!
“선생님, 머리 깎으시니 무척 귀여워 보여요!” ^^;
그 댁이 훈련소 담장에서 과히 멀지 않았는데 잠을 자려니 잠은 잘 안 오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무슨 ‘멸공!’‘집합!’ 등 구호를 외치는 소리, 취침 나팔소리 등등에 나도 하루 밤만 지나면 3년 동안 저 울타리 안에 들어가 밖에 마음 놓고 나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밤새 몸을 뒤척였다.
다음 날 신세를 진 부부에게 고맙다고 안녕히 계시라고 인사를 하는데 고향집에서 나올 때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 자꾸 나오려고 해서 혼났다.
2. 수용연대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운 수렁에 빠지는 것 같아 수용연대 정문 앞에서 미적미적 시간을 끌다가 지정된 시간이 다 되어서 집합시간임을 알리는 마이크 방송소리가 들려서야 영내로 들어섰다.
나는 고향친구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꼭 붙어 다녔다.
‘강만태’라는 이 친구는 생일이 나보다 5일이 늦으며 어머니 연세가 많아서 젖이 부족하여 젊은 우리 어머니로부터 내 젖을 가끔 씩 뺏어 먹었다고 한다.
심청이는 동냥젖을 얻어먹고 자라고도 착하고 예쁘듯이 이 친구도 동냥젖이 효험을 보았는지 나보다 키가 한뼘은 더 크고 힘이 센 장골이며 한 주먹한다. 고추 내놓고 놀며 코 흘릴 적부터 같이 자랐고, 가끔씩 참외서리 등 나쁜 짓도 같이 저지른 공범이자 내 젖을 여러번 뺏어먹은 죄가 있어서인지 다른 사람에겐 까칠하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나긋나긋하다. 나의 개인 보디가드 수준이다.
그러나 죽자사자 붙어 다녔어도 그런 경험 많은 기간병들이 이리저리 섞어 놨다 갈라놨다 하는 통에 어찌 하다보니 결국 헤어져 다른 내무반에 배정이 되고 말았다.
믿었던 경호원이 다른 내무반으로 가게 되니 엄마와 떨어진 아기 모양으로 불안해진다.
난장판과 다름없는 수용연대 생활을 내가 무사히 잘 넘길 수가 있을까?
수용연대에 도착하면서부터 나는 이상한 냄새의 정체가 궁금했다.
짚이 썩는 냄새 같기도 하고 퀴퀴하기도 한 역한 냄새가 폭 넓게 퍼져 있는데 그 정체를 모르겠다. 내무반 안에는 더 많이 난다. 구역질이 나려고 한다.
배정된 내무반에 들어가보니 정원 40명인데 200명 넘게 배정되었다.
구조는 옛날의 전형적 내무반으로 가운데는 통로이고 양옆으로 침상이 있으며 남쪽 벽에는 전에 쓰던 뻬치카(벽난로) 시설이 되어있으나 쓰지 않고, 가운데 통로에 분탄(가루석탄) 난로 2개를 놓고 날씨에 따라 하나는 계속 피우고 다른 하나는 피웠다 껐다 하고 있었다.
정원의 4배가 들어찼으니 침상에 한줄로 걸터앉지도 못하여 두줄로 앉아야 되었다.
첫째날 밤엔 잠을 자는데 안경을 쓴 채로 잤다. 긴장한 탓도 있지만 잠자리는 좁고 안경을 벗어 놓을 만한 적당한 여유공간이 내무반 안에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부터는 창틀 위에 안경을 벗어 올려놓고 잤다.
잠을 잘 때는 바로 누워 잘 틈이 없어 완전히 옆으로 칼잠을 자는데 화장실이라도 갔다오면 전혀 빈틈이 없어서 내 자리에 누운 두사람 사이의 위로 가서 무조건 누우면 잠시 후에는 자리가 생긴다. 누구나 이런 사정이 이해가 되므로 불평을 하는 사람은 없다.
기간병인 내무반장은 계급이 작대기 두개인 일등병인데 첫날부터 군기를 잡으려고 목소리가 크고 겁을 주려고 그 악명 높은 군대의 5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침상을 쾅쾅 내리치기도 한다.
한 내무반 200여명은 모두 우리와 같이 입소한 병력은 아니다. 수용연대에 들어와 신체검사를 받는 중인 장정(미완자), 이미 신체검사를 끝내고 군번 받을 날짜를 기다리는 장정(완자), 우리처럼 갓 들어온 신입 장정 등 세 부류이다.
오늘처럼 새 병력이 들어오는 날은 내무반이 터지게 많다가 군번을 받아 연무대로 훈련받으러 들어가게 되면 인원이 팍팍 줄어든다. 그러나 내무반 마다 매우 불규칙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 타다 먹고 기다리면 집합 구령이 들린다.
‘완자 집합!’ ‘미완자 집합!’
‘완자 집합’은 어디로 사역을 나가거나 군번을 받을 때 하는 것이고, ‘미완자 집합’은 아직 신체검사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남은 신체검사를 하러 가기 위한 것이다.
고향에서 신체검사를 합격한 후에 영장을 받고 입대를 하였지만 그간의 변화도 있을 수 있고 수용연대에서 정말 군인으로 감당할 신체조건인가를 다시 검사를 하는 것이다.
신체검사가 모두 통과가 되면 신체검사 용지에 끝났다는 표시로 한자로 둥근 원안에 새겨진 ‘완(完)’자를 푸른 스탬프로 찍어준다. 비로소 ‘완자’가 되는 것이다.
이곳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곧바로 ‘귀향조치’가 된다. 그렇다고 완전 군 면제가 되는 것은 아니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다시 신체검사를 거쳐 또 수용연대에 입소가 되는데 세 번인가 귀향조치 되면 그때는 완전 면제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어차피 가야할 군대라면 수용연대의 신체검사는 통과되는 7)편이 낫다. 일단 집에 가는 것 좋아했다간 다시 끌려와서 친구들보다 제대만 늦어져서 사회진출에 지각생이 된다.
수용연대에선 아직 집에서 입고 온 옷 그대로이고 아직 주머니에 돈도 많아서 갑자기 먹게되는 군대밥 맛이 없어서 매점이 메어터지게 사람이 많다. 어떤 때는 돈 가지고 빵이라도 사먹으러 갔다가 줄만 서다가 그냥 오는 수도 있다.
위에서 썼던 그 역한 냄새의 정체는 식사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바로 군대밥을 뜻하는 ‘짬밥’에서 였다.
오래 묵은 정부미에 보리를 섞어서 보일러에서 쪄낸 밥을 주는데 실지로 쌀벌레나 지푸라기가 거의 매번 눈에 띈다. 나는 첫째날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하루를 굶고 빵을 사서 먹었다.
그랬더니 입소 선배 중 완자 받고 군번을 기다리는 장정 중 뻬당(뻬치카 당번)이 있는데 자기를 달라고 해서 얼른 주었더니 아주 맛있게 먹었다. 나로선 신기하다.
이 사람은 2주일 넘게 수용연대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아마 돈이 없었던지 오랜 수용연대 생활로 돈이 다 떨어져서 배가 고팠던가 보다.
군대 가기 전 학교에 근무할 때 남자 선생님들로부터 군대 얘기는 거짓말 좀 보태서 천번도 더 들었다. 군대에 가면 ‘뻬치카 당번’을 하면 좋고 ‘향도’를 하면 나쁘다고.....!
그 이유는 뻬치카 당번은 항상 난로를 지키며 불을 보살피는 임무인데 그래서 난로 가까운 곳에서 자고 난로를 지켜야 되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끌려 다니는 사역을 안해도 되고 밥도 제일 먼저 먹는다. 단 난로 불을 꺼뜨리면 그땐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난 책임 맡는 것이 싫어서 뻬치카 당번도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 다음 ‘향도’는 내무반의 장정 대표인데 집합도 많고 지시사항 전달도 많으며 내무반의 무엇이 잘못되면 대표로 향도가 깨지며 명예만 있고 칭찬 들을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아무 책임도 맡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첫째날 내무반장이 우리 장정 200명중 3명을 따로 불렀다. 그 중에 나도 끼었다.
저녁식사를 하는데 우리 3명 보고 식판을 들고 난로 옆 내무반장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한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고향이 어디고 학교는 어디를 나왔으며 입대하기 전에 무슨 일을 했냐는 등 이것 저것을 물었다.
가만히 보니 학력이 높고 똘똘해 보이는 3명을 뽑은 것이다. (그때 우리 병력은 주로 영호남 출신이 많고 학력도 낮은 편이어서 고졸 학력이 10%도 안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셋은 향도 후보? 내무반장은 머리도 단정히 깎고 옷도 깔끔하게 입은 나를 뭐가 있는 사람으로 잘 못 본 것이다.
나는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탈출하나? 갑자기 바보짓이라도 해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내무반장이 또 여기 주목하라고 하더니 이런 말을 했다.
“야, 누구 뻬치카 당번 조수 할 사람 없냐?”
처음엔 어리둥절 아무도 나서지 않더니 잠시후 2명이 손을 들고 의사표시를 했다.
나도 처음엔 생각이 없었으나 잘못하면 향도로 뽑힐 수 있다는 문제로 고민하던 중이어서 3번째로 손을 들었다.
“야, 너희 들 난로 피워본 적 있어?”
한사람 한사람 물어보는데 한사람은 그냥해보겠다고 해서 탈락하고 또 한 사람은 시골에서 담배건조장 불을 피워 보았다고 했다.
나는 교사인데 당연히 학교 교실에서 난로를 많이 피워 보았다고 자신있게 얘기를 했다.(사실은 잘 피우지 못한다. 마세크탄이라고도 하는 조개탄은 불 붙이기가 만만치 않다. 학교에서 난로 피우는 날도 일년에 3-4일밖에 안되고 그나마 신출내기 교사는 소사 아저씨가 다 피워줬다.)
사실 난로 피우는 실력으로 치면 담배건조장이 나보다 몇수 위이다. 담뱃잎 따는 여름이면 몇 주일 연속 불을 피워야 되며 군대와 같은 분탄을 쓴다. 그러나 이 내무반장이 담배건조장에 불 피우는 내용은 잘 모르는 것 같고 나를 더 이쁘게 본 것 같다. 난 그날로 ‘뻬치카’로 불리는 난로 당번 조수가 되었다.
사수는 나에게 분탄을 물에 개서 난로에 넣고 구멍을 뚫어 불 피우는 법, 재를 치우고 가는 법 등을 시범을 보이며 가르쳐 주었다.
난로 당번을 해보니 이거야 말로 진짜 할 만한 직업이다.
난로만 끌어안고 있으면 일과 끝이다. 모든 사역에서 열외이고 밥도 타다주고 식사당번, 불침번도 안 선다. 심지어 분탄을 운반하거나 치운 재를 버리는 것도 다 사역으로 시키고 난로 당번 사수, 조수 둘이는 난로 만 지키며 불만 안 꺼지게 하면 그만이다. 자다가 난로 불이 시원치 않으면 불침번이 사수를 깨워 얘기하면 사수가 자다 말고 불을 붙이니 조수는 자다 깰 일도 없이 더욱 편하다.
내무반 안의 장정 중 중요 인물은 셋이 있는데 첫번째는 향도, 두번째는 내무반장 따까리(공식명칭‘전령’이라고 불리는 심부름꾼), 세번째가 뻬치카 인데 향도는 남이 알아주긴 하지만 책임이 무겁고, 내무반장 따까리는 약고 동작이 빨라야 한다. 우리 내무반의 따까리는 어찌나 약은지 나는 PX(=군대매점)에 빵사러 갔다가 줄만 서다가 그냥 오기 바쁜데 이사람은 무슨 수를 쓰는지 가기만 하면 금방 사가지고 온다.
좋기로는 역시 뻬치카가 최고다. 군대말로 ‘만고땡’이다.
3. 황토흙 파기
한번은 뻬치카 사수가 조수인 나보고 난로 연통에 구멍이 생겨서 연기가 새니 머리카락과 이겨 붙일 황토흙을 퍼오라고 시킨다.
머리카락이야 군대 이발소에 가면 지천으로 있다. 가지러 갔더니 기간병인 이발병이 군대 이발소 군기 세다는 말 들어봤냐면서 아무 이유없이 머리 깎는 바리깡으로 내 머리를 한대 치더니 이런 저런 일을 한참 시키고 노래까지 한곡 부르게 한 후 보낸다.
이번엔 세수대야와 야전삽을 들고 황토흙을 찾으러 수용연대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눈에 잘 안 띈다. 뭐 달리 할일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노래 불러가며 멀리 까지 갔더니 위에 철조망이 쳐진 담장 밑에 황토흙이 보인다. 얼씨구나 하고 야전삽으로 파고 있는데 어디서 ‘야!’‘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둘레둘레 보아도 나를 부르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없다. 나는 작업을 계속 했다.
잠시 후 머리통에 강한 충격과 함께 불이 번쩍 났다. 누가 내 머리를 세게 때린 것이다. 눈을 들어 보니 방한 군복에 총을 든 기간병이 서있다.
“야, 임마! 왜 부르는데 대답도 안하고, 땅을 계속 파? 너 담장 밑 파고 탈영하려는 거야?”
“아닙니다. 난로 연통에 구멍이 나서 연기 안나게 메꾸려고 합니다.”
“난로 연통이 아니라 연통 할아버지가 구멍 났어도 안돼, 흙 쏟아놓고 당장 돌아가!”
“안되는 데요. 황토흙이 여기 밖에 없는데.....!”
“뭐? 안돼? 이 새끼가? 너 여기가 사회인줄 알아?”
그리고는 총 개머리판으로 나를 치려고 한다. 나는 얼른 물러서며 흙을 쏟아놓고 달아났다.
다른 곳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니 마땅한 곳이 없다.
그냥 돌아가면 ‘고문관’소리 들을 것이 뻔하다.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자세히 살펴보니 아까 흙 파던 곳에서 좀 떨어진 곳 울타리 위에 망루형 경비초소가 있었다. 계단이 꽤 높다. 나는 천천히 지나가는 척 아까 흙을 버린 곳으로 가다가 잽싸게 아까 쏟아 버린 흙을 다시 쓸어 담고 야전삽으로 몇 번 더 파서 담았다. 낯익은 소리가 저 높은 곳에서 또 들린다.
“야!”“야!”
못 들은 척 세숫대야를 들고 튀었다. 총을 들고 계단을 내려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고 나는 마구 뛰어 달아나면 그 뿐이고, 설마 이깟 일로 총을 쏘지는 않겠지? ^^;
4. 불침번
수용연대도 군대는 군대인지라 취침시 불침번을 선다.
인원이 많으므로 두명이 한 조가 되어 20~30분씩 교대로 서면 되는데 불침번을 서는 이유는 군대의 형식을 갖추기 위한 면도 있지만, 혹시 있을지도 모를 탈영을 막고 화재 예방과 내무반에 지급된 물품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인 것 같다.
내가 지켜본 것 중 불침번이 내무반장에게 호되게 깨지는 것을 두 번 목격을 한 것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처음 조를 짜서 불침번을 서게 되는 날은 사전에 간단한 교육이 있었다.
근무 중에는 총기를 휴대하였을 경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도 주어선 안 되며 암구호를 대지 않는 사람을 출입시켜선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훈련받은 정식 군인이 아니므로 총은 없고 내무반 불침번만 서면 되는데 평상시 문을 잠그고 있다가 누가 들어오려고 하면 간단한 수하를 해야한다.
“암구호?”“누구냐?” “용무는?”
이 세 가지만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면 되는데 금방 화장실 간 동료가 들어올 때도 암구호를 모르면 들여보내지 말라고 한다.
내무반장은 가끔 가다가 당직사령이 근무상태 확인하러 일부러 시험을 해보는 경우도 있다고 하며 확실하게 잘 하라고 여러 차례 다짐을 한다.
한번은 누가 불침번을 서는데 발로 문을 차는 소리가 들린다.
불침번은 배운대로 수하를 했다.
“암구호?”
“야, 나야. 내무반장!”
“아, 그렇습니까? 암구호?”
“임마, 내부반장이랬잖아!”
“그래도 안 됩니다. 암구호는?”
“이 새끼가.... 너 죽을래? 내부반장이라고 했잖아, 임마?”
“내무반장님이 암구호 안대는 사람은 누구든지 출입금지라고 하셨잖습니까?”
“이 새끼야, 잔소리 말고 문이나 따!”
아마 내무반장이 어디가서 기합을 받고 왔던지 기분이 몹시 안 좋았나보다.
불침번이 배운대로 했건만, 문이 열리자마자 주먹이 발길질이 난무한다.
“얌마, 다른 기간병이나 당직사령이 문 따라면 모를까 목소리 다 아는 내무반장이 문을 따라는데 버텨? 너 한번 죽어봐라!”
이건 완전히 불침번이 원칙을 지켰다고 표창이라도 해야할 것을 자기 기분이 안 좋다고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그당시 군대에선 가끔 이렇게 아무 잘못 없거나 별것 아닌 일로 상급자의 기분에 따라 크게 당하는 수가 더러 있었다.
또 한번은 불침번을 서던 장정이 오줌이 마려웠다. 같이 불침번을 서던 사람보고 같이 화장실 가자고 하니 갑자기 순찰 나오면 어쩔거냐면서 안 일어선다. 그건 핑계이고 무엇보다 귀찮아서이다. 별수 없이 잠간 동안 누군가 일어설 때를 기다리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지 혼자 밖으로 나갔다.
자다가 화장실을 가려면 불침번이 혼자는 안 보낸다. 이것 역시 탈영을 우려한 것으로 ‘전우조’라고 하여 두명 이상 짝을 지어 보낸다. 내무반 안에 고향 친구가 있던가 잘 친해 놓은 사람이 있으면 깨워서 갈 수 있지만,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순순히 따라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남을 위하여 추운 겨울에 자다 말고 일어나 옷 주워 입고 따라 갔다 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것 또한 심각한 일이어서 누군가 화장실 갈 사람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같이 가야한다.
잠시 후 무슨 시끄러운 고함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면서 내무반장이 아까 나간 불침번 멱살을 잡고 끌고 들어온다.
“야 이새끼야, 누구 죽는 꼴 보려고 혼자 기어나가서 막사 옆에서 오줌을 싸? 당직 사령에게 걸리면 네가 깨지는 줄 알아 임마? 내가 쪼인트 까져!”
이렇게 잔뜩 열 받아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몇 십분 동안을 계속 얘기 몇 마디하고 쥐어박고 또 몇마디 하고 걷어차고를 반복하였다.
이 소동에 모두들 잠이 깨었건만 귀로만 듣고 자는 척 움직이지 않는다. 그 녀석 오줌 한번 잘못 누고 한시간 좋게 갖은 곤욕을 다 치뤘다.
5. 세숫대야 사건
군대 아닌 군대인 수용연대의 생활은 입고 있는 복장도 제각각 이듯이 어수선하고 혼란 투성이이다.
수용연대란 명칭에서 보듯 연대급이니 수용병력은 약 2천 명 정도일 텐데 그런 수많은 인원이 날마다 들락날락 이동이 심하고 병영생활이 처음이라 실수도 많으며 같은 내무반에서 서로 얼굴도 잘 모른다. 당연히 혼돈스러울 수밖에......!
지급품도 수시로 없어지는 경우가 많아 골치가 아프다.
세수를 하거나 식사당번들이 식기류를 닦는 곳은 예전의 초등학교 운동장가에 있던 세면대와 같은 시멘트 구조물로 되어있다.
하루는 세수를 하려고 수돗가에 갔더니 사람은 많고 자리도 좁은데 기간병 한명이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하는데 물이 튄다고 양옆 몇자리 장정들을 두들겨 패서 쫓아내고 이를 닦고 있다.
한 대 얻어맞은 장정 하나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 기간병의 이닦는 모습을 째려보고 있었다.
입가에 거품을 잔뜩 물고 칫솔질을 하던 기간병이 칫솔을 빼고 한마디 한다.
“얌마, 불만 있어?”
“아뇨. 뭐.... 저.... ”
칫솔질을 마치고 물로 입을 다 헹구어 낸 후 얼굴을 닦고 머리, 얼굴에 비누질을 하여 손으로 문질러 거품을 내고 있는데, 예의 그 장정이 그때를 기다려 날래게 세숫대야를 집어들어 물을 버리고는 냅다 튀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이모습을 지켜봤다.
기간병은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거품을 낸 다음 손으로 세숫대야의 물을 떠서 얼굴과 머리를 씻으려고 손을 아래에 대니 만져지는 물이 없다.
‘물이 다 새 나갔나?’ 이리저리 더듬더듬, 어리둥절?
이 꼴을 지켜보던 많은 장정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 기간병, 손으로 눈을 비벼 거품을 대충 걷어내고 둘러보니 저멀리 세숫대야를 들고 도망가는 장정을 발견했다.
“야, 거기 서! 야, 야, 저놈 잡아!”
그런 상황에서 서란다고 설 사람 전 세계에 하나도 없다. 잡으란다고 잡아줄 사람도 물론 없다. 절대 못 잡는다. 재미있게 구경하면 했지 남의 일에 도와주는 사람 죽어도 없다.
거기다가 밉살머리스럽게 장정들 위에 군림하는 기간병이 당한 일임에야!
비눗물에 따가운 눈을 연신 비벼가며 머리에 하얗게 거품을 뒤집어쓰고 달려가는 꼴이라니.....!
이때를 기다려 주위의 다른 장정들은 비누갑, 수건, 치약, 칫솔 등 남은 물건들을 모두 들고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내게 당장은 필요 없는 물건이라도 갖다 놓으면 나중에 없어졌을 때 보충할 수도 있고 다른 물건과 교환할 수도 있는 것이 수용연대의 생활이다.
6. 식깡 탈취 작전
내무반에 지급되는 물품으로는 식판, 수저, 세숫대야 몇 개 청소용구 등이 있다.
식판은 요즘은 학교에서 급식용으로도 쓰이고 회사나 야영장 같은 곳에서 단체급식에 많이 쓰이고 있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그때는 군대에서나 볼 수 있었다. 식깡 국깡은 밥과 국을 담는 깡통이란 뜻인데 알루미늄으로 된 커다란 둥근통으로 높이는 허리보다 좀 낮은 것으로 한개에 약 100명 이상의 분량이 들어간다.
식사시간이 되면 식사당번 열명 정도가 식당에 가서 받아다가 밥을 먹고 수돗가에 가서 씻어서 수량을 맞춰 다시 식당에 반납을 해야 한다.
보통 수돗가에 갈 때는 경험 많은 내무반장의 지시에 의하여 식사당번 외에 칠팔명 정도가 경비병력으로 동행을 한다.
하루는 말이 없고 착한 장정하나가 다른 사람을 부르기가 미안했던지 혼자서 식깡을 들고 닦으러 갔다가 그만 다른 아이들에게 뺐기고 들어왔다.
말도 못하고 얼굴이 시뻘거니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동료 장정에 의하여 전모가 밝혀졌다.
내무반장 화가 나서 뚜껑이 열렸다.
이 장정을 밀고 치고 받고 분풀이를 하다가 다른 식사당번들도 공동 책임을 물어 원산폭격을 시켜놓고 씩씩거리다가 지시를 내렸다.
“이새끼야, 이거 달러 변상을 하면 얼마인지나 알아 임마? 시골의 자갈논 몇 마지기는 팔아 와야 돼 임마! 머저리 같으니.....!”
“야, 다들 모여봐! 지금부터 특공대를 편성한다. 너희 둘은 척후병이다. 더 늦기 전에 빨리 나가서 적당한 목표가 있나 찾아보고 속히 보고해라. 그리고 다음은......”
바람잡이조, 탈취조, 차단조, 도주로 확보조 등 20여명으로 특공대가 구성되었는데 나는 뻬치카 조수로서 날마다 난로만 끼고 앉아있는 것도 무료하여 재미있을 것 같아서 지원을 했다.
일단 목표에 도착하면 바람잡이조가 접근하여 같은 내무반 장정인척 접근하여 정신을 혼란하게 하고 탈취조가 식깡 탈취에 성공하면 우리 막사의 반대 방향으로 일단 들고 튀었다가 돌아들어오고 차단조는 쫓아오는 병력을 넘어뜨려 시간을 지연시킨 후 사방으로 튀고 도주로 요소요소에는 확보조가 중간중간 서 있다가 쫓아오는 사람을 붙잡고 무슨일이 있느냐고 물어서 방해를 하거나 우연인척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것이다. 나는 도주로 확보조 였는데 별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나 있는 곳 까지 적이 도착도 하기 전에 상황이 끝났다. 그것도 한개면 되는데 2개씩이나......!
내무반장 다시 기분이 좋아지고 수고했다고 치하를 하고는 여유분 식깡은 어디로 이리저리 연락을 하여보고 다른 곳으로 인계를 하였다.
이런 소동은 이틀이 멀다하고 일어난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누군가가 재미로 일부러 이런 일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7. 시력검사
수용연대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신체검사를 거의 끝내 가는데 그만 시력검사에서 걸리고 말았다. 나는 어렸을 때 어두운 곳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서 책을 많이 본 탓인지 외갓집과 우리 가문에 시력이 약한 사람이 없건만 중3때부터 근시로 안경을 쓰게 되었다.
지금이야 중고교생 절반이상이 안경을 쓰고 있지만 나 학교 다닐 때는 많아야 한반에 두세명밖에는 없었다.
신체검사표를 들고 신체검사장에 가서 내가 아직 검사받지 않은 곳에 가서 줄을 서면 검사표를 걷어서 쌓아놓고 한명한명 검사를 하고 기록하여 확인도장 찍고 돌려준다. 그럼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줄을 서면 되는 것이다.
안경을 벗고 시력검사를 하니 왼쪽눈 0.4 오른쪽눈 0.3이 나왔다. 검사관이 신체검사표를 주지 않고 옆에 빼놓고는 나를 열외시켜 앉혀 놓는다. 다른 사람은 다 주어 보내는 데 나와 몇 명만 안 주는 것으로 봐서 불합격이 틀림없다. 그럼 집으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 창피한 노릇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여러 차례의 송별식을 거창하게 얻어먹었는데 돌아가면 다 웃을 일이 아닌가?
한참 고민을 하다가 군의관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 사이 살금살금 기어서 내 신체검사표를 빼어 통과된 검사표 위에 놓고 기어 돌아가다가 걸렸다.
“야, 너 이리와!”
꿀밤을 한대 먹이고 또 말한다.
“얌마, 여기다 놓으면 군대 가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군대가 가고 싶으냐?”
“예, 그렇습니다.”
“그래? 딴 놈들은 안가려고 애쓰는데, 너 후회 안하겠냐?”
“예, 절대 안합니다.”
“그래? 그럼 내 원망 마라잉? 바보 같은 놈!”
그러고는 웃으며 다시 꿀밤을 한대 더 먹이고는 기록 확인 도장 찍어서 나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큰소리로 인사하고 나니 이제 겁날 것 없다. 내 비록 허약한 체질이기는 하나 시력하나 빼놓고는 결격사유 하나 없다.
나중에 안 사실로는 그 당시 내 시력 정도는 보충역인가 뭐로 편성되어 군대에 안가도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한 두 차례 더 수용연대 구경을 해야 되었을 것이지만!
이리하여 나는 비교적 빨리 수용연대에 들어와서 3일 만에 ‘완자’가 되었다.
8. 군번을 받고
이제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지만 ‘완자모여!’에 모여서 이름만 불리면 군번을 받고 지급품을 받아 군복으로 갈아입고 입던 옷은 집으로 부치고 훈련소에 들어가 정식 군인이 되는 것이다.
보통 일주일 이내에 군번을 받으면 빠른 것이고, 이주일 이내면 보통, 어떤 사람은 삼주일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수용연대에서 지내는 기간은 군인이 아니므로 현역 날짜에 계산이 안된다.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제대가 늦어질 뿐이다.
완자를 받고 나면 아무 할일 없이 가끔 사역이나 하면서 대기하다가 하루 한두번 ‘완자모여!’만 참석을 하게 되는 지루한 생활이다.
나는 나보다 이주일 정도 먼저 들어온 뻬당 사수와 같이 난로를 지키면서 둘이 번갈아 PX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정말로 사역도 식사당번도 불침번도 안서는 뻬치카 당번은 심심하리만큼 한량한 특과 중 특과이다.
그러다가 아직 지루하기도 전인 완자 받고 이틀만에 나는 군번(1232 3604)을 받았다.
웃기게도 나는 나의 뻬당 사수와 같은 날 군번을 받았다. 우리 내무반 빼당 사수, 조수가 동시에 군번을 받았으니 내일부터 내가 잠자던 막사 난로가 어떻게 될지 걱정스럽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다.
천만 다행히 고향친구 만태와도 같은 시간에 군번을 받게 되어서 뛸듯이 기뻤다.
이번엔 진짜로 떨어지지 말자고 꼭 붙어 다녔다.
군복을 나누어 줄때는 한줄로 죽 서서 지나가면 옷이고 신발이고 마구 집어서 던져준다. 잘못하면 제 물건도 못 챙기기 십상이다. 군복이나 모자, 통일화 등이 크거나 작다고 바꿔 달랬다가는 현장에서 얻어맞는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바꿔 사용하라는 것이다.
입던 옷을 집으로 부칠 포장지와 끈을 지급 받고 옷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입던 옷 집으로 부치고 소지하고 있던 돈 3천원 초과분은 모두 부대 내 은행에 넣고 통장을 받아 보여주어야만 훈련소에 입소할 수 있다. 이때 될 수 있으면 돈을 많이 숨겨서 가지고 들어가야 훈련소에서 여러 가지로 요긴하게 쓸 수가 있다고 한다. 흔히 팬티(그때는 ‘팬티’라는 교양있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빤쓰’라고...!) 고무줄 넣는 곳에 돌돌 말아 넣고 그 위에 지급된 군용팬티를 겹쳐 입는데 잘못 걸리면 얻어맞고 팬티를 뺏기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인솔 담당관 말이 훈련소에서 옛날과 달리 충분히 먹여주고 필요한 물건을 다 지급하니 돈이 필요 없고 규정 이상의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적발되면 처벌을 하겠다고 하여 나는 정말로 3천원외의 돈 3만원 정도를 예금하였다.(그때 한달 월급이 2-3만원 정도였음)
우리는 정신없이 지급품 확인하고 크기에 맞게 이리저리 바꿔서 옷 갈아입느라 바빠서 옷을 부칠 때도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집에 계신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들은 아들이 입던 옷이 집에 도착하면 끌어안고 소리쳐 통곡을 하신다고 한다.
◈ 훈련소에서
9. 첫 식사당번
계급장은 없지만 군복을 갖춰 입고 이제 ‘장정’딱지를 떼고 진짜 군인이 된 우리는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에 훈련소인 연무대로 이동을 하였다.
대부분의 병력 이동은 어두워진 다음에 이루어진다.
넓디넓은 연병장에 모여서 막사 배치가 이루어졌다.
나는 고향친구 만태와 둘이서 이리저리 헤쳐모여를 여러번 하는 와중에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더러는 기간병 들의 발길에 채여 가면서도 꼭 붙어 다녔다.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23연대 10중대 4소대 같은 내무반에 배치를 받을 수 있었다.
다시 경호원이 생겼으므로 훈련소 생활이 거칠겠지만 적이 안심되는 바가 있다.
훈련은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기분이다.
계급이 병장인 내무반장(지금도 ‘김태용’이라는 이름이 기억이 난다.)의 지시로 잠자리를 배정 받고 관물대에 지급품을 되는 대로 집어넣고 저녁시간이 늦었으므로 이내 식사당번을 정하였다.
23연대 내 식당이 몇 군데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각 내무반에는 식깡, 국깡, 식판, 수저 등을 지급하여 주고 매 식사 때 마다 식당에서 주부식을 수령하여 내무반에서 배식과 식사가 이루어지는 체계였다.
나는 첫 번째 식사당번으로 뽑혀 다른 동료들 8명과 함께 식당앞으로 갔다.
각 소속별로 줄지어 앉아 있으면 밥, 국, 반찬 등이 나오는 대로 들려 보낸다. 나는 뒤쪽에 앉아 있다가 식당 안에 있는 보일러 안에 넣어 밥을 찌는 식판을 닦는 일을 맡았다.
식판하나가 20명의 식사분량이 담기는 것인데 배식 후의 빈 식판 3개를 갖고 수돗가에 가서 닦아 오는 것이다.
세제도 수세미도 안 준다. 맨 손으로 들고 가서 재주껏 닦아오라는 것이다.
나는 수돗가 주변의 굴러다니는 지푸라기를 뭉쳐서 수도의 찬물을 받아 문질러 닦았다.
그런데 식판 안은 괜찮은데 가장자리에 밥풀이 눌어붙은 것이 잘 안 떨어졌다.
찬물에 손은 얼어 빠질 것 같은데 대충 이정도면 되겠지 하고 가지고 갔더니 어림없다.
발길로 걷어차이고 불합격을 맞았다.
훈련소 들어온 첫날, 군대 생활이 시작되는 첫날부터 이게 무슨 꼴이람!
다시 지푸라기와 막대기를 구하여 문질러 봤건만 더 이상 닦아지지도 않았다.
때마침 떠오른 달빛에 비춰 보면서 얼어서 감각이 없는 손으로 닦고 들여다보고 닦고 들여다보고를 반복 하였지만 닦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손에 감각이 없어 손이 식판에 닿은 것인지 지푸라기가 닿은 것인지도 구분이 안 간다.
어느 순간 식판을 들여다보니 물이 검게 보였다.
‘......?’
왜일까? 검은 수돗물이 나왔을 리는 없고 자세히 보려고 식판을 들고 얼굴을 가까이 하니 비릿내가 확 풍겼다.
피다! 얼른 식판을 놓고 손을 들여다보니 피가 흥건한데 감각이 없어 상처는 어딘지 못 찾겠다.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려고 한다. 평생에 힘든 일 별로 안 해보고 그릇 한번 닦아 본일 없던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보름달 가까운 상현달이 둥글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 얼굴도 둥글다. 고향에서 우리 어머니도 저 달을 보고 있을까?
저 달을 통해서 이 아들이 이런 꼬락서니로 서있는 모습을 알기나 하실까? 어머니 생각을 하니 이젠 주체 할 수 없이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걸 어찌하나? 앞으로 삼년을 이렇게 보내야만 하는 것인가?
참으로 새털같이 많이 쌓인 앞날이 암담하기만 하다.
식판을 닦는데 신경을 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서 있자니, 막사에서 밥먹는 숟가락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 벌써 밥먹고 나와 담배 피우는 동료들......!
모두 나같이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
“야, 너 뭐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고 서있는 사이, 아까 같이 식사당번으로 왔던 아이가 내가 안 들어오니 밥 먹고 궁금하여 나를 찾으러 온 것이다.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식판만 가리켰다. 목이 메에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이 아이는 식판을 들여다보고 잠시 상황 파악을 하더니
“이런 병신 같은 새끼, 야 임마. 그 나이 처먹도록 밥은 어떻게 먹고 살았냐?”
하더니 언 땅을 발로 박박 비벼 모래를 긁어 모아 식판에 넣고 통일화 신은 발로 박박 문질러 금방 닦았다.
‘아니, 먹는 그릇을 더럽게 신발로 비벼 닦으면 어떻게 해?’소심한 나는 또 걱정을 했다.
“야 야, 따라와 봐!”
그러고는 식당 취사병에게 식판을 갖다 주고 검사를 맡았다.
취사병은 식판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두개는 합격, 하나는 또 불합격을 때렸다.
나는 막힌 속이 확 뚫리는 듯 하다가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신발로도 못 닦은 걸 어떻게 닦지?’
이 아이는 식판 하나를 들고 나오더니 닦을 생각은 안하고 문밖 어두컴컴한 곳으로 가서 잠시 서서 식당안의 정세를 살피더니 잠시 취사병이 한 눈을 파는 사이 식당 문안에 살며시 놓고는 얼른 돌아와서 나보고
“야, 가자!”
지금도 누군지도 모르는 이 친구는 말투는 거칠었지만 완전히 나를 구원해 주러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식사당번을 할 때마다 식당에서 밥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 작은 방 크기에 무릎 높이의 시멘트 구조물에 쌀과 보리를 가마니 째 쏟아놓고 물을 부어 삽으로 휘휘 저은 다음 둥둥 떠다니는 비교적 큰 지푸라기만 대충 걷어내고 삽으로 퍼서 식판에 넣고 여러 층의 선반으로 되어있는 보일러에 식판을 넣고 쪄 낸다. 그러니 밥 속에서 쌀벌레와 지푸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 많은 쌀에서 벌레와 지푸라기가 하나도 없게 고른다면 아마 밥을 제시간에 하기 어려울 것이다.
닭고기 국을 끓일 때는 생닭이 든 가마니에 삽으로 콱콱 찍어 대충 토막을 낸 다음 큰 솥에 넣고 끓인다.
나는 한 겨울에만 훈련을 받아서 동절기외의 다른 계절의 한국 육군 부식 사정은 잘 모른다.
밥은 쌀과 보리가 섞인 수용연대에서부터 나는 퀴퀴한 특유의 짬밥 냄새가 있다. 이 냄새는 확산성, 침투성이 매우 강한 것 같다. 상당히 먼 곳에서도 이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밥 먹을 때 입던 옷을 갈아입지 않고 외출을 하면 옷에 밴 냄새가 상당히 오래도록 남아있다.
처음에는 이 냄새가 아주 역해서 나는 연무대 입소 후에도 배식 받은 양을 다 먹지 않았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부터는 이 냄새가 차츰 구수해지기 시작해서 머지않아 곧 친숙한 냄새로 바뀌었다.
국은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고등어, 꽁치, 갈치, 도루묵, 어묵 등의 재료로 끓여 주었는데 쉽게 말하여 육해공군 국이라고 한다. 네발달린 짐승은 육군, 닭고기는 공군, 생선 종류는 해군 이런 식으로 이미 일반화 되어서 사회에서도 쓰는 말이다.
그중 특히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국은 어찌 된 일인지 기름만 많이 떠있고 고깃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를 가리켜 ‘돼지가 목욕한 물’이라든가 ‘닭이 장화신고 지나간 물’이라고 한다. 고기 맛보기는 어렵고 기름기 때문에 식판 닦기만 힘들어서 별로 반갑지 않은 국이다.
비교적 생선은 고기가 많이 들어있다. 누구나 집에서야 이런 생선들은 반찬으로나 먹어봤지 국으로는 먹어본 적이 없다. 단체 급식 상 조리 방법은 엉망이지만 생선의 질은 좋아서 손바닥 만한 갈치 도막이 나오면 모두들 그 큰 가시도 발라내지 않고 그대로 씹어 먹는다.
배고픈데 다만 생선가시라도 발라내면 양이 줄지 않겠는가?
나 같이 식사량이 적은 사람도 정말이지 훈련소 들어가 열흘 쯤 지나니 뱃속에 거지라도 들어있는 양 배고프기가 한량 없었다. 배식량이 적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적당히 힘든 훈련을 받으면서 피 끓는 젊은이들만 모여 있는 곳에서 먹으니 경쟁심이 유발 되는 것인지? 어느 때나 밥풀하나 남지 않는 식사는 식사 후 식판을 거꾸로 뒤집어도 국물 한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 내가 비교적 좋아했던 국은 어묵국(거기선 아부라기국이라고 불렀다.)으로 이국만은 위에서 떼어먹는 사람이 없는지 국 건더기가 많아서 요기가 되고 맛도 괜찮은 편이었다. 싫어했던 것은 도루묵 국으로 도루묵은 살이 연하여 국을 끓이면 살은 어디로 다 도망가고 머리와 뼈다귀, 그리고 국물위에 알만 둥둥 뜬다. 대부분의 생선이 알이 가장 맛있는데 도루묵 만은 영 아니다. 알이 굵은 편이면서 씹을 때 까드득까드득 소리가 나면서 맛이 안 좋다. 사회에 나오니 술안주로 도루묵 찜을 해 주는 곳이 있던데 이건 먹을 만한 괜찮은 안주이다.
기본 훈련 6주 동안 5주 이상을 심한 배고픔에 시달렸다.
한번은 식사 직후 중대본부에 사역병으로 갔다 온 동료로부터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중대본부 기간병들 식사는 남는 밥이 상당히 많아서 갔다 버린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다음 중대본부 사역 때 나를 비롯한 몇 명이 따라가서 중대본부 문 앞에서 죽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사역병이 들고 나온 양동이에는 정말로 남은 반찬, 국과 함께 하얀 밥이 수북히 담겨있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조금 벗어난 곳으로 옮겨 맨손으로 밥을 집어먹었다.
더러는 반찬과 국물이 섞여있어서 간이 맞으니 따로 반찬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어떤 친구는 하얀 밥은 주먹으로 뭉쳐서 주머니에 넣는 사람도 있었다.
몇 번 이런 만찬을 즐겼는데, 그만 밖에서 중대본부로 들어가던 기간병 눈에 띄어 ‘양심불량’이라나 ‘군인정신 위반’이라나 무슨 그런 명분류의 기합을 한참 받고는 종쳤다.
10. PX(Post Exchange)
PX!
처음엔 이 이름에서 느껴지는 어감이 무슨 대단한 곳처럼 생각되었지만 작든 크든 별것 아닌 군대매점을 통틀어 이르는 말에 불과하다. 군대에는 이렇게 별것 아닌 것도 영어로 되어있어 뭐가 있는 것처럼 멋있게 보이는 것이 매우 많다.
한 소녀가 와서 나를 찾거든
전선으로 떠났다고 말해주오
아무 말 없었느냐고 묻거든
말없이 고개를 저어주오
소녀가 눈물을 흘리거든
그도 울면서 떠났다고 전해주오
훈련소 PX 안에 걸려 있는 커다란 액자에 들어있던 시이다.
낡은 철조망 몇 가닥과 철모에 총을 든 병사 등 황량한 전선 풍경이 실루엣으로 함께 그려진 이 시를 나는 PX에 들어갈 적마다 몇 번 씩 도합 몇 백번도 더 읽었다.
짧은 시이지만 갓 입대하여 미래가 불확실한 긴 군 생활을 앞에 둔 훈련병들에게 이같이 심금을 울리는 시가 또 있을까?
내용이 정확히 위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누구의 시인지도 모르고 누군가 훈련병 중에 PX 벽에 낙서로 남겨놓은 것을 낭만을 아는 훈련소 간부의 지시에 의하여 시화로 만들어져 벽에 걸어놓은 것쯤으로 생각했었다.
몇 십년이 지난 후 우연히 이시가 그 유명한 ‘헤르만헤세’의 ‘먼 여로’라는 제목의 시로 조국을 위하여 전선에서 산화한 무명의 병사를 위하여 지어진 시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번역과정에서 내용상 다소 차이가 있는 여러 종류의 시도 있고, 해병대 등 군대에서 패러디한 시도 여러 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무언(無言)’이라는 제목으로,
어느 날 소녀가 날 찾거든
완전무장 짊어지고 전선으로
떠났다고 전해주오
혹 남긴 말 묻거들랑
철모 밑에 이슬이 맺혀
해병은 말없이 돌아 서더라 전해주오
소녀 울면서 돌아서거든
그도 울면서 떠났다고 전해주오
그래도 울면서 가지 않고 목 메이거든
돌아서지 않는 해병은 지금쯤 낯선 전선에서
용감히 싸우고 있을 것이라 전해주오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고
사랑은 불타도 연기가 없고
해병은 죽어도 말이 없다 전해주오
돈이 넘쳐나는 수용연대의 PX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아직 배에 기름기 빠지지 않은 장정들로 많이 붐비고 빵이나 통조림 등을 돈 주고도 사기가 어렵지만 훈련소의 PX는 돈을 모두 통장에 넣고 3천원 정도 만을 소지할 수 있기 때문에 쓸 돈이 없어서 한가하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쉽게 다 살 수 있다.
휴일이나 한가한 시간만 주어지면 영낙없이 들려오는‘사역병 집합!’소리를 피할 곳은 교회나 PX밖에 없다. PX는 운이 좋으면 잘 아는 친구가 먹을 것을 사러 들어오는 것과 조우를 할 수도 있는 좋은 장소이다.
주로 사는 물건은 편지지, 편지봉투, 우표, 볼펜 등이 많고 어쩌다 먹을 것을 사기도 한다. 나는 PX에서 한개에 15원씩 파는 삼립 크림빵이 꽤나 먹고 싶었지만(사실 더 먹고 싶었던 것은 그 당시 생산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삼립 호빵이었지만 군대 PX에서는 팔지 않음) 넉넉지 못한 돈으로 2개 이상 사 먹지를 못해봤다. 정말 간에 기별도 안가는 수준이다.
나는 군에 입대하기 전에 선배 선생님들로부터 군대얘기를 무척 많이 들었다.
군대의 제일 큰 문제는 배고픈 것이라고 한다. 육군 정량을 지급 받으면 배고플 리 없지만 높은 곳에서부터 또 끝발이 센 곳에서부터 이리저리 뜯기고 나면 말단에선 항상 배고프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이 되었다. 왜냐하면 매일 출근할 때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데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매일 남겨서 ‘군대 가면 배고픈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입대 전에 세살 위인 누님에게 부탁하여 군에 입대하고 훈련소에 들어간 뒤에 몇 차례에 나누어 우표를 100장씩 부쳐달라고 했다.
군대에선 현금처럼 유통이 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하면 훈련병에게 군사우편을 통하여 무료로 편지를 무한정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통 정도에 불과한데 우표를 붙이면 제한이 없어서 훈련병들도 우표를 필요로 하고, PX에서도 우표를 현금처럼 받는다고 한다.
한번은 중대본부에서 호출이 떨어졌다. 웬일인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중대본부에 올라갔더니 서무병이 내 앞으로 등기편지를 하나 내민다. 어디서 왔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가지고 나오려하니 그 자리에서 뜯어보고 나가라 한다. 군대에서도 웬만한 것은 통신의 자유가 보장되는데 의아해서 쳐다보았더니 ‘등기편지’나 의심 갈 만한 우편물은 검열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제서야 편지봉투를 살펴보니 누나에게서 온 것이고, 하단에 <우표 재중>이라고 써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표가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무척 반가웠다.
뜯어보니 현금 만원, 우표 백장과 함께 요긴하게 잘 쓰라는 간단한 편지가 들어있었다. 이제 들뜬 기분으로 가지고 나오려고 하니 서무병이 또 부른다. 훈련병에게 현금이나 이에 준하는 것은 보내지 못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반신 봉투를 만들어 우표와 돈을 넣어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 중대본부를 나오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남자가 되려고 군대에 들어왔더니 계집애처럼 눈물을 흘려야 되는 경우도 참 많다.
여러 사연을 거쳐 얼마 뒤에 일반편지로 우표가 다시 내게로 도착한 날, 나는 고향친구 만태를 데리고 PX에 가서 우표를 주고 삼립크림빵 10개를 사서 5개씩 나누어 먹었다. 역시 부족하다. 6개를 더 사서 또 나누어서 도합 8개씩 먹었지만 더 먹고 싶었다. 그러나 한번에 다 사먹으면 다음에 진짜 배고플 때가 있을지 몰라서 아쉽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언제고 돈이 생기거나 휴가를 가게 되면 그때는 눈앞에 크림빵을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도저히 먹을 수 없을 때 까지 먹어보리라는 환상을 간직한 채!
PX와는 관계 없지만 만태에게 도움을 받은 얘기 하나!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 크기는 더 있는 덩치 큰 만태와 자주 붙어 다니니 더러 다른 동료와시비가 될 뻔한 일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는 많았다.
한번은 시간이 남아서 연병장 철봉대에 매달려 오래 간만에 턱걸이, 다리 걸고 넘기 등 연습을 잠간하며 몸을 풀고 들어왔는데, 어라? 가슴 앞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던 스푼이 없다.
누구나 스푼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먹을 일이 생기면 재빨리 먹고 다시 씻어 넣고 다니는데 아마 철봉대에 거꾸로 매달려 있을 때 빠져 나간 모양이다. 이건 보통일이 아니다. 당장 식사시간에 밥을 먹을 수가 없다.
얼른 연병장에 달려나가 철봉대 밑을 살펴봤으나 없다! 순간 아찔! 이걸 어째?
별수 없이 개인 경호원 만태에게 말하는 수 밖에!
알았다고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더니 금방 나가서 하나를 가져다 준다.
신기하여 어디서 구했느냐 했더니 수돗가 물 빠지는 곳에 깊게 파 놓은 곳 몇군데를 돌아다녔더니 하나가 나오더란다. 나중에 나도 한가할 때면 가끔 그런데를 다니며 휘 저어 봤다.
정말 신기하게 나도 하나 건져 낼 수 있었다. 만약을 대비하여 잘 숨겨 두었다가 다른 애가 잃어버렸다고 하여 인심을 썼다.
11. 내무반
훈련소 내무반은 그 당시 신형 막사인 29연대를 제외하곤 모두 수용연대의 막사와 똑같은 구형 막사이다.
다만 같은 크기의 내무반에 인원만 규칙적으로 36명에서 40명 정도로 일정하다는 것이다.
체제도 비슷하여 여기서도 향도가 있고 따까리, 뻬치카 당번이 있다.
나는 이미 수용연대에서 경험을 하였으므로 당연히 여기서도 뻬당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아이들도 그런 내용은 파악된 뒤로 선발하려고 하니 웬 수용연대에서 뻬당을 했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나는 초장에 탈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안하길 잘했다. 밤낮없이 난로 옆에만 있으면 만고강산인 수용연대 뻬당과 달리 여기서는 학과시간을 빼먹으며 난로를 지킬 수 없으므로 낮 시간 동안은 거의 막사를 비워놓는데 난로가 자주 꺼진다. 좋은 점이라고는 불침번 빼주는 것과 식사당번 안하는 것 정도로 인센티브가 별로 없다. 오히려 남 밥 먹을 때도 석탄 먼지를 뒤집어쓰고 난로를 피워야 하는 때도 있어 고생이 많은 편이다.
내무반에서 개인 지급품을 보관하는 관물대 자리를 정해주면 바로 그 앞이 자기 잠자리가 되며 3사람씩 전우조를 짜주는데 나는 전북 임실에서 농사를 짓다 온 ‘이영기’라는 친구와 경남 울산에서 자수정 광산에서 일하다 왔다는 ‘우소암’이라는 친구를 거느리고 조장이 되었는데 셋이서 힘을 합쳐서 해결해야 될 일이 많은데 마치 정치권의 영호남 대결구도처럼 이 둘이 사사건건 서로 다툼이 많아서 아주 골치가 아팠다.
내무반장은 ‘김태용 병장’으로 무뚝뚝한 원칙주의자이나 언행이 딱 부러져서 좋았는데, 약간 음치성이어서 내무반장으로부터 배운 군가의 음정이 대부분 잘못되어서 나중에 다시 배워야 되었다.
양쪽으로 나뉜 침상에 한쪽에 18명씩 36명이 우리 10중대 4소대의 내무반원이다.
보통 내무반에서 앉아있을 때는 침상 3선에 정렬하여 앉는다. 서 있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가끔 ‘침상 1선에 정렬’이라는 구호가 떨어지는 때가 있다. 별로 좋지 않은 조짐이다.
좋은 일은 별로 없다. 기합을 받거나 얻어맞거나 할 경우가 90퍼센트 이상이다.
잠을 잘때는 한 옆에 쌓아놓은 매트리스를 깔고 한사람 앞에 3장씩 지급된 모포를 두사람이 합하여 2장은 깔고 4장은 덮고 잤다. 모포의 촉감이 까칠까칠하지만 그중 털이 많이 빠지지 않은 새것을 안쪽에 오게 하여 자면 그런대로 잘만 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니 건너편 침상에서 매트리스 젖은 게 있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가 물을 엎질렀나? 그런데 며칠이 지나니 여기저기서 매트리스가 젖어서 축축하여 잠을 못자겠다고 난리가 났다. 결국 원인이 밝혀졌는데 덩치가 좋고 키가 가장 커서 맨 끝쪽 매트리스 쌓아놓은 옆에 위치한 ‘김현기’라는 친구가 매일 오줌을 싼 것으로 밝혀졌다. 통칭 ‘고문관’에 해당하는 친구인데 취침 준비 시 자기가 적셔 놓은 매트리스만큼은 다른 곳으로 보내고 자기는 매일 보송보송한 매트리스에서 자면서 하루 하나씩 적셔놓은 것이다. 덩치가 크니 오줌의 양도 상당했을 것이다.
이 친구는 그날부터 전용 매트리스를 표시해 놓고 봄비에 젖은 듯 촉촉한 매트리스를 깔고 훈련소 퇴소할 때까지 잠들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
이친구 덕분으로 우리는 종종 원산폭격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그래도 내무반장이나 소대장이 이 친구를 함부로 하지 못했는데, 본래 고문관으로 판명이 나면 아무리 기합을 넣어도 고쳐지는 것이 아니므로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에서 열외가 되기도 하지만 뒤에 든든한 스타빽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군대에서는 빽이 크게 작용하던 시절이었다.
12. 점호
훈련소에선 날마다 아침엔 일조점호, 저녁엔 일석점호가 있으며 매주 토요일 아침엔 내무검열이 있었다.
훈련소의 일상을 살펴보면,
05:50 기상
06:00 일조점호, 체조, 구보
06:30 청소, 세면
07:00 아침식사
08:00 오전 학과
12:00 점심식사
13:00 오후 학과
17:00 저녁식사
18:00 일석점호 준비
19:00 교양 시간
21:00 일석점호
22:00 취침
이후 취침 시간부터 기상시간 사이에는 수용연대에서 처럼 내무반 불침번을 서는데 2명 일조로 한시간 씩 서기 때문에 평균 2일에 한번 꼴로 돌아오며 자다말고 중간에 일어나야하기 때문에 잠을 설치게 되고 훈련병이 항상 졸린 강력한 원인이 된다.
자다 말고 불침번을 서는 것은 매우 성가신 일임엔 틀림없지만 난로위의 큰 주전자 속에 숭늉을 끓이려고 넣어둔 밥풀이 남아있을 때는 그것을 건져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또 지급된 건빵을 다 먹지 않고 남겨두었다가 불침번 설 때 반합 뚜껑에 몇 개 넣고 물을 부어 죽처럼 만들어 난로 위에 데워 먹으면 뱃속이 황홀함을 느낄 수 있다.
훈련소에서 듣기 싫은 소리도 많지만 뭐니뭐니해도 기상나팔소리가 제일 듣기 싫은 기분 나쁜 소리일 것이다.
“빰 빰 빰빰빰 빰빠라밤빰 빰빰빰 빰빰빰 빰빠라밤빰 빠암~~~”♩♪♬♪♩
훈련에 지친 몸 피곤하게 자다가 이 소리가 들려오면 끔찍하다. 총알 같이 일어나 옷 주워 입고 일조 점호준비를 해야 한다.
“각 소대, 중대연병장에 집합”
구령소리와 함께 속히 달려 나가 연병장에 집합하여 점호를 받는다.
일조 점호 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원 점검으로 밤사이 탈영병은 없는지, 아프거나 탈이 난 훈련병은 없는지 간단히 인원보고로 확인을 한 후. 애국가를 부르고 ‘고향예배’라고 하여 자기 고향 쪽을 향하여 각자 돌아서서 묵념을 한다. 전날 훈련이 고됐거나 몸이 아플 경우, 또 뭔가 고민거리가 있을 때는 머릿속에 부모님을 떠올리면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저린 시간이다.
그리고는 육군 도수체조 등을 하며 간단히 몸을 풀고 연병장 구보를 한다.
그럼 훈련병에게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당연히 취침 나팔소리이다.
옛날 ‘세레피아’라는 신경안정제 약 광고에도 나오던 음악 ‘밤하늘의 트럼펫(=적막의 블루스)’의 첫머리가 훈련소 영내에 잔잔히 울려 퍼지면 모든 훈련병들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행복감에 젖어든다. 비상시라든가 특별한 일이 아니면 기합이나 빳따 맞기 등 얼차려를 받다가도 다음날 차질 없는 일정을 위해서 칼같이 잠자리에 들게 하고 소등을 한다. 그 무엇도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일조 점호는 첩첩이 쌓인 일과를 앞두었기 때문에 대부분 연병장에서 간단히 끝나지만, 일석점호는 결코 그렇지 않다. 훈련병에게 온갖 나쁜 일들이 내무반에서 실시되는 일석점호 또는 일석점호 준비와 관련이 있다. 특히 훈련병 초기엔 저녁식사가 끝나면서부터 취침나팔이 울려 퍼지기 전까지의 시간이 공포 그 자체이다.
-사실 자대에 가서도 쫄병들은 훈련이나 경계근무, 교육 등 군인 본연의 임무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고참들을 모셔야하고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들이 산더미 같은 내무생활이 어렵다.-
본래는 저녁식사 후 한 시간 동안 점호 준비 시간이 있어서 청소, 관물정리, 암기상태 외우기, 군가 연습 등을 하고, 그 후 두시간 정도 교양이라고 해서 집으로 편지를 쓰거나 훈련복 수선, 전달 사항 접수, 정훈 교육 등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목적대로 시간이 주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고 괴로운 시간의 연속이다.
일석점호의 본래 취지는 하루 일과를 마친 훈련병들의 인원점검과 이상 유무, 훈련 상황의 평가 등일 텐데 보통 일석점호를 위하여 몇 십 가지의 암기상태, 총기 수입 상태나 통일화, 또는 관물정돈, 장구류 상태 점검 등 갖가지 점호 착안 사항과 손톱검사나 발톱검사, 수통뚜껑의 먼지 제거 등등의 준비로 고통을 준다.
물론 다 알아두면 군 생활에 도움이 되겠지만 짧은 시간 안에 지적을 안 당하도록 준비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각 소대 점호준비. 중대 차렷!”
주번하사의 절도있는 목소리가 들려오며 일석점호의 시작을 알린다. 그때까지 관물정리, 암기사항을 외우기 등으로 소란스럽던 소리들이 이 구령소리 한마디에 싹 사그라져 버리고 중대 내 모든 훈련병들은 내무반 침상 삼선에 일렬로 정렬하여 부동자세를 취한다.
이때 분위기가 매우 살벌하다. 시선고정이나 몸을 철저하게 부동자세를 유지해야지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즉각 곡소리 난다.
뒤이어 주번사관(당직사관)에게 일석점호를 보고하는 주번하사의 목소리!
“멸공!”(인사하는 군기 든 주번하사, 목소리가 힘차다.)
-‘멸공’은 논산 제2훈련소의 구호이며 각 부대마다 다르다. 필승, 승공, 반공, 통일, 단결, 충성 등 다양하다.-
“멸공!”(인사받는 소위나 중위인 초급장교, 목소리가 부드럽다.)
“1972년 12월 XX일 제 10중대 일석점호 인원보고 총원 160명, 사고 무, 현재원 160명 일석점호 준비 끝. 멸공!”
“멸공. 점호는 1소대로부터, 점호를 취하지 않는 소대는 열중쉬엇!”
“점호는 1소대로부터 점호를 취하지 않는 소대는 열중쉬엇!”
주번하사의 복창과 더불어 주번사관을 수행하여 순회를 시작하면 1소대 내무반장(병장, 하사)의 일석점호 보고하는 소리로부터 점호가 시작된다.
“소대, 차렷! 멸공!”
이때 내무반장은 어찌나 구령이 짧고 힘이 들어가는지 ‘멸공’의 구호가 우리 귀에는 ‘멱곡’으로 들린다.
“멸공!”
“제 4소대 일석점호 인원보고. 총원 36명 사고무 현재원 36명 번호!”
“하낫, 둘, 셋, 넷 - - - - - 서른다섯, 서른여섯, 번호 끝!”
인원보고가 끝나면 주번 사관은 보고만 받고 점잖게 둘러보고 훈련병들로부터 애로사항 청취 등을 하고 돌아가는 때도 있지만(이때 자칫 잘못하여 내무반장에게 불리한 얘기가 나오면 점호 끝나고 피 보는 수가 있다.) 대부분은 관물정리 상태, 총기 수입 상태, 암기 상태 등을 확인하여 칭찬이나 질책을 하는 경우도 많고, 어떤 때는 다짜고짜 내무반장이 보고를 다 끝내기도 전에 내무반장을 쪼인트 까고 펀치를 날리기도 한다. 훈련병들은 잠시 후 점호가 끝난 후의 미래를 생각하여 아연 긴장 공포 분위기에 휩싸인다.
더러는 순회하다가 아무 훈련병이나 지휘봉으로 배를 쿡 찌르면서 ‘군인정신’이라고 하면
“네, 훈련병 ㅇㅇㅇ. 군인정신, 군인정신은 - - - - - ”
하고 외운다.
그 외에도 ‘군인의 길’,‘내무검열의 목적’,‘경계의 목적’,‘총검술 16개 동작’, ‘백병전 정신’ 등등 수도 없이 많은 몇십 개의 내용을 묻는데 그중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 ‘국민 교육 헌장’이다.
엄청 긴 내용이다. 이것은 공부하는 학생이나 교육계에서나 외워야 될 것이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어 공포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군대에서도 외우게 시킨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의 조국’이라는 노래도 작사 작곡하여 군가로 보급하여 이 노래 또한 꼭 외워야하는 노래이다. 대통령이 별 재주가 다 많은 덕택으로 훈련병들이 고생이 늘어났다.
때에 따라서는 훈련병의 건강상태 확인을 빌미로 옷을 홀랑 벗겨 지금으로 치면 성추행에 해당하는 인권 침해 사항 등이 수시로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일석점호가 가끔씩 행복한 점호로 바뀌는 수도 있다.
이른바 ‘취침점호!’
모두 잠자리를 보고 누워서 점호를 받으며 간단히 인원점검 만 끝나면 그대로 취침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날 훈련이 특별히 힘 겨웠다거나 무슨 포상 성격으로 베풀어지나 가끔 천사표 주번사관에 의해서 시혜가 되기도 한다.
우리 내무반장은 ‘취침점호’라는 전달사항이 떨어지면 우리를 잠자리 속에 뉘어놓고 머리를 한 줄로 맞추게 한 다음 철모를 머리위로 들고 마구 달려간다. 이때 머리를 내밀어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은 철모에 맞는다. 안 맞으려고 머리를 주변 사람들보다 더 안으로 들이밀면 마구 달려가다가 철모로 후려갈기고 간다. 이래저래 잘못된 자세는 처벌을 피할 길이 없다. 그리고선 한마디,
“얌마, 나 훈련 받을 땐 대검가지고 달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