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창 안의 성경은 내 삶을 완전히 바꿔
증 언 자 : 김한중(남)
생년월일 : 1960. 1. 17(당시 나이 20세)
직 업 : 대학생 (현재 전도사)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증언자 김한중은 단순한 의협심으로 시위에 가담했다. 머리가 박살나고, 푸줏간의 고기처럼 된 시신을 목격하고 무장할 결심을 했다.
5월 27일 YWCA를 끝까지 사수하다 탈출에 성공했으나 주민의 자수권유로 자수했다. 상무대로 끌려간 후 영창에서 성경책을 읽게 된 것이 예수와 만나는 계기가 되어 공학도로서의 지난날을 접어두고 지금은 전도사가 되어 겸허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다.
정치에 눈뜸
일찌기 일본유학을 했을 정도로 고학력자인 나의 아버님은 명치대 법대를 졸업했음에도 고시를 볼 자격조차 박탈당할 정도로 불운한 세상을 살다가셨다. 그것은 작은아버님 때문이었다. 작은아버님께서 '여순사건'에 참가한 후 빨치산으로 활동하시다가 '실형'을 살았던 것이다.
아버님은 슬하에 두 형제를 두고 '전국운수노조 조합장'을 지내다 장남인 내가 세 살 되던 해 작고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가족은 심한 경제적인 압박 속에서 생활했다. 경제적 여건으로 봐서는 중학교를 다니는 것도 빠듯한 정도였지만 "아버지가 고학력자였으니 자식도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어머님의 묘한 오기 때문에 대학진학까지 하게 되었다.
1980년 나는 전남대학교 2학년이었다. 1학년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바빴고, 서클은 국악반 활동을 하면서 판소리를 공부했다. 10. 26 이후에도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느끼지는 못했으나 2학년이 되면서 학내외의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1980년 4월 하순 '어용교수 퇴진'을 위한 48시간 단식농성에도 가담했으니 단순참여자로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한 셈이었다.
전경들의 과잉진압
5월이 되면서 학내문제로 인한 시위가 계속되자, 나는 혼자였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때는 단과대학별로 돌아가면서 각종 행사와 시위를 주도했다.
14일은 공대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이전의 시위는 학교 안에서만 이루어졌는데 그날은 처음으로 정문 앞까지 진출했다.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전경이 먼저 페퍼포그로 최루탄을 쏘자 열이 받친 학생들은 후퇴하면서 치열하고 끈질긴 투석전을 전개했다. 오랜 시간의 투석전에도 불구하고 정문 돌파는 끝내 실패했다.
결국 교문 양쪽과 담을 넘고 하천을 건너 시내로 나갔다.
이날 있었던 도청 앞에서의 시위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 학내시위중 전투경찰이 교정을 향해 최루탄을 쏘자 분노한 학생들이 시내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4일 가두시위를 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시민의 반응은 아주 냉담했었던 것 같다.
16일 횃불시위가 끝날 무렵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씨가,
"내일은 시위를 하지 말고 어떤 조치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보자. 그러나 혹시 무슨 일이 발생하면 오전 10시 전남대학교로 집결하자"
고 했다.
18일 오전 계엄확대 소식을 듣고 16일의 약속에 따라 10시경에 전남대 정문 앞으로 갔다. 2백여 명의 학생들이 정문 앞 다리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정문에는 두 명의 계엄군이 보초를 섰고 종합운동장에는 텐트가 쳐져있었다. 한참을 다리 근처에서 웅성거리던 학생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질렀다. 그러자 본부 스피커에서 "다리에 있는 학생들에게 알린다. 즉시 귀가하라"는 방송이 나왔고 학생들은 "이 버릇없는 자식아, 누구한테 반말이냐"며 응수했다. 잠시 후 경어를 써서 다시 경고방송을 했지만 학생들이 돌아가지 않자 다시 반말로 "강제 해산 시킨다"는 경고를 했다. 그 말을 듣고 흥분한 학생들이 돌을 집어던지자 그때까지 끄떡도 않고 서 있던 군인들이 갑자기 몽둥이를 빼들고 달려왔다. 우리는 순식간에 흩어졌다. 나는 주변의 가정집으로 도망갔다.
잠잠해 진 후 나와보니 "미처 도망가지 못한 학생 2명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수 없이 맞았다"며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나는 총을 메고 있는 군인들을 보니 꼭 발포를 할 것 같아 두려웠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이 웬지 무서웠다. 그곳에서 밀고 밀리기를 수 차례 반복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여러분 여기에서 승산 없는 싸움을 계속 할 것이 아니라 도청으로 갑시다"고 말해 모두 동의했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차도로 걸어갔다. 일요일이라 구경 나온 시민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온 시가지가 막힐 지경이었다. 우리가 '관광호텔' 옆에 있는 구코스코슈퍼 앞 길에 도착했을 때는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도청 앞에는 페퍼포그를 앞세운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 맨 앞줄에 전경과 10미터 정도 사이를 두고 서 있었다. '흔들리지 않게', '내게 강 같은 평화' 등의 노래를 부르며 구호를 외치던 중 누군가의 제안으로 연좌농성을 했다. 앞에 있던 전경들이 페퍼포그차를 앞세우고 서서히 접근해 왔으나 전경들의 과잉진압을 당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방비상태로 계속 구호를 외쳤다. 그러는 사이 어느 틈에 뒤쪽에서도 전경들이 밀려왔다. 우리들 양옆을 시민들, 앞 뒤로는 전경이 둘러싸고 있었다.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으나 주동자도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뭉친 우리들은 계속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우리와 약 3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멈춘 전경들이 페퍼포그를 발사했다. 도망가는 학생들을 쫓아온 전경들의 무차별 구타와 연행이 시작되었다. 나는 우체국 쪽으로 도망가다 구경하던 시민들에 걸려 넘어졌다. 내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뒤에서 달려 오던 학생이 내 위로 넘어져 여러 명의 학생이 겹겹히 넘어졌다. 맨 밑에 깔린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처음으로 맡은 독한 최루가스 때문에 고통받는 시민들의 고함소리, 기침소리 등으로 들끓었다. 아마 시민들이 최초로 경악을 금치 못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넘어져 있는 우리를 향해 다가온 전경들이 맨 위에 있는 학생부터 때리면서 연행해 갔다. 내 위로 두 명쯤의 학생이 있을 때 나는 쏜살같이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단숨에 공원까지 달려가서 다행히 붙잡히지 않았다. 그때 관광호텔 부근에서 아마 굉장히 많은 학생이 전경들에 의해 연행되었을 것이다.
도망온 10여 명의 학생과 다시 공원 앞에서 대열을 정비하여 충장로, 금남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4시간 정도를 그렇게 다니면서 본 시민의 반응은 두 갈래였다. 일부는 '공부하기 싫으니까 저렇게 다닌다'며 빈축했고, 또 일부는 '박수를 치며 호응'하는 양분된 모습이었다. 그때는 별로 투석을 하지 않았고 전경도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를 저지만 했을 뿐 학생을 연행하지는 않았다. 오전부터 걸어다니며 시위에 참여했으므로 배도 고프고 무척 피곤하여 3시쯤 집으로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광주에서 그렇게 엄청난 일이 발생하리란 생각은 꿈에도 못 하고 적당히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공수의 만행을 전해 듣다
집에 있는데 저녁부터 "공수들이 시내로 나와 데모하는 학생을 죽였다.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치자 눈알이 빠져나왔다. 양동 복개상가에서 공수들에 의해 할아버지와 어린이가 죽었다" 등의 소문이 꼬리를 물고 전해졌다. 그같은 소문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치가 떨렸다.
19일 낮에 집에 있는데 공수들이 풍향동을 가택 수색하여 청년, 학생을 검거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나는 승규집으로 가서 그곳에 있던 현철(송정리가 집인데 가지 못함)과 함께 전망대 밑에 사는 친구집으로 피신하여 있었다. 그러나 그곳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잘드는 칼'을 빌려 차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 셋이서 밤을 지새우려는데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자 추워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산을 내려오기는 했으나 아직도 남아 있는 검거에 대한 공포 때문에 각자 집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친구가 아는 집으로 갔다. 그날 밤을 그곳에서 보냈다.
20일 꼼짝 않고 그 집에 숨어있는데 한신대 다닌다는 학생이 와서 "공수들이 사람을 죽였다. 어떤 할아버지께서 아들과 손자가 시내에서 죽었다며 넋을 잃고 있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시내상황에 관해 물었더니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전개되고 있다고 했다. "우리도 이렇게 숨어 있을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시민들과 힘을 합쳐 공수를 광주에서 몰아내자"고 결의하고 산수동오거리로 나갔다.
무장한 시민들
거리에 몇몇 시민이 있었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어떤 아저씨가 준 소주를 마시고 승규는 몇몇 시민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현철은 노래를 선창하고, 나는 시민의 동참을 호소하고 다녔다. 점차 시민의 수가 불어나자 육성으로는 통제가 힘들 것 같아 산수동 사무소로 가서 "마이크를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는 등의 악담을 퍼붓고 나와 계속 선동을 했다. 나는 '칼'을 들고 다니면서 "시민 여러분! 동참합시다. 우리들의 형제자매가 공수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고 생각나는 대로 외치고 다녔다. 약 1천여 명의 시민이 각자 가지고 나온 파이프, 몽둥이 등을 휘둘러 유리창, 전화박스 등을 깨버리면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향해 갔다.
우리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당도했을 때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나는 그때부터 이미 지휘권을 상실했다. 계획없이 광주역을 향해 갔다. 시위군중은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광주역으로 가는 길에 있었고, 공수들은 광주역을 등지고 서 있었다. 공수들은 거의 나이가 꽤 든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악을 쓰면서 달려가 돌을 던지면 공수들은 최루탄을 쏘았다. 최루탄을 몇 발만 쏘아도 "우"하고 밀던 시위대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되풀이했다. 그사이 시위대 중 일부가 동양고속버스 몇 대를 몰고 왔다. 그러자 공수들이 발포했다. 주로 예광탄이 공중으로 날아왔고 주변건물 벽에 탄환 박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때 나는 뒤쪽에 있었기 때문에 공수들의 움직임은 몰랐지만 시민들은 한마디로 성난 군중 그 자체였다. 나는 같이 다녔던 친구들과 헤어져서 혼자 시위를 계속하다 MBC방송국 앞으로 갔다. MBC방송국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보고 도청 주위로 갔다.
헬기가 대형 헤드라이드를 비추고 있었다. 도청을 향해 계속 돌을 던졌다. 새벽 4시경 동명로를 거쳐 집으로 가던 길에 장동에서부터 농장다리까지 거적을 깔고 군데군데 시민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왜 여기 있느냐고 묻자 내일 데모를 하기 위해 쉬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다음날 시민군이 무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화적인 시위를 해야지 총을 가지고 같이 싸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23일 도청 앞 마당에 굴러다니던 군복과 전대병원에 있는 시체를 처음으로 봤다. 머리가 깨지고 푸줏간에 있는 고기처럼 축 늘어진 시체를 보자 머리가 돌아버렸다. '놈들을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총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총기를 지급받는 경로를 몰라 집으로 귀가했다가 집에서 어머니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25일 오후 시체를 봤던 기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도저히 집에 주저앉아 있을 수 없어 어머니 몰래 집을 빠져나와 도청으로 갔다. 대학생은 YWCA로 보내졌다.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시민을 살해한 공수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들을 죽여버리겠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무기반입으로 인해 행해진 강도사건이 있다는 말을 듣고 광주시민이 하나 되어 의로운 일을 하고 있는 이 마당에 추악한 짓거리가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그것을 미리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그곳에 모여 있는 대학생 50여 명 중에는 몇 명의 여학생도 있었다.
도청에서 온 어떤 시민이 우리를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다.
"광주가 지금 부랑아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그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라 효율적인 수습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니 대학생과 교체해야 되겠다."
우리는 자정이 되자 비를 맞으며 도청으로 갔다. 2층에 있는 부지사실(?)은 분위기가 몹시 살벌했다. 나는 '수습위'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른 채 어떤 신부의 일장 연설을 들은 후 그곳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승규와 나는 카빈과 실탄을 지급받고 주어진 임무에 따라 도청 정문 앞 보초를 섰다. 그때 학생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주로 정문과 무기고 보초, 시체운반 등의 잡다한 일이었다. 임무를 받은 후 대학생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승규는 낮에 총을 내게 맡긴 후 그를 찾아온 할머니와 함께 가버렸다. 밤이 되자 나는 그곳에 있던 사람에게 "대학생들 모이라더니 시키는 일이 고작 이것이냐"고 항의하자 다시 YWCA로 가라고 했다. 그곳에는 여자들이 모여 대자보를 쓰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관해 까맣게 모른 채 대자보 쓰는 것을 도우며 경계를 섰다.
무기반납 반대
도청에 있던 친구 현철이가 왔다. 그가 오자 나는 머리를 감기위해 잠시 집으로 갔다. 어머니께서 끓여준 보신탕을 먹고 현철이도 먹이려고 YWCA로 가서 집으로 가자고 했다. 현철은 "오늘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하니 집에 가면 안 되겠다"고 했다. 나 혼자 가려다 사람이 너무 없어 안 되겠기에 그냥 그곳에 머물렀다 .
밤에 정상용씨가 왔다. 그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방금 도청에서 수습위의 대책회의가 있었는데 김창길을 비롯한 온건파가 득세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래도 무기를 놓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누군가 큰소리로 "동지의 핏값, 광주시민의 핏값을 저버릴 수 없다. 우리는 절대 무기를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분의 뜻을 알겠다"고 하며 다시 도청으로 가고 우리는 "무기를 절대 놓아서는 안된다"는 결의를 새롭게 했다. 잠시 후 강경파 김종배씨가 와서는 "온건파에게 눌려 평화를 유지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으니 집으로 가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말에 일부는 총을 놓았다. 화가 치밀어오른 나는 큰소리로 "우리가 목숨 걸고 광주를 지키자고 말한 것이 언제인데 벌써 무기를 반납하자고 하느냐. 수습위의 의견은 대다수 시민의 뜻이 분명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따를 수 없다. 우리가 어찌 계엄군과 타협할 수 있겠느냐. 당신이 가서 수습위의 결정을 번복시켜라" 했다. 몇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그는 "알았다" 며 다시 도청으로 갔다. 잠시 후 무전기로 연락이 왔다. "이제 강경파의 의견이 수렴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총을 들었다.
한밤중 공수와의 총격전
자정이 되자 바리케이드를 치고 3, 4명 씩 보초를 서기로 했다. 맨 먼저 보초를 서게 된 나는 1층에 있으면서 시국에 관한 이야기와 농담을 하다보니 재미있어 교대도 하지 않고 3시까지 보초를 섰다.
막 교대하고 잠이 들려는데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빨리 일어나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도청에 있던 현철과 몇 사람이 와서 "돌고개 쪽으로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실탄을 지급했다. 나는 두 클립을 받아 그중 하나는 장전하고 나머지를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한참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자 '누가 장난쳤는갑다' 생각하고 누우려는데 도청에서 LMG 소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렸다. 그러다 30분쯤 지나자 귀청을 찢을 듯이 요란하던 총소리가 그치고 조용해졌다. 나는 '계엄군이 겁주려고 시내로 왔다가 오히려 시민군에게 쫓겨 달아났는갑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내가 있던 YWCA 앞에서도 총소리가 났다. 정신이 번쩍 든 우리도 캄캄한 밖을 향해 총을 쏘며 전쟁을 벌였다. 처음 한 시간 동안은 사방을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응사를 했으나 곧 의욕이 상실되어 버렸다. 아침이 될 때까지 일방적으로 총을 갈긴 계엄군에 의해 시민군 2명이 사망했다. 한 명은 들불야학 출신으로 머리에 M16을 맞았는데 솟구친 피가 내 친구 현철의 옷을 적셨다. 다른 한 명은 옥상에서 총에 맞아 죽었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다. 옥상에 있던 동료가 내게 와서 "사람이 죽었으니 가보자"고 했으나 총알이 날아다니는 상황에서 도저히 갈 수 없었다.
나중에 상무대 헌병대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가 쏜 총에 계엄군 2명이 사망했다고 했다. 그래서 YWCA에 있었던 사람은 대한민국 군인을 죽인 살인자라 하여 더욱 혹독한 문책을 받았다.
사력을 다한 탈출
날이 밝자 나는 2층에서 전일빌딩과 YWCA 사이의 길을 내려다보았다. 공수 3명이 지나가기에 총을 겨눴으나 쏘지는 못했다. 아마 내 가족이 죽었다면 쏘았을 것이다. 약 10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위를 쳐다본 그들이 잽싸게 드럼통 뒤로 숨더니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항복을 하고 싶어도 계속 날아드는 총탄 때문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8시경 2층에 있는데 "총 좀 그만 쏴라!"며 여자가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4시간 동안 계속되던 총성이 일시에 멎었다. 계엄군이 "총 쏘지 않을 테니 손들고 나와"라고 했다. 내 옆에 있던 청년이 "나갈 테니 총 쏘지마라"고 하면서 나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1층에 아가씨 2명이 있었는데, 그중 전남대 여학생이 등에 총을 맞자 옆에 있던 아가씨가 총 쏘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했다.
새벽 내내 얼마나 평정을 갈망했는지……. 2층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나는 그 순간 갈등이 심했다. 손을 들고 나가면 모두 몰살당할 것 같았다. '개죽음 당하느니 탈출을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이던 끝에 손을 들고 내려가다보니 1층에 계엄군의 총구가 보였다. 그것을 보자 다시 마음이 변해 도망가기로 결심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밖을 보니 전일빌딩 사이로 난 길에 마침 계엄군이 없었다. 순간 나는 뛰어내렸다. 사력을 다해 농협 쪽으로 뛰어가다 발각되었다. 계엄군이 "도망간다"고 외치자 벌써 농협 부근에서 탱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조건 담을 넘었다. 그 순간 계엄군이 두 발의 총을 쐈으나 적중시키지 못했고 한 발이 오른쪽 귀를 스쳤는데 그 충격으로 이틀 동안 그 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계속 내 위로 총알이 지나갔다. 빗자루를 들고 총소리가 나기를 기다려 시끄러운 틈을 타서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사무실처럼 보였는데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벽 위로 난 조그만 창을 깨고 간신히 빠져나가보니 담과 담 사이의 조그만 길이었다. 한쪽 담을 넘어보니 농협 앞에 있는 '서울찻집'의 안집이었다. 나는 조그만 방으로 숨어 들었다. 그 집은 할아버지, 할머니, 손녀 셋이서 살고 있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방에 있으면서 라디오를 틀었더니 "너희들은 포위됐다. 손들고 나와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민의 권고자수
10시쯤 되었을 때 내가 왔던 길을 그대로 뒤쫓아온 공수 2명이 내가 숨어 있는 집으로 왔다. 총을 들고 얼룩무늬 옷을 입고 철모에 흰 띠를 두른 차림으로 마당까지 와서는 다행히 큰방으로 갔다. "이 집에 혹시 폭도 한 명이 오지 않았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장농 안으로 숨었다. 약 한 시간쯤 지나자 그들은 돌아갔다.
공수들이 가고 난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에게 자수를 권했다. 밥도 굶으면서 하루를 그곳에 숨어 있으려니 나 역시 무척 괴로웠다. 원래 마음이 약한 나는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못 하는 성미인데 그분들에게 고통과 불안을 안겨주면서까지 계속 버티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분들이 계속해서 자수를 권유하자, 다음날 나는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자수를 권하는 할아버지를 뿌리치고 가려는데 순경 한 명이 와서 '김한중'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경찰서로 가자고 했다. 주인 할아버지께서 나한테는 숨기고 자수한 것처럼 경찰서에 연락을 했던 것이다.
광주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경찰의 일부는 외면하는 눈치였고 일부는 총으로 쏴 죽여버리라고 했다. 그날 아주 간단한 조사만 받고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서장 면담을 할 때 "YWCA 경비를 섰던 사람들의 명단이 있느냐"고 하자 "그렇다" 했더니 계엄사로 넘겨야 되겠다고 했다. "당신들 선에서 해결해 달라"고 애원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 그곳에서 집에다 연락을 하고 CAC(전투교육사 령부)로 이감되었다.
상무대 영창에는 몰살되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나는 시위에 휩쓸려 다니던 단순가담자로서 우연히 총을 들고 다니다 자수한 것으로 정리되어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적 적은 고문을 당했다. 1차 조사는 합수부에서 받았는데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 상사가 '볼기'를 얼마나 많이 때리던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많이 맞았다. 정말 무식하게 때렸다. 2차 조사는 505보안대에서 사복경찰에게 받았다.
그곳에서 130일을 살다 10월 6일 석방되었다. 더 빨리 나올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서류가 잘못되어 오랫동안 살았다.
영창내의 비인간적 처우
영창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싶지는 않고 내가 느꼈던 가장 큰 고통과 변화에 대해서만 간략히 서술하고 싶다. 그곳에서 나는 인생관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 도움이라면 도움이라 하겠다. 처음에는 잡혀온 좌절감으로 사흘간 굶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너무 적은 식사량에 허덕이며 밥벌레가 되었다. 나중에는 배고픔과 설사, 장티푸스에 시달리면서도 계속 '정좌' 하고 있었던 것이 원인이 되어 건강이 악화되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신경통과 무기력감에 시달리고 있다.
인간성을 말살시킬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더운 날 비좁은 방에서 장기간 소량의 식사를 지급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로 그때 하게 되었다. 놈들이 우리를 이간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그렇게 했는지 몇 놈의 농간에 의해 중간에서 착취하고 소량의 식사만을 지급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쉬운 말로 무식한 휴머니스트로서 그곳까지 가게 되었지만 평소 유명하신 분이나 투사들 사이에서도 풍족하지 못한 식사량으로 인해 위화감이 조성되는 것을 보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천성적인 아부근성을 보이던 몇 명의 지도자를 보면서 인간성에 대한 환멸을 느꼈고 '우리가 어떻게 저들을 믿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창생활을 하는 동안 처음 한 달간은 앞으로 전개될 나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심적 고통이 컸고 그후로는 배고픔으로 인한 영창내의 인간성 상실의 모습을 보고 좌절감에 허덕였다.
예수와 만남
지식인의 속성은 참 이상했다. 평소 나처럼 책을 멀리 했던 사람도 두 달 이상 활자를 접하지 못 하자 미칠 지경이었다. 그 열악한 상황에서 누가 밥 한 그릇과 책을 주면 당연히 책을 선택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약성서 공동번역이라는 책 한 권이 들어왔다. 운좋게도 내가 제일 먼저 읽을 수 있었다. 읽을 거리가 있다는 즐거움으로 하루 만에 다 보았다. 그것이 내가 예수와 만나게 된 첫 계기였고, 그 후부터 내 생각은 예수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경책을 읽은 후 좀더 기쁜 마음으로 영창생활을 할 수 있었다.
석방된 후 다음 학기에 복학하여 2, 3, 4학년을 판소리에 미쳐 다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졸업 후 진로문제에 대해 고민하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지금은 무진교회 전도사로 일하고 있다.
5·18의 역사적인 의의는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민중들의 힘을 표출하는 역사적인 사건은 끊임없이 발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5·18은 세계사적으로 평가해도 큰 의의가 있고 자랑스런 '민중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5·18은 내인생의 진로를 바꾼 계기가 되었던만큼 나에게는 남다른 커다란 의미가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5·18을 미화시키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인 사건은 사실 그대로 드러내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