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 발발 28주년이 다가왔다. 근 30년 동안 이 땅의 시인들은 ‘사태’에서 ‘항쟁’으로, 또 ‘민주화운동’으로 용어가 바뀌어 가는 동안 ‘80년 광주’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형상화했던 것일까.
20년 가까이 독재 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 대통령은 총애하던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서거하였다. 대학생들은 당연히 민주주의가 실현될 줄 알았는데 반년이 지나도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3월 개강 이후 대학생들은 연일 집회를 가지면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일정을 발표하라고 요구하였고, 전두환 장군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을 요청하였다. 하극상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장군은 대학생들의 반대를 어떻게 봉쇄할까 연구를 거듭하고 있던 차 5월이 왔다.
서울역 앞 대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1980년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표하고 강경진압에 나선다. 우리가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지 본때를 보여줌으로써 집권의 명분을 얻자는 의도에서였다. 특히 5월 18일 광주에서의 학생 데모 진압은 공수부대를 동원, 사상자가 날 만큼 무자비하게 전개되어 시민과 학생들은 그 다음날 목숨을 걸고 봉기 대열에 나선다.
이날부터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개시, 사상자가 속출한다. 시민들도 이에 맞서 자위적인 무장을 하여 ‘시민군’이 된다. 현대사의 자랑이며 수치요, 4.19혁명에 이은 또 하나의 학살극이며 유사 이래 초유의 ‘해방구 선언’이기도 한 광주민주화운동이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ㅡ김남주, 「학살 1」부분
김지하와 김남주, 그리고 박노해는 10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던 시인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었더라면 그들이 그런 고생을 했을 리 없다. 투옥 이전의 김지하와 박노해의 시, 그리고 옥중에서 쓴 김남주의 시는 대다수 거칠기 짝이 없는데, 감미로운 서정의 목소리를 그들이라고 왜 내고 싶지 않았을까. 그들만이 아니라 ‘민중문학권 시인’으로 일컬어진 수많은 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몇 년씩 옥고를 치르고, 수배생활을 하고, 모처에 끌려가 매를 맞고, 거짓 진술서를 쓰고, 벗들과 더불어 폭음도 하고…….
시인이 술과 시로써밖에 울분을 터뜨릴 수 없는 시절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해방공간, 전쟁 수행기, 전후의 복구기를 거쳐야 했고, 제1공화국 시대에서 제6공화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길었다. 아마도 시절이 하 수상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시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시대를 반영한 대부분의 시는 시대적 소명을 다한 뒤 문학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시가 상황과 전혀 무관한 자리에서 독야청청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시적인 형상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분의 토로에 그치거나, 정치적 목적에만 매달린 시들을 쓰게끔 한 것은 바로 어두운 한국 현대사였다.
이제 풀꽃이 산천에 돋아나
긴 침묵의 시절은 지나간다
그 사람 죽은 넋은 피젖 흘리면서
황사바람 노을 지는 오월로 떠나기 전에
먼먼 이 길가에 진달래 피면
…(중략)…
지금은 그 사람 죽은 넋 따라가면서
한반도에 돋아난 꽃잎에 얼굴 묻자
ㅡ하종오, 「사월에는」부분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지만 정부수립 이후 민주의의가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었다. 1960년 4월에 200명에 가까운 학생과 시민이 목숨을 바쳐 이룩한 민주주의는 한 명 독재자의 집권 때문에 20년 동안 침묵을 지켜야 했다. 그 독재자가 죽고 난 뒤에 겨우 고개를 내민 민주주의의 싹이 불의의 무리에 의해 뿌리까지 뽑히게 되었으니 하종오 시인은 이 끔찍한 사실 앞에 목이 메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20일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이 투쟁의 선봉에 나서면서 무장항쟁으로 발전하고, 21일에는 인근지역 농민들도 가세한다. 그날의 사망자 중에는 중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겨우 10대 초반이었을 소년이 어찌하여 총을 들어야 했던 것일까.
역사여
1980년 5월 21일
광주 도청 앞에서 전사한 한 아이를 기억하라.
도청 앞 광장에 피어난
피의 철쭉을 기억하라.
우금치 고개 너머로 내디딘
죽음의 첫 발자국을 기억하라.
ㅡ김진경, 「광주 해방을 노래함」부분
22일에는 시민들이 공수부대를 몰아내고 광주시내를 장악하여 해방구를 만든 기쁨을 누린다. 하지만 해방의 날은 불과 5일이었다. 광주시민은 불안감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이 5일을 얻었기에 끔찍한 보복을 당한다. 계엄군이 27일 새벽 0시를 기해 엄청난 병력을 동원,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편 것이다. 시민들의 마지막 결사항전의 장이었던 도청에서 민중운동가 윤상원 등이 장렬하게 전사한다.
나, 불화살 한 촉으로 저, 허공으로,
날아가는 동안도 온몸, 타지면서 날아,
날아가네, 날아가, 이 세상,
어느 들에 다시 떨어져,
나, 윤상원이, 글고, 자네, 자네,
우리, 들불로 번지세,
우리 번개 치세,
우리, 다시 하세, 다시 살세,
ㅡ황지우, 「윤상원」부분
항쟁의 불길은 27일로 완전히 잡힌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수많은 시민이 죽고 행방불명되었지만 80년대 내내 전개될 민주화운동의 들불은 그때 비로소 붙은 것이었다. 문제는 그때의 진상이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는 데에 있다.
계엄사령부는 1980년 5월 31일, ‘광주사태’의 사망자 수가 170명, 부상자 수가 380명이라고 축소 발표함과 동시에 김대중 씨가 항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책임을 전가하는 후안무치한 발표를 한다. 신군부의 역사에 대한 모독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공포정치의 서막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제압한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이 집권 초기에 구악 일소와 재건 등을 부르짖었던 것을 흉내 내어 이 사회의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면서 ‘사회 정화’를 부르짖는다. 신군부는 그 첫 조치로 초법적인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가동하여 6월 17일, 부정축재와 국가기강 문란 혐의로 329명을 수배한다. 7월 15일에는 3급 이하 공무원 4760명을, 7월 22일에는 정부 산하 127개 기관의 1819명을 뇌물수수혐의로 몰아 강제로 퇴직시킨다.
7월 31일에는 정치인 37명을 내란혐의로 기소하고 9월 17일에는 김대중 씨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8월 15일에는 사회악사범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범법행위의 여부를 제대로 따지지도 않고 지역별로 인원을 할당, 1만 9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군부대에 집어넣어 가혹하기 짝이 없는 순화교육을 시킨다. 순화교육 대상자로 지목되어 삼청교육대에 잡혀 들어간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군사훈련을 받고 체벌을 당하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해 사망자와 자살자가 속출한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인간이고자
일어서 울부짖던 사람들은
무자비한 구타 속에 의무실로 실려가고
장파열 뇌진탕 질식사로
하나 둘 죽어 나가
뜬눈으로 가슴 타는 초췌한 여인 앞에
돈 많이 벌어올 아빠를 기다리는 초롱한 아가 앞에
360만원짜리 재 한 상자로 던져진다
ㅡ박노해, 「삼청교육대 1」부분
이런 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국보위는 국민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8월 19일을 기해 전국 2597개의 출판사 중 617개를 등록 취소한다. 바로 그 8일 후에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은 ‘언론사 통폐합’이라는 20세기 초유의 분서갱유를 단행한다. 서울경제신문 등 8개 신문사와 시사통신 등 4개 통신사의 간판을 내리게 하고 동아방송사와 동양방송사의 방송을 중단시킨다.
이런 조치를 취한 이유는 이제부터 국민 중 누구라도 제5공화국 정권에 비판을 가하면 그 사람은 물론 그 말을 전한 방송사, 신문사, 출판사까지 즉시 엄벌에 처하겠다는 서슬 푸른 협박 조치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인들은 침묵을 지키지 않고 이에 대항한다. 80년대 초의 해체시는 억압 일변도로 진행되는 정치상황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정신, 바로 풍자의 방법이 낳은 교묘한 대응책이었다.
이 좆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 차렷, 헤쳐모엿!
ㅡ박남철, 「독자놈들 길들이기」부분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
파리는 파리 목숨입니다//
이제 울음소리도 없습니다
ㅡ황지우, 「에프킬라를 뿌리며」부분
오랜 군사문화에 젖어 수동적으로밖에 대응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시인은 이런 우스꽝스런 방법을 동원하여 반성적인 사유와 부단한 대결의식을 촉구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서정시 창작 기법으로는 체제의 합리화를 도와주기밖에 더하겠냐는 뼈아픈 자각에서 나온 실험이었기에 이들 시인이 행한 전통적인 담론 체계에 대한 파괴 양상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해체시가 보여준 충격은 1982년 3월 18일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충격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폭력에 의존한 것은 문제가 있었지만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군의 자세를 봐도 그렇고, 새로운 한미관계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아메리카의 핵우산 아래
원치도 않는 메이드 인 유. 에스. 에이.
위대한 아메리카의 핵우산 아래
이 땅의 운명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싸구려 코리아의 비닐우산이야
바람 불면 뒤집히기 십상인걸
ㅡ송제홍, 「아메리카의 핵우산 아래」부분
6.25전쟁 이후 이 땅에 주둔해온 미군은 시혜를 베푸는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도 국내법의 적용을 전혀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군이 취한 애매한 태도는 많은 진보적 지식인과 대학생들의 분노를 샀다. 분노는 행동으로 이어져 1982년 3월 18일, 김현장과 문부식 등은 부산미문화원에 불을 지르고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살포하여 사회일각의 반미감정에도 불을 지른다. 3년 뒤인 1985년 5월 23일에는 서울미문화원에 73명의 대학생이 들어가 농성을 한다. 72시간의 농성을 풀고 자진 해산하며 경찰에 연행되는 학생들의 머리띠에는 ‘독재 타도’가 씌어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설적 형상화 작업은 ‘5.18 20주년 기념 소설집’인 『밤꽃』으로 정리된 바도 있지만 수많은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운동의 과정을 총체적으로 담은 임철우의 5권짜리 소설 『봄날』이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시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 외에도 실로 많은 시인에 의해 다양한 형상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유월, 그것은 우리 운명의 시작이었다』(화남)와 『꿈, 어떤 맑은 날』(이룸)은 모두 ‘5.18 20주년 기념 시선집’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나온 시집이다. 광주민주화운동 28주년을 맞아 운동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한 고찰이 활발히 전개되기를 바란다.
첫댓글 이승하 님,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오월의 문학적 형상화는 이곳 작가들의 영원한 과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오월 정신의 계승이 예술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면서 계속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