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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5-4 고향땅 김제와룡을 걷는일 2만5만보
자유인 조동화는 푸른 5월의 산야에서 익산 모현동을 출발 목천포를 거쳐 내고향 김제 와룡땅을 걷는일 2만5천보를 걷고오다.
나는 오늘 쉬엄 쉬엄 느바기처럼 목천포의 만경강을 구경하고, 내고향 김제 와룡땅의 산과 들녘을 걸으며, 길가의 꽃도 보고 산의 나무도 보고 소박하고 단순한 걷기운동을 하였으며, 이런 추억 저런추억이 깃든 고향의 향수를 느끼며, 두발만능자가용으로 도보 2만5천보의 수확을 이루었으니 기분이 좋아 감개무량하고 행복하면 되얐지요.
인간은 태초에 두발로 걸으며 진화해 왔으며, 가장 간편한 운동요법인 걷기운동으로 몸의 독소를 땀으로 배설하자.
히포크라테스는 ‘걷는 것은 인간에게 최고의 보약’이라고 말했다.
걷자! 또 걷자. 틈나면 걷자.
오늘도 조동화는 걷는일로 천연보약 먹어 몸이 가뿐하구먼.
내 두발만능자가용이 쓸만하여 걷는일을 할수 있어 감사를 드리는 바이여.
내가 이리중학시절 토요일이면 학교수업이 일찍 끝나더라도 열차가 오후 늦게 있기에 동네 선후배와 걸어서 와룡까지 왔던길을, 수십년이 흐른 오늘 걸어서 와룡까지 오며, 옛날일을 떠올려 보았다.
곰다리를 지나며 와룡마을로 바로 갈까하다가, 용산다리로 가는 용암천 개울에 길이 잘 나있어 용선다리로 향하였다.
용산다리로 향하여 걷는일을 하면서, 문득 내아우 진곤이 생각이 나 눈물을 흠치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선하고 착했던 내 냇째아우 진곤이는 이리고등학교를 졸업후, 꿈도 펼치지 못하고, 이세상에 없으니 눈물이 앞을 가로 막아 망각의 세월이 아쉽구나.
하늘나라에서는 꿈과 희망을 찾아 행복하그나.
내고향 김제와룡!
김제 와룡땅은 산세가 좋은지 물이 좋은지 제법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였지요.
고향의 작은산 와룡산부근을 걷는데 길을 새로 내고 새로 단장된 봉분1구가 눈에 들어와 직접 가보니, 비석과 상석을 설치하여 유명인사의 묘역임을 확인할수 있었다.
묘비명에는 1931.10.16. 김제 와룡에서 태어나 2021.10.15. 90세를 일기로 작고했으며, 최배달(일본에서 극진공수도창립)의 아우 최영정이며, 대한민국 최고의 골프학자로 해방후 용지면장을 지내셨던 최승현(일제때 용지면장)의 다섯째 아들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추억이 깃든땅 와룡땅은 언제나 어머님의 품안같이 따뜻하고 편안한 곳이지요.
호남선 기차길 옆 내고향 옛집에서, 내가 결혼하여 신혼때 교통이 불편한 와룡에서 익산까지(약12km) 출퇴근을 하였는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였지.
호남선 와룡역은 작은 간이역으로 하루에 열차가 완행열차만 3-4개열차만 정차하였다.
버스도 없던 그시절 교통수단은 오직 열차만 있으니 신혼부부의 애환을 상상해 봅시다.
기아자전거를 사서 울틍불틍한 도로를 출퇴근을 하였던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구먼.
그러고 자전거를 통근차 객차에 싣고 집에 가려 하는데 차장하고 싸우던 일....
하기사 차장도 자기임무가 있으니 그랬겠지.
우리집에서 50여미터 떨어진 호남선 철길은 기차가 매일 수십차례 달린다.
내가 신혼시절 익산기관차에 근무하며, 호남선 철길을 지나는 1201 화물열차에 승무시 기관조사 조동화의 편리를 위하여 기관사님은 잠시 나의집 앞 철길에 기차를 정차시키면, 아내는 도시락을 기관차로 가지고 오던 추억이 있었다.
자연이 약동하는 푸른 5월에 고향땅을 걷는일 어린시절 선후배 동무들과 산천도 걷고 삐비도 뽑아먹고 뒷동산 뛰놀던 추억 그리워라.
5월을 신록의 계절이라 했던가!
싱그러운 5월에 내고향 김제 와룡땅의 대지를 걷고 걸으며, 자연에 감사하고, 세상의 잡념을 뛰어넘자.
조동화의 벗님들!
자연이 약동하는 5월에 가정의 행복과 건승을 기원드립니다.
즐겁고 행복한 나날 꿈꾸시기를.......
☛걷기일 시간 및 거리 : 9:30-17:00(7:30) 도보2만5천보
☛도보코스 : 모현동-목천포-유강리-수룡구지-부용-월현대-사산리-죽신리-명당리-평고-곰다리-용산다리-와룡-산정-와룡산-평고-뻐스귀로
<죽마고우 황한용 밭을 지나는 중, 한용친구가 밭에서 일을 하며 사진을 한컷 눌러주다.>
☛자유인 조동화 오늘의 행복이야기
자유인 조동화의 오늘의 목표는 신록의 계절 5월에 내고향 김제 와룡땅을 모현동에서 출발, 만경강을 거쳐 도보로 걷는일을 하면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일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자기고향을 어머님의 품안같이 여기며 사랑하기에, 가슴에 담고 고향의 향수를 그리며 살아가나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바쁜일상으로 고향을 찾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나, 한국철도공사를 퇴직한 조동화는 익산에 거주하면서 늘 고향의 향수 냄세를 맡으며 내고향 김제 와룡을 찾는다.
김제와룡에는 내 조상의 뿌리가 있는곳이다.
인생의 삶의 행복이 무엇인가?
자유인의 신조는 “평범한 일상속에서 행복을 느끼자”입니다.
내고향 김제와룡땅을 아무 때나 찾아갈수 있는 평범한 마음과 실천이 나의 평범한 일상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생일까?
최선을 다해 사는 것 이라고 말하겠다.
무수히 많은 인생의 정답중에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더 좋고 명쾌한 정답은 없다.
최선을 다하며 살자.
<월현대마을을 지나는 중 나의 종친이며 전두환 시절 국회의원을 했던 조상래종친집을 답사하였다. 조상래종친님은 나의 6세손(조의 충청병마사)의 후손이시다. 조상래종친님은 사업을 하여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다. 조상래종친님은 건강이 좋지 못하시다 한다.>
<사산마을은 나의 처외갓집 마을이라 감회가 깊은곳이다.>
<내가 다니던 용지국민학교의 모습이여. 그시절 아람들이 은행나무 몇 구루에서 황새가 집을 짓고 수십마리가 살았었는데 은행나무가 고목이 되여 썩어 밑둥글만 남아버려 황새가 떠나가 버렸구먼>
<나의 조상들이 묻혀 있는 봉분과 납골묘인데 5월이 되여 잡초가 무성하구나. 자주 와서 잡초를 낫으로 베어내야 되겠다.>
김제 용지 와룡산 고 최영정묘지 기행문
내고향 김제 와룡땅을 걷고 걸으며 고향마을의 작은산 와룡산을 지나는중, 잘 단장된 묘지를 발견하고 확인해 보았는데, 그 묘지의 주인은 해방후 용지면장을 지내셨던 최승현의 다섯째 아들 최영정의 묘였다.
최영정의 비문에는 공적과 생몰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골프학자 최영정은 1931년10월16일 용지면와룡리에서 고 최승현의 5남1녀중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주고를 거쳐 전북대, 대학원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산배달(최영의)동생답게 유도3단의 실력으로 씨름대회를 휩쓸었으며 전국응변대회에서도 우승했다.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했고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호는 다산으로 1959년 조선일보 수습기자로 입사한뒤 1967년부터 골프기자1호로 활약했다.
체육부장 공무국장 사업국장을 지낸뒤 한국신문협회사무국장 (주)한국신문잉크대표로 재직하면서 골프의 매너와 에티켓, 역사와 상식, 유머에 관한 칼럼을 아흔살이 넘도록 여러 골프배체에 실었다.
19홀의 세미나, 골프왕국의 절대법칙등 스무권이 넘는저서와 번역서를 출간한 대한민국 최고의 골프학자였다.
2021년10월15일 오후7시 숙환으로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부인 박정순과의 사이에 미나 혜련 연수 승욱을 두었다.
2021년12월12일 아들 승욱세움
최영정의 아버지 최승현의 일생
-생몰 : 1892.8.2-1979.3.2. 87세 사망
최승현은 용지면 와룡리에서 태어나 용지국민학교를 설립했으며 와룡역을 유치 했고,
해방전 1935년 용지면장(영세기념비에 세기여 있음),
해방후 용지면장(1946.4.8.-1947.10.2.)을 역임했다.
부인은 김영김씨 부용(1889.-1957)으로 일찍 사별했다.
신문학을 일찍 터득하여 자녀교육에 진력 노력하여 성공시겼다.
자녀는 6남2녀를 두었는데, 일운 영명 영범 영의 영정 영종 딸2이다.
최일운은 최승현의 장남으로 우석대총장을 역임했으며 철학박사학위
1915.3.13.-1995.1.6. 80세 사망
일본 조도전대학 철학 전공
전북대학원장 우석대총장역임
최승현의 3남 최영범의 상석에 세겨진 글
원래 그런것이었다.
최영범다오로(배 강순례 엘리자뱃)
자 : 최경수 요한 부식
딸 : 문자 경희 복음 옥희 문희(수녀)
최배달(본명 최영의)은 최승현의 넷째아들이다
최배달의 고향은 고향은 전북 김제 용지면 와룡리,
16세 혈혈단신 도일, 극진 가라테(極眞空手) 창시(1923∼1994) 71세로 작고했다.
최배달의 꿈은 고향에 무엇인가 남기고 싶었으나 일찍 작고하는 관계로 무산되여 아쉽다.
조동화의 최영범가족회고
조동화는 나의집에서 30여미터 떨어진 곳에 최영범선생님의 집이고 우리부모님과 가까이 지냈기때문에 집안사정을 잘 알수 있었다.
최영범의 상석에 세겨진 글
묘비명 : “원래 그런것이었다”
최영범다오로(배 강순례 엘리자뱃)
자 : 최경수 요한 부식
딸 : 문자 경희 복음 옥희 문희(수녀)
고 최영범은 최승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용지 와룡 고향에 살면서 아버지 최승현을 모시었으며 집안의 모든일을 도 맡아 했다.
위 형 최일운은 전북대 교수와 우석대 학장을 역임했다.
일본에서 극진가라데를 창립한 사람이 최승현의 넷째아들이다.
최영범은 고향을 지키며 부모님을 공양하며 자식들 제대로 학교도 못 보내고 고향을 지키며 어렵게 살았다.
작년10월 와룡산 선영에 묻힌 최영정은 다섯 번째 형제로 조선일보간부와 언론계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하고, 시골에 어렵게 사시었던 최영범 형님과 죽어서는 나란히 사이좋게 묻히여 있다.
대산배달(한국명 최영의)이야기
대산배달 최영의!
나의집에서 50여m 떨어진곳에 대산배달 최영의가 태어나서 자란곳이지요
그는 고향어른들로부터 그의 소년시절 말듣기로는 용지면 와룡의 작은산 와룡산에 올라가 불량배 부슷하게 주먹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있지요.
최영의는 유복한 가정으로 아버지가 용지면장을 했으며, 최승현과 김부영의 6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지요.
최영의는 내가 국민학교 5-6학년 시절에 그의 집을 그의 아내와 방문하여 감회어린 표정으로 고향사람들한테 감동의 말을 하는 것을 보았제요.
동네애들 모두가 보았제요.
육중한 체구였다고 느껴집니다.
그것이 내가 직접 본 대산배달 최영의 모습이여.
아마도 금의환향하여 감회어리게 자기가 태어난곳 고향사람한테 최영의가 고향 찾아 고향어른들 다시만나 빕게 되어 밥갑다 하는 얘기였겠지요.
인간이란 자기고향은 어머님의 품안같은것이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니까?
최영의는 어려서부터 무도에 관심을 가졌다. 1932년 아버지가 세운 김제의 용지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택견·씨름 같은 고유 무술을 알게 되었다. 5년 뒤인 1937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거기서도 계속 무술을 연마했다.
그의 일생에서 큰 전기는 1939년이었다. 그 해 3월, 16세의 소년 최영의는 홀로 군산에서 나가사키로 도일했다. 그 뒤 그의 삶의 주된 무대를 선택한 중대한 결단이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불편한 교통·통신 때문에 무척 멀고 외로웠을 여정을 어린 나이에 홀로 떠났다는 사실은 그의 견고한 마음을 보여준다. 최영의는 야마나시(山梨) 소년항공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서 앞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할 가라테(空手道)를 처음으로 배웠다.
원래 가라대(당수) 소질이 있었나 봅니다.
해방전 1939년 3월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가라데(당수, 唐手)를 창시한 사람입니다.
우선 어쩔수 없이 편의를 위해 일본에 귀화하면서 만든 대산배달(오오야마 마츠다스)에 대해 알아보자. 배달의 의미는 바로 백두산의 민족이란 뜻이다. 귀화하면서 까지 그는 끝까지 그의 정체성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한번도 일본인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오야마 마츠다스라는 일본이름의 어감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면서도 끝까지 최후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신 최배달.
그가 71세에 폐암으로 일찍 세상을 작고하여 자기가 태어난 고향 김제 와룡을 위해 이루고자 했던 업적이 실행되지 못해 아쉬운 생각을 금할수 없지만 그의 고귀한 고향을 사랑했던 가슴속의 정신은 후대의 몫으로 남겨지다.
1994년 6월 26일, 일본 황족과 고위층에게만 특별히 허용되는 아오아마 장례식장에는 한국계 일본인 최배달의 추모 행사가 열렸다. 최배달은 이미 두 달 전에 운명을 달리한 터였다.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한 장례식장에서 문상객들은 하나같이 최배달의 죽음을 ‘일본 최고 영웅의 영면’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날 아오야마 장례식장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로 된 조사가 낭독됐다. “매일 아침 최배달 선생님의 위패와 집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합니다” 일본의 미디어 회사 ‘미디어 8’의 대표 마에다 씨는 최배달 사후 매일 아침 조의를 표했다. 일본 전통의 가라테를 변형한 극진 가라테를 창시해 평생 목숨을 건 치열한 싸움을 계속해온 최배달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외심음 대단했다. 한국명 최영의, 일본명 오오야마 마쓰다스(大山倍達)는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신화가 됐다.
극진공수도의 역사는 실로 김제용지와룡이 고향인 대산배달(한국명 최영의)의 역사이다.
전세계에서 한다하는 싸움꾼을 거의 꺾고 실전 공수도인 극진 가라테를 보급한 재일 한국인이다
극진공수도를 창립한 대산배달(한국명 최영의)이력를 소개하면
1923년 7월 대산배달(大山倍達:최배달, 최영의) 김제용지와룡에서 탄생.
1939년 3월 16세때 일본으로 밀항
1944년 학도병 차출(일본태평양전쟁)
1946년 4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체육학과 입학.
1947년 9월 교토(京都) 마루야마(丸山) 공회당에서의 전국 일본 공수도 선수권에 출전하고 우승.
1948년 4월 생애를 공수에 걸치는 결의를 하고, 입산하여 18개월의 수행을 행한다.
1952년 3월 시카고의 공수 협회로부터 초대받고 도미.11개월에 걸친 전미 연무와 공수의 지도를 행한다.
1954년 4월 도쿄(東京), 메구로시의 노천에 정식으로 대산도장(大山道場)의 간판을 건다.
1954년 4월, 최배달은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가라테 경기장에서 들이대는 카메라 플래시에는 익숙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담아내는 카메라는 처음이었다. 맨손으로 황소의 뿔을 잘라낸다는 그의 괴력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소와 싸운 가라테’를 위해 최배달은 황소와 맞서고 있었다. “신장 175cm, 체중 70kg, 상당히 강한 몸을 가진 일본 가라테의 일인자 오오야마 6단이 700kg이 넘는 황소와 싸워 뿔을 잘라냈습니다” 소의 뿔을 두 동강 내는 광경이 펼쳐지자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흥분에 들떴다. 같은 해 최배달은 황소 47마리와 싸워 4마리를 즉사시키고 나머지 43마리의 뿔을 잘라내 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왜 황소와 싸워야만 했을까? 최배달에게는 더 이상 싸울 ‘사람’이 없었다.
1954년6월 미국을 방문. 시카고에서 소와 격투. 手刀로 소의 뿔을 부러뜨리고 맹우를 쓰러뜨림
1960년 수십여 차례에 걸친 해외 원정을 통해, 드디어 아메리카,유럽등 16개국에 합계 72의 지부가 발족.
1965년 6월 극진 회관총 본부 준공.국제 공수도 연맹 극진 회관을 정식으로 발족.
1969년 9월 제1 회 오픈 토너먼트 전국 일본 공수도 선수권대회를 동경체육관에서 개최.7,000인의 관중을 모은다.
1971.6 미 합중국 본부도장을 뉴욕. 맨하탄에 개설. 뉴욕시장 참석
1972년 10월 당시,황태자였던 스페인의 카르로스 국왕이 내관.명예 삼단을 준다.
1984년 4월 다나카(田中) 가쿠에이(角榮) 전직수상과 대담.
1985년 11월 제 3회 전유럽 공수도 선수권대회 개최 시,스페인,바르셀로나에 사마란치 IOC 회장과 대면 .
1988년 9월 일본의 모든 도도 부현에 극진 회관 조직이 확립.
1988년 12월 사마란치 IOC 회장에게 편지를 보내고,공수,쿵후,태권도 의(것) 올림픽 공개 경기 참가 문제에 관하여 제안.
1991년 5월 몽골에 정식적인 극진 회관 조직 발족.
1994년 4월26일 대산배달(大山倍達) 성노가병원에서 폐암으로 사망 향년71세.
그는 1964년, 실전무예를 근간으로 한 ‘극진회관’을 설립했고 현재까지 그의 제자는 전세계 140개국 2,000만 명에 이른다.
☞최배달 최영의의 생애
1923년7월 27일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에서 최승현(부), 김부영(모)의 6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최승현은 일제시대 당시 용지면 면장을 했으며 지방의 유지였다.
최영의라는 이름보다는 오야마 마스다츠(大山倍達)라는 일본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지만. 1970년대 어린이잡지 ‘새소년’에 연재된 고우영의 ‘대야망’과 1990년대 스포스서울에 연재된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그리고 2004년 개봉된 양윤호 감독의 영화로 잘 알려진 武人이다.
사는일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칠월과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디 꽃 뿐이라 할까...
걷기 운동
걷기는 누구나 어디서든 할수 있는 운동 으로, 인간이 하는 운동 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운동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운동 부족으로 인해 예전보다 체력이 떨어져 있기도 하고 많은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
600개 이상의 근육과 200개의 뼈를 함께 움직이는 온몸 운동이 걷기이다.
걷기는 발바닥을 통해 몸 전체에 수없이 뻗은 신경을 자극한다.
걷기는 다리의 혈액 순환과 물질대사를 활발하게 일으켜 하체의 근육을 단련시켜 준다.
걷기는 노화와 관련된 근육인 긴장근을 지속적으로 자극해 노화예방을 돕는다.
생활속에서 걸음수를 늘려라.
규칙적으로 적당히 걷기만 해도 인체 면역력이 2배는 향상된다.
걷기만 잘 해도 근육이 단련되고 심장과 폐가 건강해진다.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오늘 하루도 어떻게 하면많이 걸을까를 염두에 두고 걸을 일이 생길 때는 절대 비켜가거나 양보하지 마라.
밥보다 좋은 보약이 없듯이 걸음보다 좋은 보약도 없다.
★인생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다 생각해 보듯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흔히들 인생이란
공허한 꿈이라든가
물거품 같고 뜬구름 같다던가
불확실한 항해라던가
죽음을 향한 행진이라던가
꼭두각씨 놀음이라던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인생이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으앙! 하고 울며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과 만나고
형제 친척들과 만나고
남편 아내 자식과 만나고
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러다가 다시 하나 하나 헤어져서
마침내 혼자서 죽어가는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
아득한 과거로부터
인생은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생로병사 희로애락 속을 그렇게 살아왔다.
만날 땐 미리 헤어질 준비를 하고
헤어질 땐 다시 만날 꿈을 안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돌고 도는 우주처럼
인간도 영겁다생을 그렇게 흘러간다.
만남은 깨달음이요 재생이요 창조요 환희이며
헤어짐은 인고요 진통이요 방황이요 기다림인데.
인생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
--마음,마음,마음 중에서--
익산-부용-와룡 걷는일 조동화 인생이야기
나는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며, “인생은 왜 사는가? 조동화는 왜 이세상에 왔는가?”를 나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고 살아왔다.
이세상에 먼저 왔던 선현이나 명사들이 그 해답을 풀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여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하기도 하고, 천주교에 심취하여 신부가 되고, 기독교 목사가 되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왔으나, 아직껏 조동화에게 답을 준 사람은 보질 못했지요.
이런 의문을 갖지 않으면 짐승이나 다를바 없지.
솔직히 조동화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하여 걷고 걷는일을 실천하여 고뢰하고 고민하며 걷는일을 멈추지 않을것이요.
나는 평범한 일상을 걷는일로 생각하며 걷는일이 내인생의 하루의 최고목표로 삼고, 걷고 걸으며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걷는일의 목표 하루 1만보)
뭐 걷는일이 대단하다고 가장 쉬운 걷는일 실천이 중요헌거지.
내나이 비슷한 녀석들 방구석에서 바깥 출입도 하기가 어려운 사람도 있지.
강조 해서 말하면 걷는것보다 더 좋은 천연보약은 없단말일세.
자유인 조동화는 익산에서 내고향 와룡까지 도보로 걷는길은 철도 이정표로 하면 익산에서 부용이 7.4km 부용에서 와룡이 3.2km 총합거리10.6km이나 논드렁 밭두렁 동네길을 지나다 보니 약 20km를 걸어 2만5천보를 걷는일을 하였다.
목천포를 걷는데 노인어르신 10여명이 의자에 앉아 만경강의 경치를 구경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길래 물어보니, 노인주간보호센터(일명 노치원)에서 왔다하며 집에서 쉬는 노인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하였다.
그중에 76세된 여자어르신이 한분 있었는데, 노치원의 편리한 장점을 애기 해 주며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70이 넘으면 노치원에서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프로그램에 따라 재미있게 놀수 있는 노인들의 천국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장수시대에 새파란 나이에 노치원에 가지 않토록 건강관리 잘하여겠네.
노치원에 들러 커피도 한잔 얻어 마시고 대우 받고 왔수다.
부용 월현대에서는 월현대경노당 의자에서 잠깐 쉬는데 노인내외 두분이 들어오길래 조상래총친님 안부를 물어보니 조상래종친님이 처남된다고 하며 친절히 근황을 얘기해주는데, 요즈음 몸이 많이 않좋아 집에만 계신다고 하였다.
조상래 종친님은 전두환시절 돈을 많이 기부하고 국회의원을 하시었다.
조상래종친님과 나의 관계를 얘기하자면 나는 김제조씨 시조할아버지 조연벽의 24세손이며 조상래 종친님은 조연벽 시조할아아버지의 22세손으로, 6세손의 조의 충청병마사의 직속 후손들이다.
조상래종친님은 지역사회에서 사업을 하시며 많은 재산을 일구어낸 사업가이시었다.
지금도 그자식들이 그 재산을 이어받아 익산지역에서 살고 있다.
내고향 와룡을 지나며 밭에서 일을하는 죽마고우 황한용을 만났는데, 눈이 백내장으로 전주에서 수술하였다고 하였다.
나이가 먹으면 노환으로 아픈데가 생기는 것은 자연현상인거여.
나자신의 건강을 위해 투자하고 노력하자.
인간이 사는거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며 먹고 싶은거 먹고 좋은 경치구경하며 친구들 만나고 우정나누고 살면 되야.
나의 산 부근을 지나는 중 홍덕아우를 만나서는 와룡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자수성가한 사람들 20여명이 훌륭이 잘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홍덕아우는 나보다 10년 후배이나 농촌에서 농군으로 살며 노상 햇볕에서 일하다보니 많이 나이가 들어 보였다.
자유인 조동화의 신조는 삶의 여로에서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부질없다” 하면서 그냥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자유인 조동화는 인간의 삶을 영상을 통해 구현해 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삶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이런 문답이 있다. ‘세상의 하고많은 놀랄 일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주변에서 남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은 죽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많이 배우고 학식과 직위가 높다고 오래사는 것도 아니며 행복한 것도 아니고, 재물이 많다고 오래사는것도 아니며 행복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인생이란 하룻밤 이슬과 같다라는 말처럼 오늘하루도 소중히 생각하며 즐거운 삶을 영위해야 하겠다.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사기와 억울한일로 얼룩진 세상만사를 영상을 통해 권력만행의 기록을 더듬어 보자.
조동화의 벗님들!
건강관리 잘하시고 무궁한 행운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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