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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권 97호【기타】『 왜 종교는 여성을 차별하는가? 』 2011.3. | - 편집부 - |
<<대화>> 왜 종교는 여성을 차별하는가? 류상태 : 2004년에 소속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고,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다. 한주영 : <불교여성개발원>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다. 임보라 : <향린교회> 부목사로 일하고 있다. 류상태(이하 류): 오늘 대화의 제목은 ‘종교는 여성을 차별하는가?’가 아닌 ‘왜 종교는 여 성을 차별하는가?’입니다. 종교의 성차별은 이미 객관적으로 드러난 상황이라 전제하고 시작하는 것인데 제목의 문제는 없나요? 혹시 종교는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데…… 라는 문제의식이 있다면 짚어 보겠습니다. 한지영(이하 한): 대다수의 학자들은 불교가 가진 공空사상이나 교리가 원칙적으로 평등 을 기초로 하기에 성을 차별하지 않지만 현실의 교단은 부분적으로 남성과 여성, 비구와 비구니를 차별하고 있습니다. 유마경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당신이 왜 여성의 몸을 하 고 있느냐?”고 하니 “이 몸은 거짓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거기에 무슨 여성성이나 남성성 이 있느냐?”면서 남자의 몸으로 변화해 보여주거든요.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겉모양 자체 는 실체가 없는 것인데 이 실체가 없는 것을 두고 차별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잖 아요. 불교는 성 차별이 없는 평등성을 가지고 있는 종교예요. 하지만 현실의 문제는 또 다르게 보는 거죠. 임보라(이하 임): 제목과 관련해서 저는 종교가 일정 성차별을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요. 기독교에서는 신 앞에서 누구나 하나님의 자식이기에 평등하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예 수 이후, 기독교를 종교로 만드는 여러분들에 의해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논리와 모습 들이 교리화하거나 전통들로 이어져 교회가 조직이나 활동에 있어서 성 차별을 근간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류: 기독교가 성 차별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평등하고 신이 차별하는 것 은 아니며 불교도 현실적으로 차별이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불교의 중심 가르침 자 체가 차별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럼 이제 현실을 낱낱이 짚어갈 필요가 있겠 네요. 중심 가르침은 안 그런데 도대체 왜? 그렇다면 종교의 중심 가르침과 현실 사이에 문제를 만드는 무엇이 있는 거죠. 성 차별의 현실을 종단별로 짚어보면 안 오셨는데 가톨 릭의 경우 여성이 성직자가 될 수 있냐는 문제에서 제도적으로 또한 현실로도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수녀는 성직이 아니라 종교에서 인정하는 여성 수도자를 일컫는 말입니 다. 개신교에서는 허용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성공회는 최근에 여성신부를 배출하였죠. 불교는 아까 말씀하셨던 대로 어떤 차별이 있는지, 성직자 문제와 관련해서 말씀해주시 죠. 한: 불교가 성차별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보는 것 중에 하나가 성직자 문제예요. 이미 2500 년 전에 여성 성직자를 인정했다는 것이 불교의 평등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지만 현 재 비구니 승僧을 인정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베트남, 대만 이 세 군데 밖에 안 돼 요. 그 밖의 나라에서는 여성 성직자를 승僧으로써 인정하지 않아요. 다른 명칭으로 불러 요. 비구만 승僧이라고 해요. 대표적으로 티벳이나 인도를 들 수 있어요. 세계적으로 불 교 여성 공동체에서 핫 이슈가 여성 성직자들을 복원시키는 문제이며 스리랑카나 태국의 경우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류: 여성 성직자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많이 있군요. 한: 가톨릭의 경우 수녀와 신부의 역할이 다르잖아요. 그런 것처럼 다른 나라에서는 여성 수도자가 보조자로 고착화 되어 있어요. 류: 개신교는 어떻습니까? 성직자로 인정하는 교단과 하지 않는 교단이 있고, 인정한다 하더라고 위상에 있어서는 상당히 차이가 많은데요. 어떻습니까? 임: 개신교의 경우 예수의 열두 제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것을 성차별의 근거로 많이 대는 데요. 하지만 예수의 제자를 열두 제자로 고착화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異論들이 다양하게 있습니다. 여성 신학계에서는 예수에게 여성 제자가 있었다는 것을 밝혀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특히 중세를 거치면서 교회 안에서 지도력을 갖고 있던 여성들이 배제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수도원으로 다 들어가게 되고. 남아 있던 분들은 신비주의와 연 결이 되어 결국 마녀 사냥으로 처형되거나 유배되고 결국 몰락하게 되죠. 남성 중심의 기 독교 교리체계를 세워나가는 데 있어서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존재들은 제거해나가는 방 식들로 이루어졌는데 현재 개신교도 문자주의적인 해석에 근거해서 여성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 안수를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목사와 장로가 될 수 없다고 여전히 고집하는 교단 도 있고 여성 성직자를 인정하더라도 의사 결정 구조에서는 배제시키죠. 기본적으로 교단 의 의사 결정 구조에 들어가려면 담임 목사가 되어야 하고 안수 받은 여성 목사들이 있다 하더라도 담임 목사로 청빙을 받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여러 편견에 의해서 청빙받기 어 려운 현실입니다. 류: 제가 알기로는 종교 내에서 남녀 차별이 정말 없다고 느껴지는 데도 있더라고요. 원불 교의 경우 원불교 교무가 2000명 정도인데 여성 교무가 1300명으로 남성 교무들보다 많답 니다. 주요 직책에도 여성 교무들이 많대요. 역사가 길지 않지만 처음부터 교리로 남녀의 권리가 아주 동일하게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개신교도 불교도 문제가 있 는 것 같아요. 개신교는 기독교장로회와 감리교, 예수교장로회 통합 측만 여성성직자를 허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성 성직자의 월급여가 남성 성직자에 비해서 50%, 심지어 는 25% 정도에 지나지 않아요. 또 하나는 임 목사께서 지적하신대로 주요한 직책과 역할 에서는 소외되어 변방에서 일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한지영 국장께서 불교의 경우도 마찬 가지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만 유독 그런 건지, 개신교의 경우 주류 쪽 에 오래 있었던 서구에서도 이런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건지 궁금하고, 뜻밖 에도 불교의 경우에는 오래되고 인정받는 나라에서 오히려 차별이 더 심하다고 하는데 얘 기 나눠보겠습니다. 임: 예를 들어 연합교회라고 불리는 캐나다 연합 교단이 있죠. 많은 개신교 교파들이 같 이 모여서 이뤄진 교단입니다. 작년에 그곳에서 실무를 보고 계신 분과 얘기 나눴을 때 목 사의 수에 있어서 점차 여성목사의 비율이 높아져 간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그 분 의 해석은 개신교 안에서 남성들이 많은 권력을 잡을 수 없는 구조로 가는 것에 대해 반발 하여 다른 일을 찾아 떠나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교단 총회에서 역할을 배분하는 것 에 있어서 성 역할을 부정하고 성차별을 금지한 제도가 완비되어도 여전히 가부장제가 워 낙 뿌리가 깊기 때문에 캐나다 교회가 운영되는 모습이나 교인들이나 갖고 있는 편견들 이 남아있어 안타까웠습니다. ‘사람들의 의식은 쉽게 변화하지 않고 더디구나.’ 류: 불교의 경우에는 그나마 우리나라가 앞서 간다고 봐야할까요? 한: 네. 일단은 지금 이제 비구니 승僧과 비구 승僧 간에 뚜렷이 보이는 어떤 성 역할의 차 별은 없어요. 일반 신도들이 느낄 때 비구 승僧이 할 수 있는 일, 비구니 승僧이 할 수 있 는 일이 다르지 않아요. 비구니 승僧 절에 다니나 비구 승僧 절에 다니나 불편함이 없고 법사法師를 초청할 때도 차별이 없는데 불교의 본산이라 불리는 외국(주로 동 아시아)의 경우는 가부장제가 강하니까 여성들의 위상이 자꾸 위축되는 거죠. 비구니 승려가 사라지 게 된 원인은 외세의 침략에 의해서, 자연 발생적으로 없어지는 경험들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 그것을 복원할 때 비구 승단 같은 경우에는 빨리 복원이 되는데 비구니 승단은 복원 이 안 되는 거예요. 사회적으로 그만큼 여성들의 힘이 약하다보니까요. 그러면 비구들이 자신들의 승단을 회복하고 나서 비구니 승단의 회복을 도와주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죠. 대만이나 베트남이나 우리나라나 모두 대승 불교가 주류잖아요. 대승 불교는 空 사상이 기본적인 교의기 때문에 성 차별뿐만이 아니라 출가자와 재가자의 차별도 없어요. 그렇 기 때문에 조금 더 비구니 승僧들의 교단이 계속 유지되는데 유리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 던 것 같아요. 하지만조선 시대 500년 동안 억불抑佛 정책을 썼기 때문에 불교 자체가 굉 장히 위축되어 있었고 더불어 비구니교단도 위축되어 있었죠. 그런데 구한 말, 근대화되 는 과정에서 위대한 비구 승僧들이 비구니 승僧들을 많이 키웠어요. 그러다 보니 비구니 교단이 비구 교단과 일단 수적으로는 비슷하거든요. 한국 불교사상의 역사를 보면 뚜렷하 게 드러나는 비구니들이 거의 없잖아요. 우리가 기억하는 비구니가 없죠. 그만큼 비구니 들이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지내왔는데 오히려 지금 비구니 교단이 굉장히 활발한 시기 라고 볼 수 있어요. 류: 어떤 종교든 여성 신도들이 굉장히 많죠? 불교나 기독교나 할 것 없이 3분의 2 정도 는 여성분인 것 같아요. 그런데 성직자는 남성들이 많거나 남성 위주로 되어 있는데요. 성 직자를 봉사자로 봐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구성이 내용이 뒤바뀌어 과연 도울 수 있을까요? 신도들은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남성 위주의 성직자 그룹이 과연 여 성이 고통을 겪는 신앙적인 문제, 일상적인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상담을 하거나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임: 여성신도들이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는 문제에 대해 남성 성직자 들과 상담을 할 때 느끼는 공감대가 아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 폭력 피해여성이 그와 관련해 상담을 청해 왔을 때 대부분의 남성 성직자들은 “참아 라.” “인내해라.” 또는 사례를 들면서 결국은 “당신이 용서를 해주는 게 최선의 방법이 다.” 라고 얘기한다든지 “이 시련을 기도하면 극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등등의 얘기입니 다. 그러나 사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다른 말이 필요 없고 손을 한 번 잡아주고 공감이 되 는 대로 같이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극복이 될 텐데,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용서하심과 인 내하심의 교리로 다시 한 번 덧씌운다든지 또는 “양쪽이 다 쌍방의 과실이 있는 것이 아니 냐.” 며 양비론적인 얘기를 하거나, 중립을 가장하여 결국에는 한 쪽의 편을 듭니다. 이런 경우가 사실 허다하게 있습니다. 매우 답답한 현실입니다. 한: 비구니 승僧이 많다고 해도 별로 다르지 않아요. 비구니 승僧들이 스스로를 여성이라 고 느끼지 않아요, 성 의식이 없는 거죠. 중성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공空사상에서 근본적으로 차별이 없고 여성과 남성이 거짓의 모양이고 실제로는 실체가 없는 거라고 하 잖아요. 그런데 공空사상이 성 의식을 왜곡할 때 쓰일 수 있어요. 현실적으로 남성과 여성 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안에 고유한 특성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찾거나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저 차별이 없다고 하는 것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데에 많이 쓰여요. 실제 로 비구니 승僧과 비구 승僧의 차별화된 법문이나 깨달음을 신도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현실적으로 신도들이 비구니 승僧에 대해서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 나요?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은 있죠. 비구니 승僧들이 조금 더 다정다감한 것은 있어요. 하지만 의식적으로 별 차이는 없어요. 그러니까 왜 우리가 여성 지도자들 얘기할 때도 겉 모양이 지도자인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류: 중요한 말씀인 것 같은데 불교의 경우에 겉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냐? 본질은 다 같은 거다. 그런데 그게 참 좋은 가르침인데 역으로 왜곡을 시킨다는 거죠? 그러니까 “겉 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그렇게 얽매이지 마라. 안에 있는 불심은 다 똑같은 거니까.” 그러 면서 차별을 무시하고 고통을 내버려두는. 어찌 보면 종교가 갖고 있는 보편적인 왜곡 현 상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 불자들에게 허위의식을 많이 심어주죠. 여성 불자들 스스로가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 감이 있어요. 왜냐하면 “불교는 굉장히 고차원적인데 페미니즘 따윈… .” 이런 허위의식 을 갖고 있는 거예요.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그렇게 뭐 하고….” 이런 식으로. 그래 서 이번에 ‘불자들의 성, 젠더 의식’에 대해 저희가 조사해 보고 했는데요. 불자들의 의식 이 일반인들에 비해서 상당히 낮게 나타납니다. 류: 어찌 보면 그게 오래된 세뇌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성직자 문제 를 짚고 있는데 이런 구조가 된 게 교단 내에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들이 남성 위주였다 는 것도 있고 세뇌를 받은 것도 있지만 여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정 이 빈약하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예를 들면 개신교의 경우에 여성 성직자가 부임하는 것 을 여자 분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남성 성직자들이 와야 더 권위가 있는 것이 느끼고. 이 런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궁금한데 불교의 경우에도 비구니 승僧 중에 주지를 갖 고 계신 분이 얼마나 되나요? 한: 많죠. 저희는 거의 차별이 없어요. 류: 그렇습니까? 비구니 승僧이 주지 승僧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요. 개신교의 경우는요? 임: 제가 속한 교단의 경우는요. 신학교 다닐 때는 여학생 수가 꽤 많아요. 하지만 점점 여 성의 수가 적어지죠. 목사 안수까지 이르는 여성의 수는 현저하게 줄어요. 저희 교단에는 목사 고시를 패스하면 안수 받기 전에 준목이라는 것을 받게 되요. 준목의 숫자는 엄청나 게 여성들이 많아요. 하지만 어디서 불러줘야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는 것인데 그러지 못 하니까 정체가 있는 거죠. 여성 신도들이 담임 목사로써의 여성 목사를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 쉽지 않은 거죠. 어떨 때는 “여성의 적은 결국 여성이 아니냐?”는 말로 회자되기 도 하는데요. 하지만 저는 여성목회자를 과거에 보지 못했기에, 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 자체를 생경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고, 신도들이 경험을 해보게 되면 다른 형식의 목회 스타일과 목회자 상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그러나 생물학적인 여성이라고 해서 흔히 얘기되는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할 수 없어요. 여성 신도들에게 있어서도 그 분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으로 늘 사람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얘기되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한 여성성을 일깨워주고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심도 있게 나눈다면 스스로가 갖고 있는 편견을 좀 더 바꿔나갈 수 있고 서로 변화 시 킬 수 있는 관계가 되리라고 봅니다. 한: 의식의 문제인 것 같아요. 여성 출가자가 생겨난 과정을 보면 그 당시 부처님의 이모 이며 양육자였던 마하 파르자바티가 샤카족을 데리고 석가모니를 찾아가거든요? 처음에 찾아갔는데 안 된다고 했어요. 다시 갈 땐 스스로 삭발을 해버리고 승복으로 갈아입고 맨 발로 걸어서 갑니다. 그런 여성들의 결단과 용기, 자발적인 요구에 의해서 비구니 승단이 생겨요. 그런 역사성을 지금의 여성 불자들에게도 일깨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부처님이 비구니를 만든 게 아니고 여성들이 요구해서 비구니가 만들어졌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비 구니 승僧들과 지금의 여성 불자들은 차별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기 때문 에 그것이 해결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게 없잖아요. 굳이 내 것을 내줄 필요가 없죠. 여성 불자와 비구니들의 올바른 의식과 용기 있고 결단력 있는 행동들이 결국 교단을 바꿔올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류: 그렇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 한 번 묻고 싶었는데 왜 부처님이 그렇게 막으셨을까 요? 왜 그러셨는지, 부처님도 어떤 시대적인 한계나 그런 것 때문에 의식의 한계가 있었 다고 봐야 되는 건지요? 한: 기존의 성 차별을 고착화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 봐라. 결국은 여성들이 뭔가 부 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부처님도 허락을 안 했던 거다.”라고 이용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 요. 부처님이 거절할 때 아난이 “그러면 여성들은 깨달을 수 없습니까?”라고 얘기하니까 “아니다. 여성들도 수행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이것이 중 요한 메시지라고 보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도 근본적으로 성 차별을 하진 않았다 고 보는 것이지요. 인도는 지금도 카스트제도가 사회 운영의 중심이며 각종의 차별이 많 아요. 다만 당시의 시대적인 환경이나 조건 때문에 주의를 주신 거죠. 특히 부처님을 따르 는 모임이 생겨날 때에는 이교도들로부터 위협도 많이 받았거든요. 교단이 틀이 잡혀 권 위가 있을 때는 여성들도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초창기에는 부처님도 굉장히 핍박을 많 이 받고 어떨 때는 탁발을 못 할 때도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주로 숲 속에서 그냥 노숙을 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위험에 노출되고 교단이 보호해줄 수 있는 역량이 안 된다고 보셨겠죠. 하지만 부처님보다 더 빨리 여성들의 요구가 있었던 걸로 보이고 그래 서 굉장히 망설였지만 수행자가 돼서 깨달음을 얻는데 차별이 없다고 하는 부분에서 확인 하고 허락해주지만 당시의 상황이 여성 출가 수행자 집단이 성장하기에는 굉장히 불안정 하고 어려운 조건이었다고 봅니다. 류: 그랬군요. 이제 기독교에서 예수님은 제가 보기에는 적극적으로 여인들을 배려하셨다 고 보거든요. 특히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약한 자 그 중에 여성이 들어가죠. 특히 소외된 여성을 돌보시는 것이 예수님이 남성이지만 예수님이 갖고 있는 여성성, 또는 모성이라고 도 느끼는데 삶으로는 은근히 보여주신 것 같은데 적극적으로 여성 문제에 대해서 변호 를 하시거나 말씀을 하시거나 여성들에게 지침을 주신 것은 없는 것 같기도 한데요. 임: 예수의 여성성은 당시의 예수가 사용했던 언어에서 사실 많이 드러나서 예수가 많이 깨어있는 것이었죠. 예를 들면 결혼과 이혼과 관련해서 모세의 율법은 여성의 의사를 고 려하지 않고 남자가 싫다고 이혼하고 그 남자는 다시 결혼을 합니다. 예수는 이혼이 남용 되는 것에 대해서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었지요. 또 여성이며 이방인이 딸을 구해 달라고 예수를 찾아갔지만 처음에는 거절을 했지요. 제가 봤을 때는 이 모습이 예수가 갖고 있었 던 사람의 한계, 순간의 한계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여성도 예수께서도 그 한계 를 뛰어넘는 것이죠. 류: 지금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한계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셔도 되는 건지 모 르겠습니다. 어쨌든 신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으면 인간의 한계도 가져 야 인간인 우리들에게 반가운 모습일 겁니다. 이제 일반 신도들에게 미쳐지는 차별이 많 이 있을 것 같아요. 신도들이 겪는 차별은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한: 저희 단체에서 여성신도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것이 있습니다. “성차별을 느끼느 냐?”라는 질문이었는데 절대 다수가 “성차별을 느끼지 못한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래도 성차별을 느낀다면 어떤 부분이냐?”라는 질문에 “여성들에게 반말을 한다. 여성신도 에게만 반말을 한다.”라는 대답을 했고 그다음에 “여성에게만 참으라고 하고 복종하라고 하고 부부관계에 있어 아내의 복종과 순종에 관한 교리를 들었다.”라는 부분에서 성차별 을 느낀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임: 개신교의 경우 주요한 직분에 있어 배제되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고 교회의 각 부서 에서 밑바닥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부서에 는 봉사, 음식 만드는 일이 선교, 심방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선교에 관련된 것들을 전체 적으로 책임을 진다든지 대외적인 것에 대해서는 여성이 배제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봅 니다. 그 다음에 일상에 있어서 개신교도 마찬가지로 젊은 남성목사가 5~60대 권사에게 거의 말을 놓는 식의 경우는 사실 찾기가 쉽습니다. 일상적인 것에 있어서도 제도적인 것과 또 이런 면에 있어서 일상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 개신교에서 몇 년 전에 나왔었던 다 큐멘터리 중에 “슬로밧의 딸들”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서 비춰졌던 가장 인상적인 여 러 모습중 하나가 주일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하는데 남자들은 다 앉아있고, 모든 연령 때 의 여성들은 저 주방에서 식탁까지 일렬로 서가지고 계속 음식을 배달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 그런 식입니다. “그게 왜 성차별이냐?” 라고 말들을 하지만 그것이 진짜 뿌리 깊게 박 혀있는 성차별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류: 이런 얘기가 나오면 저도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젊은 목회자들이 자기 어 머니뻘 되는 분들한테도 말을 쉽게 놓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격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의할 가치가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개인이 조금만 생각하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한: 맞습니다. 그것이 교리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류: 이런 여러 가지 차별현상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이것을 현실적으로 극복을 할 수 있을 까요? 극복방안이라고 할까, 여성신도들이 나서서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인지, 또 여 성 교육자들이 노조라도 만들어야 되는 것인지 어떤 방안들이 없을 까요? 한: 파르자바티 비구니의 예처럼 여성들이 요구를 해야지요.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얘 기를 해야 됩니다. 저희가 이런 조사를 하고 세미나를 하는 이유가 그런 것이거든요. 대부 분은 사실 반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쁘지만 다 그러니까 나만 유독 그럴 수 없으니까 그 냥 지나가거든요. 근데 그랬을 때 “기분 나쁘다.” “그렇게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라 고 요구를 해야 되는 것이지요. 10년 전만 해도 신도회장이 남성인 경우가 아주 많았거든 요. 참 이상하잖아요. 대부분의 신도들이 여성인데 신도회장은 남성이고 그 전체가 모인 중앙신도회장도 남성이고 단체장들이 거의 남성인거예요. 그러나 지금은 많이 변했어요. 지금은 중앙신도회장도 여성이고 각 사찰의 신도회장들이 여성인 경우도 많습니다. 아직 까지 직장직능 쪽의 단체장들은 남성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자체가 남성위주의 사회성 을 반영하는 것인데 그러나 신도회활동 속에서는 성차별은 많이 완화된 것 같습니다. 여 성들이 신도회장이 되고 단체장이 되는 것은 경우는 굉장히 많아졌고 여성들이 자긍심이 높아졌습니다. 저희가 열심히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달라졌습니다. 10년 전과는 제 가 피부로 느끼는 부분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성직자 내, 교단 법적인 부분에서 는 성차별이 있습니다. 총무원장은 비구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구니는 선거권도 없 습니다. 일반적인 비구에게 주어지는 정치적인 행위에 비구니들을 일절 배제시켰어요. 그 러면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한 성차별인데 이것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저희도 사실 이 부분에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사실은 제가 여성들 중심의 단체이다 보니 까 출가자들의 어떤 교단운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부담스런 측면이 있습 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종회에다 이것이 성차별적인 것이니까 이것은 개정되어야 한다 는 의견서를 제출한다거나 이런 토론회를 통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적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저희가 그것을 이슈 파이팅을 하거나 그런 적은 없습니다. 문제는 가장 큰 주최는 비구니 승僧들인데 비구니 승僧들이 이것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단 한 번도 문제제기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간헐적으로 글에서 주장을 하거나 이런 분들은 있지만 집단적으로 비구니 승僧들의 의견을 모아서 요구하거나 그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 는 해결이 안 되고 있다고 봅니다. 류: 비구니 승僧들이 사실은 주체인데 문제제기하기는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직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직에 잘못 보이면 곤란하거든요. 개신교에서 보면 산적한 문제가 굉장히 많은데 몰라서가 아니라 문제제기를 못하는 것이지요. 조직이 싫어 하는 얘기를요. 조직 무서운지 모르고 나섰다가는 저처럼 되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에는 측면지원이 필요한 것이지요. <불교여성개발연구원>이라든지 이런데서 비구니 승僧들 의 어떤 대언도 해주고 힘도 실어주고 해야 되지 않을까요? 한: 사실은 그런 게 많이 필요하죠. 류: 목사님들도 그럴 것 같아요. 의식들은 굉장히 열려있고 개신교 신학을 앞서 열어가는 진보적인 분들 중에 여성신학자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데 공개된 자리에서는 할 말 을 못하는 것이지요. 쫓겨날까 봐요. 그런 점에서 그 분들을 도울 수 있는 깨어있는 일반 신자들이 필요하지만 그것도 잘 안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세뇌되어서요. 한편 으로 이런 생각도 듭니다. 차별현상을 극복하는 중요한 방안은 창시자의 원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별로 차별하지 않은 것 같지만 현 실적인 문제는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임: 예를 들면 총무원장은 비구밖에 될 수 없다 이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성차별 금지법에 위배되는 사회적인 법으로 했을 경우 “차별이다.”라고 판결이 날 수 있는 사안 이라고 봅니다. 현실극복방안에 시작점은 과연 차별이라는 것이 뭐고 평등이라는 것이 뭔 지 구체적으로 종교가 질문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차별이다.”라고 얘기 되어 있 는 부분들에 대해서 종교가 가장 더디다고 얘기할 수 그런 것들을 위해서는 각 종단이 갖 고 있는 신학교, 불교대학 이런 교육기관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근본적으로 성직을 하겠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그 역할은 중요합니다. 제가 속한 교단은 양성교육평등 이라는 것을 시행하기 위한 첫걸음을 이제 띠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양한 성의 평등에 대 해서는 아직 멀었지요. 이제 양성평등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제도적으로 신 학교육과목이든지 아니면 목회자 수련회든지 장로 교육부터 시작해서 모든 과정에 기본 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번에 바뀌지는 않더라도 뭔가 들었을 때 시작될 수 있는 그 다음에 문제제기들을 이어나갈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결 국은 그런 커리큘럼 자체의 변형이나 개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교단에 있어서도 사실은 이런 것들을 밑바탕으로 교단의 정책을 세워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임의 중심에 있어서도 평신도 내지는 목회자, 남성 뭐 이런 중심으로 가게끔 될 수밖에 없는 틀거리가 있습니다. 여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요일이든지 뭐 여러 가지, 직장 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60대 이상의 여성들이 참여하기 쉬운 구조라든지 이런 정형화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인지적인 관점에서 좀 해체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닥에서부터 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 아가야할 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닥이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은 전체적인 교단이 바뀔 수 있는 구조가 원천적으로 봉쇄 됩니다. 그리고 잘릴 각오를 하고 말할 수 있는 성직자들 의 목소리들이 좀 더 큰 물줄기를 이루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고 여성 성직자와 여성신 도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하는 부분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 저도 얘기를 덧붙이면 비구니 승僧들의 문제이긴 하지만 결국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일반 여성 불자들이라는 것이고 비구니 승僧들도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분들이 직접 얘기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구니 회장 이 저희 단체에 고문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희에게 많은 관심과 지지․지원을 보내주시고 있는데 그런 것들이 늘 받기만 했습니다.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저희들 이 먼저 적극적으로 했어야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앞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류: 종교가 여성차별적인 요소를 많이 갖는 것 중에 하나가 대상에 대한 인식과 호칭에 상 당히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불교에 있어서 부처님하면 일단은 남성의 모습이 지만 그래도 그것을 보상하는 여성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보살님은 상당히 여성성이 있 는 것 아닌가요? 관세음보살하면 특히 다 살피고 끌어 앉고 하는 여성성을 보완하는 역할 이 있는데 개신교에는 아니 기독교 전반에는 굉장히 약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천주교는 교리적으로 많이 공격을 하지만 성모마리아가 그 역할을 많이 합니다. 여성성의 역할을 요. 그런데 개신교는 없는 것 같아요. 오로지 남성위주 그래서 하느님을 부를 때도 “하느 님 아버지” 이렇게 딱 나옵니다. 꼭 아버지라고 불러야 되는지 호칭을 가지고 점점 더 차 별이 고착화 된다면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하느님 어버이 하는 것은 어떨지 그것은 안 되는 것인지, 그랬을 경우 남성성이 희석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 다. 어떤 분은 또 하늘 아버지, 땅 어머니 이런 분들도 있거든요. 이것이 기독교신앙으로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포용여부는 있는 것인지 알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부처님, 보살님, 남성성 등 얘기한 것이 오류가 없는 지 짚어주셨으면 좋겠고, 또 제 가 제안하는 게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아니면 이거 외에 어떤 방안이 있는 지 말씀을 나누 었으면 합니다. 임: 하느님 아버지와 관련해서는 여성신학자들이 수세기동안 싸워온 문제입니다. 개신교 에 서 주기도문을 번역하면서 한 5~6년 전 부터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 번역된 주기 도문에서 계속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 등으로 번역을 했는데 그게 다 당신으로 되 어 있는 부분을 아버지로 대치시킨 것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어느 세미나에 가서 제기를 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에서 아버지를 빼라고요. 예수가 아바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 느냐 이런 얘기들을 하면서 굳이 그것을 아버지를 너무 남성성 또는 가부장제 몰아가는 것 아니냐 라고 얘기를 하는 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하느님 아버지에서 아버지 를 삭제해 달라고 얘기를 계속하는 것은 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이 여전히 예수님이 아버 지를 부르셨다 이런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 아버지라는 상이 사회적으로 고 정 관념적으로 박혀있는 그 뿌리를 사실은 봐야 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존재를 그 육신의 아버지 또는 이 사회를 지배하고 가정을 지배하는 그러한 아버지로 종속되게 만든다는 것 을 봐야 되고 여성신학자들이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아버지라는 말의 뿌리를 보라는 것 을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 부정적이고 여러 가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역 할들을 했었던 것을 굳이 하느님 아버지에 비춰가지고 하느님을 그런 존재로 뿐만 아니 라 그것을 이용해서 성직자도 그런 아버지 상으로 주입을 시킨다든지 이랬을 때 하느님 어버이라고 부르던 어머니시고 아버지시던 하느님이라고 부르던 그런 시도들을 저와 같 이 공부를 하고 있었던 분들이 공중기도회에서 시도를 하지만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며 거부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워낙 귀에 정착되어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 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를 비롯해서 예수의 남성성도 사실은 굉장히 많은 동적인 이미지 통 해 남성화시킨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보거든요. 그랬을 때 하느님에게서 거세된 예수에게 서 거세된 성형에서 거세된 여성성을 복귀하기 위해서라도 언어가 점유한 것들을 언어로 다시 되찾는 작업들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며 그래서 저는 신학적으로도 예를 들 어 어버이 하느님이든 어떤 호칭으로 부르든 가급적이면 어머니라는 것도 종교적으로 사 회적으로 어머니는 되는 데 여성은 안 되는 이런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다른 반론을 가지 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불리는 것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불리어질 수 있도록 장을 많이 제공해야하지 않나 생각을 합니 다. 류: 어찌 보면 기독교 신학이 하느님의 전능성을 강조하는데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구성으 로 제안하는 자체가 어떻게 보면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차라리 어버이라 고 하는 게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기존 교리에 부합하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 얘기를 듣다 보니까 여성 신도들이 남성목사를 찾게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하느님 이 아버지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걸 전달해주는 목사님도 남성인 것이 맞을 것 같아요. 일반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요. 그래서 정말 중요한 문제인 같습니다. 그리고 종교가 굉 장히 사회변화에 뒤쳐지잖아요. 익숙한 것을 좋아하잖아요.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이거든 요. 그러니까 그것을 익숙하게 만들려면 결국은 처음에는 어떤 것이든지 새로운 것은 낯 설잖아요. 새로운 것에 대한 의미부여를 강력하게 해주어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새 로운 것을 기존의 것을 고수하는 것 보다 이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이 더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드리게끔 강력한 의미부여를 해서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의미부여와 익숙해지도록 계속해서 하는 거죠. 처음에 한두 번은 낯설지만 또 해보고 또 해보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사실은 당신이 아버지로 해석되었다는 것처럼 저 희가 총무원장은 비구밖에 될 수 없다 이것도 저희가 1994년에 이 법이 개정되었는데 그 전에는 승려라고 되어 있었어요. 법을 개정할 때 여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은 비구 였을 것이고 이 사람들은 승려가 곧 비구라고 이해가 됐을 것 같아요. 사실은 이 사람들 이 특별히 의도적으로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승려를 비구로 고쳤다고 생각하지는 않 아요. 그 당시에 그 고친 당사자들은 별 차이를 못 느낀 거예요. 승려는 곧 비구니까 그래 서 비구라고 고친 거예요. 그러면 누가 아니다 라고 바로 문제제기를 했어야 하는데 문제 제기를 안한 것이죠. 그리고 넘어간 거죠. 법이 만들어지니까 그 다음에는 고치기가 힘들 어요.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이 남성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남성중심의 어떤 종교적인 문 화나 어떤 교단운영 이런 것이 계속 강화되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이 별 의식이 없었는데 도 불구하고요. 류: 기독교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점에서 진짜 어떤 신상을 왜곡하 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남성화하고 여성성을 배제하는 것도 문제지 만 아버지 하니까 하느님이 우리처럼 생기는 거죠. 사람의 모습이 고착화 되는 거죠. 대화 하기는 참 좋죠. 인격화하면서 대화하기는 좋은데 그러면서 자꾸 인격화 안에 가두어 버 리는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꾸 이것을 어떻게 깰지, 이런 것을 연구하 는 여성신학자분들이 우선은 좀 따뜻하게 모성을 찾아서 불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 다. 하느님 엄마, 이렇게 한 번 불러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같이 할 때는 하느님 어 버이 하든지 이렇게 시도해 보면서 일단은 고착화 된 틀에서 벗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하 는 생각이 듭니다. 임: 그렇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로 많이 의식적으로 합니다. 공식석상 기도회에서는 더더군다나 많이 합니다. 류: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십시오. 어떤 표현들을 지금 여성학자들이나 여성목사 님들이 주로 쓰시는 지요? 임: 어버이라는 말도 쓰고 어머니 되시고, 아버지 되시고. 류: 어머니 되시고, 아버지 되시는 하느님 이렇게 쓰신다는 말씀인데 그게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저쪽(북한)에서 어버이 김~ 이래서 부담스러운가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좋은 말들이 사용하면 이상하게 된 것들이 많습니다. 동무, 인민 등이 그 런 이유로 뺐긴 것 같습니다. 임: 그래서 말이라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 근데 어버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좀 생경하잖아요. 그런데 아까 어머니 되시고 아버 지 되시고 그랬을 때 우리가 어머니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좀 와 닿는 것이 느낌이 남다르 지 않을까 싶습니다. 류: 그러면은 또 공포심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 아버지하고 안 좋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느님을 만나는 데 상당한 걸림돌이 된다는 사례가 많습니다. 류: 훌륭한 대안 제시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올해 이미 많이 대안 제시가 되었지만 호 칭에 대한 문제가 중요한 대안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아까 여러 말씀 나눈 것처럼 여기서 몇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를 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도 성직자에게만 기대하는 것도 곤란하고 평신도들이 깨어서 이런데 목소리를 내고 힘을 모 으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얘기만 하고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아까도 나왔 지만 평신도에게 기대하는 점이 뭐가 있을 까요? 한: 저희는 여성의식만 낮은 것이 아니라 불교 전체적으로 사회의식이 낮아요. 결국은 그 것과 연관해서 여성의식도 낮다고 생각을 하는데 너무 고차원에서 놀아요. 바닥에 딱 발 을 딛고 그렇게 봤을 때 거기의 고통의 현실에 직시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자꾸 마음, 마 음 하고 현실과 뭔가 딱 천착되지 못하는 그런 풍토가 오랫동안 있다 보니까 결국은 교리 적으로 평등한 근본교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이런 성차별들이 오랫동 안 극복되지 않는 문제도 여전히 마찬가지이며 불교 신자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교리해 석, 잘못된 신행도 그런 형태로 연결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부처님은 분명히 고진멸도 사 성제의 고로 시작을 했거든요. 고통스러운 현실, 불평등하고 모순되고 그런 어떤 억압하 고 이런 부자연스러운 현실이 있는 거죠. 이 현실이 이 속에서 뭔가 이것을 극복해 나가려 고 하는 그런 것이 불교라는 거 이런 근본적인 문제하고 저희는 맞물려 있는 것 같습니 다. 이런 부분들에 있어 여성 불자 뿐만 아니라 불교계 자체가 새로운 교리해석과 새로운 불교의 실천 모습 이런 것들이 요구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 몇 년 동안 쭉 성서 배움 모임을 가지는데 그 목표는 여성의 눈으로 보는 성서입니다. 거기서 늘 말하는 것이 “계속 물음표를 다십시오.”입니다. “제가 지금 이 시간에 말하는 것도 다 맞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뭔가 저 사람도 틀리게 생각을 할 수 있고 틀린 말을 할 수도 있고 왜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 지 물으시고 교회 안에서도 설교를 들으면서도 계속 물으십시고 하느님께도 물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으 시기 때문입니다. 여성차별과 관련해서 평신도들에게 교인들에게 성직자 역시 교인들이 이런 성직자들을 평신도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직자를 완성품으로 보지 말고 고민하고 있는 지점들을 자꾸 성직자에게 똑같이 질문을 던져주고 그것으로 하여금 고민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한데, 여전히 꿈의 대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면 그것 이 오늘날의 개신교를 이 꼴로 만드는데 정말 주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 다. 류: 불교든 개신교든 다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너무 성직자 의존적인 신앙, 거기에서 머 물지 말고 주체적인 신앙을 갖자는 것으로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차별 은 권력을 소수의 가진 자로부터 출발합니다. 몇몇 사람들이 모든 권력을 행사하면서 차 별은 생기는데 권력을 분산하는 작업을 통해 차별을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 다. 수고하셨습니다. |
첫댓글 이미 10여년전에 쓴 글인데 참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고착화되면 그에 편승하는 집단이 생기고 이익이 창출되어 공고화한다. 이로하여 차별이 당연시되는 것이다. 차별을 없애는 것은 용기있는 일이라는 것이 실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