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소망
(시146:5,요11:25-27)147.150
2015.4.5.9시 시온성군인교회
2015.4.6.10 실버대학
2015.4.15.13 태안보건의료원
(보내지는 곳 8사이트)
글:-남제현목사
태안자살예방협회장
(태안보건의료원협의체)
충서지부이사장(서산시협의체)
http://cafe.daum.net/sangokli
http://cafe.daum.net/talifecent
사람은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그래서 죽음은 자기존재가 없어지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죽음은 엄연한 현실이며, 인간의 최대의 관심거리이며, 모든 철학과 삶과 문학과 예술의 가장 깊은 신비적 대상이라 현대인들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려하지 않으며 죽음을 터부시 한다. 여기에 문명사회 일수록 가급적 말을 않으려고 터부시하고 침묵을 지켜왔다. 그래서 서구사회에서 장례식에도 식구나 친지의 일부만이 모여 거행하기도 한다.
죽음은 삶에서 제외되고 소외시켜 그 자체가 비인간화되는 것이다..죽음은 우리의 큰 삶의 일부분로 인간다운 얼굴을 지닌 사회로 조성하는 인간의 근본문제가 된다..그런데 <공자>는 "산다는 것도 아직 체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안단 말이냐“ 앞날의 삶도 모른다고 하였다..그래서 여전히 죽음은 인간의 한계상황으로 신비이면서 풀고 넘어서야 할 매듭이다..
그래서 나를 초월하여 뛰어 넘어 마지막 결승 벽이 무엇인가 해답을 찾아야 한다.. 누구나 맞아해야 하고 예고 없이 찾아 올 수 있다. 그러면서 죽음이 가까워 오면 모든 과정을 낮선 의사에게 위탁해 버린다..그러면서 죽음은 비록 전쟁터라 할지라도 홀로 맞이해야 한다. 자식이나 남편, 아내일지라도 대신 죽을 수 없고 함께 죽을 수 없다. 개개인의 홀로되는 가장 엄숙한 순간이다..
죽음은 모든 의미 있는 관계가 끊어지고 잃어버리고 해체되고 상실의 고통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혼신의 다해 쌓아온 모든 업적이 끝이 나는 날이다. 그래서 죽음은 근원적 소외가 주는 아픔이고 고통이다. 거역할 수없는 이런 죽음은 고귀한 인간성을 모독하고 파괴하는 비정한 순간이다...죽으면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냉동고 속에 들어가야 한다..
비비고 만지고 흔들 어 꼭꼭 묶어 차거 운 땅 속에 매장을 해도 감각이 없다..그런데 이런 두려움을 불식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13)”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잠들어 쉰다.“ 는 말씀을 하셨다..
인간의 관심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다..한번은 (마19:16)“-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다..죽은 후의 생명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와 내세를 모두 아우르는 전체적인 본래적인 참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로스>"죽음 이후의 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 이다“ 하였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인들에게 (고후5:1-3)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압니다...”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한다..죽으면 다 끝이란다..이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에 있을까...<무디>"세상은 떠나가지만 천국이 내 앞에 열리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 나는 가야 한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인자가 <하나님>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였다..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께서 엠마오 도상의 제자에게 나타나셨다..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쯤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까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예수>께서 그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으신다..
그들 중 하나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서만 모른단 말입니까?"하였다. <예수>께서 물으셨다. "무슨 일입니까 ?" "나사렛 예수와 관련된 일로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법정에 넘겨주어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소망을 걸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몇 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 그분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눅24:25)“-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두 길손은 마을에 가까이 이르러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 그리하여 <예수>께서 집에 묵으려
고 들어가셔 음식을 잡수실 때에, 빵을 들어서 축사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서로 말하기를 "길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던가. ?"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주>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그 두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하였다....(눅24;13-35) ..캐나다에 어떤 호수에 자살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 곳이라...'한 번 더 생각해 보시오' 푯말이 세워져 있다.
어느 날 어떤 청년이 푯말을 보지 못하고 호수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마음을 바꿔 살기로 결심하고 겨우 땅 위로 올라오는데 그 푯말을 보게 되고 다시 호수에 뛰어들고 말았다. 이 땅에는 삶에 대한 위기감 그리고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좌절에 빠져 생을 포기하겠다고 한다..물론 소망이 있고 저주 받은 땅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위험한 장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을 찾아 이리 저리 방황하는 동안 오히려 소망은 더 멀어질 수 다. 우리 눈에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다..이 땅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소망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오랫동안 정을 붙이고 살던 도시를 등지고 시골로 먼 길을 떠나던 두 젊은이들은 불안과 근심이 가득 찼고 얼굴에는 슬픈 빛이 역력했다.
도시에서 있었던 우울한 이야기이다..부당하고 불의한 사건이 오랫동안 품고 있던 소망이 다 사라져 버렸다...이제는 소망이 깨끗이 사라져 더 이상 그 도시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그 도시를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의 모습이다..그 도시에서 그들의 소망이 사라졌기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루살렘>에 소망이 있음을 발견하고 급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다.
어두운 눈이 밝아지고 답답한 가슴이 다시 뜨거워졌다. 도시를 떠나던 그 모습이 아니라 의욕과 열정에 사로잡혀 급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확신을 가지고 돌아왔다..이제는 포기하고 잃어버렸던 소망을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행복을 찾게 되고 꿈과 새로운 소망을 회복시켜준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