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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바라따(Mahabharata)
마하바라따(महाभारत)는 라마야나(Ramayana)와 함께 고대인도의 2대 산스크리트 서사시이다. 마하바라따는 힌두 이띠아사(Itihasa: 역사)의 일부이고 힌두 신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마하바라따는 인도아대륙의 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 힌두교의 주요 원본이다. 인간의 목적[아르타(Artha: 목적), 까마(Kama: 기쁨), 다르마(Dharma: 의무), 목샤(Moksha: 자유)]에 대한 논쟁이 오랜 전통속에 드러나며, 사회 그리고 세상(자아의 본질) 그리고 까르마(Karma: 행동)의 작용에 대한 개인들의 관계를 규명하려 하고 있다.
마하바라따는 “바라따왕조의 위대한 이야기”로 번역할 수 있고, 마하바라따 자체의 기술에 따르면 24,000절의 바라따(Bharata)라 칭하던 보다 짧은 판본을 자세히 다시 쓴 것이다.
전통적으로 인도인들은 브야사(Vyasa)를 마하바라따의 원작자로 여긴다. 역사적인 발전과 원작자들을 밝히려는 문헌상의 연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초의 원작자들은 아마도 베다시대(Vedic period: ~BC 6세기)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약 4세기 경의 굽따시대(Gupta: 240-550) 초기에 아마도 최종적인 작품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74,000절이 넘는 긴 산문 구절과 백팔십만 개의 단어가 사용된 마하바라따는 세계에서 가장 긴 서사시의 하나이다. 대략 일리아드(Iliad)와 오디세이(Odyssey)를 합친 크기의 10배 분량이고, 라마야나의 4배 분량이다. 하리밤사(Harivamsa)를 포함한 마하바라따의 전체 길이는 90,000절이 넘는다.
마하바라따의 많은 지역적인 작품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쓰여졌는데, 대부분 중요치 않은 항목이나 구절에 차이가 있거나 관련된 이야기들을 첨부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자바(Java)의 까까윈 바라따유다(Kakawin Bharatayuddha)와 같은 인도 아대륙 이외 지역의 일부 판본도 포함된다.
범위
꾸룩쉐뜨라(Kurukshetra)전쟁과 까우라바(Kaurava)들과 빤다바(Pandava)들의 운명에 대한 서사적 이야기 외에도 마하바라타는 스리마드(Shrimad) 바가바드 기따(Bhagavad Gita: 6.25-42)와 4가지 “삶의 목표” 또는 뿌루샤르타(Purushartha: 12.161)에 대한 토론과 같은 수많은 철학적이고 신앙적인 소재를 담고 있다. 후반부는 다르마(Dharma: 정의), 아르타(Artha: 부), 까마(Kama: 기쁨), 목샤(Moksha: 해방) 같은 것들을 열거하고 있다.
마하바라따는 첫 빠르바(Parva: 편)의 시작부분에서 “여기서 얻는 것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있고, 얻지 못하는 것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얻지 못할 것이다” 고 하며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음을 역설한다. 마하바라따에서 중요한 작품과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다(종종 이들 자체가 독립적인 작품으로 간주된다).
Nala Damyanti
6편(비시마빠르바: Bhishmaparva)의 바가바드 기따는 끄리시나(Krishna)가 회의감에 빠진 아르주나(Arjuna)를 충고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http://kr.youtube.com/watch?v=bqTe2qA3jGw&feature=related 3편(아란야까빠르바: Aranyakaparva)의 다마얀띠(Damayanti) 또는 날라(Nala)와 다마얀띠는 사랑 이야기이다. 3편(아란야까빠르바: Aranyakaparva)에는 라마야나의 요약본이 포함되어 있다. 3편(아란야까빠르바: Aranyakaparva)에서 리시야스링가(Rishyasringa)는 뿔난 소년이며 리쉬(rishi) 이다.
원문의 역사와 구조
마하바라따는 전통적으로 서사시에서 주요 왕가인물들의 하나로 등장하는 브야사(Vyasa)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마하바라따의 첫 부분에는 브야사의 요청으로 브야사의 구술을 기록한 가네샤(Ganesha)가 등장한다. 가네샤는 브야사가 낭송을 중지하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받아 쓰기에 동의했다고 전해진다. 브야사는 가네샤가 구술을 받아 적기 전에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갖는데 동의했다. 마하바라따는 수많은 인도의 종교적 비종교적인 작품들에 보편적인 액자소설으로 알려진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태를 취한다.
마하바라따는 브야사의 제자 바이삼빠야나(Vaisampayana)에 의해 아르주나(Arjuna)의 증손자인 자나메자야(Janamejaya)왕에게 낭송되었다. 자나메자야에 대한 바이삼빠야나의 낭송은 여러 해가 지난 후 어떤 현자들의 집회에서 우그라스라바 사우띠(Ugrasrava Sauti)란 전문 이야기 꾼에 의해 다시 낭송된다.
마하바라따의 전집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커진 것으로 여겨진다. 마하바라따(1.1.61) 자체는 아시발라야나 그르야수뜨라(Ashvalayana Grhyasutra: 3.4.4)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는 동시에 부가적인 보조소재와 대립하는 것으로서 바라따 고유의 24,000절의 핵심 부분을 구별한다. 마하바라따[시로까(Shloka: 절) 81.101-102]의 아디 빠르바(Adi-parva)에 따르면, 브야사가 집필한 당시의 원본은 8,800절이었고 자야(Jaya: 승리)로 알려졌으며, 후에 바이삼빠야나가 낭송한 바라타에서는 24,000절이 되었고, 우그라스라바 사우띠가 낭송한 마하바라타에서는 결국 90,000절이 넘게 되었다.
호메로스(Homer: 호머) 연구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마하바라따에 대한 연구도 원본의 여러 부분을 해석하고 연대를 추정하는 수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원본의 구조는 20세기 초 인도학자들에 “혼돈” 또는 “무질서” 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마하바라따에 관련된 최초의 작품인 핵심적인 바라따는 빠니니(Panini: BC 4세기)의 아시따드야이[Ashtadhyayi (sutra 6.2.38)]와 아시발라야나 그르야수트라(Ashvalayana Grhyasutra: 3.4.4, BC 5세기)에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길어진 마하바라따의 초기 판본과 마찬가지로 바라따로 알려진 핵심적인 24.000절이 BC 4세기에 지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야(Jaya)의 원본 8.800절의 일부는 기원전 8-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의 작가 디오 크리소스톰(Dio Chrysostom: 약 40-120)은 “호메로스의 시는 인도에서도 그들의 말과 언어로 번역되어 불리어졌다고 한다. 결국 인도사람들은 프라이모스(Priam: Troy 왕)의 괴로움들, 안드로마케(Andromache: Hector의 정숙한 아내)와 헤카베(Hecuba: Priam의 아내)의 슬픔과 고통, 아킬레스(Achilles) 그리고 헥터(Hector: Priam의 아들) 두 사람의 용기에 생소하지 않게 되었다. 이와 같이 주목할 만한 것은 어떤 사람의 시가 불리어지고 있는가 이다!” 라 하였다.
일리아드를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한 구절의 분명한 외형(참뜻)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디오 또는 그의 자료들이 일리아드 이야기와 융합적으로 동일시하는 이야기들은 당시 마하바라타의 존재를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추정한다. 크리스찬 라센(Christian Lassen)은 Indische Alterthumskunde에서 디리따라시뜨라(Dhritarashtra)의 불운, 간다리(Gandhari) 그리고 드라우빠디(Draupadi)의 슬픔, 그리고 아르주나(Arjuna) 와 슈요다나(Suyodhana) 또는 까르나(Karna) 용기에 결국 참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런 해석은 디오의 원문에 대한 특정한 언급 없이 반복되고 있는 알브레이트 베버(Albrecht Weber)의 “인도문학의 역사”의 표준참조와 같은 것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후기의 끄오[Khoh: 마드야 쁘라데시(Madhya Pradesh)주]의 마하라자 샤르바나타(Maharaja Sharvanatha: 533-544) 동판비명에는 마하바라따가 10만 절의 작품(shatasahasri samhita)이라 쓰여 있다. 이런 막대한 원문의 개정판은 숫자 18 그리고 12를 강조하는 형식적인 원칙에 따라 출판되었다. 마지막으로 추가된 부분은 마하바라따에 전집에 다른 목록들을 포함하면서 남아 있는 것 중 가장오래된 1세기 경의 산스크리트 철학적 원고인 MS Spitzer의 아누샤사나 빠르바(Anushasana-Parva)에 누락된 날짜일 것이다. 이런 증거로 볼 때 그것이 1세기에 18권으로 개정된 것으로 보인다. 20 빠르바(parva)로 달리 분류한 것은 얼마 동안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였다. 100권으로 나눈 아(亞)빠르바 분류는 보다 오래되었고, 대부분의 빠르바는 아빠르바를 구성하는 하나의 이름을 따랐다. 하리밤사(Harivamsa)는 100개의 아빠르바의 마지막 두 개를 구성하고, 18 빠르바의 교정자들이 마하바라타 고유의 부록(Khila)으로 여기고 있었다.
18 빠르바(Parva)
18 빠르바로 분류한 것은 다음과 같다.
아디 빠르바는 자나메자야(Janamejaya)의 뱀을 재물로 바치는 의식(사르빠사뜨라: Sarpasattra), 그것의 동기, 왜 존재하는 모든 뱀들을 없애려 하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뱀이 아직도 존재하는 지에 대한 설명이 포함된다. 이런 사르빠사트라 소재는 “주제의 유인(민코프스키: Minkowshi 1991)”에 의한 마하바라따의 어떤 출판본에 추가된 독립적인 이야기로 여겨지며, 베다(Vedic, Brahmana)의 문학에 특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특히 빤차빔샤 브라마나(Panchavimsha Brahmana)는 사르빠사뜨라는 뱀에 대한 원래 의식이라 기술하는데, 마하바라따의 사르빠사뜨라의 두 주인공인 드르따라시뜨라(Dhrtarashtra)와 자나메자야(Jananmejaya)는 뱀들의 이름이고, 마하바라따에서 딱샤까(Takshaka)도 어떤 뱀의 이름이다. 샤따빠타 브라마나(Shatapatha Brahmana)는 자나메자야 빠릭쉬따(Janamejaya Parikshita)에 의해 치러진 아시바메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Mbh. 1.1.50의 한 인물의 말에 따르면, 각기 Manu (1.1.27), Astika (1.3, sub-parva 5) or Vasu (1.57)로 시작되는 세 개의 서사시 판본들이 있었다. 이들 판본들이 추가 본에 합쳐져서 또 다른 대화 구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바수(Vasu) 판본은 구조 배치를 생략하여 브야사(Vyasa)의 탄생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아스띠까(Astika) 판본은 마하바라따 이름을 소개하는 브라만의 문학의 사르빠사뜨라와 아시바메다 요소를 추가 했고, 작자와 브야사(Vyasa)를 동일시한다. 이들 추가 편집자들은 아마도 최종적인 편집 때까지 원문과의 대조를 지속하는 것과 비슷한 오베를리에스(Oberlies, 1998)의 빤차르뜨라(Panchartra) 학자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시마 빠르바에서 휴나(Huna)에 대한 언급에는 이 빠르바가 4세기경에 편집되어 졌음을 암시하는 것이 나타나 있다.
역사적 내용
꾸룩쉐뜨라(Kurukshetra) 전쟁의 역사성은 불분명하다. 역사적 선례를 가진 것으로는 BC 9세기 경의 인도 철기시대의 내용에 가장 적절할 것이다.
특히 꾸룩쉐뜨라 전쟁의 사실성을 고려하지 않은 서사시의 일반적 배경은 인도 꾸루(Kuru)왕국이 대략 BC 12-8세기에 정치력의 중심에 있던 철기시대(Vedic) 인도의 역사적 선례를 확실히 가지는 것으로 여긴다. 이 기간 왕가의 투쟁은 결정적인 전투가 결국 획기적인 사건으로 연결되는 마하바라따 전집의 핵심을 서술한 자야(Jaya)에 대한 영감을 주게 되었다.
뿌라나(Purana) 문학은 마하바라따 이야기와 관련된 족보를 기술하고 있다. 뿌라나들의 증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빠리끄시따[Parikshita: 아르주나(Arjuna)의 손자]의 탄생과 BC 382년의 마하빠드마 난다(Mahapadma Nanda)의 즉위에 이르는 1015년 또는 1050년에 이르는 시기와 BC 1400년경으로 추정되는 바라따(Bharata) 전투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이다. 하지만, 이것은 족보상에 나타난 왕들의 평균적인 치세기간을 길게 적용한 것이다. 둘째는, 아디시마끄리시나[Adhisimakrishna: 빠리끄시타의 증손자)와 마하빠드마 난다의 시대 사이의 뿌라나들의 비슷한 족보를 분석하는 것이다. 10개의 별도 왕조 목록을 평균한 빠기떼르(Pargiter)의 26 세대들의 추정치에 따라 18년의 평균 재임기간을 가정하면 아디시마끄리시나에 대한 BC 850년의 계산이 나오고, 이렇게 대략 BC 950년에 바라따 전투가 일어난다.
B. B. 랄(Lal)은 BC 836년을 추정하기 위해 평균적인 임기를 보다 보수적으로 계산한 비슷한 접근법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Painted Grey Ware 지역의 고고학적인 증거가 서로 관련되어 있고, PGW의 인공유물들과 서사시에 언급된 장소들 사이에 연관성이 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천문고고학적인 방법을 이용해 사건들의 연대를 추정하는 시도들이 제시되었고, 구절들을 선택하여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BC 4세기에서 2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추정한다. 4세기 후반은 아리야바따(Aryabhata, 6세기)의 행성의 합에 기초한 깔리유가(Kaliyuga)시대의 계산에 선례를 가진다. 그가 계산한 BC 3102년 2월 18일은 인도 전통이 일반화되게 되었다. (예를 들어, 556-634년의 Saka 시대의 Pulikeshi 2세의 Aihole 비명은 바라타 전쟁 이후 3735년이 지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문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또 다른 전통적인 학파는, Vriddha-Garga, Varahamihira 그리고 Kalhana로 대표되는, Kaliyuga 시대 이후 바라타 전쟁을 653년으로 지정하고, 이렇게 하여 BC 2449년이라 한다.
줄거리
작품의 핵심내용은 꾸루(Kuru) 일족이 통치하는 왕국 하스띠나뿌라(Hastinapura)의 왕권을 차치하기 위한 왕가의 권력투쟁이다. 권력투쟁에 뛰어든 가문의 두 방계혈족들은 까우라바(Kaurava) 그리고 빤다바(Pandava)의 투쟁에 참여한다. 비록 까우라바가 가문의 위쪽 항렬이지만, 까우라바의 맏형 두르요다나(Duryodhana)는 빤다바의 맏형 유디시티라(Yudhisthira) 보다 젊다. 두르요다나와 유디스티라 모두 왕권을 상속하는데 우선권이 있음을 주장한다.
빤다바가 결국 승리한 꾸룩쉐뜨라(Kurukshetra)의 대회전에서 투쟁이 극에 달한다. 이 전투는 혈연과 우정이 얽힌 복잡한 투쟁을 낳고, 옳고 그른 것 보다 우선하는 가족의 충절과 의무를 보여주고 있다.
마하바라타는 끄리시나(Krishna)의 죽음으로 끝나고, 그의 왕조도 이어서 막을 내리며 빤다바의 형제들은 하늘로 올라간다. 그것은 인류의 4번째 이자 마지막 시대인 깔리[Kali: 깔리유가(Kali Yuga)]의 힌두시대가 시작됨을 알리는데, 위대한 가치와 고귀한 사상은 무너지고 사람은 올바른 행동과, 도덕 그리고 덕이 완전히 붕괴되는 쪽으로 향하게 된다.
선조 세대들
자나메자야(Janamejaya)의 선조 하스띠나뿌라(Hastinapura)의 왕 샨따누(Shantanu)는 여신 강가(Ganga: 갠지즈)와 짧은 결혼 생활을 하는데, 외견상 상속인이 된 아들 데바브라따(Devavrata: 후에 Bhishma라 불린) 한 명을 두게 된다.
수년 후 사냥을 하던 샨따누는 어부의 딸 사뜨야바띠(Satyavati)를 보게 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녀와의 혼인을 요청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뜨야바띠의 어떤 미래의 아들이라도 권좌를 넘겨 준다는 샨따누의 약속이 없으면 결혼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왕의 고충을 풀기 위해 데바브라따는 왕위를 물려받지 않겠다고 동의했다. 어부가 데바브라따의 서약을 못미더워하자 데바브라따는 다시 그 아버지의 약속을 보증하기 위해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겠다는 맹세를 했다. 샨따누는 사뜨야바띠와의 사이에서 치뜨랑가다(Chitrangada)와 비치뜨라비르야(Vichitravirya) 두 아들을 보았다. 샨따누가 세상을 떠나자 치뜨랑가다가 왕이 되었다. 그는 커다란 사건 없이 아주 짧은 생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 어린 아들 비치뜨라비르야가 하스띠나뿌라을 통치했다.
젊은 비치뜨라비르야의 혼처를 정하기 위해 비시마(Bhishma)는 세 공주 암바(Amba), 암비까(Ambika) 그리고 암발리까(Ambalika)의 스와얌바라(Swayamvara: 과년한 여성이 청혼자들 중에서 배필을 선택하는 관습)에 참여하기 위해 까시(Kasi)로 갔다. 그는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력으로 그들을 유괴했다. 암비까와 암발리까는 비치뜨라비르야와의 결혼에 동의했다. 암바는 비시마에게 스와얌바라에서 비시마가 쫓아 낸 샬바라지(Shalvaraj: 샬바의 왕)와 결혼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비시마는 그녀가 떠나도록 놓아주었으나 비시마에게 당한 굴욕에 충격을 받은 샬바라지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거절했다. 암바는 비치뜨라비르야와 결혼하기 위해 돌아왔으나 그도 거절했다. 마침내, 그녀는 비시마에게 결혼해줄 것을 청했으나 그는 독신의 맹세 때문에 그녀와 결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암바는 몹시 격노했고 그녀의 곤경에 대한 책임이 있는 비시마의 냉혹한 적이 되었다.
빤다바(Pandava)와 까우라바(Kaurava) 왕자들
비치뜨라비르야가 상속자 없이 요절한 후 사뜨야바띠(Satyavati)는 미망인의 니요가(Niyoga: 씨줌이)로 그녀의 첫째 아들 브야사(Vyasa)를 정했다. 첫째 여왕 암비까는 육체관계를 하는 동안 눈을 감았고 그녀의 아들 드리따라시뜨라(Dhritarashtra)는 장님으로 태어났다. 암발리까는 창백하고 핏기가 없었고 그녀의 아들 빤두(Pandu)는 창백하게 태어났다. (빤두란 말은 황달에 걸린 이란 의미도 됨). 브야사가 아버지인 셋째 아들 비듀라(Vidura)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던 궁녀와의 사이에서 나았고 아주 총명했다.
드리따라시뜨라는 그녀가 장님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스스로 눈을 가린 간다라(Gandhara)의 공주 간다하리(Gandhari)와 결혼했다. 빤두는 드리따라시뜨라가 장님이란 이유로 권좌를 이어받았다. 빤두는 꾼띠(Kunti)와 마드리(Madri)에게 두 번 결혼했다. 하지만 빤두는 성적행위를 하게 되면 죽는 현자 낀다마(Kindama)의 저주를 받고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두 아내와 함께 숲으로 떠났고, 그 후로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이 통치했다. 하지만 빤두의 왕후 꾼띠는 듀르바사(Durvasa)에게 받은 은혜를 이용해서 다르마(Dharma), 바유(Vayu) 그리고 인드라(Indra)신들에게 아들을 요청했다. 그녀는 신들을 통해서 유디시띠라(Yudhishtira), 비마(Bhima) 그리고 아르주나(Arjuna)의 세 아들을 낳았다. 꾼띠는 그녀의 은혜를 후비 마드리와 나누었고, 그녀는 아시위니(Ashwini) 쌍둥이 신들을 통해서 쌍둥이 나꿀라(Nakula) 와 사하데바(Sahadeva)를 낳았다. 하지만 빤두와 마드리는 성욕에 빠졌고 빤두는 죽게 된다. 마드리는 자책 없이 그의 화장더미 위에서 죽었다. 꾼띠는 통상 빤다바형제들로 언급되는 5형제들을 키웠다. 디리따라시뜨라는 간다하리와 백여 명의 아들을 두었고, 모두가 유디시띠라가 탄생한 이후에 태어났다. 이들이 맏형 듀르요다나(Duryodhana), 둘째 듀샤사나(Dushasana) 등의 까우라바형제들 이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이들과 빤다바형제들 사이의 경쟁과 대립은 꾸룩쉐뜨라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락사그르하[Laksagrha: 랙(Lac)의 집)
듀르요다나는 빤다바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그는 불에 잘 타는 재료들[주로 랙(Lac)]로 지은 궁전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 불이 나도록 계획하고 그들을 그곳에 머물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빤다바들은 굴을 파기 위해 그들에게 광부를 보낸 그들 삼촌 비듀라(Vidura)의 경고를 전해 듣는다. 그들은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고 그들로 오인하도록 다른 시체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은신에 들어갔다. 빤다바들과 꾼띠는 은신에 들어갔다
드라우빠디(Draupadi)와의 결혼
은신해 있던 빤다바들은 빤찰라(Panchala) 공주 드라우빠디의 혼처를 정하기 위한 스와얌바라를 듣게 된다. 빤다바들은 브라민(Brahmin)들로 변장하고 경쟁에 들어갔다. 임무은 강철활에 시위를 매고 아래쪽 기름에 반사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천정에 매달린 움직이는 인조물고기의 눈을 맞추는 것이다. 대부분의 왕자들이 실패했고 많은 이들이 화살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아르주나(Arjuna)는 성공했다. 하지만, 빤다바스들은 집으로 돌아와 그의 어머니에게 아르주라가 승리했음을 알리고 그들이 데리고 돌아온 것을 바라보았다. 볼것도 없이, 꾼띠는 아르주라가 승리해서 가져온 것이 무엇이든 그들 사이에 공유하기를 청했다. 이렇게 드라우빠디는 결국 5 형제 모두의 아내가 된다.
인드라쁘라스타(Indraprastha)
결혼식 이후, 빤다바 형제들은 하스띠나푸라에 다시 초청된다. 꾸루(Kuru)일가의 원로들과 친척들은 협상을 했고 빤다바들이 새로운 영토를 얻도록 왕국의 분할을 모색했다. 유디시띠라(Yudhishtira)는 인드라쁘라스타에 이 영토를 위한 새로운 수도를 짓도록 했다. 하지만 빤다바, 까우라바 어느 측도 그 협정으로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얼마 후 아르주나(Arjuna)는 끄리시나(Krishna)의 여동생 수바드라(Subhadra)를 납치하여 결혼했다. 유디시띠라는 왕권강화를 원했고, 그는 끄리시나의 조언 구했다. 끄리시나는 그에게 조언했고 충분한 준비를 한 후 일부 반대자들을 제거했고, 유디시뜨라 라자수야 야그나(rajasuya yagna) 의식을 수행했고, 이렇게 그는 왕들 중에서 뛰어난 왕으로 인정 받았다.
빤다바들은 그들은 위한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그들은 인드라쁘라스타에 까우라바 사촌들을 초대했다. 듀르요다나(Duryodhana)는 궁전 주변을 거닐었고, 광택이 나는 마루를 물로 착각하여 딛지 못했다. 그의 실수가 알려지게 된 후 그는 연못을 보고 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다 빠졌다. 드라우빠디는 그를 보고 웃었고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주사위 게임
듀르요다나(Duryodhana)의 삼촌 샤꾸니(Shakuni)는 조작된 주사위를 이용한 유디시띠라와(Yudhishtira)의 주사위 게임을 준비했다. 유디시띠라는 그의 전 재산과 왕국을 잃었다. 그는 그의 형제들과 자신 그리고 마침내 아내까지 게임에 걸었다. 환호하던 까우라바들은 속수무책인 빤다바들을 모욕했고 심지어 왕실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드라우빠디의 옷을 벗기려 했지만, 그녀의 명예는 걷어진 천을 기적적으로 늘려주는 끄리시나(Krishna)에 의해 지켜졌다.
드리따라시뜨라(Dhritarashtra), 비시마(Bhishma) 그리고 다른 원로들은 아연실색 했지만 듀르요다나는 하스띠나뿌라에서 두 사람의 태자를 위한 곳은 없다며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그의 소망과 반대로 드리따라시뜨라는 다른 주사위 놀이를 준비하라고 했다. 빤다바들은 13년 동안의 유배에 처하는 명령이 내려졌고, 13년 동안 반드시 숨어있어야 하며, 까우라바들에게 발견될 경우, 또 다시 12년을 유배에 들어가야 했다.
유랑과 복귀
빤다바들은 12년의 유배생활을 보내고, 이 시기에 많은 모험들을 겪는다. 그들은 적절한 미래의 투쟁을 위한 동맹을 준비한다. 그들은 마지막 해를 비라따(Virata)의 궁전에서 변장한 채 지내고 그 해의 마지막에 발견된다.
유배를 마치면서 그들은 인드라쁘라스따에 돌아갈 협상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들이 숨어 지내는 동안 발견되었고 왕국으로 돌아오는데 동의할 수 없다는 듀르요다나의 반대로 협상이 실패한다.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꾸룩쉐뜨라(Kurukshetra) 대회전
양측에서 그들을 돕기 위한 대군이 소집되었고 꾸룩쉐뜨라에서 전투를 위해 대치했다. 빤찰라(Panchala), Dwaraka, Kasi, Kekaya, Magadha, Matsya, Chedi, Pandya 왕국들과 빠라마 깐보자스(Parama Kanbojas)와 같은 군벌들이 빤다바와 동맹을 맺었다. 까우라바(Kaurava) 동맹군은 Pragjyotisha, Anga, Kekaya, Sindhudesa(Sindhus, Sauviras and Sivis 포함한), Mahishmati, Madhyadesa의 Avanti, Madra, Gandhara, Bahlikas, Kambojas 그 밖의 수많은 왕국들이 포함된다. 전쟁이 선포되기 이전에 발라라마(Balarama)는 증가하는 분쟁에 불쾌함을 표시하며 성지순례를 떠났고, 이리하여 그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끄리시나는 아르주나의 2륜 전투마차를 모는 비전투원 역할을 수행했다.
전투에 앞서, 아르주나(Arjuna)는 맞은편의 증조부인 비시마(Bhishma)와 그의 스승 드로나(Drona)를 바라보면서 전투에 회의를 품으며 간디바(Gandiva)활을 조준하기를 꺼려했다. 끄리시나는 서사시의 유명한 바가바드 기따(Bhagavad Gita)의 그가 수행해야할 의무를 그에게 환기시켰다. 비록 처음에는 전투가 기사도적인 개념에서 행해졌지만, 양측은 곧 불명예스러운 전술들을 채택했다. 18일 동안의 전투가 끝나자 빤다바스의 Satyaki, Kripa, Ashwathama, Kritavarma 그리고 끄리시나만 살아남았다.
빤다바스들의 최후
대참사를 “목격”한 후, 아들들을 전부 잃은 간다리(Gandhari)는 전쟁을 멈출 신성과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가문의 몰락과 같은 것을 목격하게 만든 끄리시나를 저주했다. 저주를 받은 끄리시나는 36년 후 열매가 된다. 왕국을 통치하게 된 빤다바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가죽과 넝마를 입고 히말라야에 은둔했고 육체의 형태로 하늘을 향해 올랐다. 길 잃을 개가 그들과 함께 여행했다. 형제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드라우빠디(Draupadi)는 그들의 길을 떠났다. 각기 비틀거리면서, 유디시뜨라(Yudhishtra)는 그들이 떠나는 나머지 이유를 제공했다. (드라우빠디는 용모를 뽐내며 자랑했던 Arjuna, Nakula 그리고 Sahadeva를 유달리 좋아했고, 비마(Bhima)와 아르주나는 각기 완력과 궁술을 자랑으로 여겼다).
유일하게 덕망 있던 유디시뜨라는 대참사와 개만 남는 것을 막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시도했다. 그 개는 스스로 신 야마[Yama: 야마, 야마 다르마라자(Yama Dharmaraja)로 알려진]임을 밝히고, 그를 그의 형제와 아내가 있는 지하세계로 안내한다. 시험의 본질을 설명한 후, 다르마(Dharma)는 하늘로 돌아오는 유디시뜨라를 맞았고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한가지 거짓말에 대한 지옥의 고통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다르마는 그의 형제들과 아내가 그들의 죄에 다라 정해진 시간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한 후 하늘에서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를 확신시킨다.
아르주나의 손자 빠릭쉬따(Parikshita)는 그들 뒤를 이어 통치하고 뱀에 물려 죽는다. 그의 사나운 아들 자나메자야(Janamejaya)는 뱀들을 없애기 위해 뱀을 재물로 바치는 의식(사르빠스뜨라: Sarpassttra)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이 의식에서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에게 전해진다.
등장인물
가계도
기호 남성: 청색 여성: 붉은색 빤다바: 초록색 박스 까우라바: 붉은색 박스
주석 a: 샨따누는 꾸루왕조 또는 왕국의 왕이며 꾸루라 부르던 조상들의 일부세대는 삭제되었다. b: 빤두와 드리따라시뜨라는 비치뜨라비르야가 죽은 후 브야사에 의해 태어났다. 드리따라시뜨라, 빤두, 그리고 비듀라는 각기 브야사와 암비까, 암발리까 그리고 궁녀의 아들들이다. c: 까르나는 그녀가 빤두와 결혼하기 이전 꾼띠가 슈르야에 대한 기원을 통해 태어났다. d: 빤다바들은 빤두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나 꾼디가 다양한 신들에게 기원하여 낳은 것이다. 야마(Yama) 또는 다르마를 통해 유디시띠라를, 바유(Vayu)를 통해 비마를, 인드라(Indra) 또는 바루나(Varuna)를 통해 아르쥬나를, 쌍둥이 나꿀라 그리고 사하데바는 아시빈(Ashvini)들에 대한 그녀의 기도를 통해서 마드리에게서 낳다. e: 듀르요다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같은 시기에 태어났고 빤다바들 사촌으로 같은 세대이다.
태어난 형제들의 순서는 탄생에 대한 언급이 없는 브야사와 비시마 그리고 그들 이후에 태어난 비치뜨라비르야를 제외하면 가계도에 정확히 나타나 있다. 암비까와 암발리까가 자매란 사실은 가계도에 나타나 있지 않다. 듀르요다나의 탄생은 까르나와 유디시띠라가 태어난 이후에 이루어지지만 나머지 빤다바 형제들 보다는 앞선다.
등장인물들 중에서 일부 형제들은 명석함과는 거리가 먼데, 비치뜨라비르야의 맏형 치뜨랑가다가 여기에 포함된다. 비듀라는 드리따라시뜨라와 빤두의 배다른 형제이다. 가계도는 아르쥬나의 자손까지 지속되는데 여기엔 나타나 있지 않다.
[출처]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 마하바라따)|작성자 nahoi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