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31)
떠돌이의 생일
이호준(1958~ )
길가 편의점 문을 민다
사리곰탕 큰사발면 포장을 벗긴다
스프를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천천히 전화 버튼을 누른다
숨을 크게 몰아쉰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아침도 고깃국물 먹고 있는 걸요
목소리에 짐짓 윤기를 칠하며
후루룩 국물부터 마신다
이호준 시인
시인이자 여행작가.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국내외를 여행하면서 많은 산문집과 기행산문집을 냈다. 대표 산문집으로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1, 2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안부』, 『자작나무숲으로 간 당신에게』 등이 있고 기행산문집으로는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 『나를 치유하는 여행』, 『세상의 끝 오로라』 등이 있다. 2013년 등단. 시집 『티크리스강에는 샤가 산다』, 『사는 거, 그깟』이 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31번째 시는 이호준 시인의 “떠돌이의 생일”입니다.
남의 딸 결혼식에 가서 주책없이 눈물을 흘린다거나, 흐드러진 5월의 장미를 보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머리에 서릿발이 늘어갈수록 심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몸이 고단해지거나 정신적으로 힘이 들 때, 고향의 늙으신 부모님이 생각나는 건 나이 들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길가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가 “사리곰탕 큰사발면”을 사서 “포장을 벗”겨 “스프를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 행동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늘이 “생일”이라는 점입니다. 그것도 평안한 삶을 영위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도는 “떠돌이의 생일”입니다.
부모님은 항상 자식 걱정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꾸려 온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세상의 모든 부모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여행을 한답시고 끼니를 거르며 세상을 떠도는 아들이 매일 걱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도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런데 체질이 자유를 찾아 떠도는 걸 좋아하는 시인은 생일의 밥상으로 “사리곰탕 큰사발면”으로도 만족하지만 그런 아들을 걱정하고 있을 “어머니”가 더 걱정입니다. “숨을 크게 몰아쉰” 후 짐짓 태연하게 “오늘 아침도 고깃국물 먹고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시인의 마음이 그래서 더 갸륵하고 눈물나게 합니다.
시인의 삶에 “윤기”가 더해지기를 빌어봅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24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