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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학년도 수시 1학기 논술 예상 문제
고려대학교ㆍ이화여자대학교ㆍ서강대학교ㆍ성균관대학교ㆍ한양대학교ㆍ경희대학교ㆍ중앙대학교
예상 문제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출제자 김동석
논제 1> 다음 글의 논의를 발전시켜 민주주의의 전제 조건을 말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의 민주화 저해 요인에 대해 논술하라. (띄어쓰기 포함 400자 내외)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특히, 민주주의를 제도화함에 있어서 미국, 프랑스, 영국은 각기 질과 내용을 달리하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여 온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서구의 민주주의가 각 국가마다 다른 풍토 속에서 제도화되고 유지되어 온 과정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공통되는 경제 조건, 사회구조, 역사 전통, 정치 풍토 및 국내외적 정치의 여건 등이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논제 2> 다음 글을 읽고 ‘모방의 가치’에 관한 필자의 견해에 대해 동조하거나 반박하는 입장에서 글을 쓰시오. (단, 과학 이외의 분야를 예로 제시할 것, 띄어쓰기 포함 400자 내외)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창의성이 핵심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창의성이 모방의 바탕 위에서 이룩되었을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나게 된다. 인류 문명은 모방에 의해 과거를 계승하고 그 위에 창의성을 보태어 한 단계의 발전의 길을 택했다. 점보제트기를 탈 때 이따금씩 이 비행기가 공중을 날 수 있을까 의심이 되는 동시에 인간의 창의성의 집결체인 비행기에 감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의 비행기는 모방 위에 창의성이 끊임없이 보태어진 것으로, 모방이 없이 창의성만 강조되었으면 우리는 라이프 형제의 비행기를 끊임없이 재발명하는 데 그치고 말았을 수도 있다.
교육학자의 얘기를 빌리면, 인간이 출생 후 3년 동안에 한평생 배우는 양의 반 이상을 배운다고 한다. 직립 보행을 하고 언어를 배우는 등 사람으로서의 특성을 출생 후 3년 동안에 이룩하기 때문이다. 이 삼 년 동안에 이루는 능력의 계발은 창의에 의해서가 아니고 철저한 모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김호길/자연법칙은 인간도 바꿀 수 없지요)
논제 3>
1. 제시문 1)을 참고로 하여 역사학은 문학인가? 과학인가?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하시오.
2. 제시문 2)를 통해 역사의 진보로 인해 제시문 4)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을 논술하시오. (띄어쓰기 포함, 600자 이내)
3. 제시문 3)에서 주장하는 과거 청산이나 역사의 심판은 필요한가?
제시문 1)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에서는 교양 있는 시민들이 배워야 할 과목을 규정하고 분류하여 여러 학문의 발전과정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다. 그 과목의 숫자는 사람마다 달랐다. 4세기에 그것은 마르타아누스 카펠라에 의해 일곱 개로 정착되었고, 그는 거기에 ‘인문학’이라는 이름 붙였다. 6세기에 보에티우스는 그 일곱 과목을 둘로 나누었다. 글을 다루는 3과에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이 포함되었고 숫자를 다루는 4과에는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 들어갔다.
그 중에서 역사학은 수사학에 속했고, 따라서 문학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18세기 계몽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그런 견해는 지속되었다. 역사서술은 기껏해야 옛 사람들의 선행을 본받고 악행을 경계할 교훈을 전해주거나, 실례를 통해 통치에 필요한 기술을 정치지배자에게 제공하는 글로 간주되었다. 사실의 정확성보다는 교훈의 실용성이 강조되는 한, 역사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엄밀한 사실 확인이 아니라 타인을 설득시킬 수 있는 힘이었다. 역사가는 감동적인 문체로 글을 써야 했다.
한편 역사가가 쓰는 글의 대상은 과거에 실지로 존재했던 인물이나 사건으로 한정되어 있다. 역사를 서술하며 문학적 상상력을 마음대로 발휘하여 글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19세기 중엽부터 독일의 역사가들은 사실의 엄밀한 추구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사실 그대로 밝히는 것이 역사가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던 그들은 역사학의 목적, 대상, 방법론 등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들에 의하면 역사학은 ‘자연과학’은 아니라 할지라도 ‘정신과학’ 혹은 ‘문화과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역사학이 문학인가 혹은 과학인가.’라는 질문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역사이론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깊이 생각해봐야 할 주제가 되었다. 각 시대에 따라, 각 개인에 따라 그 대답이 달라졌고,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접어들며 그것은 더욱 미묘한 문제가 되었다. (역사학은 문학인가 과학인가? - 조한욱/한국교원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제시문 2)
‘역사는 진보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진보(進步, progress)란 어떤 개념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각자의 가치관과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쓰일 수 있겠지만, 대체로 ‘인간의 역사가 계속해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규정은 몇 가지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주체의 문제이다. ‘인간의 역사’란 누구의 역사란 말인가? 엘리트인가 주변부 사람들인가? 둘째, 가치의 문제이다. ‘좀 더 나은 방향’이란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가? 물질적인 것인가 도덕적인 것인가? 셋째, 목적론의 문제이다.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종착점을 전제로 하는가? 혹은 끝없이 움직이는 것인가? 선택이 다양할 수 있는 만큼, 그에 대한 대답도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역사가 이를 보여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가 앞으로 진보 ․ 발전해 나간다는 관념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고대 중국과 그리스 ․ 로마의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전통적 역사관은 대체로 감계(鑑戒) 사관, 상고사관, 순환사관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감계사관이란 역사 속에서 후대에 귀감이 될 만한 도덕적 규범을 찾아 그것을 역사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것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 교훈적 역사관이다. 중국에서 이러한 사관의 대표적인 예가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다. 그는 책 속의 <진서표>에서 “본받아야 할 선한 일, 경계해야 할 악한 일”을 다루고자 한다고 그 저술목적을 밝히고 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 역시 《로마사》에서 역사서를 통해 “국가가 모방할 것은 택하고 치욕적이며 부끄러운 것은 피할 수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상고사관은 이상적 가치기준을 고대에서 찾는 것을 말한다. 아득한 고대에 일종의 황금시대가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윤리가 쇠퇴하게 되었음으로 다시 고대의 이상적 원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에서 “후세를 본받을 수 없는 연유는 후세의 사람들이 선왕의 도를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은 곧 요 ․ 순 ․ 우 등 고대 선왕의 정치를 이상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스의 헤시오도스가 《노동과 제일(祭日)》에서 과거를 황금시대-은시대-동시대-철시대로 나눈 것도 동일한 변화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르네상스가 고전 ․ 고대적 가치의 부활을 목표로 했다는 사실 역시 일종의 상고주의적 경향이다.
순환사관은 마치 자연현상이 주기를 가지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처럼 역사도 시간에 따라 비슷한 양상이 되풀이된다는 관념이다. 역사가 선대의 질서와 후대의 무질서를 반복한다는 맹자의 일치일란설(一治一亂說)이나, 자연의 근본요소인 목 ․ 화 ․ 토 ․ 금 ․ 수가 순서에 따라 운행함으로써 이들의 상호작용에 따라 만물이 생성 ․ 변화한다는 오행설(五行說)이 대표적이다. 플라톤 역시 《티마이오스》에서 인간사회가 야만상태에서 출발하여 문명을 이루었다가 대파국을 겪고는 다시 야만으로 되돌아가는 순환을 계속해 왔다고 주장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인간의 정치체제는 예외 없이 왕정-참주정-귀족정-과두정-민주정-중우정의 단계를 반복한다고 말하였다.
이 세 측면의 역사관은 서로 강력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역사를 주로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감계사관), 그 이상적 기준을 고대에서 찾고(상고사관), 따라서 선대의 원형과 후대의 변질이 끊임없이 반복 ․ 순환한다고(순환사관) 보게 되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 어떤 의미에서든 진보 ․ 발전한다는 관점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물론 고대라 해서 진보사관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리스의 전성시대였던 기원전 5세기경, 아르키메데스나 히포크라테스와 같은 과학자들의 저작들에 그러한 흔적이 보이며, 서기 2세기의 유학자 하휴가 《춘추공양전》에 대한 주해서에서 역사가 쇠란(衰亂)-승평(升平)-태평(太平)의 시대로 점점 발전한다는 장삼세론(張三世論)을 펼친 것도 그 한 예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류를 형성한 적은 거의 없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 곽차섭/부산대 사학과 교수)
제시문 3)
한국사회의 과거청산과 극복논쟁은 여전히 사법적 단죄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친일파청산이나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진실규명 과정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장기적 관점에서 책임 있는 사회적 기억을 만들기보다는 여전히 단기적인 정치적 계산속에서 인적 청산에 매달리고 있는 듯한 인상이 짙다. 물론 학살과 같은 구체적인 범죄행위를 저지르고 그에 대해 개인적 책임이 있는 자들에 대한 사법적 처리는 엄정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조차도 정치적 계산속에서 흐지부지되었을 뿐이다. 용서할 수 있는 권리는 희생자들만이 가질 뿐, 야당출신의 대통령들이 모든 희생자를 대신해서 박정희나 광주학살의 책임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민주화의 의상을 입은 이들 새로운 정치권력이 자신의 당파적 이해를 위해 역사적 희생자들을 정치적으로 전유한 것일 뿐이다. 이 점에서 박정희와의 역사적 화해나 전두환 ․ 노태우에 대한 사면은 남아공이나 칠레의 진실위원회의 작업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정치권력의 대척점에 서 있는 시민사회의 역사적 기억도 그리 건강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소수의 친일파, 유신잔당, 신군부의 명령권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소수의 사악한 가해자 대 다수의 선량한 피해자라는 도덕적 자위행위에 만족하거나, 가해자에 대한 사법적 처단의 카타르시스에 집착함으로써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도망가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잔학한 범죄행위자에 대한 엄정한 사법적 추궁을 넘어서 이들로부터 고백과 참회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총력전체제에 대한 동조 혹은 수동적 동의와 1980년 5월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무거운 침묵 등 ‘침묵의 공모’에 대한 자기성찰을 통해 아픈 과거에 대한 책임 있는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한다. 의문사 진상 규명작업 등도 사법적 정의를 확립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사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 희생자의 기억을 드러내어 공적 기억으로 전화한다는 문제의식이 요구된다. 국가적 배상이 갖는 의미는 물적 보상이라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독재의 과거를 공적 기억으로 선포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만의 하나라도 물적 보상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지우려는 의도가 담겨있다면, 민주화 유공자 보상법 등은 다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기억의 정치학에서는 망각 또한 과거를 기억하는 한 방식인 것이다.
역사적 담론이 자꾸 사법적 담론을 닮아갈 때, 그것은 기억을 법조문의 틀에 묶어둠으로써 법정의 서류뭉치 속에 잠자는 것으로, 그래서 끝내는 카타르시스를 통한 사회적 망각으로 이어질 것이다.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행해진 범죄는 분명 사법적 심판의 대상이다. 그러나 역사는 심판될 수 없다. (역사는 심판할 수 있는가? - 임지현/한양대 사학과 교수)
제시문 4)
문화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라고 할 때, 문화유산은 한 사회의 고유한 정신적 ․ 물질적 산물이다.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할 재산(property)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국민국가가 성립하면서이다. 즉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각 나라들은 각기 그들의 문화유산을 근거로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국립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을 만들어 그 속에 ‘우리’를 대변할 만한 고유한 그 무엇으로 채워 넣었고, 그 유물들은 ‘민족’을 대표하는 고귀한 무엇이 되었다. 민족적 특수성을 부여받은 문화유산을 숱한 ‘전통’을 만들어냈으며, 나아가 ‘우리’를 단결시키는 애국적 무기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국가가 전유한 문화유산은 때때로 본래의 가치로부터 유리되어 국가의 영광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유용할 때만 비로소 계승할 가치가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보존될 수 있었다.
국가의 재산으로 인식된 문화유산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문화재(Cultural Property)’로 지정되어 국가의 차원에서 관리한다. 우리나라는 1962년, 일제시대의 법령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대체하는 ‘문화보호법’을 제정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개정되기는 하였으나, 크게 유형문화재(보물, 국보)와 무형문화재, 그리고 기념물(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민속자료로 나누어 지정하고 보존 ․ 관리와 활용 등을 국가가 통제하고 있다.
한편 1972년의 세계유산협약은 국제적 차원에서의 문화유산의 보존을 목적으로 한다. 인류 전체를 위하여 보호되어야 할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유산들을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정하여 그 보호활동을 지원하고 국제적 협력을 도모하도록 한 것이다. 현재 우리s라의 문화유산 중에는 석굴암, 종묘, 팔만대장경 등 모두 8점이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위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계승할 ‘가치’를 규정하고 그에 근거하여 보존할 ‘문화재’를 가리는 일은 간단치 않다. 한 사회의 고유한 지역과 역사, 그리고 전통 속에 뿌리내린 문화유산이라고 하더라도 놀라운 다양성을 갖고 있고, 여러 구성원들 사이에도 인식차이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가령 여러 해 전 우리나라의 단군관련 단체와 기독교 단체 사이의 갈등이 급기야 상대의 상징적 유물의 파괴로 치달은 것이나,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굴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하여 붕괴된 것 등도 문화유산에 대한 엄청난 시각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에 대하여 합의가 이루어졌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곧 누가 어떻게 보존하느냐 하는 방법론의 차이이다. 보존의 주체가 누구이냐의 문제는 문화유산을 누가 소유하고 통제하며 사용권을 행사하느냐인데, 근대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에 전쟁과 식민지 정복 등을 통하여 다른 나라로 이동된 문화재의 경우 그 갈등의 양상은 더욱 복잡하다. 특히 제국주의 열강들이 약소국가에서 약탈해 간 유물들은 수많은 문화재 반환논쟁을 초래하였다. 그리스와 영국 사이의 파르테논 신전 조각(일명 엘긴마블즈) 논쟁이나 우리나라와 프랑스 간의 외규장각 고문서 논쟁 등이 그 좋은 예다.
논쟁의 초점은 그 문화유산의 소유권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있었으며, 유출과정은 적법했는가이다. 그러나 대부분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거나, 있다 하더라도 그 해석을 놓고 의견의 차이가 분분하다. 또한 한 국가의 전통과 문화를 대표하는 ‘민족의 문화재’를 본국으로 찾아가겠다는 빼앗긴 측과, 인류문명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인류의 문화재’를 더욱 잘 보존할 책임이 있다는 뺏은 자의 줄다리기는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낳은 정 기른 정의 대립과 같다. 전시(戰時)의 문화재보호를 목적으로 한 헤이그 협약(1954), 문화재의 불법 반출입을 금지하기 위한 유네스코 협약(1970) 등 국제사회에서 지켜야 할 일종의 윤리적 규범이 마련되고 있지만, 문화유산의 거취문제가 국제사회의 정치적 힘의 역학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누가 보존의 주체인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보존하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은 보존의 효율성 이사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문화유산을 본래의 위치에서 보존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박물관 등에 옮겨 전시하느냐에 따라 그 유물의 의미는 사뭇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보통사람들의 일상의 애환이 담긴 분청사기 그릇은 박물관의 근사한 쇼 케이스로 들어가자마자 본래의 삶의 영역을 벗어나 민족의 미를 대변하는 우아한 예술로 승화되고, 박물관의 화려한 조명 아래로 옮겨진 돌부처는 더 이상 민초들의 지친 삶을 위로하는 경건한 안식처가 될 수 없다. 박물관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권위는 우리의 지난 삶의 흔적 가운데 일부를 우상화하고 신화화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그만큼 문화유산은 우리의 진솔한 삶에서 멀어져 갈 위험성이 있다고 하겠다.
(문화유산은 보존해야 하는가? - 성혜영/역사학자 ․ 박물관 연구자)